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 우리가 놓치는 민주주의 위기 신호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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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 전, 소련을 필두로 동구권이 무너지며 바야흐로 자본주의와 결합한 민주주의의 시대가 도래한 것처럼 보였다. 물론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도 체제가 민주주의긴 하지만 그쪽 진영은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독재로 흘러버렸고 경제적으로도 실패했다. 반면 자본주의를 앞세운 진영에선 실제로 민주주의가 구축되어 안정적으로 운영되었기에 당시 자본주의와 결합한 민주주의가 가장 경쟁력 있고 선도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중국과 러시아를 필두로 상당수 사회주의 진영이었던 권위주의 국가들은 민주주의를 운영하지 않고도 산업 경쟁력을 회복했다. 반면 승자로 보였던 유럽과 미국의 자본주의와 결합한 민주진영에서는 경제가 흔들리고 더불어 민주주의도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다. 책은 미국의 사례와 역사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진단하고 나름의 해법을 제시한다. 

 민주주의는 서구에서 본격화한지 300여년 정도가 지난 제도다. 상당히 안정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지금의 민주주의는 매우 쉽게 흔들린다. 사람들은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지키고 지탱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히틀러나 트럼프, 한국 역사상 독재를 한 대통령 혹은 그에 준하는 자들은 대개 국민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선출된 권력이다. 이는 시민이 충분히 민주적이지 않고, 이러한 잠재적 독재자들이 대중의 약점과 감성을 매우 잘 파고들어 자신에게 영합하게 만들기가 생각보다 쉽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가 보기에 미국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그것을 수호한 것은 견제와 균형의 원리다. 그것을 구현한 것은 미국의 양 정당이며 이들이 지켜온 규범은 사호관용과 이해, 그리고 권한 행사에 있어서 자제의 원리다. 놀랍게도 이는 미국 헌법이나 여타 법률에 전혀 규정되어 있지 않다. 어느 순간부터 정치인들이 이를 실천해 온 것이며 그것이 굳어져 규범화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 정치가 양극화하며 1980년대부터 이 규범에 균열에 생겨왔고 그것의 결과는 잠재적 독재자인 도널드 트럼프의 탄생과 규범의 파괴였다. 

 린츠의 연구에 의하면 잠재적 독재자는 4가지 특성을 공통적으로 드러낸다. 우선 말과 행동에서 민주주의 규범을 거부한다. 그리고 경쟁자의 존재를 부인하고 제거하려 든다. 또한 자신의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폭력을 용인하고 조장한다. 마지막으로는 언론의 자유를 포함하여 반대자의 기본권을 억압한다. 도널드 트럼프는 선거 결과를 부정했고, 오바마를 무슬림으로 취급했으며, 지지자들의 국회점거를 용인하고 그 범죄자들을 사면까지 했으며, 자신을 비방하는 언론 기자를 출입금지시키거나 대놓고 면박한다. 그리고 한국의 탄핵된 대통령 윤석렬도 이 4가지 특성을 상당히 드러냈었다. 그도 툭하면 부정선거 의혹을 드러냈고 실제 국정원을 동원해 이를 조사했으며, 선거해서 승리했음에도 야당대표의 수사를 지시하고 제거하려 했으며, 재임 중 각종 공식행사에서 반국가세력을 언급했고 계엄을 단행했으며, 자신을 비난한 언론사 기자를 대통령 전용기에 탑승 금지시켰다. 

 이런 잠재적 독재자는 대개 포퓰리스트 아웃사이더로 기성정치에 반대하며 자신이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부패하고 음모를 꾸미는 엘리트 집단과 전쟁을 벌이겠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기존 정치인이 오히려 비민주적이고 비애국적이라 매도하며 기존의 질서를 뒤흔들어 집권한다. 

 트럼프와 양극화로 인해 이런 잠재적 독재자들이 최근에 등장한 것 같지만 미국 역사를 살펴보면 이들은 과거부터 꾸준히 존재해왔다. 성공한 것이 최근일 뿐이다. 이들이 과거 실패했던 것은 미국의 정당이 문지기 역할을 하며 이들을 제거해왔기 때문이다. 정당들은 잠재적 독재자를 선거기간에서 당내의 경선에서 배제하거나, 정당의 조직 기반에서 극단주의를 제거하고, 반민주적인 정당이나 후보자와의 모든 연대를 거부하고, 극단주의자를 체계적으로 고립시키며, 그들이 유력주자로 떠오를시 연합전선을 구축해 대항한다. 

 미국역사상 등장했던 잠재적 독재자들은 찰스 코글린이나 휴이 롱, 조지프 매카시 등이 있다. 이중 매카시는 냉전시대 공포를 이용하여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언론을 검열하고, 출판사를 폐쇄했다. 그는 상원의 불신임에도 40%의 지지율을 얻었다. 그리고 1968-72년 윌리스는 극단적 인종차별로 큰 인기를 얻었다. 이들은 대중의 지지를 얻었지만 정당의 문지기 역할로 인해 체계적으로 배제되었다. 

 미국의 건국자들은 민주주의를 확립했음에도 대중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대중이 무지몽매하여 언제든지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의원내각제는 총리가 의회의 일원으로 정치 내부자의 인정을 받아야 지도자가 될 수 있다. 반면 대통령제는 국민 선거로 결정되는 만큼 이 같은 필터기능이 없다. 그래서 미 건국자들은 선거인단제도를 고안하였다. 하지만 선거인단은 국민 선거 이후에 구성되어 후보자 자체를 거르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정당과도 무관하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필터기능이 없다. 

 이로 인해 미국은 역사상 정당이 사실상 민주주의 관리인이 된다. 19세기 초 대통령 후보 선출은 의회간부회의라는 하원단체에서 매우 폐쇄적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다 1830년대 초부터 각 주의 대의원이 참석하는 전당대회에서 후보가 결정되었다. 대의원도 일반투표가 아니라 각 주 및 전당위원회에서 선발했다. 프라이머리 선가는 1890-1914년에 도입되었다. 하지만 당시엔 대의원의 프라이머리 승리후보에 대한 지지의무가 없었다. 이런 일련의 전당대회 시스템은 비민주적이거나 위험한 후보를 제거했다. 프라이머리는 대선 후보 지명에 대한 구속력이 없고 그 자체로 화려한 행사에 불과하다. 실질적 힘은 당내부자가 갖고 있었고 이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 후보자가 되는 길이었다. 이는 오랜 기간의 동료평가 기능을 했다. 정치인들은 서로를 알고 오랜 기간 같이 일하면서 성격과 이념, 위기관리능력, 인성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가능하다. 

 정당들은 1970년대 들어 기존의 후보 선정 시스템을 바꾸기 시작했다. 1968년이 시작인데 당시는 로버트 케네디 암살, 베트남 전 갈등, 반전 시위의 열기로 사람들은 기존 정당에 신뢰가 사라져서 전통적 후보 지명시스템에 대해 강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급기야 시카고 전당대회에 반전시위대가 난입하였고 그 과정을 경찰이 강경진압한다. 그 후폭풍으로 대선후보 험프리가 패배한다. 이에 민주당 지도부는 대통령 후부 지명과정을 개방해야 한다는 강한 압박에 직면했고 이후 지금의 구속력있는 프라이머리가 생겨난다. 1972년 민주, 공화 양당은 전당대회에 참여하는 대의원 대부분을 각 주의 프라이머리와 코커스를 통해 선출한다. 후보들은 대의원의 이탈을 막기위해 미리선출했다. 당지도부에 의존하지 않고 대선후보를 선출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장벽이 남아있었다. 프라이머리에서 승리하려면 막대한 선거자금, 호의적 언론기사, 모든 주에서 자신을 위해 활발하게 뛰어줄 인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후원과 언론인, 이익단체, 사회운동가, 주지사와 시장, 상하원 의원등과의 광범위한 연합도 요구되었다. 

