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의 것들 이판사판
고이케 마리코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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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고 싶어지는 공포가 아니라 그 자리에 못 박힌 듯한...

무섭지만 시선이 빨려 버리는 듯한 그런 공포”(p226)

 

무섭지만 따스한 한편으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문예평론가 이케가미 후유키)

 

2017년 출간된 고이케 마리코의 괴담-서늘한 기척은 제목에 걸맞게 수록작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등장하는 기이한 이야기들이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이 풍기는 분위기나 남겨 놓은 자취들은 대부분 온기가 도는 것들입니다. 그런 탓에, 좀 이상한 조어지만, 개인적으로는 따뜻한 호러라고 명명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5년 만에 다시 만난 고이케 마리코의 괴담집 이형의 것들역시 전작과 비슷한 궤적을 그리고 있는데, 굳이 따지자면 수록된 여섯 작품 중 세 편은 고이케 마리코 특유의 따뜻한 호러이고, 나머지 세 편은 정통에 가까운 호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망자가 품은 어찌할 수 없는 미련과 안쓰러운 집착을 그린 숲속의 집’, 세상에 존재할 리 없는 이세계(異世界)를 경험한 한 여자의 이야기를 다룬 히카게 치과 의원’, 노년에 이른 여자가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과 이웃하고 지냈던 반세기 전의 시절을 회상하는 붉은 창등 세 편은 한 문예평론가의 표현대로 무섭지만 따스한 한편으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작품들입니다.

반면 질투와 원망이 가득 찬 귀신 얼굴을 본 딴 가면을 쓴 여자와 마주한 뒤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리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 얼굴’, 남편이 죽은 뒤 집안에 나타나기 시작한 이국의 유령 때문에 전율하는 한 여자의 사연을 다룬 조피의 장갑’, 메이지시대부터 온천여관 지하동굴에서 목격된 두 유령 이야기를 그린 산장기담등은 사념 혹은 원념에 바탕을 둔 정통 호러에 가까운 작품들입니다.

 

주제나 소재 자체가 따뜻한 호러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고이케 마리코만의 개성이 더욱 강하게 드러나는 대목은 달고 찬 민트 같은 냄새가 가득한 겨울 숲”, “(거무스름한 우윳빛 같은) 음울한 안개”, “잘 익은 토마토의 과즙 같은 저녁놀등 오감을 자극하는 풍성한 감각적 묘사들입니다. 분명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들을 다루는 괴담집임에도 불구하고 고이케 마리코가 풀어놓은 아름답다고 할 수밖에 없는 시적 혹은 미적 표현들에 빠져들다 보면 정작 무서움보다는 안쓰러움이나 애틋함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데, 그 덕분에 단순히 기괴한 분위기를 강조하는데 역점을 둔 일반 괴담집과는 전혀 다른 결의 서사를 맛볼 수 있게 됩니다.

 

다만 진짜 무서운 괴담을 기대한 독자에겐 다소 심심하게 읽힐 수 있다는 점 역시 사실입니다. 그런 취향의 독자라면 미쓰다 신조나 스티븐 킹을 택해야 하겠지만, 가끔은 고이케 마리코의 특별한 괴담을 간식처럼 맛보는 것도 아주 괜찮은 선택이라는 생각입니다. 무서움보다는 애틋함이, 소름보다는 온기로 채워진 괴담에 흥미를 가진 독자라면 고이케 마리코의 괴담집을 꼭 찾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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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탑의 라푼젤
우사미 마코토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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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 후 공업과 유흥의 도시로 성장했지만 빈곤과 폭력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위험하고 더러운 곳이라는 이미지가 고착된 다마가와남부. 아동상담소의 마쓰모토 유이치는 아동가정 지원센터의 마에조노 시호와 함께 문제 있는 가정들을 방문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성실한 공무원입니다. 유이치와 시호가 특히 주목한 건 6살 아들 소타를 학대하고 방치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시이 집안. 한편 화려한 전망탑 아래 폐창고가 늘어선 부둣가의 빈촌에는 언젠가 이곳을 떠날 결심을 한 필리피노카이, 정체성 때문에 혼란을 겪는 재일한국인야스나리, 그리고 어려서부터 성적 학대를 당해온 나기사 등 18살 청춘들이 막장 같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그들 앞에 말문을 닫아버린 어린 소년 하레가 나타납니다.

