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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드로스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4
플라톤 지음, 김주일 옮김 / 이제이북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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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12년에 선물 받은 책이었다. 고맙게도 증정 사인도 있었다. 하지만 『파이드로스』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고, 플라톤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4년이 지나고 이제야 읽었다. 얼마 전에 『향연』을 읽었고, 내용도 내용이지만 소크라테스의 까칠한 말솜씨가 매우 흥미로워, 잊고 있었던 『파이드로스』를 기억해 냈다. 『향연』을 읽게 된 것은 작년 말부터 읽기 시작한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덕분이다.

 

한국사와 세계사를 함께 한 스터디 팀과 기어이 철학 공부를 시작했다.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많았고 여전히 많지만, 다행히 이번 주로 5회인데 손들고 나간 분은 별로 없다. 모두들 머리를 쥐어뜯으며 글자만 읽고 온다고 고개를 흔들지만 또 스터디 시간에는 눈을 반짝이며 집중들을 한다. 처음 계획보다 진도는 훨씬 느리다. 한 주에 20쪽 정도 밖에 못한다. 강유원 선생님의 <2012 서양 철학사> 강의 파일을 얻게 되어 엄청 도움이 된다. 우리 교재는 강유원 선생님의 교재와는 다르지만 수록된 철학자와 순서는 거의 비슷한 것 같다. 진행을 맡은 나는 『철학 고전 강의』와 『세계 철학사』도 참고 한다. 그러다보니 여기 저기 주워 읽고 들은 것이 보태져서 교재에 있는 것보다 많은 말을 하게 된다. 우리 교재에 맞추어 미리 정리를 하는데, 이 작업도 만만치가 않다. 토요일을 꼬박 투자하고 나면 머리에서 말 그대로 쥐가 나는 것 같아, 이 나이에 왜 이 짓을 하고 있나 하면서도, 좋다. 다만 혼자 되는대로 이 책 저 책 읽은 경험만 가지고, 철학사 스터디를 진행해도 되는지 수시로 되물어보게 된다. 책에서 읽은 것만, 강의에서 들은 것만 말하자고 다짐해도 내 머릿속에 들어온 것들은 내 이해력 안에서 재조합되고 윤색되기 마련이다. 부디 내 독해가 심각한 오독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파이드로스』는 약간 충격적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물론 당대 희랍세계가 아니라 우리에게 그렇다. 소년 애인과 그를 사랑하는 혹은 그와 육체적 관계를 원하는 어른 남자에 관한 대화이기 때문이다. 희랍세계에서 이런 관계는 매우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이기도 한 모양이다. 『파이드로스』의 주제는 소피스트애 대한 비판인 것 같은데 철학사에 인용된 대목은 영혼에 관한 부분이다. 플라톤 편을 공부하면 ‘형상 상기설’이라는 것이 나온다. 영혼이 육신으로 추락하기 전에 이데아를 보았고, 그때 본 이데아를 우리가 갈망한다는 것이다. 이데아의 그림자인 사물은 우리에게 이데아 즉 형상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앎은 우리 바깥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상기하는 것이다. 사물들은 그저 우리가 그것들을 폐기하고 우리의 사유를 이데아들로 고양하게끔 하는 자극일 뿐이다. p92,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그렇다면 영혼은 어떻게 이데아를 볼 수 있었던 것일까? 『파이드로스』에 아주 자세한 설명이 있다. 믿기진 않지만 플라톤 철학과 관련하여 읽으면 매우 흥미롭기도 하다. 길지만 주요 부분을 옮겨 놓겠다. 아, 참, 플라톤의 대화편은 말 그대로 대화 형식이라 이것이 철학인가 싶을 정도인데 그냥 이야기책처럼 읽어도 재미있다. 다 그런지는 모르지만 향연이 그렇고 파이드로스가 그렇다. 몇 년 전에 읽은 국가도 분량이 많고 이름값이 무거워서 마음먹기가 힘들지 읽기는 어렵지 않았다. 『파이드로스』를 선물했던 지인에게 이제야 감사 인사를 한다.

 

 

 

1. 246a ~ 246e

 

혼이 본래 한 멍에에 매인 날개 달린 말들과 마부가 합체된 능력을 닮았다고 해 보자고. 그런데 신들의 말들과 마부들은 모두가 그 자체로도 훌륭하며 태생도 훌륭한 반면, 다른 쪽들의 경우엔 섞여 있지. 그러니까 첫째로 우리 쪽의 다스리는 자는 한 쌍의 말을 몰며, 둘째로 말들 중 한쪽은 아름답고 훌륭하며 태생도 그런 반면, 다른 쪽은 그 반대고 태생도 반대지. 그러니 우리 경우에 전차 몰기는 어쩔 수 없이 어렵고, 애먹이는 것일 수밖에 없지. 자, 그럼 어떻게 해서 살아 있는 것이 사멸한다고도 불리고 불사한다고도 불리게 되었는지를 말해 봐야지. 모든 혼은 혼이 없는 것 전부를 돌보고 천계 전체를 순례하지. 그때그때 다른 모습을 하고서 말이지. 그리하여 혼이 완전하고 날개가 나 있으면, 드높은 하늘을 가르며 우주 전체를 관장하지만, 깃털이 빠진 혼은 쓸려 다니다가 단단한 뭔가를 붙잡아 거기에 정착하여 흙으로 된 몸을 취하고, 몸은 혼의 능력 덕에 자신이 자신을 움직이는 것처럼 여겨져, 혼과 몸이 달라붙은 전체가 살아 있는 것이라 불리며, 사멸하는 것이란 명칭을 얻었지. 반면에 불사한다는 것은 논증이 된 그 어떤 이야기에도 토대를 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신을 보지도 못했고 충분히 깨닫지도 않았으면서, 한편으로는 혼을 갖고 다른 한편으로는 육체를 갖고 있으면서 본래 이것들을 영원히 합체시킨 불사하는 것이자 살아 있는 것이라고 신을 형상화하지. 그렇지만 그런 것들이야 그 사실이 어떻든 신의 마음에 들어야 하고, 또 신의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이야기되어야 하겠지. 반면에 깃털들이 혼에서 떨어져 나가게 하는, 깃털들의 상실의 원인은 우리가 파악해 보자고. 그건 다음과 같은 어떤 것이야.

 

본래 날개의 힘은 무거운 것을 공중으로 올려 신들의 종족이 사는 곳으로 이끌어 올리는 것으로, 어떻게 보면 육체와 관련되는 것들 중에서는 신적인 것에, 즉 아름답고 지혜롭고 훌륭하며, 그 밖의 모든 그러한 신적인 것에 가장 크게 관여하지. 바로 이것들에 의해서 혼의 깃털이 가장 많이 양육되고 자라며, 그것들과 반대되는 추하거나 나쁜 것 등에 의해서는 쇠퇴하고 소멸하지.

