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만난 다음 페이지 - 사랑으로도 채울 수 없는 날의 문장들
조안나 지음 / 을유문화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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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하면서 종종 마주치는 문제는 '내가 이 짓을 왜하나?' 하는 자조적인 질문과 아주 가끔씩 부정기적으로 찾아오는 허무감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도 블로깅이라면 으레 공부가 하기 싫어 SNS에 매달리는 10대의 일탈과 취준생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그저 남아 도는 시간을 죽이기 위해 몸부림치는 '뻘짓'쯤으로 여기는 세상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얘기다. 돼지우리와 진배없는 어두침침한 방에서 컴퓨터 모니터의 푸른 불빛을 마주한 채 웅크린 모습으로 자판에 코를 박고 있는 모습은 과히 아름다운 풍경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왜 블로그를 하는가? 하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은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살아가면서도 '도대체 나는 왜 사는가?' 하고 이따금 자신을 향해 의미도 없이 묻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자신에게는 '매일 복용량'처럼 매일 써야만 하는 글의 양이 있다며 자신을 글쓰기에 미친 글쓰기광이라고 지칭하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오래된 블로거들 대부분은 어떤 알 수 없는 의무로 그들 자신을 속박하거나 일정한 주기로 찾아 오는 조급함과 초조함에 얽매이는 경우가 종종 있는 듯하다. 날씨가 궂은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기상통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봐왔던 오래된 블로거들이 모두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 중 몇몇은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던 글들을 가려 뽑아 이따금 자신의 책을 발간하기도 하고 살아온 자신의 삶을 보석인 양 간직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쩌면 블로그를 하는 보람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처럼 글쓰기에 이렇다 할 재주도 없고 뚜렷한 주제도 없이 잡다한 글만 올리는 블로거에게는 언감생심 그마저도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그들의 책은 신춘문예와 같은 일정한 루트를 통해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하는 작가의 책과 비교되기도 하는데 작가의 출신이 문제가 아니라 모든 책은 그 나름의 장단점이 있게 마련이라고 나는 생각하곤 한다. 예컨대 자신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밝혀야만 하는 순간에도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중견작가의 노련함에 비해 블로거의 대부분은 자신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쓴다는 데서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순진하게도 말이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블로그에 쓰는 글 중 대부분이 자신의 경험과 직접적인 생각을 떠오르는 대로 꾸미지 않고 기록한다는, 말하자면 일기와 같은 특성이 일정 부분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집『일요일들』. 작위적이지만, 일요일 밤에『일요일들』 을 읽는 것이 내 오래된 습관이다. 시시콜콜한 일상에 숨어 있는 인간의 본성을 유쾌하고 날카롭게 풀어내는 작가답게 이 소설은 쉽게 읽히고, 오늘의 안녕을 안심하게 만든다." (p.21)

 

조안나의 <당신을 만난 다음 페이지>는 순전히 제목이 좋아서 읽게 된 책이다. 나는 그녀가 대학생 때 시작한 블로그를 십 년째 운영하는 오래된 블로거라는 사실도, 결혼을 하기 전에는 출판사에서 근무했다는 사실도, 이십 대의 치기 어린 애독기를 담은『달빛책방』의 저자였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저자는 자신이 예전에 읽었거나 새로 읽은 소설 200여 권 가운데서 이 책에 소개된 30권의 소설을 간추리는 데에만 한 달이 넘는 시간을 소비했다고 한다. 그 시간은 어쩌면 바쁜 직장인으로서의 '눈으로만' 읽는 독서에서 전업주부이자 전업작가로서의 감각이 살아 있는 독서로 탈바꿈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했던 필수적인 기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번데기에서 성충으로 우화하는 과정에 드는 일정한 시간처럼 말이다.

 

"유행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지 않아도, 세련된 말투로 걸려온 전화에 응대하지 않아도, 마주치는 사람마다 미소를 짓지 않아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는 최신 맛집을 몰라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도시에 어울리는 차림을 하지 않아도 내 삶이 충분히 빛날 수 있다는 걸 밤마다 읽은 소설들이 가르쳐 주었다." (p.272~p.273)

 

한강 작가의 맨부커상 수상 이후 소설에 대한 국내 독자의 열기가 뜨겁다. 교재, 수험서, 자기계발서 등의 실용서 비중이 기형적으로 높은 국내의 독서 생태에서 소설에 대한 관심은 어쩌면 낯선 풍경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설은 곧 나 자신의 이야기이고, 우리 가족의 이야기이며, 전 인류의 이야기로 확대되는 것이기에 한번쯤 소설에 빠져들었던 독자는 그 행복한 글감옥에서의 탈출을 시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발적인 수감을 요구할런지도 모른다.

