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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12일 쓴 글입니다.

 

 

‘ 1박2일 동안 정성을 다하여 만든 손두부... ’

‘두부마을’은 내가 가끔 두부나 콩물을 사다 먹는 집이다. 주인 총각(?)은 3,000원짜리 두부 한모에도 거의 배꼽 인사를 하는 아주 예의바른 청년인데, 나도 덩달아 허리를 숙이면서도 그 눈매며 짧게 자른 머리가 범상치 않아 전직이 살짝 궁금해지게 만드는 청년이다. 어쨌든 일주일에 한 두 번은 드나드는 그 가게에서 저 광고가 눈에 보인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가게에서 직접 두부를 만들어 하루에 세 번 두부 나오는 시간을 정해 놓고 있는데, 내가 갈 때 마다 주인 총각은 두부 물을 젓고 있거나 콩을 씻고 있거나 커다란 솥을 닦고 있었다. 1박2일 동안이나 정성을 다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성실히 만드는 두부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특히 고소한 두부 맛을 보면 정말이지 그런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는다. ‘1박2일’은 몰라도 ‘정성을 다하여’는 아마도 수사(修辭)일 것이다. 사실 ‘정성을 다하여’란 말은 그 자체가 수사이외의 다른 의미를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어짜피 정성을 다했는지 안했는지를 판단할 기준이란 없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길을 지나다 우연히 저 문구를 보게 된 사람은 ‘1박2일’ 조차도 단순한 수사로 읽을지 모른다. 예능프로 1박2일의 인기에 편승한 얄팍한 상술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또 어떤 단골 할머니는 ‘정성을 다하여’에 진짜로 공감하실 지도 모른다. 낯설고 건조한 ‘1박2일’이란 말 보다는 ‘정성을 다하여’란 말이 더욱 믿음직스러운 사실일 수 있다, 그 할머니에게는.

 

그렇다면 수사란 혹은 rhetoric이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엄마, 아버지 묘 어떻게 할 거야? 공원묘지로 옮길 거야? "

  "안그래도 내가 저기 외할머니랑, 외갓집 묘 모셔 놓은 OO 공원을 갔는데.....흙 아래에 묻는 게 아니고 시멘트로 이렇게 저렇게 발라서 ...... ......... 거기 모셔 놓은 XX 친구가 전화가 와서 물어 봤는데 ..... ........ ...... 네 아버지는 자기 묘를 왜 그런데다가 썼는지....... 그런데 거기 옆에 신성일이가 묘를 크게 ......."

  "엄마! 옯기겠다는 거야? 안 옯기겠다는 거야?"

  "그것이아니고....... 너희 오촌 아저씨들이 왜 거기다가 묘를 안 쓰는지..... 아버지 자리는 왠만해도...내 자리는 ....."

  "엄마!!! 그 얘기는 저번에도 했잖아! 그래서 어쩔건데!!!!" 」

 

엄마와의 대화는 대충 이런 식으로 끝난다. 나는 무엇을 언제 어떻게 할 것인지 요점만 말하라고 다그치고(?), 엄마는 하나부터 열까지 끝도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으려고 한다. 안부 전화를 해도 이런 식이다. 아픈데 없냐고 물으면, 엄마는 그 대답은 없이, 내가 운동을 나가려고 신발을 신는데...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다리가 아팠다든가 허리가 좋아졌다든가 하는 결론이 나오려면 30분은 족히 지나야 한다. 그렇지만 나는 대부분 그 30분을 참아내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고 만다. “엄마 그래서 아프다는 거야? 안 아프다는 거야?” 갑자기 말문을 중단당한 엄마는 황급히 괜찮으니 걱정마라며 전화를 끊는데, 엄마의 풀죽은 목소리가 멀어지면 벌써 후회가 시작되지만 번번이 나는 소리를 지르고 또 후회를 되풀이한다. 남편은 왜 그렇게 유독 장모님에게만 못되게 구냐고 하는데 나는 할 말이 없다. 엄마니까 그렇지 뭐 ㅡ.ㅡ;;

 

정신분석학 입문서를 보면 욕망과 요구와 욕구의 관계라는 것이 있다. 라캉의 공식이라는데,

욕망 desire = 요구 demand - 욕구 need

요구는 말로서(혹은 울음으로) 원하는 것이다. 이 때 정확히 그 상대가 말해진 요구를 충족 시켜 주었다고 해도 즉 욕구를 만족시켜 주었다고 해도 남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욕망 desire이다. “나는 너에게서 이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네가 나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보통 생트집을 잡는다고 하는 것이 있다. 애들이 뭘 달라고 막 떼를 쓸 때, 정확히 원하는 그것을 가져다주면 오히려 그것을 집어 던지고 더 크게 울면서 뒹구는 경우가 있다. 이 때 그 아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 아이가 말로서 요구했던 그것이 아니라 다른 그 무엇이다. 엄마의 사랑, 아버지의 관심일 수도 있고 또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자신도 모르는 그 무엇일 수도 있다. 여하튼 욕망이란 그런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욕망은 대개 수수께끼로 남는다. 나도 내가 욕망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틀린 설명이 아닌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내가 읽은 바로는 대충 이런 뜻인 것 같다.

 

엄마의 욕망은 그러니까 그 30분 동안의 끝없는 이야기 속 어딘가에 있다. 엄마가 허리가 아파서 전화를 했을 때조차, 내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어떤 병원으로 가라든지, 어떤 약을 먹으라든지 그런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엄마의 말을 말 그대로, 요구로서만 이해하고 그것을 충족시켜 줄 방법(욕구의 해소)만을 재빠르게 제시할 줄 알았지, 엄마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사실 엄마도 엄마의 욕망을 모를 것이다. 위로, 위안, 속에 있는 것들을 말로서 풀어내기 ... 이런 것들로서 엄마의 30분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따뜻한 말이 듣고 싶고, 상한 속을 풀어내고 싶은 것이 진정한 욕구였을 수는 있지만, 비록 내가 그 30분을 애정으로 응대했다고 하더라도 엄마에게 남아 있는 그 무엇은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콕 집어서 이걸 원한다, 이렇게 해달라고 말하지 못하고 번번이 운동화 끈을 조이는 것에서 그 길고 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30분이 의미 없음 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30분은 오히려 빼앗겨서는 안 될 30분, 내가 귀 기울여 들어 주어야 할 30분일 수가 있다. 우리는 그렇게 욕망의 주위를 맴돌 수밖에 없는 인간, 히스테릭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욕망에서 충동으로 넘어가는 것이 라캉 이론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데, 일단 나는 여기까지만 풀어 보기로... 뒤는 너무 어려워서...)

 

예전 글들에서 선생님의 ‘레토릭에 관하여...’란 글을 발견했다. 간간히 ‘인간의 언어’를 주장하시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에 관한 선생님의 견해인 것 같았다. 레토릭이란 말이 도대체 어떤 의미로 쓰이느냐에 따라 그 글은 찬반양론을 불러 올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학생들에게 말 할 때는 쉽게, 현학적이지 않게가 원칙이란 말로 이해하면 일단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내가 이 글을 쓴 것은 그 글을 읽고 두부를 사러 나갔다가 ‘1박2일 정성을 다하여..’란 문구를 읽고 문득 ‘레토릭’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레토릭이 되는지는 수신자 각자에게 모두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것이 ‘정보(지식, 주장 등)의 정확도’라는 욕구를 충족 시켜주는 말(요구)인지, 어떤 것이 단순 레토릭인지의 기준이란 애초에 없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위험을 무릎 쓰고 한 발 더 나아가면 레토릭이야 말로 욕망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 장황한 혹은 화려한 혹은 현학적인 수사修辭 속에, 말하는 자의 욕망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스스로 과녁을 맞출수 없는 발화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흘러넘치는 레토릭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자신의 표적을 적중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엄마는 딸의 무안쩍은 고함 소리를 번번이 예상하면서도, 그 장황한 이야기를 끝낼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욕망을 멈출 수 없듯이..... 그러므로 결론도 없고 요점도 없는 엄마의 길고 긴 이야기는 차라리 레토릭의 강물이 아닐까..