 

 

2. 247b ~ 248e

 

그렇기는 하지만 잔치와 만찬을 위해 갈 때면, 천계를 떠받치는 맨 꼭대기 궁륭으로 가파르게 나아가는데, 거기서 신들이 타는 것들은 고분고분해서 균형을 잡고 쉽게 나아가지만, 다른 자들이 타는 것들은 겨우겨우 나아가지. 나쁜 본성에 참여하는 말은 몸이 무거워 땅으로 쳐지면서 마부들 중 말을 제대로 기르지 못한 마부를 힘겹게 하거든. 바로 거기서 극도의 고난과 다툼이 혼 앞에 놓이지. 사실 우리가 불사자라 부르는 혼들은 꼭대기에 이를 때면, 밖으로 나아가 천계의 등마루에 서게 되는 한편, 회전운동은 서 있는 그들을 돌리고, 그들은 천계 밖의 것들을 관조하지.

 

하지만 천계 바깥 자리를 이제껏 이 세상의 어떤 시인도 노래한 적이 없었고, 언젠가 그에 걸맞게 노래할 날도 없을 거야. 하지만 그곳은 이렇지. -최소한 참된 것만큼은 우리가 과감히 말해야 하고 우리가 진리를 주제로 삼아서 말할진대, 특히 그러해야 하니까- 색깔도 형체도 없으며 만져지지도 않는, 있는 것답게 있는 실재가, 즉 혼의 키잡이인 지성에만 관조되고, 참된 앎의 부류가 관계하는 실재가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그리하여 순수한 지성과 앎에 의해 양육되는 신의 생각, 그리고 자신에게 적합한 양식을 섭취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는 모든 혼의 생각은 때가 돌아오면 회전운동이 빙 둘러 제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시간 간격을 두고 실재를 보고 반기며, 참된 것을 관조하여 양식을 얻고 즐거워하지. 그 궤도에서 그것은 정의 자체를 목격하고, 절제를 목격하며, 앎을 목격하지. 그런데 그 앎은 생성이 곁들여지지 않은 앎이요, 오늘날 우리가 있는 것들이라 부르는 것들 중 어떤 다른 것과 관련될 때마다 달라지는 앎이 아니라, 있는 것답게 있는 실재인 것에 관계하는 앎이지. 있는 것답게 있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같은 식으로 관조하고 잔치를 즐기고서, 그것은 다시 천계의 안으로 들어가 집으로 돌아갔지. 그것이 돌아오면, 마부는 구유에 말들을 세우고 신찬을 먹이로 주고 더해서 신주를 주어 마시게 했지.

 

이것이 신들의 삶이야. 한편 다른 혼들의 경우, 가장 훌륭하게 신을 따르고 닮은 혼은 바깥 자리로 마부의 머리를 들어 올리고 회전운동을 신과 함께 돌지만, 말들로 인해 소란을 겪어 실재들을 어렵사리 목격하는 한편, 말들에 휘둘려서 어떤 것들은 보았고 어떤 것들은 보지 못했지. 그런 한편 또 다른 혼들은 모두 윗 세상에 집념하여 따르지만 능력이 없어서 표면 아래에서 함께 도는데, 서로를 밟고 깔아 뭉개 가며, 서로 앞서 있으려 하지. 그리하여 극도의 소란과 힘겨루기와 진땀나는 일이 벌어지는데, 바로 이 와중에 마부의 무능함 때문에 많은 혼들이 불구가 되는가 하면, 또 많은 혼들이 날개를 많이 다치지. 하지만 그 모든 혼은 많은 고난을 겪고도 실재의 관조에 입교하지 못한 채 떠나고, 떠나서는 의견을 양식으로 삼지. 그런데 진리의 평원이 어디에 있는지 보고자 하는 대단한 열의의 이유는 혼의 최상의 부분에 제격인 여물이 거기 있는 목초지에서 나며, 혼을 들어 올리는 날개의 본성이 그것으로 양육되기 때문이지.

 

또한 아드라스테이아의 법칙은 다음과 같지. 신의 수행자가 되어 참된 것들 중 어떤 것을 목격한 혼은, 또 다른 주기 전까지 비탄에 빠지지 않을 것이며, 그 혼이 때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언제까지나 해를 입지 않으리라는 것이지. 반면에 따라갈 능력이 없어서 보질 못하고, 어떤 불운으로 말미암아 망각과 무능으로 가득 차 무거워지는가 하면, 무거워져 깃털이 빠지고 땅에 떨어질 때면, 그때 이 혼은 첫 출생부터 야생의 존재에 심기는 게 아니라, 가장 많이 본 혼은 장차 지혜를 사랑하거나 아름다움을 사랑하거나, 혹은 시가나 사랑을 따르게 될 사람의 싹에 심기며, 두 번째는 법치를 하는 왕이거나 전쟁을 잘하는 지휘관 같은 왕의 싹에, 세 번째는 정치에 맞거나 한 집안의 경영에 맞는 사람, 또는 사업에 맞는 사람의 싹에, 네 번째는 운동을 사랑하는 체육가거나 육체의 치료에 관여할 사람의 싹에 심길 것이고, 다섯 번째는 예언가의 삶이거나 입교의식을 따르는 어떤 삶을 가지리라는 것이 그 법칙이지. 여섯 번째 혼에게는 시를 따르는 삶이거나 모방에 관련된 사람들의 그 밖의 다른 삶이 어울릴 것이고, 일곱 번째 혼에게는 만들거나 농사를 짓는 삶이, 여덟 번째 혼에게는 소피스트거나 민중 선동가의 삶이, 아홉 번째 혼에게는 참주의 삶이 어울릴 것이라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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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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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제목만으로도 시선을 끄는 책이다. 남자들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여자들은 대개 “아, 진짜!!” 라고 할 것 같다.

 

이 책은 레베카 솔닛이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쓴 9편의 에세이(칼럼?)를 모아 놓은 책이다. 개개로 쓴 글들을 모아 엮은 책들이 대개 그렇듯 체계적이고 일관된 깊이를 느낄 수는 없다. 하지만 오랜 연구와 현장 활동을 바탕으로 그때그때의 이슈를 재빠르게 논제화하는 능력은 탁월해 보인다. 가장 흥미로웠던 글은 세 번째 글인 전 IMF 총재 스뜨로스깐의 성폭행을 분석한 것과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글인 여성발화와 여성 문제의 명명(命名)에 관한 것이었다.