 이 장벽은 2010년대에 무너지게 된다. 연방대법원은 2010년의 판결로 외부자금이 더 쉽게 유입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로 인해 정치후원자를 찾는 것이 매우 쉬워져 기존의 정당에 의존을 덜 하게 되었다. 그리고 케이블 티비와 유튜브, SNS의 등장은 대체언론의 성장을 가져와 기존 시스템에 대해 의존을 더욱 덜어주었다. 

 이처럼 미국역사에서 대선 후보가 되는 과정은 과거 매우 비민주적이고 폐쇄적인 체계에서 더욱 민주적이고 개방적으로 변화하였다. 하지만 정치 전문가에 의한 필터기능이 사라지면서 미국에서는 극단적이고 정치경험이 전무한 포퓰리스트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가능해졌다. 상당한 역설인 셈이다. 

 과거 독재자들은 정적을 대놓고 투옥, 추방, 암살했다. 하지만 지금의 독재자들은 탄압을 합법적으로 포장한다. 이를 위해 심판 매수가 필요한데 바로 법원이다. 그리고 현대 독재자들은 종종 명예훼손이나 모욕적 혐의로 소송을 남발해 반정부성향이 강한 인물을 합법적으로 경기에서 배제한다. 그러면 언론사는 공격으로 인해 자체검열을 시작한다. 독재자는 야당을 지지하는 기업도 공격한다. 그리고 예술가, 지식인, 팝스타, 스포츠 선수 등 문화계 인사도 공격한다. 이들의 높인 인기와 도덕성은 독재자에게 위협이다. 그래서 독재자들은 이들을 회유, 협박한다. 주요 언론인과 기업가들이 매수되거나 경기장 밖으로 쫓겨날때 저항세력은 힘을 잃는다. 현대의 독재정권은 이렇게 해서 법률의 테두리 안에서 승리를 거머쥔다. 

 여기서 더 나아가 독재정권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게임의 법칙도 바꾼다. 헌법과 선거시스템, 다양한 제도를 바꾸어 저항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공공의 선이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며 그래서 경쟁자에 불리하게 운동장을 기울인다. 

 잠재적 독재자라도 민주체제이기에 뭔가를 하려면 명분이 필요하다. 경제위기, 자연재해, 전쟁, 폭동, 테러와 같은 안보 위협은 좋은 구실이다. 그래서 잠재적 독재자일수록 그런 상황이 아님에도 위기를 강조한다. 실제 미국의 트럼프는 자신을 반대하는 민주당 우호지역을 범죄 우범지역, 테러지역으로 규정하고 군대 투입을 하고 있다. 시민들 역시 안보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러한 조치를 찬성한다. 

 법체계는 본질적으로 모든 것을 규정할 수 없기에 모호하고 개념에 공백이 있다. 그래서 헌법 조항에만 의존해서는 잠재적 독재자를 막을 수 없다. 민주주의가 오래 건강하게 작동하는 국가는 비공식적 규범에 의존한다. 바로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다. 상호관용은 정치 경쟁자가 늘 헌법을 존중하는 한 권력을 놓고 서로 경쟁을 벌이며 사회를 통치할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권력에 대한 반항은 역적으로 여겨졌고 제거로 이어졌기에 이는 혁신적 사고다. 그리고 민주주의 붕괴 사례에서 독재자들은 반대파를 국가의 위협으로 낙인찍어 제거한다. 제도적 자제는 법적 권리를 신중하게 행사하는 태도다. 법을 존중하면서 입법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자세다. 대통령은 행정명령의 권한을 갖고 있다. 한국의 윤석렬은 행정명령을 마구 집행해 입법부와 갈등을 일으켰고, 국회분의 헌법재판관이나 방송통신위원등을 임명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제도적 자제에 실패한 사례다. 

 미국 역시 강력한 민주주의 규범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건국초기 공화주의자와 연방주의자들은 서로를 제거 대상으로 여겼다. 그러다 수십년이 지나서 상호공존의 정신이 생겨났다. 이는 오래가진 않았는데 남북전쟁때문이다. 당시 인종차별에 대한 갈등은 최고조였다. 하지만 전후 흑인 노예에 대한 시민권의 확립과 군의 철수 부분에서 북부쪽이 상당한 양보를 하고 흑인들의 시민권 문제를 해결하지 않음으로써 갈등이 봉합된다. 갈등이 다시 재점화한 것은 1963-64년에 미뤄뒀던 흑인 시민권 문제가 다시 법적으로 쟁점화하고 해결되면서부터다. 이는 인종을 포섭하고 미국은 진정한 민주사회로 바꿨지만 미국의 양극화와 상호관용과 자제의 규범에 균열을 내는 시작이 되었다. 

 과거 미국의 양당은 모두 내부적으로 다양성을 보존했고 정당간의 차이가 미미했다. 하지만 1964-65년 남부지역의 민주화는 남부지역의 백인을 공화당으로 북동부를 민주당 지지지역으로 바꾸었다. 민주가 진보, 공화가 보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실제 1950년대 유색인종의 7%가 민주당 지지였다면 2012년엔 무려 44%가 되었다. 그리고 공화당 지지자 중 백인 비중은 90% 정도로 큰 변화가 없다. 또한 공화당은 개신교의 정당이 되었다. 1973년 연방대법원은 낙태 합법화 판결을 하였는데 이후 공화당이 개신교를 대변하게 되었다. 그 결과 2016년 백인 개신교 집단의 76%가 공화당을 지지한다. 

 규범파괴는 양당이 모두 자행하고 있지만 대개 시작은 공화당이었고, 그 파괴의 정도도 더욱 심각하다. 저자는 그 이유로 공화당 지지자가 민주당 지지자에 비해 막말을 일삼는 당파성향이 강한 매체에 더욱 의존하고, 보수이익 단체가 강경화했으며, 지난 수십년간 민주당은 지지계층의 다양성이 확보된데 비해, 공화당은 백인 개신교로 동질적이고 이들이 기득권을 잃어 편집증적 반발을 하는 것을 원인으로 지적한다. 

 한쪽이 강경반응을 보이면 조선시대 사화가 그랬던 것처럼 반대쪽도 강경반응으로 대응하기 쉽다. 저자는 이것이 해결책이 아니라고 말한다. 강경대응으로 반대쪽이 나서면 오히려 전제주의가 강화되기 쉽다. 그리고 중도진영을 실망시켜 지지도가 떨어지고 친정부세력이 더욱 강해지는 경우가 있다. 또한 쌍방의 강경대응은 기존의 민주적 규범을 완전히 무너뜨려 더욱 낮은 수준의 민주주의를 고착화한다. 사람들은 초기엔 민주주의 규범의 파괴에 놀라고 격앙하지만 그것이 자주 자행될수록 기준은 낮아지게 된다. 

