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지음 / 동녘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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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네 번째 묶음은 총 12명의 철학자 중 묶여지지 않는 나머지이면서, 각각 철학의 새로운 장을 펼친 태두 혹은 거두 3인이시다. : 정신분석학의 프로이트, 현상학의 후설, 해석학의 가다머.

 

 

 

인간 역사의 3대 굴욕 혹은 세 번의 혁명은 프로이트의 잘 알려진 이야기다. 첫 번째가 ‘코페르니쿠스의 천체 혁명’이다. 우주의 중심에서 주변부로 쫓겨난 인간의 범우주적굴욕. 두 번째는 ‘다윈의 진화론’이다. 인간은 신이 특별히 만든 창조물이 아니라 진화의 산물일 뿐. 세 번째는 프로이트 자신이 주창자인 ‘무의식의 혁명’ 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주인조차 아니다? 내 마음 나도 몰라 되시겠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바로 이 무의식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프로이트 편 저자는 ‘이드, 에고, 수퍼에고’ 로 이루어진 정신기구, 욕망과 충동, 꿈 등에 관해 다루고 있다. 이 중 무의식의 작동법칙을 드러내주는 꿈에 대해 조금 정리해 놓겠다.

 

꿈은 크게 꿈의 내용과 꿈 사고로 나뉜다. 우리가 꿈에서 본 꿈이 꿈의 내용이며, 이 꿈이 의미하는 바를 꿈 사고라고 한다. 꿈의 내용과 사고가 분리되는 이유는 의식의 검열 때문이다. 수배자가 검색대를 통과하기 위해 변장을 하듯이 무의식 역시 의식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꿈을 기괴하고 비논리적인 모습으로 바꾸어버린다. 이 과정을 꿈 작업이라고 하는데, 전치와 압축이라는 두 가지 방법이 이용된다. “꿈 작업은 압축과 전치를 통해 잠재된 꿈 사고를 드러난 꿈 내용으로 바꾸는 작업이고, 꿈의 해석은 드러난 꿈 내용 속에서 잠재된 꿈 사고를 찾아나가는 작업입니다. p64” 여기서 꿈의 해석은 물론 우리가 심심풀이로 하는 해몽과는 다르다. 그런데 왜 무의식은 의식의 검열을 피해야 하는 걸까? 무의식은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욕망이나 충동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꿈은 결국 숨겨진 무의식적 욕망의 표현이다. 무의식의 욕망은 꿈뿐만 아니라 농담, 말실수, 실착행위 그리고 증상을 통해 드러나기도 한다. 라캉은 ‘증상은 곧 사람’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겪고 있는 증상은 숨겨진 나의 본질과 무의식을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증상을 덮어놓고 부벙해서는안되고 증상을 통해서 본질, 숨겨져 있는 욕망을 그대로 찾아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p73”

 

 

 

서양 철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것저것 읽어본지가 10년 가까이 되어 가는데, 가장 개념이 잡히지 않는 것 중 하나가 ‘현상학’ 이다. 몇 년 전 현상학이 뭔지 도대체 아리송하던 차에 우연히 도서관에서 『현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발견했다. 그러나 ‘바로 이거야’ 라는 흥분도 잠깐, 곧바로 좌절하고 말았다. 이해가 불가능한 내용이었다. 그 책의 목차에 등장한 철학자가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였으니, 이들의 철학이 현상학과 관련이 있구만 하는 확인이 성과라면 성과였을 뿐이다.

 

그래서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후설편이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 대중 강연이니 어쩌면 쉽고도 똑 부러진 설명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하트라는 교수를 인용해 후설의 현상학은 ‘수많은 거봉을 품고 있는 웅장한 산맥’ 이라고 표현한다. 알프스산맥이나 에베레스트 정도 된다는 말일 테니, 동네 뒷산도 헉헉거리는 처지에 덤비는 것은 언감생심이 분명하다. 저자 역시 짧은 지면으로 약수터 산책객들을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이끌 중뿔난 방법은 없을 것이다. 성마른 기대가 민망했으나, 어떻게 약수터라도...

 

후설이 현상학을 창시하게 된 배경은 20세기 들어와 실증주의가 발호하면서 철학에 위기가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후설이 보는 실증주의는 실증 과학이 모든 학문의 토대가 된다고 주장하는 그릇된 철학이다. 여기서 실증주의는 실증 과학과는 다르다. 실증 과학은 과학이고 실증주의는 철학인데, 후설이 비판하는 것은 철학으로서의 실증주의이다. 실증주의는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인식되지 않는 다양한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현상학은 뇌 과학과 같은 의식에 대한 자연과학적 연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뇌 과학 역시 현상학의 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상학은 뇌 과학이 의식을 연구할 수 있는 유일한 학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후설의 ‘현상학적 심리학’ 과 ‘초월론적 현상학’ 은 내적 지각의 능력을 토대로 의식의 신비를 해명하려는, 의식에 관한 현상학이다. 내용 설명은 어차피 수박겉핥기가 될 것이 다분하기 때문에 생략한다.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마지막 주자는 가다머다. ‘해석학을 존재론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20세기 철학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철학자’ 로 소개되어 있다. 그래서 가다머를 ‘존재론적 해석자’ 라고 부르는데, 그가 추구했던 것은 ‘사람이 어떤 존재냐는 문제’ 다. 여하튼 꼴이 일단 해석학부터 알아야 할 것 같은데, 해석학이라고 검색하면 먼저 미적분에서 발전한 수학분야라는 설명부터 나온다. 그리고 역사, 성서 등등에 ‘해석학’이 붙어 줄줄이 뜬다. ‘해석의 이론과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 이라는 동어반복 같은 사전적 의미를 보니, 해석할만한 분야에는 다 해석학이 있을 듯하다. 그런데 영미 분석철학이니 뭐 그런 것은 들어봤어도 해석 철학은 조금 생소하다. 분석과 해석은 사촌지간 아닌가? 숙질간인가? 다행히(?) 그저께 『처음 읽는 영미 현대철학』이 배달되었으니, 조만간 분석철학에 대해서는 조금이나마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혈통 비교는 그 때 가서 해보고, 일단은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가다머 편의 저자 설명을 조금만 덧붙여 놓는다.