 

그렇다면 레토릭을 듣(읽)는 사람에게 그것은 무엇일까? 레토릭에 욕망이 있다면, 레토릭에 ‘요구- 욕구 = 욕망’ 인 잔여가 있다면, 그것은 듣는 사람에게도 ‘그 무엇’을 주는 것은 아닐까..... 나는 사실 아무것도 모르고 지젝의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지젝이 말하는 헤겔도 칸트도 라캉도 프로이트도,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지젝의 책들을 하나하나 읽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그의 문체가 매혹적이었고, 그의 말하는 방식이 독특했고, 그래서 아마도 그것에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강한 느낌, 강한 끌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히 지젝의 책은 어렵고 반 정도만 이해할 수 있지만, 내게 왜 지젝을 읽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첫 번째는 여전히 그 끌림 때문이라고 할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그가 전달하는 지식 보다는 그의 레토릭에 대한 끌림이라고 해야 맞을 듯 하다. 그 레토릭 속에는 무엇인가 나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 있다. 그 속에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세상이 내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에 대한 대답이 있는 듯도 하고, 그 물음 주위를 계속 맴돌게 하는 자력 같은 것이 있는 듯도 하다. 그러니 레토릭이란 현학적인 태도, 젠체하는 우월감이 전부인 것은 아니지 않을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혹 같은 것, 무엇이라고 콕 집어 말 할 수는 없지만 어떤 아우라 같은 것이 있는 것 같다. 무엇이든 쉽게 배우고 쉽게 이해하는 것이 효율적이긴 하지만, 알 수 없는 그 무엇, 이해 불가능한 그 무엇이 우리를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게 하는 동력이기도 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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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6일 쓴 글입니다. 씨네21의 <독자 영화 클럽> 에 응모한 글입니다. 여러명이 함께 쓴 글입니다.

 

 

말리는 기가 막혔다. 카페에 올라 온 세 편의 글은 형식도 다르고 내용도 다르다. 친절한 설명도 없고, 각자의 장(場)에서 통통 치고 올리고 받으며 놀려 본, 날 것 그대로를 던져 놓았다. 이리 저리 뜯어 붙여 형태나마 잡아 보려고 해도 도대체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할 수 없다. 아무래도 멋을 낼 수 없을 바에야 덕지덕지 분칠 보단 맨 얼굴이 상책이다. 그래서 이 글은 40여년만의 대설로 전국이 얼어붙은 2010년 1월의 첫 째 수요일, 칼바람을 뚫고 기어이 강남에 모여야 했던 사연에서 시작한다.

 

 

1. 1월의 독자 영화 클럽이 재결성(?) 되기까지

 

외상은 없었지만 내상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12월의 독자 영화 클럽 응모에서 떨어진 것이다. 넉넉한 망년회 회식비는 고사하고 영화표 1장도 얻지 못했다. 당선자 발표까지의 열흘 남짓의 기간은 5,000원짜리 로또가 주머니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뿌듯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아마도 내상의 형태는 각자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소리 내어 물어 보지 않았다. 단지 ‘1월에는 기필코!’를 외쳤을 뿐이다. 마플이 이렇게 말하기는 했었다. “우리의 편지가 수신자에게 도달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그것은 위안인 동시에 소통에 대한 의문이기도 했다.

 

1월의 선정 영화는 전우치였다. 말리가 1등 전우치, 2등 나인을 외쳤고, 뒤이어 겁사가 전우치를 재청했다. 마플은 1등 아바타, 2등 셜록 홈즈를 들고 나왔다... 약간의 긴장이 흘렀다고 해야 할까? 모두 갈매를 기다렸다. 그러나 갈매는 역시 평화주의자인 듯하다. 산뜻하게 그럼 1월의 영화는 전우치라고 선언해 주었다. 우리 셋은 전우치가 갈매의 기호가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갈매의 선택 또한 알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7년 가까이 조금씩 서로를 알아 왔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오랫동안 기상(氣象) 역사에 남을 2010년 1월의 첫째 주, 두텁게 쌓인 눈과 칼바람 속에서 ‘전대미문의 한국형 히어로’, 강동원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

 

2. 주점에서 난상 토론?

 

“어땠어요?” “ 뭐 할 말이 없는데요.” “도대체 영화 선택은 누가 한 것이야?” 대체로 이렇게 시작했다. 간장 종지만한 술잔이 한 순배씩 돌아가도 별로 이야기가 풀리지 않았다. “그래도 지루하지는 않았잖아요?” 라고 말리가 1등으로 전우치를 외친 죄를 수습해 보려 했지만, “저는 엄청 지루했어요” 라는 겁사의 말에 또 입이 닫히고 말았다. 겁사는 판타지 애호가인데, 전우치는 도대체 판타스틱하지 않다는 것이다.

 

“전우치를 영웅이라고 할 수 있나요?” 갈매가 문득 말했다. 갈매는 대체로 말이 없는 편이지만, 문득 문득 화두를 던지는 신묘함이 있다. 우리는 잠깐 동서고금의 영웅들에 대해 이야기 했다. 홍길동과 해리 포터, 반지의 제왕까지 이야기가 번졌으나, 불행히도 말리의 귀에 쏙쏙 들어오지 못했다. 말리는 이해력이 뛰어 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한참 모자란달 수도 없지만, 이 클럽의 회원들은 각자의 분야에선 때때로 날아다니는 신통력을 보여 주기 때문에 평범한 말리로서는 따라 잡지 못할 때가 많이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은 늘 말리의 몫이기 때문에 (말리는 안타깝게도 백수다), 말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글이 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야기는 또 장자를 거쳐서 표훈 대덕과 초랭이가 여자라는 것의 전복성(?) 혹은 진부함과 현대의 신선이 스님, 신부, 무당으로 묘사된 것의 의미, 국회의원과 돈 다발이 보여 주는 것은 결국 딴나라당을 요괴로 그린 것이냐라든가, 화담이 요괴이면 결국 유가 보다 도가가 더 높다는 것이냐는 등등으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아, 무슨 말인지 전 모르겠어요. 일단 각자 하신 말씀을 카페에 올려 주세요. 그것 보고 글을 써 볼께요.” 드디어 말리가 소리쳤다. “아니, 왜 못알아 들어요?” “나는 십이지신들이 나온 병풍도 못 봤고, 송영창이 왜 스님이란 건지도 모르겠고, 전우치전이라는 설화가 있다는 것도 몰랐고요. 여튼 내일이면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럼 언제까지 올려야 되죠?” 겁사가 물었다. “아, 오늘이나 내일 기억이 생생할 때 써야 좋죠 ㅋㅋ" 마플이 대답하고, 갈매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어쨌든 씨네21 정훈이 만화는 꼭 보셔요. 전우치에 대한 가장 뛰어난 작품이죠.” “정훈이 만화 시리즈 중에서도 백미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정훈이는 아직도 씨네21에 연재하나 보죠?” 다들 보았다는 정훈이 만화를 혼자만 못 본 말리는 기어이 한번 퉁퉁거리고 말았다.

 

3. 각자가 카페에 올린 글

 

(클럽 ‘화사’는 독서 토론을 위해 자체 비공개 카페를 갖고 있다)

 

맨 처음 카페에 글을 올린 사람은 갈매였다. 말은 없지만 행동은 의외로 민첩하다. 항상 말은 많은데 행동은 굼뜬 세 명의 여자들 사이에서 갈매는 혼자 속이 터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 조선 시대 설화 속 인식은 백성을 먹여 살리는 것은 왕이었다. 왕이 현명하면, 백성은 흉년에도 굶어 죽지 않았다고 하니까. 그런 인식 아래서 어리석은 왕을 희롱하고 돈과 곡식을 빼앗아 흉년을 당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준 전우치는 영웅일 수 있다. 하지만, 왕이 없고 기업가들이 일자리를 만드는 현대사회에서 전우치가 영웅일 수 있을까? 소설 해리포터 시리즈에는 호그와트 학교뿐만 아니라 마법사 사회가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수많은 마법사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모든 마법사들이 해리포터와 같은 영웅은 아니다. 전우치가 도술을 쓴다고 해서 무조건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현대로 불려온 전우치가 영웅이 되려면 화담이나 그와 관련된 세력들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고 이로 인해 자기와 자기 주변 사람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상황이 미리 상정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 설정이 이 영화에서는 없었다. 이 부재가 영화 전우치가 현대 사회에서 우리의 영웅으로 등극할 수 없는 이유이다. 」

이 영화를 영웅, 전우치란 면에서 본다면 함량 미달이라는 결론인 것 같다. 난세에 영웅인데, 난세가 제대로 그려지지 않으니 영웅이 하고 있는 짓도 무슨 짓인지 도통 요령부득이란 말을 하는구나, 말리는 갈매의 글을 이렇게 해석해 버린다.

 

다음은 겁사다. 평소의 습관대로 절대로 따로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 갈매의 글에 댓글을 길게 길게 달아 놓았다. 본 글 보다 훠얼씬 긴 댓글이다.