 

 

IMF 총재가 뉴욕 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아프리카 출신 이민자 여직원을 성폭행했다는 놀라운 소식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2011년의 일이지만 욕실에서 벌거벗고 나온 어쩌고저쩌고 하던 말도 기억나고, 이후 같은 뉴욕에서 비슷한 차림으로 벌어졌던 전 청와대 대변인 윤창준 사건까지 겹쳐지면서 그 이미지는 더욱 오랫동안 남게 되었다. 이 사건이 다른 성폭행 사건보다 특히 문제시 되었던 것은(물론 성폭행은 모두 특별한 문제이다.) 당연히 스뜨로스깐이 IMF 총재였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보다 더 성폭행이 권력의 문제라는 것을 또렷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다. 솔닛은 이점을 분명히 포착하여 스뜨로스깐이 여성을 폭행한 방식이 IMF가 약소국을 유린한 방식에 다름 아님을 주장하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아프리카였다. 그의 이름은 IMF였다. 그는 그녀에게 올가미를 걸어 약탈당하게 했고, 보건 써비스를 폐지하게 했고, 굶주리게 했다. 자신의 친구들을 배불리기 위해서 그녀에게 쓰레기를 투척했다.p72”

 

“그러나 세계의 운명의 일부를 좌우하는 사람이 제 주변에 두려움과 괴로움과 불공정을 빚어내는 데 에너지를 쏟았다는 사실은 이 세상의 구조에 관해서, 그리고 그는 물론이거니와 그와 비슷한 다른 남자들의 행동을 용인한 여러 나라들과 단체들이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p74”

 

IMF의 구제금융이 얼마나 악랄한 ‘사채’인지 우리는 겪어서 잘 알고 있다.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는 고분고분 그의 말을 따라야 하는 줄 알고, 우리는 각자가 가진 돌 반지까지 팔아서 그에게 진 빚을 열심히 갚았고 그로부터 모범생이라는 칭찬도 들었다. 하지만 IMF는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그때부터 명예퇴직과 성과급과 무한경쟁과 승자독식과 비정규직과 그리고 .... 등등이 우리를 흙수저와 금수저로 갈라놓았다.

 

IMF의 중심국인 미국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2010년에 이렇게 말했다.

 

“1981년부터 우리가 방향을 재고하기 시작한 작년 무렵까지 미국은 다음과 같은 정책을 취했습니다. 우리처럼 식량을 많이 생산하는 부유한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들에 그걸 팔아서 그들이 스스로 식량을 생산하는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맙게도 그들이 산업화 시대로 곧장 건너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이런 정책은 통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칸소 주에 있는 일부 농부들에게는 좋았을지 몰라도, 우리 예상대로 되진 않았습니다. 그것은 실수였습니다. 저도 그 실수에 관여했습니다. 저는 지금 다른 누구를 겨냥하려는 게 아닙니다. 제가 그렇게 했습니다. 제가 저지른 실수 때문에 아이티가 자국민을 먹일 쌀 생산능력을 잃은 것에 대해서, 저는 남은 평생 책임을 느끼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p79~80”

 

‘아이티가 자국민을 먹일 쌀 생산능력을 잃은 것’ 이란 대목에서는 미국과의 자유무역으로 몰락한 아이티 농민들의 빈곤과 함께 1년 가까이 뇌사상태에 있다가 돌아가신 고 백남기 농민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경찰이 물대포를 살인무기처럼 쏘아댔던 그 시위는 반정부 시위가 아닌 농민들의 생존권 시위였다. 가해 종주국의 전 대통령마저 평생 자책하겠다고 나온 마당에(그것도 5년도 전에), 피해 당사자를 정부 전복세력마냥 무자비하게 진압한 것이 우리나라이다. 그것도 모자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인’과 ‘부검’을 둘러싼 싸움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

 

IMF총재는 약소국의 경제를 약탈하던 그 권력으로 약자 중의 약자인 이민자 출신 호텔 여직원을 마구 농락했다. 윤창중은 청와대란 권력으로 인턴 교포 여학생을 함부로 그러쥐었다.(그 유명한 'grab')

 

성차별이 논란이 될 때는 어김없이 권력관계가 개입된다. 최근 터져 나온 문단과 미술계 등 문화계의 성폭행과 성추행도 권력관계에 기반 해 있다. 스승과 제자, 심사위원과 신예 예술가들의 관계는 철저히 권력 구조아래 놓여 있다. 아무 권력도 없어 보이는 성 폭행범조차도 여성과의 관계에서는 스스로 우위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거절한 여성에게 분노를 폭발시키는 남성의 의식에는 자신은 여성을 선택할 권리가 있지만 상대 여성에게는 오로지 받아들일 의무만 있다는 그릇된 성의식이 있다. 남편이 아내를 폭행하는 경우는 말 할 것도 없다.

 

 

일곱 번째 글의 제목은 <악질들 사이의 카산드라>이다. 카산드라는 희랍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 왕의 딸로, 진실을 말하지만 아무도 그 예언을 믿어주지 않는 저주에 걸렸다. 오랜 세월 남성에게 여성의 발화는 기본적으로 카산드라의 예언에 다름 아니었다. 여성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여성에게는 공적으로 발언할 기회조차 없었다. 물론 현대 사회는 더 이상 법적으로 여성의 공적 발언을 금지할 수 없다. 이슬람 극단주의 종파를 제외하고는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성폭행과 관련해 볼 때 피해자 여성의 증언은 의심받고 폄훼되기 일쑤다.

 

“비밀과 침묵은 범인의 첫 번째 방어선이다. 비밀을 지키는데 실패하면, 범인은 피해자의 신뢰성을 공격한다. 그녀를 철저히 침묵시키는 데 실패하면,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듣지 않게끔 만들려고 애쓴다. (․․․) 모든 잔혹행위에는 우리가 뻔히 예상할 수 있는 똑같은 사과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느니, 피해자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느니, 피해자가 과장하는 것이라느니, 피해자가 자초한 일이라느니, 심지어 이제 그만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말도 나온다. 범인이 유력한 인물일수록 현실을 호명하고 정의하는 능력이 크기 마련이라, 그의 주장이 더 철저히 득세한다. P168~9”

 

어떤 남자 교수는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우리가 왜 한 여성의 말만 믿고서 조사에 나서야 합니까? P171”

 

성폭력 피해자가 신고 과정에서 2차 피해를 입고 신상을 털리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다시피하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 많은 성폭행 피해 여성들이 입을 다무는 것은 가해자에게 정당한 처벌을 하기보다는 피해 당사자에게 오히려 더 큰 폭력이 가해지는 사회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 때문이다.