 

가다머는 나치의 출현으로 무엇보다, 과학기술문명이 우리 삶을 어떻게 오도하는지에 대해 깊이 파고들었다. 거의 모든 현대철학자들처럼 가다머 역시 그 원인을 데카르트 이래 절대화된 ‘도구적 이성’에서 찾아낸다. 현대철학 시리즈를 보면 데카르트는 만악의 근원처럼 보인다. 신으로부터 인간을 독립시킨 프로메테우스적 영웅이 악마의 화신으로 추락한 셈이다. 오! 데카르트... 그러나 현대는 여전히 ‘modern' 이기도 하다. 여하튼 가다머는 나치 독일의 현실을, ‘자신을 절대화함으로 자신 외의 모든 것을 대상화와 배제, 차별하는’ 도구적 이성의 오만함 때문으로 규정한다.

 

가다머는 도구적 이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긴 성찰 끝에 고대 희랍에서 근대의 이성과는 다른, 삶의 현실성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유의 전체성을 만나게 된다. 그 결과 근대의 이성과 다른 새로운 이성 개념으로서의 ‘이해’를 제안한다. “가다머가 말하는 이해는 무엇을 파악하기 위한 수단이나 방법이 아니라 마주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로 융합하면서 나를 있게 하는 전체성의 지평을 가리킵니다. 나와 이해를 분리할 수 없는 하나 안에서 파악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우리는 달리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이해를 달리함으로 존재도 달리한다는 것이지요. p294” 이성과 이해의 차이는 우리가 흔히 쓰는 일상어의 뉘앙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는 너를 이해해’ 는 ‘나는 너를 이성적으로 다 파악했어.’ 와는 다르다. 가다머의 말이 이런 뜻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읽다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여하튼 이해는 곧 존재라는 의미에서 가다머를 ‘존재론적 해석학자’ 라고 부른다. 가다머는 이해는 곧 적용이자 해석이라고도 한다. ‘이해는 언제나 이미 적용이며, 적용은 또 해석’ 이다. 이해와 적용과 해석은 앎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생성해 나오는 삶의 일이다. 이것이 가다머 철학의 특징이다. 이러 가다머에 대해 과거로 회귀하고, 주관주의에 빠지고, 무비판적이고, 자기이해 중심이라는 비판이 있다고 한다. 저자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세요? 라고 묻고 있지만, 알 리가 있겠는가, 다만 저자의 권유대로 가다머의 대표작 『진리와 방법』을 정독해 본다면 어렴풋이나마 판단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문제는 그러자면 가다머의 비판자들의 책도 다 읽어보아야 한다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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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아카데미 지음 / 동녘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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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세 번째 묶음은 프랑크푸르트학파로, 1세대 아도르노, 2세대 하버마스, 3세대 호네트 이다. 호네트편 저자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개요와 각 세대별 패러다임의 전환에 대해 잘 요약해 놓고 있어 먼저 인용한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1930년대부터 독일 프랑크푸르트 소재 사회연구소에서 호르크하이머를 중심으로 공동 연구를 추진했던 일단의 연구자들을 지칭한다. 철학 주도의 학제 간 공동연구를 통해 현존 사회를 비판하고 대안적 사회를 모색한 이들의 이론은 흔히 ‘비판이론’ 이라 불린다. 그러나 이들이 어떤 단일한 사회비판 모델이나 대안적 사회상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세대와 시대에 따라 그들의 비판이론도 변화해 왔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1세대는 『계몽의 변증법』을 공동 집필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로 대표된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초기에 맑스주의를 표방했으나, 나치 치하의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이들의 패러다임도 전환을 겪었다. 미국 독점 자본주의의 비인간성과 전체주의로 변질된 스탈린체제, 그리고 나치의 가공할 폭력 앞에서 그들은 인류의 문화 과정 자체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했다. 『계몽의 변증법』은 그 결과물이다. 인류의 역사는 계몽의 역사이며, 계몽의 과정은 현대사회에 이르러 정점에 이르렀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끝은 ‘새로운 야만’ 으로 귀결되었다. 인간의 이성이 신을 대신하며, 자연을 지배하고 조작했지만, 근대사회는 결국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물질중심 사회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계몽주의자로서, 계몽의 미완이 야만을 불러왔다고 판단했다.

 

푸랑크푸르트학파의 2세대로는 단연 하버마스가 유명하다. 하버마스는 우리가 보기에 대단히 상식적이다. 그의 <의사소통 행위 이론> 은 쉽게 말하면 소통만 잘 되면 된다는 정도로 보인다. 근대의 합리성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도구적 합리성과 의사소통 합리성이다. 그런데 도구적 합리성이 점점 우세한 힘을 가지며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파괴해 버리면서, 현대 물질문명의 문제를 야기했다. 그러므로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활성화된다면 『계몽의 변증법』이 문제 제기한 야만성은 극복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3세대 대표주자는 호네트이다. 호네트의 이론은 ‘인정’과 ‘무시’라는 일상적 언어로 전개된다. 인간은 인정을 받음으로써 아무런 훼손 없이 자아실현에 이를 수 있으며, 인정의 반대는 무시이다. 인간은 사회구성원으로써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끝없이 ‘인정투쟁’을 벌인다.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아도르노편은 그러나 프랑크푸르트학파나 『계몽의 변증법』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다. 다만 칸트와 헤겔의 비판적 사유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 을 소개하고 있다. 아도르노는 이론의 실천과정에서 피할 수 없이 발생하는 폭력의 문제에 깊이 고민하며 예술에 집중했다. 예술은 사회적 폭력을 흡수하는 상징체계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론과 실천을 엄격히 구별한 그의 태도는 현실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실천을 원했던 학생들과 충돌했다.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하버마스편은 의사소통행위이론과 생활세계 식민화에 대해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버마스 철학의 핵심개념은 이성적 ‘대화’라고 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대화 속에서 갈등을 넘어선 공존과 화해의 가능성을 모색해 왔다.

