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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 알타이 걸어본다 6
배수아 지음 / 난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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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잡아 2,3일이면 대충 다 읽지 않을까, 했던 것이 일주일을 넘기고 나서야 겨우 다 읽었다. 딱히 게으름을 피운 것도 아닌데 유난히 진도가 나가지 않는 책이 종종 있다. 그렇게 꾸역꾸역 읽다 보면 내용도 잘 생각나지 않고 말이다. 소설가 배수아의 알타이 여행기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얄팍한 책의 두께와 여행기라는 말에 '저것쯤이야.' 생각했었다. 넉넉잡아 이삼 일, 맘만 단단히 먹으면 하룻밤에라도 다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웬걸, 나의 예상과는 달리 진도는 좀체 나아가지 않았고 하릴없이 날짜만 축내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사진이나 그림이 반 이상을 차지하는 다른 여행기와는 달리 이 책은 여느 소설책보다 더 빾빽한 글씨와 알타이 체류기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작가의 공간적 이동이 적었고, 우리에게는 한없이 낯선 알타이의 묘사가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나는 '궁금하면 500원'이 아니라 천 원을 받는다 해도 알타이에 대해 딱히 궁금한 게 없었다. 책이 지루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때에 맞춰 내가 바빠진 탓도 있었고, 기대했던 여행기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변명하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우리 여행자들은 말을 잊은 채 지상의 풍경에 고정했다. 이곳이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던 그 세계, 그 공간에 속하는 것이 과연 맞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탄 비행기는 1만 년 전의 오늘을 향해 시간을 거슬러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울란바토르에서는 결코 느끼지 못했던 이곳은 알타이다, 나는 알타이에 있다는 감정이 비로소 가슴에서 피어올라 향나무의 흰 연기처럼 나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p.62)

 

작가의 특이한 이력처럼 여행지 선정도 색달랐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이화여자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한 작가는 한동안 공무원(병무청)으로 일하다가 무작정 쓴 소설 '천구백팔십팔년의 어두운 방' 이 1993년 <소설과 사상> 겨울호에 실림으로써 등단했다고 한다. 그 후 독일에서 1년간 체류하던 그녀는 2002년 다니던 직장에 사직원을 제출하고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2009년 여름 그녀가 알타이 고원의 추위에 떨면서 유르테에 불을 피울 야크똥을 모으는 고생을 자초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것은 여행기가 아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것은 여행기라고 불리기에는 어떤 요소가 너무 부족하거나 혹은 너무 넘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결코 여행과 함께 시작하거나 끝나지 않는다. 나는 여행을 떠났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나로부터의 도피였으며, 특별히 흥미진진하거나 남다른 사건이나 경험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p.11)

 

독일어로 소설을 쓰는 몽골 샤먼이자 투바 부족의 추장인 갈잔 치낙에게 이끌려 이름도 낯선 알타이-투바를 그녀는 2009년부터 세 번이나 다녀왔다고 한다. 대부분이 유럽인인 여행객 중에 유일한 아시아인이었던 작가는 끝도 알 수 없는 스텝 초원을 말을 타고 달려보기도 하고, 요리에 재주가 없다는 그녀가 20명 이상의 식사를 자원해서 준비했다가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하기도 하고, 여행의 마지막 무렵에는 병명도 알지 못하는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인간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문명으로부터 잊혀진 몇 안 되는 지역 알타이-투바를 그녀는 그렇게 겪어냈다.

 

"우리들 머리 위의 하늘은 투명한 푸른빛의 폭포이다. 깨끗하고 맑은 대기는 우리의 영혼을 스치며 너울거린다. 찌르는 듯한 햇빛이 환하게 쏟아지는 스텝 초원에 앉아 빵에 부드러운 야크 버터와 달콤한 딸기잼을 발라 밀크티와 함께 먹는다. 밀크티는 항상 한 번에 기본으로 두세 잔을 마셨다." (p.154)

 

작가의 여행기라기보다는 알타이-투바 유목민 체험기에 가까운 이 책에서도 첼로를 전공한 오스트리아 여인 마리아가 비중있게 등장한다. 그녀는 5개 언어를 할 줄 알고, 유목민과 결혼하여 알타이에 살고 싶다는 염원으로 나이 어린 알타이 유목민 총각과 소개팅을 하고 몽골어와 투바어까지도 배운다. 그러나 문명에 길들여진, 오페라에 열광하는 마리아는 열병과도 같았던 알타이앓이에서 금세 벗어난다.

 

"나는 누구였던가. 나는 이곳에서 그것을 완전히 잊고 지냈는데, 눈앞으로 닥친 귀향을 생각하니 갑자기 그런 질문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까지 나는 너무나 나 자신으로 존재함으로써만 살아갈 수 있었는데, 여기서는 나 자신이 되기를 그토록 강요하는 불안과 혼돈이 없으며, 그래서 늙은 뿔처럼 단단히 뭉쳐 있던 나의 자아는 무엇인가의 영향 아래 서서히 부드러워졌고, 점점 밀도가 희박해지고 가벼워져서 검은 호수 아래로, 향나무의 연기를 따라, 밤 늑대의 울음 속으로, 달의 둥근 얼굴 속으로 휘발되어버렸고, 그럼으로써 도리어 나는 검은 호수와 향나무의 연기, 늑대의 울음, 달의 얼굴로 동시에 모두 존재할 수 잇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p.224)

 

여행이 이따금 돌이킬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나를 이끌 때가 있다. 이곳에 왜 왔는지, 나는 이곳에서 과연 무엇인지, 문명으로부터 나는 얼마나 멀어졌는지, 그것이 나에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작가의 의식 저편을 주목하고 있었다. 어쩌면 작가는 지금 그녀의 가슴 한켠에 알타이의 햇살 한 줌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을 거라는, 그런 예감이 들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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