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 힐링에서 스탠딩으로!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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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년이 된 이후 오랫동안 내 삶을 지배한 감정은  기쁨이나 즐거움이 아니었다.
수치심과 분노, 슬픔, 연민, 죄책감, 의무감 같은...것이었다"

정치인 보다는 작가로서의 삶이 더 행복하다고  이야기 하는 유시민 작가의 책입니다.
요즈음 방송에서 논리와 해박한 지식으로 무장한  무적의 말빨로 인기 방송인으로 거듭나고

계신분이죠

그러나, 제 기억하고 있는 유시민은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을 건강보험과  면바지 차림으로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가던 국회의원, 100분토론, 노무현대통령 탄핵가결 대한 오열
부산시장, 경기지사 낙선. 노무현태통령 서거.
그리고 작은 정당을 창당하며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던 모습이었습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고 기득권 정치인들에게  철저히 배척당했지만 자기 목소리를 끊임없이
내는 정말 멋진 정치인을 보며  저 양반이 꽤나 힘들겠구나 생각했는데
정말 많이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온 열정을 쏟아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보자고 끊이없이 이야기 했던 목소리는

우리 사회의 많은 곳에서 아직도 메아리가 되어 울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온순한 사람을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 내는  부정한 시대한 온 몸으로 살아온 한

사람으로 저는 기억합니다.

작가가 쉰다섯에 쓴 이 책은 무엇보다 교조적이거나  교훈적이지 않아서 좋습니다.
작가의 내면을 들어다 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차근차근 풀어냅니다.

일과, 사랑과 놀이와 연대. 자신의 살아온 날들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어떻게 채우며 살아가고 싶은지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 하듯 글을 풀어냅니다.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훈계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며 글을 쓴듯하여,
불편함없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삶과 죽음, 개인과 사회, 자유와 공동선, 진보와 보수, 신념과 관용, 욕망과 품격,

사랑과 책임, 열정과 재능 등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물질적 정신적
요소들에 대한 나름의 시각으로 해석합니다

특히나 신념에 대한 작가의 시선과   진보와 보수에 대한 시각은 많은 부분 동의가
되기도 하고 그동안 생각해왔던 것과는 다른  시각이라서 새롭기도 했습니다.

작년쯤 어렵지만 충격적으로 읽었던  카뮈의 "시시포스 신화"에  대한 작가의 답변도

아주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여운이 깁니다.
인간의 삶이 생명에만 있는것인가?
내가 나의 의식을 잃어버린 상태의 삶은  과연 무엇인가? 전신마비 환자의 자살과
스티븐 호킹박사의 삶에서 과연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을까?
생명은 선이고 죽음은 악인가? 결국 삶의 완성이 죽음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이책에서 죽음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더 많이 와닿고 인상깊었습니다.
생전 장례식을 하고 싶다는 작가의 글도  많은 부분 공간되기도 합니다.

이책을 내내 차지도 뜨겁지도, 열정도 재능도 없이 하루하루  꾸역꾸역 쑤셔넣듯 살고 있는

저의 하루하루가 참 비루하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도 "크라잉 넛" 참 좋아합니다.

< 책중에서((p.56) >
왜 자살하지 않는가?’ 카뮈의 질문에 나는 대답한다.
가슴이 설레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있다.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너무 좋아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뛰어오를 것 같은 일이 있다.
누군가 못 견디게 그리워지는 시간이 있다.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미안한 사람들이 있다.
설렘과 황홀, 그리움, 사랑의 느낌….
이런 것들이 살아있음을 기쁘게 만든다.
나는 더 즐겁게 일하고 더 열심히 놀고
더 많이 더 깊게 사랑하고 싶다.
더 많은 사람들과 손잡고 더 아름다운 것을
더 많이 만들고 싶다.
미래의 어느 날이나 피안의 세상에서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그렇게 살고 싶다.
떠나는 것이야 서두를 필요가 없다.
더 일할 수도 더 놀 수도 누군가를 더 사랑할 수도
타인과 손잡을 수도 없게 되었을 때,
그때 조금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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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 천연균과 마르크스에서 찾은 진정한 삶의 가치와 노동의 의미
와타나베 이타루 지음, 정문주 옮김 / 더숲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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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유명했던 책이죠. 작년쯤이었던 것 같네요.
산속 작은 마을에서 천연균으로 만든 주종으로 발효시킨
빵을 만들에 파는 '다루마리'라는 작은빵집의 이야기 입니다.

...

고택에 붙어사는 천연균으로 만든 주종으로 발효시킨
빵을 만들며, 적정한 가격을 매겨 파는 빵가게.
일주일에 사흘은 휴무, 매년 한 달은 장기 휴가로 문을
닫습니다.
이것은 제대로 된 먹거리에 정당한 가격을 붙여서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팔고,
만드는 사람이 숙련된 기술을 가졌다는 이유로 존경받으려면
만드는 사람이 잘 쉴 수 있어야 하고
인간답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합니다.