 

호러, 판타지, 미스터리 등 다양한 장르가 포진된 단편집 소녀들은 밤을 걷는다와 개인적으로 ‘2020년 미스터리&스릴러 베스트 11’으로 꼽은 어리석은 자의 독등 앞서 만난 우사미 마코토의 작품들은 모두 깊은 인상과 여운을 남겨줬습니다. 덕분에 그녀의 신작 소식이 너무나 반가웠는데, 독특하고 깊이 있는 미스터리를 기대했던 탓인지 신작의 제목과 표지를 보곤 살짝 의아한 생각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다만 아이들은 죽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라는 홍보카피 때문에 피해자가 어린이인 음울한 미스터리가 아닐까 예상했는데, 결과부터 말하면 그 예상은 절반쯤만 들어맞았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 축으로 전개됩니다. 우선, 학대받는 아이들의 문제는 결국 가정 내에서 해결되는 게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가진 아동상담소 공무원 유이치와 사회가 좀더 적극적인 태도로 문제가정에 개입해야 되며 필요하다면 아이와 부모를 분리하는 게 최선책이라 믿는 시호가 서로의 생각 차이 때문에 크고 작은 갈등을 겪으며 여러 케이스의 아동학대사건을 다룹니다. 학대, 방치, 성폭력 등 다양한 케이스가 등장하지만 그중에서도 6살 소년 이시이 소타의 학대와 방치가 유이치와 시호의 주된 관심사입니다.

도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전망탑 인근에 사는 18살 청춘들의 이야기는 더욱 암울합니다. 빈곤과 폭력에 시달리며 유년기를 보낸 다마가와시의 10대들에게 밝고 희망찬 미래 따윈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모들은 여전히 개망나니 같고, 또래들은 일찌감치 잔인한 먹이사슬 구조에 편입될 수밖에 없으며, 다마가와시를 떠나지 않는 한 내일은 오늘과 조금도 다를 것 없는 암담함 그 자체입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성노예로 살아온 나기사가 전망탑을 바라보며 동화 속 라푼젤의 구원만을 고대하는 모습은 그저 안타깝고 서글플 따름입니다.

마지막으로 불임 때문에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내는 30대 부부 이쿠미와 게이고의 삶이 그려지는데, 특히 어떻게든 아이를 낳고 싶어 온갖 방법을 시도하는 이쿠미가 자신의 아이를 학대하는 이웃의 부모를 지켜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는 이야기가 눈길을 끕니다.

 

인터넷서점에서 추리/미스터리 소설로 분류되긴 했지만 전망탑의 라푼젤은 참혹한 현실을 고발하는 르포 혹은 그 와중에도 사소한 관심에서 구원이 탄생할 수 있다. 좌절과 절망뿐인 현실에서 누군가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야말로 인간의 삶을 기적으로 이끄는 첫걸음이다.”라는 주제를 앞세운 휴먼 드라마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세 이야기가 한줄기로 엮이는 대목은 미스터리 못잖은 반전과 트릭을 선보이긴 하지만 역시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희망 가득한 메시지로 읽힙니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전망탑의 라푼젤 따윈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구원과 희망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건 누구나 쉽게 써내려갈 수 있겠지만, 우사미 마코토는 서로 다른 결의 세 개의 이야기와 절묘한 트릭과 막판 반전을 통해 그저 막연하고 현실감 없는 희망 판타지가 아니라 더욱 더 설득력 있고 공감 가능한 이야기를 자아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앞으로도 우사미 마코토의 작품들을 계속 출간할 예정이라는데, 독특한 서사와 깊이 있는 이야기에 빠진 저로서는 그녀의 신작 소식을 늘 기다리게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어리석은 자의 독과 같은 특별한 미스터리라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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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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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소설가 히다카 구니히코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사체로 발견됩니다. 히다카의 젊은 아내와 함께 사체를 발견한 건 히다카의 친구이자 교사 출신 아동문학작가인 노노구치. 노노구치는 한때 같은 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던 가가 교이치로가 담당 형사임을 알곤 깜짝 놀랍니다. 가가는 노노구치가 작가적 호기심 때문에 수기 형태로 기록한 사건 당일의 정황을 참고자료 삼아 수사에 나서고 이내 그 수기를 바탕으로 범인의 정체를 파악합니다. 하지만 체포된 범인은 자신의 범행 사실을 인정하기만 할뿐 왜 히다카를 죽였는가?”라는 동기에 관해서는 일체 입을 다물어버립니다. 가가는 집요한 탐문과 증거 수집을 통해 범인의 동기를 파악하는데 성공하지만 사건의 이면에 또 다른 진실이 있음을 감지합니다.