 

하버마스는 인간의 행위 유형을 ‘도구적 행위’, ‘전략적 행위’, ‘의사소통 행위’ 로 구별한다. 『계몽의 변증법』은 문명화 과정 전체를 인간의 자연 지배, 타자 지배, 자기 지배 등의 도구적 행위 과정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인간에게는 타자를 도구화하지 않고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의사소통 행위의 가능성이 존재함을 보았다. 의사소통행위는 사회적 행위자들이 상호 이해를 목적으로 서로의 행위 계획을 조정하는 데에서 성립한다.

 

하버마스는 또한 생활세계와 체계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모든 사회는 그것의 존속을 위해 물질적 차원과 상징적 차원에서의 재생산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지요. 하버마스는 상징적 차원의 재생산을 생활세계에, 물질적 차원의 재생산을 체계에 할당합니다. 상징적 차원의 통합과 재생산, 물질적 차원의 통합과 재생산이 각각 생활세계와 체계라는 개념을 통해 포착됩니다.p317” 그런데 자본주의체제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회 진화는 체계의 명령이 생활세계에 침투하는 ‘생활세계 식민화’를 야기한다. 다시 말해 화폐나 권력 같은 물적 차원이 생활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이런 병리적 현상을 해소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활성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고 토의민주주의를 주장한다. 토의민주주의는 시민사회의 공론을 기초로 입법 행위를 함으로써 국민주권의 이념을 실현하고, 체계의 생활세계 식민화를 제어하려는 기획이다. 그러나 하버마스가 생활세계 식민화 테제를 도출하던 1980년대는 복지국가의 틀이 유지되고 있던 때인데 반해,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하버마스의 이론이 얼마나 적절한 시대진단인가에 대해서는 검토가 필요하다.

 

하버마스의 이론은 우리 일반인의 상식과 딱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무리 소통을 외쳐도 불통만 심해지고 있는 이 시대에 과연 소통이론이라는 것이 현실성이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인간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인가?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호네트편은 그의 ‘인정이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정과 무시라는 그의 개념은 우리가 쓰는 일반적인 뜻과 비슷하다. 여기서 인정은 현존성, 동등성, 독특성에 대한 인정이 기본이 된다. 첫째는 무시 즉 안 보이는 사람 취급이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존재를 인정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권리의 동등성을 인정하는 것, 셋째는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등 개별적 독특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타인의 존재를 인정할 때, 구성원 개개인의 자아실현이 보장되는 사회가 가능하다. 호네트는 인정과 긍정적 자기의식과의 관계를 세 가지 유형을 들어 설명한다. 사랑은 자신감을, 권리의 부여는 자존심을, 사회적 연대는 자부심을 가져다준다. 한 사회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사회적 배려, 권리 부여, 사회적 연대 등의 사회적 인정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느냐에 따라 사회의 건강성이 결정된다. 인정이 아니라 무시가 횡행하는 사회는 병리적 사회이며, 이런 사회일수록 구성원의 인정투쟁이 격화될 수밖에 없다. 사회의 도덕적 진보는 인정투쟁을 통해 사회적 인정의 대상과 내용이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론은 매우 상식적이고 평이해 보인다. 우리가 합리적 이성을 믿을 수 있는 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론은 매우 현실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사회가 흘러가는 모양을 보면, 인간에게 과연 소통이라는 것이, 상호인정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당장 우리나라의 동서로 갈라진 지역차별과 적대부터가 소통의 불가능성을 입증하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진정 합리적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상호 인정과 소통이 가능하다면, 세월호 참사라는 명백한 하나의 사건을 두고도 이렇게 대립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보면 비단 이 빈관적 상황은 우리민족만의 비합리성 때문인 것 같지도 않다. 의자와 소파까지 가져다 놓고 가자지구에 떨어지는 백리탄을 관람하며 맥주를 즐긴다는 이스라엘 국민들을 보라. 스데롯 시네마! 저것이 합리적 이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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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지음 / 동녘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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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두 번째 묶음은 나치와 철학자들 : 니체, 하이데거, 아렌트, 벤야민 이다. 물론 내 마음대로 묶음일 뿐, 저자들은 나치에 관해 별 말을 하지 않는다. 작은 지면으로 핵심만 소개하기도 바쁜 터에, 민감한 곁가지까지 건드릴 여유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냥 호기심으로 묶어보았다. 서양 철학을 읽다보면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는데, 유난히 유대인 철학자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유대인은 전 세계 인구 70억 명 중 1300~1400만 명 정도다. 대략 1/500 의 비율인데, 이 책에만 해도 마르크스, 프로이트, 후설, 룩셈부르크, 벤야민, 아도르노, 아렌트 까지 7명이나 되니 놀랍다. 유대인이 각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이 많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사상적 흐름을 주도하는 철학계의 거장들을 보면 늘 의문이 든다. 이런 인물들을 배출한 민족임에도, 어떻게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그렇게 야만적일 수 있는지. 이천년 전의, 신화인지 뭔지도 모를 말씀 하나를 근거로, 이천년을 살아온 민족을 몰아내고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는지. 나치와 지금의 이스라엘이 근본적으로 동일함을 그들이 어떻게 모를 수 있는지. 이 책을 보다 문득 생각이 나서, 나치와 유대인과 철학을 엮어 보았다.

 

 

 

니체는 나치와 직접적으로는 연관이 없다. 히틀러가 그의 이미지를 나치의 ‘초인’ 이론에서 따왔다고 해서 자동 연상되는 불운을 겪고 있다. 최근에 출간된 『히틀러의 철학자들』에는 칸트, 헤겔, 포이어바흐, 피히테 등이 줄줄이 히틀러에 의해 엮인 모양이고, 그 중에서도 니체는 히틀러에게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철학자로 선정된 모양이다. 니체의 의도와 상관이 있든 없든 여하튼 히틀러가 니체의 사상에서 뭔가 영감을 받은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니체 편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힘에의 의지’를 읽으며 뭐 그럴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수박겉핥기식의 개론과 주마간산 식 독서가 합작한 폐해겠지만, ‘힘에의 의지’ 라는 말 자체가 풍기는 뉘앙스만으로도 히틀러가 좋아했겠다 싶다.