발효와 부패사이의 주종을 만드는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균의 발효와 부패를 자본주의의 폐해와
대비하여 설명하는 부분은 생각해 볼 만합니다.

부패하지 않고 계속 증가하기만 하는 자본.
싸고 간편한 식자재는 결국 싼 노동력을 위한
자본의 노림수라는 주장도 꽤나 설득력이 있지만,
당장의 편리함과 저렴함을
포기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죠.

거대한 자본에 평범한 소시민이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도구가 되지 않은 방법은
우리도 생산시설을 갖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산시설은 거대한 것이 아닙니다.
빵을 만드는 주종이 될 수도 있고,
집집마다 다른 발효음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을 사람이 만든 빵을 먹고, 마을 사람이 담근 된장을 먹고,
마을 사람이 만든 그릇을 쓰는 마을
마을 사람들을 장인으로 길러내는 마을 경제공동체.
이렇게 작은 마을 경제 공동체를 통해
건강한 마을 경제가 순환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작은 마을이 살아나는 것은 도시 사람들의 관광지로 만들어
도시 사람들의 놀이터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안에서
순환되는 경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골목골목 들어온 거대 프랜차이즈 빵집과 커피숍,
사라져버린 동네 서점,
프랜차이즈화 되어가는 떡볶이집,
네임드를 무기로 골목골목 밀고 들어오는 거대 자본은
결국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블록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빵집을 내야할 것 같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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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하는 여자
김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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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은 작가입니다."김숨"(이름이 참 예쁘네요)
누비 바느질하는 수덕과 그녀의 두딸 금택과 화순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작은 동심원을 그리며 느리게 진행되는 이야기입니다....
읍내와 떨어진 우물집, 그 집에서 평생 누비 바느질로 옷을 짓는 엄마와 두딸의 바느질이야기가 곱게 펼쳐집니다.
좁은 장소, 한정된 인물들의 긴시간이 0.3cm 홈질로 가지런히
문자화 되었고 그 바느질을 따라 읽는 재미가 마치 곱고 참한
누비 한복 한벌 같습니다.

한정된 공간에서의 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인물들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는 특별히 제가 좋아하는 형식이기도 합니다.
형식적인 면에선 엘리스 먼로 "디어 라이프"가 겹치기도 하고,
도리스 레싱의 소설들이 겹치기도 합니다.

서쪽방에서 한땀한땀 누비옷을 지으며 평생을 산 수덕.
그녀의 옆을 지키며 그녀를 잡고 있던 금택.
숨막히는 엄마의 바느질과 언니의 질투에서 도망가고자 했던
화순. 세 모녀의 40년의 짧지 않은 시간들이 지루하지 않게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책은 여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주축이 되는 세모녀와
어느 시장통 한복골목에서 한복을 짓는 여자들
복래한복, 서울한복, 전주한복, 아씨한복 여자들과 옥사모님,
월성댁, 일월오봉도 자매, 부령할매, 엘리자베쓰양장점 처녀,
부엉상회, 재숙까지 모두 여자들 이야기입니다.

평생 고운 옷감속에서 살면서도 자기옷 한벌 지어 입지 못하고
일월오봉도 자수 평풍엔 먼지만 쌓여가고, 결국은 삵바느질을
면치 못하지만 자기 몫의 삶을 차근차근 살아내는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여자들 이야기.

바느질 한땀이 쌀한톨, 밀가루 한줌이 되고,
죽은 누군가를 위해 매듭없이 되돌아 가지 않는 바느질을
멈추지 못하는 여자들의 이야기 입니다.

6살 꼬마가 40대 중반의 나이가 되기까지의 이야기가
가을 바람처럼, 누비 바느질 처럼, 봄비처럼 지나가고 쌓여서
한권의 소설이 된것 같습니다.

폭발하거나, 웅장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굉장히 좋은 소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암튼 좋네요.

"한 흰색이어도 멥쌀 같은 흰색이 있고,
갓 지은 백미 같은 흰색이 있다는 것을 금택은 알았다.
배꽃 같은 흰색이, 달걀 껍데기 같은 흰색이,
두부 같은 흰색이 있다는 것을.
멥쌀 같은 흰색에는 옅은 밤빛이,
갓 지은 백미 같은 흰색에는 초겨울 새벽녘의 푸른빛이,
배꽃 같은 흰색에는 노란빛이 미미하게 감도는 연둣빛이,
달걀 껍데기 같은 흰색에는 탁하고 흐린 분홍빛이,
두부 같은 흰색에는 살굿빛에 가까운 노란빛이 감돌았다."

