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듣는데, '토요일에 만난 사람' 코너에 내가 애정해 마지 않는 강신주가 나왔다.

요며칠 심심함이 극에 달했었다.

딱히 마음 둘데가 없는 것이, 지루하고 따분했으며 매사에 의욕이 없었다.

왜 사는 지를 모르겠는 채로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 그렇게 그렇게 지냈었다.

강신주 식으로 얘기하면 타자와의 소통부제로 괴로워했고,

이지누 식으로 설명하자면 지독한 고독을 맛보는 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만난 강신주는 가뭄에 만난 단비였다.

출근 시간 부랴부랴 움직이느라 제대로 못들은 부분을 나중에 다시 듣기로 들었는데, 역시나 '강신주'였다.

다소 '센 발언'도 서슴치 않는 것이 솔직한 성격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었고,

철학이라는 어려운 얘기를 하면서도 '박사'랍시고 심각하게 무게잡고 얘기하지 않는 것도 좋았다.

전에 그가 알튀세르를 좋아하여 이메일 계정을 'contingency'로 한다는 소릴 들었었는데,

오늘도 contingency와 eventuality가 적절히 버무려진 그런 것이었다, 아흑~!

 

오늘 라디오를 듣고 그가 더 좋아 졌는데,

강연에서 말을 많이 하다 보니까 강연이 끝난 후엔 듣고 싶어져서...

보통 음악을 들으면서 시간을 좀 보내다가 잠이 든다는 것이( 의외였지만,) 충분히 공감을 할 수 있어서 였고,

첫 단행본이라는 <장자 :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을 풀어서 설명하는 과정에서 '철학자' 강신주가 아니라 '인간' 강신주를 엿본것 같아서 였다.

타인과 제대로 소통하려면 내가 변해야 되고 내가 변해야 타인과 소통하는 게 동시적인 사건이어가지고 우리가 대개 소통의 문제가 지가 안 변하면서 소통하려고 할 때 폭력이 돼요. 그러니까 타자와의 소통이라고만 얘기하면 이상하고 주체의 변형이라고 하면 지 혼자 수행하는 거고 그런데 왜냐하면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진짜 그 사람한테 마음을 열면 내 자신이 변하잖아요. 그러니까 그 경험을 장자가 딱 포착을 했기 때문에 출판사에서는 뭐라고 그러죠. 이거 어렵다, 개념이 너무 철학 개념이 한 4개 정도 들어가니까. 그래도 이걸로 하자, 이 제목이 가장 어울리는 것 같다.

사실, 오늘 하고 싶은 얘기는 '손석희'도 '강신주'도 '이지누'도 아닌, 내가 심심하다는 거다.

타인과 제대로 소통을 하려면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강신주'를 들으며,

'고독'을 수행처럼 지켜낸 '이지누'를 되풀이해 읽으면서,

심심함이 극에 달해 바닥을 쳤다는 얘기를 하려니,

왠지 라디오를 헛 듣고 책을 헛 읽은것 같지만서도...

모든 깨달음은 그렇게 오더라,

소통과 고독도 견디고 이겨낼 수 있으려면,

일단 소통과 고독을 몸과 마음으로 직접 느끼고 깨달아야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관독일기 : 잠명편
 이지누 지음 / 호미 /

 2008년 11월

 

하지만 고독이란 것은 내부로부터 오는 것이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지 않던가. 또 고독을 견디고 이겨 내며 굳건함을 지키는 것 또한 스스로 해야 할 일일 뿐 누구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럿이 함께해야 하는 일이 있는 반면 혼자 이루어야 하는 일도 허다히 많다.(64쪽)

그렇다고 내가 그동안 심심함이나 고독 따위는 전혀 몰랐었냐 하면...그건 또 아니다.

다만 그런 내게, 소통의 즐거움과 더불어 고독의 굳건함을 알려준 친구가 여행중이신 고로,

홀로 남겨진 나는 그전보다 더 심심함과 고독함을 뼈 아프게 느끼고 있고,

생각은 엉뚱한 곳으로 널을 뛰어 날 홀로 내버려 둔 친구를 향하여 '직무유기'라며 툴툴거리고만 있다.

