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특집: 3.1운동의 주역 몽양 여운형>

2019년 3월 1일인 오늘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3.1운동은 1910년 조선을 강제로 합병하고, 무단통치라는 무자비한 통치에 대한 반감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대한 기대에 부흥하여 조선민중이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전개한 비폭력 혁명이다. 비록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혁명은 진압되었지만, 그 이후 중국에서 일어난 5.4운동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고, 대다수의 조선민중이 일본 제국주의의 무단통치에 반대했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 사건이었다. 1919년 3월 1일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비폭력 민중혁명이 일어나기 전, 이에 불씨를 제공한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몽양 여운형이다.

몽양 여운형은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잊혀진 주연이다. 1886년 경기도 양평의 소론 집안에서 태어난 몽양 여운형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자신의 집에 있던 노비들을 전부 해방시켰고, 애국계몽운동에도 참여했었던 인물이다.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독립운동을 하게 된 여운형은 현재 터기의 국부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결성한 터키 청년당에 감명을 받아 1918년 신한청년단을 조직한 그는 당시 상하이에 와있던 윌슨의 측근인 찰스 크레인에게 청원서를 보냈고, 1919년 파리에서 있을 강화회의에 독립운동가인 우사 김규식을 파견하여 조선 독립을 청원했다.

여운형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신한청년당 당원들은 국내외 지역에서 활동하며 해당 지역의 독립운동가들과 협력했다. 그 결과 일본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이 발표되었고, 3월 1일에는 민족대표 33인이 모여 서울에서 독립선언서가 공표된 것이었다. 이처럼 몽양 여운형은 3.1운동의 불씨를 만들어낸 주역이었다. 이는 1919년에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 또한 3.1운동에 있어서의 그의 공로를 크게 인정했다.

안타깝게도 3.1운동에 불씨를 제공했던 인물인 몽양 여운형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이는 해방 후 그가 추진한 좌우합작운동을 노골적으로 폄하하고, 대한민국에 반공주의라는 광기를 퍼뜨린 모종의 세력들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지금까지 잊혀져 왔다. 이제는 그를 기억해야 한다. 몽양 여운형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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