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103 소설Y
유이제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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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해저터널 안에서 40년을 살았다. 바닷물이 터널로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터널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피부가 없어 뼈와 근육이 다 드러나는 괴물, ‘무피귀’를 피해 고립을 선택한 이들이 과연 터널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일명 ‘차폐문’을 열 자는 누구인가? 터널 바깥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어 위험천만한 곳으로 누가 나갈 것인가.

제4회 창비x카카오페이지 영어덜트소설상 대상 수상작 <터널 103>은 이렇게 시작부터 압박감이 상당하다. 그런데 어린 소녀 서다형이 제물 아닌 제물이 된다. 어릴 때 할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이 터널에서 언젠간 나갈 수 있을거라는 꿈을 자신이 실현시키고 싶었다. 그것은 모두의 목숨을 살리는 일이긴 하나 제 목숨이 어떻게 될지는 전혀 장담할 수 없는 일! 다형을 사지로 내모는 이는 촌장 황필규다. 폐렴을 앓고 있는 다형 엄마에게 페니실린을 주겠다는 거래처럼 보이지만 예전에 다형 엄마가 자신을 배우자로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치졸한 복수다.

이 소설은 초반부터 어린 주인공을 선택의 기로에 세우고 지도자인 어른의 바닥을 가차없이 보여준다. 다형이 환기팬을 통해 터널을 나간 후부터 소설이 끝날 때까지 한 편의 영화처럼 휘몰아친다. 계급으로 나뉜 것 같은 여러 형태의 무피귀들과의 오싹한 전투, 터널에서 태어난 다형이 실제 자연과 인간을 만나면서 겪는 흥미진진한 이야기, 결국 인간의 욕심으로 탄생한 무피귀가 인간을 위협하게 되었으며 터널에 대한 비밀까지. 책을 잡은 누구라도 몰입감에 손을 놓지 못할 것이며 영화화 된다면 새로운 크리처물의 탄생이 될 것 같다. 무피귀의 외모를 실감나게 살리는 게 관건이겠지만.

인간의 본성을 두고 성악설, 성선설로 논쟁하는 이들이 있고, 이기심과 이타심도 왈가왈부하는 주제이다. 인류가 지금까지 생존해 온 것은 이기적으로 군 인간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소설 속 상황처럼 집단을 위해 누군가가 총대를 메고 나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과연 나는 할 수 있을까? 감히 다형처럼 행동할 수 없었을 게 분명하다. 이 소설은 딜레마 상황을 비롯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나오므로 청소년들이 읽고 재미있게 독후활동을 하면 좋겠다. 만약 내가 다형이나 승하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 자신이나 주변 사람과 비슷한 등장인물 찾아보기, 책 속의 실패 사례인 인간병기가 현실에서 AI로 바뀌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예상해 보기 등등...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가제본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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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 위의 삶 - 뇌종양 전문 신경외과 의사가 수술실에서 마주한 죽음과 희망의 간극
라훌 잔디얼 지음, 정지호 옮김 / 심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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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학 드라마를 즐겨보고 의사가 쓴 책도 찾아 읽는 편이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환자를 대하는 저런 따뜻한 의사들이 분명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낭만닥터 김사부”는 실감나는 수술 장면에 매료되어 보았다. 이국종 교수나 김승섭 교수, 남궁인씨의 책들도 읽어왔다.

책 <칼날 위의 삶>은 제목부터 긴장되었다. 20여 년간 1만 5천 명 이상의 환자를 만나고 4천 건 이상의 수술을 진행해온 의사가 쓴 책이라는 소개를 보니 꼭 읽어보고 싶었고 기대했다. <골든 아워>의 긴박감과 “낭만닥터 김사부”의 피 튀기는 수술 장면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머리말의 첫 문단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문단에서 저자 ‘라훌 잔디얼’은 전혀 다른 책이 나왔다고 했다.

외과 의사는 환자보다는 그 환자가 받을 수술에 관심이 더 많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수술을 한 적이 없다. 내게 수술은 인체 해부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관한 탐구였다. 나는 수술이라는 기술의 덕을 많이 보았다. 수술은 나와 환자를 발가벗기고, 둘의 사활을 칼날 위에 올려놓는다. 수술은 외로운 상황이 될 수 있고, 쉬운 답은 거의 없다.

