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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 - 작가 위화가 보고 겪은 격변의 중국
위화 지음, 이욱연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평점 :
작가가 아닌 나 같은 평범한 사람도 (기억력이 깜박깜박 하는 나이 때문이지만, ㅋ~.) 책을 읽었을 때의 감동과 느낌을 붙들어 두기위해서 글을 쓰는지라, 위화 같은 전문 작가의 경우에는 뭔가 다른 목적을 가지고 글을 쓴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작가 위화가 보고 겪은 격변의 중국'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를 읽기 시작하면서 먼저 읽었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 비해서 훨씬 둥글렸다는 느낌이 들어 맥이 빠져버릴 때 즈음, 책날개에 적힌 그간의 사정을 읽게 되었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는 '검열'로 인해 중국이 아닌 대만에서만 출간되었으며,『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이 책 같은 경우는 중국에서 10년 만에 발간된 산문집이라고 하니, 아무래도 자체 검열의 과정을 거쳤을 테고 그러면서 순화되었을 수밖에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이 책이 유난히 반가워졌고 그간이랑 다른 의미로 읽혔다.
그렇다면 이렇게 일기 형식을 띤 이 산문집을 통해서 위화라는 작가가 우리에게 얘기하려던 것은 무엇일까?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삶, 불균등한 삶이다. 지역 간의 불균등, 경제 발전의 불균등, 개인적 삶의 불균등이 나중에 마음의 불균등이 되었고, 끝내는 꿈의 불균등으로 이어졌다. 꿈은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원래 지니고 있는 재산이고, 모든 사람의 마지막 희망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잃어도 꿈만 있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꿈조차 균형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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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우리 삶이다. 우리는 현실과 역사라는 이중의 거대한 격차 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모두 환자라고 할 수 있고, 모두 건강하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두 극단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과 과거를 비교해도 그러하고, 오늘과 오늘을 비교해도 역시 그러하다.ㆍㆍㆍㆍㆍㆍ 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차라리 치료법을 찾는 사람이라 하겠다. 나는 한사람의 환자이기 때문이다.(12~13쪽)
곳곳에서 다른 시대, 다른 국가, 다른 언어와의 비교가 나와서 '차이'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한 요량인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개혁개방 이후, 경제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사유 방식과 생활 방식, 세계관과 가치관 따위가 천치(지)가 개벽하듯이 변했고(15쪽), 사람들의 추격 속도는 발전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서 지쳐가고 있다며,
개인의 가치와 가정의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찾을 수 있도록 발걸음을 늦춰야 한다고 하는 데에서야 저자 위화가 하고자 하는 얘기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일례로 93년부터 컴퓨터로 글을 쓴 386세대인 그가, 그 이전에 10년 정도 손으로 글을 써서 생긴 손가락의 굳은살을 은근 자랑스러워 했었는데, 나중에 왕멍(왕멍의 쾌활한 장자 읽기의 그 왕멍인듯~^^)을 만나 그의 손에 굳은살을 보고는 완전 감탄한 얘기를 들려준다. 자신은 겨우10년이지만, 왕멍은 286세대로 컴퓨터로 글을 쓴것도 먼저이지만, 이전 손으로 글을 쓴 것도 반평생이란다.
내겐 '차이'로 읽히지 않고, '꾸준함을 이기는 힘은 없다' 쯤으로 읽혔다.