「 혹시 다른 맥락이 있을까 싶어서 제 딸에게 <전우치전>의 결말에 대해 물어 봤어요. 그런데 원래 얘기에 따르면 전우치의 위치가 손오공과 약간 유사하더라고요. 왜냐하면 우치가 신통력을 뽐내려다가 실패한 다음에 ‘아! 나는 아직 멀었구나!’ 하고 자기가 선택한 스승 화담을 모시고 산속으로 들어간다니까요. 이 부분만 보면 영화에서 화담이 악당으로 묘사되는 것은, 스승의 부재 또는 권위의 부재를 목 놓아 부르는 포스트 모던한 현대의 자화상에 대한 무의미한 반복으로 보입니다. 차라리 어제 보았던 드라마 <추노>가 훨씬 낫습니다. 특히 장혁이, 자신이 쫒는 여종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잔디 아버지를 찾아간 장면에서 나온 대사가요. 소현 세자가 어떠니 제주도에서 어떤 학살이 벌어졌느니 하는 나라의 일이 그리고 조정의 일이 도대체 자기와 무슨 상관이냐고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모든 개인적인 일이 정치적인 일이라고? 상부 구조는 하부 구조를 그 원인으로 하는 단순한 결과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부 구조와 전적으로 상관이 없는 것도 아닌, 다시 말해 시차적 관점을 가진 것이라고? 씨네21에서 최동훈 감독의 인터뷰를 보았는데도, 도대체 감독이 이 영화를 왜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더라고요. 만들고 싶었다는 말만 기억이 나요. 정말 마플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만화 정훈이가 훨씬 더 훌륭합니다. 적어도 이 만화를 보고 나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르니까요. - 우리들은 어떤 존재들인가? 똑 같은 하나들인가? 아니면 하나 더하기 하나 더하기 등등인가? 아니면 하나를 향한 욕망을 가진 하나들인가?

이번 주 씨네21에서 김소영 교수가 쓴 ‘전영객잔’에는 요런 구절이 있습니다. “해적이 난무하고 흉년이 들어 백성이 참혹한 지경에 빠졌는데도 나라에서 백성을 돌보지 않자 격분한 전우치는 천하로 집을 삼고 백성으로 몸을 삼으리라 결단한다. 전우치의 둔갑술과 도술은 도적의 토벌, 가난한 선비의 구제, 가난한 백성을 원조하는 데 쓰인다. 반면 영화 <전우치>에서 전우치는 장난질과 망나니 사이를 오갈 뿐이다. 홍길동만큼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의로운 전우치를 이렇게 망가뜨려야 하는 우리 시대의 요구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 자체를 시대 착오적인 것으로 간주케하는 시대성은 무엇일까? 그 반시대성은 어떤 것일까?”

정말 반가웠어요. 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서요. 특히 ‘백성으로 몸을 삼으리라’는 대목을 읽는데 갑자기 너무 집중하게 되더라구요. 저의 요새 화두가 백성 개념이거든요. 왜냐하면 그 어떤 정치 원리도 형식적일 수밖에 없다면, 최소한 그 형식은 기울어진 형태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에요. 백성을 향해서, 없는 자들을 향해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런 이유로 드라마 <추노>가 너무 기대됩니다. 홈페이지에 가보니, 장혁은 요런 인물이래요. - 나라 또는 정치와 상관없이 살고자 했으나 결국 휩쓸리고 마는. 영화 <전우치>에는 이런 고민이 없습니다. 따라서 결론은 <추노> 만쉐이~ 」

 

헉헉... 기~ㄹ다. 뭐 읽기에는 그다지 길지 않은데, 그대로 다시 옮겨 입력하자니 엄청 길다.(왜 ‘복사하기’를 안하고 미련하게 자판을 두드렸는지에 대한 구구한 사연은 접어두고 싶다;;) 일단 말리도 전우치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실존 인물이긴 한데, 전해오는 이야기는 썰(說)일 가능성이 많고, 여튼 도술을 부려 백성도 도와주고, 임금도 골탕 먹이고, 장난도 치고 그랬다는 것이 여러 이설(異說)들에서 공통점인 듯하고, 어쨌거나 결국 도통의 경지는 아득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화담 서경덕을 싸~부님으로 모시고 입산수도 했다는 얘기로 마무리되는 것 같다.

그러니까 화담은 요괴가 아니라 사부님이다. 그런데 왜 영화는 스승을 요괴로 만들었는가? 겁사의 질문은 여기서 씨네21 김소영 교수의 질문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다. 이 신물 나는 포스트 모던의 시대에서 스승 따윈 필요 없어, 권위 따윈 필요 없어는 이제 의로움 따윈 필요 없어와 동의어가 되었고, 그런 것들에 대한 질문마저 시대착오를 넘어 반시대적인 것으로 낙인찍힌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처한 곤경은 이제 이런 낙인쯤이야 말로 오히려, ‘포스트 모던한 현대의 자화상에 대한 무의미한 반복’, 일종의 클리셰가 되어버렸단 것이다. 그러니 전우치 전설의 정치적 배경을 한낱 장난질의 배경으로 바꿔 버린 영화 <전우치> 보다는, 비정치적이고자 했으나 정치적인 것 속으로 휩쓸리고 마는 또 하나의 전설적 인물을 그리고자 하는 드라마 <추노> 가 진정 ‘새로움’이라고 겁사는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말리는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정리해 두고, 어려운 말들은 늘 그렇듯 흘러 보냈다. 그런데 가끔 말리는 신기한 경험을 한다. 이렇게 한 귀로 들어 와서 한 귀로 내보냈던 말들이 어느 날 문득 대화 속에서, 책 읽기 속에서, 글쓰기 속에서 다시 떠오르는 것이다. 그것들은 그렇게 나타나 말의 아귀를 맞춰 주기도 하고,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삼년이면 읊는다는 서당 개의 풍월도 이렇게 어느 날 문득 터진 말문이 아닐까?

 

마플이 소식이 없다. 제일 먼저 올릴 줄 알았는데, 기어이 쪼아야 할 판이다. 사실 글쓰기 전공은 마플이다. 마플의 글은 독특한 향취가 있지만, 읽기 쉬운 친절한 글은 아니다. 언젠가 김연아의 트리플 점프에 자신의 글을 비유한 적이 있다. 순식간에 회전하는 트리플 점프는 보기에 무척 아름답지만, 정확한 동작 하나하나를 읽어 내기란 쉽지가 않다.

「아무래도 부적은 환상의 아이맥스 3D, 아니 온갖 색이 만발한 매트릭스의 세계로 사람들을 홀리는 안경 같은 것이렷다. 그러니깐두루 전우치는 오늘날로 치면 제임스 카메론이나 아키텍터일진데, 문제는 모시냐. 이놈의 전우치가 애시당초 정통이 아니라 그것이여. 나랏님을 홀려서 함경도 빈민을 구제해 봐야, 본시 삐딱한 사고뭉치 밖에 안 되는 이유는, 스스로 “마음”을 비우지 못해서로다.

그렇다면 진정 바람을 다스리고 기후도 다스리는 도사는 어떠한 것인가? 전우치는 하나 남은 부적의 힘으로 여인을 구한 뒤 청계천 바닥에 코를 박는다. 그러고는 갑자기 네오처럼 부적 없이도, 이 현실 세계 자체가 환상인 비밀을 알고는 신출귀몰 몸을 놀리게 되나니, 어디서 많이 들은 듯한 이야기로다. 유가의 입신양명 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권력을 쫒던 미천한 계급 출신인 주인공은 “사랑”으로 타자를 살리는 순간, 역설적으로 환상을 가로지른다. 그러니까 진정한 도사는 그림 속으로 들어가 그림의 일부로서 그림을 바꿔야 할 터? 나랏님이 다스리건, 장사치들이 먹여 살리건, 그림은 수묵화에서 미술관 유화로 바뀐 것 뿐이러나, 그렇다고 허허하면 그것도 가짜 사도, 아니 도사라 이말이시. “사랑”하면 통하고, 그래야 그림이 바뀐당께로. 활동사진으로, 3D로, 리얼디 4D 등등. 영화 속 영화도 바뀌었자너. 일단은 코디가 주인공이 된거지만. 그래서, 인제야 말이지 전우치가 내 아바타라면, 영화를 들어 엎겄다 이 말이여. <정훈이 만화>가 잘 보여 주더만. 전우치 전문, 무한 아바타 생성 신공으로다가, 합법적인 일자와 다수의 차이는 무엇인지, 누가 정한 그림의 법도인지 물음을 던져서 떡하니 웃음보에다가 꽂아 버리는 거. 초랭이와 표훈대덕이 모두 여자라고 하면 뭘해. 바다 갖고 되냐 이 말이여, 바다. 인연의 실이 얽힌거나 뒤집힌 거, 옛날과 오날이 뫼비우스의 띠이며 반복인거 이제 누가 몰러. 바보야, 문제는 차이여, 차이!」

 

말리는 단순하다. 늘 이 쪽인가 저 쪽인가를 갈라놓고 시작한다. 우리 편인가? 적군인가? 또는 좋다는 말인가? 나쁘다는 말인가? 일단 대세 판단이 틀리지 않으면, 상세한 것의 잘잘못을 모른다 해도 결정적으로 오판할 위험은 그 만큼 줄어든다. 이것이 말리의 처세술 중 하나이다. 그런데 겁사와 마플은 이런 말리를 두고 늘 웃는다. 말리는 결과가 중요한 응용과학 전공이고 (전공이라고 하기에 좀 쑥스럽긴 하다. 대학 4년간 별로 배운 것도 없다), 겁사와 마플은 결과에 이르는 ‘길’ 속에서 모든 것을 찾는 인문학 전공자들이다. 그러니 마플에게 그래서 결론이 뭐요? 라고 묻는 것은 또 한번 웃음을 짓게 할 뿐일지도 모른다. 그렇거나 말거나 말리는, ‘바보야, 문제는 차이여, 차이!’에서 답을 찾는다. 말리가 주목하는 것은 ‘차이’가 아니라 ‘바보’다. 일단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우리 영화 클럽은 영화 <전우치>가 졸작이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과감하게 단언한다.

