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파동 만들기'에 두 전류 도선 사이에 작용하는 힘에 관한 앙페르의 실험을 기술하는데, 힘의 방향 설명에 오류가 있다.


  1879년 앙드레 앙페르는 전류가 흐르는 두 가닥의 전선을 나란히 놓았을 때, 전류가 같은 방향으로 흐르면 전선들이 서로를 밀쳐 내고, 전류가 반대로 흐르면 잡아당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기는 자기력을 띠었고, 자기력은 전기적이었다. 그렇다면 전자기 현상이란 양전기와 음전기를 가진 '미립자'가 자기력을 만들어 내는 작용을 말하는 것일까? (419 페이지, 밑줄 추가)


위의 글은 두 평행한 도선에 흐르는 전류가 같은 방향이면 척력, 다른 방향이면 인력이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전류의 방향이 같으면 인력, 다르면 척력이 맞다. 두 전하 사이에 작용하는 쿨롱의 힘과 연관하여 혼동한 듯 싶다. 쿨롱의 힘은 두 전하의 부호가 같으면 척력, 다르면 인력이다. 


원문에도 같은 오류가 있다. 


  In 1879 André Ampère put two live wires next to each other and saw that when the currents ran in the same direction the wires repelled each other and when the currents went in oppsite directions the wires were attracted. Electricity was magnetic and magnetism was electrical. Was the electromagnetic phenomenon a 'molecule' on which positive and negative electricity acted to produce magnetism? (p. 281, 밑줄 추가)


번역서의 마지막 문장인 "전자기 현상이란 양전기와 음전기를 가진 '미립자'가 자기력을 만들어 내는 작용을 말하는 것일까?"는 언뜻 잘 이해가 안되는 원문을 의역한 듯 싶은데, 사실 원문을 왜곡했다. 원문의 뜻대로 번역하자면 "전자기 현상이란 양전기와 음전기가 작용하여 자기력을 만들어내는 '미립자'인 것일까?"가 맞다. 무슨 뜻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저자인 버크는 과학사와 문화사에 정통한 듯 싶지만, 과학에 대한 내용을 기술할 때 부정확해 보일 때가 있다. 위의 글이 그런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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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 낡은 테이프, 피아노, 풋풋함, 추억, 노래, 마음, 라디오, 길거리, 말들, 미안함, 부러움, 그리움, 울음, 웃음, 하염없이... 바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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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그 자체 - 현대 과학에 숨어 있는, 실재에 관한 여덟 가지 철학
울프 다니엘손 지음, 노승영 옮김 / 동아시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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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 다니엘손은 스웨덴의 끈이론 연구가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도발적 문장으로 책을 시작한다. 


비밀을 하나 알려드리겠다. 살아 있는 존재는 기계가 아니고, 우리 머리 밖에는 수학이 존재하지 않고, 실재하는 세계는 시뮬레이션이 아니고, 컴퓨터는 생각하지 못하고, 의식은 환각이 아니고, 의지는 자유롭지 않다. (21 페이지)