 

"결혼식이 끝나고, 일상으로 복귀했을 때에야 비로소 책을 읽지 않고 사는 것에 대한 허무감이 밀려왔다. 책을 읽지 않는다는 건, 내가 나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모든 물건을 갖다 버리고 싶어질 만큼 절망적이었다." (p.260)

 

주말에 맞는 풍경은 언제나 비슷하다. 날은 덥지만 내일 당장 출근해야한다는 조급함과 강박을 그들의 얼굴에서 찾아볼 수 없다. 한결 느긋해진 표정과 발걸음은 주변 사람들 모두에게 전염되는 듯 덩달아 미소가 번지게 된다. 이런 날 에쿠니 가오리나 박민규가 쓴 가벼운 소설 한 권 옆에 끼고 가까운 계곡에 나들이라도 나가보는 건 어떨까? 계곡에 발을 담그고 소설을 읽는 재미에 한껏 빠져 보면 하루의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것이다. 저녁 어스름이 내리는 소슬한 밤길을 달려 귀가하는 발걸음은 또 얼마나 가볍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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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6-07-10 1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꼼쥐님처럼 글쓰고 싶어요! 길어도 계속 읽게 되는 문장의 자연스러움~ 많이 배우고 갑니다.

꼼쥐 2016-07-12 15:54   좋아요 1 | URL
너무 과분한 칭찬을...
아무튼 감사드립니다. ^^

qualia 2016-07-10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에서 인터넷의 발명이 가장 획기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 모든 혁명 중에서도 인터넷 혁명이 가장 파급력이 컸다고 봅니다. 모든 게 인터넷 이전과 이후로 달라졌다고 볼 수 있죠. 그 덕에 꼼쥐 님의 노트에 적혀 어느 한 가정집의 서랍이나 책장 속에 꼭꼭 숨어 있었을 사적인 글들을 (꼼쥐 님과는 전혀 안면도 없고 관계도 없는) 제가 읽을 수 있게 된 것이죠. 정말 놀랍습니다. 제가 있는 공간과 꼼쥐 님의 책상 혹은 컴퓨터 사이까지의 거리는 그 어느 우주 공간보다도 더 아득히 멀다고 할 수 있잖아요. 지금이 인터넷도 없는 1980년대와 같은 시대라면 말이죠. 그런데 지금 2016년 07월 10일 낮 2시 38분, 한국의 어느 한 도시에서 제가 꼼쥐 님의 내밀한 사적 공간으로 잠입해 들어가 그 내면을 고스란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꼼쥐 님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블로거들이 블로그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서슴없이 공개하고 있으니까요. 인터넷이 없었다면 결코 벌어지지 않았을 현상이죠. 거듭 놀랍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례는 인터넷이 가져온 놀라운 변화 중 지극히 작은 한 사례에 불과하죠. 다른 거대하고 심층적인 변화와 혁신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잖아요. 아무튼 꼼쥐 님의 윗글 가운데 첫째와 둘째 단락에 들어 있는 얘기와 생각들이 정말 맘에 듭니다. 인용해 주신 글도 그 인용문에 대한 꼼쥐 님의 느낌글도 정말 너무 좋습니다. 덕분에 얕은 생각이지만 이렇게 적을 수 있었네요~ hehe 고맙습니다~ ㅋ

꼼쥐 2016-07-12 16:02   좋아요 1 | URL
qualia 님의 꼼꼼하게 적어내려간 댓글을 읽으며 순간 감동하게 되는군요. 저는 사실 생각이 날 때마다 이따금 두서없는 글을 남기고 그것을 읽는 다른 블로거의 존재에 대해서는 별 생각도 없이 지내왔었습니다. 제 블로그의 다른 글들을 보시면 알겟지만 이렇다 할 댓글이 달리지 않는 이유도 그런 까닭이지요. 제가 쓰고 싶은 대로 멋대로 쓰고 제가 쓴 글에 누군가 댓글을 달든 그렇지 않든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도 물론 다른 블로그를 방문하여 글을 읽고 댓글을 남기는 경우는 좀체 없었습니다. 제가 남들보다 게으르다는 말을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는군요. 아무튼 이런 성의있는 댓글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이렇게 제 생각을 간단하게나마 남깁니다. 더불어 제 글에 대한 칭찬도 감사히 받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