*19세기의 중후반 이후의 이처럼 *문화의 한 차원으로 *구조화되는 *권태, 슬픔, 무기력, 멜랑콜리, 허무감, 무사감, 피로감 등의 정서군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서구의 체액설에 의해 흔히 ‘우울질’의 감정형식으로 분류되어 왔고,

오랫동안 서구인의 심성 속에서 신화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점성술에 의해 *토성saturn의 감정이라 일컬어져왔다. - P214

열정의 결여,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의 쇠락, 즉 감정의 불가능성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1856)에서 엠마 보바리의 삶을 삼킨 *권태는, *고독과 막연한 *그리움과 긴장된 *무기력으로 *가득 차 있는 *공허한 **일상적 세계 속에서 그 *어떤 것에도 *진정한 *삶의 활력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타성의 원천으로 등장한다. - P214

*멜랑콜리야말로 *무사태평한 웃음 속에서 메아리치는 이 시대의 *질병이며, 우리로부터 명령과 복종과 행동과 희망의 용기를 앗아간다. - P215

*행동과 감정의 *불가능이라는 이러한 세계감은 역설적이게도, 사회의 모든 부면에서 성취된 *전례 없는 *혁신에 대한 *자신감과 *역사적 미래에 대한 *낙관 위에 설립된 *근대의 *진보적 *세계관의 *필연적인 *그림자였다.

*근대가 창출한 **사회적 모더니티가 *국민-국가, *자본주의 그리고 *시민사회를 축으로 하는 *공적 제도의 영역에서, 베버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신 geist 없는 전문가’와 ‘*가슴 없는 향락자’들을 양산했다면,

*사회적 모더니티의 *지배적 가치들에 **저항하는 *미적 기획에 다름 아닌 *‘문화적 모더니티’는 *진보하는 부르주아의 *공적 세계가 *엄폐한 **사적 공간에서 되살아난 *우울의 신 사투르누스의 힘에 복속된 ‘*토성saturn의 아이들’을 탄생시켰다.

*사회적 모더니티는 *과학과 기술의 힘으로 *외적 자연을 *탈마법화시키고, *열정을 *이해로 변신시킴으로써 인간의 *내적 자연마저 *정념의 마성으로부터 해방시켰으나,

*문화적 모더니티는 이러한 *해방의 *아이러니한 결과에 다름 아닌 *환멸감 속에서 *죽은 고대의 신에 다시 *사로잡힌다.

역사적이고 집합적인 파토스의 차원에서 보자면, 근대인의 감정을 지배하는 것은 우울자들을 비호하는 사투르누스였다. - P215

근대적 멜랑콜리는 사회학이 아닌 심리학 혹은 정신분석학의 대상으로 설정되었고, 사회를 움직이는 추동력이 아닌 *특정 계급의 *나른하고 나약하고 몽롱한 *허위적 감정의 *사치쯤으로 인식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멜랑콜리는 *문화적 모더니티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정서적 코드이며, *대다수의 문화적 산물들의 *심정적 배경을 구성하는 *문화해석학적 열쇠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있다. - P216

이러한 맥락에서 이 글은 고전 사회학이 공백으로 남겨놓은 이 세기적 감정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의 초안을 다음과 같은 순서로 기획한다.

첫째, 감정, 열정, 정념, 충동, 정서, 파토스 등 다양한 방식으로 불리는 소위 ‘느낌’의 문제에 대한 구조적인 접근을 가능하게 해주는 개념으로서 우리는 하이데거의 정조 stimmung 개념을 소개한다.

둘째, 문화적 모더니티의 근본 정조로 규정되는 토성적인 감정의 계보를 재구성함으로써 그 역사적 발생 구조를 명료히 드러낸다.

