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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압니다.
저는 지금 당신의 시간을 쓰고 있습니다.
영화 '아비정전'에서 아비로 분한 장국영이 장만옥을 붙잡아 억지로 '1분'이란 시간을 함께 했던 것처럼 저 역시 활자로 당신의 시간을 이렇게 붙들어 매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보내고 있는 이 시간이 뭔가 소용이 있고 의미가 있을 수 있도록 만족할 만한 무언가를 드렸으면 좋겠습니다만 재주가 비천한지라 그만한 자신은 없네요.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러니 당신을 가급적 많이 붙잡지 않기 위해 서둘러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레이먼드 카버의 책 이야기입니다.
'대성당'이라는 단편집 이야기입니다.
이 글을 통해 당신이 내 과거의 시간에 참여하고 있듯이
문학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그런 예술이란 것들 모두가 그렇게 타인의 시간에 참여하는 것이란 생각이 행여 드시지는 않는지요?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대성당'을 읽고 유독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대성당'에는 모두 열 두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당신이 레이먼드 카버의 개인사를 아신다면 아마 당신 역시도 저와 똑같은 느낌이 드시지 않을까 싶지만, 그 모두가 쉰 해에 걸친 카버 인생의 어느 한 단면들을 그대로 도려내어 담아낸 것만 같이 느껴지거든요. 그러니까 마치 쉼 없이 흐르는 삶의 시간에서 카메라 렌즈로 어느 하나를 건져내어 오래도록 음미할 수 있도록 앨범에 붙여놓은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맞아요. 딱 그러네요.
'대성당'이란 제목의 카버 개인의 사진 앨범을 뒤적이고 있는 기분. 사진은 그렇지요. 특히나 앨범의 사진은 기묘한 인력이 있지요. 흘러가는 시간에 렌즈를 갖다 대어 무턱대고 잘라 공간화 시켜 버려서 그런가, 텅 빈 우주에 문득 블랙홀이 생긴 것처럼 주위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지요. 그것이 '충실한 복원'이 주는 신뢰감 때문인지는 확언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 때문에 문어가 여덟 개의 팔로 조여 오듯 시선을 붙드는 건 사실이지요. 그런데 무엇에 대한 복원이기에 그만한 마력이 있는 걸까요? 아마도 그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그래서 다시는 도래하지 못할 그 '시간'의 복원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요?. 즉 우리가 그 사진을 보면서 거기 재현된 '진짜-시간(real-time)'에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하기 때문에 그런 마력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요?
제가 '대성당'이 사진 앨범과 같다고 한 건 정말 이 단편집이 그런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대성당'에 실린 단편들은 그냥 이야기가 아닙니다. 카버가 있었던 그리고 느꼈던 그 삶의 '진짜 시간'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는 타임머신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저는 단언할 수 있어요. 이 모든 단편에 실린 그 어떤 경험이든 감각이든 그것이 실제 그에게 있었던 것이라고. 그것을 확신하게 된 계기가 있어요. 무엇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단편을 읽고 나서였죠. 그 단편엔, '삶에는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비극이 있다. 하지만 삶은 또한 뜻하지 않은 곳에서 위로 역시 준비하고 있다(이건 단편을 읽고 든 저의 느낌을 두 개의 문장으로 표현해 본 것입니다만...)'라는 카버의 마음을 담겨 있습니다. 이 단편에는 사경을 헤매고 있는 아들을 둔 아버지가 나옵니다. 아버지는 병원에서 간호를 하다가 잠시 쉴 요량으로 집으로 갑니다. 그런데 가자마자 후회를 합니다. 혹시 자기가 없는 동안에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을 하게 될까 봐.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했던 자신을 영원히 후회하게 될까 봐. 그래서 그는 집에 있는 내내 병원에 있을 때 보다 오히려 더 불안해하며 간간히 걸려오는 전화도 오만가지나 되는 불행한 예상으로 받기조차 두려워합니다. 저는 그 아버지의 얘기를 읽으면서 그건 절대로 문학적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이 실제 카버의 경험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왜냐면 저 역시 그와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죠. 카버와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저 역시 그와 똑같았기 때문이죠. 때문에 아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글은 정말 체험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다는 것을. 그랬습니다.
