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 2 - 5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5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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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카이사르는 장발의 갈리아에 있다. 갈리아인들과의 싸움에서 여러 차례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그들의 반발은 잠잠해질 것 같지가 않은 상황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점차 정돈이 되어 가는 느낌이지만, 콜린 매컬로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 전쟁이 과연 끝나기는 할까 하는 회의감이 좀 더 짙게 든다. 두 작가 모두 카이사르라는 인물에게 푹 빠져 있는 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 이 시기를 보는 관점이 퍽 다른 게 재미있다.


갈리아 전쟁 후반부에서 카이사르를 가장 괴롭혔던 인물은 베르킹게토릭스(보통은 베르킨게토릭스라고 쓰는데 이 책에선 이렇게 표기한다)였다. 갈리아인이라고 통상 부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부족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들이 서로 협력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 그도 그럴 것이 갈리아 하면 오늘날 중부 유럽의 대부분을 가리키는 넓은 땅이고,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에 갈리아 전역이 일치단결한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땅과 인구는 많지만 갈리아인들이 로마군에게 연전연패했던 것은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겼던 베르킹게토릭스는 이 불가능한 작업에 도전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큰 약점이 있었는데, 그의 출신 부족이 세력이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좀 더 큰 부족을 이끄는 이들은 그가 앞으로 나서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고 있었고, 형식적으로는 머리를 숙였으나 내심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으니까. 만약 그가 아이두이족 같은 유력한 부족의 대표였다면 갈리아전쟁의 결과는 달라졌을까.


이야기를 읽어 나가면서 오늘날의 EU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2천 년 전 베르킹케도릭스가 꿈꿨던 갈리아의 통일(물론 EU는 당시 갈리아인에게 큰 위협이었던 라인강 동쪽의 게르만족의 땅도 포함되어 있긴 하다)이 마침내 실현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EU 내부의 알력과 각 국가별로 다른 정치적, 경제적 상황 때문에 다들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으니 여전히 EU가 하나의 공동체가 될 수 있을 지는 미심쩍다.





그래도 전쟁에서 수는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모든 갈리아인들이 다 함께 들고일어난 것은 아니라도, 당장 모인 수만 해도 족히 수십 만 명이었으니, 제한된 수의 군대만 이끌고 갈리아 전역에서 싸워야 했던 카이사르로서는 가볍게 볼 수 없는 적이었다. 만약 그들이 한 자리에 모여 로마군과 대규모 회전을 벌이겠다는 생각만 안 했더라면...


갈리아 전쟁의 대미는 알레시아 공방전이 장식한다. 알레시아 요새를 둘러싼 로마군의 압도적 포위망, 외부에서 적의 지원군이 올 것까지 대비해 성을 둘러싼 방향만이 아니라 그 바깥에도 대비가 되어 있는, 어떻게 보면 도넛 모양으로 안과 밖에서 적과 맞서야 하는 일종의 배수진 비슷한 전술이었지만, 카이사르의 병사들은 그 어려운 걸 해 냈고, 마침내 전쟁은 사실상 끝이 난다.


전체의 윤곽을 그리고 시간대 별로 변해가는 상황을 서술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는 시오노 나나미와 일종의 극으로서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콜린 매컬로의 방식은 여기에서도 다시 한 번 차이를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로마인 이야기의 방식을 더 선호하는데, 어느 정도 선이해가 없이 보면 그냥 ‘치열하게 싸웠다’ 수준을 넘기가 어려우니 말이다.


사실 말이야 쉽지 포위망의 안팎에서 공격해 오는 적과 싸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배수진은 퇴로를 차단해 끝까지 싸울 수밖에 없도록 아군을 몰아가는, 마지막 전술 같은 건데 이런 전술이 늘 유효하지 않다는 건 임진왜란 초기 조선 기마군을 사실상 전멸시킨 신립의 탄금대 전투가 잘 보여준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했던 건, 역시 부하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카이사르의 능력 때문이지 않았나 싶다(실제 작품 속에서도 그런 언급이 자주 보인다). 전적인 신뢰, 그리고 존경 어린 시선을 받는 장군은 그의 부대가 갖고 있는 힘 이상을 끌어낼 수 있다. 물론 그런 존경과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당연히 자신의 “능력”을 여러 차례 보여주어야 했을 거고. 탁월한 리더는 단순히 말빨이나 심리조종이 아니라 확실한 능력 위에 공정함과 너그러움, 정치적인 감각 또한 갖춰야 했다.