 

8장 <#여자들은 다 겪는다.>는 여성혐오를 주제로 쓴 글이다. 2014년 한 남학생이 여러 학생들을 칼과 총으로 살해한 사건 이후 온라인에서 위 제목과 같은 해시태그 릴레이가 벌어졌다. 이른바 여성혐오 살인이었다. 직접적 살해의 대상은 아니라도 특히 온라인상에서 여성은 상시적으로 혐오대상이 된다.

 

여성혐오에 대해 과거와 달라진 점은 여성들이 직접 사건을 명명하고 집단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최근 강남역 화장실에서의 여성 살해사건도 마찬가지다. 이 사건은 명명의 싸움이기도 했다. ‘강남역 살인 사건’ 이라는 두루뭉술한 명명에 대해 여성들은 이 사건을 명백한 ‘여성혐오 살인‘으로 이름 붙였다. 범인은 범행 대상을 여성으로 정해 놓고 오랜 시간을 여성 피해자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이는 단순히 묻지마 살인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묻지마 살인 즉 여성혐오 살인이었다.

 

우리는 지금 사용하는 여성문제에 관한 호칭이 원래부터 있었거나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된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처음에는 여성문제를 지칭할 수 있는 이름마저 없었다. 명명되지 못한 여성문제는 당연히 논의될 수도 없었고 존재한다는 사실마저 인정되지 못했다. 단적으로 여성문제는 명명되기 이전에는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았다.

 

「 1963년에 베티 프리던은 기념비적 저서 『여성의 신비』를 출간했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이름 없는 그 문제 -즉 미국 여성들이 인간으로서의 능력을 온전히 계발하지 못하도록 저지당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 는 우리가 아는 다른 어떤 질병보다도 이 나라의 물리적, 정신적 건강에 훨씬 더 큰 해를 끼치고 있다.” 이후 그 문제에는 여러 이름이 붙었다. 처음에는 남성우월주의, 나중에는 성차별, 여성 혐오, 불평등, 억압이라는 이름이. 그 문제의 치료법은 ‘여성해방’ 혹은 ‘페미니즘’이었다. 지금은 이런 단어들이 닳고 닳은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에는 신선한 단어들이었다.

   프리던의 선언 이래 페미니즘은 부분적으로나마 현상을 호명하는 전략을 통해서 진전했다. 가령 ‘성희롱’이라는 용어는 1970년대에 처음 고안되었고, 80년대에 사법체계에서 쓰이기 시작했고, 1986년에 대법원으로부터 법적 지위를 인정받았으며, 1991년에 대법관으로 지명된 클래런스 토머스에 대한 상원 청문회에서 한때 그의 직원이었던 애니타 힐이 그의 성희롱을 증언함으로써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힌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당시 남자들로만 구성된 질문자들은 힐을 가르치려 들면서 괴롭혔고, 상원뿐 아니라 온 세상의 많은 남자들은 상사가 음란한 말을 던지고 성적 서비스를 요구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혹은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P185~6」

 

가정폭력, 데이트 강간, 강간문화, 성적 권리의식 같은 이름들은 최근에 와서야 붙여졌다. 가정폭력이라는 명명이 있기 전까지 가족 내에서의 구타는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범주의 집안문제일 따름이었다. 동일한 행위에 가정폭력이라는 이름이 붙고 나서야 그 행위는 비정상이 되었고 범죄가 되었다. 데이트 강간, 부부 강간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이, 사랑한다고 비춰지는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형태의 성행위는 두 사람 사이의 일일 따름이었다. 지금도 부부 강간은 성립 여부를 놓고 논쟁이 있는 것 같지만 말이다.

 

더 주목해야 할 호칭은 강간문화이다. 강간은 이제껏 정신에 문제가 있는 개인의 특수한 범죄로 취급되었다. 그런데 ‘강간문화’란 말이 만들어지자, 강간을 사회 전반적, 문화적 배경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강간의 예방책도 단순히 전자 발찌 같은 것이 아니라 문화 전반의 측면에서 수립해야 하는 것이다.

 

“강간문화란 강간이 만연한 환경, 미디어와 대중문화가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규범화하고 용인하는 환경을 말한다. 강간문화는 여성 혐오 언어의 사용,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는 시선, 성폭력을 미화하는 태도를 통해서 지속되며, 그럼으로써 여성의 권리와 안전을 경시하는 사회를 낳는다. 강간문화는 모든 여성에게 영향을 미친다. P191”

 

강간문화란 우리도 손쉽게 볼 수 있다. 막말로 유명한 개그맨 장동민의 ‘설치고 떠들고 생각하는 여자가 싫다’부터 ‘참을 수 없는 건 처녀가 아닌 여자’ 등등 인용하기도 싫은 말들이 버젓이 대중매체에서 우스갯거리로 방송되었다. 당시 SNS 상의 빗발치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과 몇 마디 외에 별다른 제제 없이 버젓이 여성혐오 발언과 사회적 약자 비하 발언을 이어갔다.

 

강간문화라는 명명은 이런 것들을 별 생각 없이 용인하는 우리 자신을 깜짝 놀라 뒤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나의 생각 없는 웃음이 강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끔찍하다. 여성의 뚱뚱한 몸매를 보면서 깔깔거리기 전에 강간문화란 말을 한번 떠올려 보면 어떨까. 지나친 생각이라고? 지나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자명한 것으로 규정 되었다. 가정폭력이 그랬고, 데이트 강간이 그랬다.

 

레베카 솔닛은 말한다. 우리의 언어는 우리의 무기라고. 명명은 문제해결의 출발이다. 여성문제 뿐만이 아니라 모든 문제가 그렇다. 문제가 문제로 인식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부를 이름을 가질 때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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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하우스
스티븐 J. 굴드 지음, 이명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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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제이 굴드의 『풀하우스』는 몇 년 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다. 처음,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다.” 라는 짧은 문구를 접했을 때 깜짝 놀랐다. 진화(進化)가 진보(進步)가 아니라면, 나아간다(進)는 말은 무슨 뜻일 수 있을까?