(……)

내가 환자와 함께했던 여정은 인간의 나약함, 용기, 아름다움이 어우러진 상급자 코스였다. 그리고 그 고통을 치료하려고 내 자신의 고통을 전면에 내세워야 했다. 그동안 내가 환자와 함께 겪었던 윤리 문제와 갈등에 대처한 여정을 이 책에 담았다.

이 책이 어떤 환자를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수술했다는 자랑이 아닐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수술 현장의 모습을 구경하려고 했던 나를 반성했다. 책은 10개의 장으로 나뉘었으며 각 챕터의 주 제목 아래에 부제가 붙어있다.




저자가 했던 뇌수술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실패 사례도 다룬다. 장마다 각기 다른 환자의 질환과 수술, 결과 뿐 아니라 당시 저자 자신의 상황과 심리 상태로 연결했다. 각각의 케이스가 너무 절박하고 극적이기 때문에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보기 어렵고 드라마에서도 접하기 힘든 사례들이었다. 그렇지만 저자는 자신의 힘들었던 어린 시절과 실패담을 드러냈고, 심리학 용어와 자연스레 연결해주어 독자도 자신에게 대입해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뇌 관련 질병명 뿐 아니라 저자가 수술하는 장면에서 뇌의 세부 명칭과 혈관의 이름을 언급할 때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소화가 잘 안되기 때문에 소화 관련기의 위치와 하는 일, 관련 질병에 대해 공부를 하는 중이다. 몇 년 전에는 친정엄마가 급성 신부전으로 큰 일을 겪을 뻔 했던 적이 있어서 신장까지. 그동안 뇌과학 책들을 읽어왔는데도 이 책을 읽다보니 뇌에 대해선 아는 게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수술하는 장면을 실감나게 서술했지만 나는 장님 코끼리 다리 더듬는 기분이었다. 뇌가 하는 일과 수술 순서가 나오지만 여러 혈관의 이름을 언급할 땐 대체 그것이 어디 쯤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모르니 답답했다. 그래서 뇌 해부도와 각 혈관의 위치를 검색해서 이미지를 보며 읽었더니 수술 장면이 어슴프레하게나마 그려졌다. 독자마다 감동포인트가 다르겠지만 나는 뇌에 대해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저자의 글솜씨에도 감탄했다. 의학 관련 지식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생생한 현장감이 잘 전달되었고,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저자는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물론 매끄럽게 번역한 역자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각 장마다 다루어진 환자의 사례는 그 어떤 소설보다 몰입하게 만들었다. 순간적 판단 미스로 하반신이 마비된 12살 소녀, 6개월 후 아들의 졸업식을 보기 위해 마지막 수술을 요청한 어머니, 레지던트 수련의 시절 수술실에서 교수의 집도가 잘못되었다고 했다가 신경외과의를 못하게 될 거라고 협박당한 일, 감금증후군 환자의 영혼을 놓아주었던 사례까지 어느 것 하나 놀랍지 않은 게 없었다.

저자는 어릴 때 주위로부터 받았던 냉대와 과소평가가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을 입증하며 살아야 했다. 적을 갖는 것이 추진력의 원천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이끌어주는 자양분이 아니라 결점이며 삶에 장애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아이를 망친 그저 그런 외과 의사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완벽해지고 싶었다. 다른 이들이 할 수 없는 수술을 중독적으로 맡아 했다. 다행이 그는 아버지 덕분에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수술 과정에 집중하면서 희열을 느끼기 시작했다.

저자는 암 전문 외과의사로 일하는 것이 심적으로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오히려 환자가 자신에게 가르침을 주고 용기를 준다고 답한다. 그는 암환자들이 위협을 안고 살아간다고 꼭 무기력해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현실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했다. 암환자들은 그에게 인생 대부분의 경험에는 양면성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저자가 옆집에 살던 이웃 형에게 당했던 괴롭힘은 자신을 협박한 교수와의 사건을 이겨낼 힘이 되었다.