한편 로마 본국에서는 끝을 알 수 없는 막장 행보가 계속 이어진다. “보니”라고 불리는 원로원 내 보수파들은 어떻게든 카이사르를 실각시키기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그가 저지르지 않은 온갖 범죄혐의를 뒤집어씌우기도 하고, 그의 적법한 요구는 철저하게 무시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를 반역자로 몰아 일찌감치 포섭해 둔 폼페이우스를 동원해 군사적으로 제압하려는 시도까지... 결국 아마도 다음 편에 나올, 루비콘 도하는 보니파가 작정하고 카이사르를 밀어붙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는 보니파도 뭐 대단한 것 하나 없었다. 그들 모두가 태생적인 귀족 혈통이었던 것도 아니었고(오히려 카이사르가 속한 율리우스 씨족이 대표적인 파트리키였다), 대표적인 반 카이사르파였던 카토는 평민귀족 출신으로 같은 보니파 내에서도 과하다고 여길 정도로 자기 고집에 빠져있는 유아독존적 인물로 묘사된다. 심지어 자신의 마음의 평정이 깨진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는, 그러면서도 또 그녀를 잊지 못해 새 남편이 죽자 다시 그녀와 재혼을 하는 뭣도 아닌 그런 인간.


사실 곧 이어질 내전을 앞두고, 카이사르의 반대편에 서게 될 인물들을 지속적으로 깎아내리고 있는 콜린 매컬로다.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갈리아 전쟁 내내 카이사르의 오른팔 같은 인물로 묘사되던 라비에누스는 야만적 성향이 강한 촌뜨기로(그는 내전이 시작되면서 폼페이우스에게 달려가는데, 시오노 나나미는 그가 폴페이우스의 클리엔테스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카이사르의 애인 세르빌리아의 아들이었던(그리고 카토의 조카였던) 부르투스는 겁쟁이라 전쟁터는 늘 피해 다니면서 고리대로 돈벌이를 하는 데만 빠져있는 쫌생이로 묘사하는 식이다.


그리고 내전까지는 카이사르의 편에 서 있었지만, 훗날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와 대립했던 안토니우스도 어느 정도 군사적 재능은 있었지만 허영심이 좀 과한 인물로 등장한다. 훗날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독자들이 보면 살짝 미소가 띄워지는 부분. 카이사르를 당장 제거해야 할 무슨 심각한 범죄자로 몰아가던 이들이, 정작 일상에서는 철저하게 비틀린 인물들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이건 뭐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


이야기가 점점 종말을 향해 달려간다. 그래도 아직 카이사르가 암살당할 그날까지는 책이 여러 권 남아 있으니 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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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덕을 구현하는 방식은

첫째, 행동하는 덕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고,

둘째, 덕을 발휘하는 대리적 실천을 독자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대리적 실천이 실제 실천과 같은 것은 물론 아니지만,

대리적 실천을 함으로써 마음의 습관과 사고방식, 인식의 방식이 생겨난다.


캐런 스왈로우 프라이어, 『소설 읽는 신자에게 생기는 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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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교회의 성경
후스토 L. 곤잘레스 지음, 김기철 옮김 / 복있는사람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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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에 관해 믿고 보는 저자 후스토 곤잘레스의 새 책이다. 서문에 팬데믹 상황에 관한 언급으로 보아 정말로 최근에 쓴 책인가 보다. 제목에 나와 있듯, 이 책은 성경에 관한 책이다. 하지만 성경의 내용보다는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는지, 초기 기독교 시기를 배경으로 탐색해 보는 쪽이다.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성경이 만들어졌는지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1부가 가장 재미있었다. 구약은 대체로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일부 아람어 포함), 신약은 그리스어로 쓰였다. 하지만 포로기 이후 신약시대까지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언어는 아람어였다. 신약은 처음부터 번역의 과정을 거쳐 쓰였던 것.


구약의 경우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거룩한 글로 사용해 온 책들과 대부분 겹친다. 하지만 여기에 외경이라고 불리는 주로 포로기 이후 쓰인 책들의 성격을 두고 이견이 생겼다. 70인 역에서는 이 외경도 중요하게 여겼기에, 전통을 따라 가톨릭교회에서는 외경도 제2의 경전으로 여긴다. 하지만 원문에 대한 연구를 중요시했던 종교개혁자들은 유대인들의 인정해 온 히브리 성경에 실려 있는 책들의 권위만을 인정하려 했다. 결국 구약의 목록에 차이가 생긴 이유다.