 

몇 권의 책을 통해 굴드라는 이름과 그의 진화론 해석에 대해 간간이 알게 되었는데, 이차적으로 알게 된 대개의 책에 대해 그렇듯이 ‘아, 읽어봐야 하는데...하는데...,’ 하고 몇 해를 넘겼다. 그러면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마치 직접 읽어본 것처럼 ‘진화란 그런 것이 아니야. 진보가 아니라고. 다윈 이론의 핵심은 변이와 다양성이지. 흥흥’하고 알은 체를 했다. 간접적인 앎을 이렇게 확신해서 말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모르는 것은 아닌데, 그럼에도 번번이 그러고 싶을 만큼 매혹적인 주장이었다. 사실 생물학계에서 굴드의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어쩌면 소수의견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풀하우스』의 논지는 내게 충분히 그럴듯하게 들렸다. 물론 과학이란 대중에게 설득력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제안한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나는 독자들이 다윈 혁명의 깊은 의미를 잘 이해함으로써, 다양한 개체들에 의해 이루어진 전체가 자연의 참모습임을 깨닫게 되기 바란다. 즉 이 책을 통해 여러분들이 <이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변이 그 자체>로 세계가 이루어져있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p13~4” 제목 풀하우스는 말 그대로 변이에 의해 다양해진 각종 개체들로 가득 찬 세계를 가리킨다.

 

먼저 다윈의 발견이 ‘다윈 혁명’ 이라 칭해질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다윈에게 ‘혁명’을 붙인 것은 굴드가 아니라 프로이트다. 프로이트는 과학의 역사에서 인간에게 굴욕을 안겨 준 세 가지 혁신을 꼽고 있다. 코페르니쿠스, 다윈, 그리고 프로이트 그 자신이다.

 

코페르니쿠스와 그 후계자들은 “지구가 변두리 항성에 딸린 작은 행성에 지나지 않음을 밝혀냄으로써 인간이 유한한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믿음을 붕괴시켰다. p33” 두 번째 타자 다윈은 하느님의 선택받은 창조물이라는 인간의 자부심을 한방에 박살내 버렸다. 인간은 그저 진화의 끄트머리에서 발생한, 한갓 동물의 후손일 따름이었다. 이제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은 그 어떤 동물도 가지지 못한 인간의 이성이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이성적 인간이라는 개념을 산산이 깨뜨렸다. 인간은 이성의 주인이 아니라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여기에 굴드는 네 번째의 혁명을 보탠다. 고생물학자들이 발견한 이른바 ‘깊은 시간’ 이다. “고생물학자들이 인류의 존재는 지구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등장했다는 사실을 밝혀내자 프로이트적 혁명이 일어났다.p34”

 

이 네 번째 혁명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 ‘변질된 다윈주의’ 이다. 다윈에 대한 오해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인류가 진화의 마지막 순간에 등장한 것에 아우라를 부여하는 시나리오가 쓰인 것이다.

 

“이 새로운 이야기는, 진화에는 예정된 결과를 향해 진행되는 근본적인 경향 또는 추진력이 있으며, 그 힘이 생명의 역사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최고의 결과(인간)를 낳았다는 오류를 기반으로 한다. 이때 근본적인 경향 또는 추진력이란 물론 진보를 뜻한다. 이 이야기는, 해부학적 복잡성, 신경의 정교함, 습성의 다양성과 유연성 등 호모 사피엔스를 생명 전체의 꼭대기에 올려놓기 위해 명백하게 날조된 온갖 기준으로 생명의 역사를 관찰하고, 생물이 틀림없이 어떤 증가 경향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생명의 역사를 진보로 정의하려는 것이다. p36”

 

굴드가 ‘명백하게 날조된’이라고 표현한 것은 사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과학적 사실들’ 이다. 단세포에서 다세포로, 하등 생물에서 고등 생물로 진화하는 그림들은 생물학의 기초 중의 기초이다. 굴드는 이것들을 모두 ‘거짓말’ 이라고 단언한다. “진화의 방향을 인간을 향해 예정된 진보p37” 로 만들기 위한 날조라는 것이다.

 

만약 진화를 진보로 해석하는 것이 순전히 날조라면 우리는 어떻게 ‘진화≒진보’ 라는 등식을 이토록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일까? 인간은 누가 보더라도 가장 진보된 생물이 아닌가?

 

이 책은 사실 초반 일부분만 재미있고 나머지 대부분은 지루하거나 어렵다. 진화생물학자인(물론 다른 세부전공으로도 불릴 수 있지만) 굴드는 일반인을 위해 이 책을 썼지만 기존 이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새로운 이론을 증명 없이 자기주장만으로 쓸 수는 없다. 그런데 과학적 증명이란 것이 일반인이 보기에는 너무 시시콜콜하기도 하고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다. 굴드가 하는 말이 맞는 말인 것 같지만 실제로 맞는지 틀렸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 그럼에도 과학적 증명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 아무리 어렵다 해도 저자든 독자든 피해갈 수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독자는 어물쩍 책장을 넘길 수도 있다. 그냥 저자를 믿기로 하고 결론만 읽어도 되긴 된다. 어차피 읽어도 모르고 안 읽어도 모르니까 결과는 같을 수도 있다. 나도 긴가민가하며 읽었다. 누군가 진화생물학의 권위자라고 하면서 굴드를 조목조목 반박한다면 또 그럴 수도 있겠네, 할 것이 틀림없다. 내가 이 책에 매력을 느낀 것은 그 결론 때문이지 과학적 증명이 훌륭해서는 아니다. 그러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그냥 훌륭한 논증이겠거니 하고 넘어가게 된다.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하는 이유는 이 책의 대부분이 이런 논증들인데, 이걸 콕 집어 정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충 말해보자면 이렇다.

 

굴드는 먼저 어떻게 우리가 진화를 진보라고 잘못 인식하게 되었는가를 ‘중심경향성’이라는 통계 값을 들어 설명하고 진보의 증거로 제시된 교과서적 자료들이 모두 편향된 자료에 지나지 않음을 입증한다. 그리고 야구를 좋아하는 미국인답게 4할 타자의 절멸에 대해 아주 길고 길게 분석하면서 진화의 ‘오른쪽 벽’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어서 더 중요한 ‘왼쪽 벽’ 개념을 설명하는데, 단순무식하게 말하면 이런 것이다. 생명체가 더 복잡한 구조를 가진 고등 생물로 진화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생명의 출현이 가장 단순한 구조인 왼쪽 벽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더 단순한 구조인 왼쪽 벽은 막혔으니 극히 일부라도 더 복잡한 구조인 오른쪽으로 나아간 종들이 생기고, 그것이 전체 생물이 복잡성을 향해 진화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생물은 더 복잡해 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박테리아이다. 굴드는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 박테리아가 지구의 주인이었고 지금도 주인이라고 힘주어 설명한다. 굴드가 말하는 ‘벽’이란 한계 값을 의미한다. (...... ㅡ.ㅡ;;)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어쨌든 결론을 말하자면 이것이다. “즉 변화의 역사를 <무엇인가>가 어디론가 움직여 가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풀하우스)에 걸쳐 일어나는 변이의 확장이나 위축으로 보아야 한다. p203”