 

나는 오랫동안 ‘힘에의 의지’ 라는 말을 오해했다. 우리말 ‘힘에의 의지’는 뭔가 힘에 의지하고 싶어 하는 수동적인 느낌을 준다. 그런데 ‘힘에의 의지’ 란 힘을 향한 의지, 힘을 갖고 싶어 하는 의지라는 편이 맞을 것이다. 이럴 때 ‘의지’ 란 마치 어떤 실체처럼 느껴지지만, 저자에 의하면 번개와 같은 것이다. ‘번개가 치다’에서, 문장 구조상으로는 번개라는 실체가 있고, '치다'는 번개의 행위로 보이지만, 실제로 번개는 칠 때만 존재하지, 가만히 있는 번개가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번개의 존재는 곧 번개의 생성이다. 의지란 곧 힘에의 추구이다. “니체에게 이 세계는 다수의 힘에의 의지들의 거대한 관계의 네트워크입니다. 힘에의 의지는 주지하다시피 ‘항상 힘 상승과 강화와 지배를 추구하는 의지작용’입니다. 지배와 더 많은 힘 그리고 더 강해짐에 대한 추구는 의지들에 내재하는 본성입니다. 즉 모든 의지는 힘의 상승과 강화 및 지배를 추구하지요. 그래서 힘에의 의지는 다른 의지들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립하는 제3의 의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의지들은 그것이 의지인 한에서 힘 상승을 추구하며, 그래서 모든 의지를 힘에의 의지라는 명칭으로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는 이런 힘에의 의지들이 구성해내는 관계-세계인 것이고요. p84” 그다지 쉬운 설명은 아닌데, 힘에의 의지는 실체적 행위자가 아니라는 것과 관계적 운동이기 때문에 독립적인 힘이 아니라는 것이다. 니체의 세계는 모든 힘들이 동시에 각축하는 관계-세계이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개인은 세계 전체와의 동시적 상호작용에 의해 공동으로 구성되는 개인이고, 세계도 공동으로 구성되는 세계입니다. 이것은 개인과 세계에 대한 근대적 모델로부터 완전한 전회를 이루는 새로운 모델이지요. 근대적 개인은 일종의 원자적-실체적 개인입니다. 즉 원자적인 ‘나’의 존립이 먼저 전제되고, 타인과의 관계 맺음은 그 후의 일이며, 그 관계의 유무에 무관하게 ‘나’는 ‘나’로서 존립합니다. 근대적 사유는 바로 이런 개인관을 토대로 개인과 공동체와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하지만 니체의 관계론은 이런 원자적-실체적 모델 자체를 폐기합니다. p100” 관계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에만 가능한 것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니체 철학의 본질은 복수성이다. 니체는 위대한 사건들을 믿은 것이 아니라 사건의 복수적 의미를 믿었다.

 

10여 년 전 나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다. 뭐라고 말했는지 지금은 다 잊어버렸고, 그때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려웠다. 그 때 니체를 읽은 이유는 순전히 들뢰즈 때문이다. 이진경이 일으킨 들뢰즈 바람이 우리나라에 한창 불던 시절이다. 소련 몰락 후의 좌파 철학의 대표주자로 우리나라에 소개되었고, ‘생성, 탈주, 유목, 되기, 기계’ 따위 개념이 덕분에 유행했다. 들뢰즈는 니체를 덮쳐서, 자신의 아이를 낳았다. 들뢰즈는 철학적 비역질로 유명하다. “나는 어떤 작가의 등에 달라붙어서 그의 애를 만들어낸다고 상상했지. 그것은 그의 아이가 될 것이고, 흉물스러울 것이었지. 그것이 그의 아이라는 사실이 아주 중요해. 실제로 그 작가는 내가 시키는 대로 말을 해야 했으니까. <신체 없는 기관>” 니체도 들뢰즈의 여러 상대들 중 하나이다.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은 그렇게 탄생한 아이일 것이다. 여하튼 10여 년 전 쯤, 니체는 들뢰즈의 파트너로 우리에게 왔던 것 같다.

 

 

 

벤야민은 나치 때문에 희생된 비극적인 철학자이다. 유대인인 벤야민은 1940년 망명 도중 스페인 국경마을에서 자살했다. 프랑스로 귀환되어 나치에게 인계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자살로 몰아갔다. 그런데 2000년대 초 어느 매체에, 벤야민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의 스파이들에게 살해당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나치가 아니라 스탈린이 그를 살해해야 했던 이유는 그의 「역사철학 테제」때문이란 것이다. 벤야민이 프랑스에서 스페인 국경을 넘을 때 품안에 「테제」의 초고를 품고 있었는데, 이를 알고 있었던 스탈린이 어떻게 해서든 이 테제에 근거한 새로운 책의 간행을 막으려고 그를 죽였다. 나는 이 웃긴 이야기를 지젝의 『시차적 관점』 서주에서 읽었는데, 지젝은 스탈린이 설혹 「테제」를 읽었다 하더라도 그의 관점에서는 「테제」의 진정한 차원을 간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며 일축했다. 「역사철학 테제」는, 그 불가능한 소문을 퍼뜨린 매체에, ‘마르크스주의의 실패에 대한 짧지만 충격적인 분석’ 으로 소개되어 있다.

