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에 이른바 도술이나 문장이란 것은 부지런함으로 말미암아 정밀해지고,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 진실로 능히 깨닫기만 한다면, 지난날 하나를 듣고 하나도알지 못하던 자가 열 가지, 백 가지를 알 수 있다. 앞서 아득히천리만리 밖에 있던 것을 바로 곁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전에는 뻑뻑하여 어렵기만 하던 것이 너무도 쉽게 여겨진다. 옛날에 천 권, 만 권의 책 속에서 찾아 헤매던 것이 한두 권만 보면너끈하게 된다. 이전에 방법이 어떻고, 요령이 어떻고, 말하던 것이 이른바 방법이니 요령이니 하던 것이 필요 없게 된다.
하지만 깨달음의 방법은 방향도 없고 실체도 없다. 잡을 수도없고 묶어둘 수도 없다. 옛날에 성련成連이란 사람은 바다의파도가 일렁이는 것을 보다가 거문고를 연주하는 방법을 깨달았다. 그는 정말로 그랬다. 가령 다시 어떤 사람이 성련의일을 부러워해서 거문고를 끌어안고 파도가 일렁이는 물가에 섰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대개 성련의 깨달음은 여러 해동안 깊이 생각한 힘으로 된 것이지, 하루아침 사이에 어쩌다 . 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깨달으라고 권하기보다는 생각해 보라고 권하는 것이 낫다. 물가에서 물고기를 부러워하느니, 차라리 집으로 가서 그물을 짜는 것만 못하다. 도술과 문장을 사모하기보다, 우러러 한 번 생각해 보는것만 못하다.
부지런한 노력이 정밀함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깨달음이 없으면 정밀함도 소용이 없다. 오성이 열리는 순간 모든 것은 달라진다. 지난날 암중모색하며 헤매던 길을 활보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깨달을 수 있는가? 막상 깨달음의 길은 방법도 없고 방향도 없다. 깨달음은 노력하고 또 노력하다 보면 어느순간 문득 열린다. 하지만 노력의 뒷받침 없이는 깨달음도 있을수가 없다.
가령 한 권의 책이 대략 60~70쪽쯤 된다고 치자. 그중 정화精華로운것만 추려 낸다면 십수 쪽에 불과할 것이다. 속된 선비는 처음부터 다 읽지만 정작 그 핵심이 있는 곳은 알지 못한다. 오직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손 가는 대로 펼쳐 봐도 핵심이 되는것에 저절로 눈이 가 멎는다. 한 권의 책 속에서 단지 십수 쪽만 따져 보고 그만둘 뿐인데도 그 효과를 보는 것은 전부 읽은 사람의 배나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두세 권의 책을 읽고 있을 때 나는 이미 백 권을 읽고, 효과를 보는 것 또한 남보다 배가 되는 것이다.
허공을 울며 나는 새를 새‘라는 단어 속에 가두는 순간, 그 새는 더 이상 날갯짓도 없고 울음소리도 없는 지팡이 위에 조각해놓은 새와 다를 바 없게 된다. 문자로 가두어진 지식이란 지팡이위에 새겨진 새의 조각과 같다. 그러니 ‘나는 그런 죽은 새보다 이른 아침 창밖에서 우짖는 저 새의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을 읽겠노라고 연암은 말한 것이다. 이런 독특한 관점은 「소완정기素玩亭記」에서도 "대저 하늘과 땅 사이에 흩어져 있는 것이 모두 이 서책의 정기"라고 하여 거듭 천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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