 

잠箴은 자신의 허물을 예방하고 반성하며 결점을 보완하려고 짓는 글이고,

명銘은 스스로를 반추하며 새기는 글을 말한단다.

이 책 <관독 일기 :잠명편>에 나오는 조선 시대의 숱한 사상가와 문장가(장유, 신흠, 김집, 이규보, 안정복, 조익, 이식, 윤휴, 허균, 보각 선사, 원랑 대통, 낭혜 무염 등) 의 글들을 이지누의 날 선 해석으로 접했다.

정갈하고 깔끔한 상차림을 '내가' 주체가 되어 고루 누리기 위해,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가치관과 선입견을 배제하려고 노력하였고,

그 과정에서 극도의 심심함과 지독한 고독을 맛보았다.

 

이지누는 담담하게 읊조리듯 얘기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고독이 자신의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오는 것이란걸 느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뿐더러,

그 고독을 견디고 이겨내는 굳건함을 지키는 것 또한 녹록지 않았다.

 

어찌보면, 이지누의 그것들은 너무 날이 선 듯하고 반듯하여 좀 부담스러운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 푸른하늘을 선물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흔하겠는가 말이다.

좋아할 순 없어도 존경할 순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몸은 신身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일 테고, 거울은 오늘 실레마을에서 바라보며 윤대녕 형에게 마음 속으로 선물한 것과 같은 푸른 하늘일 것이다. 누구라서 그 하늘에 자신을 비추어 스스로 한 점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을 고치려고 하는 생각보다 인정하는 마음이 더 깊어야 한다는 것이다. 깊이 인정하지 못하면 고치는 것 또한 겉일 뿐일 테니까 말이다.(87쪽)

게다가 그의 글이 반듯하고 사실적인 기술이라고 해서, 문체까지 무미건조하고 재미없지는 않다.

서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기품을 잃지 않아, 미려하고 그리하여 시적 감상에 젖기에 충분하다.

그의 '서정'이 다른 사람의 그것과 다른 점은, 직접적인 경험과 체험에서 나온 사실의 기록이라서 한결 애틋하고 살가운 느낌이 강하다는 것이다.

나뭇잎 지는 소리는 빗소리와 달라서 자꾸만 두리번 거리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빗소리는 대개 일정하여 오히려 그 소리가 그치면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지만 낙엽 지는 소리는 그렇지 않다. 아무리 순하게 떨어져 내린다고 해도 그는 일정하지가 않다. 또 마른 잎이 바위나 나무 등걸에 부딪치는 소리는 바람 부는 대로 들쑥날쑥하여 제멋대로이다. 더구나 무엇엔가 집중하고 있다가 그 소리를 들으면 마치 누군가가 숲 속을 걸어서 나에게로 오는 것 같은 환청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91쪽)

 

그러나 뒤늦게 깨달은 것은 인생이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야 하는 것보다 나 스스로 이루어야 하는 것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냉철한 눈으로 바라보면 인생이란 어차피 홀로 가는 길이다. 그 지독한 외로움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뒤죽박죽으로 뒤엉켜 버리고 말지 싶다. 비록 고독할지라도 홀로 이루어야 할 것들을 참구하는 동안 만나는 사람들은 절로 진정한 벗이 될 것이다.

서로 동시대의 시간 안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흐뭇하기만 한 진정한 벗이란 한두 명일지라도 족한 것이다. 새로운 벗을 사귀거나 그것을 지키려는 것보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혹독할지라도 단절의 고독을 만드는 것이다. 시퍼렇게 날을 세운 칼날 위를 홀로 걷는 고독을 내 안에 지니지 않은 채 도대체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107쪽)

 

암튼 이지누를 읽으면서,

홀로 고독해지는 것을 지독히 두려워 하면서도 고독을 꼭 필요한 것이라고 여기고 받아들이려는 이중적인 태도를 엿보았는데, 이게 수행자의 그것이라서 멋지다기 보다는 왠지 처연해서 눈물이 났다.