 

악의가가 형사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입니다.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완성형의 가가 교이치로를 만날 수 있으며, 교사였던 그가 왜 교직에서 물러나 경찰이 됐는지를 엿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말하자면 형사로서 본 궤도에 오른 가가의 맹활약과 함께 전작인 잠자는 숲에서 독자에게 소개되지 않은 그의 경찰이 되기 전의 이력을 엿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가급적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이나 다른 독자의 서평을 읽지 말 것을 권하고 싶은데, 비록 초반에 범인이 공개되고 이후 범인의 동기를 찾는 것이 주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범인이 누군지 알면 초반부가 다소 김이 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범인이 누군지 설명하지 않곤 작품을 소개하기 난감한 탓에 저 역시 두루뭉술한 인상 비평 이상의 서평을 쓰기가 어렵겠지만 역시 아무 정보 없이 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입니다.

 

악의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작품의 핵심은 누가?’ 또는 어떻게?’가 아니라 ?’입니다. 체포된 범인은 자신의 범행을 순순히 인정하면서도 동기에 대해서만큼은 입을 다무는데, 가가는 상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범행동기 속에 사건의 진실이 있다고 확신하곤 집요하리만치 수사를 이어갑니다. 그리고 기어이 범인의 동기를 알아내지만 수사를 마무리하기 직전 찰나의 순간에 눈에 들어온 어떤 장면하나 때문에 앞서 얻은 결과에 의구심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범인과 피해자의 과거를 이 잡듯이 뒤진 끝에 사건 속에 깃든 진짜 악의선의를 파악함으로써 자칫 뒤바뀔 뻔한 두 사람의 운명을 제자리에 돌려놓습니다.

 

이미 한 번 완주한 바 있는 가가 형사 시리즈의 기억에 따르면 가가의 능력은 물증과 단서를 통한 추리보다는 사건 관련자들의 심리를 파악하고 미묘한 태도 변화에 주목하다가 그것들을 물증과 단서에 연결시키는 대목에서 더 빛났던 것 같습니다. ‘악의는 그런 가가의 능력이 십분 발휘된 작품으로, 어떻게든 범행동기를 감추려는 범인이 쳐놓은 교묘한 덫을 해제하고 그의 심리적 동요와 태도 변화를 지켜보던 가가가 오랜 시간 축적돼온 악의의 정체를 파헤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야말로 와이더닛(whydunnit) 미스터리의 진수라고 할까요?

 

시리즈 첫 편 졸업에서 대학졸업반 시절이던 가가는 다음 작품인 잠자는 숲에서는 이미 7~8년 이상의 커리어를 지닌 30대 초반의 경시청 수사1과 형사로 등장합니다. 7~8년 가운데 2년 정도를 중학교 교사로 재직했다는 간략한 정보만 소개됐었는데, ‘악의에서는 그가 교직을 접고 경찰이 된 사연이 공개됩니다. 힌트만 공개하자면 학교폭력때문인데, 그 사연은 이번에 맡은 소설가 살인사건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어서 가가로 하여금 더더욱 진실 찾기에 집착하게 만들었습니다. 즉 아직도 큰 상처로 남아있는 교직 시절의 사건 때문에 가가는 이번 사건의 범인이 품은 악의에 대해 더욱 분노하고 더욱 열심히 수사에 나선 셈인데, 그래서인지 다 읽은 뒤엔 통쾌함이나 시원함과는 거리가 먼 씁쓸한 여운이 더 깊고 짙게 남았습니다.

 

다음에 읽을 작품은 시리즈 4편인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입니다. 독특한 결말이었다는 점만 기억에 남아있는데, 덕분에 처음 읽는 듯한 기대감과 함께 완성형의 가가 교이치로가 어떻게 더 진화하게 될지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중구난방으로 읽을 때와는 달리 주인공의 성장을 순서대로 읽으며 지켜보는 것은 역시나 흥미진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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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브 디거 밀리언셀러 클럽 66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전새롬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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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학대와 폭력 속에 비뚤어진 성장기를 보내며 크고 작은 전과를 쌓아온 야가미 도시히코. 32살이 된 그는 뒤늦게나마 자존감을 되찾고 그간의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 골수를 기증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이식 수술을 코앞에 둔 어느 날, 야가미는 느닷없이 살인용의자로 몰린 것은 물론 정체불명의 사내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어떻게든 추격을 뿌리치고 수술 병원에 도착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2중으로 추격당하는 야가미의 처지는 갈수록 위태로워집니다. 한편 30대 감찰계 주임 겐자키와 정년이 얼마 안 남은 기동수사대 최고참 후루데라는 하룻밤 사이 연이어 기이한 살인행각을 벌이는 일명 그레이브 디거를 수사하면서 동시에 야가미의 행적을 쫓던 중 상상치도 못한 진실을 발견하곤 충격에 빠집니다.