셋째, 이러한 토성적인 감정이 구성하는 의미구조를 주체, 세계, 그리고 세계와 관계 맺는 주체의 전략이라는 차원에서 분석한다. - P216

2. 하이데거의 정조


*합리성과 *자유의지의 확고한 이상 위에 설립된 *서구의 *지적/윤리적 전통에서, *감정은 *늘 부차적이고 잉여적인 것으로 취급되어 왔다. (Joffe, 1999: 184)

*감정 즉 파토스는 항상 *능동적인 행위(poiein)가 아닌 *수동적 정념(*passion)이며, 항상적 *실체(ousia)가 아닌 *우발적인 사건이며, *철학적 사유가 *이상으로 삼던 *평정심(apatheia)과 *지혜(sophia)에 *반하는 *정신의 동요로 이해되었다(Didi-Huberman,
2002a: 203).

철학뿐 아니라 *사회과학의 경우에도 이는 마찬가지였는데, 그 이유는 감정이 *주관적이고 *개인적이며 *비합리적인 토대를 갖고있다고 파악되었기 때문이다(Joffe, 1999:183-211).

따라서 감정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우선 요구되는 것은 감정이 순수한 심리학적 현상이 아니라 *집합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문화적·역사적·사회적 *객관성을 구비한 현상이라는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의 대표적인 실례를 우리는 하이데거의 *‘정조‘ 개념에서 찾아볼 수 있다. - P217

*하이데거는 1929년에서 30년의 겨울학기에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행한 일련의 강의에서 "*철학적 사유를 *뒷받침하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해답으로서 **권태라는 감정을 제시한다.

철학함의 근본 감정이 권태인가, 불안인가 아니면 공포인가 라는 문제는오히려 부차적인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던진 "**형이상학의 **파토스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형식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위의 질문은 *철학적 사유의 기저에 *이성이 아닌 *특수한 감정의 상태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내포한다는 의미에서 *로고스와 파토스의 *위계를 전도시키고있으며, *‘사유‘와 ‘의지‘에 늘 종속되어 있던 *‘느낌‘, 즉 감정의 질서를 *학문적으로 복권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질문이기 때문이다.

*‘풍경 위에 드리워지는 *불안정하고 붙잡히지 않는 *구름의 *그림자‘ (Heidegger 1929-30)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는 감정의 차원을 *재평가함으로써 인간의 *감정이 *단순한 심리학적 *소여가 아니라,

*주체가 *역사적으로 *세계와 **관계 맺는 가장 **본원적인 차원이며 **집합적인 체험의 구조라는 사실을 논구하기 위해서 그가 사용하는 개념인 ‘*정조’는 *다자인 dasein이라는 *주체 형식에 대한 하이데거적인 문제의식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 P217

*하이데거는 *합리적 이성을 본질로 하는 *근대적 주체철학의 *인간관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과정에서, 1927년의 <존재와 시간>에서 *다자인이라는 주체 형식을 제출한다.

*다자인은 세계 내 존재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세계는 *자연적이고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라, *역사적 결단을 포함한 모든 **‘가능성의 총체로서 *늘 거기에 존재하며 *이미 전제되어 있는 *삶의 환경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

*다자인의 본질은 *이성도 *육체도 아닌 그 자신의 **실존이다. 이러한 *세계 안에 *던져진 *유한자이며, *자신 앞에 펼쳐지는 *무한한 *가능성과 직면하고 있는 *자기 형성적인 *주체이자, 그 *본질이 자신의 *실존(Existenz)과 *동일시되는(Heidegger,
1927 66) *다자인이 세계와 맺는 관계는 *협소한 *인지적 관계를 넘어선다.

즉, *다자인은 세계를 이해하기에 앞서 세계를 느끼고 세계 속에서특정한 감정을 갖는 존재라는 점에서, 다자인을 다자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코기토가 아닌 바로 정조이다(Heidegger, 1927: 191-2), 이러한 맥락에서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의 제5장 30절에서 공포의 감정을, 6장 40절에서 불안의 감정을 분석하며 (Heidegger, 1927: 194-8,
251-60),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권태, 환희, 불안의 정조를 분석한다(Heidegger, 1929: 56-9).

이러한 정조들은 심리학적 개인의 심적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집합적이고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의미에서 이해되는 다자인과 세계의 관계 맺음의 양식을 지칭하고 있다.