이런 것이 더구나 비단 이 단편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기에 카버의 실제 체험이 작품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는 생각은 더 커져 갔습니다. '대성당'의 인물들은 대부분 알콜 중독자입니다. 그런데 카버 자신 역시 그랬습니다. 그는 그 중독을 치료하기위해 1년 사이에 네 번이나 입원한 전력도 있습니다. 그 때의 경험이 '내가 전화를 거는 곳'이란 단편에 그대로 투영되어 나오기도 하지요. 또한 '대성당'의 관계들은, 주로 부부 관계를 다룹니다만, 모두 파탄 나 있거나 그 직전이거나 한없는 권태로움에 물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그저 몸만 '함께'이거나 '상실'을 지울 수 없는 얼룩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카버의 부부 생활 역시 그랬죠. 오래도록 별거를 반복했고 결국 죽기 6년 전, 그의 멘토였던 존 가드너가 사망했을 때 오래도록 그의 아픔이었고 망집이었던 부인과도 역시 이혼합니다. 그 6년 전은 그에게 가장 커다란 상실을 안긴 해였습니다. '대성당'은 그 바로 다음 해에 출간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대성당'은 카버가 가장 힘겨운 시간에 쓰여 진 것입니다. 고통 속에 써내려 간 글쓰기 이며 앨범으로 치자면 가장 쓰라린 시간속의 자신의 모습을 모은 앨범인 것입니다. 기형도가 언젠가의 시에서 '온통 검은 페이지뿐이니 뉘라서 보아줄 것인가'라고 말했던 자서전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카버가 '대성당'의 열 두 편의 단편을 쓰며 바로 그 힘겨운 시간을 버텨내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리얼 타임'으로 재현되는 '대성당'은 그 때 카버가 겪었던 상실의 아픔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치유하려던 노력하던 시간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상실의 아픔은 작품 도처에서 느껴집니다. 처음 '깃털들'에서부터 카버는 다시는 도래하지 않을 진실한 만남의 순간을 씁쓸히 되새기죠. 상실의 감각은 거기로부터 시작되어 '체프의 집'에서는 삶을 새로이 시작할 가능성을 가져다 준 공간의 상실로 이어지고 더 이상 가지고 살기 보다는 차라리 버리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체념하게 되는 '보존'으로 까지 나아갑니다. 여기까지가 '상실'을 안고 사는 것에 대한 얘기였다면 그 뒤의 얘기는 그러한 상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어떻게 치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카버 자신의 탐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칸막이 객실'에서 상실된 것의 집착이 다만 자신의 헛된 망집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 '별 것은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에서는 상실에 대한 위안의 가능성이 처음 나타납니다. 그 뒤 '비타민'과 '대성당' 까지는 모두 그 위안과 치유를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카버가 보는 인생은 언제 프레온이 바닥날지 모르는 냉장고만큼(보존), 언제 차 앞으로 날아들지 모르는 공작만큼(깃털들), 문득 합석한 손님에게서 느닷없이 해꼬지를 당할지 모르는 만큼(비타민), 우연히 굴뚝 청소하러 온 여인에게 '두 다리를 달달 떨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을 드디어 만났다'고 알 수 있을 정도로 반할만큼(내가 전화를 거는 곳) 예측 불가능성으로 넘치는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 그 끔찍한 스스로를 한없이 무력하게 만드는 상실을 안게 될 지 알 수가 없습니다. 미리 생일케잌을 준비했었는데 생일날 아이가 끔찍한 사고를 당했던 '별 것은 아니지만...'의 주인공 엄마처럼. 한 마디로 예방 접종을 맞을 수 없다는 것이죠.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아픔을 겪는 것뿐입니다. '칸막이 객실'이나 '비타민' 혹은 '열'에서 보듯 그 상실을 상실 자체로 보듬지 않고 그것을 억지로 메우기 위하여 떠나가 버린 상대에게 매달리거나 혹은 '내가 전화를 거는 곳' 처럼 알코올과 같은 다른 것에 의탁하여 단지 그 아픔만 넘기려 한다면 결국 얻게 되는 것은 더 큰 비극뿐입니다. 카버는 그 지난한 시간들을 글쓰기로 견디면서 그것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조심'까지가 거짓 치유의 시간들이었다면 그 깨달음이 비로소 피어나는 곳은 그 다음 단편 '내가 전화를 거는 곳'에서부터입니다. 거기서야 카버는 진정한 치유는 그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사랑해주는 '타인'으로 부터만 올 수 있다고 깨닫게 되죠. 그리고 그 진정한 타인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상실을 상실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새롭게 변화할 수 있는 계기로 받아들이는 자세임도 역시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열'에서 '굴레'는 바로 그러한 '변화의 받아들임'에 대한 얘기들입니다. 카버는 거기서 분명 깨닫습니다. 상실은 그저 변화할 시간이 도래했다는 것이며 인생에 그 어떤 굴레가 있던 그것은 이제 다르게 한 번 걸어볼 때가 되었다는 신호에 불과하다고. 그렇게 카버는 진정한 타인과 만나게 될 때까지 그 어떤 일시적 망각을 가져다주는 것에 기대지 않고 묵묵히 '굴레'의 베티나 '나'처럼 스스로 견뎌가기로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대성당'에 이르러 '타인과의 진정한 하나 됨'이 어떤 것인가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그 작년에 영원히 이별해 버린 자신의 멘토인 '존 가드너'에게 바치는 소설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분명 거기서 주인공에게 '타인과 진정한 하나 됨'이 어떤지 경험하게 해주는 '맹인'의 존재는 '존 가드너'를 강하게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가 그 단편에서 그토록 인상적으로 마치 '접신'과도 같은 '타인과의 하나 됨'을 생생히 그려낼 수 있는 것도 존 가드너와의 체험이 그 바탕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은 아닐지 생각되기도 하는군요. 아마도 카버는 스승을 추억하다 그와의 행복했던 교감을 떠올렸고 그 교감의 순간에 자신이 맛보았던 것이야 말로 자신이 정말 추구했던 것이라는 걸 깨달았던 것은 아닐까요? 아무튼 그렇게 '고통 속에 써내려간 글쓰기'는 결국 낙관적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면서 또한 상실을 궁극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타인과 진정한 하나 됨' 역시 전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전혀 예기치 않은 인물로부터도 올 수 있음을 알려 아무리 예측 불가능성으로 넘치는 인생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랑할 자격이 있음도 깨닫게 해 주죠. 단편집의 제목이 그리고 마지막 단편의 제목이 '대성당'인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대성당' 자체가 삶에 대한 하나의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카버는 모든 고통의 여정을 끝낸 후에 대성당의 이야기를 자신의 스승과도 같은 '맹인'을 통해 이렇게 말하게 합니다.