 

뭐 이런 내용들을 갖가지 자료와 분석과 증거를 들이대며 주장한다. 그러니 이런 것은 나 같은 일반 독자가 요약할 내용은 아님이 틀림없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다윈이 진화를 진보로 보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하면 바로 진보를 떠올리지만 그건 다윈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

 

“다윈이 진보를 진화의 예정된 결과로 보기를 거부한 것은 그의 다른 과격한 생각들 중에서도 가장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라마르크를 비롯한 19세기 대부분의 진화론자들은 진보를 진화의 핵심으로 보는 훨씬 더 구미에 맞는 이론을 제시했다. 사실 빅토리아 시대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생물학적인 변화를 진보와 동일하게 보았기 때문에 <진화evolution>가 다윈이 말한 <변이를 동반한 상속 decent with modification>을 지칭하는 단어로, 우리의 언어에 정착된 것이다. 그리고 허버트 스펜서에 의해 정식 생물학 용어가 되면서 <진화>는 영어의 일상 용법에서 진보(단어 자체의 뜻은 펼침 unfolding)를 뜻하게 되었다. 다윈은 처음에는 이 단어 사용을 거부했다. 그의 이론은 특정한 변화의 결과 전반적인 발전이 이루어진다는 식의 개념을 전혀 내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진화>라는 단어는 『종의 기원』 초판에는 등장하지도 않는다. 다윈이 그 단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1871년에 발표한 『인류의 유래』에서였다. 다윈은 <진화>라는 단어를 결코 좋아한 적이 없으나 스펜서가 쓴 이 용어가 일반적으로 많이 통용되었기 때문에 마지못해 따랐을 뿐이다 p190”

 

다윈은 실제로 이런 메모를 남기기도 했다. “더 고등하거나 더 하등하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p190” 동료 학자에게 보낸 편지에도 이렇게 썼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진보를 향한 내재적인 경향 같은 것은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네. p191”

 

그렇다면 다윈이 『종의 기원』 에서 주장한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연선택 이론을 제안하면서 세 가지 사실을 입증하려고 했다.

 

첫째, 모든 생물은 생존할 수 있는 수보다 더 많은 자손을 생산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 자손들은 다 다르며 변하지 않는 원형에서 찍어낸 복제품이 아니다.

셋째, 이 변이들의 적어도 일부는 미래 세대에 전달된다. (다윈은 멘델의 유전법칙을 몰랐다.)

 

이로부터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자연선택의 원리가 유도된다.

 

“대부분의 자손들이 죽어야 한다면(모두가 제한된 자연 생태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그리고 모든 종의 개체들은 서로 다 다르므로 평균적으로(항상 그런 것이 아니고, 통계적으로 봐서) 생존자들은 국지적으로 변하는 환경에 우연히 가장 적합한 특성을 가진 개체들이다. 유전이 일어난다면 살아남은 개체들의 자손은 성공적이었던 부모를 닮을 것이다. 오랜 세월 이렇게 유리한 변이가 축적되면 진화적 변화가 일어난다. p192”

 

여기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국지적으로 변하는 환경에 우연히 가장 적합한 특성을 가진 개체’ 라는 구절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적자생존’의 적자, 즉 ‘적합한 자’는 타 개체와의 목숨을 건 투쟁에서 살아남은 승리자가 아니다. 다만 국지적으로 어떤 환경의 변화가 발생했을 때 그 변화에 ‘우연히’ 적합한 특성을 지니고 있었던 한낱 변종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적자란 그 전과는 달라진 환경에 딱 적합했던 운 좋은 개체이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언제 어떻게 변화할지 인간은 모두 다 예측할 수 없다. 갑자기 엄청난 운석이 우리나라를 강타할 수도 있고, 인간이 모르는 바이러스가 인간을 멸종시킬 수도 있다. 인간의 유전자가 수 백 만년을 털끝만큼의 변이도 없이 조상에게 물려받은 그대로만 전달되어 왔다면 현생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의 치명적인 환경 변화에도 글자 그대로 전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상 변이가 있었고, 대다수의 개체들과 다른 특성을 가진 개체들이 그런 변화된 환경에서 살아남았기에 인간은 지금까지 지구의 지배자연 할 수 있는 것이다. 굴드에 의하면 인간은 결코 이 행성의 지배자였던 적도 없고 현재도 아니고 미래에도 아닐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런척하며 살고 있다. 가끔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부리 색깔이나 꽁지의 모양 따위 사소한 차이를 가진 비슷비슷한 새들이 각기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면서, 쟤네들은 왜 저렇게 변종이 많아 싶지만, 그 변이야말로 지금껏 그들이 생존해 올 수 있었던 가장 큰 비밀이었던 것이다.

 

또 하나, 그냥 넘어가기 쉽지만 주목해 보아야 할 아주 중요한 단어는 ‘국지적’ 이란 말이다. “자연선택은 지역적인 적응을 강화시킬 뿐이다. 적응 양상은 더할 나위 없이 정교한 적응도 어디까지나 지역적이고 일반적인 진보나 복잡화 경향의 어느 단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p194”

 

예를 들어 코끼리와 매머드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매머드는 갑자기 추워진 북극권에서 살아남았던 털이 긴 코끼리의 후손이다. 어떤 코끼리들은 보통의 코끼리보다 털이 길었고 그 긴 털이 갑작스런 환경 변화에 아주 적합했다. 북극에서 보통의 코끼리는 멸종했지만 매머드는 살아남았다. 그렇다고 해서 적도에서 지금도 늠름하게 군림하는 코끼리가 매머드보다 열등한 것은 아니다. 코끼리가 진보하여 매머드가 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사실 한때 운 좋게 선택되었던 그 매머드는 지금 멸종 상태다.) “털이 난 매머드가 털 없는 코끼리보다 전우주적으로 더 낫거나 전반적으로 더 우월한 것은 아니다. 매머드의 <향상>은 전적으로 기후가 추워진 지역에 국한된 이야기이다. 자연선택은 눈앞에 있는 주변 환경에 대한 적응만을 낳을 수 있다. p193”

 

결론은 처음에 말했듯 ‘진화란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다’라는 것이다. 코끼리는 털이 없는 코끼리와 털이 있는 코끼리로 다양하게 진화했을 뿐 서로 우열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둘이 피터지게 싸워서 북극을 차지한 것이 매머드였던 것이 아니다.

