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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
모신 하미드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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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신 하미드는 파키스탄 출신 작가다.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출간되는 그의 작품이고, 원래는 세번째 작품에 속한다. 그의 이름은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바 있는 두 번째 작품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로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이 책은 2012년에 우리나라에 나왔는데 번역한 왕은철의 후기를 보면 '2013년에 발표할 예정인 소설로 '신흥 아시아에서 엄청난 부자가 되는 법'이 어떤 소설일지 자못 기대된다'는 말이 나와있다. 제목에 사소한 차이가 있다. '엄청난'이 '더럽게'가 되었다. 보통 Rich와 같이 쓰면 '엄청난 부자'로 해석하니까 어떤 단어를 쓰든 틀린 것은 아니다. 중의적 의미로 보면 될 것 같다. 어쨌든 소설은 정말로 2013년에 나왔다. 2016년인 이제서야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조금은 늦은 셈이다.


 그냥 개인적인 생각인데 이 작품은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와 함께 읽으면 보다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판단하게 된 것은 두 작품이 가지는 차이점 때문이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파키스탄인으로 미국에서 살았던 작가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을 충분이 반영하여 미국이라는 외부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반면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은 파키스탄으로 상정되는 아시아에 있는 국가 내부에 일어난 일을 담는다. 전자는 외부인의 시각으로, 후자는 내부자의 시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시각의 차이는 공교롭게도 인칭의 변화와 맞물리는데,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나'라는 1인칭의 소설인 반면, '떠오르는'은 당신이라는 2인칭의 소설이다. 외부자의 시각에서는 1인칭이었던 소설이 내부자가 되니 2인칭으로 바뀐 것이다. 나는 이 변화가 중요하고 이것이야말로 소설 '떠오르는'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할 핵심적인 열쇠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 소설이 왜 하필이면 '자기계발서'를 패러디한 형식을 취했는지와도 상관있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나'라는 주인공이 미국인으로 상정되는 한 사람에게 들려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혹시 알베르 까뮈의 '전락'을 읽어보셨다면 그와 똑같은 형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읽다보면 제목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가 주인공이 아니라 실은 듣고 있는 미국인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그 미국인은 9.11에 대한 그의 반응 때문에 그를 암살하러 온 사람으로(그래서 그는 인종에 대한 근본주의자다.) 그의 고백을 들으면서 죽일까 말까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9.11 이후 전면적으로 대두 되었던 미국과 타자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 '나'가 바로 그 타자이며 그 타자의 내면을 오롯이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소설이 추구하는 바다. 다시 말해 이런 말을 들려주는 것.


 "당신네들은 파키스탄인 모두를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라고 상상하면 안 돼요. 우리가 당신에 미국인들 모두를 변장한 암살자라고 상상하면 안되는 것처럼 말이죠. (...) 나는 당신이 내 얘기의 일부를 불쾌하게 생각했다는 건 알아요. 그렇다고 악수를 청하는 내 손을 거부하지 않기를 바라요."(주저하는 근본주의자, p. 160)


 외부자의 시각과 1인칭은 그를 위한 설정이었다.


 "떠오르는"은 내부로 들어왔다. 소설의 주인공은 이제 '당신'으로 불린다. 파키스탄 같은 나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나 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했고 사랑은 이루지 못했으나 부자는 된 이의 일대기를 건조한 어조로 담고 있는 이 소설에서 그 인물은 내내 '당신'으로 호명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계발서'의 형식을 슬쩍 취한다. 이것은 어떤 효과를 노린 설정일까?


 '주저하는'은 타자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떠오르는'에선 그런 목소리가 더이상은 필요하지 않다. 파키스탄은 온전히 타자의 영토이기 때문이다. 모신 하미드에게 '타자'란 미국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타자를 말한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에 포섭되지 않은, 그래서 고유의 가치관과 독립된 문화로 하나의 거울처럼 신자유주의를 비춰 스스로 자신의 기형적인 모습과 한계를 자각시키는 존재다. '주저하는'은 그 거울을 세웠다. 그런데 '떠오르는'에서는 거울 자체를 문제삼고 있다. 과연 그 거울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말이다. 다시 말해, 모신 하미드는 이런 질문을 소설을 통해 검증해보는 것이다.

