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남자들만 산다
고은광순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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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제 폐지를 위해 애쓰고 계신 고은광순님은 여성억압적인 현실을 내게 가르쳐준 스승이다. 용기가 없어 부모성 함께쓰기에 동참하진 못하고 있지만, 고은님이 하시는 모든 말에 동의하고, 고은님이 원하는, 부부가 나란히 같이 가는 사회의 도래를 진심으로 바란다. 일제의 잔재라고 무조건 나쁘다는 게 아니라, 호주제가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아직도 많은 여성들을 옭아매고 있기 때문에 없어져야 한다는 말은 전적으로 옳지만, 우리나라에서 이 법이 없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은 호주제보다 더 시대착오적인 마초들이 남성들의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호주제에 관해 토론을 해보려 해도 잘 안되는 이유는, 호주제를 사수하고자 하는 사람들 중 설득력 있게 호주제의 존치 이유를 말하는 사람이 한명도 없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심규철 의원의 말이다.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닌데 불편해도 좀 참으면 안되나?' 최병국 의원은 한술 더떠서 호주제 폐지가 '민족사에 대한 도전'이란다. 나이든 사람이 그러는 건 이해해줄 구석이 없는 건 아니지만, 요즘은 젊은 사람들이 한술 더뜬다. 이 책에 소개된 네티즌의 견해다.

[남자가 우생학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지저긍로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이미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헌법상의 여성에 대한 교육의 의무를 전면 삭제하고 처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남편에게 주는 법을 명문화시켜야 할 것이다(166-8쪽)]

이런 사람들과는 토론 자체가 애당초 불가능하다. 말도 안되는 논리에는 해학과 조롱이 필요한 법, 고은님은 그 부문에서 아주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고은님의 말이다.
[일부 남자들이 한국남성들의 '노는계집 밝힘증에 대해 습관적으로 둘러대는 변명이 있다. 남성이 여성보다 성욕이 스무배나 강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회교문화권에서는 남성에 비해 여성이 열배나 민감한 성감을 갖고 태어난다고 믿는단다. 그들이 여성들의 가장 민감한 성감대인 클리토리스를 거세하는 할례를 하는 것은 남성들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우리도 그 방법을 써보며 어떨까?...남성들의 성욕을 일으키는 호르몬을 분비하는 샘을 수술로 제거하여 1/20만 남겨두면 어떨까?(40쪽)]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난 소리내어 웃었다. 하지만 내가 이 얘기를 마초 친구에게 했더니, 그는 대번에 이렇게 대답한다. '맞아! 아랍처럼 해야 돼! 일부다처제' 이럴 수가. 마초와 깊은 대화를 하면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호주제가 없어지면 가정이 파괴될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그는 호주제가 없는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가정을 유지하는지, 호주제가 있는데도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왜이리 높은지도 설명하지 못한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성(姓)을 가진 집안이 전체의 절반도 안됐다는 사실도, 호주제의 발상지인 일본에서는 이미 호주제가 철폐되었다는 설명도 그에게는 소용이 없다. 그들은 앵무새처럼 외칠 뿐이다. '호주제가 없어지면 가정이 파괴된다!' 이런 걸 보고 우이독경이라고 하던가. 외국 기관에서 발표한 경쟁력 순위가 2-3위만 밀려도 나라가 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우리 언론들이 우리나라의 여성권한척도가 해마다 최하위에 가깝다는 발표에는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는 이유는 우리 기자들 중에도 마초가 많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나라에는 왜 이렇게 마초가 유난히 많은 걸까? 이렇게 가다간 우리나라가 '동방마초지국'으로 불리는 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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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영화와 시선 6
이성욱 외 지음, 연세대미디어아트연구소 엮음 / 삼인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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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서울관객만이 아닌, 전국관객을 집계하기 시작했고, 그러다보니 예전에는 꿈도 못꿨던 '500만 관중돌파'가 심심치 않게 이루어진다. 영화 '친구'는 그 와중에도 우뚝 솟은 별로, '실미도'에 의해 기록이 깨지기까지 3년간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800만, 대한민국 사람 여섯명 중 한명이 그 영화를 봤다는 얘기다. 떠들썩한 소문에 밀려서, 난 거의 마지막으로 800만 대열에 합류했다. 어두컴컴한 극장에 혼자 앉아 그 영화가 대박을 터뜨린 비결이 뭔지를 연구했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난 도대체 뭐가 그토록 많은 관객을 끌어들였는지 알 수 없었다. 유오성의 연기가 일품이긴 했어도, 줄거리로 보면 그저그런 조폭얘기, 의리얘기가 아니던가.