 

 

이 책을 읽은 것은 느닷없이 생물학에 관심이 생겼기 때문은 아니다. 진화학자들이 진화를 뭐라고 정의하든 그것이 생물학계 내의 논쟁이라면 털끝만큼의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윈의 진화론은 초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무한 경쟁이나 승자독식을 당연시하는 주장의 강력한 근거로 이용되고 있다. ‘그 유명한 다윈의 진화론을 읽어봐! 약한 것들은 도태되고 강한 것들만 살아남는 것이 자연의 섭리야!!’ 다윈의 진화론이 사회진화론으로 슬며시 대체되는 것이다.

 

사회진화론의 대표자는 허버트 스펜서이다. 진화론은 다윈의 창작품이 아니다. 다윈 이 『종의 기원』을 발표하기 이전에 진화론이 슬슬 유행을 타기 시작했고, 이 생물학적 이론을 사회학에 접목시켜 폭발적 관심을 일으킨 사람은 스펜서이다. 다윈은 『종의 기원』 5판에 가서야 이 유행하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적자생존이라는 말도 스펜서가 창안해 낸 것이다. 하지만 스펜서 역시 다윈의 자연선택이론을 자신의 사회진화론을 정교히 다듬는 근거로 이용했다. 동시대에 살았던 다윈과 스펜서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은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과 스펜서의 진화론은 완전히 다르다. 어쩌면 서로 반대라고 할 수도 있다. 스펜서는 사회진화론으로 제국주의적 침략을 옹호하였다. 강한자만이 살아남는 것은 자연과 사회를 통틀어 일종의 섭리라는 논거를 내세웠다. 다윈은 적자생존을 그렇게 정의하지 않았다. 강한 자가 적자가 아니라 우연히 살아남은 자가 적자이다. 여기에는 개체간의 경쟁도 침략도 살육도 없다.

 

이것이 끝이면 문제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을 것이다. 스펜서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윈의 진화론을 오용했다고 밀어붙이면 그만이다. 식민지배의 수모를 겪은 민족으로 스펜서는 나쁜 놈으로 몰아붙이고, 다윈은 다양성으로 가득한 풀하우스를 지지했다고 하면 깔끔한 결론이 될 것이다. 그런데 굴드가 털어놓은 다윈의 이면은 스펜서만큼 어둡다.

 

19세기 후반은 이른바 제국주의 시대이다. 그 제국주의 시대를 이끌었던 것이 영국이고 다윈은 그 영국의 대지주 집안 출신이다. “게다가 다윈은, 진보를 존재의 근본 교의로 삼고 산업화와 식민지 확장에 열을 올리던 당시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이 제공하던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엄청난 성공을 구가하고 있는 국가에서 최고위급 귀족이 어떻게 영국 사회의 번영을 정당화시켜 주는 이론을 포기할 수 있었을까? 자연선택은 국지적인 적응을 가져다주지 일반적인 진보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지적 요구와 사회적 요구의 상반된 요구들을 어떻게 타협시켰을까? p195”

 

결론만 말하면 다윈은 그의 위대한 이론에 오점을 덧붙였다. ‘생태학적 이야기’ 몇 가지를 덧붙임으로써 적자생존과 생존경쟁을 구분했다. 자세한 내용은 어려우므로 생략하고, 대충 이런 땜빵으로 다윈은 지적 요구도 사회적 요구도 충족시키려 했지만 그 결과는 명백한 모순이었다. 이 모순 때문에 다윈 연구가들은 엄청난 노력을 낭비하고 폭발적인 논문을 발표해가며 서로 싸웠다. 다윈에 대한 오해는 다윈 자신이 초래한 면이 없지 않은 것이다. 다윈의 모순된 모습에 대해 굴드는 그 자체가 시대상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자기 이론의 논리와 사회의 요구 사이에서 결단을 못 내리고 씨름했던 다윈의 개인적인 고충은, 진보라는 것이 우리 문화에 얼마나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진보라는 족쇄를 풀 수 있는 이론을 만들어낸 다윈마저도 우리 문화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진보라는 가치관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었는데 오늘날 우리라고 별 다를 수 있을까? p201”

 

과학자가 아닌 맘 편한 일반인의 입장에서 보면 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은 것 같다. 다윈이 진짜 무엇을 말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보기에 다윈의 것 중 옳다고 생각되는 것을 지지하면 된다. 다윈은 완벽하지도 않았고 일관되지도 않았다. 과학자의 양심과 사회적 욕망 사이의 갈등에서 그가 타협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과학자의 양심만 선택하면 된다. 그의 과학이 오늘날의 과학에 위배되지 않고 그의 과학이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면 말이다. 그의 올바른 진화론을 가지고 오늘날 강요되고 있는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게임을 비판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굳이 다윈을 일관된 영웅으로 신격화할 이유는 없다. 그는 탐욕스러운 제국주의 시대에 영화를 누린 영국인인 동시에 그의 과학적 발견으로 시대의 논리에 구멍을 뚫은 혁명가이기도 하다. 왜 그럴 수 없다는 말인가? 그가 한 것이 바로 그것인데. 우리가 옹호하는 것은 인간 다윈이 아니라 다윈의 이론 그 자체다. 다시 한 번 말해보자면,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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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의 힘 - 지리는 어떻게 개인의 운명을, 세계사를,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가 지리의 힘 1
팀 마샬 지음, 김미선 옮김 / 사이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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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분류가 맞는지는 모르겠다.

현대사는 현재로부터 대략 30년 전까지이고, 그 후를 시사라고 한다는 것이.

들은 이야기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고등학교 교재를 보면 한국사든 세계사든 당대를 다루고 있지는 않다.

 

여름에 <세계사 능력 검정 시험> 이라는 것을 보았는데

마지막에 연속 4문제가 요즘 진행되고 있는 사건들에 관한 것이었다.

함께 공부한 지인들도 모두 당황했다.

EBSi 강의에도, 검정 시험의 공식 교재라는 책에도

이런 당대의 현안들은 없었으니까.

난사군도, 우크라이나 사태, IS, 브렉시트가 그것들인데,

뉴스에서 설핏 들은 것들로 대충 찍어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지리의 힘』은 독서회 회원의 추천으로 11월에 토론할 책이다.

우리 독서회는 올해 '전국 독서 동아리 활동 지원' 을 받고 있다.

연 100만원의 도서 구입비를 지원받는데,

서류작업 등 이것저것 회장님이 해야 할 일이 많지만

회원들은 공짜로 7~8권의 책을 받았다.

『지리의 힘』도 이렇게 내 손에 들어왔다.