책의 나머지는 위의 주장에 대한 그의 설명과 논증이다. 그는 '실재가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동어반복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첫 번째의 '실재(reality)'는 우리 주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들(사과, 사람, 개, ...)을 의미한다. 그것이 환상(illusion)이 아니라 실제로 있다는 것이 위 문장의 뜻이다. 왜 이런 말을 하냐면, 실재가 사실은 환상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바로 플라톤주의자들이다. 우리 주변의 사물들이 사실은 '이상적' 형태의 불완전한 반영이라는 것이 플라톤이 한 말인데, 현대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자연 현상이 수학에 의해 설명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러므로 자연 현상보다 수학이 더 본질적이고, 어찌 보면 자연 현상은 단지 그림자(환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일군의 이론물리학자들이 그 예이다. 이런 생각(모든 것이 수학으로 설명)을 더 밀고 나가면 살아 있는 존재는 기계이고, 우리 머리 밖(이데아의 세계?)에 수학이 존재하며, 실재하는 세계는 마치 컴퓨터 시뮬레이션과 같고, 컴퓨터와 우리 뇌는 별 차이가 없으며, 그러므로 컴퓨터도 생각할 수 있고(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하지만 의식처럼 보이는 것은 컴퓨터가 만들어낸 것이므로 결국 인간의 의식도 뇌가 만들어낸 환상일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다니엘손은 이 모든 것이 표상에 불과한 수학을 실재로 착각한 오류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시간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스몰린도 이런 입장에 동의할 것 같은데, 스몰린은 과학 쪽에서 그의 주장을 펼치는 반면, 다니엘손은 입장과 논증이 상당히 철학적이다. 그가 스몰린과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지점은 의식을 물리학이 설명할 수 있느냐이다. 스몰린은 객관적으로 관찰이 불가능한 의식은 물리학의 영역이 아닐 거라고 얘기하는 반면, 다니엘손은 물리학은 모든 것을 포괄해야 하며, 그러므로 의식까지 포함하여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식을 포함한 물리학이 무엇일지는 그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물리학이라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개념 오류들의 일소가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의식이 실재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이라는 것은 (종교인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동의하는 부분이다. 100년 후, 또는 1,000년 후에는 과연 의식까지 포괄하는 물리학이 가능할지, 우리는 모른다. 어떤 물리학일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무척 궁금하다. 어쩌면 영원히 인간의 능력 밖인지도 알 수 없다. 


그의 관점에는 상당 부분 공감할 수 있었지만, 사실 그의 생각을 100%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거슬리는 번역 용어 2개가 자꾸 눈에 띄는데, 하나는 "기초 물리학"이고 다른 하나는 "환각"이다. 기초 물리학은 fundamental physics를 번역한 말인데, fundamental physics는 입자물리학이나 우주론 같이 근원을 탐구하는 물리 분야를 뭉뚱그려 부르는 말이다. 잘 사용하는 말은 아니지만 '근원 물리학'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 싶다. "기초 물리학"이라고 하면 basic physics가 떠오르며, 이는 원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환각"은 illusion을 번역한 말일 텐데, '환상'이 더 적절한 듯 싶다. 환각은 뭔가 약물의 영향인 듯한 느낌이 들지 않나? 


과학의 본질이나 의식의 문제에 관심 있는 분들이 읽으면 곱씹을 만한 주장이 많다. 하지만, 추천사에도 나오듯 많은 이론물리학자들은 저자와는 완전히 반대로 생각한다. 이들이 사실 물리학계의 주류이다. 


... 물리학은 그저 모든 것의 토대가 아니라 모든 것이다. 나는 물리학을 세계 자체의 모든 측면에 대한 연구로 정의한다. 우리는 유기체로서 이 세계의 일부를 이루며, 진화를 거치는 동안 서서히 자신을 영원한 잠에서 깨어난 물질로 인식하게 되었다. 물리학은 자유롭고도 독립된 관찰자가 세상 바깥을 떠다니며 멀찍이서 관찰하는 학문이 아니다. 우리의 유기체적 몸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과학적 모형을 비롯한 우리의 모든 생각은 우리가 그토록 절실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바로 이 세계의 일부다. 내가 상상하는 물리학은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고 모든 것을 다룬다. 물리학은 말 그대로 생사가 걸린 문제다. (27 페이지)

  평행 세계 이론의 핵심은 무엇을 실재로 간주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수학적 도구는 단지 우리가 예측할 때 이용하는 모형의 일부일 뿐일까, 아니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무언가에 대응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어떻게 접근하는지에 따라 결론이 달라진다. 수학적 구조를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라고 믿는다면, 파동 함수를 이 범주에 넣고 평행 세계를 인정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하지만 당신이 (나와 마찬가지로) 물질적 우주가 수학의 형식언어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실재가 하나 이상 존재한다고 믿을 이유는 전혀 없다. (70 페이지)

