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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내성적인
최정화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평점 :
79년생 여성 작가의 첫 단편집. 2012년에서 2015년 사이에 발표한, 모두 10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꼬치처럼 모두를 꿰뚫는 하나의 키워드가 있으니, 바로 불안이다. 불안, 그것은 현대의 페스트다. 불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도, 그럴 수 있는 곳도 없다. 구조조정이란 말이 본격적으로 들리고, 경제에 대한 불길한 예언이 연일 쏟아지고 있는 지금, 드리워지고 있는 불안이란 장막은 날마다 더욱 넓어지고 두터워져 간다. 그러므로 '지극히 내성적인' 단편집은 문학이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란 말을 믿는다면 지금 문학이 해야 할 말을 하고 있다.
여기 단편의 인물들을 비유하자면, 높고 가느다란 막대 위에서 흔들리면서 돌고 있는 10개의 접시라 해야 하리라. 그것은 정말 불안하게 흔들린다. 하지만 소설의 카메라는 돌리고 있는 손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이 담아내는 피사체는 오로지 위태롭게 돌고 있는 접시 뿐이다. 인물들은 하나같이 불안에 갈팡질팡 하지만 독자들은 정작 그 원인을 알 수 없다. 불안의 진짜 이유는 마치 제목처럼 '지극히 내성적인' 곳에 꼭꼭 감춰진 듯 하다. 그렇게 소설은 불안의 여파만 훑는다. 우리가 음미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엄습한 불안을 어떻게 해소하는가 뿐이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영화 제목처럼 '불안이 영혼을 잠식한다'고 말한다면, 거기에 대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제목을 살짝 바꿔 '나는 어떻게 근심을 멈추고 불안이란 폭탄을 해체하게 되었나'하고 응수하는 격이다. 그런 면에서 10개의 접시들은 지극히 개성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균형을 찾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균형의 경로가 다 적절한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비열하고, 어떤 것은 한심하며 또 어떤 것은 자기 파괴의 성격을 띠기도 한다. 소설은 건조한 묘사 만큼이나 모든 경로에 대해 윤리적 판단을 배제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현상학적이라 할 만하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치중하고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돌린다는 의미다. 분명 독자는 판단이든, 공감이든 어떤 식으로든 소설에 개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언젠가의 자기 모습을 보게 될 것이므로.
두 번째로 나오지만 시기적으로 가장 앞서 있는 '팜비치'는 그녀에게 창비신인소설상을 가져다 준 작품이다. 안정된 가정을 이룬 30대의 남자가 주인공인데, 그는 휴가를 맞아 해변에 갔다가 자신의 일상이 점점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마지막에 그는 발가락에 상처를 입는데, 그것은 마치 자신이 가져온 상어 튜브의 이빨에 물린 것 같다. 상어 튜브가 불안을 상징한다. 그는 휴가를 맞아 아이와 해변에서 놀고 있다가 아내의 명령으로 상어 튜브를 가져오기 위해 해변을 벗어난다. 그의 과거 회상에 의하면 어떤 경로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안을 가져왔다. 회사 동료와 같이 걸어가다 우연히 맡게된 음식 냄새 때문에 멈춰 섰을 때, 그는 승진에서 누락하고 동료는 승진해 결국 혼자가 되었다. 해변에서 벗어날 때 그는 물내음을 맡으며, 슬리퍼 한 짝을 잃어버린다. 이런 식으로 상어 튜브를 찾아가는 길은 불안 속으로 점점 빠지는 길이다. 아니나 다를까, 간신히 상어 튜브를 가지고 돌아오니 아내는 다른 남자에게 눈길이 가 있고 아이는 상어 튜브를 타려 하지 않는다. 아내는 마음을 두고 있는 남자가 진짜 팜비치에 살고 있다고 부러워한다. 그들이 현재 묶고 있는 리조트 이름은 '팜비치'. 그는 발가락의 상처처럼 엄습한 불안을 통해 자신이 진짜라 여겼던 삶이 가짜가 되어가는 것을 느낀다.
이후에 발표된 '구두', '오가닉 코튼 베이브', '틀니',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 '타투'는 그렇게 불안을 안게 된 이들이 삶에 매달리기 위해 어떻게 그것을 지워가는 지 보여 준다.
'구두'는 자신보다 못한 타인에 대한 상대적 우월감을 확인하는 것으로, '오가닉 코튼 베이브'는 진짜 믿지는 않지만 뭔가 거창하게 느껴지는 이념에 동참하는 것으로, '틀니'와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는 나보다 더 우월한 누군가에 기대는 것으로 그리고 '타투'는 그저 회피하고 해결을 지연하는 것으로 불안을 잠시 잠재운다. 맞다. 잠시다. 결국 그들의 모든 시도는 실패하니까. 작가는 그들의 패배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시도의 실패는 다른 경로를 찾게 만든다. '홍로', 대머리' '파란책' 그리고 '집이 넓어지고 있어'가 그렇다. '홍로'는 거짓을 진짜처럼 믿는 것으로, '대머리'는 끝내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으로, '파란책'은 잘 알지도 못하고 성공에 대한 보장도 없지만 무작정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타자의 세계에 뛰어드는 것으로 그리고 '집이 넓어지고 있어'는 환상에 대한 믿음을 통해 불안을 관통해 나간다. 혹은 '극복한다'고 말해도 좋다. 사실, 이 경로의 인물들은 성공하니까.
