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사랑은 지금 행복한가요? - 기시미 이치로의 사랑과 망설임의 철학
기시미 이치로 지음, 오근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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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시인의 시 '즐거운 편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시인은 사랑을 노래하는 듯한데 그것이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사랑은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라 소소한 일상의 한 부분이거나 전부라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소한 일상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사랑을 할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게 됩니다.

 

"한순간 한순간의 '지금 여기'에 집중해서 지낼 수 있다면, 그날 만난 순간부터 헤어질 때까지 둘이서 나눈 이야기를 모두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유는 아주 명백합니다. 함께 지낸 시간이 '그저 보낸 시간'이 아니고 '체험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기쁨을 동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시간이 아니고, 둘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p.229~p.230)

 

이따금 어린 학생들이나 대학에 다니는 젊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생각을 들어볼 기회가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몇몇 대학생들과 저녁을 함께 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일상이 궁금한 나로서는 대화에 적극적으로 끼어들기보다는 그저 묵묵히 듣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쩌다 나의 생각을 묻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그들로부터 들었던 대학가 커뮤니티 사이트를 통한 즉석 만남의 실태는 과거 세대인 저로서는 가히 충격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서로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만나 성적인 욕구를 충족한 후 깨끗하게 헤어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내가 그것에 대해 우려를 표하자 학생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에 과민반응을 보이는 게 아니냐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날 만나서 마음에 들면 그날 관계를 가질 수도 있고, 욕구를 충족한 후 그날 바로 헤어질 수도 있지만 다음에 또 만날 수도 있는 게 아니냐며 자신들은 옛날처럼 질질 시간만 끌면서 금쪽같은 시간을 낭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압축적으로 사랑을 하는 까닭에 시간을 아낄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자신이 고독하다는 감정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에 섹스를 요구하는 사람은 섹스를 커뮤니케이션의 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잇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커뮤니케이션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협력, 존경, 신뢰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상대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p.259)

 

아들러 심리학을 소개한 <미움받을 용기>를 통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저자는 이 책에서 사랑이 단순한 욕구 충족이나 일시적인 감정의 결과가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능력이자 기술임을 일깨워 줍니다. 사랑하는 법을 알아야 사랑이 행복해질 뿐만 아니라 노력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사랑의 기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숙한 사랑의 방법론을 말하기 위해 저자는 심리학자인 알프레트 아들러와 에리히 프롬을 비롯해 철학자인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칼 야스퍼스, 마르틴 부버, 니체 등과 함께 시인인 릴케의 저작과 에피소드를 두루 살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저자 자신의 통찰을 더하여 사랑이 인간관계의 한 부분임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사실 공부를 할수록 사랑에 대한 아들러의 입장도 예수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아들러와 공동으로 연구를 했던 프로이트는 예수의 이웃사랑에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실제로 만약 "네 이웃이 너를 사랑하듯 네 이웃을 사랑하라!" 이렇게 말했다면 이견은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나도 묻고 싶습니다. 나를 사랑해주는 것도 아닌데 왜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만 하는 거냐고 말이지요. 그러나 곧 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해준다면 나도 당신을 사랑하겠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p.124~p.125)

 

저자는 서문에서 '연애에 괴로움을 느꼈던 사람, 같은 괴로움을 또다시 맛볼까 봐 두려운 사람, 그리고 바로 지금 연애 상대나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괴로움을 느끼는 사람을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지금보다 좋은 사랑을 만들어가는 힌트를 발견하기를 바란다는 희망도 싣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저자는 전 연령대의 사람들이 연애와 결혼, 자녀 양육에 이르기까지 상황별, 시기별, 문제별로 해결책을 고민해보고 이 책을 통해 도움을 받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앞서 인용했던 황동규 시인의 시에서처럼 사랑은 소소한 일상을 통해 배우는 인생 전체의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젊은 사람들의 일시적인 욕구 충족 행위는 그 횟수가 늘어날수록 사랑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나 습관을 심어줄 수도 있습니다. 육체적 관계가 아닐지라도 일상에서의 따뜻한 관계 속에서 서로의 체온을 감지할 수 있고 더불어 삶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는 사실은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학습되는 것이지 어느 날 갑자기 사랑에 빠진 남녀가 저절로 터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봄이 오고 있습니다. 시간 속에 스미는 숱한 기억들은 우리가 지난 겨울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통해 배웠던 사랑의 향기였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아름다운 까닭은 피어나는 봄꽃처럼 사랑의 향기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더없이 아름다운 사랑을 배우기 위해 우리는 평생을 바치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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