  뉴턴은 중력이 있다고 말하고 아인슈타인은 없다고 말한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뉴턴 역학이 거둔 성공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채 더 정확한 예측을 내놓는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무엇보다 GPS로 정확한 위치를 계산하는 데 필수적이다. 미래의 물리학자들은 더욱 효과적인 이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법칙과 수학이 발전하고 달라질 수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우리 머릿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뉴턴의 머릿속에, 아인슈타인의 머릿속에, 그리고 당신의 머릿속에. 자연은 사과가 어떻게 떨어지는지 계산하기 위해 물리학과 수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과는 그냥 떨어진다. 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우리의 기술은 시간에 따라 발전하고 개선된다. (84 페이지)

  실재론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과학자들에게 특히 인기 있는 것은 우리의 의식 바깥에 우리의 생각과 선입견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세계가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은 단 한 가지뿐이다. 이것이 많은 과학자들이 천명하는 믿음이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실재론의 진짜 의미 아닐까? 대안이 있을 수 있을까? 실은 대안이 있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실재론은 '형이상학적 실재론metaphysical realism'이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불린다... 이 입장은 우리의 직관에 반하며, 우리가 일상적 현실을 바라보고 관계 맺는 방식과도 어긋나지만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세계가 실재로 존재하는 방식이 하나뿐이라면, 그 세계의 형태는 (물리학의 주장에 따르면)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입자들의 덩어리일 수밖에 없다. 형이상학적 실재론은 실재를 바라보는 대안적 관점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기초 물리학의 기술은 예외적으로 예외를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 보이는 모든 거시적 물체는 알고 보면 임의적 구성물에 불과하다.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의자와 당신이 지금 앉아 있는 의자(지금 앉아 있다면), 내가 <세계 그 자체>를 쓰고 있는 컴퓨터와 당신이 손에 들고 있는 책, 내 몸과 당신의 몸도 마찬가지다. 형이상학적 실재론에 따르면 이 가운데 무엇 하나도 실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이 세계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이 세계는 우리가 만들어 낸 환각일 뿐이다. (108~109 페이지)

... 객관적 세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세계에 대한 주관적 표상을 만들어 낼 가능성을 인정하는 철학적 모형은 없을까? 그런 것이 있다. 퍼트넘은 그런 모형에 '내재적 실재론internal realis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내재적 실재론의 요점은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세계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세계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 하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퍼트넘은 세 종류의 물체들로만 이루어진 세계를 예로 들었는데, 여기에 살을 붙여보자. 이해를 돕기 위해 세 물체를 사과, 오렌지, 바나나라고 하겠다. 이것들이 우리가 쓸 수 있는 유일한 구성 요소다. 이 세계가 세 종류의 물체들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은 필수 불가결한 사실로 보인다. 과연 그럴까? 이것만이 이 작은 세계를 정의하는 방법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과일을 둘씩 셋씩 짝지어 또 다른 구성 요소로 간주할 수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일곱 가지 구성 요소가 생기는 셈이다. 이제 사과, 오렌지, 바나나 말고도 사과-오렌지, 사과-바나나, 오렌지-바나나, 사과-오렌지-바나나가 생겼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이 체계로 표현되고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성 요소는 3개일까, 7개일까? 그것은 당신에게 달렸다. 하지만 당신이 한 체계를  선택하고 고수하면, 그 안에는 세계에 대해 객관적으로 참인 진술들이 존재하게 된다. 

  우리가 현실 세계를 파악하려 할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세계 자체는 원자와 진공 같은 물리학적 구성 요소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도 있고, 의자, 책, 사람 같은 일상적 사물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근본적 의미에서는 동일한 세계이지만(우리는 실재론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내재적으로, 즉 의식 안에서 우리는 세계를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분명 근사한 일이다. (110~112 페이지)

  그런데 이 중에서 더 나은 방식이 있을까? 당연하겠지만, 그것은 당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에 달려 있다...