그렇게 이 단편집은 '팜비치'를 시작으로 하여 불안을 대하는 두 경로가 나와 있으며 하나는 실패로, 다른 하나는 성공으로 귀결된다. 발표된 시점이 두 경로 모두 섞여 있기 때문에 작가가 실패에서 성공으로 나아가게끔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아마도 정말은 이 모든 것을 우리들이 흔히 취할 수 있는 태도 중의 하나로 그저 제시하는 것에 그쳤을 것이다. 현상학적이니까 말이다. 그래도 내게는 말한 바와 같이, 비관과 낙관으로 나뉘어 보이고, 낙관의 경로에서 은연 중에 불안을 이길 수 있는 작가의 조언을 듣는 것 같다.
그런데 낙관의 경로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여기에도 뭔가 공통된 것이 보인다. 이 경로에선 '파란책'이 가장 먼저 발표되었고, '집이 넓어지고 있어'가 가장 나중이다.
'파란책'은 '팜비치'처럼 안정된 일상을 영위하던 중년 여성이 주인공인데, 그녀는 딸의 책상을 자신만의 간이 책장으로 만들었다가 새삼스레 책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여기서 책이란 특정한 책이 아니라 책 그 자체, 즉 '보편으로서의 책'이다. 이것은 그녀가 결국 책을 사려고 서점에 들리는데 오직 책의 두께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데서 드러난다. 책은 그녀에게 전적으로 타자였다. 알지도 못했고 실용적인 목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작정 책의 세계로 빠져든다. 책이 가진 허구 속으로.
'파란책'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다. 하이데거는 니체의 허무주의를 강의하면서 허무주의엔 부정적 허무주의와 긍정적 허무주의가 있다고 이야기했고 니체의 것을 긍정적 허무주의로 보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리의 불안은 궁극적으로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고 결국 그 죽음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불안의 성격도 달라지게 된다. 하이데거는 니체를 통하여 허무, 즉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꿨다. '죽음 때문에'가 아니라 '죽음이 있기에' 오히려 삶의 긍정적 전망이 열린다고 보았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라고. 그녀도 그렇게 된다. 물론 그런 하이데거의 말은 검증할 수 없다. 전적으로 허구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죽음과 허무를 삶의 끝이자 비관이라 생각하는 것도 허구일 지 모른다. 정직하게 보자면 우리는 두 허구 중의 하나를 선택해 믿는 것이 아닐까?
낙관의 경로는 허구의 믿음을 선택한 자들의 것이다. '파란책'의 주인공은 하이데거의 말을 전혀 모르는 남편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자신이 이미 하나의 강을 건너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p. 228)
강, 그것은 현실과 허구 사이에 놓인 강이었고 그녀는 케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넜듯이 허구의 영토로 강을 건너고 말았다. 순전히 자의로. 바로 이것이 공통점이다. '파란책'에 나오는 남편과 같이, '홍로', '대머리, '집이 넓어지고 있어' 모두에서 우리는 주인공과 대립하고 있는 현실 세력들을 볼 수 있다.
'홍로'에서는 여자의 남편이(진짜 남편은 아니고 주인공에게 월급을 주면서 아내로 고용한 사람이다. 즉 여자의 세계는 허구였다. 그녀는 아내를 연기하고 있었고 그 사실에서 늘 커다란 불안을 느꼈다. 그런데 오히려 그 허구를 껴안자, 스스로 진짜 아내라는 거짓말을 믿고 그렇게 행동하자 삶이 안정되기 시작한다.), '대머리'에선 암투병 때문에 벗겨진 머리를 가발로 가리고 있는, 주인공이 결혼하려는 여자의 언니가, '집이 넓어지고 있어'는 그녀를 둘러싼 물리적 세계 자체가 그러하다. 대립하는 현실 세력 모두 패배한다. '홍로'에선 자신은 아직 벗어던져지 못한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허물을 허구를 믿은 여자가 마침내 벗어던진 것을 보며(p. 126), '대머리'에선 '구두'처럼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 대한 상대적 우월감과 '가발'이라는 위장으로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던 현실이 주인공에게 가발이 벗겨져 대머리라는 초라한 모습으로 전락한다. 그런데 주인공은 자신의 삶을 거짓으로 꾸며 결혼하려 하고 있었다. 사실 여자가 가발을 쓰고 주인공을 경멸한 것도, 주인공이 그 가발을 벗겼던 것도 다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주인공의 자존심이 진짜 상처 받았던 것은 자신이 결혼하려는 여자가 원래 패배자에게 잘 끌리는 성향으로 실은 그녀를 유혹할 때 전혀 거짓말을 전혀 할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결국 그는 허구로 지탱해 온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꿈꾸던 결혼이 끝장날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가발을 벗겼고, 거꾸로 그로 인해 현실의 한없이 약하고 초라한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그는 그것을 보며 격한 웃음을 멈추지 못한다. '집이 넓어지고 있어'에선 불가사의한 이유로 자꾸만 넒어지는 집이, 이미 그것만으로도 허구가 현실에게 이기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지만, 자기 집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 집까지 넓어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렇게 현실 세계는 패배하고 허구를 믿었던 이들은 승리한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 허구를 믿었다. 설령 그것이 진실이라는 아무런 보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 믿음을 통해 이전엔 결코 알 수도, 볼 수도 없었던 삶이 가지고 있었던 긍정적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이것을 작가의 조언이라고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일단 한 번 강을 건너 보라며 그녀가 손짓하고 있다고. 어쩌면 이런 조언은 그녀가 소설가이기에 나온 것일 수도 있다. 허구에 대한 강한 믿음 없이 어떻게 허구를 생산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요즘 아주 인기 있다는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란 책에서 호모 사피엔스 자체가 허구의 생산에 있어서도, 허구의 믿음에 있어서도 유달리 뛰어난 능력을 보였고 끝내 그 때문에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허구를 짓고, 허구를 먹었다. 허구가 여기까지 우리를 끌고 왔다. 사실이 이렇다면 작가의 조언을 망상이라며 내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허구에 대한 믿음은 '지극히 내성적인' 망상이 아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믿음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