연세 미디어아트연구소에서 펴낸 <친구>를 읽은 이유는 풀지 못했던 그 궁굼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해 보고자 한 까닭이었다. 그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왜 800만 관객이 그 영화를 선택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그 책을 통해 전에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었다. 저자 중 한명인 김정선의 말이다.

[고전적 갱스터는 애당초 목표가 자기 세계의 정상에 오르는 것이다. 그에게서 보스에 대한 충성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1990년대 중반 한국의 삼류깡패는..자기파괴적인 일인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그가 꿈꾸는 미래는...보스로부터 예쁨을 받아 출세하는 것이고, 보스에게 온 힘을 다해 충성을 바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하지만 '넘버3'의 태주(한석규 분)는..두목의 의중을 간파하고 배신을 선택함으로써...살아남는다...]

그렇다면, 깡패영화의 계보 속에서 '친구'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자.
['친구'는 두 인물을 통해 구축하는 성공의 욕망(장동건)과 인간됨을 향한 욕망(유오성)의 충동에 있어 후자의 손을 들어주는 데 반해 1990년대 중반의 한국 갱스터 영화는 성공이 인간성을 어느 정도 희생해서라도 성취해야 할 절대과제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정리하면 다른 갱스터 영화들과 달리 '친구'에서는 일종의 전복이 이루어지고 있다(128-130쪽)]

유오성은 친구를 잔인하게 죽였는데 무슨 인간성이냐, 하고 물을 수 있겠다. 하지만 상택처럼 '삶의 색이 완전히 다른 친구는 친구가 될 수 있지만, 삶의 색이 비슷한 친구는 친구이기 전에 경쟁자(100쪽)'임므로 둘 중 하나는 어차피 죽어야 할 운명인 것이다. '내는 니 시다바리가?'라는 유명한 대사는 둘 사이의 사이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실린 글들이 대체로 다 유익했지만, 상택과 유오성, 장동건을 '욕망의 삼각형'이란 이론을 통해 분석한 대목은 매우 흥미로웠다. '나는 사랑의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가능케 하는 경쟁자를 사랑한다!' 내용이 어려워 멀미가 나기도 했지만, 남자들간의 의리라는 것도 따지고보면 동성애라는 말은 맞지 않는가? 이제 내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내리련다. 800만 중 절반 가량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친구'를 보지 않으면 대화에 끼지 못해서 극장을 찾은 건 아닐까? 뭐가 좋다면 우 하고 달려가는 우리의 성향이 800만의 신화를 만들어 낸 것이리라.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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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 - 불완전한 과학에 대한 한 외과의사의 노트
아툴 가완디 지음, 김미화 옮김, 박재영 감수 / 동녘사이언스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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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작가는 외과 레지던트다. 우리나라의 레지던트들은 박봉에 무지하게 바쁜 일상을 영위하느라 책을 쓸 여력이 전혀 없을 테지만, 미국의 레지던트는 좀 다른가보다. 우리나라가 4년인 데 반해 미국은 8년을 하는 걸 보면, 거기선 레지던트가 거의 스탭과 동등한 게 아닌가 싶다. 작가는 꼼꼼히 환자의 자료를 챙기며, 환자의 퇴원 후에도 쫓아가 경과를 관찰하는 열의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현장감이 넘치고,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재미있다. 문장력 또한 뛰어나며, 전문용어도 최소한으로 사용하는 등 독자를 배려한 흔적이 역력하다. 첫장을 펴자마자 흠뻑 빠져들어 정신없이 읽어내려갔는데, 책 곳곳에서 작가의 고뇌와 성찰이 엿보인다.

예컨대, 교육병원의 딜레마에 관한 부분을 보자. '최상의 의료서비스에 대한 환자의 권리는 의사의 수련이라는 목적보다 분명 상위에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실습대상이 되는 것은 싫어하면서 숙련된 의사를 원한다. 하지만 만일 누군가를 훈련시키지 않는다면 그 피해는 모두의 몫이다(39쪽)' 그러면서 작가는 아무 연고도 없는 힘없는 사람이 피해를 보는 현실에 마음아파한다.