  내재적 실재론의 이점은 실재하는 세계와 그 세계에 대한 기술을 구분한다는 것이다. 과학의 목표는 세계 자체에 대한 유용한 예측을 내릴 수 있는 효율적이고 신뢰할 만한 모형을 내놓는 것이다. 각각의 모형은 잠정적이며, (정량적 예측뿐 아니라 개념적 실증 면에서도) 언제나 개선의 여지가 있다. 앞서 보았듯 뉴턴 역학에서 일반 상대성이론으로의 전환이 그 예다. 뉴턴은 사과의 낙하와 달의 공전이 중력에 의한 것임을 간파했다. 아인슈타인은 중력의 존재를 깡그리 부정하고 모든 것이 휘어진 시공간의 결과라고 주장하여 뉴턴 역학을 송두리째 뒤엎었다. 이런 종류의 개념적 혁명을 고려하면 과학의 발전은 그때까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적어도 당신이 형이상학적 실재론자라면 그렇다. 틀릴 때마다 원점으로 되돌아가라. 거듭거듭 그렇게 하라. 뉴턴은 틀린 것으로 드러났고 아인슈타인이 그의 자리를 차지했다. 말하자면 과학은 결코 믿을 것이 못 된다. 하지만 내재적 실재론자의 생각은 달라서, 과학이 정확히 제대로 작동된다고 말한다. (112~113 페이지)

  요점은 과학을 수학적 논리에 기반한 체계로만 본다면 과학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 같은 연구자들이 이론을 가지고 하는 일도 형식화된 규칙에 따라 기호를 조작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의미가 생겨나는 것은 이 기호들이 현실 세계에, 더 정확히 말해 우리가 선택하고 추상화하는 현실의 일부에 연결될 때뿐이다. 문제는 여기에 중요한 단계들이 있다는 것인데, 이 단계들은 사소한 것으로 오인되며 의도적으로 외면당한다. 고상한 관념들과 비루한 자연계 사이에는 연구자 자신의 체화된 의식이 놓여 있다(이것이야말로 과학의 본질이다). 수학과 논리라는 추상 세계와 우주 사이에 객관적이고 외부적이며 독립적인 연결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연결은 언제나 피와 살로 이루어진 뇌에서 이루어진다. (132 페이지)

순수한 형식언어로 수학의 본질을 포착할 수 없듯 현대물리학은 물질이 어떻게 유기체적 존재를 통해 의식을 만들어 내는지 알지 못한다...

  물리학자들은 곧잘 두 가지 기본적 함정이 빠진다. 첫 번째 함정은 모형을 세계 자체로 혼동하는 것이다. 모형은 수학으로 정식화되므로, 세계 자체를 수학과 동일시하는 실수를 저지를 법도 하다. 두 번째 함정은 괴델의 결론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완전히 기계적인 수학이라는 힐베르트의 헛된 꿈을 좇는 데서 비롯한다. 이렇듯 세계를 수학과 동일시하면, 세계 자체가 어떤 의미론도 필요로 하지 않는 무의미한 구문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는 수많은 기이한 결론을 낳는다. 이를테면 모든 것이 의미 없는 형식언어에 불과하다면 시뮬레이션과 현실 세계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있을 수 없다. 이것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우리가 컴퓨터에서 돌아가는 한낱 프로그램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전적으로 합리적이다. (168~169 페이지)

살아 있는 유기체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새롭게 한다. 우리를 이루는 물질은 대부분 교체된다. 기계의 동일성은 물질적 부분, 궁극적으로는 낱낱의 원자에 깃들어 있지만 살아 있는 유기체에 대해서는 결코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없다. 기계가 본질적으로 닫힌계closed system인 데 반해 유기체는 들락날락하는 흐름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열린계open system이기 때문이다. (193 페이지)