"정조는 절대적으로 ‘내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내면에 있다가 드러나서 시선에 포착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조가 외부에존재하는 것만도 아니다. (・・・・・…) 정조는 체험된 인상으로서 영혼 속에서 발견되는 존재자가 아니라, 우리의 ‘공통적인 디자인의 상태이다" - P218

공통적인 디자인의 정서적 상태로서의 정조는 인간과 세계를 매개하는 하나의 ‘분위기‘, ‘풍토‘ 혹은 ‘환경(Umwelt)‘으로 이해할 수 있다(Han, 1997: 533).

정조라는 단어를 구성하는 중요한 의미소인 목소리(Stimme)가 음악적 비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은 그리하여 우연만은 아니다. 정조란 다자인이 세계와 화음을 조정하는 과정이며 세계의객관적인 음조와 주체의 음조가 섞이고 부딪치고 조정되어 형성되는일종의 음역(音域)이다.

조화로운 화음도 있지만, 불협화음 또한 있을수 있다. 하이데거는 후자를 불쾌감(Verstimmung)이라 부른다.

다자인이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 즉 세계와 인식론적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세계와의 특정한 정서적 감응상태, 음악적 조응상태에들어간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세계에 대한 감정을 갖는 것보다 사후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다(Heidegger, 1927: 197-8; Heidegger, 1956: 337; Harr, 1985: 87-8).

이러한 맥락에서, 하이데거가 사유의 역사를 정조의 역사로 새롭게 구성하는 것은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정조가 사유보다 근원적인 체험의 레벨일 때, 사유라는 상부구조는 자신의 전(前)-사유적인하부구조로서 감정적 차원을 갖게 된다.

1955년 8월 프랑스의 세리자라-살(Cerisy-la-Salle)에서 열린 한 콘퍼런스에서 하이데거는 정조를중심으로 재구성된 사유의 역사를 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 철학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근본 정조는 경이의 감정(thaumazein)이다. 이경이의 감정은 자연의 잠으로부터 깨어난 인간이 자신 앞에 현현하는세계에 대해 놀라고 감탄하는 파토스가 추동한 서구철학의 개시와 조응한다.

또한 데카르트적인 근대철학의 근본 정조는 ‘인식에 대한 절대적 확실성에 대한 믿음‘에 복무하는 감정으로서의 ‘의혹의 정조‘이다(Heidegger, 1956: 340 이하). 그렇다면, 하이데거 당대의 사유, 즉 20세기의 사유를 규정하는 본원적 감정구조는 무엇인가?

"*오늘날의 사유는 어떠한 *정조로 우리를 *이끌고 있는가? 이 질문에 일원적인 대답을 내리는 것은 매우 어렵다. 아마도 어떤 근본적 정조가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숨어 있다. (・・・・・・)

우리는 *다양한 정조들의 *혼재를 본다. 한편으로 *의혹이 다른 한편으로는 *절망이 있으며, (.………) *공포와 *불안이 *희망과 *믿음에 뒤섞여 있다.

종종 그리고 끝없이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표상의 양태들에 비추어보면 *사유는 모든 정조로부터 *자유로운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계산의 *차가움, *산문적인 명석함 또한 *어떤 정조의 -필자) *부름에 대한 *응답이다.

*모든 열정으로부터 *해방된 듯이 보이는 이성은, *이성으로서 자신의 원칙과 규칙의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명성에 대한 신념에 정서적으로 조용한다.
(Heidegger, 1956: 341-2)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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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멜랑콜리와 모더니티


그에 관해 전해오는 한 일화를 벤야민은 자신의 <파사젠베르크>….

침착하게 진찰을 마친 후에 의사가 말했다. "걱정할 것 없소이다. 당신은 약간 휴식을 취해야 할 것 같소. 편하게 좀 쉬시오. 날을 잡아서 드뷔로의 공연을 보러 가시오. 그러면 아마도 인생이 달리 보일 거요"

환자가 대답했다.

"하지만 선생님, 제가 바로 드뷔로입니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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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티?