또 환자들이 감사인사를 보내면 의아하단다. 그들의 가장 치열하고 가장 개인적인 순간에 개입할 수 있도록 관대하게 허락해준 환자들에게, 그들의 시련을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허락해준 환자들에게 감사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는 오랫동안 환자들의 인생을 지켜보는 관객이라 생각했지만 그들의 여정에 감동을 받고 교훈을 얻었다.

p.207

뇌는 마음의 승객인 동시에 운전사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결정을 내리기도 하지만, 결정을 내린 그 마음이 정처 없이 표류하다 다시 돌아와 뇌에 변화를 일으키고 그 결정을 바꿀 수도 있다. 뇌는 우리 몸에서 기계적인 일을 처리하지만 그보다 한 수 위의 일도 가능한 유일한 기관이다. 한쪽만 묶이고 다른 쪽은 자유로운 연과 같다. 뇌는 신경생물학에 따라 움직이지만 그 원리를 넘어 자유롭게 떠다니며 춤을 춘다. 인간은 생각하는 육신이다. 우주에서 가장 신비로운 존재다.

p.211

자신이 살면서 추구하는 보상이 무엇인지 한번 의식해보고 무슨 동기로 그런 보상을 열망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혹시 파괴적인 동기는 아닌가? 우리 뇌는 보상을 좇아갈 태세가 되어 있다. 그게 우리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추진력이다. 이런 동력이 없으면 우리 삶에 주도권이나 방향이 없어진다. 바람이 잔 바다에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의 갈망도 관리할 필요가 있다. 갈망을 의식하고 잘 관찰해서, 궁극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내적으로 갈망을 이끌 통제력을 잃으면, 우리는 중독이라는 병에 걸린다.


p.263

자신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창조자로서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최종으로 답할 발언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유서로 인생의 마지막을 마무리하고, 가장 중요시하는 대의에 자신을 기증하면서 사후 이 질문에 답한다. 제인은 자신의 뇌종양을 연구에 기증했다. 제인은 암에게 정복당했지만 그 서사는 계속되고 그의 세포는 번식해서 과학적 발견과 미래 의학을 이끈다. 제인은 유산을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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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아이 라이트
케이시 / 플랜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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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시 작가는 소설 <네 번의 노크>로 처음 만났고 인상깊었다. 이번에 신간 에세이 <아이 라이트>가 나와서 서평단에 당첨되었고, 이북으로 제공받아 읽었다. 제목이 아이 라이트? 무슨 뜻일까? 요리조리 짐작해봤지만 내 짧은 추리력보다는 빨리 페이지를 넘기는 게 빠를 것 같았다. 제목의 의미는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알 수 있었다. “i Lite”에 대한 설명을 확인하니 작가의 스타일에 한발짝 다가선 기분이었다.

나는 소설을 읽을 때 마음을 활짝 열고 읽는 편이다. 작가가 구축해놓은 가상의 세계로 기꺼이 빠져들고 싶어서다. 특히 미스터리 소설일 경우, 밀도 높게 얽어놓은 서사의 빈틈을 찾고 싶어 집중하게 된다. 작가의 데뷔작 <네 번의 노크>는 끝까지 쫀쫀함을 유지했고 반전에 허를 찔렸으며 종내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런 작가의 에세이는 어떨지 기대가 되었다. 소설가들이 쓴 에세이에 자신을 전부 드러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그러할 것이라 믿고 읽게 된다.

소설에서의 문체와 에세이의 그것이 일치할 수 없음에도 나는, 나도 모르게 이번 에세이를 읽으며 <네 번의 노크>의 느낌을 찾으려했다. 초반부가 지나자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제야 작가의 일상과 생각을 천천히 따라 걷게 되었다. 나는 에세이를 읽을 때 소설만큼 몰입이 안 되고 작가의 생각에 공감하기 쉽지 않았다. 에세이는 남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기분이라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그러다 내 생각과 비슷한 지점을 만나면 괜히 반갑고, 좋은 문장을 찾으면 월척의 손맛, 아니 눈맛을 느낄 때도 있다.

작가는 천천히 걷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 서점에서, 길에서, 무심코 스쳐지나는 것들을 천천히, 유심히 살피고 생각한다. 그 생각의 편린들을 읽으며 ‘이렇게 생각하기도 하는구나, 나는 어땠던가?’하며 내 생각과 비교해보았다.

초연결 시대일수록 상처는 더 예리해진 것만 같다. 검으로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것 같다.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비난을 초과해 죽음 가까이 내몰다 벼랑에 닿은 사람을 다 같이 힘껏 민다. 끝내 바닥에 떨어진 사람을 보고 약속이나 한 듯 일시 음 소거 후 뒤돌아 잊는다. 그리고 스스로 면죄부를 준다.

