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날 위의 삶 - 뇌종양 전문 신경외과 의사가 수술실에서 마주한 죽음과 희망의 간극
라훌 잔디얼 지음, 정지호 옮김 / 심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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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학 드라마를 즐겨보고 의사가 쓴 책도 찾아 읽는 편이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환자를 대하는 저런 따뜻한 의사들이 분명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낭만닥터 김사부”는 실감나는 수술 장면에 매료되어 보았다. 이국종 교수나 김승섭 교수, 남궁인씨의 책들도 읽어왔다.

책 <칼날 위의 삶>은 제목부터 긴장되었다. 20여 년간 1만 5천 명 이상의 환자를 만나고 4천 건 이상의 수술을 진행해온 의사가 쓴 책이라는 소개를 보니 꼭 읽어보고 싶었고 기대했다. <골든 아워>의 긴박감과 “낭만닥터 김사부”의 피 튀기는 수술 장면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머리말의 첫 문단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문단에서 저자 ‘라훌 잔디얼’은 전혀 다른 책이 나왔다고 했다.

외과 의사는 환자보다는 그 환자가 받을 수술에 관심이 더 많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수술을 한 적이 없다. 내게 수술은 인체 해부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관한 탐구였다. 나는 수술이라는 기술의 덕을 많이 보았다. 수술은 나와 환자를 발가벗기고, 둘의 사활을 칼날 위에 올려놓는다. 수술은 외로운 상황이 될 수 있고, 쉬운 답은 거의 없다.

(……)

내가 환자와 함께했던 여정은 인간의 나약함, 용기, 아름다움이 어우러진 상급자 코스였다. 그리고 그 고통을 치료하려고 내 자신의 고통을 전면에 내세워야 했다. 그동안 내가 환자와 함께 겪었던 윤리 문제와 갈등에 대처한 여정을 이 책에 담았다.

이 책이 어떤 환자를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수술했다는 자랑이 아닐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수술 현장의 모습을 구경하려고 했던 나를 반성했다. 책은 10개의 장으로 나뉘었으며 각 챕터의 주 제목 아래에 부제가 붙어있다.




저자가 했던 뇌수술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실패 사례도 다룬다. 장마다 각기 다른 환자의 질환과 수술, 결과 뿐 아니라 당시 저자 자신의 상황과 심리 상태로 연결했다. 각각의 케이스가 너무 절박하고 극적이기 때문에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보기 어렵고 드라마에서도 접하기 힘든 사례들이었다. 그렇지만 저자는 자신의 힘들었던 어린 시절과 실패담을 드러냈고, 심리학 용어와 자연스레 연결해주어 독자도 자신에게 대입해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뇌 관련 질병명 뿐 아니라 저자가 수술하는 장면에서 뇌의 세부 명칭과 혈관의 이름을 언급할 때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소화가 잘 안되기 때문에 소화 관련기의 위치와 하는 일, 관련 질병에 대해 공부를 하는 중이다. 몇 년 전에는 친정엄마가 급성 신부전으로 큰 일을 겪을 뻔 했던 적이 있어서 신장까지. 그동안 뇌과학 책들을 읽어왔는데도 이 책을 읽다보니 뇌에 대해선 아는 게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수술하는 장면을 실감나게 서술했지만 나는 장님 코끼리 다리 더듬는 기분이었다. 뇌가 하는 일과 수술 순서가 나오지만 여러 혈관의 이름을 언급할 땐 대체 그것이 어디 쯤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모르니 답답했다. 그래서 뇌 해부도와 각 혈관의 위치를 검색해서 이미지를 보며 읽었더니 수술 장면이 어슴프레하게나마 그려졌다. 독자마다 감동포인트가 다르겠지만 나는 뇌에 대해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저자의 글솜씨에도 감탄했다. 의학 관련 지식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생생한 현장감이 잘 전달되었고,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저자는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물론 매끄럽게 번역한 역자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각 장마다 다루어진 환자의 사례는 그 어떤 소설보다 몰입하게 만들었다. 순간적 판단 미스로 하반신이 마비된 12살 소녀, 6개월 후 아들의 졸업식을 보기 위해 마지막 수술을 요청한 어머니, 레지던트 수련의 시절 수술실에서 교수의 집도가 잘못되었다고 했다가 신경외과의를 못하게 될 거라고 협박당한 일, 감금증후군 환자의 영혼을 놓아주었던 사례까지 어느 것 하나 놀랍지 않은 게 없었다.

저자는 어릴 때 주위로부터 받았던 냉대와 과소평가가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을 입증하며 살아야 했다. 적을 갖는 것이 추진력의 원천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이끌어주는 자양분이 아니라 결점이며 삶에 장애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아이를 망친 그저 그런 외과 의사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완벽해지고 싶었다. 다른 이들이 할 수 없는 수술을 중독적으로 맡아 했다. 다행이 그는 아버지 덕분에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수술 과정에 집중하면서 희열을 느끼기 시작했다.

저자는 암 전문 외과의사로 일하는 것이 심적으로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오히려 환자가 자신에게 가르침을 주고 용기를 준다고 답한다. 그는 암환자들이 위협을 안고 살아간다고 꼭 무기력해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현실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했다. 암환자들은 그에게 인생 대부분의 경험에는 양면성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저자가 옆집에 살던 이웃 형에게 당했던 괴롭힘은 자신을 협박한 교수와의 사건을 이겨낼 힘이 되었다.

또 환자들이 감사인사를 보내면 의아하단다. 그들의 가장 치열하고 가장 개인적인 순간에 개입할 수 있도록 관대하게 허락해준 환자들에게, 그들의 시련을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허락해준 환자들에게 감사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는 오랫동안 환자들의 인생을 지켜보는 관객이라 생각했지만 그들의 여정에 감동을 받고 교훈을 얻었다.

p.207

뇌는 마음의 승객인 동시에 운전사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결정을 내리기도 하지만, 결정을 내린 그 마음이 정처 없이 표류하다 다시 돌아와 뇌에 변화를 일으키고 그 결정을 바꿀 수도 있다. 뇌는 우리 몸에서 기계적인 일을 처리하지만 그보다 한 수 위의 일도 가능한 유일한 기관이다. 한쪽만 묶이고 다른 쪽은 자유로운 연과 같다. 뇌는 신경생물학에 따라 움직이지만 그 원리를 넘어 자유롭게 떠다니며 춤을 춘다. 인간은 생각하는 육신이다. 우주에서 가장 신비로운 존재다.

p.211

자신이 살면서 추구하는 보상이 무엇인지 한번 의식해보고 무슨 동기로 그런 보상을 열망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혹시 파괴적인 동기는 아닌가? 우리 뇌는 보상을 좇아갈 태세가 되어 있다. 그게 우리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추진력이다. 이런 동력이 없으면 우리 삶에 주도권이나 방향이 없어진다. 바람이 잔 바다에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의 갈망도 관리할 필요가 있다. 갈망을 의식하고 잘 관찰해서, 궁극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내적으로 갈망을 이끌 통제력을 잃으면, 우리는 중독이라는 병에 걸린다.


p.263

자신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창조자로서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최종으로 답할 발언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유서로 인생의 마지막을 마무리하고, 가장 중요시하는 대의에 자신을 기증하면서 사후 이 질문에 답한다. 제인은 자신의 뇌종양을 연구에 기증했다. 제인은 암에게 정복당했지만 그 서사는 계속되고 그의 세포는 번식해서 과학적 발견과 미래 의학을 이끈다. 제인은 유산을 남긴 것이다.



**위 리뷰는 네이버카페 컬처블룸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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