 

4. <전우치>, 정훈이 만화 속에서 완성되다!

 

아무래도 말리는 정훈이 만화를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글을 끝낼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영화 <전우치>가 폼나게 그렸으나 진정으로 보여주지는 못한 ‘전대미문의 한국형 히어로’, 영웅 전우치는 씨네21의 <정훈이 만화> 속에서 비로소 그 막강한 도력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합법이란 가면을 쓴 권력의, 무지막지한 폭력성이 지배하는 이 시대,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영웅은, 서울 광장에서 오십만으로 분신(分身)한 바로 그 소박하지만 무시무시한 전우치(들)이다. ‘빵꾸똥꾸를 빵꾸똥꾸라 부르지 못하고!’를 외치는 오십만 전우치(들)! 그것이야말로 텅 빈 법의 야만성과 눈먼 폭력성을 통쾌하게 고발하고 사정없이 농락하는 신통방통 오묘신묘한 진정한 도력이 아닌가 말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대상은 피리 부는 표훈 대덕이 아니라 우리의 철딱서니 없는 빵꾸똥꾸 해리여야 하지 않을까, 만약에 ‘사랑’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이것은 세 회원의 글 속에서 말리가 읽어 낸 일종의 맺음말이지만, 그들이 꼭 그렇게 썼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읽은 자는 말리이고 혹은 이 글이 읽힐 기회가 있다면, 독자들일 것이니 말이다...

 

2010년 1월의 독자 영화 클럽에 응모할 글은 이렇게 완성 되었다. 그냥 이런 저런 수다를 재미있게 배치하면 간단할 것을 불행히도 클럽 <화사>에는 그런 오묘한 재주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월의 쓰라림이 되풀이 될 위험 부담을 안고서도, 다시 이렇게 길고도 까탈스런 길을 걷는 것은 떡고물에 대한 욕심도 욕심이려니와 소통에 대한 어떤 기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언어가, 읽히고 이해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 혹은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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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5일 쓴 글입니다.

 

 

  중학생 때였을 것이다. 프로야구가 창단되면서 삽시간에 야구 열풍에 휩싸였던 것이. 나는 집에 돌아와 방바닥에 배를 깔고 숙제를 하면서도 늘 라디오로 야구 중계를 듣곤 했는데, 삼성 라이온스의 승률은 물론 장효조와 이만수 등의 타율을 줄줄 꿰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야구를 아주 좋아했던 것도 아니다.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교를 들어가고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그 기록들 뿐 아니라 선수들의 이름도 잊어갔다. 내가 열광했던 것은 사실 야구 그 자체는 아니었다.  

  열심히 TV화면을 보면서도 여전히 혼자서는 스트라이크와 볼을 구분하지 못했고, 직구인지 변화구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중간고사를 앞두고도 TV 앞에 나를 붙들어 매었던 것은 야구 그 자체의 묘미도, 선수들의 순수한 기량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승부에 대한 열광과 환희였다. 대구 삼성과 광주 해태의 경기는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 버스가 불타오르고 선수들은 운동장을 도망쳐 빠져나와야 했다. 나는 왜 그래야하는지 생각해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무조건 해태를 미워했고 무조건 해태는 이겨야 한다고 믿었다. 어떤 경기에서도 무조건 일본은 이겨야 하는 것처럼. 그러나 왜 하필 해태인지,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아니 그것은 이유 따위가 필요 없는, 그 자체로 자명한 사실이었다. 뉴튼 이전에,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에는 어떤 이유도 필요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김연아의 트리플 러츠는 아름다웠지만, 그것이 단지 아이스 쇼였다면 나는 진정 그 점프에 그렇게 마음을 조이며, 또 그렇게 안도하며, 그렇게 기뻐할 수 있었을까? 트리플 악셀의 아사다 마오가 자빠지기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즐기면서, 그렇게 심술쟁이가 되어, 스무살 앳된 얼굴을 적시는 진짜 눈물을 가증스럽다고 느낄 수 있었을까? SBS를 켜기만하면 넘쳐 나는 광고들,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믿습니다.’ 따위 광고들에 넌더리를 내다가도, 막상 이승훈이 모태범이 이상화가 금메달을 따냈다는 해설자의 비명 소리에 덩달아 으악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가 있었던가? 나는 여전히 소위 국가주의 이데올로기 혹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는 ‘알지 못하는 자’, 혹은 ‘나는 알아, 그럼에도 불구하고...(믿는자)’ 란 말인가?

 

  벤쿠버 올림픽 기간 중 우리나라 학생 한 명이 러시아에서 스킨해드 족의 테러에 희생당했다. 그 사건과 관련하여 어느 뉴스 전문 케이블 채널에서 러시아의 인종주의에 관한 심층 보도를 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러시아를 비롯한 구동구권 뿐만 아니라 서구 유럽에서도 인종주의 혹은 민족주의 세력이 우려할 만한 수준 이상으로 세력을 넓혀 나가고 있다고 했다. 신나찌란 말이 심심찮게 나도는 것도 벌써 오래 전부터이다. 얼마 전에 읽은 책에는, 그때까지 잘 몰랐던 구동구권의 인종주의에 관한 흥미로운 분석이 있었다. 이 책은 1990년대에 씌어 진 것이지만, 지금도 동구권의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왜 권위주의적 민족주의는 민주주의적 복수주의에 그림자를 드리우는가?.... 이 지점에서 “진정한 사회주의” 나라들에서의 종족 긴장의 원인에 대해 좌파가 제안한 표준적 분석들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좌파의 테제는 종족 긴장이 집권당의 권력 장악을 적법화할 수단으로서 집권당 관료에 의해 선동되고 조종되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루마니아에서 민족주의적 강박, 위대한 루마니아의 꿈, 헝가리 및 여타 소수민족의 강압적 흡수는 차우세스쿠의 권력 장악을 적법화하는 항상적 긴장을 만들어냈다.....그렇지만 이러한 가설은 최근의 사건을 통해 매우 스펙터클한 방식으로 논박되었다. 일단 공산주의 관료지배가 무너지고 나자, 종족 긴장은 한층 더 강력하게 출현했다. 왜 종족적 원인에 대한 이러한 애착은 그것을 낳은 권력 구조가 붕괴한 이후에도 존속하는가? 」

 

  보통 간간이 들려오는 동구권의 종족 분쟁에 대한 느낌은 그랬다고 할 수 있다. 여전히 종족 따위에나 매달려 있으니 자기들끼리 총질이나 하고 있지. 공산당 독재가 무너졌으면 열심히 일해서 경제를 살려야지 츳츳츳, 뭐 그런 것. 그런데 저자의 분석은 완전히 거꾸로다. 인종주의 때문에 시장 경제가 발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 경제 즉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체제 변화 그 자체가 인종주의를 한층 더 강화시킨 원인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구조적 불균형을 낳는다.” 지극히 심란하고 피곤한 문장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가 매일 겪고 있는 사실이다. 취업을 포기한 청년 인구가 사십만, 구조 조정, 중산층의 몰락, 기타 등등은 우습게도 1인당 GNP라거나 세계 몇 번째 경제 대국이라거나 하는 소위 경제 발전 지표와 비례한다. ‘자본주의의 기본적 특징은 내속적인 구조적 불균형, 그 최심중의 적대적 성격으로 이루어진다’ 같은 문장이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양극화를 단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본주의의 적은 공산주의나 민족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라는 것인데, 민족주의는 자본주의가 이것을 은폐하기 위해서 이용하는 그 무엇이다. 저자는 파시즘을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다.

