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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평점 :
내가 태어나 살아가던 1980년대에는 모두가 가난했다. 누구 하나 실컷 배불리 먹었다는 사람을 만난 적 없고, 누구 하나 때깔 고은 새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다 후즐근하게 늘어진 티셔츠를 엄마에서 언니로 언니에서 동생으로 이어지거나, 아빠에서 오빠로 오빠에서 동생으로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았다. 우리 집은 특히 형제자매가 다른 집에 비에 많았다.(아버지 주변 분들은 모두 2명의 자식만 두고 계셨다) 베이비붐 세대인 아버지와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살이 속에서도 집안의 기둥인 '아들'을 얻기 위해 딸 셋을 낳고 아들을 얻으셨다. 그래서 우리 집은 늘 먹을것이 부족했다.
당시 라면이 보편화되었던 시절이었지만, 우리 집에서 라면은 평소에는 먹을 수 없는 특식에 가까운 음식이었다. 늘 집안을 든든히 지키시던 엄마가 외출을 하시는 날이면, 아버지는 그날 저녁 서랍장 속에 꽁꽁 숨겨둔 라면을 끓여주셨다. 평소엔 맡아볼 수 없던 라면냄새가 집안에 진동을 하면 우리는 환한 웃음꽃을 피우며 서둘러 식탁에 앉아 경건한 마음으로 기다리곤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고기 건더기가 동동 떠오른 라면을 놓아주셨다. 라면과 고기! 이건 정말 멋진 조합이었다. 아버지의 입에서 '먹자'라는 신호탄이 떨어지면 동생과 나는 잽싸게 그릇속에 있는 고기를 건져 입안에 넣고 오물거렸다. 그런데 아뿔싸! 이건 고기가 아니라 덜 풀린 된장 덩어리었다. 동생과 나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된장 덩어리를 힘겹게 삼킨 후 속은 마음을 애써 진정시켜야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아버지가 끓여주시던 라면은 '된장 라면'이다. 식구가 많다 보니 일반적인 '맛'보다도 '양'으로 승부하던 우리집은 라면을 끓일 때 물을 넉넉히 넣고 푹 삶아 끓여내곤 했는데 아버지는 거기에 된장을 넣어 끓이곤 하셨다. 그렇게 라면 국물 속에 침투한 덜 풀린 된장은 면발 사이사이에 고기처럼 위장하며 우리의 손길을 기다렸다. 라면 냄새에 흥분한 우리가 된장인지 고기인지 분간을 못하고 냉큼 집어먹으면 기대와는 다르게 씁쓸하고 짭짤한 맛이 입안에 퍼져 오만상을 찌푸릴수 밖에 없던 기억이 난다. 이런 우리의 표정을 읽으신 아버지는 된장이 우리몸에 얼마나 좋은지를 말씀해주시곤 했던 기억이 난다. 어린시절에는 아버지의 말씀은 귓등으로 들으며 그저 고기건더기로 속은 분한 마음만 있었지만, 이렇게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만큼 성장하고 보니, 아버지의 된장 한 스푼은 자식들의 건강을 생각한 뭉클한 마음이 담긴 사랑이였음을 느끼게 되었다.
' 맛은 화학적 실체라기 보다는 정서적 현상이다. 맛은 우리가 그것을 입안에 누리고 있을때만 유효한 현실이다. 그외 모든 시간 속에서 맛은 그리움으로 변해서 사람들의 뼈와 살과 정서의 깊은 곳에서 태아처럼 잠들어 있다. 시장기는 얼마나 많은 맛을 환기 시키는가p17
김훈 저자의 책 <라면을 끓이며>를 읽으며 맛은 '정서적 현상'이라는 말에 강한 긍정을 느낀다. 아버지가 끓여주시던 된장라면은 단순한 라면을 넘어 아버지의 사랑과 추억이 내 기억의 가장 밑바닥에 웅크려있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하나 저자의 말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기억 밑바닥에서 태어처럼 웅크리고 있는 각인된 기억의 '맛'은 시장기로는 소환될 수 없다는 특수성이 있다고나 할까. 그저 허기진 배를 쥐어틀고 떠올린다기 보다도 이렇듯 면발처럼 탱글탱글한 '글맛'을 들이킬때 예고도없이 불쑥 소환되어지고 눈앞에 펼쳐저 그 그리움 속으로 빨려들어갈 수 있음을 느낀다. 그러니 김훈 저자의 글맛은 그리움이 묻어나고 사랑이 묻어나고 때론 풍화된 기억의 저 밑바닥으로 불쑥 빨려들어가 잊혀진 사람들과 만나고 아픔 마음을 달래고 돌아오는 인생의 달그락거리는 울림이 있다고나 할까. 이 책은 다양한 글들을 묶은 산문집이라 모든 내용을 온전히 받아 들였다고 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 맛과 아버지에 대한 글맛으로 책을 읽는동안 뭉클하고 행복했던 시간이였음을 느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