'아이가 타고 있어요' 꼭지에 쓰인 위 대목을 읽으며 최근 한 축구선수를 향한 과한 비난을 떠올렸다. 몇 년 전 조국사태 때도 그랬지만 대중은 미디어에서 쏟아낸 정보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울분을 쏟아낸다. 팩트체크 해볼 의사는 없어 보인다. 그저 누군가를 두드리는 맛에 심취해 도를 넘어도 한참 넘은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다 또 다른 먹잇감이 던져지면 그쪽으로 우르르 몰려간다. 위 내용처럼 짓밟은 대상을 확인하면 돌아서서 잊어버리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준다. 맞을 짓을 했으니 맞을 만 했다고... 여럿이 모여 남을 뒷담화하는 게 수다의 맛이라는데 요즘은 만날 필요도 없다. SNS 상에서 떠드는 건 시간, 장소 구애없이 혼자서도 가능하다. SNS가 배설통이 되어버렸다.

아, 이번 에세이를 읽다 작가에 대해 알게 된 게 있다. <네 번의 노크> 속 주요 등장인물들이 여자라서 그랬을까? 필명 때문이었을까? 난 작가가 여성이라고 철썩 같이 믿었다. 그런데 아내, 할아버지가 되겠다는 말이 나와 놀랐다. 참으로 저 보고 싶은 대로만 봤다. 그러고보니 케이시 에플렉, 남잔데...

나이들어서도 아이들에게 성공담 보다 실패담을 생생히 들려줄 할아버지가 되고 싶다. 무엇보다 성공담은 좀 재수 없다. 자기 자랑은 영 듣기 거북한 측면이 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남의 망한 이야기가 제일 재밌다. 난 실패담을 웃으며 얘기할 때 인생의 참맛을 느낀다.

나도 망한 이야기를 재미지게 들려줄 할머니가 되고 싶다. 그러려면 이런 저런 경험을 많이 하고 실패도 해봐야 할텐데 맨날 똑같은 일상을 살고 있으니 가능할까... 나이 들어도 도전하라는 책은 읽으면서 실제로는 하지 못하고 있다. 과감하게 도전해서 성공한 사람들을 보며, ‘아, 나도 저렇게 해보려고 했는데!’ 라며 시도하지 못한 이유들을 떠올리다 후회하는 수순을 밟는다.

생각만 하고 시작하지 못한 것 중 하나는 첼로다. 어릴 땐 피아노를 쳤고, 20여년 전엔 색소폰을 배운 적이 있는데 현악기를 켠다면 첼로의 활을 잡고 싶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를 본 후 더 마음이 동했었다. 영화 초반부, 주인공 스필만이 은신하고 있던 집에서 첼로를 켜는 여성의 옆모습을 훔쳐본다. 음악이 삶의 전부인 피아니스트가 첼로 소리에 이끌려 열려진 문틈 사이로 다가간다. 첼로 소리를 듣고 있던 그 모습은 독일 장교 앞에서 쇼팽 발라드 1번을 연주하던 장면만큼이나 내겐 절절하게 다가왔다. 나도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프렐류드를 연주하고 싶다. 무식자 귀에 그 곡이 연주하기 제일 쉬울 것 같은 건 너무 많이 들어서겠지?

‘천천히 걸으면 어디든 미술관’ 책 제목으로 잡아도 좋을 법한 이 꼭지에서 그려지는 장면장면의 색감은 세피아였다. 줄이 죽죽 그어진 옛날 영화 필름 같기도 했다. 작가의 산책길을 따라 나서기도 하고, 어떤 책의 귀퉁이를 접었는지 작가의 손에서 뺏아보기도 하고, 커피를 한잔씩 두고 마주앉은 카페에서 그의 낙서를 흘깃흘깃 훔쳐보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문단은 내게 하는 말 같았다.

도구가 있는데도 즐거움을 창작하지 않는 건 직무 유기다. 읽었다면 이제 쓸 차레다. 재채기처럼 참을 수 없는 창작의 욕구를 뱉어내야 한다. 재채기를 억지로 삼키려고 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얼굴을 보게 된다. 어차피 할 기침이라면 해버리는 게 속 시원하다.

압! 나 지금 가장 못생긴 얼굴로 살아가고 있...

