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사람들
아일린 파워 지음, 이종인 옮김 / 즐거운상상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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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 대학에서는 중세에 관한 교양 필독서로 마르크 블로흐의 <봉건 사회>, 요한 호이징하의 <중세의 가을>과 함께 저자의 이 책을 꼽는다는 말을 듣고 읽게 된 책이다.

사실 이 책 이전에는 난 이 저자에 대해 몰랐는데 이 책을 읽어가면서 내가 좋아하는 책이 바로 이런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사와 문학이 어우러지고 유명하지 않은 일반 대중의 삶에 애정을 갖고 기술하는 문체라든가, 현재 자신이 속한 시간, 공간의 입장에만 의거하여 여타 시/공간을 편견을 갖고 재단하지 않는 시각 등등,,, 정말 마음에 드는 역사책이다. 마치, 오래 꿈꾸었던 이상형을 이제야 만난듯한 느낌이다.

책의 구성은 시대순을 따른다. '1. 중세 이전의 사람들'에서는 서로마 제국의 쇠퇴기를 살며 한 시대의 끝자락을 지각했던 여러 지식인들의 모습이 그려지며 '2. 농부 보도’편에서는 중세 유럽 샤를마뉴 시대 시골 영지에서 살던 보도라는 농부의 일상 생활이 생생히 묘사된다. 장원제 농노의 삶을 손에 잡힐듯 떠올리게 해 주는 장이었다. 다음  제3장은 그 유명한 여행가인 마르코 폴로의 눈을 통해 13세기 몽골제국 지배하의 아시아를 재현해주는 흥미로운 장이다. '4. 마담 에글런타인'은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 짧게 등장하는 매력적인 수녀원장이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당시의 자료들을 동원해서 추적하는 장이다. 저자는 5장 '가부장의 아내'에서는 14세기 나이차가 많이 나는 어린 아내를 맞이한 파리의 가부장이 선배주부로서 아내에게 잔소리하는 내용을 적은 책을 소개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6장과 7장은 경제사학자인 저자의 중세 무역과 산업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는 부분으로, 15세기 양모상인인 토머스 베트슨과 헨리7세 시절 에식스의 직물상인인 토머스 페이콕의 삶을 당시 관련 자료들을 통해 재구성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농업은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변화가 없는 직업이기에 예전의 믿음과 미신에 묶여 있었고,
오래된 신들은 가정과 도로에서는 사라졌지만 밭고랑 사이에서는 아직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르미논 수도원장의 영지에서는 농부들이 아픈 자식들과 소를 위해 주문을 외웠고,
들판에서는 땅이 비옥하게 해달라는 주문을 올렸다.        - 본문 88-89쪽. '농부 보도'편에서.

위의 인용 부분에서 느껴지듯, 번역문이지만 대구의 묘미가 잘 살아 있다. 능력이 되시는 분들은 원서를 읽어보면 정말 시처럼 낭독하며 문장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대구를 한 눈에 보이기 위해 내가 타이핑해 넣으면서 행갈이를 좀 했다.)

역사책에는 맨날 전쟁과 왕조 교체, 비현실적인 위인들의 업적만 나와서 읽기 싫다는 분들께 이 책을 권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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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세계사 - 신화적 인물은 없다
엄창현 지음 / 페이퍼로드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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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세계사>란 제목에서 가진 기대와는 다른 책이었다. 통사식도 아니고 인물평전 열전식도 아니었다. 아마, 저자분께서 관심 두신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신의 견해 피력한 글들을 모은 것으로 보인다. 이럴 경우, 저자분의 집필 의도나 출판사의 편집 의도가 궁금해진다.