처음 성경은 가죽 위에 써서 두루마리 형태로 말아 보관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코덱스’라고 불리는, 오늘날의 책과 같은 형태를 일찌감치 널리 사용했다. 저자는 그 이유를 알기 어렵다고 하지만, 사실 성경과 같은 책을 쉽게 찾기 위해서는 코덱스 형태가 훨씬 편하다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 외에도 성경을 장과 절로 구분하는 관행이 어떻게 나왔는지, 성경의 필사본들이 어떤 식으로 전달되면서 오류 생겼고, 그것을 복원하기 위한 노력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인쇄술이 발명이 교회의 신앙생활 방식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등이 이어진다.


2부에서는 성경이 다양한 정황 가운데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3부에서는 성경의 내용에 대한 초기 교회의 해석법으로 시작해, 당대 중요하게 여겼던 성경 속 주제들 몇 가지를 검토한다.





책이 얇기도 하고, 자연히 내용도 개론에 가까운 쉬운 수준인지라 금세 읽을 수 있었다. 위에서 얘기했듯 흥미로운 내용들이 적잖이 담겨 있어서, 읽는 내내 큰 부담 없이 즐거웠다.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말씀”에 관한 그리스도인들의 인식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각각의 시기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최선이라고 여기는 태도로 말씀을 귀하게 여겼지만, 또 지금 보기에 그들의 모습은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을 띨 때가 있었다.


우선 인쇄기의 발명과 그로 인한 성경의 대략 출간이, 그 이전 시기 필사라는 방식을 통해 성경을 제작해온 사람들의 반발을 샀다는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 중 일부는 이 새로운 발명품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성경의 필사 자체를 영적 훈련의 하나로 여겨왔던 이전 시대의 관념을 반복하며 큰 문제가 생겼다고 우려를 표한다.


본질과 부수적 유익을 혼동하거나, 시대적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구세대의 저항으로 볼 수도 있지만, 누구나 성경을 값싸게 손에 들 수 있는 오늘날, 그렇다고 사람들이 성경에 더 익숙해졌는지를 자문해 보면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말씀을 읽고 쓰고 하는 행위 속에서도 우리는 다양한 것들을 훈련하고 익혀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사람은 몸으로도 예배를 해야 하는 존재이니 말이다.


또 하나는 말씀예전과 성찬예전의 긴장관계에 관한 서술이다. 이방인들이 대거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된 시기에는 성경의 내용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라도 말씀을 굉장히 강조했지만, 이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와 함께 이보다 더 큰 기적은 없다는 논리로 말씀이 오히려 약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였다. 개혁자들이 가톨릭의 성찬 교리에 대한 강렬한 비판을 가했던 데에는 어쩌면 이런 이유도 있었던 것일 지도 모르겠다.





초기 교회 시기에 관한 내용이 주가 되지만, 자연스럽게 그와 연결된 이후 시기에 관한 내용도 언급되니 더욱 좋다. 저자의 간명한 문장이 복잡할 수도 있는 내용을 좀 더 쉽게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개론서에 가까운 책인지라 좀 더 자세한 세부사항을 알고 싶으면 다른 책을 펴야겠지만, 또 그렇다고 아주 단편적인 정보만 실려 있는 건 아니다. 성경에 대한 상식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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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4-04-22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종교인들도 스스로 다음과 같이 자평하시더군요.목사님은 자영업,신부님은 직장인,스님은 프렌차이즈 점장이라고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말이 딱 맞는것 같습니다^^

노란가방 2024-04-22 12:21   좋아요 0 | URL
그런 면도 있네요..ㅎ
 
평행우주 - 우리가 알고 싶은 우주에 대한 모든 것
미치오 가쿠 지음, 박병철 옮김 / 김영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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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다시 도전한 물리학 책. 뭐 그래봤자 대중교양서로 쓰인 책이라 아주 전문적인 내용은 아니다(그렇다고 내용이 쉽다는 뜻은 아니고). 책 제목에 “평행우주”라고 떡하니 써 있지만, 다짜고짜 이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법, 책의 1부는 우주의 발생과 현재에 이르기까지 익숙한 우주론에 관한 설명을 담고 있다.