 

데뷔작인 ‘13계단에 홀딱 빠져 뒤이어 출간된 다카노 가즈아키의 작품들을 연달아 읽은 건 2000년대 중후반의 일입니다. ‘그레이브 디거는 그의 두 번째 장편으로, 무척 흥미진진한 미스터리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니 숨 돌릴 틈 없는 도주극과 전대미문의 연쇄살인이 뒤섞인 (해설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면) ‘논스톱 서스펜스였습니다. 속죄를 위해 골수 이식을 결정한 악당 주인공, 그를 추격하는 정체불명의 사내들, 중세 영국의 처형 수법을 모방하여 충격적인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일명 그레이브 디거’, 그리고 상부를 속여 가면서까지 진실 찾기에 나선 젊은 감찰계 주임과 기동수사대 최고참 콤비 등 매력과 카리스마를 겸비한 인물들이 12시간에 걸친 숨 막히는 추격전을 이끕니다.

 

야가미의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무사히 병원에 도착하여 자신의 골수를 기다리는 백혈병 환자에게 새 생명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자신을 살인용의자로 오인하는 경찰로부터, 또 무슨 이유에선지 자신을 붙잡으려는 정체불명의 사내들로부터 도망치는 와중에도 야가미는 오로지 무사히 병원에 도착하는 것만을 원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차곡차곡 모은 단서들을 통해 야가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조금씩 눈치 채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악연 아닌 악연을 맺어온 후루데라 경장이 자신을 쫓고 있다는 사실에 아이러니함을 느끼면서도 그에게 기댈 수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 작품의 타이틀 롤이자 연쇄살인을 벌이는 그레이브 디거의 행각은 그야말로 엽기 그 자체입니다. 사지를 묶은 뒤 끓는 물에 삶아 죽이고, 온몸이 찢어지기 일보 직전에 이르도록 추락시키는가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불로 태워 죽입니다. 수사진은 이런 기괴한 살해수법이 중세 영국의 처형 수법과 꼭 닮았다는 사실을 알아내지만 범인이 왜 그토록 무리한 방법을 구사하는지는 도무지 알아낼 길이 없습니다. 그에게 살해당한 인물들의 접점을 가까스로 알아내긴 하지만 오히려 수수께끼는 더욱 복잡해질 뿐입니다.

 