 저자가 제시하는 해법은 이렇다. 잠재적 독재주의자가 나타나면 민주적 규범과 절차 파괴행위에 대해 강경대응하면서도 반대 진영은 철저히 규범을 지키고 연합전선을 이뤄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현상에 대한 대응이다. 가장 궁극적인 해법으로는 사회불평등 해소와 보편적 복지를 통한 사회 양극화의 해소를 든다. 잠재적 독재주의자가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기존 민주체제와 정치권에 대한 불만 때문이다. 때문에 그것을 애초에 봉쇄하는 것이다. 다만 시민의 자질에 대한 지적이 없는 점은 좀 아쉽다. 시민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신봉자라면 잠재적 독재주의는 사실 불만이 있더라도 들어설 길이 없다. 즉, 상당한 수의 시민이 자신의 경제적, 정치적 유불리로 인해 민주주의의 파괴를 용인하는 셈인데 이는 시민성의 문제다. 이런 부분에 대한 지적도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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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좌절
김경일.류한욱 지음 / 저녁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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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실 속에서 자라난 화초는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건강하게 자라나지 못한다. 나무는 성장과정에서 자신의 거대한 몸체를 지탱할 강한 뿌리와 조직이 필요하다. 바람이 불면 부는 방향 뿌리가 들리면서 이를 견뎌내기 위해 반대쪽 조직이 경질화한다. 바람은 사방에서 불기에 세월이 지나면 모든 부위가 견고해지는데 그래서 어려서부터 풍랑 속에 자라난 나무가 강하게 성장하게 된다. 반면 온실 속에서 자라난 나무는 풍랑이 없었기에 경질화하지 못해 어느 정도 자라면 자신의 무게조차 견디질 못하게 된다. 

 사람도 딱 그러하다. 어려서 충분한 좌절을 경험하지 못하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자신을 감당하지 못해 자신과 주변 사람을 파괴하게 된다. 책은 이런 부분을 지적한다. 과거에 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에서 온실 속에서 자라나는 인간 화초는 좀처럼 없었다. 아동에 대한 사랑과 애정, 충분한 관리가 오히려 부족한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과도하다. 모든 분야에서 안전 지상주의가 과다하며 아이에게 부모가 모든 것을 해주려 한다. 그래서 자녀가 성인이 되었음에도 아직도 상당수 부모가 대학의 교수에게, 군대의 상관에게, 직장의 상사에게 전화하는 촌극이 벌어진다.

 이는 자식에게도 부모에게도 비극이다. 자녀는 몸만 큰 어린 아이인 셈이고, 자녀가 더욱 그러하기에 부모의 관여와 간섭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이뤄진다. 영원한 어린 아이 육아를 하는 셈이다. 사람이 건강하게 자라나려면 적절한 좌절이 필수적이다. 그래서 이걸 발판으로 자율성과 독립성이 생겨난다. 물론 과도한 좌절은 사람의 자존감을 아예 무너뜨릴 수 있기에 좌절은 적절해야 한다. 이는 수용가능한 실패를 의미한다.

 요즘의 과잉애착부모는 정서적 비만 자녀를 양산한다. 아이는 태어나서 정상자폐-정상 공생-분화-연습-재접근-독립의 과정을 거치며 성장한다. 여기서 적절한 좌절은 분화단계에서 필요하며 재접근 단계에서는 좌절 강도의 조절이 중요하다. 그래야 온전한 독립이 이뤄져 건강한 자아를 형성할 수 있다. 

 최근 한국의 학생들은 부모의 과잉애착에 따른 정서적 비만 상태로 대개 몸은 크게 정신은 어린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강력한 학습성취를 강요받는다. 과거엔 이런 간극이 커지면 학생은 대개 가출 등의 일탈 행동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스마트폰과 인터넷, 경제력의 향상으로 사실상 집에서 충분히 일탈을 할 수 있기에 집 바깥이 아니라 집 안, 자기 방으로 가출을 한다. 그래서 이런 학생들은 부모가 잠들면 비로소 활동을 시작하고 이로 인해 밤을 세우게 되어 등교가 어려워진다. 이것이 반복되어 성인기까지 이뤄지면 그야말로 은둔형 인간이 되고 만다.   

 분리 독립의 최초 시작은 취학 전 잠자리 분리와 식사예절이다. 식사예절은 식사 시간 지키기, 같이 식사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식사 중 눈 맞추기, 스마트폰 사용 금지), 식사를 준비한 사람에 대한 예의다. 잠자리 분리는 늦어도 취학 전 이뤄져야 한다. 뇌는 잠들면 외부자극이 끊어지기에 DMN회로가 활성화하여 과거 기억과 자기반성, 상상, 과거 경험에 대한 재구성을 하며 과거를 상기해내 실패를 찾아내고 미래에 이를 대비한다. 즉, 자기 성찰 및 반성이 시뮬레이션 되는 것인데 이는 혼자자야 잘 작동한다. 잠자리를 분리하면 아이는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혼자 정리하게 된다. 

 잠자리 분리 다음 단계는 적정한 경계 설정하기다. 이 단계에서 아동은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아이가 세상과 자기를 조율하는 경험을 반드시 해야 한다. 부모는 여기서 모든 행동을 통제하지 말고 적절한 자유와 책임을 부여하고 아이는 이를 통해 점차 자신의 행동이 가져오는 결과를 경험하고 고민하게 된다. 이것이 스스로 행동을 조정하는 힘이 된다. 

 이런 분리 독립이 이뤄지지 않으면 아이는 친구 관계에 어려움이 생긴다. 소위 골목대장형, 다 맞춰주는 형, 편가르기 형으로 자라난다. 

 아이의 양육에 있어서 아이의 감정과 행동에 그들만의 영역을 인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는 공간적 심리적 적정 거리를 마련한다. 아이 방에 들어가기 전 신호하기, 스킨 십에 거리 두기가 그러하다. 그리고 아이의 의사결정에 대한 관여도 중요하다. 아이의 의사결정을 존중한다고 뭐든지 아이가 원하는대로 결정하게 하면 안된다. 이는 일종의 떠넘기가에 불과하며 아이가 싫어도 반드시 해야하는 것은 하도록 지도해야 한다. 

 비교 중심의 칭찬도 지양해야 한다. 비교 중심의 칭찬은 자기 중심성만 강화한다. 이런 칭찬은 경쟁을 유도하므로 자신만에 대한 칭찬을 해야 한다. 

 이런 분리 독립에 실패한 성인은 나르시스트가 되어 사회에 암적인 존재가 된다. 조직의 비판을 견디지 못하고, 남의 공을 가로채려 하며, 모든 관계안에서 끊임없이 자기가 중심이 되려 한다. 공동 목표보다는 자신의 이미지 관리에 집착하여 팀워크를 깨기도 한다. 이들은 얼핏 보기엔 자존감이 높아보이지만 대개 유약한 자아와 깊은 불안감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자신만을 내세워 굳이 싸울 생각도 없는 남과 싸워 이기려고만 하는 것이다. 이들은 거부 민감성이 과도하게 높은 경우가 많고, 관계적 공격성이 높고, 과잉 통제하려는 경우가 많다. 

 물론 나르시스트로 성장했다고 해서 늦은 것은 아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수정은 가능하다. 이들은 분리 독립의 실패로 전전두엽이 적절히 성장하지 못해 자기 정체성 혼란, 높은 우울감, 타인의 욕구에 즉각 반응하는 듯 하나 정작 자기의 욕구 살피기에 서툴고, 자기 조절력이 높아 보이나 실제로는 낮다. 그래서 내 기분 찾아내기, 작은 것 부터 스스로 선택하기 부터 시작해 자기 조절력을 키워나가야 한다. 물론 회복은 매우 느리고 섬세한 과정이 필요하다. 