게다가 친구가 잠시 잠깐 곁에 없는 것으로도 극도의 심심함과 지독한 고독으로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내가,

벗이 동시대의 시간 안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흐뭇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더 지독한 고독을 겪어야 하는 걸까.

그걸 강신주는 본인이 더 힘들어봐야 된다는 한마디로 일축하고 있다.

자기가 힘들어봐야 그것보다 적게 힘든 사람들은, '저 사람이 어떤 걸로 힘들구나' 하는 것들을 대충 알게 되고,

그래야 자신이 힘들게 고민하고 살아왔던 걸 철학이나 문학이나 이런 걸 통해서 강의를 할 수 있게 된단다.

하지만, 위로를 한다든가 하진 않는단다.

때때로 보면 지나치게 어떤 힘든 것도 아닌데 오버해서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야단도 많이 쳐야 되고 욕도 좀 하고 그래야 돼요.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안아주세요. 이런 것도 있어요. 위로 받으려고 해요. 무슨 위로를 해요. 위로를 하긴, 다 힘든데 살기가.

그런데 말이다.

내 입장에서 보기에는 엄살을 부리는 사람도 그렇지만, 의연한 사람도 인간다운 매력이 없기는 매 한가지다.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세상에서...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이 곁에 있어서 더욱 고독하고 쓸쓸해지는 것만은 막아보자는 심사다.

 

책을 통틀어 이지누가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부분은,「대대례大戴禮」의 '무왕천조'편에 나오는 무왕이 반우에 새겼다는 명과 관련해서 인듯하고, 나도 그랬다.

사람에게 빠지려면 차라리 물에 빠지겠다. 못에 빠지면 헤엄쳐 나올 수 있지만 사람에게 빠지면 구제할 수 없다(與其溺於人也 寧溺於淵 溺於淵 猶可遊也 溺淤人 不可求也).

글을 읽고 참으로 묘한 마음이 일어나 선뜻 책상에서 내려올 수가 없었다. 그 울림이 무척이나 강했던 것이다. 오늘까지 읽은 글들이 어느 것 하나 허튼 생각으로 대할 것이 없지만 이토록 크게 마음을 흔든 것은 없었다. 글을 읽고 두어 시간이 지난 지금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지만 아직도 나의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무왕은 사람에게 빠지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이미 무왕의 그 큰 생각에 빠져 버렸으니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을까.

여전히 나는 진정되지 않았다.(292~293쪽)

하지만, 이지누는 금방 진정이 되지 않아 이노릇을 어찌하면 좋을까...라고 하였는데,

나는 물보다는 사람에게 빠지는 쪽을 택하겠다.

물에 빠졌을 경우 헤엄쳐 나올 수 있는 것은 수영을 할 수 있는 경우에 한해서고, 수영을 하지 못한다면 말짱 꽝이다.

사람에게 빠지면 쉽진 않겠지만,

내가 그(녀)를 닮고 배울 수도, 그(녀)가 나를 닮고 배울 수도 있을 것이고,

구할 수 없어도 물들어 닮고 배우다보면 서로가 서로를 자극하여 나아지는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그게 강신주의 첫 단행본 <장자 :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에서 얘기한 '자신이 변해야 되고, 자신이 변해야 타인과 소통하는 게 동시적인 사건'이 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암튼, 이지누가 너무 좋아 헤어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던 차에 작은 맞춤법 오류를 발견하였다.

솔직히 다른 책이라면 눈도 꿈쩍하지 않고 넘어갈 일이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그것이다 보니 작은 걸 갖고도 호들갑이다.

인간이니까 그럴 수 있는 것일테고,(아흑~, 어쩔거야. 인간적이어서 멋지잖아~--;)

나도 인간이니까 호ㆍ불호를 놓고 손바닥 뒤집듯 할 수 있는 것이다, ㅋ~.

 

ㆍㆍㆍㆍㆍㆍ박병천 선생의 소리는 애끓는 한을 머금은 채 한 세상 넘어간 곳에서 뱉어 내는 것만 같았다. 비록 천대받던 무가이었을지라도 소리에 기품이 넘쳤고 몸짓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오로지 사람을 통해서만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거늘 이제 또다시 그 소리를 어디에서 들을 수 있을까.