  세계 자체를 평범한 컴퓨터에서 시뮬레이션할 수 있고 자연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모든 계산을 튜링 기계에서 수행할 수 있다는 생각은 흔히 '물리적 처치-튜링 가설physical Church-Turing hypothesis'이라고 불린다... 말하자면 우주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고성능 컴퓨터로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즌에 따르면 생명계는 스스로를 떠받치는 고리가 필요한데, 이런 고리는 시뮬레이션이 불가능하다. 처치-튜링 가설이 적용되는 세계에는 오로지 기계만 있을 뿐 생명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로즌이 옳다면 처치-튜링 가설은 틀렸으며 살아 있는 유기체는 이 가설에 어긋나는 물리계의 첫 사례다. 따라서 생명계를 완벽하게 기술하려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컴퓨터의 정보처리 능력을 뛰어넘는 모형을 동원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계산 불가능한 수학이다. (19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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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늑대와 검찰의 시간 - 윤석열과 검찰주의자들
이재성 지음 / 어마마마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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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시기는 정치적으로 무엇을 위한 것인가. 비정상의 정상화인가, 아니면 정상의 비정상화인가. 답은 개인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일례로 원자력발전소 문제만 해도 그렇다. 우리나라처럼 기름이 나지 않는 나라에서 원전 없이 어떻게 전기를 수급하냐는 입장도 있을 수 있고, 후쿠시마의 경우와 같이 원전은 한 번 사고가 나면 정말 되돌리기 힘들므로 전반적으로 원전을 줄이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맞다는 입장이 있을 수도 있다. 세계의 전반적 추세는 탈원전이다. 이 문제는 정쟁의 소재로 삼을 것이 아니라 차분하게 고민해서 결론을 내리는 것이 맞다. 


지난 정부에서는 탈원전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전반적으로 신규 원전을 하지 말자는 원칙을 내세웠다. 정작 원전의 발전 비율이 줄진 않았지만. 현 정부는 지난 정부에서 무리하게 탈원전을 내세웠으며 마치 탈원전 정책에 불법이 있었다는 듯이 단죄하며 정반대로 원전 부흥을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정치의 가장 안 좋은 측면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들 수 있는 예는 무수히 많다. 외교에서도 지난 정부와 완전히 반대로 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는 와중에 경제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아무리 전 정부가 싫어도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정책을 뒤집는다면 국내적으로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신뢰할 수 없는 정부로 인식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검찰공화국의 목표는 무엇인가. 기껏해야 검찰기득권의 유지 정도로 생각했는데, 요즘 진행되는 사항들을 보면 너무 극우 편향이라 보수 인사들조차 우려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것은 대통령이 극우인사들에게 포섭된 것인가, 아니면 원래 생각이 이랬던 것일까. 극우가 우리나라 주류의 본류인가. 


<개와 늑대와 검찰의 시간>에서는 검찰 뿐만 아니라, 관료와 언론에 대해서도 생각할 기회를 준다. '공정(fairness)'이 요즘 이슈인데(특히 젊은이들의), 단순히 개인이 노력한 만큼 얻는 것이 공정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재능과 환경까지 고려하는 것이 좀 더 진정한 공정이 아니겠느냐는 화두를 던진다. 현 상황이 답답해서 읽어봤는데, 단순히 검찰 개혁이란 범위를 넘어서 우리 사회의 여러 구조적 문제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준다.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고민하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관료들의 저항’은 역사적이고 구조적이며 계급적인 배경을 갖고 있다. 재정과 세제, 복지와 분배, 외교와 남북관계를 비롯한 국정운영 철학이 일치하는 보수(반개혁) 정부에서는 관료들이 청와대에 저항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개혁을 추진하는 리버럴 정부에선 청와대와 여당에 반기를 드는 관료가 많아지고 곳곳에서 파열음이 발생한다. 관료집단 스스로 우리 사회의 강력한 기득권이자 특권층이기 때문이다. 리버럴 정부에선 ‘정부=청와대’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 언론은 청와대에 저항하는 관료를 찬양하고 부추긴다. ‘김동연 패싱론’을 만들어내거나 ‘살아있는 권력수사론’을 증폭시켜 권력에 저항하는 의인 프레임을 만들어낸다. 보수적 관료와 언론의 연합작전으로 개혁은 좌절하고 반기를 든 관료는 영웅이 된다. 윤석열과 최재형, 김동연의 대선 도전 스토리가 대략 이러하다. 박근혜 탄핵으로 기존 보수정치 세력이 망해버린 상황에서 현 정부에 맞섰던 관료 출신들이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19 페이지) 