 분리 독립은 정서적으로 책임지는 자아의 탄생을 의미한다. 스스로의 미래를 감당하려면 철학, 깊은 사고, 정체성 그리고 좌절이 꼭 필요하다. 요즘 우리 사회에 유독 자기만을 아는 소위 진상이 넘쳐나는 것은 이런 안전 지상주의와 과도한 개입과 애정, 그리고 이를 불러일으키는 능력주의의 온상이라 생각한다. 서로의 행복을 위해 바꿔나가야 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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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육에서 무엇을 평가하고 있는가 - 알고리즘, 그 이상의 교육
거트 비에스타 지음, 이민철 옮김 / 씨아이알(CIR)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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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은 백년지대계란 말처럼 산업화 이후 거의 모든 근현대 국가들은 시민 하나하나의 교육수준이 국력과 직결됨을 깨닫고 보통교육을 실시해왔다. 이후 교육을 꾸준히 변화하여 교실과 학교 및 정책수준에서 많은 변화와 혁신이 진행되었다. 그러는 사이 이 모든 교육을 왜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사라졌다. 초점은 '왜'는 정해져 있고 '어떻게'로 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좋은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를 주변화시키는 것은 이른바 교육의 학습화와 관련한 것을 보인다. 교육의 언어를 학습의 측면에서만 논의하려 하는 경향이 강하다. 학습은 물론 교육의 핵심이다. 하지만 목적의 문제를 포함해서 내용과 관계의 문제를 다루기 힘들게 하는 측면도 있다. 


1.교육의 학습언어화와 증거기반실천의 문제점

 지난 20년간 PISA를 필두로 하여 교육의 측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는 국가간 교육체제를 비교하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 내의 지역과 개별학교에 대한 상대평가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일련의 측정 행위는 모든 사람이 동일 품질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사회정의, 책무성과 선택의 요소, 실패한 학교와 교사를 선별하게 한다. 이는 1980년대의 논의와 이어진 결과다. 당시 교육 개선을 위해 학교 효과성 연구가 이뤄졌다. 처음엔 단위학교-교수 및 학습의 역동성-타당한 결과와 산출물이라는 식으로 시각이 좁혀졌다. 이는 학교교육의 성과를 개선 및 측정가능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이런 시도가 행해졌다. 이런 측정문화는 최고 수준의 교육정책과 교사 실천에 영향을 미쳤다. 데이터 기반이기에 어느 정도 유익한 면도 있었으나 교육의 성과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사실적 정보로만 국한시키는 문제도 있었다. 

 이는 2가지의 문제를 야기했다. 우선 사실정 정보는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당위성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측정의 타당성 문제다. 이런 측정 정보가 교육이 가치 부여하고자 하는 것을 실제로 측정했느냐란 점이다. 

 학습의 언어가 부상한 이유는 총 4가지다. 우선 지식과 이해의 구성에 학생의 적극적 역할과 이에 대한 교사의 혁신적 역할에 중점을 둔 학습이론의 등장이다. 둘째는 교육의 과정이 교사 중심이어야 한다는 관점에 대한 비판, 셋째는 사람들의 삶 전반에 걸친 비공식 학습의 엄청난 증가에서 입증된 소위 학습의 조용한 폭발, 넷째는 복지 국가의 쇠퇴와 그에 따른 학습 책임을 개인에 전가하는 신자유주의 때문이다. 

 이런 학습의 언어는 교육을 교수자 중심에서 학습자 중심으로, 학습의 정의를 공식 교육과정에서 그 외의 것과 평생으로 늘렸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하지만 2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교육과 학습을 학습자 개개인의 것으로 국한했다는 것이다. 교육에서는 많은 협동, 협력 학습이 이뤄지며 꾸준한 관계가 이뤄진다. 때문에 이것을 개개인의 영역으로만 국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학습은 근본적으로 과정의 개념인데 결과적인 측면에만 주목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교육은 기본적으로 3가지 다른 기능을 수행한다.

 우선 자격화다. 교육의 기능은 그들에게 지식, 기능, 이해와 더불어 무언가를 할 수 있게 하는 성형과 관련의 형식을 제공한다. 이는 경제적 요인과 관련이 있다. 정치적 문해력, 문화적 문해력도 포함한다. 또 다른 기능은 사회화다. 교육을 통해 개인은 자신이 속한 특정한 사회, 문화, 정치 질서의 일부가 된다. 마지막은 주체화다. 교육받은 자가 사고와 행동에서 자율적이고 독립적이 되는 것이다. 이 3가지 기능은 각각의 특성이 있어나 어느 정도 서로 중첩되며 그 과정에서 시너지와 갈등이 혼재한다. 

 현재의 가장 큰 문제는 언급한 것처럼 교육에 있어 온갖 측정에 기반한 시도와 평가가 넘쳐나지만 정작 실제로 가치 있는 것을 측정하고 있느냐의 여부다. 증거에 기초하여 교육을 해야 한다는 생각과 교육이 증거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최근 세계 여러나라의 두드러진 경향이다. 이는 1980년대 영미권을 중심으로 교육 연구는 효과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시도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90년대 이런 사고가 연방 연구기금에 관한 법률에 영향을 미쳤고 2001년 미국의 초중등교육법은 모든 아이를 뒤에 남겨두지 않는다는 유명한 구절로 개정되었다. 

 이런 증거기반실천은 원래 의료분야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것이 다른 영역으로 확대한 것인데 이것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효과적인 개입으로써의 전문적 행위가 강조되고 그것의 인과가 분명해야 한다. 의료는 그러한 측면이 강하다. 하지만 교육은 그렇지 않다. 교육은 선형적 관계가 아니며 끊임없는 되먹임 관계다. 의료에서 치료가 있으면 낫거나 실패하지만 교육은 가르침이 있어도 반드시 배우는 것은 아니다. 교사의 교수가 어떤 학생에겐 매우 이롭지만 다른 이에겐 해로울 수 있으며 배우는 과정도 타고난 재능과 가정과, 친구, 주변 등 환경 여건의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교육에 대한 증거기반실천적 접근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수반한다. 우선 특정 목적에 대한 효과적인 방법이 있더라고 학생은 그에 따라 행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육은 항상 활동과 전략 그리고 개입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즉, 기술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도덕적 실천에 가깝다는 점이다. 그래서 교사는 교육상황에서 단지 효과가 어떨지를 질문하기보다는 폭넓게 이런 상황에서는 아이에게 어떤 것이 가장 적합한지를 질문한다. 

 

2. 책무성의 문제

 책무성의 개념은 진정한 민주적 잠재력을 가진 개념에서 벗어나 교육 실천을 사실상 억압하고 규범적 문제를 단순한 절차의 문제로 축소시킨 일련의 과정으로 전환되었다. 앞장의 증거기반실천이 교육의 민주적 통제에 위협이라면 책무성은 교육의 관리적 접근으로 인해 교육자들이 자신의 행위와 실천에 대해 책임지기보다는 결과에 대해 자기검열하게 하여 교육을 위축시키게 만들었다. 

 원래 전통적인 교육에서의 책무성은 지금처럼 거버넌스 체계가 아니라 관련하는 여러 주체가 상호 책임을 갖는 체계였다. 즉, 현장체험학습을 가서 아이의 돌발행동으로 사고가 난다면 과거엔 아이의 행동문제, 부모의 교육문제, 교사의 관리 문제, 버스기사의 문제, 그외 사회의 문제로 분산되어 상호책임졌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사건이 터지면 학교와 교사에게만 책임을 묻는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분위기는 체험학습 자체를 시행하지 않는 교육회피로 이어지게 된다.  

 이는 교육이 복지주의에서 관리주의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복지주의에서는 형평성, 통합, 사회정의 같은 전문적 기준에서의 가치와 헌신이 이뤄지고 협력의 강조 같은 공공서비스가 중요하다. 하지만 관리주의에서는 고객 자향의 정신, 효율성 및 비용효과성, 경쟁, 자유시장 경쟁, 품질 보증이 중요하다. 이런 전환의 기저에는 신자유주의가 있다. 공동선의 추구에서 공급자로서의 국가와 서비스 소비자로서 납세자 관계가 되어 버린 것이다. 

