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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정호승 지음, 황문성 사진 / 비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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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많은 순간에 상처받고 살아가고 있다. 위로가 되어주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노래를 듣거나 혹은 맛있는 것을 먹거나 추억의 사진의 한 장이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혹은 선배가 건네주는 말에 위로가 되고 용기가 생길 때가 있을 것이다.

 

 

 

문득 나에게는 어떤 말들이 용기가, 위로가 되었었던가 생각해 본다.

 

아직도 버리지 못한 꿈이 하나 있는데, 그걸 생각하면 나의 나이가 떠오른다. 이 나이에 내가 그걸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당연히 접어 버렸던 그 소망 앞에 <늦지 않았다>는 말이 허망하면서도 위로가 되고, 때로는 “너 아직 그 바닥에서 죽지 않았구나!” 말을 들으면 아직 내가 접지 않아도 될 그런 희망이었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곤 하다.

 

 

때론 누군가에게는 길가에 버려진 종이처럼 쓸모없는 말일지라도 절망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모습에 자책과 자학의 길에 서 있을 때 구원해줄 그런 말이기도 하다. 그런 말들을 골라 놓은 정호승 시간의 산문집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에는 책의 두께만큼 묵직한 용기들이 들어 있다. 그 용기는 때로는 위로가 되고 때로는 양식이 되고 때로는 마음의 검은 그림자가 사라지는 마술을 부릴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위로를 주는 말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너무나 평범하다. “인생은 자기가 생각한 대로 된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목적을 버려야 목적에 다다른다.”, “나만의 속도에 충실 하라.”, “지금이 바로 그때다.”, “용서는 신의 몫이다.” 등등 자기 계발서에서 많이 읽어 본 듯한 소제목들이다. 간혹 자기 계발서들의 제목과 일치하지 않는 내용이라던가 혹은 제목만 읽고도 다음 장을 그냥 넘겨 버리고 싶은 관념적이고 상투적인 얘기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너무나 뻔해서 읽고 싶지 않고, 너무나 잘 알아서 듣고 싶지 않은 얘기들이 수두룩하다. 대체 이런 말로 절망에 빠진 나에게 용기를 준단 말인가 자문하면서 책에 대한 신뢰가 급 하락한다.

 

 

“기념하지 않는 실패는 실패가 아닙니다. 실패는 기념함으로써 비로소 성공의 싹을 틔웁니다. 인생이라는 학교에서는 성공보다 실패가 교사입니다. 저는 인생이라는 학교에서 실패라는 교사의 가르침을 잘 따르는 그런 학생이 되고 싶습니다." P31

 

 

“ 인생의 수없는 동반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동반자는 바로 실패입니다.” P227

 

 

 

 

한숨이 절로 나왔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지만 그 실패 때문에 많은 이들이 목숨을 버렸고 마음을 닫았다. 이런 상투적인 얘기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단 말인지. 이런 마음은 아마도 닫힌 마음 때문에 드는 생각일 것이다.

 

 

아직 나에게도 두려워 시도하지 않은 일이 있다. 그 일 앞에서 분명 이 말은 큰 용기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패를 기념하고, 다시 도전하면 되는 삶이 아닐까. 때론 이런 말들이 너무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라 그냥 지나쳤을지 모르겠지만, 분명 어떤 도전을 앞둔 사람이거나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필요한 말일 것이다. 그 말이 때로는 벼랑 끝에 선 발을 쳐다보고 다시 내려 올 수 있는 용기를 줄지 모를 일이다.

 

한때 나는 [아마데우스] 영화를 보고 늘 내 자신이 살리에리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살리에리가 아마데우스를 보며 이런 말을 했었다.

 

 

 

“신이여, 당신은 제가 그토록 갈망했던 능력을 저런 방탕한 녀석에게 주시고 왜 저에게는 그 아름다움의 화신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밖에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P59

 

 

 

천재적은 능력은 없지만 분명 재능은 있었던 그가 아마데우스를 만나고 절망했었던 그 순간, 그가 용기를 내어 자신을 더 갈고 닦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지 않더라도 그는 분명 위대한 음악가중 한 사람이었는데 그 사실을 그만 몰랐던 것일까.

그래서 나는 살리에리에 대한 애증이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사랑하지만 그의 천재적 재능을 탐하기보다 그를 보며 마음 아팠을 살리에리에 대한 동정 혹은 공감의 마음이 더 깊다. 많은 사람들은 모차르트보다 살리에리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이들이 천재가 될 수 없고 그들의 모습을 동경 혹은 질투하며 자신을 바꿔 나가거나 그들의 모습을 인정하고 자신의 모습을 순응하며 그렇게 살아나가고 있다.

 

 

 

가끔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기위해 쓴 책의 저자들이 스님이거나 수녀님들은 절대 화를 내지 않을까 궁금했다. 책에는 모두 참아 내거나 견뎌내면 그 일이 지나간다고 다독인다. 하지만 그런 말을 수백 번 들어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분노와 화가 있는 것이다. 정호승 시인의 책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또한 그랬다. 뭐든 실패의 어머니를 삼아 좌절하지 말고 살아가야 한다는 얘기들이 너무 많아서 답답했지만 그 또한 사람이기 때문에 화를 냈던 일화에 웃음이 났다.

 

 

참 사소한 일에 화를 냈던 에피소드들에 그의 인간다움에 마음이 놓이는 이상한 현상이었다. 그도 이토록 화를 참지 못하고 화를 내는 사람이구나. 우리에게 어떤 실의나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그것을 품지 말고 지나도록 하라는 말을 하는 그 또한 사소한 일에 화를 내거나 그것 때문에 하루 종일 마음이 상해 있는 사람 일 수 있다. 마음을 다스리는 책을 읽어도 그 수간만큼은 절대 그 책의 내용이 뒷등으로도 들리지 않는 수련이 덜된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도 증오심을 품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고 하는데 수련도 못한 사람들이 어찌 단 한순간에 없었던 일로 치부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마음을 해질녘까지 품지 말고 다음날까지 이월하지 않아야 하는 말은 수긍할 수밖에 없다. 당장의 화는 어찌 할 수 없다고 해도 그 다음날까지 그 마음으로 살아가면 일주일 혹은 한 달 내내 마음의 고통이 가시지 않는 것이다.

 

 

 

어떤 위인들은 누군가가 해준 작은 한마디에 용기를 얻어 실패를 딛고 성공을 이룰 수 있었다는 얘기를 한다. 때로는 어떤 이들은 절망의 순간에 자신에게 용기를 줬던 말로 죽음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는 얘기도 한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강철마인드를 가지고 싶은 것은 아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분명 흔들리고 흔들리는 마음을 가져야 더 유연하게 살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점점 늘어나는 청소년들의 자살에 마음이 아프다. 그들이 견뎠던 더 모진 시간이 앞에 있을 수 있지만, 분명 삶은 살아 볼만한 인생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 안타깝다. 절망의 손을 잡아줄 누군가가 있다면 그들도 그렇게 떠나지 않았을 텐데, 그 절망의 순간에 나타나는 손은 때로는 너무 야속하게 쉽게 오지 않는 것 같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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