사람의 일들이 점점 사라져 가는 세상에서 사람이 내는 소리와 몸짓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절절하게 보여 주던 고인은 자신이 타인을 위해 부르던 소리를 들으며 북망산천 먼 길을 떠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절로 처연한 마음이 생기고 슬픔이 일어났다. 다시 한번 애도의 마음을 펼쳐 놓은 채 잠이 들었다.(141쪽)

 

위 문단에서 빨간 글씨 '애끓다'의 용례를 보게 되면,

'애'가 끊어질 만큼 슬플 때는 '애끊다'를, '애'가 부글부글 끓을 만큼 몹시 답답하거나 안타까울 때는 '애끓다'를 써야 한단다.

박병천 선생의 소리는 애(창자)가 끊어질 듯이 슬픈 소리였으니, '애끊다'가 적절하겠다. 설혹 부글부글 애가 끓는 통한의 그것으로 들렸다고 해도, 뒤에 나오는 '오로지 사람을 통해서만 끊어지지 않고' 와 '문맥 상 호응을 이룰 수 있도록 '애끊다'가 더 낫지 않을까 싶다.

 

또 한군데, 

ㆍㆍㆍㆍㆍㆍ"도에 가까워진 사람은 말수가 적어진다"고 했거늘 그 많은 말들을 밖으로 토해 내지 않고 어디에 새겨 두었을까. 그것은 마음 속일 것이다. 달아나지 못하고 갈라지지 않게 굳게 붙들어 둔 마음 말이다.

번연히 알고 있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그러나 그 마음 다스리고 보존하기가 쉽지 않은 까닭에 이토록 마음에 대해 많은 경계의 글들이 넘쳐나는 것 아니겠는가. 날마다 돌아봐야겠다. 나의 마음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맹자」'고자 상 告子 上'에 "학문의 길은 다른 것이 아니다. 놓친 그 마음을 찾는 것일 뿐이다. (學文之道 無他 求其放心而已矣)"라는 말이 나오지 않던가. 공부를 한다는 것, 결국 불교에서 말하는 본성을 깨닫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지 싶다.(243쪽)

 

 

학문(學問)-어떤 분야를 체계적으로 배워서 익힘. 또는 그런 지식.

학문(學文)-≪서경≫, ≪시경≫, ≪주역≫, ≪춘추≫, 예(禮), 악(樂) 따위의 시서ㆍ육예를 배우는 일.

 

따라서, 저 상자 안의 빨간 글씨는 學問이 되어야 맞는다.

 

 

 

 

 

 

 

 

 

 

 

 

 

 

 

 

 

 [수입] Joni Mitchell - The Studio Albums 1968-1979

 [10CD 리마스터 디럭스 박스세트]
 조니 미첼 (Joni Mitchell) 노래 / Warner / 2012년 10월

 

 

Love is touching souls
Surely you touched mine
Cause part of you pours out of me
In these lines from time to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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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3-02-24 00:07   좋아요 1 | URL
정말 좋은 글들이 많아서, 다시 또 읽고 있어요. 전 타자와의 소통에 문제가 많은편이라, 제가 바뀌지 않고, 상대도 바꾸지 않고, 포기쪽을 선택해요.ㅜㅜ 사람한테 빠져서 미친듯이 살았던 20대도 생각나고, 주저리주저리, 이런저런 생각들이 많이 나는 글이에요.....

다크아이즈 2013-02-24 15:29   좋아요 1 | URL
강신주 목소리를 들으셨군요. 타자와의 관계에서 내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 맞아요. 하지만 인간인지라 그게 맘대로 안 될때면 저도 꿈꾸는 섬님처럼 포기하는 쪽을 택하고 말아요. 사람 사귀기는 힘들지만 놓는 것은 한 순간이더군요. 강신주식 장자를 읽을 때의 그 바람결 냄새가 아직도 선하옵니다. 정통 장자를 학문하는 사람들이 마구 욕하는 그 상황까지 전 재밌게 생각했어요.
심심함을 가장하시는 나무꾼님 언제나 잘 계시리라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