  개혁 정부가 집권하면 보수우파 언론은 전투모드로 돌입한다. 대한민국이 사실상 내전 중이라는 사실은 아무 날짜나 <조선일보> 사설을 보면 안다. 비판이라기보다 비난과 저주에 해당하는 날선 언어가 날마다 이 매체의 지면과 화면을 채운다. 조선일보는 총 대신 활자를 쏜다. 요즘은 그 흔한 허니문도 없다. 대표적인 경우가 문재인 정부 초기 최저임금 인상이었다.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최저임금 1만원 달성은 목표 시기만 달랐을 뿐 여야의 주요 후보가 모두 약속했던 내용이었다. (33 페이지) 

  한국 검찰의 역사는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 나뉜다. 목줄을 세게 쥐는 권위주의(또는 독재) 정부에서는 충직한 개였다가, 풀어 놓아주는 리버럴 정부에서는 야생의 늑대가 된다. 개의 시간에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물라면 물고 짖으라면 짖지만, 늑대가 되면 스스로의 본능에 따라 살아간다... 생명 유지와 번식을 위해 필사적으로 먹이를 사냥하고 목숨을 건 결투도 피하지 않는다. (49 페이지) 

  ... 검찰에 힘이 쏠린 이유 중 하나인 구속 위주의 사법 관행 혁파, ‘유전무죄’ 사법 불평등의 다른 이름인 전관예우 타파, 검찰 전관예우의 밑바탕인 수사권과 기소권 분리, 기소배심 도입 등 사법 민주화, 피의자 권리의 대폭 강화 등 중대한 개혁 과제가 남아 있다. 검찰 개혁은 이 나라의 민주주의 발전과 동의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 저항하는 검찰은 민주주의의 적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 (65 페이지) 

  수구세력이 검찰개혁 저지에 총력을 기울이는 이유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검찰이 수구세력의 주요 진지이자 요새이기 때문이다. 군대를 동원한 쿠데타가 거의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공권력 가운데 가장 강력한 물리력(수사권, 영장청구권, 기소권, 형집행권)을 독점하는 검찰을 수구세력은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으로 활용해 왔고, 그 과정에서 둘 간의 정치적 연대가 형성됐다. 여기에 물적 토대를 제공하는 재벌권력이 가세하면서 수구세력의 트라이앵글이 완성됐다. 요컨대, 반검찰개혁 전선은 수구세력 계급투쟁의 최전선이다. (78 페이지) 

... 부모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는 ‘우연성’과 ‘재능 불평등’ 현상을 수정하거나 보완하려는 시도는 저항에 부딪혀 비틀거리기 일쑤고, 학력과 시험 성적을 ‘노력’이라는 주관적 지표로 절대화하면서 사회적 격차를 유지하거나 더 벌리려는 세력이 압도적이다. ‘전교 1등’을 자처하는 의대생들과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반대했던 인천공항 정규직 노조가 그런 경우다. 사회가 만들어놓은 경쟁의 틀에서 최선을 다해 자격을 갖췄는데 이제 와서 규칙을 바꾸는 건 공정하지 않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약자의 논리였던 공정성은 이제 시험으로 자격을 획득한, 토마 피케티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한국형 브라만 계급의 특권을 보호하는 무기가 되었다. 지금 공정을 말하는 이들은 이미 브라만이거나 브라만을 지향하는 이들, 또는 그들을 옹호하는 언론이다. (137~138 페이지) 