 

여러 책들에서 벤야민이란 이름을 보게 되면서 나도 벤야민을 읽어보려 한 적이 몇 번 있다. 그런데 번번이 실패했다. 명성만큼 혹은 인용된 문구만큼 그렇게 매력적인 벤야민을 찾기가 어려웠다.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출간되었을 당시, 그 무시무시한 두께에 놀라며 책을 펼쳤는데, 두께도 두께려니와 왜 이런 내용을 이렇게 시시콜콜 묘사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워 바로 덮었다. 다음으로는 그 유명한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였는데, 여기서도 별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인터넷 검색을 통해 전문을 읽게 된 「역사철학 테제」는 정말 훌륭했다. 체스 두는 자동인형과 난장이의 비유로 시작하는 제 1 테제를 비롯해 클레의 천사 그림으로 진보를 설명하는 제 9 테제 등 우리가 어디선가 보았던 유명한 문장들의 출처가 바로 이 「테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벤야민 편은 이런 것들을 다루지는 않는다. 매체철학과 도시공간에 관한 논문들을 쓴 저자는 거두절미하고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을 파고든다. 아우라는 원래 ‘신비한 기운’ 이라는 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나, 벤야민이 예술과 관련해 사용하면서 매우 논쟁적인 철학 개념이 되었다고 한다.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한마디로 ‘아우라의 몰락’ 이라고 규정했다. 저자는 아우라가 무엇인지, 왜 벤야민이 몰락을 말했는지, 그리고 현대 문화예술에서 몰락했다던 아우라가 어떻게 재아우라화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예술 쪽에는 완전 문외한이라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아우라는 아우라지 뭐.

 

 

 

나치와 철학자를 말할 때 가장 문제적인 인물은 아마도 하이데거일 것이다. 하이데거는 변명의 여지없이 나치에 가담한 철학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를 무시하고 현대철학을 말할 수는 없다. 하이데거주의자들은 이런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의 나치 가담은 잠깐 동안의 실수에 불과할 뿐이며 그의 철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로 박사학위를 받고, 그의 주요 이론서에는 어김없이 하이데거를 등장시키는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은 하이데거의 ‘위대함’은 나치에 참여했음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때문이라는 것, 그 참여가 하이데거의 ‘위대함’을 구성하는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는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에서 이 문제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하이데거는 나치에 의해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으로 임명된 뒤 나치당원이 되지만, 10개월 만에 총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나치즘’이 인종-기술주의적인 니힐리즘에 의해 배반당했다고 비판했을 뿐, 그 내적 위대함에 대해서는 여전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1930년대 내내 하이데거는 일관되게 이 배반당한 ‘내적 위대함’, 나치 운동의 세계사적 잠재성을 구원하고자 노력했다. 지젝은 하이데거의 오류를 나치의 오류와 동일한, ‘비겁함’ 에 있었다고 본다. “나치의 ‘용기’는 그들 사회의 핵심 특질인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공격하지 않은 비겁함에 의해 지탱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히틀러의 폭력은 가장 끔찍한 순간에서조차 여전히 ‘존재적’인 것으로, 나치 운동이 부르주아적 공동 존재의 근본 좌표와 대결-의문시-해체하는 실제적인 ‘비장소’가 되지 못한 무능을 폭로하는 무력한 행위로의 이행이었다. 그렇다면 하이데거 자신의 나치 참여 역시 일종의 행위로의 이행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자기 안에서 발견한 이론적 곤경을 해소하지 못한 무능을 증명하는 파괴적인 분출이 아니었을까?”

 

나치즘은 민족(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자본주의의 무능과 병폐에 반대하여 조직된 일종의 사회주의 정당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르주아 자본주의 체제를 공격하지 못하고, 독일인민의 분노가 유대인을 향하도록 돌려놓음으로써, 오히려 부르주아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도록 복무했을 뿐이다. 지젝은 이것을 비겁함이라 부른다. 하이데거가 지지했던 나치즘은 비겁했던 현실의 나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시킬 내적 위대함을 지닌 나치였다. 그러나 지젝은 하이데거 역시 자신의 이론적 곤경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했던 바로 그 비겁함 때문에 나치에 가담하게 되었다고 해석한다. 물론 지젝은 그 ‘이론’에 대해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지만, 하이데거의 이론이란 것은 정말 이해하기 쉽지 않다. 오죽했으면 그의 『존재와 시간』을 두고 독일 사람들도 독일어가 맞는지 의심스러워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하이데거 관련 글을 읽다보면 존재, 존재자, 존재적, 존재론적 같은 ‘존’ 자 돌림 단어들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그러니 여기서 하이데거가 처한 이론적 곤경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그런데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하이데거 편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이데거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저자의 말대로 쉽고 분명한 편이다. 그래서 밋밋하다. 이런 정도면 왜 하이데거를 우회해서는 현대철학을 말하기 어려운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실 『How to read 하이데거』라는 입문서를 읽고 놀란 적이 있다. 하이데거에 대한 악명 때문에 잔뜩 긴장했는데, 의외로 너무 술술 읽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이데거에 대한 내 생각은 쉽게 접근하면 그 어떤 사상 보다 쉽고, 구체적으로 파고들면 무슨 말인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어렵다로 정리되어 있다. 어려운 것이 좋은 것은 아닌데, 어려움 속에는 쉬움 속에 없는 독특한 무엇이 있다. 읽기의 즐거움은 사실 그 독특함을 발견하는 것은 아닐까? 하이데거의 ‘존~’ 시리즈는 그렇게 밋밋한 개념은 아닌 듯싶다.

 

 

 

유대인인 한나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제자이자 연인이었다. 18살에 당시 30대 중반이었던 하이데거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현대 철학계의 거의 유일한 여성 철학자인 아렌트와 하이데거의 사랑은 나이차, 불륜관계, 그리고 무엇보다 나치와 유대인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나치의 박해가 심해지자 아렌트는 미국으로 망명하는데, 돈도 없고 영어도 잘 하지 못했던 아렌트는 5년 동안 가사 도우미 일을 했다고 한다. 아렌트를 대중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사건은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의 재판이었다. 1960년 아렌트는 미국 <뉴요커>란 잡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에서 직접 이 재판을 지켜본 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을 썼다. ‘악의 평범성’ 이란 말로 유명해 진 이 책에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악마도 괴물도 아닌 평범하고 성실한 생활인임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그렇다면 유대인을 대량 학살한 그 악마적 행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렌트의 결론은 악의 평범성이란 사유의 부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그저 명령에 충실하게 따랐을 뿐, 그 명령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전혀 사유하지 못했던 것이다.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아렌트편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묻는 능력과 직결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묻지 못했던 아이히만의 모습. 이 모습은 오늘날 열심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악은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p277”