"수백 명의 일꾼들이 오십년이나 백 년 동안 일해야 대성당 하나를 짓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 "평생 대성당을 짓고도 결국 그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죽는다더군. 이보게 그런 식이라면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게 아니겠는가?" (P.348)
그렇습니다. 평생을 바쳐도 그 완성을 볼 수 없는 대성당처럼 인생은 불완전합니다. 생래적으로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상실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은 어차피 침묵에서 시작해 침묵으로 돌아가는 것. 그렇게 상실에서 태어났고 상실로 돌아가는 것이니까요. 하니 카버는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상상해서 말하자면, '인생이 어차피 이토록 불완전한 것이라면 상실을 스스로 변할 수 있는 계기로 받아들이고 그래도 그 아픔이 너무도 커서 견딜 수 없다면 타인에게 손을 내밀어라. 자존심을 내세우지도 말고 행여 그 손이 거부당할까 두려워하지도 말고 내밀어라. 내미는 그것이 중요하다. 인생은 당신의 계산과 상상을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의 예측불가능성으로 풍부하다. 그러니 어느 순간 어느 모퉁이에서 문득 당신의 내민 손을 잡아주는 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밀지 않는다면 그 가능성조차 아예 생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이죠.
제가 많이 당신의 시간을 뺏었나요?
죄송합니다. 저는 '대성당'이 무엇보다 카버 자신의 진실한 기록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정말 커다란 상실을 겪었고 '대성당'은 그 아픔의 와중에 쓰여 진 기록이 틀림없으니까요. 당신도 그의 일대기를 염두에 두고 읽어보면 작품 곳곳에 현재진행형으로 진행되고 있는 그 고통과 성찰의 편린들이 묻어나고 있음을 분명 느끼실 거예요. 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소설집이 무엇보다 진실 된 기록이라면 상실이 본래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 또한 그의 인생과 다르지 않으니 언젠가 도래할 상실의 순간을 보다 잘 이겨가기 위해서라도 한 번 시간을 들여 그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지 않겠냐고. 그래서 이렇게 부득이 당신의 시간마저 빼앗게 된 것입니다. 당신이 들인 시간만큼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리뷰란 것도 제가 당신에게 내미는 손이 아닐까 싶어요. 무엇보다 우리가 타인에게 내미는 손이란 타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시간으로 참여하도록 건네는 손짓일 테니까요. 그렇게 우리는 손을 맞잡듯 리뷰를 읽고 서로의 시간을 공유하면서 생각과 느낌을 나누는 것이겠죠. 이건 카버가 '대성당'에서 묘사했던 '타인과 진정으로 하나 된 모습'이기도 합니다. 거기서 맹인은 주인공의 손에다 자신의 손을 그대로 겹치면서 주인공이 본 대성당의 모습을 눈을 감고 그리도록 하죠. 그렇게 감은 눈을 통해 동일한 존재가 되어 그 겹쳐진 손을 통해 대성당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하나로 공유합니다. 그것이 주인공에게 가져다 준 느낌은 이러합니다.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 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나는 말했다. (P.353)
뭐, 저의 리뷰가 그런 정도의 느낌까지 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아무튼 다른 말이기도 합니다만 이 리뷰들로 가득한 광장 역시도 대성당이 세대와 세대를 거쳐 그들이 쌓아올린 수많은 돌과 나무로 이루어지듯 그렇게 수없이 내미는 손과 맞잡는 손으로 가득한 '대성당'같은 곳이 아닐까요? 돌과 돌이 서로를 지탱하고 나무와 나무가 서로를 받쳐주듯, 전세대가 미처 이루지 못한 것을 후세대가 대신 이루듯 그렇게 여기도 애초부터 불완전하게 태어난 인생들 서로가 서로의 손을 맞잡고 시간을 공유하며 함께 보완해주고 세계를 지탱해나가고 있는 게 아닐까요? 지금 저는 그렇게 생각되는군요.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일상에 지칠 때면 자주 이곳을 떠올리고 또 지금처럼 누군가 맞잡아 줄 손을 기대하며 이렇게 또 한 부분의 나를 담아 내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당신은 정말 저의 손을 아주 굳세게 잡아주신 셈이로군요. 그렇게 맞잡아 주신 손에, 시간을 들여 함께 해준 당신에게 정말 감사드립니다. 당신이 함께 있어 주신 그 시간이 얼마이든 그것으로 정말 행복하다고 진정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