독일의 문예학 전통에서 수용미학의 창시자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는 **미적 모더니티(ästhetische Moderne)라는 개념을 사용해온 바 있다.

이 용어는, 영미문학이론에서 하나의 장르로 파악되는 *‘모더니즘‘이라는 *협소한 개념과는 달리,
*루소, 독일낭만주의, 괴테, 보들레르, 프루스트, 아방가르드, 미래파, 입체파, 표현주의 등의 다양한 *근대예술현상과 *니체, 벤야민, 아도르노 등의 *문화비판의 흐름을 포괄하는 근대의 독특한 미학적 선회를특화시켜 지칭하는 용어이다 (Jaus, 1970; Jaus, 1989; Bohrer, 1994;Habermas, 1984: 26-35). - P247

이러한 의미에서 **미적 모더니티와 소위 **사회적 모더니티 사이에는 일종의 *긴장, 갈등, 경합이 존재하는바(Calinescu,
1977: 53),
*근대성 내부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두 개의 상이한 *모더니티에 대한 *논의는 *모던/포스트모던의 *이분법적 사유를 지양하면서 *문화적 산물들에 대한 *심층적인 논의를 펼치고 있는 최근의 인문, 사회과학적 흐름 속에서 폭넓게 *수용되고 있다.

*역사적 과정이자 *사회적 실재의 변동으로서의 *근대화를 *내재적으로 *비판하고자 했던 이러한 흐름을 단순히 *‘미학적‘
영역에 *국한시키지 않고, 좀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문화적 모더니티라 부르고자 한다

(박성환은, *짐멜의 ‘사회학적 미학‘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문화적 근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박성환, 1999)〕. - P247

이러한 맥락에서 *문화적 모더니티는, **19세기 중후반으로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서구의 지성사, *예술사, *문학사의 영역에서 다양하게 표출되었던 *근대적 삶의 양식에 대한 *비판적 사유와 *상상력의 표현으로 특징지어지는 *미학적,
*인식론적, *윤리적 문제설정이며,

*다양한 저자, 개념, 수사(修辭), 전망, 전략, 감수성, 테마 등의 *동시대적 교직(交織), 즉 *하나의 *담론구성체 (formation discursive)로 규정될 수 있다.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모더니티를 *하나의 담론구성체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문화적 모더니티의 소위 **대항근대성(counter-modernity)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다양한 차원에서 *진보에 기초한 *사회, *정치, *경제적 근대와 *문화적 근대의 *대립선을 설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Calinescu, 1977: 53). - P248

**문화적 모더니티는 *부르주아의 *근대가 아니라 *사회적 폐인(人)들, 그러니까 *몰락한 귀족, 댄디, *룸펜 프롤레타리아트, *실패한 예술가, *부유하는 지식인, 아나키스트, 창녀와 레즈비언, 그리고 *독신자(獨身者)들의 근대이다.

**부르주아의 근대가 **낙관적이라면 이 **폐인적 근대는 **우울하다.

*부르주아의 근대가 *진보를 *신앙한다면, *문화적 근대는 *영겁회귀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

*부르주아의 근대가 *자기 규율의 *엄격한 에토스로 *스스로의 삶을 *조직하는 *의지력에 기초한다면, *문화적 근대는 *능력의 부재, *절제의 불능, *체험의 빈곤, 즉 *극도의 무기력과 *무능력 위에 설립된 *신기루로서의 근대이다. - P248

*전자 속에서 우리는 *근대화의 *힘을 읽지만, *후자 속에서 우리는 *데카당스,
*세기말의 피로, *고도의 자의식과 *내면성의 과도한 표출, *광기를 읽는다.

*사회적 근대와 *문화적 근대의 차이는 이처럼 *서구 *근대성의 *내부를 가로지르는 *내밀한 *정신적 분계선으로 기능한다.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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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패배여도 더 나은 패배가 있는 법.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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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은 *모든 사람들의 것이에요.
*그런데 *왜 *제게는 *어둠밖에 주지 않나요?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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