 

저자는 첫 부분에서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잠시 언급하는데, 아렌트에 대한 비난에 비약이 있음을 지적한다. 아렌트의 활동적 삶, vita activa는 정치적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병철이 말하는 과잉활동hyperactivity 와는 다르다.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노동labour ,작업work, 행위act로 나눈다. 노동이란 농사, 가사 같이 생존과 직결되는 일이며, 작업은 집, 옷 등을 만드는 일에 해당한다. 행위란 희랍세계의 폴리스에서 행해지던 활동과 같은 공적인 행위이다. 폴리스시민들은 폴리스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을 정치적인 것으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폴리스에서 사는 동물’이다가 ‘정치적 동물’ 이다로 번역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폴리스적인 삶에 대비되는 것이 사적인 삶, 오이코노미아(oikonomia)다. economy 의 어원인 오이코노미아는 가정경영,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희랍시대에 먹고사는 일은 가정에서 해결해야 할 사적인 영역이었다. 아렌트의 노동과 작업은 오이코노미아에, 행위는 정치적 삶에 해당된다. 이런 분류를 통해 아렌트는 사라져 가는 정치 영역의 회복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렌트 사상의 핵심을 두 가지만 짚자면 정치의 회복과 깊은 사유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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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지음 / 동녘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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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첫 번째 묶음은 혁명의 대명사 마르크스와 로자 룩셈부르크 이다.

 

 

사실 이런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을 정도의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마르크스는 어떤 식으로든 익숙한 이름이다. 조금씩은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겨우 이십여 쪽에 저자가 마르크스의 무엇을 담아낼 지가 나는 더 궁금했다. 본격적인 사상을 담기에는 지면이 너무 짧고, 대강 훑기에는 너무 잘 알려진 터라 저자의 고심이 컸을 것 같았다. 저자의 선택은 곧바로 19세기로 날아가는 것이다. 19세기는 흔히 부르주아의 시대라 불릴 만큼 자본주의가 급성장한 시기다. 이 시기를 살아가면서 마르크스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고, 어떤 이야기를 했으며,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집중하겠다고 저자는 밝힌다. 그의 삶을 통해 사상을 따라가는 방식이다. 그 과정에 마르크스의 핵심개념들이 짤막하게 소개되고 있는데, 여기서 요약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나만 기록해 두자면,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자신의 고유한 업적이 있다면 그것은, 노동이 가치의 원천임을 밝힌 데 있는 것도 아니고, 사회가 계급으로 분화되어 있고 계급투쟁이 역사를 추동한다는 것을 밝힌 데 있는 것도 아니며, 오직 이 투쟁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향해 나아가는 경향이 있음을 밝힌 데 있다” 고 했다는 것이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자면 의심스럽지만, 왜냐하면 대부분의 좌파철학자들도 역사적 유물론은 폐기한 것 같으니 말이다, 어쨌든 마르크스가 집중한 것은 이 발전의 ‘경향’ 이라고 한다. 사실 노동가치설 하면 우리는 대뜸 마르크스를 떠올리지만, 노동가치설이야말로 자유주의 부르주아 사상가들의 경제학이라고 한다. 홉스에 이은 로크가 사적 소유권의 근거로 내세운 것도 노동가치설이다. 원래 주인이 없는 자연물, 즉 하느님이 만드신 땅을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까닭은 그 땅에 나의 노동력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식민지 팽창시절 아메리카 대륙에 간 백인들이 먼저 달려가서 깃발을 꽂으면 자기 땅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깃발을 꽂고, 울타리를 세운 ‘노동’ 이 사적 소유권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었다.

 

식민지 말이 나왔으니 곧바로 연상되는 것이 식민지 전쟁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바로 극에 달한 식민지 쟁탈 전쟁이었는데, 마르크스는 자본의 잉여가치를 최종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식민지 전쟁은 필연적임을 역설했다. 자본은 생산과정에서 발생한 잉여가치를 유통과정에서 실현해야 한다. 상품은 생산이 아니라 소비를 통해서 최종 가치가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임금으로는 이 잉여가치 분을 모두 구매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은 잉여가치의 실현을 위해 부단히 비자본주의적 시장을 자본주의적 시장으로 포섭해야 한다는 강제에 직면합니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근대에는 국경의 끊임없는 확장을 통한 시장 확대의 경향으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에 식민주의 전쟁의 필연성이 있지요. 식민주의 전쟁은 원주민들을 그들이 속한 자연 환경에서 폭력적으로 분리시키는 시초축적 전쟁의 확장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시장 확대를 둘러싼 자본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을 수반하고요. 이것이 제국주의 전쟁의 기초가 됩니다. p33~4” 스페인이 처음 남아메리카를 점령했을 때만 해도 수탈은 주로 식민지의 자원에 집중되었다. 식민지에 혈안이 된 이유가 은광이나 금광 따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더욱 절실해 진 것은 생산한 상품을 판매할 자본주의적 시장이었다. 단순히 가정해서, 노동자는 TV 1대 값의 임금을 받고, 적어도 TV 두 대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남는 한 대의 TV는 누가 구매할 수 있는가? 노동자에게는 두 대를 살 수 있는 구매력이 없다. 이 남는 TV 즉 잉여가치는 다른 곳에서 판매되어 한다. 식민지는 그렇게 해서 잉여가치를 실현할 자본주의 시장으로 재편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른바 ‘근대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뉴 라이트를 비롯해 떠들썩하게 우리를 웃겼던 문창극 같은 사람들이 찬양하는 일제 강점기 근대화론이라는 것이, 우리나라도 자본주의 시장으로 편입되어, 제국의 상품을 살 수 있는 소비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물론 우리는 약삭빠르게 살아남아 이제 우리의 잉여가치를 실현해 줄 제3국으로 진출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도 거대자본의 이익일 뿐이다. 여하튼 서구 자본주의국가들은 자본주의의 법칙 상 제국주의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고, 전 세계를 재빠르게 자본주의 시장 경제로 바꾸어 놓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식민지는 철저히 수탈당하고, 제국주의 국가의 노동자들에게도 수탈의 콩고물이 배분되었다. 마르크스가 1848년,『공산당 선언』에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지만, 콩고물에 현혹된 제국의 노동자들과 좌파들조차도 제국주의 전쟁을 찬성하며, 프롤레타리아의 형제애를 배반해 버렸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한 독일 사회민주당 소속 의원 2명 중 한 명이다. 둘 다 전쟁이 끝난 후 살해당했다. 로자가 유명해 진 것은 ‘로자 대 베른슈타인 논쟁’, 즉 수정주의 논쟁 때문이다. “수정주의 이론을 대표한 사람이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이고요. 로자와 베른슈타인 논쟁의 핵심은 자본주의가 붕괴될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였지요... 수정주의자들이 정통 맑스주의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자본주의가 계속된다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가 위기를 극복하는 ‘적응 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p141”