  「파시스트의 꿈은 단순히 “과잉”없는, 구조적 불균형을 야기하는 적대가 없는 자본주의를 갖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파시즘에서 한편으로 사회적 직조의 안정과 균형을 보증하는, 즉 사회의 구조적 불균형에서 다시금 우리를 구해주는 주인-지도자의 형상이 복귀하는 것이고,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 이 불균형에 대한 이유가 “과도한” 축적과 탐욕으로 사회적 적대를 야기하는 유대인이라는 형상에 귀속되는 것이다.... 주인의 기능은 과잉의 원인을 분명하게 한정된 사회적 작인에 위치시킴으로써 과잉을 통제하는 것이다..... 주인의 형상과 더불어 사회적 구조에 내속적인 적대는 권력의 관계로, 우리와 그들, 적대적 불균형을 야기하는 저들 사이의 지배 투쟁으로 변형된다.」

 

  초기 자본주의의 참상은 올리버 트위스트라든가 기타 소설이나 역사서, 채플린의 영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 히틀러가 그것이 자본주의 자체의 내적 속성이라는 것을 알았던 몰랐던,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의 터질 것 같은 불만을 ‘유대인’이라는 외부의 적에게 돌리는 것에 성공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필연적인 결과로서의 빈곤은, 자본주의적 결실을 모두 가져가 버리는 ‘유대인’, 우리의 것을 도둑질해 간 ‘유대인’ 이라는 외적 대상에게 그 책임이 전가되었다. 내적 적대는 봉합되었고, 외부의 적은 그럴듯하다.

  “집 안 싸움을 하다가도 도둑이 들어오면 합심해서 도둑을 잡아야한다”는 의 말은, 집 안 싸움은 집 밖에 도둑을 만듦으로써 봉합되어야 한다는 주인의 주문에 다름 아니다. 현명하게도 혹은 고지식하게도 그녀는 “그런데 집 안 사람 중에 한 명이 갑자기 도둑으로 돌변하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부지불식간에 그녀는 진짜 도둑은 원래 집 안에 있었다는 진실을 드러내 보였다.

 

  도요타 사태도 어쩌면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의미심장하게도 도요타 자동차의 리콜 사태는 미국 경제가 공공연하게 쇠퇴하는 단계에서 징후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1990년대 초반에 벌써 이렇게 쓰고 있다. 「오늘날 미국에서 점차로 유대인의 역할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것은 일본인이다. 일본인들은 즐길 줄을 모른다는 생각에 강박적으로 사로잡힌 미국의 미디어를 보라. 일본이 점점 더 미국보다 경제적 우월성을 보이고 있는 이유는 일본인들이 충분히 소비하지 않는다는, 그들이 너무 많은 부를 축적한다는 다소 불가사의 한 사실에 놓여진다...」

  도요타 사태에 열광(?)적인 비난을 퍼붓고 있는 미국 정부와 미국 미디어의 태도에는 무언가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 모기지 대출 사태로 격발된 모든 경제적 불안과 불만이 갑자기, 광적으로 도요타를 상대로 분출하고 있다는 바로 그 느낌말이다. 그런데 미국인들 자신은 도요타 사태의 이 과잉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걸까?

  「인종적 뿌리에 관한 이야기는 애초부터 “기원들의 신화”이다. 지배 이데올로기가 자신의 현재의 적대를 흐려놓기 위해서 사후적으로 창조한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화석이 아니라면 “민족유산”이란 무엇이겠는가? .... 민족주의로의 이와 같은 반전의 충격적인 신속함 때문에 외상적 방향 상실을 겪으면서 놀라는 대신... 이 외상적 방향상실을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해결의 열쇠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리라. 민족주의에 대한 호소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가 초래한 외상적 방향상실로부터, 발밑에서 근거를 상실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출현한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의 붕괴는 과소평가되지 말아야 한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자본주의의 무한 경쟁 상태에 놓이게 되었을 때 어떤 혼란과 상실을 겪게 되는지는 솔직히 미루어 짐작하기도 쉽지 않다. 어쨌든 러시아를 비롯한 구동구권 사회들의 자본주의 적응기는 그리 순탄해 보이지 않는다. 저자에 의하면 난폭하게 날뛰는 신흥 인종주의 혹은 민족주의가 그것을 반증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 민족주의는 자본주의의 내적 적대를 드러내는 부정적 증표인 동시에, 사회주의가 갖고 있던 어떤 그 무엇에 대한 가치를 반증하는 긍정적 증표이기도 하다. 여전히 레닌주의자인 저자의 지향점이 무엇인건 간에, 인종주의 혹은 민족주의의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 시차적 관점을 제공한다. 인종주의 혹은 민족주의는 어떤 특이한 지점, 어떤 결정적 장소에 위치하고 있다. 이쪽에서 바라보면 자본주의의 내부적 적대를 은폐하는 장막이지만, 반대쪽에서 바라보면 자본주의의 내부적 적대 자체를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문제가 되기도 하고 해답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저자가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시차적 관점인 것 같다.

 

  지난해 흥행에 성공했던 영화 <국가대표>가 벤쿠버의 성화와 함께 OCN에서 방송되기 시작했다. <국가대표>는 뛰어난 작품으로 보이진 않지만, 소소한 재미를 주는 무난한 영화인 것 같다. 콧물 찍, 눈물 찍은 촌스럽다는 통념이 오래되어서인지 몰라도 국가대표라는 제목 자체의 중압감에 비해서는 다행히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나는 딱 그만큼이 좋은 성동일의 연기 덕이 크다고 생각하지만, 태극마크와 애국심의 상관관계를 애초에 단절하고 들어가는 전제에 힘입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하긴 태릉선수촌의 그 누구도 애국심 따위를 고된 훈련의 동력으로 삼을 리 없는 시대에 그 정도야 기본이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들 네 명(혹은 다섯)의 선수뿐만 아니라 코치나 조직위(?)까지도 철저히 개인적이고 정념적인 이유로 국가대표를 꾸린다.

  그런데 그렇다고 꼭 그렇게 깔끔하게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과거에는 자연스럽게 생겨나던 혹은 진심에서 우러나던 애국심이라고 할 수 있던 것이, 여기서는 오히려 국가에 의해 강요된다고도 할 수 있다. 네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먼저 국가에 대한 너의 애국심과 능력을 증명해 보라! ...라는 식의 무엇이 있다.

  하정우는 엄마에 의해 버려진 해외 입양 고아이다. 이유야 어떻건 간에 자식을 버린 것은 엄마이다. 귀책 사유는 엄마에게 있다. 그런데 그런 엄마를 만나기 위해서 하정우는 자신을 버린 국가, 혹은 엄마(보통은 아버지가 국가를 은유한다고 할 수 있지만)를 위해 자신의 능력과 진정한 마음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코치 성동일은 대표가 되기를 거부하는 하정우에게 너를 버린 국가를 이용하라고 하지만, 사실 그 의미는 국가에게 너의 능력을 먼저 인정받아야 비로소 국가를 혹은 엄마를 되찾을 자격을 갖게 된다는 것과 같다. 매주 되풀이 되는 “국가가 내게 해준 게 뭐가 있다고~”는 여전히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 생각하지 말고,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하라”던 케네디의 유명한 연설을 넘어 서지 못한다.  애국심이란 물론 목적을 위한 수단과는 다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내가 단지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는 그 행위 속에서 우리는 이미 애국심 혹은 국가주의의 장 안에 갇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는 결국 구구한 개인적 사연으로 얽힌 선수들과 코치 사이에 화합과 형제애(혹은 민족애?)가 싹트는 과정을 보며주며, 국가대표 혹은 태극마크 안에서 하나됨을 대단원의 막으로 그리고 있다. 어쩌면 엄마를 찾아야 한다는 그 핏줄에 대한 강박 관념 자체가 하나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애국심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영화 <국가대표>는 첫 인상과는 달리, 그 제목이 대놓고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애초에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예찬하는 참으로 솔직한 영화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난해 그 흥행 성공이 보여 준 것처럼 우리는 그 이데올로기에 순수하게 감동했다. 그렇다면 나의 관점은 무엇일까? 대답을 위해 다시 김연아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듯하다.