 1980-90년대만 해도 학부모는 자신을 교육의 소비자라 생각하지 않았고 교육을 상품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사실 부모의 선택과 학교가 부모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자체는 민주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부모의 요구가 사회에서의 교육의 형태와 목적에 대한 숙고가 결여된 것이라면 이는 단지 경제적 사회적 자본이 문화적 자본으로 바뀌는 결과를 초래해 불평등만 재생산하게 된다. 

 그리고 책무성은 강화되었지만 교육소비자인 부모와 학생, 공급자인 학교는 간접책무성 관계에 불과하다. 교육 공급의 질은 정부가 책임지고 학교는 당국의 규제에만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책무성이 강화되었음에도 부모는 교육의 방향에 참여 권한이 없다. 또한 책무성으로 학교에 인센티브를 가하게 되면 학교는 학생을 잘하게 만들기보다는 잘하는 학생을 유치하려 한다. 그것이 훨씬 손쉽기 때문이다. 또한 책무성의 문화에서 학교와 교사는 공급자 측에 갇혀 전문적 목소리를 내기도 어렵다. 

 결국 책무성은 학교 현장에서 학부모와 학생의 민주성을 다소 신장시킨 면이 있다. 하지만 학교는 정부의 각종 정책과 규제에 묶여 있기에 지역과 학교 특성에 맞는 요구를 실행시켜주지 못한다. 또한 책무성은 공공성과 기반한 학교교육의 제공을 납세자로서의 수요자측면으로만 바라보게 하여 공공성을 넘어선 개인적 요구와 과다한 요구 교육에 대한 책임을 교사와 학교에 집중시켰다. 이는 학교와 교사의 교육전문성을 약화시키고 자기 검열을 하게 만들며 급기야는 모든 책임과 위험을 회피하도록 해 교육자체를 크게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학생들이 운동회를 할 때 조차 시끄럽다고 소리치는 것이 지금의 실태다.


3. 멈춤의 교육(주체화의 교육)

 멈춤의 교육은 자격화, 사회화, 주체화를 모두 포괄하지 않는다. 주체화에 중점을 둔 방식이다. 저자는 주체화는 유일성 개념이라 설명한다. 그리고 현전으로서의 출현이라는 개념이 인간의 주체성과 주체화에 대한 인본주의적 약점을 극복한다고 본다. 즉, 주체화는 현전으로서의 출현인 것이다. 그리고 아렌트의 개념을 빌린다. 

 아렌트에게 행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고 특징은 자유이다. 행위한다는 것은 주도적이 되는 것이며 뭔가 새로운 것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래서 행위는 탄생이다. 다만 그녀가 말하는 자유는 선택한는 것을 무엇이든 하는 자유가 아니라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것을 존재하게 하는 요청이다. 그래서 이는 내면의 감정이나 지극히 사적인 것이 아닌 정치적이고 공적인 것이 된다. 즉, 나의 행위는 시작의 절반에 불과하며 타인이 나의 행위의 주도성에 응하느냐가 중요하다. 결국 주체가 현존하는 것은 개인의 측면을 강조하나 항상 세계 속에서 출현하므로 공적이고 타인과 같이 가는 것이다. 

 멈춤의 교육은 표준적인 질서의 중지 가능성을 열어주는 교육이다. 이를 통해서 유일성이 발현하고 유일한 타자를 만날 수 있다. 그래서 교육을 서비스로 보는 수요자의 요구는 배격된다. 이는 공동선의 추구가 아니라 지극히 개인의 이익과 민주주의에 대한 추상적 대의 명분의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엘커스는 학교가 지나치게 많은 민주적 간섭에서 보호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학교는 자율적으로 기능할 때 가장 잘 작동한다는게 그의 생각이다. 학부모와 학생 개개인의 공동성에서 벗어난 요구를 모두 들어주려하는 경우 겨우 의미없는 파편화된 교육과정만 초래될 뿐이다. 따라서 이런 선호들은 그것의 출처, 타당도, 가치성, 근거가 이기적인지 이타적인지를 고려해야 한다. 

 이런 일련의 것들을 위해 필요한 것이 숙의 민주주의다. 이는 개인의 욕구를 집단의 것으로 전환한다. 이는 어떤 신호가 가장 많은 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최선인지를 판단한다. 때문에 공공의 이익은 때론 사적 이익을 침해한다. 공적 영역에 대한 참여와 헌신은 특정의 규율과 특정의 자제력을 요구한다. 이는 참여와 헌신이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배움을 통해 어느 정도는 고통스럽게 내면화 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그리고 학교는 교과 학습에서 주체화의 장을 마련해줘야 한다. 이를 통해 개인이 세계에 대한 분명한 인상을 취할 수 있고 세계로의 진입도 가능해진다. 주체화는 교과 내용에 대한 참여를 통해 일어날 수 있는 사회적이고 상호주관적이며 결국은 정치적 과정이다. 

 포용도 중요하다. 포용인 민주주의의 정당성에 관여한다. 민주적 의사결정의 규범적 당위성은 그것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여 결과에 영향을 미칠 기회를 갖는 정도에 달렸다. 민주주의 역사는 포용범위의 지속확대 역사다. 그리고 배제의 역사이기도 하다. 배제의 대상은 합리성과 분별력은 없고 이기심만 가득한 자들이다. 그래서 민주적 교육은 개인으로 하여금 민주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준비가 되도록 하는 과정이다. 

 숙의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참가자들에게 더 공적인 마인드를 갖게 하고 보다 관용적이고 박식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에 주의를 갖게 한다. 그래서 자신의 관점을 더욱 공적으로 만들 수 있게 한다. 