작가는 라이트한 버전으로 살아보겠다고 하면서 이 책을 마쳤다. 이 ‘라이트’는 빛도 된다. 에필로그에서는 소문자 I의 의미와 모양을 가지고 요모조모 뜯어본다. 줄 위의 공이라는 생각은 참말이지 기발하다. 그것을 Looking for lost love로 연결한 것 역시! 이게 뭔 소린가? 싶은 사람은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에필로그 전체를 옮길 수 없고, 에필로그만 읽는 것 보다는 책 전체를 읽어야 더 잘 공감하게 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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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간호사, 현직 보건교사의 가꿈노트 - 간호 새싹들을 위한 오색빛깔 진로 개발 지침서
정진주 지음 / 미다스북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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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간호사 현직 보건 교사의 가꿈노트>는 간호사로 시작해 보건교사가 된 정진주씨가 낸 책이다. 그는 간호사나 보건교사가 되고 싶은 간호새싹들을 위해 자신의 경험을 이 책에 오롯이 털어놓았다. 진로를 이쪽으로 정한 학생들에게 더없이 알찬 정보들이 담겨있다. 그러므로 강추한다. 나처럼 진로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읽어도 좋은 책이다.


학교 다닐 때 (예전엔)양호실에서 만난 양호선생님이 하는 일이란 지극히 간단해보였고, 병원에서 만나는 간호사들의 일도 눈에 보이는 것뿐이지 속속들이 알기란 어렵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해 자세히 알고 보니 사명감 없이 하기 어려운 직업이란 생각이 들었다. 간호사들의 악습 태움을 접했을 땐 그리 곱지 않은 시선이었다. 사람이 몸 부대끼며 일하는 곳에서야 어슷비슷하게 벌어지는 일들이었음에도 자극적으로 다룬 미디어의 시각에 휩쓸린 것 같다.


저자 왕진주씨는 학창시절 꿈이 간호사는 아니었으나 인서울 영어영문학과와 가천길대학 간호과 두 군데에 합격했을 때 간호과를 선택했다.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할 수 있고 간호과에서 배우는 것이 재미있을 것 같아 선택한 것이 보건교사의 길로 이어졌다. 간호과는 학과 공부가 거의 고등학교 때 수준과 같을 정도로 빡빡하며 임상실습부터 실제 간호사가 된 이후로도 긴장의 연속이다. 나에게는 간호사 세계를 간접 경험하는 흥미진진함이 있었다. 나는 책으로 타인의 인생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 책은 소설 속 인물이 아닌 실제 한 사람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서 인상깊게 읽었다.


이 책은 간호과를 희망하는 학생들에게는 친절한 안내서 역할을 톡톡히 함은 물론 저자의 진솔한 경험들로 미리 겪어보는 임상실습이라 하겠다. 올해 중학교 3학년이 되는 조카는 간호사가 꿈이다. 내가 먼저 읽어보고 조카에게 선물했다. 이 책을 읽은 조카는 정말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말했다. 막연한 꿈을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게 해주었다며 고맙다고 했다. 서평단용으로 받은 책이라 조금 미안한 마음으로 주었는데 다행이었다. 그런데 내가 서평단으로 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책이 눈에 띌 리 없었으니 그 또한 다행한 일이라 생각한다.


조카는 저자가 대학에서 공부한 방법들을 지금 바로 자신의 공부에 적용해보겠다며 의욕을 불태웠다. 간호학생으로 실습을 나갈 때 저자의 충고를 보고 미리 준비해두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무엇보다 보건교사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이 책을 읽고 자신도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학교 보건선생님하고 친해져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단다. 이 책으로 조카는 진로를 명확히 그려나가는 데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렇게 책 한 권이 어떤 이의 꿈을 이루는데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얼마나 값진 일인가!


