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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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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읽은 정유정의 [28] 때문에 괴로웠다. 이 소설을 다 쓴 작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렇게 고통스러운 길고 무거운 내용의 글을 쓴 저자의 노고를 생각하면 즐겁게 읽어야 할 책이었건만 나는 그녀의 책 내용이 많이 힘들었다. 그녀의 전작들 [내 심장을 쏴라], [7년의 밤]을 모두 읽었기에 그녀에 대한 깊은 믿음이 있었건만, [28]은 꽤 힘들게 읽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그녀가 쓴 글들이 좀 무겁고 지루했다. 그런데 그녀의 첫 번째 여행 에세이를 읽고 나서는 그녀를 향한 원망 아닌 원망이 히말라야 눈 녹듯 사라졌다. 이렇게 유쾌한 유머 코드를 가지고 있는 작가였다니. 이런 작가님이 왜 그간 소설에서는 이런 유며 코드를 보여주지 않으셨는지. 나만 모른 건지.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 방황]이라는 에세이가 나왔다는 얘기를 들었을때, 처음에는 책을 출판하기 위한 여행을 떠났나 생각이 들어 기획된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순간 설령 기획된 책이었다면 너무나 고마운 기획이었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작가 정유정을 그냥 조금 무겁고, 두꺼운 책을 쓰는 작가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나의 여행 리스트 중에 가장 마지막의 것은 스페인의 [산티아고]이다. 한 달이 넘는 날들을 오로지 노랑 화살표 하나만 의지하며 걸어가야 하는 산티아고의 그 길을 왜 그렇게 가고 싶냐고 물어 본다면, 이유는 없다. 뭔가 오랫동안 길을 걸으며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버텼으니 뭔들 못하겠냐며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지 않을까 생각하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내가 산티아고를 가고 싶은 그나마 이유는 혼자 오랫동안 걸어가면서 느끼는 나만의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런 부분 때문에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 종주]는 산티아고를 향한 나의 큰 자극제가 되었다.

 

17일 동안 해발 고도 5416미터인 쏘롱라패스를 올라 다시 내려오는 코스가 [환상코스]인가보다. 몇 달 전에 본 [정글의 법칙]에서 네팔에 도착해 이 비슷한 길을 걸었던 것 같은데 가장 무서운 고산병으로 험난한 길을 고통스러운 가슴과 두통과 싸우며 내려가야 한다는 것에 너무 힘든 여행일 것 같아 나는 절대 못할 여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고산병은 산을, 그 지역을 허락하는 사람에게만 없는 것 같아 뭔가 선택되는 사람 되는 기분은 아닐까 생각도 해 본다. 고산병 없이 높은 지대를 다닐 수 있는 사람이 제일 부럽겠지. “아무리 잠자리가 바뀌어도 잠만 잘 자고, 모르는 사람들과도 저녁이면 술을 마시며 카페에 앉아 있었던 적이 많아 보이나보다. 그건 우리 단장님 다른 것은 몰라도 두통으로 괴로웠던 날이 많았기 때문에 두통과는 늘 화해하며 지내고 싶은 마음이다.” 이런 나름의 포기하는 마음으로 읽은 그녀의 환상 종주는 정말로 환상적이었다. 그녀의 동료 김혜나 작가가 찍은 사진이 간혹 보이긴 하지만 사실 뷰를 중요시 생각하는 검부의 추천 호텔, 풍경이겠지만 사진이 없어도 그녀의 환상 코스는 멋있어 보인다. 검부는 늘 얘기를 하지 않던가. 힘들어도. 뷰가 좋아야 한다고. 


어머니의 투병으로 그녀의 삶은 달라졌다고 했다. 그때 가졌던 우울과 어둠에 대한 그녀의 생각에, 나는 나의 지난날을 생각하며 스스로의 시간을 쓸어 내렸다. 


“ 사람들은 말한다. 그때가 있어 인간으로서 성숙해지고 삶이 단단해지지 않았겠느냐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 어둠은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인생과 싸우는 법보다는 인생을 즐기는 법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세상의 링이 아닌 놀이터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전의를 불태울 대상이 필요하지도 않았을 테다. 나는 노는 일마저 훈련해서 노는 인간이 되었다. 그것이 몸과 마음을 정전 상태에 빠뜨린 원인이었다.” P133


그녀의 삶의 랜드 마크였다는 스물두 살의 그해의 어머니의 기억은 그녀가 고지를 오르는 동안 큰 힘이 되면서 가슴 아픈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의 다른 이름으로도 남았다. 어쩌면 우리는 길고 험한 길을 걸어가는 것을 원하는 이유는 이런 치유의 과정을 힘든 마음으로 이겨보려는 것은 아닐까. 그녀가 쏘롱콜라 협곡을 따라 북진하면서 어머니가 말해줬던 그 말을 떠올리며 걸어갔던 그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긴 시간을 걸었는지 모른다. 

“이제부터 너 혼자 가는 거야.” 


“우리는 죽을 때까지 아이인 동시에 어른인 셈이다. 삶을 배우면서 죽음을 체득해 가는 존재. 나는 안나푸르나에서 비로소, 혹은 운 좋게 어른의 문턱을 넘었다” 307


그녀의 17일간의 여정 중에 단 하루도 편안했던 날이 없었기 때문에 나도 그녀의 그 시간을 공유하며 걸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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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4 12: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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