 책은 교육에 대한 좋은 함의와 고민을 담았다. 전 세계 교육은 신자유주의와 측정의 사고방식에 함몰되어 있다. 그래서 작금의 교육현장은 공공선을 담아내는 그릇의 역할보다는 이기심과 공공성이 전무한 소수로 얼룩지고 있다. 그들은 말도 안되는 무한 요구로 학교와 교사, 그리고 다른 학생들을 괴롭히며 수많은 교육기회를 날리고 소진시킨다. 이런 것들에 대한 강한 제재가 필요하다. 자정작용은 어렵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밖에 보지 못하기에 주변의 비난엔 아랑곳하지 않는다. 법적 제재가 현재로선 유일한 방안으로 보인다. 책은 교육과 그 본질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들어주었다. 교육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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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온 미래 - AI 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
장강명 지음 / 동아시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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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인공지능 시대 초입에 진입했다. 향후 전면적 인공지능 시대에 살게 될 것은 분명하다. 현재 인공지능은 아직 분야별로 기능하고 있어 모든 분야에서 인간이상으로 기능하는 범인공지능의 시대까지 가지는 못했다. 그래서 현재 사람들은 각자의 직업과 상황에 따라 인공지능이 자신의 직장을 위협하는 정도가 각각 다른 상황이다. 코딩을 하는 사람이나 드라마나 시나리오 작가, 예술가, 음악가들은 이미 심대한 위협에 직면했지만 건설노동자나 간호사 등은 아직 이렇다할 인공지능의 그림자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선도적으로 인공지능이 침탈한 분야가 있으니 바로 '바둑'이다. 우리 모두는 10년 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을 기억한다. 이 사건은 인공지능이 인간을 넘어선 최초의 상징적 사건으로 사람들을 모두 강제로 인공지능의 시대로 이끌었다. 대국이 시작되기 전 바둑은 그 특유의 심오함으로 예술에 가까운 분야로 여겨졌고 변수가 너무 많아 비교적 단순한 체스와 달리 인공지능이 인간을 넘어서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이세돌의 참패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시 중계를 바라보며 인공지능이 두는 수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렴풋이 직접 대결하며 감을 잡은 이세돌이 마지막 대국에서 승을 거두었다. 이것은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바둑을 이긴 사실상 마지막 경기였다. 이후 여럿이 도전했지만 전혀 이길 수 없었고 인공지능의 실력은 당시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강해졌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넘어선 이 사건은 바둑판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먼저 그나마 긍정적인 측면으로 바둑계의 민주화(?)란게 이뤄졌다. 이전 바둑은 한중일 중심의 게임이었고, 조기 영재의 게임이었고 남자의 게임이었다. 서구는 바둑에 관심이 있어도 실력을 거의 늘릴 수 없었는데, 서구에 고수가 거의 없어 실력자와 대국을 두며 자신의 실력을 양성할 기회가 지리적으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개 바둑의 입문 시기는 5-6세다. 부모가 바둑에 취미나 교양이 있는 경우 이것을 어린 나이에 배우다고 소질이 발견되면 입문하는 형태였는데, 이런 요소 때문에 부모가 바둑을 모른다면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입문 시기 자체가 늦어 따라가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였다. 또한 바둑은 전반적으로 남기사의 실력이 월등했는데 이는 남기사들이 초반 대국의 실력이 앞섰기 때문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등장하며 이런 모든 면이 해소되었다. 서구의 사람들은 인공지능의 바둑이 최고로 평가받으며 인터넷을 이용해 이런 것들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일반인들 역시 부모가 바둑에 관심이 없어도 조기에 바둑에 입문하는게 가능해졌고, 인공지능을 통한 교육으로 인해 조기 영재들을 따라잡는 경우도 많아졌다. 여성기사들은 대국 초반에 약점이 있었는데 인공지능을 통한 수 배우기는 초반 대국에 매우 유리했다. 많은 기사들이 인공지능이 알려주는 초반 대국을 암기하여 게임 중반으로 넘어가게 되었으므로 이는 여성기사들의 실력 양성에 도움이 되었다.

 이제부터 나올 것은 모두 문제점이다. 인공지능은 우선 바둑 기사들의 생계를 위협하게 되었다. 과거 바둑에서 실력을 양성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 보다 고수를 만나 직접 대국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하수는 고수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일종의 대국료를 지불하였고, 고수들에게 기원 등에서 수강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인공지능을 통해 수를 배우게 되면서 이 모든 것이 거의 사라져버렸다. 대회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이 등장하였어도 대회 자체의 수는 줄어들지 않았지만 상금 자체가 적어젔다. 특히, 하위 영역에 입상하는 기사들에게 지불하던 상금의 액수가 사라지거나 크게 줄었다.

 다음은 바둑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다. 과거 바둑은 일종의 예술로 여겨졌다.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너무나도 많다보니 인간의 머리로는 이에 완전히 통달할 수 없었고 이런 요소 때문에 규칙과 승패가 분명한 게임이자 스포츠적 요소가 강함에도 예술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강했다. 특히, 각 기사들은 자신만의 대국 방법이 있었으며 사람과 직접 대결하다보니 대국을 하면서 풍기는 기세도 이러한 예술적 부분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인간을 능가하며 이 모든 것이 사라졌다. 과거 고수의 수 하나하나는 설명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하나하나의 수를 모두 이길 확률로 평가한다. 과거 멋지게 두던 기사의 수들도 인공지능이 평가해보면 형편없는 수인 경우가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모든 요소는 바둑에서 예술성을 앗아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학습 방법도 변화했다. 인공 지능 이전 바둑 실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은 고수와 대국하거나 , 과거 훌륭한 기사들의 기보를 분석하거나, 고수에게 입문하여 꾸준히 사사하거나, 기원에서 동료들과 모여 여러 수들에 대해 토론하거 새로운 수에 대한 효과들에 대한 갑론을박을 주고 받는 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것이 거의 사라졌다. 최고의 기사들도 인공지능의 수를 공부한다. 그리고 그를 이해하려고 하고 인공지능이 두는 수에 기반하여 바둑 게임이 이뤄진다. 특히 초반부가 그러하다. 게임이 상당히 진행된 중반 이후부터는 인간이 두는 영역이 많이 남아있지만 향후 이조차도 어찌될지는 알 수 없다. 

 마지막은 바둑 기사들이 느끼는 심리적 공허함이다. 인간에게 자신이 종사하는 영역은 하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다. 사람은 자신이 종사하는 분야에서 경험을 쌓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인정받고 또한 인정하며 성장해나간다. 이는 인간이 평생을 살아가며 자신의 긍정적 정체성과 자아존중감을 쌓는 방식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일순 등장해 이 모든 것을 부정해버렸다. 우러러 보던 고수의 대국이 알고보니 형편없는 경우가 많았고, 그들의 아우라도 거의 사라져버렸다. 무엇보다 사람이 기계에 의존하여 모든 것을 진행해야 하거 그것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 큰 듯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바둑을 전혀 모른다. 작가 장강명은 바둑에 관심이 많고, 이를 통해 수 많은 바둑계의 사람들과 직접 인터뷰하며 책을 구성했다. 인공지능이 최초로 침탈한 분야로 다른 분야에서도 도 인공지능이 적용될 수 어떠한 일이 일어날 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작가는 논의를 진행하며 자신의 분야인 문학에서도 인공지능이 인간 이상의 소설을 양성할 시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꾸준히 상상하며 우려했다. 

 우린 이런 걸 고려하지 않고 인공지능의 개발에만 몰두한다. 그 흐름은 되돌리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이미 국제공조보다는 대결의 시대로 들어섰고 기업들 역시 빅테크를 중심으로 패권을 잡기 위해 고삐를 늦추기 보다는 무한 경쟁으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은 인간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인공지능도 그러할 것이다. 더욱 강하게. 이에 대한 우려와 고민이 담긴 책이었다. 책 말미를 통해 작가님의 아내분이 아픈 것을 알 수 있었다. 부디 쾌차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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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냉전 시대
제이슨 솅커 지음, 김문주 옮김 / 더페이지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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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 냉전이 기억 난다. 미소 양국은 적대적으로 상호확증파괴 무기를 개발했고, 핵으로 인한 공포로 인해 영미권에서는 핵전쟁 드라마나 영화도 많이 제작되었다. 그 냉전이 끝난지 30년, 이젠 미국과 중국이 중심이 되어 세계화 시대를 마무리하고 사실상의 제2차 냉전이 시작되었다. 책은 이 용어를 제시하고 이를 개념화한다.

 사람들은 제1차, 제2차 대전을 별개로 생각한다. 시간 차도 좀 있고, 인류 역사상 미친 영향과 사상자수도 상당히 차이가 난다. 하지만 독일이란 주인공을 중심으로 양차 대전은 사실상 독일 문제에 대한 전쟁이다. 독일 문제는 19세기 독일인이 거주하는 영토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통일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독일어를 쓰는 민족과 영토를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는 대독일주의와 이를 북독일로만 국한하는 소독일주의가 있다. 문제는 대독일주의의 실현이었다. 

 이처럼 1, 2차 냉전도 중국을 주인공으로 보면 일관된다. 1차 냉전은 지금의 러시아인 소련이 주인공이지만 중국도 주역이었으며 미국이 중국이 아시아에서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패권을 장악하려는 오래된 경향을 막아낸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런 관점이라면 제1차, 제2차 냉전은 일관성있게 연결된다.

 제2차 냉전의 전조는 적대적 연합의 형성, 경제와 기술을 탈동조화, 대리전과 하이브리드전, 사이버-정보전쟁으로 구분한다. 