뉴턴의 고전역학에 기초한 과학은 초기설정값만 알면 앞으로 진행될 모든 일들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는 기계론적 우주관(일종의 숙명론, 예정론과도 비슷하다)을 가지고 있었다. 이건 뉴턴의 이론에 (어떤 의미에서) 창의적인 파괴를 이뤄낸 아인슈타인에게서도 발견되는 태도였다. 시간과 공간마저 상대적이라고 주장했던 아인슈타인도 우주에 절대적인 실재와 진리가 있다는 주장은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놈의 양자역학이 나오면서 모든 게 흔들렸다. 어떤 원자의 물리적 위치와 운동값을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는, 그래서 우리는 모든 걸 확률로만 설명할 수 있다는 이 기발한 주장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기존의 주장을 완전히 폐기시키고 말았다. 물리적 최소단위인 양자의 세계에서는 이곳과 저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일도, 이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저쪽에 빛보다 빠르게 영향을 줄 수도 있다. 더 이상 세상은 기계적으로만 해석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우리는 뉴턴의 고전역학이 통하는 것처럼 살고 있다. 사과는 여전히 나무에서 땅으로 떨어지고, 우리는 그걸 중력이라고 부른다. 공을 던지면 저쪽으로 날아가지 던진 반대방향으로 날아가는 걸 볼 수는 없다. 물은 한 번 쏟아지면 다시 컵으로 담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그렇게 될 확률이 다른 사건이 일어날 확률보다 무지막지하게 크기 때문일 뿐이다. 우주의 어딘 가에서는 아래로 떨어져 깨진 컵이 다시 식탁 위로 올라와 원래대로 복구되는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말(실제로 일어난다는 뜻과는 좀 다르다).





아무튼 이 양자역학을 파고들다 보니 좀 더 큰 그림도 보이기 시작했다. 우주에는 크게 네 가지 힘(중력, 전자기력, 강한 핵력, 약한 핵력)이 있는데, 이 중 나머지 세 개는 서로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중 가장 약한 중력은 도무지 다른 것과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지를 도무지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이 네 가지 힘의 상호관계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이론”이야 말로 물리학자들의 성배와 같은 목표다.


그런데 양자역학이 여기에 뭔가 실마리를 던져주는 듯하다. 다만 이 주장을 따라가려면 세상이 10차원이나 11차원쯤으로 되어 있다는 가정이 강력하게 필요하다(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건 현재로서는 검증할 수 없는 주장이지만, 일단 그렇게 가정하고 보면 꽤 많은 난제들이 풀리는 걸 보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느냐는 입장이 꽤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 어딘가에서 평행우주라는 개념이 나온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어떤 양자는 동시에 이곳에도, 저곳에서, 아니 아예 우주 전체에 존재할 수 있다. 사람이 그걸 관찰하는 순간 하나의 위치값을 갖게 되는 거니까. 그런데 이게 도무지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그래서 사람들이 꺼낸 것이 평행우주론이다. 양자는 그것을 관찰하는 순간, 그것이 존재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자리가 실현되는 다양한 우주로 분화된다는 설명이다. 쉽게 말하면 내가 이 오렌지를 먹는 순간, 오렌지를 먹지 않는 또 하나의 가능성이 실현되는 우주가 이 우주와 독립적으로 생겨난다는 거다.(쉽지 않다)





사실 비슷한 내용의(그리고 두께의) 책을 앞서 두 권 정도 읽어봤기에 아주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다. 또 책이 출판된 게 지금으로부터 벌써 20년 가까이 지났기에, 그동안 또 새롭게 발견된 사항들은 당연히 반영되지 않았다(물론 물리학계에서 최근 20년 동안 판을 바꿀 결정적인 뭔가가 등장하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책 제목에 평행우주라는 이야기가 떡 박혀 있으니, 이 쪽에 관해 좀 더 집중적으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겠다 싶었다. 이 부분은 또 어느 정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고.


물리학계 일각에서 우주를 이해하는 데 있어 ‘의식’의 중요성을 주장한다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양자역학에서는 관찰자가 대상을 볼 때 비로소 그 정확한 위치값이 확정되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의 다양한 요소들이 실제로 그 자리에 있으려면 누군가 그것을 의식해야만 하지 않느냐는 취지다. 물론 이 주장이 저자를 포함한 자연주의자들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꽤 신선한 내용이지 않은가. 왠지 오래 전 라이프니츠의 신적 조화 같은 것도 떠오르고.


주류 물리학자들에 의하면 이 우주는 언젠가 끝장이 나고 말 운명이다(사실 이건 성경을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대책으로 다른 우주로의 이주 같은 개념도 나오는가 보다. 다만 이런 주장은 아직은 그냥 아이디어쯤에 불과하고 아주 진지한 건 아니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건, 우주에 별다른 섭리나 인간의 존재 자체의 필연성 따위도 전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저자의 태도다. 그건 과연 합리적인 사고의 결과일까.


확실히 어려운 면이 있다. 그래도 한 번 기분전환을 했으니, 이제 다시 인문학의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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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4-04-21 0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혹 나랑 똑 닮은 도플갱어는 평행우주에서 우리세계로 떨어진 또다른 내가 아닐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