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가장 소중했던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소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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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 제1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7월

[가족의 가장 소중했던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소녀여]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것만 알고 섣불리 택한 이 책은 읽는 내내 독자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두지 않았다. 있을 법하지 않은 ,그러나 소외받는 하류 인생의 그 누군가는 될 수 있을 듯하기에 상징적인 의미가 되기도 하는 기이한 소녀를 따라가도록 만든다. 이름도 없다..나이도 모른다...엄마의 자궁을 찢고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믿는 가엽은 짐승같은 아이의 이름은.. 당신 옆을 스쳐가 소녀였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있을까? 언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자신의 이름도 없는 아이,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에 폭력을 일삼고 엄마는 무기력하게 맞으면서 습관처럼 가출을 일삼고, 자신의 삶을 자신의 살을 갉아 먹는 쥐새끼들이 만연한 집안에서 살고 있는 소녀.  소녀는 숨쉬고 있으나 살아있지 못한 존재였다. 상처가 무엇인지 두려움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이들이 가짜 부모임을 확신하고 자신의 진짜 부모를 찾아나서면서 소녀는 길 위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소녀가 만나게 된 사람들과 엮이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독자의 시선이 소녀 자신에게로 향하게 되는 순간이 많다. 타인이 소녀를 보는 것보다 소녀가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바라보게 되는 세상의 어두운 측면이 더 강렬하게 와 닿는다. 그런 와중에 소녀가 중얼거리는 진짜 엄마, 진짜 부모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좀더 확실해진다.  

....나는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듣고 짐작하는 천 년의 세월을 살았다. 태어나서는 그보다 훨씬 지독한 세월을 단숨에 견뎌냈다. 맞고 때리고 지르고 울고, 부수고 찌르고 할퀴고 몰고, 박살내고 집어던지고 다치고 도망가고, 닦고 짓이기고 삼키고 내 혀부터 씹어대는 그런 것들...... 

소설을 읽는 내내 너무도 강렬하고 섬뜩한 표현들에 혀를 내두르게 되지만 그로인해 소녀가 생에 대해서 갖고 있는 처절한 독기와 행복에 대한 갈망이 더 진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엄마의 자궁에서 태어났지만 세상의 고통이 너무 힘들어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것은 아픔을 겪는 사람들의 그것과 같지 않을까? 

세상을 혀로 살아가는 무능한 대학생을 바라보며 사랑을 키우며 상처받는 장미 언니, 자식이라는 이름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주며 살아가는 태백식당 할머니, 버려진 폐가에 사는 남자, 엄마를 찾아 전국을 헤매는 각설이패 사람들 ,가정에서 버림받은 유미와 나리.. 소녀가 길위에서 만나 사람들, 그들은 한결같이 생의 아웃사이더이자 밑바닥 생활을 하는 아픈 사람들이라는 것도 인상적이다 .아픔이 있는 사람은 아픔이 있는 사람을 알아 보게 되는 것이 이치일까?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푼돈은 결국 부자들의 주머니가 아니라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주머니 속에서 나오듯 ,소녀가 안고 있는 아픔과 사랑의 결핍을 알아보는 이들이 소녀를 향해 손을 내민다. 이들의 삶 속에 숨어있는 현재의 고통이 드러나는 순간마다  소녀의 어깨에 하나씩 짐이 더 얹어지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진짜 부모가 아닌 이들을 하나씩 접어가는 성장이 느껴지기도 한다.  

 소녀의 마지막 선택의 순간은 처절하고 잔혹하다. 그래서 그만큼 가슴이 따갑고 아프다. 소녀가 결국 찾고자 한 것은 자신의 진짜 부모였을까? 세상 밖으로 나온 소녀가 찾고자 한 것은 이 세상에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뢰의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결국 소녀가 본 것은 그 이외의 것들이었다. 현실은 그랬지만 과거의 어느 순간 이들이 누렸을 평화로운 나날들이 환영처럼 지나치면서 소녀는 마지막 순간 어디로 향했을까? 가장 원초적인 본능으로 아무런 미움도 갖고 있지 않았던 엄마의 자궁 속이었을까? 마지막 장에 펼쳐진 엄마를 향한 독백같은 마지막 글귀가 그래서 더 진한 아픔과 여운을 남긴다. 

....천년의 세월 중 내가 들었던 가장 달콤한 말은, 사랑하는 우리 아가. 내가 보았던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엄마의 자그많고 부지런한 심장. 가장 황홀했떤 건, 아빠가 엄마 안에 들어와 우리 셋이 완전한 하나가 되던 느낌. 그 안에서 짐작했던 최고의 행복은, 당신이 나를 안고 내 눈을 보며 내 이름을 불러 주는  그 순간..... 

당신 옆을 스쳐가 그 소녀의 이름을 떠올리면서 나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떠올려 본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순수한  만남의 순간이 언제였던가도 떠올려본다. 신의 축복이라 여기며 가장 고귀한 순간으로 아이를 처음 품 안에 안았던 그 순간도 떠올려본다. 그리고 지금의 나도 되돌아 본다...우리 곁은 스쳐간 그 소녀는 바로 우리가 잊고 사는 가장 소중한 순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려고 했는가 보다.  최진영이라는 작가, 처음 만났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가이다. 외모와는 다른 강렬한 표현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에 그녀의 다음 작품도 예의 주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