 제1차 냉전은 미소의 대결이었지만 양측의 직접 충돌은 사실상 없었다. 대리전이 치뤄졌는데 한반도와 베트남, 아프간 등이 주 무대였다. 제2차 냉전의 대리전은 러우전쟁, 이란의 대 테러전과 이스라엘, 대만에서 일어난다. 두 개는 실현되었고 마지막 하나는 가장 파급력이 높고 파괴적이며 일어날 가능성이 충분하다. 

 2차 대전에서 연합국은 교훈을 얻었다. 그들은 히틀러의 체코 주데텐 지역 합병을 승인하였는데, 이를 통해 히틀러는 영국, 프랑스가 개전의지가 없음을 깨닫고, 체코 전지역을 병합하고 2차대전 마저 일으킨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가 체코 주데텐 합병을 승인하지 않았다면 독일은 불리한 산악지대에서 싸웠어야 했고, 사전의 독일의 전술과 무기체계에 대해 적응하고, 전면전을 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을 것이다. 러우전도 마찬가지다. 유럽연합과 미국은 개입하여 상당한 시간을 벌었다. 러시아의 무기전략체계를 알 수 있었고, 사실상 무방비였던 나토의 국방비와 방어력이 상당히 증가하였으며 동유럽에 나토 상비군마저 배치할 수 있었다. 우크라 합병을 그저 보고만 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성과와 대비다. 

 하마스의 공격은 이란과 러시아 그리고 제2차 냉전의 동반자들이 추구하는 지정학적 목적을 뒷받침하는 광범위한 합동 대리전이다. 이는 주요 자원 수송로인 중동을 위협하여 미국과 유럽의 상당한 군사자원을 이쪽으로 돌리게 만들어 러우전을 러시아와 중국에 유리하게 만들었다. 러시아는 이란의 대리전에 핵심역할을 했다. 바그너 그룹이 이란의 후원단체와 협력을 강화하였고, 군사훈련, 안보협력, 무기기술을 제공했다. 이란은 후티반군에 탄도미사일, 트론, 장거리 타격 능력을 제공했다. 후티반군을 이를 이용해 홍해를 지나는 선박을 타격해 미국와 나토의 군사역량을 이리로 집중시켜 우크라이나 지원 역량을 줄였다. 

 중국은 연합리검작전 2024A와 2024B를 실행했다. 이는 대만봉쇄 및 침공상황에 대한 작전이다. 중국의 해군은 사상최대규모다. 2년마다 무려 프랑스 함대 전체 수준의 성장이 이뤄지고 있다. 2025년까지 항모도 두 척 추가 진수예정이다. 스텔스 구축함과 강습상륙함도 신속히 증가중이다. 중국은 이미 남중국해를 군사화했다. 오바마 정권 당시 이를 묵인한 것이 미국과 동맹의 패착이다. 10년간 피어리크로스, 수비, 너스치프 암초를 군사화하여 장거리 레이더 시스템, 전투기, 폭격기 수용활주로, 미사일 격납고와 대함/대항공기 포대, 연료보급 및 재공급을 위한 심해해군시설이 구축되었다. 미국과 동맹은 대만 침공시 이 시설로 인해 상당히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북한은 제2차 냉전의 불안한 대리전 당사자의 하나가 될 수 있다. 북한은 이미 러우전쟁에 상당한 물자와 병력을 공급했다. 핵과 미사일 능력도 확대중이다. 태평양과 미본토 타격이 이미 가능하다. 중국은 밀무역과 에너지를 평양에 공급하고 있고 러시아는 군사기술, 식량원조, 외교적 지지를 하고 있다. 중국은 대만을 침공할 시 북한에 남한으로의 도발을 유도할 수 있다. 이는 후티반군이 한 것처럼 미국과 동맹의 자원을 양쪽으로 분산시켜 대만침공에 유리한 발판이 된다. 

 중국과 러시아는 아프리카로도 전선을 확대 중이다. 경제지원, 군사원조, 정치공작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아프리카는 풍부한 천연자원, 전략적 항구, 경제발전으로 지정학적으로 중요하다. 중국과 러시아 모두 아프리카에 기반을 구축하고 있다. 중국은 일대일로 정책으로 아프리카에 진출했다. 대규모 차관으로 인해 많은 나라들이 이미 중국에 종속되고 의존중이다. 부채상환의 어려움으로 인해 중요 전략자산을 중에 넘겨야 하는 부채함정외교에 빠진 상황이다. 중국은 지부티를 중심으로 아프리카의 뿔 주변을 지나는 핵심해상항로에 대한 권한과 통제권을 확보 중이다. 중국은 여러 나라를 도우면서도 특히, 자신들과 같은 권위주의적 정권을 강화하고 있다. 러시아 바그너 그룹도 말리, 리비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등 분쟁 지속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친크렘린 정권을 지원한다. 그리고 대가로 금, 다이아, 에너지 자원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 중이다. 

 남미 역시 중국의 주요 공략 대상이다. 브라질, 아르헨, 칠레, 페루 같은 나라의 핵심 농업과 에너지, 광업 분야에서 중국의 통제력이 확대중이고, 투자하여 의존하게 하고 있다. 중국은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니카라과와의 관계를 광하중이다. 이들 국가에 무기, 감시기술, 군사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권위주의 정권을 강화하고 미국의 영향력을 줄이고 있다. 남미는 중국과 러시아가 부추기는 대리전에 취약하다. 아르헨티나는 중국과 군사적 유대관계를 맺고, 중국이 남대서양과 남극대륙 근체에 전략적인 통제를 확립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SNS는 은밀한 방식으로 사회를 해체하고 가짜뉴스를 현실로 왜곡하는 호위 합의 편향을 이용해 분열을 부추긴다. 역사적으로 강력한 서사는 대중을 동원해 혁명의 불을 지폈다. 인지적 억압, 경제적 어려움, 국가적 굴욕이 주요 메시지다. 이를 분노와 두려움, 억울함, 자부심 같은 정서를 자극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자꾸 이것을 퍼뜨려 그것이 마치 널리 퍼진 합의라도 되는 양 만든다. 중국과 러시아는 AI생성콘텐츠와 봇을 이용하여 범세계적 담론을 조직하고 이를 서구의 화합파괴에 이용한다. 

 SNS는 감정이입과 창의력을 감소시킨다. SNS는 위기와 분노, 갈등을 끊임없이 조장하여 전반적으로 대중을 공감피로 상태로 몰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이 고통에 둔감해지고 프로파간다에 도덕적으로 저항하지 못하게 한다. 알고리즘의 콘텐츠 피드는 복합적 사고를 막고 단기적 사고만 하게 한다. 반응적이고 초당파적 담론이 늘며 섬세한 논의가 어려워진다. 이는 사안에 대한 이성적이고 창의적인 대응을 막는다. 그래서 제2차 냉전은 국가 정체성과 진실, 디지털 회복력을 위한 싸움이 된다. 

 체제 위기에는 5가지 징후가 있다.