  이 나라의 건국세력으로서 보수우파의 권력에 대한 집요한 의지는 상식을 초월했다. 검찰권력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도저히 차기 대권이 보이지 않던 암흑의 터널을 뚫고 유력한 대선주자를 세웠다. 현 정권을 향해 칼을 들었던 검찰총장이 어떻게 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설 있겠느냐는 상식은 어차피 이들의 것이 아니다. 이들의 권력욕 앞에서는 모든 상식이 무용해진다. 상식을 내팽개쳐 국민의 심판을 받았던 주류가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5년 만에 다시 집권의 꿈을 꿀 수 있을 만큼 우리 사회의 상식은 허약하다. 우리 민주주의의 수준이 고작 이 정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기초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겸허해져야 할 시간이다. (151 페이지) 

  내로남불 프레임은 도덕 기준이 높은 진보가 필패할 수밖에 없는 게임이다. 내로남불 프레임이 특히 문제인 것은 뻔뻔한 악당들이 면죄부를 받게 돼 있기 때문이다. 악당들은 나쁜 짓을 해도 사회적 관심을 끌지 못한다. 악당을 비난하며 자신은 악당이 아닌 것처럼 행세하던 사람들이 조그만 잘못에도 대역죄인처럼 비난받는다. 이 과정에서 민생은 사라지고 무의미한 정쟁만 무한 생산된다. 도덕성 경쟁이 정책 경쟁의 지우개 노릇을 하는 셈이다. 도덕성 경쟁을 하지 말라는 게 도덕성을 포기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도덕성을 정치적 상품으로 팔지 말라는 것이다... 진보가 내놓아야 할 상품은 따로 있다. 기득권에 기반한 정당들이 낼 수 없는 진보적 정책이다. 우리가 덜 타락했다고 주장하지 말고 우리가 더 유능하다고 말해야 한다. (160~161 페이지) 

  중도강박증은 진보언론이 더 심하게 앓고 있다. 민주당과 국힘 사이에서 기계적 균형과 형평성을 지키는 게 언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최근에 역편향 드라이브가 걸려 있다는 걱정마저 들게 한다. 민주당에 유리할 것 같은 팩트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취재해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국힘이 명백한 거짓 주장을 펼쳐도 아무런 여과없이 보도해 주기도 한다. (169 페이지) 

  문재인 정부의 검찰개혁 실패는 예정돼 있었다. 권력 분산과 민주적 통제라는 기본 원칙에서 벗어난 그림을 그렸다. 지름길을 놔두고 먼 길을 돌아갔다. 기소권과 수사권을 분리하고, 경찰과 검찰의 (중대)수사 및 기소를 시민이 통제하는 대배심(grand jury)을 도입해야 했지만, 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 적당히 타협해 인사로 해결하려 했다. 윤석열을 수족처럼 부리려고 하지는 않았겠지만, 너무 쉽게 믿었고, 너무 많은 권한을 주었다. 적폐수사가 끝나갈 무렵, 서울중앙지검장 신분으로 조선일보의 방상훈과 중앙일보의 홍석현을 잇달아 만났을 때부터, 윤석열은 이미 칼끝을 돌리겠다고 마음먹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윤석열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검찰의 주특기였던 정적 제거 기술을 총동원했다. 피의사실과 직접 관련 없는 사생활의 가십(강남의 건물주가 꿈이라는 등)을 흘려 인격을 짓밟았고, 과도한 강제수사와 별건수사로 법의 상식을 짓밟았다. 현 정권을 정적 대하듯 했다. “수사권 가지고 보복하면 그게 깡패지, 검사입니까?”라고 말했던 윤석열은 수사권을 갖고 정치를 했다. 그리고 최소한의 정치적 알리바이조차 걷어차고 국민의힘에 입당함으로써 깡패보다도 못한 양아치 수준임을 스스로 입증했다. (171~17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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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인력(중력)으로 인해 물체는 가속되며 지구로 떨어진다. 지구 표면에서 중력으로 인한 가속도는 잘 알려져 있듯이 9.8 m/s^2이다(이 중력가속도를 g라는 문자로 종종 나타낸다). 가속도는 속도(m/s)의 1초당 변화율이므로 단위가 m/s/s 즉, m/s^2이다. 이 가속도는 32 피트/s^2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1 피트가 약 0.3 m이므로 32피트는 거의 9.8 m와 같다.) 책 214페이지에서는 갈릴레이가 경사면 실험을 통해 "'1초의 제곱당 32피트'의 법칙"을 발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정지해 있던 물체가 일정한 가속도로 가속될 때, 물체가 운동하는 거리는 시간의 제곱에 비례하여 증가한다. 물체가 정지해 있다가 자유 낙하할 때 이동한 거리 s는 다음의 식을 만족한다: s = (1/2)gt^2. g는 중력가속도이고 t는 초(s)로 잰 시간이다. 식 앞의 1/2은 속도가 일정하게 증가하며 운동(등가속 운동) 하기 때문에 들어간 것이다.