레지던트 초년병 시절, 자신의 실수를 기술해 놓은 대목도 재미있다.
[각도를 유지하는 데만 골몰하다가...쇄골을 정통으로 찔러버렸다. '욱!' 환자가 신음소리를 뱉었다. '죄송합니다' 내가 말했다...나는...다시 시도했다. '윽!'이번엔 너무 얕았다. 다시 쇄골 아래로 찔러넣었다. 역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너무 뚱뚱해서 그런 거야, 나는 속으로 불평했다...나는 S에게 주사기를 건네고 옆으로 비켜섰다...너무나도 쉽게 들어갔다...나는 완전히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25-26쪽)]

이밖에도 검사상에는 나타나지 않는데 환자는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 환자와 의사 사이에 치료방법을 선택함에 있어서 누가 결정권을 가져야 하는지, 의사의 실수는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작가는 깊은 성찰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의사에 대한 감정이 그다지 좋지 않다. 의사들이 보여준 행태가 그렇게 만든 측면도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의사와 환자간의 진솔한 소통이 없어서일 것이다. 예컨대 돈이 없어보이는 환자를 걱정해 '그 검사가 좀 비싼데, 하시겠어요?'라고 말했던 어떤 의사는 자기를 무시했다고 펄펄 뛰는 환자로부터 수모를 겪어야 했는데, 이런 것들도 모두 신뢰의 부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겠는가. 바쁜 건 알지만 우리 의사들도 이 책처럼 진솔한 책들을 많이 쓴다면, 그래서 그 책들이 많이 읽힌다면, 의사가 지금처럼 적대시되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우리 모두는 잠재적 환자고, 의사와 환자는 모두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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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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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책은 이번이 4번째인데, 잘나가다 '이게 뭐야?' 소리가 나오게 했던 전작들에 비해 이번 책은 끝까지 긴장을 풀 수 없게 만드는 재미가 있었다. 시작부터 이야기에 빨려들어가게 만드는 오스터의 흡인력도 여전히 탁월했고.

나 혼자만의 생각이겠지만, 이 책은 '미남 주변에는 이쁜 여자가 꼬인다. 하지만 이쁜 여자를 너무 밝히면 망한다'는 교훈을 주기 위한 게 아닌가 싶다. 잘생긴 영화배우 헥터는 소문난 바람둥이다.
[헥터는 몇명인지도 모를 예쁘장한 여배우들과 계속 놀아났다....함께 침대로 가고 하기를 즐기면서]

그런 그가 자신을 인터뷰하러 온 기자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녀가 오후 세시에 그의 집으로 찾아오는데, 다섯시경이 되자 그들은...바닥에서 알몸으로 뒤엉킨 채 이리저리 구르며...' 대체 어떻게 생긴 여자길래? '생기발랄한 표정으로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적어도 2, 3일에 한번씩은 그녀와 함께 지냈다'

하지만 헥터는 다른 영화를 찍다가 엄청난 미인을 만난다. '그녀에겐 야성적인 기질...눈을 떼지 못하도록 하는 동물적인 에너지가 있었다' 한마디로 도발적인 매력이 있었다는 얘기다. 헥터는 한달간 67통의 편지를 보냄으로써 그녀를 사로잡는다. 잘생기기만 해서 되는 건 아니고, 가끔은 이런 노력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는 그전 여인에게 '바쁘다고 둘러'대며, 야성녀와 결혼하기로 맘먹는다. 하지만 일이 잘 안되어 두 여인이 싸우는 바람에 헥터는 도망가야 할 처지에 놓인다. 그는 그전 여인의 고향으로 가 그녀 아버지가 하는 가게에 취직하는데-성격도 이상해!-거기서 그전 여인의 동생을 만난다. 동생의 미모는 어땠을까. '얼굴 전체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서 언니보다 한두 급수는 예뻐 보였다' 사람이 잘생겼다는 건 참으로 좋은 일이라,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동생 역시 그를 사랑하게 되고, 심지어 결혼해 줄 것을 요구하지만, 그는 황급히 거기서 도망친다. 양심상 그러기도 했고, 또다른 문제도 있어서.