 첫 번째는 군사적 위험이다. 대리전, 봉쇄, 무력충돌이다. 언급한 것처럼 중동, 대만, 한반도, 아프리카가 가능성이 높다. 둘째는 경제적 위험이다. 무기화된 무역, 부채함정, 자원의존도가 위협이다. 서구 경제를 불안하게 하기 위해 중국은 산업우위, 러시아는 에너지 우위를 이용한다. 중국은 산업경쟁력에서 이미 미국의 영향력에서 상당히 자립했다. 그러면서도 희토류 제련을 독점해 언제든 미국을 위협할 수 있다. 그리고 미국은 제조업이 붕괴하여 주요 기술과 군사부품에서 적대적 공급망에 의존중이다. 세번째는 기술적 위험이다. 인공지능 전쟁, 사이버 위협, 산업스파이다. 중국은 인공지능과 사어비전쟁, 디지털 감시에 선도적이다. 이것으로 전 세계적 담론을 조장하고 거짓 선도으로 민주주의를 뒤흔든다. 산업스파이는 미국과 유럽의 기술을 탈취한다. 대만은 전 세계 반도체의 무려 60%, 첨단 반도체의 경우 90%를 생산한다. 중국의 대만 봉쇄나 침공은 큰 위협이다. 네 번째는 정치적 전략적 위험이다. 언급한 것처럼 민주주의 진영 내 거짓 선동으로 내부분열을 일으킬 수 있다. 마지막은 디지털 위험과 심리적 위험이다. SNS의 무기화로 적대세력이 대중의 정서조장, 정치담론 형성, 사회결속력을 약화한다. 양극화로 정서적 고갈과 사회불안이 늘어난다. 

 제2차 냉전은 세계 질서를 재편한다. 금융과 에너지 시장, 기술, 무역, 공급망에 이르기까지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높아진다. 기업은 투자전략을 바꾸고 위험노출을 재평가해야한다. 경제,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려는 경쟁은 글로벌 공급망을 파괴하고, 금융의 흐름을 변화하고, 기술경쟁의 구조를 조정하고, 통상적인 관계를 재정립한다. 이는 국가안보와 기업전략에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북극은 새로운 전장이다. 해동하면 막대한 양의 에너지 자원과 희토류, 북극항로가 대상이다. 러시아는 구냉전시대의 기지를 재가동중이다. 극초음속 미사일을 배치하고 북극함대를 강화한다. 중국 역시 멀리 떨어져있음에도 억지로 근북극권국가를 주장하며 경쟁에 뛰어든다. 극지실크로드 전략으로 에너지프로젝트, 운송인프라, 군사연계 연구소 등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중이다. 미국과 나토는 이에 대응해 북극해상경비를 강화하고 쇄빙선 함대를 확장중이다. 캐나다, 노르웨이, 덴마크와의 동맹도 강화중이다. 

 우주도 전장이다. 중국은 우주군사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우주자산감시, 사이버공격, 미국와 동맹의 우주자원에 대한 전자적 수행이 가능하다. 중국은 우주실크로드로 저궤도 통신과 달자원채굴을 노린다. 미와 동맹도 이에 대응해 위성 이용과 프로그램, 인공지능기반 궤도 방어시스템, 우주기반 미사일 요격기동을 준비중이다. 

 미국과 동맹은 환적을 엄격히 감시하여, 중국기업의 제3국을 통한 구멍을 차단하고 있다. 양자컴퓨터 기반의 무역 감시와 블록체인 기반의 추적 체계 덕에 앞으로는 상품의 원산지와 감시, 공급망 부정행위 추적 기술이 더욱 강화될 것이다. 

 경제안보는 경제적 힘과 경제적 자급자족으로 구분한다. 국가의 GDP는 자본, 노동, 기술의 결합이다. 최근 기술이 점점 핵심요소로 부상 중이다. 경제적 자급자족은 전략적 자원의 비축, 강력한 국내 생산기반, 독립적인 기술확보, 다변화된 공급망, 무기 생산에 필수적인 산업용 금속 및 핵심소재의 안정적 공급이다. 미국은 경제적 힘은 우수하나 경제적 자급자족에서 취약하다. 반면 중국은 경제적 힘에서는 미국에 뒤쳐지나 경제적 자급자족은 상대적으로 낫다. 이로 인해 제2차 냉전시대의 미국과 동맹의 과제는 다음과 같다.

1. 희토류 채굴, 제련 능력을 늘리고 중국 의존도를 감소

2. 남미, 아프리카, 동남아로 새 에너지 파트너 구축 및 다각화

3. 소듐이온 배터리, 전고체 배터리로 개발로 리튬과 코발트 의존 줄이기

4. 동맹 내의 신재생에너지 구성품 생산장려로 중국 의존도 줄이기

5. 미국, 캐나다, 멕시코와 우호적 페르시아만 국가로부터 에너지 수출을 늘리고 러시아와 이란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 줄이기

6. 신흥국에 대한 인센티브로 미국으로부터 에너지 수입 확대

7. 유럽연합과 아시아로  LNG수출 확대, 러시아 LNG 의존도 줄이기

8. 에너지 인프라 개발로 대외원조 활용


 중국의 지정학적 위협으로 인해 리쇼어링, 니어쇼오링, 프랜드쇼어링 전략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반도체, 의약품, 바우이산업, 첨단 제조 부품 등 공급망 안보가 국가안보의 우선순위인 산업일수록 이런 경향을 두드러진다. 국제 무역의 미래는 다음과 같다.


1. 경제 및 국가안보를 위해 관세의 광범위한 사용

2. 세계 공급망의 재편

3. 경제적 자급자족 압력 강화

4. 중국 견제

5. 군사화하는 무역 항로의 위험성 증가


이런 경향으로 인해 세계화가 마무리된 이후 지난 10년간 세계의 무역 규제는 무려 100배나 증가했다. 

 향후 기술적 우위 전쟁도 극적이다. 세계는 사실 상 두개의 기술 지역으로 구분되고 경쟁중이다. 양자 우위는 더 이상 단지 컴퓨팅의 문제가 아니다. 사이버 보안과 정보지배, 암호의 우위 문제다. 중국은 양자부호화로 서구의 암호 프로토콜을 파훼하고 기업과 금융거래, 군사정보에 접근하려 한다. 중국은 양자 부분의 특허량이 미국을 압도한다. 

 반도체 전쟁은 인공지능과 양자, 첨단기술의 지배를 의미한다. 반도체 생산을 장악한 국가가 세계 경제와 군사력을 좌지우지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2차 냉전의 시나리오 4개를 제시한다.

1. 정체

 지정학적, 경제조건이 변화하지 않으며, 정체된다. 관세, 동맹, 제재, 갈등 위협이 현 수준을 유지하는 시나리오로 현실성이 낮다. 

2. 붕괴

 탈세계화가 멈추고 무역 규제가 철회되어 미중 갈등 이전의 자유무역에 기반한 세계화 시대로의 회귀다. 역시 가장 현실성이 낮다.

3. 지속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다. 2차 냉전이 꾸준히 진행하고 탈세계화, 무역전쟁, 대리갈등, 미중격돌이 격화한다.

4. 포물선

 2차 냉전이 장기화하여 분쟁이 가속화하고, 직접 군사충돌도 일어난다. 역시 실현가능성이 높지 않다. 


 저자는 갈등이 지속될 것으로 보고 사태가 최악으로 치닫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적대국 간의 소통채널 확보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전쟁은 치열한 이성적 계산에 근거하기 보다는 소통 실패와 억제 전략의 오판, 보복의 악순환에서 시작했다. 실제 1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은 봄의 전쟁이 가을이면 끝날 것으로 오판했고 2차 대전의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체코 합병의 의도를 오판했다. 

 향후 각 나라와 기업들은 위와 같은 흐름을 잘 살펴 정책과 투자 및 경영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 기업은 공급망을 재편하고, 사이버 보안을 강화하며, 금융 탈동조화와 경제적 파편화에 대비해아 한다. 에너지, 원자재의 확보다 중요하다. 대한민국은 식량자급률이 20% 초반에 불과하고, 미중 대리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대만 및 북한과 인접한다. 향후 기업과 정부에 상당한 위기 관리 능력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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