이 책이 좋았던 것은,
소설가 위화가 쓴 산문집 답게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책머리에,
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차라리 치료법을 찾는 사람이라 하겠다. 나는 한사람의 환자이기 때문이다.(13쪽)
라고 하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문제를 제기하지만 않고, 다양한 해법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책과 글을 통하여 문제 제기를 하고, 치유책을 찾고,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 과정에서, 독서를 할 때 중요한 문제가 부상하기도 하고,
작가에 대한 선입견을 토대로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잘못이며, 위대한 독서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난 상태에서 읽는 것이란 점이다. 그것은 텅빈 마음을 품고 읽는 것으로, 독서 과정에서 마음은 빠르게 풍성해진다. 왜냐하면 문학은 언제나 미완성이고 부조리 서사의 특징도 미완성이기 때문이다.(66쪽)
영향을 준 작가는 많지만, 다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며,
포크너 만을 진정한 스승이라고 하는데,
스승의 요건으로 이론뿐 아니라 제자에게 직접 전수해주는 한 수가 있어야 하는데,
포크너는 어떻게 심리묘사를 처리해야 하는지 절묘한 한 수를 알려주었다고 치하한다.(95쪽 내용 재배열)
위화 자신이 '스트린드 베리'의 '빨간방'을 다시 읽은 독서 경험을 살려 이런 말도 한다.
지나간 삶은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지만 지나간 독서는 세월이 지나면 더욱 새롭다. 20여년 동안 위대한 작품들을 읽을 때면 늘 다른 시대, 다른 국가, 다른 언어의 작가들에게서 나 자신의 감성을 읽었고, 심지어 나 자신의 삶도 읽었다. 문학에 어떤 신비한 힘이 진정으로 존재한다면 아마도 이런 것이리라 생각한다. (112쪽)
작가 사이의 상호 영향 내지는 다른 작가나 외부의 영향을 이렇게 비유했었다.
한 작가의 창작이 다른 작가의 창작에 영향을 주는 것은 태양이 식물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같으나, 중요한 것은 식물이 태양의 빛을 받아들여 성장할 때 결코 태양의 방식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식물 자신의 방식으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118쪽)
이 말은 무척 멋지게 들렸지만, 어찌보면 자신의 본성을 고집한다는 의미로도 읽혔다.
과연 식물은 성장할때 식물의 방식만을,
또는 태양은 빛을 비추일때 태양의 방식만을, 고집하는 것일까?
태양이 빛을 비춰주고 식물이 받아들여 성장하는게, 태양이나 식물 어느 한쪽만을 고집하는 것일까?
번지고 스며 물드는, 통섭이나 융합 따위로는 설명 불가능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봤다.
이 책의 뒷부분 '부록'으로 가면, 위화 본인이 쓴 소설 『형제』에 대한 본인의 해설이 나오고,
달라이 나마와 관련 오늘날 중국에 대한 비판과,
창간 50주년을 맞는 잡지에 축하문을 기고하며 자신의 20년 작가인생에 대한 소회를 밝힌다.
우리가 아무리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을 지라도,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차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위화는,
'차이'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한 요량이 아니라,
향후 10년 혹은 20년 동안의 중국 사회 형태가 차츰 보수적 방향으로 나아가고 부드러운 방향으로 나아가길 희망하기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를 구해야 하기 때문에.
소설 『형제』의 해설을 이렇게 마무리 한다.
ㆍㆍㆍㆍㆍㆍ언어의 온도를 조금 높일 수 있었다. 나는 쓰면서 현실 세계의 냉혹함을 느꼈고, 사납게 썼다. 그래서 따뜻한 부분이 필요했고, 지극히 선한 부분이 필요했으며, 이는 내게 희망을 주고, 독자에게 희망을 주었다. 현실 세계가 사람들을 실망시킨 뒤 나는 아름다운 죽은 자들의 세계를 쓴 것이다. 이 세계는 유토피아도 아니고, 도화원도 아니다. 하지만 무척 아름답다.(244쪽)
그의 글이 내게 치유인 이유이다.
맨날맨날 그날이 그날인,
다를게 없는 무미건조한 일상일지라도,
조금쯤은 현실세계에 냉혹함과 각박함을 느끼더라도,
우리가 무조건 따뜻한 남쪽나라를 그릴 수 없는 까닭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유토피아도 아니고, 도화원도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 맞잡은 손으로 온기를 더할 수는 있고,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로 언어의 온도를 조금 높일 수는 있지만,
우리는 죽은 자들이 아니고, 현실에 발 딛고 서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