책에서 다룬 인물들을 훑어보겠다. 마타 하리, 체 게바라, 스파르타쿠스, 무솔리니와 히틀러, 나폴레옹, 시이저, 지아코모 카사노바, 토마스 뮌처, 엥겔스, 오웬과 푸리에, 프란시스코 프랑코, 레닌, 요하네스 케플러 등이 전체 15장에 배분되어 등장한다. 큰 연관성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인물들의 면모를 다루어도 일대기식 구성이 아니다. 엥겔스나 프랑코는 청년기만 다루고 시이저는 죽는 순간만을 다룬다. 히틀러와 마이카 시대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기는 하지만 초보 역사 독자의 경우 전체 인물의 공과를 살피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역사 에세이를 읽을 때마다 갖는 생각인데, 저자분의 의도가 아님이 보이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곡해하게 만드는 부분이 이따금 보인다. 저자분의 미숙함 때문이 아니다. 말하자면, 저자분은 다 아는 이야기이므로 생략하거나 충분한 근거 제시 없이 바로 자신의 견해를 서술하시시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본문 135쪽 히틀러의 제3제국 부분에서 저자분은 '고대의 로마가 제1제국이었고, 로마멸망 이후 로마의 고토에 성립되었던 신성로마제국이 제2제국이며, 자신이 건설한 제국이 제3제국이라고 주장한 자가 있었다. 히틀러다. 우리는 그가 건설했던 나라를 나치독일이라 부르고 있으나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제3제국으로 불렀다'라고 되어 있는 부분을 보자. 미흡한 내가 보기에 이는 저자분이 지금의 독일지역에 위치했던 과거 800 ~1806년까지의 신성로마제국과 1871~1918년의 독일제국이란 존재를 몰라서 이렇게 서술한 것이 아님을 안다. 히틀러의 망상을 효과적으로 서술해 주기 위해서 그런 거다. 그러나 이를 초보 독자들은 히틀러의 제3제국이 로마, 신성로마제국에 이은 3번째 제국이란 의미로 오해할 수 있다. 또 재미있게 서술하시려고 위트를 가미한 부분이 독자인 내게는 불편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327쪽의 레닌의 혼혈 가계도를 언급하시는 부분에서 "레닌은 완전한 잡탕이었다"라고 하신 부분, 레닌의 신체 묘사 부분에서 "숏다리"라고 하신 부분이 그랬다. 이 부분은 내가 예민해서 그럴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전체 서양사를 웬만큼 아는 독자분이 저자의 견해를 참고하는 의도로 읽기에 좋은 책이다. 일반적 인물 소개 부분보다 저자의 전공 분야와 관련하여 토마스 뮌처와 기독교 공산주의 부분,  공상적 사회주의자의 ‘구체적’ 사회개혁 복안 오웬과 푸리에의 ‘신도시 플랜’ 부분은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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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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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시오노 나나미 저자의 전작을 다 소장하고 읽게 되었다. 말하자면 '빠순이'가 된 게다. 괴이하다.난 이 저자의 역사를 보는 시선이나, 다루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욕하면서도 계속 이 저자의 신간이 나올 때마다 찾아 읽게 된다.

책은 1차 십자군 원정을 다룬다. 11세기 말, 비잔틴 황제의 원군 요청을 자기 나름으로 해석하여 민중과 기사집단을 선동한 교황 우르바누스 2세와 은자 피에로에게서 이야기가 시작하여 고드프리드, 보두앵, 보에몬드, 탄크레디의 활약으로 중근동 지중해 해안가에 예루살렘 왕국, 에데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 백국 등 프랑크인들의 국가가 세워지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이런 사항들이야 기존 도서들에도 다 나와있는 바이다. 별 새로운 해석은 없다. 저자만의 특색인, 인간성에 대한 고찰과 남자의 매력에 대한 언급이 행간에 종종 보일뿐. 그런데, 바로 그 점이 책을 읽는 재미이긴 하다.

예를 들자면, 예루살렘 공격 이전에 군대가 예루살렘 성벽 주위를 맨발로 돌며 속죄의식을 보이는 장면에서 "이렇게 그리스도 전사들은 그리스도교식으로 말하자면 '속죄', 동양에서 말하는 '목욕재계', 내가 보기에는 '집단 세뇌'를 마쳤다.(본문 233쪽)"라고 서술하는 것은 정말 독자를 박장대소하게 만드는 필력이지 뭔가!  

