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뺀 세상의 전부 - 김소연 산문집
김소연 지음 / 마음의숲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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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산문집은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간다. 그래서인지 나는 짐짓 시를 읽는 체하며 시인의 산문집을 읽곤 한다. 1990년대 이후 나로부터 차츰 멀어진 시는 좀체 거리를 좁히지 못한 채 데면데면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이제는 숫제 내쪽에서 먼저 꽁지를 빼기도 한다. 말간 시구(詩句)들이 강물 위에 뜬 낙엽처럼 한동안 흔들리다가 끝내 초점을 잃고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 편의 시는 내게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한 채 허망한 발길을 되돌리는 것이다. 그렇게 시는 해독이 어려운 외계어인 양 나로부터 한참이나 멀어져 갔다. 휴대폰이나 인터넷이 없던 시기에 내게 있어 시집은 누군가를 기다리며 가장 손쉽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가장 편한 도구이자 마음을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는데 말이다. 이제는 시인의 산문집을 읽으며 짐짓 시를 읽는 체하는 지경에 처하고 보니 왠지 모를 아쉬움과 아련한 그리움이 함께 드는 것이다.


김소연 시인 역시 시집보다는 산문집을 통해 먼저 알게 되었다. 2008년에 출간된 양장본의 산문집을 나는 마치 리듬을 벗어난 시를 읽듯 떠듬떠듬 읽어나갔던 것이다. 시인의 정성과 아름다운 마음이 별처럼 쏟아지던 책이었다. 아, 제목마저 어쩜 그렇게 딱 들어맞는지... 시인이 쓴 <마음사전>을 읽으며 나는 비로소 예전에 잊었던 시적 감흥을 조금씩 되살려낼 수 있었다. '햇살에도 파도가 있다/소리는 없지만 철썩대고 있다/삭아갈 것들이 조용하게 삭아가고 있었다'고 노래했던 시인의 짧은 시구가 마음을 헤집고 온통 어수선한 난장을 치던 밤, 나는 차마 잠들지 못한 채 검푸른 새벽을 맞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누군가의 주장을 듣고 있을 때보다 누군가의 하루를 지켜보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게 될 때에 더 크게 설득되고 더 큰 경이감이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나도, 되도록 생각한 바와 주장하는 바를 글로 쓰지 않고, 다만 내가 직접 만났거나 직접 겪었던 일들만을 글로 써보고 싶어졌다. 나를 뺀 세상의 전부, 내가 만난 모든 모든 접촉면이 내가 받은 영향이며, 나의 업장이자 나의 사유라는 걸 믿어보기로 했다."  (p.10 '책머리에' 중에서)


'겨울 이야기'에서 시작된 책의 순서는 차례로 봄, 여름, 가을을 지나 '다시 겨울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있지만 가만한 계절의 응시가 시인에게는 무척이나 낯설고 힘겨운 시간들이었겠다, 하는 생각을 문득 하면서 한 곳에 머물지 않는 하루하루가 어느 누구에게도 참으로 소중한 것이었음을 진심으로 믿게 되었다. 오롯이 경험으로만 채워진 삶의 조각들이 기억의 바구니에 수북수북 쌓이던 밤, 글로 채색되지 않는 수많은 반복과 재생의 일상들이 본데없는 직선과 사선의 불필요한 교차만 그려내고, 구겨진 파지 위로 드리워진 아침 햇살이 드문드문 옅은 그림자를 펼쳐놓던 어느 아침. 나는 비로소 시인의 하루를 이해한다.


"시를 쓸 때에도 자주 이런 종류의 괴로움과 만난다. 가장 오래 탐구해왔고 가장 오래 지속해왔던 일에 대해 오히려 모르겠다는 입장이 될 때마다 두려움과 고단함을 동시에 느끼곤 한다. 나의 무지에 대하여 고단함을 느끼지 않고 달갑게 여길 때에야 간신히 새로운 모름에게로 한 걸음 걸어 들어갈 힘이 생긴다. 모른다고 느껴질 때보다 안다고 느껴질 때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 이전에, 모른다는 것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p.83)


별것도 아닌 나의 일상을 하나하나 기록하여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군가 내가 지나쳐온 일상 속에 마법의 가루를 흩뿌려놓은 듯 반짝반짝 빛이 나는 걸 보게 된다.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별의별 일들로 변화하는 놀라운 마법. 나태주 시인의 시구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가 마법의 주문처럼 외워지던 순간. 시인이 기록한 계절의 순간들은 그저 별것도 아닌 것에서 이렇게 다채로운 옷을 갈아입고 마치 신데렐라가 유리구두를 신고 호박마차에 올라타는 것처럼 우리의 의식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죽는 날까지 경험할 필요 없는 일들만을 경험하며 살다가 인생 자체를 낭비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을지라도, 커다란 후회는 안 해야겠다 생각한다. 수많은 인생 중에 시행착오뿐인 인생도 있을 테고, 하필 그게 내 인생일 뿐이었다고 여길 수 있었으면 한다. 대신, 같은 실수가 아닌 다른 실수, 같은 시행착오가 아닌 새로운 시행착오, 겪어본 적 없는 낭패감과 지루함을 경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빛나는 경험이라는 게 따로 있다는 걸 이제는 안 믿는다. 경험이란 것은 이미 비루함과 지루함, 비범함과 지극함을 골고루 함유하기 때문이다."  (p.252)


노을이 지는 하늘을 보며 내가 보낸 하루와 시인이 경험했을 이 하루에 대해 생각해본다. 누군가와의 만남을 약속하고, 가보지 않은 식당의 문턱을 넘고, 약속했던 시간을 확인하며 스마트폰 속의 낯선 기사를 읽고, 낯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초조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는 하루. 때로는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익숙하지 않은 공원의 보도 위를 거닐던 시간들. 그런 무감한 일상들이 시인의 손길을 거쳐 익숙함의 탈을 벗는 모습은 그저 신비롭다. 창밖에는 농익은 봄햇살이 노을 뒤편으로 숨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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