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독
박완서 지음, 민병일 사진 / 열림원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꼭 10년 전인 2011년 1월 22일 세상을 뜬 작가 박완서에 대한 기억은 사람마다 각자 다르지 않을까 싶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이름만 겨우 한두 번쯤 들어본 작가일 수도 있고, 감수성 예민하던 시절에 열광하던 작가일 수도 있고,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정이 가는 작가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질곡의 시대를 살았던 작가가 자신과 주변의 삶을 고스란히 글로 옮겨놓았던 노고를 생각할 때, 후손 된 입장에서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지는 건 어찌할 수가 없다.

 

"티베트의 하늘은 그때의 우리 하늘빛보다 더 가깝고 더 깊게 푸르다. 인간의 입김이 서리기 전, 태초의 하늘빛이 저랬을까? 그러나 태초에도 티베트 땅이 이고 있는 하늘빛은 다른 곳의 하늘과 전혀 달랐을 것 같다. 햇빛을 보면 그걸 더욱 확연하게 느낄 수가 있다. 바늘쌈을 풀어놓은 것처럼 대뜸 눈을 쏘는 날카로움엔 적의마저 느껴진다. 아마도 그건 산소가 희박한 공기층을 통과한 햇빛 특유의 마모되지 않은, 야성 그대로의 공격성일 것이다."  (p.20)

 

박완서 작가의 여행기 <모독(冒瀆)>을 읽었던 건 소설이 아닌 작가의 산문집을 읽어보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지만 10주기를 추모하는 나 나름의 경건한 의식 같은 것이기도 했다. 1997년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처음 출간되었던 이 책은 '2005년 한국의 아름다운 책 100'에 선정(예술 부문)되기도 했는데 지금은 절판되어 책 애호가들 중에는 희귀본으로 남아 있다. 그러다 2014년에 열림원에서 재출간한 책이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다. 나는 1997년 판본의 낡은 책을 읽고 있으나 그 시절의 작가도, 외환위기를 겪었던 그 시절의 기억도 그저 머릿속의 희미한 흔적으로만 남았을 뿐 손에 잡히지 않는 그리움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만큼이나 무상하다.

 

"우리가 초모랑마(에베레스트)에 대해 외경심을 갖는 것은 세계의 최고봉이기 때문이지만 인도나 티베트, 네팔 등 힌두 불교 문화권에서는 카일라스 산을 창조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고 일생에 한 번이라도 순례하기를 열렬하게 소망한다. 순례의 길이 고통스러울수록 죄가 정화된다고 믿어 고통보다는 법열을 느낀다고 한다. 그들처럼 최소한의 소유로 단순 소박하게 사는 민족도 없다 싶은데 이런 엄청난 죄의 대가를 지불하려들다니, 그들이 느끼고 있는 죄의식이 어떤 것인지 우리 같은 죄 많고 욕심 많은 인간에겐 상상이 미치지 않는 영역일 듯싶다."  (p.199)

 

'민병일 시인이 카메라를 들고 따라나서 주었고, 소설 쓰는 이경자, 김영현도 동행이 돼주었다.'고 밝힌 이 책에서 작가는 60대의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히말라야 오지를 여행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면서도 동행했던 이들의 살뜰한 보살핌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다. 박완서 작가의 글은 소설에서도 그렇지만 군더더기 없이 맑고 단아하다. 읽는 이로 하여금 리듬감을 느끼게도 하고, 작가의 투명한 속내가 글에 내비치는 것 같기도 하다. 현대 여행작가들에게서 보이는 지나친 감상이나 과장, 여행자만의 애상 등 여행기라기보다 '여행 감상문' 혹은 '여행 애상기'에 가까운 그런 문장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작가가 보았던 티베트와 네팔의 빛과 어둠이 있는 그대로 펼쳐진다.

 

"오늘 살 줄만 알았지 내일 죽을 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 힌두 문화권에서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그들의 사는 모습을 구질구질한 면까지 천연덕스럽게 보여주듯이 죽어 빈 껍데기가 된 시신이 아주 한 자락의 바람으로 무화되는 과정도 천연덕스럽게 보여준다. 윤회를 믿기 때문일까."  (p.301)

 

소박한 사람들이 욕심 없이 사는 성스러운 땅에 화석 연료의 마지막 쓰레기인 비닐 조각, 스티로폴 파편, 찌그러진 페트병 따위의 생전 썩지 않는 것들을 두고 온 것이 완전 순환의 땅인 그곳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는 노작가의 진솔한 자아성찰기가 작가가 세상을 떠난 10년 후의 어느 독자에게 부끄러움을 안겨주었던 책. 며칠 따뜻했던 날씨가 다시 또 추워지고 있다. 삶도 자연도 끝없는 순환만 이어질 뿐 영원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작가가 세상을 떠난 지 꼭 10년 만에 나는 먼지 쌓인 서가에서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삶도 이처럼 허허로운 것인지도 모른다. 이따금 책을 읽고 또 이따금 생각을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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