또한 "후세의 많은 역사가들은, 예루살렘을 해방한 후 유럽으로 돌아간 장수들을 영토 욕심이 없고 신앙심으로만 뭉친 기사들이었다고 칭찬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결국 책임감이 많고 적음의 차이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신앙만으로는 신앙조차 지킬 수 없는 것이 인간상의 현실이니까(본문 253쪽)"에서처럼 역사가는 절대 쓸 수 없는 분석을 해 주는 것을 읽는 재미도 좋다. 

하지만 이 저자의 책들을 읽어가다 보면 은근 대장이 불편해져 화장실을 들락거리게 된다. 좋게보면 이 저자는 선악의 개념을 떠나 실리 면에서 사건을 분석하고 어떤 한가지 이념에서 자유로운 다신교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나쁘게 보면 이 점이 힘을 가진 자의 실효적 지배를 긍정하는 쪽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사실 꼭 부쉬를 들먹이지는 않더라도 이 지역의 비극적 역사의 근원을 거슬러올라가자면, 십자군 전쟁을 이렇게 서술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닌가. 이번 십자군 서술도 예루살렘 '해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등, 서구 침략자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물론 이슬람 쪽의 자료도 언급하기는 하지만. 무식한 내가 보기에는 겁나 심플해 보이는 십자군 전쟁사 책이었다.

흠, 결국 내가 하고픈 말은 이거다. <로마인 이야기>처럼 이번 책의 원제에도 '모노카타리物語'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모노가타리는 이야기, 전설, 설화란 뜻이다. 바로 이 점, 시오노 저자의 책을 읽을 때마다 명심해야 한다. 이 저자의 저작들은 역사서가 아니다. 그러니 다른 역사서를 먼저 읽고, 이 저자의 책은 수필의 맛만을 찾아 읽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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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 350년 동안 세상을 지배한 메디치 이야기
김상근 지음 / 21세기북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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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한 리뷰가 될 것 같다.

나는 이 저자분을 좋아한다. 현재 이 책까지 이 분의 저서는 8권을 읽었다. 앞으로도 이 분의 신간이 나온다면 서평단에 응모한다든가 하는 행위 없이 무조건 자비로 구입해 읽을 계획이다. 그런데 이번에 이 책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는 꽤 오랫동안 망설였다. CEO 특강의 내용을 재구성한, 뭐 그런 뻔한 책일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좋아하는 다른 블로거분 두 분의 리뷰를 보고서 메디치 가문의 이야기가 주된 내용임을 확인하고 주문했다.

배송 받아 읽는데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메디치 가문의 기원, 국부 코시모, 로렌초 일 마니피코, 두 명의 교황과 두 명의 프랑스 왕비, 미켈란젤로 등의 이야기가 저자의 전작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와 <카라바조>, <엘 그레코> 등 같은 시기 피렌체가 등장하는 부분의 이야기와 거의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 점은 괜찮다. 그런데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의 역사를 CEO들의 경영술에 연관지어 이야기하다보니 비약이 심하고 본래 역사의 가치를 제대로 밝혀주지 못하고 있는 점이 마음에 안 들었다. 예를 들어 난 카테리나 데 메디치가 프랑스의 왕비가 되어 네 아들을 모두 왕위에 오르게 했기때문에 위대한 리더라고 보지 않는다. 아, 물론 저자분도 그렇게 보지 않는 것을 안다. 그런데 리더쉽 위주로, 갈아서 만든 죽처럼 빠른 흡수만을 위해 이야기를 압축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읽힌다. (여기서 나는, CEO용으로 나오는 이런 책들의 존재에 의문이 든다. 그들은 너무 바빠서 이런 책들이 필요한 것일까?  마치 게으른 중고딩이 단기적으로 점수따기 위해 독서논술용으로 줄거리 압축되고 모범감상까지 달린 다이제스트북만 읽는 예가 생각난다.)
 
아마 이는 저자분의 역량 문제가 아니라 책의 기획상 성격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을 파악하지 못한 내가 어리석었다. 앞으로 CEO용으로 나온 책은 안 사 읽으련다. 이 저자분의 책은 계속 사 읽겠지만. 오해는 마시길. 이 책의 수준은 훌륭하다. 처음으로 읽는 독자가 쉽게 피렌체와 메디치가문의 이야기를 읽고 싶다면 추천할 만 하다. 도판도 풍부하다.