 

베른슈타인의 근거는 마르크스의 예언과는 달리 영국과 독일 같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위기를 겪으면서도 붕괴되지 않고 살아남았고, 이들 국가의 노동자들이 조금씩이나마 살기가 좋아졌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주의가 수정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 자본주의 국가들이 살아남은 이유는 마르크스 편에서 살펴보았듯이 식민지 수탈이다. 수정주의자들은 식민지 전쟁을 찬성했다. 수정주의의 물적 토대가 바로 제국주의이기 때문이다. 당시 제 2 인터내셔널에는 네 가지 커다란 논쟁이 있었는데, 수정주의 논쟁, 제국주의 논쟁, 총파업 혹은 대중파업 논쟁 그리고 반전 논쟁이다. 여기서 수정주의 논쟁은 식민지 논쟁과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다.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그 틀 안에서 선진국 상층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보장받으려 했던 수정주의자들에 맞서 제국주의라는 틀로 자본주의를 새롭게 이해해야 하고 자본주의 붕괴의 필연성은 변함이 없다고 주장한 이들이 바로 로자와 레닌이었습니다. 당시에 이들은 스스로를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 라고 불렀지요. p142”

 

수정주의자들은 자본가 계급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여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의 가장 전형적인 논리는 우리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의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입을 통해 듣는 것과 똑같다. 후진적이고 야만적인 지역을 문명화하기 위해 식민지를 지배한다는 것으로, 그들이 말하는 문명은 기독교, 근대 계몽주의,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다. 수정주의자들은 자국의 상층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해 식민지 민중을 배반했다. “이것이 수정주의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결정적 차이이자 20세기 내내 서유럽 사민주의와 나머지 지역의 사회주의를 갈라놓은 지점입니다.p147” 한마디로 수정주의자들의, 자본주의는 붕괴하지 않고 노동자들의 실질 이익도 증가했다는 주장은, 식민지 민중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과 착취에 눈감은 결과이다. 로자는 이런 수정주의 노선에 반대하며, 자본주의의 붕괴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려 노력했다.

 

로자는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의 붕괴를 어떻게 확신했을까? “로자는 혁명의 객관적 조건으로서의 자본주의의 붕괴는 경제적 붕괴로 나타나지 않고, 정치적 충돌을 통해 나타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세계적인 규모의 전쟁의 형태로 말입니다. 그녀가 판단하기에 지구상에는 이미 비자본주의 영역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선진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해 전 세계가 거의 분할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따라서 제국주의 국가들 중에서 후발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의 확대재생산을 위해서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이 지배하는 식민지를 재분할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당시 제국주의 국가들 앞에 남은 역사적 과정은 식민지를 재분할하기 위한 충돌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세계적인 규모의 제국주의 전쟁이 닥칠 것이라고 로자가 판단한 이유입니다. 불행히도 그렇게 됐고요p147~8”

 

그러나 자본주의는 붕괴하지 않았다. 그러면 로자는 폐기되어야 하는 것일까? 마르크스와 함께 말이다. 아마도 보는 사람들의 관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여전히 거대한 괴물로 성장 중이고, 소련의 공산주의는 채 한 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붕괴했다. 이것으로 역사는 종결된 것일까? 이미 철 지난 유행으로 취급되지만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이 이루어진 것일까? 자본주의가 변신을 거듭하며 위기 속에 살아남았듯, 자본주의에 대항한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역시 단지 어떤 과정 속의 침체기를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다음 시대의 역사가 그 답을 말해 줄지도 모르겠다.

 