 

이 책의 원제목은 『Prisoners of Geography』이다. 번역본의 제목과는 정반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여하튼 원제목이 이 책의 성격을 좀 더 분명하게 보여준다. 세계 주요 지역과 국가의 발전 혹은 분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지리적 여건이라는 전제 아래 이 책은 지금 우리 사회의 세계사적 현안을 정리해 주고 있다. 한마디로 지정학적 세계인식인데, 저자는 "지정학은 지리적 요인들을 통해 국제적 현안을 이해하는 방식" 이라고 말한다.

 

당연하게도 이 책은 분쟁 지역을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다. 세계사 교과서가 취급하지 않는 우리 시대의 현안들이라 이 책을 미리 읽었더라면 시험에 도움이 되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학생들이 읽어도 좋고 상식을 넓히고 싶은 어른들이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읽기도 수월한 편이다. 25년 이상 국제전문 저널리스트로 활동하셨다는 저자라 그 박학다식을 어렵지 않게 술술 풀어내는 재주도 가졌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10개 지역은 언뜻 보면 지구 전체를 망라한다. 중국, 미국, 서유럽, 러시아, 라틴아메리카, 인도, 아프리카에 더해 중동과 북극 그리고 한국과 일본까지. 하지만 이 지역들 중에서 지정학적 가치가 높고 그런 이유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곳들을 중심으로 압축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나는 10개 지역 가운데 맨 먼저 중동을 읽고 마지막에 한국과 일본을 읽었다. 사실 곳곳에서 년도가 틀리는 등, 내가 아는 기초적 사실에 조금 어긋나는 것들도 있었지만 실수겠지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관한 내용을 읽으며, 이 책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고작 15 페이지 정도의 분량에 단군까지 끌어오는 오지랖도 오지랖이지만, 어느 나라에나 흔히 있는 하늘의 자손이라는 민족적 신화를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에 대한 신격화의 근거라 설명하는 데에는 고개를 젓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다른 지역과 다른 민족에 대한 이런 식의 설명에는 아무 저항감도 이상함도 느끼지 못했듯이, 아무것도 모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다른 나라의 독자들도 이런 서술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사실’ 혹은 ‘사건’ 에 대해서만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한 것도 사실이고, 인도가 티베트 망명정부에 근거지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 두 나라는 히말라야산맥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고 있고, 두 나라 모두에게 티베트가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라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확인할 수 없는 해석, 특히 단군의 경우처럼 순전히 추정에 근거해 뭔가 이유를 설명하려는 시도 등에는 먼저 의심의 눈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아무리 작은 나라라도 한 나라의 역사는 더욱이 그 역사 속에 면면히 형성되어온 의식이라는 것은 이방의 칼럼니스트가 함부로 단언할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지리의 힘』은 책장에 꽂아둘 가치는 있다. 짤막한 뉴스나 기사로 잘 알 수 없는 사건들, 그 복잡하게 얽혀 있는 세계 각지의 다양한 사태들을 조금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세계사 시험이라도 불 것이 아니면 IS나 브렉시트가 무슨 상관이냐고? 상관있다. 당장 석유 값에도 주식 가격에도 실시간으로 영향을 미친다. 비록 주식 따위는 쳐다보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가 낸 국민연금이 주식을 하고 있으니, 내 미래가 어떻게 브렉시트와 상관이 없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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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고전 연속 강의 3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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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의 책으로 가장 기다리던 『철학 고전 강의』가 나왔다.

아무 정보도 없었지만 언젠가는 나올거라 생각했다.

철학자인데 인문고전과 역사고전만 강의하고,

정작 철학고전은 빼놓는다면 

마침표가 없어 결코 끝날 수 없는 문장이 되버릴 테니까.

 

체계없이 배운바도 없이

내키는대로 이 책 저 책, 철학책을 뒤적거린지 10년이다.

대개는 무슨말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읽었다.

그래도 신기한 것이 또 읽게하고 또 읽게하는

끌어당김이 있었다는 것인데

그것이 무언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강유원의 철학 강의를 손꼽아 기다린 것은

내가 읽은 그 책들이 대체 무슨 말인지를

조금이나마 어떤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때문이었다. 

(물론 이 책의 바탕이 된 40주짜리 서대문 구립 이진아 기념 도서관의 강의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면 무엇보다 좋았겠지만)

 

40주짜리 강의를 시간나는대로 틈틈이 일 주일 정도 걸쳐 읽었다.

열일을 제쳐두고 읽었더라면 이틀쯤이면 읽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만큼 술술 읽히기도 했고,

다루고 있는 주요 철학자가 다섯 뿐이어서

예상보다 가뿐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내가 이 내용을, 전부는 언감생심이고,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니다.

우선 한 번 읽어 봤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떤식으로 쓰여졌는지 너무 궁금해서 먼저 후루룩 읽어 보았다. 

이제 정신을 모으고 하나하나 짚어가며 다시 읽어야 한다.

정신을 바짝만 차리면

이제껏 내가 읽고도 맥을 짚지 못하고

단편 단편으로만 기억하고 고민하던 부분들을 조금은,

전체 그림 속에 위치지울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를 한다.

 

 

『철학 고전 강의』의 부제는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이다.

철학 중에서도 무한자에 대한 사유 즉 형이상학에 관한 강의이다. 

 

형이상학은 

"간단히 말하면 한정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탐구입니다. 인간은 스스로가 한정된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동시에 무한한 것을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유한한 인간은 무한을 생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무한에 대한 호기심과 요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이다.

무한에 대한 사유는

유한한 인간 자신에게는 불행한 의식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서든 죽어서든 무한에 이르기를 갈망한다. 

 

이 책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희랍 철학자들부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이

탐구했던 무한자에 대한 사유가

어떤 형태였는지를 

철학사의 흐름 속에서 설명하고 있다. 

 

다섯 명의 철학자들에 관해

가장 중요한 부분(내가 이것저것 읽은 것들에서 생각하는 수준이지만)

짚어주는 것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형이상학과 존재론이라는 주제에 대해

이들 다섯 명 각각이 이룬 성과와 남긴 과제를

각각 어떻게 이어받아

어떻게 무한자에 대한 사유를 발전시켜 왔는지를 

대략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 강의에서 강유원은 이렇게 말했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지만 항상 어버어버하면서 

상대는 알아듣지도 못하게 이야기하곤 했다.  

 

"형이상학은 역사의 도저한 흐름과는 아주 무관한 사유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본다면 시대의 첨예한 문제들이 형이상학 속에 스며들어 있으며, 형이상학적 사유 원리의 전환이 시대의 큰 변화에 작용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짐작을 확실한 앎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앞으로 더 많은 독서와 공부를 통해 이루어야 할 일일 것입니다."  

 

형이상학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철학 일반에 대한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형이상학이야말로 철학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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