하지만 나는 이왕이면 같은 저자의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와 크리스토퍼 히버트의 <부, 패션, 권력의 제국 메디치 가 이야기>를 권하고 싶다. 
  

*** 본문 176쪽 : 자기 가문의 딸을 프랑스의 '왕세자비'로 받아주면 => '왕자비'임.     
                        카테리나가 시집갈 당시 카테리나의 남편이 될 앙리2세의 형은 생존해 있었음.
                        그래서 프랑스의 왕세자비인 '도핀느'로 결혼협상을 벌인 것이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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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고 - 역사적 오류에 얽힌 이야기 혹은 우리 가슴속에 묻어둔 희망을 두드리는 이야기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삼우반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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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 콜럼버스가 (멀쩡히 그 자리에 잘 있던)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 그런데 이 신대륙의 이름은 콜럼비아가 아니다. 우리는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서 이 신대륙을 "아메리카"라고 부른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에 따르면 베스푸치는 콜럼버스보다 7년이나 늦은 1499년에 미대륙을 탐험했는데 말이다. 여기에는 우연과 실수, 혹은 의도적 왜곡으로 꼬인 유명한 역사적 오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이 사연을 저자 츠바이크는 그 특유의 매력적 문체로 더듬어 나가, 독자로 하여금 어찌보면 아메리카가 베스푸치의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을 필연으로, 희망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저자는 말한다. '잘못 놓은 수들로 얼룩진 저 유명한 역사의 장기판을 한 수 한 수 끝까지 두어보려는 것이다(본문 8쪽에서)'라고. 이 역사의 장기판을 다시 두는 모습을 한 수 한 수 지켜보는 것, 바로 독자인 나의 핵심 즐길거리였다.

건조하게 간추려서 기록해 놓는다면 이하와 같다. 메디치 가문의 피고용인이었던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자신의 항해담을 고용인인 메디치가에 보고한다. 그런데 그 편지가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편집되어 이른바 베스트셀러가 되어 버렸다. 그러자 돈에 눈면 인쇄업자들은 짜깁기로 후속편 팜플렛들을 찍어낸다. 거기에 식자공의 오식이 더해져 그가 콜럼버스보다 먼저 미대륙에 첫발을 디딘 셈이 되어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베스푸치의 업적을 찬양하게 된  지도제작자 발트제뮐러는 1507년 <지리학 입문>이라는 책에서 신대륙에 아메리고의 라틴어 이름 여성형인 "아메리카"를 붙여 버린다. 이후 라스 카사스 주교 등등의 논자들에의해 베스푸치는 콜롬버스의 명예를 빼앗은 사기꾼 정도로 폄하되다가 300여년이 지나 메디치가문에 보낸 그의 편지 복사본이 발견되면서 베스푸치는 비로소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게 된다. 사실 베스푸치는 결코 자신이 신대륙을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주장한 바가 없으며 이 모든 것은 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절의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베스푸치의 업적이 전혀 없는 것도, 미대륙에 아메리카란 이름이 붙은 것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말한다. 대항해 시절 당시, 콜럼버스를 비롯 선구자적 항해자들이 이룬 업적 못지않게 베스푸치의 업적도 지대하다라고. 당시에 일확천금 인생역전을 꿈꾸며 아무 생각없이 탐험선에 승선하여 떠났던 사람들이 그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그는 발견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 때문에 항해에 나섰지 않은가. 황금에 눈먼 남자들이 무기를 들고 낯선 곳의 이민족들을 폭력으로 제압할 때 그는 인문학자로서 펜을 들고 이민족들을 관찰하고 묘사했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는 바로 자신이 도달한 곳이 어디인지, 자신의 탐험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똑바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베스푸치는 그의 편지가 인용된 팜플렛에 정확히 네 음절, "문두스 노부스(Mundus Novus, 신세계)"라는 표현을 했다. 이 표현 자체가 세계를 보는 관점에 있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혁명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모두들 잘못 생각해서 서쪽에서 인도를 발견했다는 망상에 눈멀어 있던 시절, 그만은 진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학자, 항해가, 상인, 제후들 할 것 없이 모두가 초조하게 기다렸다. 유럽 전체가 기다렸다. 그 모든 것을 발견한 뒤 사람들은 마침내 그들이 발견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 세기의 결정적인 업적은 이루어졌다고 모두가 느끼고 있었지만, 아직 그 업적의 의미와 그에 대한 해석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 37쪽에서