 

  김연아가 서 있는 곳은 어디일까? 이제 막 성인이 된 그녀는 언론의 집요한 물음(오히려 추궁이라고 해야 할 듯하지만)에도 3월 이후의 계획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신중함일 수도 있지만 거부의 느낌이 더 강한 침묵이다. 나는 그녀에게 동의하지만 어쩌면 동의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분열되어 있다. 자연인 김연아와 피겨퀸 혹은 국가대표 김연아로. 나는 김연아가 그냥 평범한 대학생이 되어 가끔 기분이 내킬 때만 스케이트를 신는 진짜 전설이 되길 바라지만, 한편으로는 트리플 악셀을 훌륭하게 구사하여 4년 뒤에도 아사다 마오를 납작하게 이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물론 그것은 전적으로 김연아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해야 옳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끼어든다. 김연아는 이미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자본주의적으로 말하자면 그 막대한 광고 수입을 흔쾌히 동의한 까닭은 김연아가 국가대표로서의 의무를 기꺼이 완수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솔직히 나는 분열되어 있다. 국가대표, 국가대표로 대표되는 국가주의를 냉소적인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서도, 혹은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순간 나는 그 국가주의에 열광하고 있다. 그 민족적 자부심에 은근히 뿌듯해 하고 있음을 들키고 만다. 김연아 효과가 몇 조인가를 몇 일째 되풀이 보도하는 뉴스는 물론 한심하다. 벤쿠버에 울려 퍼지는 애국가를 들으면서 나도 더 잘할 수 있다거나, 우리 민족이 더 잘 살 수 있다거나, 우리가 하나로 뭉칠 수 있다거나 하는 생각은 물론 눈꼽만큼도 하지 않는다. 벤쿠버의 성공을 마치 정부의 성공인양 우려먹고 또 우려먹을 것만 같은 정부를 생각하면 성공이 아니라 실패 같기도 하다. 나는 믿지 않지만, 김연아의 금메달 소식에 눈물을 줄줄 흘리는 아주머니, 할아버지를 보면서 스포츠를 이용한 우민화 정책이 먹혀들까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나는 국가 대표가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아니 어쩌면 올림픽 자체가 거대한 음모인지도 모른다. 세계적인 적대를 은폐하는 전 지구적 우민화 정책일지도 모른다. 100일 뒤에 빨간 셔츠를 입고 뛰쳐나와 목이 터져라 외칠 월드컵 응원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나는 안다” 이후에도 남아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체가 무엇인지 나는 모르겠다. 나는 진짜 모르는 것일까? 나는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믿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 민족주의에는 그 모든 기만에 이용당하고도 남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일까? 그 자체가 주는 어떤 잔여가 있는 것일까?

 

 

 

** 인용문은 지젝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무르기>에서 따온 것이다. 벤쿠버 올림픽과 영화 <국가 대표>와 러시아 등 유럽의 신흥 인종주의와 이 독서가 함께 맞물려 여러 가지 생각을 불러 왔지만, 지젝의 책이 여전히 어렵게 읽히는 것만큼이나 이 글은 산만하고 어쩌면 오독에 기인한 틀린 글이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있다. 무엇보다 국경별로 뚜렷한 빈부 격차와 국가에 의해 존재가 보장되지 못하면 인간이 아닌 산 죽음 (호모 사케르)으로 취급받는 이 냉혹한 세계에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갖는 의미, 그것에 대처하는 우리의 태도 등에 대한 일관된 의견을 가질 수 없음이 혼란스럽다. 그것은 물론 S1과 대상a, $의 개념에 대한 여전한 혼돈의 탓도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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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14일에 쓴 글입니다.

 

 

곰동씨가 가끔 세상이 망해버리기를 바란다거나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가끔씩 세상이 망하는 영화를 보면서, 세상이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살짝 든다고 중얼거렸을 뿐이다. 세상의 멸망을 세상이 끝장난 듯이 보여 주려하는 영화들은 그 거대한 재난을 어떻게든지 막아보려는 인간의 필사적 노력과 눈물겨운 인간애를 영웅담으로 버무려 놓지만, 영화 제작자들이 지구 연합 사령부도 아니고 독수리 오형제도 아닌데 해마다 그렇게 난리법석을 떠는 이유가 무엇인지 곰동씨는 슬쩍 궁금해진 것이다. 혜성이 충돌한다, 쓰나미가 덮친다, 지각이 이동한다, 외계인이 공격한다, 기타 등등등, 육해공을 넘어 우주까지 총동원된 이 전 세계적 '대한 뉘우성' 재난 경고 영화들이 지치지도 않고 되풀이 되는 것은 지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원초적 공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렇게 쫄딱 망해주길 바라는 은밀한 욕망에 기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슬금슬금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땅이 쩍쩍 갈라지고, 시뻘건 불덩이가 하늘을 메우고, 산더미 같은 해일이 빌딩을 집어 삼키는 장엄한 CG 너머에 또는 아래로, 그 욕망을 둘러싼 원환의 회오리는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따위로 영화를 가늠해 보는 재미가 쏠쏠하지 않을까 곰동씨는 생각하며, 조금은 늙어 보여 마음이 아픈 존 쿠삭의 <2012>를 보았던 것이다.

 

 

영화는 재난 영화가 흔히 그렇듯 파괴된 가족에서 시작한다. 아버지는 쫒겨나고 엄마는 양부와 결혼해 새로운 가족을 만들었지만 어딘가 불안한 구석이 있다. 그런데 조금 달라진 것 같다고 곰동씨는 생각한다. 생부와 양부가 손을 잡은 것이다. 워낙 막강 재난이라 원수와도 손잡을 다급한 판이 아닐까 곰동씨는 잠깐 반문했지만, 어쨌든 다른 것은 다른 것이다. 곰동씨는 쫒겨 난 아버지가 새 아버지와 힘을 합쳐 가족을 구했다는 영웅담을 들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둘이면 그건 곧 남편이 둘? 에 생각이 퍼뜻 미치자, 곰동씨는 웃는 듯도 하고 찡그리는 듯도 한 표정을 짓는다. 두 명의 남편이 좋은지 나쁜지 얼른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러나 곰동씨가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영화는 한 고비를 넘기자 양부를 사정없이 죽여 버린다.

 

아버지는 원래 그렇게 하나인 법이다. 곰동씨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버지는 (하나인) 법이다’ 엄정하고 절대적인 법을 서슬 푸르게 선언하던 과거의 아버지에 비해 거의 쫒겨나다시피 한 오늘날의 아버지가 법일 수 있을까 혹은 법 자체가 이미 쫒겨난 아버지처럼 바닥에 처박힌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어쩌면 법이 아닌 척 하는 법, 모든 것이 그저 욕망에 맡겨진 듯 보이는 세상의 법이야말로 가장 가혹하고 냉엄한 법은 아닐까 곰동씨는 생각해 보지만, 별로 자신이 없다. 아버지를 법이라고 말해도 되는 것인지, 법이 아버지라고 하면 바보가 되는 것인지, 법이 없는 세상은 없지만 그것이 꼭 아버지는 아니라는 것인지, 오디푸스와 앙띠오디푸스 따위 기타 등등의 역사 속에 아버지와 법의 관계가 이제 어떻게 설정되어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곰동씨는 푸념한다. 몇 권의 책을 읽은 듯도 하고 귀동냥도 한 것 같긴 한데, 여전히 곰동씨는 회색암흑(그냥 멋져서 한번 써본 말일 뿐이다, 어제 어떤 책에서 읽었다) 속에서 헤매고 있다.

 

함께 영화를 본 이웃동네 ㅇㅇ씨의 말을 곰동씨는 기억한다. “그런데 왜들 이렇게 생물학적인 아버지를 복원시키지 못해서 안달일까요? 아버지를 잃어버렸다는 불안감 때문이 아닐까요? <2012>에서 재난은 명백하게 자연 재해로 그려지지만 거꾸로 아버지의 상실이 이 재난을 불러 왔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버지가 없는 세상을 견디라는 다문화주의적 요구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 아닐까요? 아버지가 없는 세상은 금지라는 성가신 법도 없지만,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잖아요. 게임 외에는 할 것도 없어요.” 그래서 곰동씨는 그렇다면 아버지가 돌아와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지만, 늘 불친절한 ㅇㅇ씨는 그렇게 말하면 큰일 난다고만 했을 뿐 곰동씨가 알아 들을 수 있게 친절을 베풀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것은 ㅇㅇ씨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 ㅇㅇ씨의 세상에서 ‘친절함’은 늘 이 세상에서는 ‘불친절함’으로 보여지는 아인슈타인적 상대성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되었건 간에 양부는 죽었고 가족은 이전 보다 더 단단한 가족으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아직 세상이 폭삭 망한 것은 아니다. 사실 망한 척만 했을 뿐 전혀 망한 것이 아닌데다가 어쩌면 일종의 페인트 모션이었다고 곰동씨는 생각한다. 어릴 때 엄마들이 말 안 듣는 아이들을 협박하던 그 수법이다. 말 안 들으면 엄마가 콱 죽어 버린다. 콱 죽을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다는 것을 눈치 챈 영악한 놈마저도 혹시나 진짜 엄마가 죽어 버리면 어떻게 할까라는 순간적인 의문이 스치는 그 찰나적인 순간에 이미 무지막지한 공포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래서 이 뻔한 거짓말의 약발은 그리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영화는 잠깐 새로움을 보여주는 듯 하다가 오히려 가장 뻔뻔한 스토리로 돌아가 버린다.

 

세상이 망하지 않았는데 새로운 세상에 대한 전망이 있을 리가 없다. 생부가 죽고 양부가 살아서 가족을 구원한다든가, 생부도 죽고 양부도 죽었는데 엄마가 자식들을 구한다든가, 엄마도 죽었지만 오빠가 여동생을 구한다든가, 여동생도 죽었지만 세상은 전혀 다른 새로운 사람들의 손에 의해 다시 열린다든가, 기타 등등... 아버지가 없는 세상을 견디라는 것에 대한, 다문화주의 시대에 꼴리는 대로 살라는 충동질에 대한, 환멸은 다시 옛날의 그 권위적인 아버지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는 것은, 서당개도 알 것이라고 곰동씨는 생각한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재난 영화는 마치 예전의 바로 그 아버지의 귀환이 구원의 상징인 것처럼 가족의 재결합을 완성하는 것으로 세상을 구해낸다.