저자 왕진주씨와 출판사 미다스 북스에 감사드린다. 간호사나 보건교사를 꿈꾸는 학생들이 모두 이 책을 읽기를 바란다.


p.130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들을 보면 힘들어서 어떻게 버티냐, 그냥 참고 일하는 거겠지!’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울며 겨자 먹기로 억지로 일하는 사람도 잇을 수 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내가 길지도 않지만 짧지도 않은 5년을 임상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환자와 가족들을 만나고 마음을 나누는 것이 좋아서였다. 거창하게 간호한다는 생각보다는 병원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만나고 그들이 다시 건강해질 수 있게 돕고 있다는 것이 좋았다. 특별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게 간호사란 직업의 매력 포인트다.


p.183


중고등학교에서 예비 간호학생을 키우는 건 보건교사다. 최근들어 간호학과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하는 걸 실감한다. 고교학점제가 이슈화되면서 보건 교과나 간호화 관련된 과목을 이수하는 학생들의 수요가 훨씬 더 커졌다. 이런 과목들을 수업하는 사람이 바로 보건교사이다. 간호학과 입학 시 보건 교과를 이수하면 가산점을 주거나 보건 동아리 활동을 의미있게 봐주면 학교에서 보건교사의 입지도 좀 높아지고 직업적인 위상도 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p. 235

수업이 없고 학교에서 보잘것 없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해도, 있는 그 자리에서 꾸준히 기회가 생길 때마다 배우고 도전하고 경험하다 보면 그게 다 내 피가 되고 살이 될 거라고 말이다.


p. 268


폴리토르(politor)는 라틴어로 닦는 사람, 가꾸는 사람을 뜻한다. 내가 만들어 낸 호모 폴리토르는 한 마디로 꿈의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이다. 다양한 역할과 능력을 키우고 발전시켜 나가는 다재다능한 인간을 의미한다. 나처럼 배우고 성장하는 걸 즐기는 사람, 미래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학생들, 취업 준비생, 직장인, 퇴직자 모두 꿈을 가꾸는 사람들이다. 나는 나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며 꿈을 가꾸며 사는 사람들의 조력자로 살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또 그들과 호모 폴리토르의 삶을 함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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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키
요헨 구치.막심 레오 지음, 전은경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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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말을 할 줄 아는 수고양이가 있다. 그의 이름은 프랭키! 프랭크 시나트라에서 왔다. 프랭키가 수컷 인간의 자살 장면을 목격하게 되고, 수고양이와 수컷 인간은 서로를 보며 깜짝 놀란다. 남자의 이름은 리하르트 골드! 그의 자살은 미수에 그쳤고 고양이 프랭키는 기절한다. 프랭키가 죽은 줄 알고 골드는 신고를 하기에 이르고 수의사인 안나가 확인을 하러 오면서 소설 <프랭키>가 시작된다.


누구나 자기가 키우는 동물과 대화를 하고 싶어할 것이다. 나도 우리 고양이가 냥냥거릴 때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너무나 알고 싶지만 알 도리가 없어 내 맘대로 해석한다. 우리 집에 있는 세 마리 고양이 중 한 마리만 수다스럽고 두 마리는 말을, 아니다! 거의 소릴 내지 않는다. 하지만 나와 눈빛은 교환하기 때문에 눈으로 말하는 것 같긴 하다. 그 눈맞춤의 의미 역시 내가 짐작할 땨름이다. 삼냥이들과 대화를 하진 못해도 한 공간에 있다는 충만감만으로도 그들은 존재의 이유가 분명하다.


인간어를 할 줄 아는 고양이 프랭키에 대한 소개를 보고 나는 집사로서 마땅히 서평단에 신청해야했다. 출판사가 삼냥이 집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어 프랭키를 만날 수 있었다. 보통 동물이 주인공인 영화나 소설에서 동물이 구사하는 언어, 즉 인간과 나누는 대화는 대부분 인간의 뇌피셜에 가깝다. 동물이 인간의 언어를 직접 구사한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인간은 본디 구라쟁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의 공감력과 상상력은 동물들이 등장하는 창작물을 재미있게 만드는 것이다.


프랭키와 골드의 충격적 첫 만남 이후 둘의 동거가 시작된다. 프랭키의 입장에서 쓰인 이 소설은 일인칭 고양이 시점이라 하겠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지극히 단순한 묘생을 살아가는 프랭키의 눈으로 본 중년수컷 골드는 복잡하고 답답하다. 이 소설이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고양이와 중년남의 좌충우돌 동거 이야기라면 흔히 만날 수 있는 동물 시점의 소설과 비슷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소설답게 프랭키는 수다스럽고 인간과 고양이의 대화는 철학적이다. 마지막에는 예상을 벗어나는 반전이 있다. 실망할 독자들도 있겠으나 나는 신선했다. 결말 부분을 자세히 다루면 스포일러가 되므로 여기서 끊는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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