 '파키스탄은 미국에게 진정한 타자가 될 수 있는가?'


 미국의 진정한 타자가 되려면 파키스탄이 신자유주의에게서 자유로워야 한다. 하지만 내부의 시각으로 본 결과, 결론은 부정적이다. 우리는 그것을 무엇보다 이 소설이 자기계발서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데서 알 수 있다. 미셸 푸코에 따르면 자기계발서 자체가 신자유주의로 인해 비로소 출현하게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미셸 푸코는 신자유주의를 낳은 학자들의 이론을 점검하면서 그들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이 한 개인을 1인 기업가로 만드는 것이라는 알게 되었다. 즉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하나의 회사처럼 여기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설령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발생한 위험도 사회의 책임이 아니라 한 개인의 책임으로 쉽게 전가시킬 수 있다. 그들이 못 사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게으름과 무능력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것이 신자유주의가 원하는 바였다. 사회적인 것을 철저히 분쇄하여 모조리 개인화 시키는 것. 그렇게 되면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계급 혁명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바로 지금 우리 사회처럼.


 자기계발서는 그 일환이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읽는 사람을 한 개인으로 보도록 만들었으며 자신이 처한 상황 모두가 스스로 초래한 것이라고 믿게 만들었다. 그것은 노력하면 원하는 결실을 얻으리라 달콤하게 속삭였지만 본심은 결코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게 계속 시야의 중심을 자신에게만 두어서 결과적으로는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 눈길이 향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봉사했다. 솔직히 자기계발서는 소위 말하는 돈없고 빽없는 99%의 노예들을 위한 것이었다. 1%에겐 자기계발서 따위 조금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번에 드러난 로스쿨 부정 입학 사건을 보라. 요즘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취업을 위해 다시 큰 돈을 들여 취업 스킬을 가르쳐주는 학원에 나간다고 한다. 자기소개서는 어떻게 쓰고 면접은 어떻게 하고 등등을 학원에서 교육받는데, 로스쿨을 들어갈 때에 든든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것은 전혀 배울 필요가 없다. 그저 자기소개서에 이렇게만 쓰면 되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검사장인 아버지를 보면서 법과 정의가 어떻게... 블라블라' 이러면 합격이다. 아버지나 가족의 직업이 합격의 원천인 것이다. 그러니 자기계발서 따위가 왜 필요하겠는가?


 결국 자기계발서는 노예의 도덕을 유포한다. 라캉 식으로 말하면 '대타자'에게 나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자문하도록 하여 그들이 원하는 인간형이 되는 것이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이중 사고를 하게 만드는 것과 유사하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라는 식으로 서로 상반된 가치를 한 개인에게 별 비판 없이 수용토록 하는 것이 이중 사고가 아니던가. 자기계발서는 그런 것을 조장하고 결국엔 '신자유주의'라는 '빅브라더'에게 봉사토록 만든다. 9.11 이후 미국의 애국자법이 미국인들에게 '자유는 곧 감시'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만들었듯이.


 바로 이런 자기계발서 형식을 빌려왔다는 것이 파키스탄이 제대로 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아니나 다를까, 소설은 자기계발서의 말들을 소제목으로 하고 있는데 정작 소설에선 그것이 보장하는 성공과 행복을 하나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허위와 기만의 말일 뿐이다. 주인공의 행복은 그런 말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신만의 감정에 충실했을 때에 비로소 찾아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주저하는'에서도 핵심이었다. '떠오르는'에서도 그러한데 그래서 모신 하미드에게 '사랑'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랑은, 고린도서 13장의 말을 빌릴 필요도 없이, 타자 중심이다. '떠오르는'은 가족 이야기까지 나와서 사랑이 가지는 타자 중심의 성격을 강조한다. 모신 하마드는 사랑에서 진정한 구원의 거울상을 찾고 있는 지도 모른다. 소설이 보여주는 바 그대로 파키스탄 역시도 거울의 역할을 할 수 없다면 이제 그 거울을 스스로 만들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타자 중심인 사랑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각의 경로이다.

 과연 이 거울이 제대로 정초될 수 있을 것인지, 지금의 나로서는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런 의미에서 얼른 다음 소설이 나왔으면 좋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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