야가미의 추격전과 그레이브 디거의 연쇄살인에 못잖게 흥미로운 대목은 경찰 내부의 알력입니다. 형사사건을 다루는 수사부와 테러 혹은 정치적 사건을 다루는 보안부 사이의 갈등이 꽤 비중 있게 그려지는데, 사건 자체와 무관해 보이던 이 갈등은 막판 클라이맥스와 엔딩에 큰 영향을 미칠 정도로 중요한 설정이라 내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개인적으론 짜릿한 반전과 시간제한 미스터리가 잘 배합된 ‘13계단에 좀더 높은 평점을 줬지만, 장르적 매력에 관해서만큼은 그레이브 디거가 압도적이라는 생각입니다. 또 다양한 소재와 코드들을 복잡하면서도 정교하게 짜인 판 위에 빈틈 하나 없이 펼쳐놓은 필력은 이후 출간된 제노사이드의 예고편처럼 느껴져 역시 다카노 가즈아키!”라는 감탄이 저절로 튀어나올 정도였습니다. 독자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도 있지만 “‘환불 보장을 내세워도 좋을 걸작.”이라는 해설속 문구는 제겐 절대 과장광고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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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의 손길
치넨 미키토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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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30대 중반의 다이라 유스케는 준세이카이의대 대학병원 흉부외과 8년차 의사입니다. 가혹한 근무환경과 열악한 처우 때문에 모두가 기피하는 흉부외과지만 유스케는 의대 시절부터 오로지 최고의 흉부외과 의사가 되기 위해 정진해온 인물입니다. 하지만 흉부외과 의사로서의 미래를 결정지을 파견 인사를 앞두고 유스케는 극도로 예민한 상태입니다. 최고의 파견 자리 하나를 놓고 1년 후배인 하리야와 경쟁해야 하는데, 그는 다름 아닌 흉부외과 과장 아카시의 조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와중에 유스케는 아카시 과장으로부터 원하는 곳으로의 파견을 전제로 두 가지 요구를 받습니다. 하나는 신입 인턴 3명 중 2명을 흉부외과에 영입해야 한다는 것, 또 하나는 아카시 본인의 논문 조작설을 주장한 괴문서 유포자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치넨 미키토는 현직 의사이자 미스터리 작가지만 무척 특이한 행보를 보여왔습니다. 읽은 작품만 따져 봐도 가면병동시한병동이 본격 미스터리와 의료 서스펜스를 절묘하게 결합한 작품이라면, ‘리얼 페이스는 성형의 빛과 그늘을 다루면서 거기에 연쇄살인사건을 접목시킨 작품이고, 최근에 읽은 유리탑의 살인(메디컬과는 전혀 무관한) 신본격 미스터리의 부활을 선언하는 듯한 정통 미스터리입니다. 그야말로 장르를 불문하고 종횡무진 활약하는 의사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자의 손길은 치넨 미키토가 자신의 본업을 소재로 집필한 메디컬 휴먼 드라마라서 더욱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체로 메디컬 드라마의 주인공은 의술과 인품을 골고루 갖춘 완벽한 인물이거나 의술은 뛰어나지만 어딘가 모난 구석이 있는 괴짜 캐릭터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 유스케는 무척이나 현실적인의사입니다. 물론 병원 내 권력다툼 같은 데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환자를 위한 순수한 헌신과 최고의 흉부외과 의사가 되겠다는 뜨거운 열정을 지닌 점에선 보통 주인공들과 다를 바가 없지만, 지극히 속물적인 욕심(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고의 파견 자리를 반드시 차지하고 말겠다!)에다 소심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은 물론이고 요령 없다는 평가와 함께 팔랑귀에 가까운 가벼운 처신도 수시로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과장의 조카인 하리야에게 최고의 파견 자리를 빼앗길 가능성이 농후한 상태에서 유스케에게 던져진 동아줄은 두 개. 하지만 어느 하나 쉽지 않습니다. 오래 전부터 흉부외과 지원자가 사라지다시피 한 현실에서 3명의 신입 인턴 중 2명을 반드시 잡아야 하고, 과장의 논문 조작설을 제기한 괴문서 유포자를 찾아내는 일은 안 그래도 격무에 시달리는 유스케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미션으로 보일 뿐입니다. 더구나 인턴들을 유혹(?)하기 위해 나름 고안해낸 배려가 오히려 날선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괴문서 유포의 용의자가 흉부외과 내 고위직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오히려 유스케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설정만 보면 미스터리가 곁들여진 꽤 시끌시끌한 소동극처럼 보이지만 구원자의 손길8년차 의사 유스케가 진짜 의사로 성장하는 이야기이자, 용감하게 흉부외과에 도전하는 신입 인턴들의 분투기이며 병원 내 권력투쟁의 단면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정통 메디컬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또 생명과 직결된 흉부외과가 주 무대이다 보니 감동 코드도 풍성했는데, “마지막 1페이지에 반드시 눈물짓게 될 것이다!”라는 출판사 소개글과 달리 제 경우엔 최소 네 번은 울컥함에 눈가가 뜨끈해졌습니다. 그건 역시 욕심 많고 소심하고 요령 없는 팔랑귀지만 진짜 의사의 모습을 진정성 있게 보여준 유스케의 캐릭터가 그만큼 매력적이고 사랑스럽고 무엇보다 내가 아플 때 이런 의사를 만날 수 있다면!”이란 생각이 저절로 들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유스케의 엔딩은 일반적인 메디컬 드라마의 주인공의 그것과 사뭇 다릅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공감이 갔고, 응원하고 싶어졌고, 박수를 보내고 싶어졌습니다. ‘구원자의 손길이란 제목 대신 의사의 길이 더 어울릴 것 같은 그의 엔딩은 반드시 후속편을!!!”이란 간절한 바람을 갖게 만들었는데, 과연 치넨 미키토가 유스케의 다음 이야기를 독자에게 선사해줄지 너무나도 궁금해질 따름입니다.

 

(사족으로.. ‘옮긴이의 말에 이 작품의 주요 조연인 스와노 료타가 신의 카르테의 주인공이라고 돼있는데, 그는 치넨 미키토의 작품 기도의 카르테의 주인공입니다. 중쇄를 하게 되면 꼭 수정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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