 

그런데 사실 곰동씨도 마냥 욕을 하고 있을 입장은 아니다. 세상이 폭삭 망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곰동씨에게도 있다. 예전에 어떤 세상이 폭삭 망하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는데 그 세상 역시 한 세기도 버티지 못하고 폭삭 망하는 것을 보고 난 이후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니 새로운 세상이 얼마나 단단한 땅을 가졌는지를 확인하지 않고는 지금 사는 세상을 탕탕 부셔버릴 용기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곰동씨는.  그런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새로운 세상이라는 것의 단단하기를 미리 측정해 볼 방법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일단 이 세상이 거대한 심연 속으로 장엄하게 가라앉고, 자욱한 분진이 걷힌 후에라야 새로운 세상이란 놈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진퇴양난이다. 일등만 기억하는 이 더러운 세상이 쫄딱 망했으면 좋겠는데, 그 다음이야 말로 회색 암흑이니 돌다리도 두드려 보는 소심한 곰동씨로서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옛 속담이 솔깃한 것이다.

 

그건 그렇다고 해도 영화는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곰동씨의 속도 덩달아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마지막에 그 과학자가 양심이랍시고 연설을 하고 자빠지신다. 갑판의 사람들을 다 태워야 한단다. 그런데 그 갑판 위의 사람들이 누구인가? 애초에 10억 유로씩 내고 세 번째인가 함선에 타게 되어있던 갑부들이다. 아, 물론 중국인 노동자들도 있다. 처음 승선이 시작될 때 내리라고 했던 함선 인부들도 그 갑부들과 섞여 있긴 하다. 여기엔 옆 동네 ㅁㅁ씨가 한 재미난 말이 있다. “그건 인도주의적인 차원이 아니라 순전히 경제적인 차원이죠. 신세계를 건설할 노동자가 필요하잖아요.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속도전이 가능한 중국인 노동자들인 걸요. 그러니 버리고 갈 수는 없죠.”

 

방향 감각이 거의 없는 곰동씨가 이렇게 옆길로 새기 시작하면 제 길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곰동씨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이쯤에서 곰동씨는 재빨리 10억 유로로 돌아온다. 애초에 그 함선들에 탈 사람들은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선정되지 않았다. 최후의 시간이 돌아 올 때까지 사람들은 그것이 종말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잠깐 기도할 시간만이 주어졌을 뿐이다. 애초에 새로운 세상을 위한 법은 그렇게 만들어 졌다. 거기에 그 잘난 인도주의란 없었다. 10억 유로가 있든가 아니면지구상에 첫 번째 혹은 두 번째에 준하는 비상한 능력을 가졌거나 (물론 명시된 바는 없지만 함선을 만들거나 운항할 과학자나 기술자 따위를 염두에 둔다면 말이다), 각 국가의 (그것도 선진 10여 개국 안에 속해야 할 듯하지만) 통치권자라든가 하는 일방적인 기준이 적용되었을 뿐이다. 그 기준에 대한 지구인들의 합의나 의사소통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법은 그냥 폭력적으로 법으로 선포되었을 뿐이다. 그런 폭력적 정초 이후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합법이라든가 적법이라든가 따위의 법에 의한 보호 운운에 의해 보호받거나 처벌 받을 수 있을 따름이다. 법의 기원을 보장해 주는 법이란 것은 없다.

렇다고 곰동씨가 그런 법은 무효라거나 비민주적이라거나 따위의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곰동씨도 이런 저런 귀동냥과 몇 권의 책 덕분에 그 정도로 고지식하지는 않다고 할 수 있다. 법이란 것은 원래 그렇게 텅 빈 것이고, 법의 기원은 그냥 폭력적 선언일 뿐이란 말에 곰동씨도 동의하는 편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를 때때로 금과옥조로 삼기도 하지만 그것은 전략적인 면에서 유효할 따름이지, 사실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가 곰동씨는 요즘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왜 곰동씨가 열이 받았다는 것이냐고 성질을 낼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곰동씨가 열이 받은 것은 법이 원래 그런 것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원래 그런 법의 잔인함을 턱도 없이 ‘인도주의’ 따위를 운운하며 덮어 보려는 그 교활함과 사악함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난 직후 곰동씨는 함께 본 여러 씨들에게 씩씩거리며 이렇게 말했었다. “그런 식으로 양심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래도 거기 온 사람들은 10억유로씩 내고 온 사람들이잖아요. 차마 그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는, 그 가증스러운 인도주의라니! 그것으로 처음부터 배제한 사람들에 대한 근원적 폭력을 은폐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그 때 옆 동네의 그 ㅇㅇ씨는 “그런 면에서 오히려 합리적인 것은 그 장관 이예요. 자신의 논리에 맞는 행동이잖아요. 목적은 인류의 생존이지 양심의 구원이 아니니까요.” 라고 했었다.

 

그랬다. 사실 그건 인류 생존 프로젝트일 따름이었다. 곰동씨는 웃기긴 하지만 만약 진짜 그 상황이 우리에게 닥친다면 솔직히 10억유로는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꼭 돈이 있어야 배를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논의야 구구할 수 있겠지만 무엇인가 그런 무조건적인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했다. 1년 전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서 민주적 절차를 밟고 따위의 생각은 오히려 망상에 더 가까우리라고 곰동씨는 지금도 생각한다. 곰동씨가 말하려는 것은 그 폭력적 법 세우기는 그것으로 좋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 원칙은 끝까지 지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래도 최소한 윤리적인 태도가 아닐까? 생존한 인류의 신세계라는 것은 이렇게 시작한다고, 차라리 잔인하게 웃으며 ,갈라진 심연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사람들의, 공포에 찬 굳은 눈을 당당하게 바라보는 것, 끝까지 잔인하게 응시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윤리라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하는 것이다. 양심에 상처가 있다면, 기원적 배반에 대한 가릴 수 없는 간극이 있다면, 그것을 끝까지 견뎌내라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악마라고 불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애초에 인권이라는 것은 없었어요. 그런데 그런 세계를 세우고 보니, 그 구멍이 견딜 수가 없는 것이죠. 그 사람들이라도 태워서 양심을 구원해야한다. 그래야만 최초의 배반, 그 근원적 폭력이 은폐될 수 있다? 선이라는 것은 차라리 기만이군요.” 곰동씨는 그 과학자의 위선을 이렇게 표현했었는데, 옆에 있던 모모씨가 결론을 내리듯 덧붙였다. “기만적이지만 그 기만 없이는 세상이 지탱되지 않는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 것은 아닐까요? ㅎㅎ 그것으로 최초에 배제한 인간들은 영원히 잊혀지고, 인간성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신세계가 열리는 거죠.”

 

곰동씨는 그 때 ㅇㅇ씨, ㅁㅁ씨, 모모씨 등과 영화에 대해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를 했다. 뭐 세상이 망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든, 세상이 망하길 바라는 욕망 때문이든 재난 영화의 반복은 어떤 학습 효과를 갖는 것 같다. 실제로 재난이 닥쳤을 때 너무 익숙한 상황이라 좀 덜 당황하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 2020년 경인가 딥 임팩트 같은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랬다. 누군가 우주로 나가 폭탄을 심어 터트릴 것 같은 것이다. 하긴 언젠가 지구가 망하기는 망할 것이라고 곰동씨는 생각한다. 지구가 망하고, 태양이 꺼지고, 어쩌면 우주 전체가 블랙홀로 빨려 들어갈 지도 모르고... 태양이 45억년 살았으니 아마 자연사 한다면 50억년 정도는 더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구는 점점 식어가는 태양 때문에 아마도 더 빨리 멸망할 것이고, 그것도 자연사 한다면 그렇지만 말이다. 하긴 그것 보다 더 급한 불이 있긴하다고 곰동씨는 웃는다. 3년 뒤에 외계인들을 데리고 오겠다든 디스트릭트9의 그 외계인이 돌아와 인간의 씨를 깡그리 말려 버릴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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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21일 쓴 글입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멋지다.

그랜 토리노가 무엇을 말하려하든, 그랜 토리노에서 내가 본 것이 무엇이건 간에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말하지 않고는 시작할 수 없을 듯하다. 그렇다고 내가 이 노배우에 관해 아는 것이 있다거나(솔직히 ‘많다거나’가 아니다.) 그의 팬인 것도 아니다. 다만 그 형형한 눈빛과 은색의 짧게 깍은 머리, 당당한 어깨를 빼놓고는 그랜 토리노를 보았다고 할 수 없을 듯하다. 아마도 그 모습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진정 보여 주고 싶은 오늘날의 ‘미국’, 바로 그 자체인 듯 보이기 때문이다. 늙고 쇠락했지만 지는 해처럼 아름다운 혹은 꺼져가는 노을처럼 안타까운 모습 말이다.