그럼 물체가 정지해 있다가 자유낙하할 때 처음 1초에 떨어진 거리는 얼마인가? (1/2)(9.8 m/s^2)(1 s)^2 = 4.9 m이다. 또는 16 피트이다. 이걸 염두에 두고 다음을 읽어보자.


  뉴턴은 상호 인력이 행성들 사이의 거리에 따라 작용한다는 케플러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는 그 힘이 거리에 반비례한다는 이론을 만들어 냈다. 지구 반경의 60배 거리에 있는 달의 경우, 지구 인력의 크기는 그 인력의 1/60^2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갈릴레이가 초당 32피트라고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구는 32/60^2, 즉 초당 0.0088피트(0.00268미터)의 비율로 달을 관성 경로로부터 공간상으로 잡아당긴다. 달의 경로를 초 단위로 재면 뉴턴이 옳았음이 입증된다. (239 페이지)


위의 글은 달이 1초에 얼마나 지구로 떨어지는지를 추론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달의 위치에서는 지구 표면에서보다 인력이 1/60^2 = 1/3600이므로, 1초에 떨어지는 거리는 16피트/3600, 즉 0.0044 피트(0.14 센티미터)가 된다. 위의 문장은 등가속운동으로 인한 1/2을 누락해서 값을 2배로 잘못 나타냈다. 사실 원문을 찾아보면 0.0044 피트로 제대로 나오는데, 역자는 저자가 오류를 저질렀다고 생각해서 고치려다가 원문에는 없는 오류를 냈다[*].


제임스 버크의 글은 문화사적, 과학사적 의의를 잘 짚어주는데, 가끔씩 과학적 설명이 부족하거나 너무 어렵게 쓰여져 있는 경우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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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에서는 제곱을 나타내는 위 첨자가 제대로 표시되지 않아 60^2이 아니라 그냥 602로 인쇄되는 오류가 나온다. 원문: Newton agreed with Kepler that the mutual attraction operated in relation to the distance between the planetary bodies. He theorised that the force would work at a ratio inversely proportional to their separation. In the case of the moon, at a distance of sixty times the earth’s radius, the strength of the attraction of the earth should be 1/602 of the attraction, which Galileo had shown to be 16 feet per second. The earth should therefore be attracting the moon away from her inertial path out into space at a rate of 16/602, or 0.0044 feet per second. Examination of the moon’s path second by second showed Newton to be right. (원서 p. 160) 다음처럼 번역한다면? 뉴턴은 상호 인력이 천체 사이의 거리에 따라 달라진다는 케플러의 의견에 동의했다. 뉴턴은 이 인력이 둘 사이의 거리 제곱에 반비례한다고 추론했다. 달은 지구 반지름의 60배 거리에 있으므로 달이 느끼는 지구 인력은 지구 표면에서 인력의 1/60^2이 되어야 했다. 갈릴레이는 지구 표면에서 물체가 1초에 16피트(4.9미터) 떨어진다는 것을 보였으므로, 이는 관성에 의해 궤도의 접선방향으로 달아나려는 달을 지구가 1초에 16/60^2 피트, 즉 0.0044피트(0.14센티미터)씩 잡아당김을 의미했다. 달의 궤도 관측은 뉴턴이 옳았음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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