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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ㅣ 패트릭 멜로즈 소설 5부작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 지음, 공진호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5월
평점 :
여느 날과 다를 바가 없는 하루의 시작, 그리고 결코 괜찮지 않은 저녁의 끝.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그토록 출연을 원했다는 작품이라길래, 믿고 보는 배우의 선택은 옳으니까 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책을 들었다. 분명 짧은 문장으로 쉽게 쓰여진 책인데, 더구나 얇기도 얇은데 읽는 내내 읽기가 힘들었다. 다 읽고 나서야 이 이야기가 이 많은 사건이 겨우 하루만에 이뤄진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저 어리고 작은 다섯살의 아이가 받은 충격으로 자신을 파괴했던 사람. 1992년에 처음 이 책이 나왔다니, 그 당시에도 이 어린 아이가 겪은 고통은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 이야기가 자전적 소설이라니. 20년간 자신의 이야기를 쓰면서 작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패트릭과 자신을 별개의 인물로 바라봤을까, 아니면 자신을 100% 투영해 바라보며 힘들어했을까.
부유층이라는 껍데기에 가려져 그 누구도 이 아이의 실제적인 아픔을 알아주지 않았을지 모른다. 피폐한 청년기와 우울증, 약물중독에 자살기도까지. 나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이렇게 아름답고 처연하게 그려낼 수 있다니. 40번이 넘게 자신의 원고를 고치고 고치면서도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을 패트릭 멜로즈로 분리해내는 과정이.
아버지는 왜 그랫을까?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그러면 안 될 텐데. 패트릭은 생각했다.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그러면 안 될 텐데.
-45P
이 문장을 읽자마자 정말 마음이 아팠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 그리고 숨겨진 진실, 상처받았지만 그렇지 않은 척 어른이 되야 했던 그 날 밤의 기록. 그 속에서 상처받은 아이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가두고 망가뜨리기 시작한다.
어제와 다를 것이 없이 시작된 하루. 속은 곪아버린 가정이지만, 겉으론 완벽한 모습으로 이웃을 대하는 부모님. 언제나처럼 우아한 모임을 갖고 있지만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시한폭탄인 사람. 폭력이 일상 속에 자리잡은 남자. 그 폭력의 시작은 아내였다. 폭력 속에서 탄생한 아들은 엄마에게도 두려운 기억의 조각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소리를 내지 못하고, 아이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두려웠던 미숙한 모정. 그 모정은 다른 아이들을 후원하고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표현됐지만 정작 자신의 아들이 고통받을 땐 외면하고 말았다. 끝내 아들의 방에 들어서지 않고 문을 닫아버리지 않았다면, 패트릭은 조금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정상에 있다는 느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은 특권을 누리는 굉장한 향연일 때가 있고, 사람들의 아첨과 시샘일 때가 있었다. 또 어떤 때는 젊고 예쁜 여자의 유혹이, 또는 사치스러운 커프스 단추가 그 중요한 일을 성취시켜 주기도 했다.
-163p
일상 속에 폭력은 그 날의 기억도 담장 너머로 보내버린다. 담장을 넘어가는 도마뱀. 도마뱀처럼 집 밖으로 넘어가고 싶은 패트릭. 도마뱀은 더이상 보이지 않고, 내 고통도 그와 함께 사라져버렸다는 믿음. 마치 어느 날과 똑같이 내 머리칼을 잡아당기던 폭력처럼 일상에 스며들듯 새겨진 고통.
날 상처내고 아무렇지 않게 다시 자신의 자리로 내려가 고상한 부유층의 이야기를 나누는 아버지. 날 찾아왔지만 날 결코 안아주지 않는 엄마. 다섯살의 어린 아이는 그렇게 상처받고 자신의 성을 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