 

헨리 제임스의 <아메리칸>은 1877년 작품이다. 장사와 주식으로 떼돈을 번 미국의 젊은 사업가가 유럽으로 건너와 유럽의 오래된 문화와 귀족 사회를 접촉하면서 겪는 일들을 통해 우아하지만 음흉하고 쇠락한 유럽과 활기차고 투명한 젊은 미국을 세밀하게 대비하고 있는 소설이다. 불과 130여 년 전만해도 미국은 힘차고 밝고 생기 넘치는 청년이었다. 우리가 기만 속에 들어 왔던,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가 있어... 아!,아! XXXX” 란 노래에 적합한 나라가 지구상에 단 하나라도 있다면, 마땅히 그 나라여야 할 듯한 아 메 리 카, 바로 그 아메리카라는 젊은 청년 말이다. 물론 <아메리칸>의 주인공은 그 젊음과 막대한 부에도 불구하고 숭고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유럽의 모호한 중핵으로서의 그녀라고 할 수도 있는, 그 귀족 부인을 얻지 못하지만 말이다. 유럽이라는 낡은 성은 곧 허물어 질듯 하면서도 바로 그 때문에 더욱 신비롭고 더욱 모호하고 더욱 매력적이며, 그래서 자신감만 충만한 순진한 청년에게는 쉽사리 열리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의 좌절로서 굳게 닫혀있다. 비록 그 성 안에는 낡은 거미줄과 기울어진 문 짝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을지 모르지만, 모든 것이 투명한 아직은 순박한 청년 ‘아메리칸’에게는 성을 걸어 잠근 육중한 문은 그 자체로 성의 견고한 가치로 인식된다. 성 안에는 신비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귀족 부인이 외로이 갇혀 있을 것이다...

 

고작 130여 년이 지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메리카’는 창고 안의 움직이지 않는 그랜 토리노이다. 한국전과 포드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의 심장 미국, 그랜 토리노는 이제 이방인 갱 패거리들이 노리는 한낱 노획품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총 한 자루 이외에는 그 시시껄렁한 애새끼들을 몰아 낼 방법도 없다. 자식들은 멀리 있고, 그의 삶을 이해하려하지도 이어받으려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랜 토리노를 탐낼 뿐이다. 그러나 그랜 토리노는 단순히 값나가는 빈티지 차가 아니다. 그랜 토리노는 물려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만 물려질 수 있는 것이다. 세계의 중심, 자본주의적 가치의 성지, 아메리카를 지켜낼 수 있는 자만이 그랜 토리노의 진정한 상속인이다. 그것이 폴란드계건 이태리계건 몽족이건 말이다.

 

처음에 몽족은 이방인 침입자였다. 말도 예의도 통하지 않는 낯선 야만인. 그러나 그의 곁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타자들이다. 싹싹하고 착하든, 진중하고 과묵하든, 껄렁거리고 위험하든, 히스페닉이건 몽족이건 모두 타자이다. 타자 없는 그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싫든 좋든 그들과 엮이고 그들의 삶에 연루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싫다면 떠나야 할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의 핏줄은 모두 그를 떠나 그가 혐오하는 천박하고 무가치한 세계를 살고 있다. 그는 타자와 함께 존재하거나, 핏줄과 함께 무가치한 세계에 생존해야 한다. 그는 몽족의 과묵하고 착실한 남자 아이를 진정한 ‘아메리칸’으로 만들기로 한다. 거친 남자들의 농담, 아메리카를 건설했던 기술, 미인을 꼬드기는 방법까지. 그러나 정의를 명분으로 한 어설픈 힘의 과시는 몽족 갱들의 보복을 불러 오고, 남자 아이의 누나는 처참한 유린을 당한다. 과거의 힘에 대한 무의식적 과신이 불러 온 참담한 결과는 그를 어떤 선택으로 몰아간다. 죽거나 혹은 또 죽거나! 고개를 숙이고 죽어 살거나, 대의 속에 살아 죽거나. 대의의 세계에서 죽거나 생물학적으로 죽거나. 이제 그에게는 그 자신의 대의가 속하는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혹은 어쩌면 그 세계 자체가 쇠락하여 죽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선택은 핏빛 노을처럼 저무는 것이다. 매트릭스 3부의 네오처럼, 혹은 진정한 God처럼 죽음으로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 준다. 몽족의 사내 아이는 그의 개를 옆에 앉히고 그랜 토리노로 아메리카를 질주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지키고 싶은 미국적 가치는 무엇일까? ‘이 땅은 아메리카의 식민지’라는 어느 시인의 외침 속에 성장한 동방의 이방인에게는 진정한 미국적 가치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식민 제국인지 자유의 수호자인지에 관한 명확한 입장이 있을 뿐, 저 개척 시대와 독립 선언을 거쳐 자본주의 종주국에 이른 미국이란 나라의 본질적 가치, 그 진정한 보수적 가치가 무엇인지, 그것의 쇠락을 바라보는 진정한 ‘아메리칸’의 회한은 무엇인지, 그 쇠락에 대한 반성의 의의는 무엇인지를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애잔한 아름다움이 느껴질 뿐이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그 장엄함 속에 알 수 없는 슬픔이 느껴지듯 말이다. 헨리 제임스가 쇠락해 가는 유럽에서 만났던 단단한 중핵, 그 숭고함 같은 것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가 뻗어 나가는 힘 속에서 , 과거 우리를 속박했던 미국을 삼킬 수도 있다는 패기만만한 젊은 대한민국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겨우 200여년의 짧은 역사 속에 미국 자체가 이룩했던 것이라곤 어짜피 표피적인 물적 부에 그쳤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전혀 개인적인 무감각, 몰 역사성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래도 궁금한 것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어떤 아메리카를 위해 식코의 무어 감독을 총으로 쏴버리고 싶다고 했는지 이다. 그랜 토리노의 그는 한국전에 참가했다. 그는 그 때 받은 훈장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지만, 그것은 영광인 동시에 고통이다. 그 훈장이란 것이 결국 반항하지도 못하는 어린 소년병(?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들을 학살하듯 죽인 대가라는 것을 그는 고통 속에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몽족 소년의 가슴에 그 훈장을 달아 준다. 그것은 어떤 아메리카적 가치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로부터 자유주의를 수호했다? 혹은 자본주의를 수호했다? 혹은 작은 식민지 하나를 개척했다? <미스틱 리버>의 월남전에 대한 상흔도 마찬가지이다. 무엇인가 고통스럽지만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어떤 상황이 불현듯 닥쳤고 겪어 내었고 고통 속에서도 상처를 봉합하고 아메리카를 위해 거리를 행진한다. 비록 그 행렬 속에 누군가 길을 잃고 방황한다 할지라도.

 

미국인이 보는 ‘아메리카’와 타자들, 특히 미국의 식민지민들이 보는 ‘아메리카’가 같을 수는 없다. 그들 자신의 고통스러운 반성은 때로는 장엄함과 아름다움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그 반성이 가식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타자의 시각에는 명백한 ‘잘못’도, 그들에게는 어렴풋이 인식하는 것조차 그토록 힘겹다. 더욱이 진정한 문제는 그 ‘인식’ 혹은 ‘인정’으로 범죄 자체를 은폐한다는 것이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그들은 스스로 인정했다는 그 사실에 도취되어 있다. 범죄 자체의 잔혹함은 오히려 깨달음의 황홀경을 위한 배경으로 전도된다. 그렇게 미국적 반성은 범죄의 은폐물이 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장엄한 아름다움은 그래서 극단적인 위험일 수도 있다. 물론 미국인들 자신들에게 1차적으로 가장 위험하리라고 생각되지만, 타자들에게도 때때로 그 당당한 아름다움은 미혹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미국인들 자신에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실제로 무엇인지 나는 모르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굽히지 않는 완고함만도 아니고 지식인의 섬세한 고뇌만도 아니다. 그 눈은 마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 것 같다. 나는 당당히 의지를 갖고 살았지만, 그것이 때론 과오를 저지르게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오를 회피하지도 않았고 그 고통에 굴복 당하지도 않았다. 우리 삶은 느닷없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재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는 지켜내야 할 어떤 가치가 있다. 신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고 성직자는 그저 애송이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성사는 필요하고 신은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애초에 신을 몰랐으니 무신론자가 될 필요도 없고, 처음부터 삶은 재난도 행운도 아니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했으니 지켜야 할 어떤 가치도 알지 못한다고, 때때로 막연히 우울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매혹 당한 이유는. 그것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일지라도, 나는 그 노인의 깊은 주름에서 그 매혹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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