이러한 의미에서 베스푸치는 실제로 아메리카의 발견을 마무리지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발견이나 발명은 그러한 발견이나 발명을 행한 사람보다는 그것의 의미와 작용을 인식한 사람을 통해 궁극적인 타당성을 얻기 때문이다. 콜럼버스가 행위이라는 공적을 세웠다면, 베스푸치에게는 앞에서 한 그의 말을 통해 콜럼버스의 행위에 대한 역사적 해석이라는 공적이 돌아간다. 그는 자신의 앞 사람이 몽유병 환자처럼 헤매다가 발견한 것을 꿈의 해석가처럼 구체적으로 밝혀냈다. - 54쪽에서

이렇게 아메리고 베스푸치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끝났다. 이제 나는 이 사람에 대한 글을 쓴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 책에는 <역사적 오류에 얽힌 이야기 혹은 우리 가슴속에 묻어둔 희망을 두드리는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역사 관련서에 적힌 내용이 전부 객관적 사실이라고 착각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필자의 역사 해석을 통해 걸려져 독자에게 전달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이 잠 못드는 새벽, 왜 저자는 아메리고 베스푸치라는 사나이에 대한 이야기를 유고작으로 남겼을까를 나는 고민한다.

책을 다시한번 쓰다듬어 보고, 이어서 생각해 본다. 당연히 미대륙이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얻기까지의 역사적 '오류'에 얽힌 이야기,라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왜 '희망'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던가, 하는 점을. 그리고 이 책이 저자의 유고작이었다는 것과, 저자가 망명 이후 2차대전의 참상에 절망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본다. 혹시 저자는 이 점에 주목하지나 않았을까. 지리상의 발견과 대항해 시대, 그러나 지도에 남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숱한 폭력적 제국주의자들이 아니라 인문학자적 자세를 지니고 자신의 할 일을 찾아 묵묵히 실행하고 기록한 아메리고 베스푸치였다는 점에.

슈테판 츠바이크, 아마 그는 그런 베스푸치의 삶을 보고, 폭력과 잔학으로 얼룩진 현대를 살아가면서 그래도 후대에 역사에 남을 희망을 찾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현재 자신이 하는 행위의 의미를 모르고 파시스트의 선동에 빠져 있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던 당시에, 그는 세상을 똑바로 보고 자신이 하는 일을 인식했던 아메리고 베스푸치라는 외로운 사나이가 있었노라고 세상에 말해 주고 싶지 않았을까. 이렇게 볼 때, "우리 가슴속에 묻어둔 희망을 두드리는 이야기"라는 부제는 매우 정확해 보인다.

예측 불가능한 역사의 자장 속에서는 종종 아주 작은 자극 하나가 엄청난 영향을 일으킬 수 있다. 역사에서 정의를 요구하는 사람은 역사가 주려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꼴이다. 역사는 대체로 단순하고 평범한 남자에게 위대한 행위와 불멸을 선물하고 가장 훌륭한 자들, 가장 용감한 자들과 현명한 자들은 이름도 부르지 않은 채 어둠 속으로 던져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카는 자신의 세례명을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다. 그 이름은 올바르고 용감한 사나이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 178쪽

어쩜 위의 문단은, 아메리고 베스푸치에 대한 저자의 평가라기보다 2차 대전 당시 폭력과 광기와 파시즘에 직면하여 스스로 자신에게 걸고픈 한 나약한 인간의 자기 주문일지도 모르겠다. 가슴이 아파 온다. 곧 해가 뜨려나.

(이 책의 집필 시점 이후 이후 70여년이 흘렀으므로 베스푸치에 대한 이 책에서의 저자의 입장을 반박할 자료나 논문이 더 나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점을 떠나서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의 매력을 엿보게 해 줄 '충분히 가치 있는' 책이다. 역시 슈테판 츠바이크, 질투 유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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