로자의 유명한 책 『사회 개량이냐 혁명이냐』에 대해 한마디만 덧붙이겠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비판한 책인데, 언뜻 보기에는 베른슈타인이 개량을, 로자가 혁명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이분법은 베른슈타인이 만든 것이고, 로자는 이 문제 설정 자체가 잘못되어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혁명이냐 개량이냐는 찬 소시지냐 뜨거운 소시지냐를 고르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혁명과 개량은 같은 범주의 것이 아니라, 혁명이 상위의 개념이다. 혁명으로 가는 길에 개량적 전술도 있고, 무장봉기의 전술도 있다. 민주주의를 부르주아식 의회민주주의의 동의어로 보면 의회민주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운동은 테러가 되어 버린다. 로자는 의회민주주의가 충분히 민주적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근본적인 민주주의를 추구했다. 로자에게 그것은 파리 코뮨이나 소련의 소비에트와 같은 민중의 기구인 ‘평의회’ 였다. 그러므로 로자를 폭력적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며, 2001년 베를린 시의 ‘로자 기념조형물’을 반대한 우파의 주장은, 80년 전 수정주의자들의 그것과 닮았다. 로자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와는 다르지만, 더욱 본질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하려 한 혁명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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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지음 / 동녘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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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가 직업인 지인들은 이런 책을 읽지 말라고 했다. 개설서나 입문서 백번 읽느니 철학자가 직접 쓴 책 한권을 읽는 것이 진짜 공부라고 말이다. 어려워도 그렇게 해야 제대로 된 시작이란다. 그런데도 나는 이런 책들이 보이면 눈이 반짝 거린다. 옳은 말하는 지인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있다. 그들이 이삼십년 전에 훌륭하신 교수님들로부터 배워 익힌 그 기초라는 것이 이과 출신인 내게는 전혀 없다는 것을. 칸트가, 헤겔이 어떤 맥락 속에 있는지, 현상학이 무언지 해석학이 무언지 관념론이 무언지, 심지어는 형이상학과 철학이 어떻게 다른지도 모른다. 내게 『순수 이성 비판』은 ABC만 겨우 익히고 셰익스피어 원서를 집어 드는 것과 같다. 뭐 사전 들고 햄릿을 읽지 못하란 법은 없다. 영화 <더 리더>에는 문맹인 한나가 감옥에서 녹음된 책을 들으며 글자를 익히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나는 자유인 아닌가. 일반 시민의 철학적 교양을 위해 특별히 쉽게 만든 이런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눈앞의 밥상을 걷어차는 것과 같이 미련한 일일 것이다.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은 철학 아카데미의 ‘처음 읽는 철학’ 시리즈 두 번째 권이다. 첫 번째는 프랑스 현대철학이었다. 작년에 읽었는데, 꽤 재미있었다. 현대철학하면 보통 포스트모더니즘을 떠올리고, 포스트모던하면 아무래도 프랑스 철학이다. 모두 포스트모던 철학자는 아니지만 하여튼 샤르트르, 알튀세르, 라캉, 푸코, 데리다, 들뢰즈, 바디우 등등 짱짱한 철학자들이 출연한다. 이 시리즈의 특징은 먼저 철학아카데미에서 강의한 내용을 묶었다는 것이고, 저자들은 각각의 철학자들을 전공한 학자들이다. 한 사람이 현대 프랑스 철학을 죽 개괄한 것이 아니라, 각각의 개별 강의를 모아 놓은 것이라 현대철학사라고 보기에는 통일성이 없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전공자들이라 각 철학자들의 핵심 개념을 잘 짚어주고 있다. 전체 철학사의 맥락 속에 개별 철학자들의 위치를 알고 싶었던 나는 살짝 아쉬웠지만, 그만하면 나쁘지는 않았다.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은 프랑스 편 보다는 대체로 쉬웠다. 프랑스 사람들 보다 독일 사람들이 생각과 말을 더 똑 부러지게 하는 편인지, 저자들이 더 쉽게 강의를 풀어냈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독일이 주는 그 딱딱한 느낌 때문에 더 어렵고 지루하리라 예상했는데, 의외였다. 프랑스 편은 12명의 철학자 모두가 20세기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1901년 라캉부터 대부분 20세기 초반에 태어나, 20세기의 사상을 이끌었던 인물들이다. 그래서 현대철학하면 20세기부터 쳐주는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독일편에는 19세기 출생자가 반이 넘는다. 그것도 1818년에 태어난 마르크스는 아예 19세기의 사상가이고, 니체 1844년, 프로이트 1856년, 후설 1859년, 로자 룩셈부르크 1871년, 하이데거 1889년, 벤야민 1892년생이다.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기준이 뭔지 다시 한번 궁금해진다. 잘 모르지만 아마도 데카르트를 시작으로 하는 주체중심, 이성중심의 근대 관념론 철학이 헤겔에게서 완성된 이후, 이 관념론 철학에 대항하는 새로운 사상들을 현대철학으로 분류한 것이 아닐까 싶다. 마르크스의 유물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후설의 현상학 등이 그런 사상들로,『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앞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 아닐까, 혼자 생각했다.

 

 

‘처음 읽는 철학’ 시리즈의 목차는 거의 생년을 기준으로 순서가 정해진다. 그러다 보면 맥락상으로는 좀 왔다 갔다 한다. 예를 들어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세 명 나오는데 떨어져 있어, 죽 연결해서 읽는 것 보다는 산만하다. 리뷰를 하나하나 써 볼까 하다가 작년 여름에 프랑스편을 쓸 때, 고생한 것이 기억나 포기했다. 덥기도 했거니와 사실 스무 여 쪽 정도의 분량에 한 철학자의 사상을 압축해 놓은 것을 다시 줄여 리뷰하는 것이 무리기 때문이다. 내가 잘 아는 철학도 아니고, 생판 처음 읽는 철학자도 많은데, 이 짧은 글을 읽고 내가 알면 무엇을 얼마나 알았다 할 수 있겠나. 여하튼 그래서, 12명의 철학자들을 곰곰이 들여다 보다 몇 개의 묶음을 지어보았다. 일관된 기준은 아니고 그냥 쉽게 연상되고 연관되는 대로 묶은 것이다.

 

먼저 마르크스와 로자 룩셈부르크. 둘 다 꽤 알려진 인물이라 쓸 것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혁명가로 묶어 놓았다. 그 다음, 이 책은 ‘독일’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연관되는 철학자들이 있다. 니체, 하이데거, 벤야민, 아렌트. 이들을 묶는 연관어는 ‘나치’ 다. 하이데거는 나치에 직접 가담한 전력으로 유명한 철학자이고,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제자이자 연인이었지만, 유태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태인 철학자다. 나치와 유태인이라는 비극적 한 쌍. 벤야민 역시 유태인으로 나치를 피해 망명하던 도중 자살한 비운의 사상가이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 라는 그 유명한 사상 때문에 나치의 이론적 근거로 은근히 이용당했다는 소문이 있다. 그 다음으로는 현대 독일철학의 대표주자인 프랑크푸르트학파 3인방이다. 1세대의 아도르노, 2세대의 하버마스, 3세대 호네트가 해당 되신다. 마지막으로 딱히 철학적 공통점은 없지만, 새로운 사상의 대표로서의 공통점을 가진다고 할 수 있는 3인의 철학자가 있다. 정신분석의 아버지 프로이트,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 현대 해석학하면 떠오르는 인물 가다머 이다. 현상학과 해석학, 제일 개념이 안 잡히는 까다로운 철학이지만, 뭐 어쨌든 이 책의 내용을 한번 따라가 볼 생각이다. 이제 틈틈이 가능하면 짧게, 그러나 네 묶음이나 되어버린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본격적인 리뷰를 마음먹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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