낯선 도시에 온 헥터는 우연히 은행에 갔는데, 거기서 또 미인을 만난다. '그녀는 감탄스러울 정도의 미모에...자부심 강한 눈빛...' 그때 하필 은행강도가 그녀를 인질로 잡고, 헥터는 그녀를 구하려다 총을 맞는다. 그녀가 보기엔 생명의 은인인 셈, 그 은혜를 갚기 위해 그녀는 헥터와 결혼을 한다. 이건 헥터가 잘생긴 탓도 있는 것이, 내가 그랬다면 고맙다고 사례나 좀 하고 말았을 거라는 거다. 그 후 헥터는 제법 잘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속사정을 따져보면 사는 것같지 못하게 살았는데, 그러니까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여자를 울리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폴 오스터가 이 서평을 못보는 게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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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배반한 역사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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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개 드러난 사실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곤 한다. 우리 역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친일파는 나쁘다고 욕하기만 할 뿐,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박노자는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한 배경을 밝힘으로써 그들을 이해하려 시도한다. 그렇다면, 보수언론이나 이문열, 복거일 씨처럼 박노자 역시 친일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강변하는 것일까? 결코 아니다. 그가 이 책을 쓴 목적은 다음과 같다.

[글이나 말로는 친일파에게 엄격한 필주를 가하곤 하는 우리지만, 친일파와 결부된 현실에 대해선 놀라울 만큼 너그럽다. 물론 역사 인물들의 훼절을 엄정하게 밝히는 작업은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때 그들의 사성적 광기가 '어떤 구조적인 이유에 의해 형성됐는가' 그리고 '현재까지 어떻게 계승되는가?'라는 부분에 대해서 보다 많은 관심을 갖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지 않나 싶다. 친일파들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정확한 대중적 의식이 있어야 '전 국민적 공동체의 미덕'을 기리는 어용적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사람이 사라질 것이다(75쪽)]

'국기에 대한 맹세'로 대표되는 소름끼치는 우리의 국가주의가 군사독재 정권 때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아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박노자는 지금의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국가주의적 세계관이 근대 초기의 지식인들에게서 배태된 것이라는 것을 실증하고 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우리의 민족주의가 피지배국의 어쩔 수 없는 선택임을 이해하지만, 팽창적 민족주의가 될 가능성에 대해 우려한다. 그는 ''파업이 국민경제를 좀먹는다'는 보수 신문의 말을 '글쎄, 그런가보다'고 그대로 믿'는, 순치되버린 우리의 의식을 질타하며, 개인주의를 빙자하여 현실과 타협하는 우리의 나약함을 꾸짖는다.

[현대인들이 직장에서 상사에게 무조건 고분고분하고, 집에서는 별다른 비판의식 없이 권위주의 질서의 보루인 족벌신문들을 읽으며, 소비 생활에서 자신의 취향을 내세우는 것만으로 개인주의를 자처할 수 있을까?]

물론 그는 '아니'라고 한다. 개인주의자는 자기 혼자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게 아니란다. 진정한 개인주의자라면 '사립학교 재단이 자기가 낸 등록금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들 중 왜 시간강사들이 유독 많은지'에 관해서도 관심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 박노자의 말이다. 진정한 개인주의자는 자신의 자유가 침탈당했을 때 분연히 일어나 싸우는 사람이니까. 요즘 대학의 일부 신세대들처럼 정치적 무관심을 빙자해 권위주의적 극우와도 얼마든지 타협할 수 있는 개인주의는 개인주의가 아닌 거다. 그는 말한다. '그들에게 개인주의의 참뜻을 실천으로 보여주는 것은 진보 진영의 급선무다'

그의 책은 늘 나를 부끄럽게 한다. 아무런 의식없이 '대-한민국'을 외치고, 혼자만의 안일에 젖어 소수자들을 외면하는 나의 행태를 반성해 본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그런 반성을 하는 건 책을 읽는 그 순간 뿐이고, 책을 덮고나면 난 다시금 원래의 나로 돌아간다. 방법은 없을까. 있다. 박노자가 책을 많이 써서 나로 하여금 늘 그의 책을 들고 있게 하는 것, 그것만이 날 제대로 된 인간으로 살게 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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