"콩죽같은땀색을 토끼똥색과 보름달품은구름색과
청개구리색과 동쪽하늘색과 거머리색이 사방에서 둘러싸
조각보라는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것이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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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장 죽이기 1 - 현현하는 이데아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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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장 죽이기(무라카미 하루끼)

좋아한다고 하기에는 이미 진부해진 이름
무라카미 하루끼입니다.
그래도 사서 읽었습니다....
가장 최근에 읽었던 하루끼의 책은(벌써 몇년 전이네요)
"여자없는 남자들"이라는 단편집과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입니다.
무척 잘~~ 읽었던 책들입니다.

이 책 "기사단장 죽이기"는 또 다른 하루끼를 만나는 듯 합니다.

우선은 굉장히 일본색이 강해진 듯 합니다.
일본 작가이지만 일본색이 없다는 것이 일본 문학계에서의
비판이면서 하루끼가 세계적인 작가가 된 이유중이 하나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책은 굉장히 일본스럽습니다.

사실 여러모로 기대했던 것에 미치지 못한 책이기도 합니다.

여러가지 인물과 사건의 개연성이 많이 떨어지는 듯 합니다.

책의 처음을 여는 얼굴없는 남자의 의미도, 결국은 돌려받지
못한 펭귄도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오랜 시간 공들인 인물인 멘시키 역시 분량에 비해 퇴장이
너무 초라합니다.
쇼코의 애인으로 퇴장하기엔 멘시키 분량이 너무 많지 않나
생각됩니다.

중간 중간 너무 많은 섹슈얼리티는 좀 부담스럽기 조차 합니다.

주인공(생각해 보니 주인공 이름이 한번도 안나온 듯 합니다.)이 발견한 사각의 지하와 메타포의 세계에서의 모험이 마리에라의 귀환과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지도 참 모호합니다.
바닷가에서 만나 그 여자와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는 무엇이었을까요?
내안의 정체모를 이중의 악한 메타포일까요?
기사단장의 역할 역시 모호하긴 매 한가지 입니다.
도대체 이데아라는 이분은 마리에라를 구출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한 것일까요?

그래도 제일 소설같은 이야기는 아마라 도모히코라는
노화백의 이야기 입니다.
차라리 아마라 도모히코 중심을 두고 이야기를 좀더 심플하게
구성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천재작가라 불리는 작가앞에서 이게 무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분이 이걸 볼것도 아니고.
뒷담화는 뒤에서 하는 맛이죠)

중간 중간 다양한 음악, 미술, 문학, 자동차와 요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돈 조반니같은 음악은 모르지만 얼마전 읽은 악령의
"끼릴로프"는 무지무지 반가웠습니다.

1, 2권 1,000페이지가 되는 분량도 적지 않지만 앞자락에
깔아 놓은 것들을 마무리하려면 3권까지는 나와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유즈와 다시 살게된 마무리는 너무 싱겁게 끝나 버린 듯합니다.
8개월 보낸 그 곳은 후쿠시마 원전과 가까운 바닷가 마을로
원전사고로 그의 8개월도 묻혀 버리게 되죠.
그가 보낸 8개월은 파도의 포말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책의 내용 중 아마라 도모히코의 동생이 난징 대학살의
군인으로 징집되었고 학살의 트라우마라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잠깐 나옵니다.
이부분이 일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난징 대학살 자체를 사실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작가는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고
일부 극우 인사들은 인격 살인에 가까운 비난을 쏟아냈다고
합니다.

거기에 대한 작가의 답입니다.

"우리 역사를 우리에 맞게 다시 써도 결국 다치는 것은
우리뿐이다.
벗어날 방법이나 숨길 방법 그런 건 없다.
만약 방법이 있다면 상대조차 인정할 만큼의 사죄
그것 하나뿐이다."
"내가 대표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내가 대표해야 하는 것은
일본이 아니다.
오직 나의 신념 뿐이다.
작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품격이다.
소설가는 예술인이기 이전에 자유인이어야 한다."

이 책에 대한 개인적인 호불호와는 관계없이
한 인간으로써 작가로써 멋짐 폭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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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
지원용 지음 / 컨콜디아사(재단법인한국루터교선교부유지재단) / 199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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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말틴 루터, 지원용 옮김)

올해 10월 31일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날 이었습니다.

말틴 루터라는 신학자가 독일의 비텐베르크 성문에 면죄부판매에 대한 95개의 반박문을 붙인날이...
1517년 10월 31일 입니다.
올해가 딱 500년 되는 해입니다.
500년전 수도사이자 신학자인 그가 어떤 말을 했는지 알고 싶기도 하고 개신교의 시작인 그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많이 부족한 크리스찬이지만 종교개혁 500주년을 혼자서 조용히 기념하며 읽은 책입니다.

