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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 ㅣ 크로마뇽 시리즈 1
정준호 지음 / 후마니타스 / 2011년 5월
평점 :
그간 의대 선생들에게 우리 학교는 초원에서 양이 풀을 뜯는, 아주 평온한 곳이었다.
아무것도 안해도 누가 뭐라할 사람이 없었단 뜻이다.
그런 좋은 시절은 시나브로 갔고,
올해부터는 나같은 기초의학 교수에 한해 주 당 6시간을 강의하지 않으면 월급을 깎겠단다.
돈에 약한 우리는 부랴부랴 교양강좌를 개설했고,
난 주말마다 강의준비를 하느라 허리가 휘고 있다 (평일엔 연구를 해야 하니까).
내가 개설한 교양강좌 중 기생충을 가르치는 ‘현대기생충백서’라는 과목이 있다.
그 강좌를 준비하느라 논문을 찾고 구글을 검색하다보니
그간 내가 너무 얕은 지식으로 살아왔구나,는 걸 새삼 느낀다.
그만큼 배우는 게 많다는 소리인데,
강의 자료가 하나둘씩 쌓여가다 보니 “이것들을 모아 여름방학에 집필을 하자”는 기특한 생각을 하게 됐다.
그전에 냈던 부끄러운 책들 말고, 이젠 정말 제대로 된 기생충 교양서를 내보자는 생각을.
여러 자료를 뒤지던 어느 날, 정준호라는 분의 블로그에 들어가게 됐다.
런던대학에서 기생충학 석사를 하고 아프리카의 스와질랜드에서 의료봉사를 하는 훌륭한 분이던데,
글을 얼마나 잘쓰는지 읽다보면 감탄만 나왔다.
그 글들은 한편 한편이 기생충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어우러진, 유익하고 재미있는 것들이었다.
마음이 초조해졌다.
“이거이거, 이 사람이 먼저 책을 내면 어쩌지?” 싶었는데,
그만 그분의 책이 나오고 말았다.
블로그에서 본 것보다 한 차원 높은 글들이 책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기생충 교양서로 읽을만한 책은 칼 짐머가 쓴 <기생충 제국>밖에 없었는데
이젠 더 이상 그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그보다 훨씬 더 잘쓴 우리나라 책이 있으니 말이다.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선 다음 구절만 읽으면 된다.
“연구가 기생충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연구를 위한 연구였던 것인지 지금도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다. 결국 나는 실험실을 떠나, 실제 기생충이 어떻게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는지를 보고자 아프리카에 오게 되었다.”(11쪽).
훌륭하지 않은가?
대부분의 기생충학자가 안락한 실험실에서 자기가 키우는 기생충을 돌보는 데 그치지만,
저자는 아프리카로 가서 현실의 기생충과 싸우고 있었다.
그런 경험을 토대로 저자는 기생충과 사회, 그리고 정치와의 상관관계를 유려한 문장으로 담아냈고,
그 책으로 인해 여름에 책을 쓰자는 내 계획은 잠깐 공황상태에 빠졌다.
책을 덮고 나서 난 이런 좋은 책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책을 또 써야 할 이유를 생각해 봤고, 다음과 같은 이유를 만들어냈다.
1) 기생충에 대한 지식은 정준호 선생이 더 낫다해도, 유머는 내가 한수 위다.
2) 우리나라엔 읽을만한 기생충 교양서가 너무 없었다. 올해 갑자기 두 권이 나온다고 해서 뭐 큰일날 게 있을까?
3) 책 출간과 동시에 저자는 군대에 갔다. 라이벌(이라고 하기엔 내가 좀 딸리지만)이 없는 틈을 노려 일을 벌이라,는 로마시대 무명 병사의 말을 따라야 한다.
4) 생각해보니 한 출판사로부터 계약금만 받고 책을 아직 안썼다. 파렴치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뭔가 써야 하고, 내가 쓸 건 기생충밖에 없다.
벌써 5월 중순이고 강의는 이제 한달 남짓 남았다.
그 기간 동안 더 열심히 준비해 정준호 선생의 책에 필적할 기생충 교양서를 써 봐야지.
유익함과 유머로 점철된 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