1517년 10월31일은
인류문명의 암흑기로 불린 중세의 문을
닫고 근대의 문을 활짝 연 날 이기도 합니다.
교황과 주교를 비롯한 당시의 기득권의 눈에는
미쳐도 단단히 미친 독일 변방의 한 수도사가
인류 문명의 선로 변경기의 손잡이를 잡아당긴 사건이기도 합니다.

생각보다 말틴루터의 책이 많지 않다는 것도 놀라웠습니다.

종교개혁에 관한 책들은 몇권 있었지만 말틴 루터의 책을 번역한 책은 많지 않았습니다.

제가 읽은 책은 "말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이라는
책입니다.

루터회 목회자이신 지원용 목사님께서 번역하신 책입니다.
나중에 찾아봤더니 우리나라에 루터교를 처음 들여오신
목사님인 듯 했습니다.
이책의 놀라운 점은 초판 1쇄가 1993년 5월이고
초판 9쇄가 2017년 3월이라는 것입니다.
수정없이 24년간 계속 출판되어 온 것도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이책은 말틴 루터가 1520년에 발표한 논문 세편을 묶은
책입니다.
독일 변방의 수도사는 1517년 그날이 이후 계란으로 바위는 치는 것과 같은 싸움을 계속합니다.
그리고 로마 교회에 한발도 양보하지 않은
그는 결국 1521년 파문과 출교가 선포되었다고 합니다.

이책은 "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보내는 글",
"교회의 바벨론 감금", "크리스찬의 자유" 세편의 논문을 묶어놓은 책입니다.

"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보내는 글"은 로마교도들의 교묘한 세가지 담에 대해 가열차게 비판으로 시작합니다.

"교회의 바벨론 감금"은 옛날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던 것 처럼 교회의 성례가 로마 교회에 의해서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비유해서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루터는 교회의 성례의식이 너무 많다는 것을 비판하며
성만찬에 대한 평신도의 권리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떡과 포도주로 이루어지는 성만찬에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교회 의식에 대한 내용으로 개신교의 성례가 성만찬과 세례로 이루어진 것의 토대가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리고 "크리스찬의 자유"는 우리가 많은 부분은 교리로 이해하고 있지만 다시한번 생각해 볼만 합니다.
특히나 디모데의 할례와 디도에게 할례을 행하지 않은 바울에 대한 이야기는 그 뜻이 깊다고 생각됩니다.
신앙과 자유의지에 대한 신앙인으로서의 고민과 통찰이
지금 읽어도 무겁게 느껴집니다.

처음 부분은 "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보내는 글"은 500년 전 로마교회를 향한 글이지만 지금에 개신교 모습과 겹쳐지는 모습이 참 안타깝습니다.
교황을 비롯한 사제는 영적지위가 아니라 직무인 것이다.
평신도를 위해 봉사하는 직무인 것이다.
황제위에 교황의 모습, 신도위에 사제의 모습이 얼마나 비성경적인 것인지, 신도들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그위에 군림하는 사제들을 적그리스도라는 표현으로 무자비하게 비판합니다.

첫 수입세을 포함한 각종 공물과 헌금제도가 결국 개인의
호주머니로 들어가고 심지어 세습되는 것, 순례, 탁발수도단, 성자의날, 죽은자에 대한 미사에 대한 금지등 개혁되어야 할 27가지 폐단에 대해 조목조목 열거하고 반박합니다.

이러한 용감한 수도사는 결국 파문당하게 됩니다.
파문은 현세와 내세에서의 영원한 사형선고라고 설명합니다.
(책을 읽다보면 당시 교황청의 입장에서 본다면 파문도
마땅하다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현세와 내세의 사형선고에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수도사 한명이 인류의 문명사의 길을 바꾸게 됩니다.
한사람의 힘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신교의 토대가 된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 과연 지금에 한국교회는 얼마만큼 왔는지 생각해 보게 합니다.
교인수에 따라 공공연히 사고파는 교회,
뉴스에 나오는 교회의 담임목사 세습에 대한 이야기들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마냥 감사하게
생각할 수는 없게 합니다.

성도들에게 순종만을 강요하는 목회자들,
모든것은 하나님이 하시니 당신이 할 수있는 건 기도뿐이라고 가르치는 설교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과연 우리가 무얼하고 있는 건지,
그 많은 교회들은 무얼 가르친건지 참 난감합니다.

교회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악한 무리가 되어 비난의 대상이 되고, 성도들에게 교회의 권위에 순종을 강요하는 것은 최소한 루터가 말한 종교개혁의 정신은 아닌건 확실합니다.

500년전 한 수도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침묵을 지킬때는 지나가고 이제는 말할 때가 되었다고(전도서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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