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언어의 위로 - 모국어는 나를 키웠고 외국어는 나를 해방시켰다
곽미성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4년 11월
평점 :
**이 리뷰는 네이버카페 컬처블룸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나는 외국에서 사는 사람들이 쓴 글을 좋아한다. 올 해에 베네수엘라, 스위스, 독일, 칠레, 프랑스에 사는 한국인이 쓴 책을 읽었다. 외국에 살며 그 나라 언어에 점점 동화되어 가는 글을 읽으면 나도 같이 뿌듯해진다. 그 과정 속에서 겪는 어려움, 놀람, 재미, 위안 등의 감정을 같이 느끼는 것도 좋다. 이방인이라는 한계도 있지만 그 역시 받아들일 밖에...
<언어의 위로>는 프랑스어를 20년 넘게 쓰면서 한국어 에세이를 꾸준히 출간해온 곽미성 작가의 신간이다. 그의 책은 이번이 처음인 줄 알았는데 책을 읽다보니 소설 <파노라마>를 번역했다는 것을 알았다. 10월에 <파노라마>를 읽고 서평을 썼는데 가독성이 좋았던 기억이 났다. 그 책은 소설인데도 형사가 사건을 브리핑하는 것 같았는데 번역의 스타일도 한 몫한 것 같다. 곽미성 작가는 프랑스 각계 각층의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뉴스를 만드는 일을 했다. 그 경험이 소설 번역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싶다. 작가는 영화를 배우려고 프랑스로 유학을 갔고 지금은 번역과 에세이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언어의 위로> 1부는 낯선 프랑스어를 생존언어로 삼았을 때 벌어지는 경험들을, 2부에서는 프랑스어가 작가의 인생 전반에 스며들었던 순간들을 만날 수 있다.
나는 학창 시절에는 시험을 위한 교과목으로서 영어를 배웠고, 성인이 되어선 외국어를 배운 적도 외국 생활을 해본 적이 없다. 나 같은 사람들은 모국어의 소중함이나 고마움을 느낄 길이 없다. 물론 별 불편함도 없지만.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우리도 이제 모국어로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읽는다며 으스댈 수 있게 되었다는 소릴 들었다. 모국어만 쓸 줄 아는 뭔가 능력 없어 뵈는 사람이었다가 갑자기 노벨문학상 보유국으로 격상된 게 아닌가. 하지만 태어난 곳에서 모국어만 쓰며 죽을 때 까지 사는 것보단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다. 이젠 거의 실현불가이므로 이런 책으로 간접경험하며 대리만족 할 수밖에 없다.
작가가 프랑스어를 배우는 경험들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프랑스의 문화나 사람들의 태도, 그로 인해 드러나는 언어의 뉘앙스를 알 수 있었다. 나는 프랑스에 한 번도 못 가봤지만 다양한 매체를 통해 프랑스인들이 자국어와 문화에 대해 자긍심이 강하다는 것을 많이 들었다. 또 식사 시간 동안 토론에 버금가는 대화를 많이 하며 비판적이라고. 이 책에 나의 선입견과 유사한 사례들이 꽤 나와서 흥미롭게 읽었다. 작가가 프랑스인은 ‘투덜이’라고 표현하며 든 사례는 꽤 공감이 되었다. 작가가 그 상황에서 시니컬한 맞장구를 치기도 하는데 재미있다.
작가가 이젠 거의 프랑스인 다 된 것 같은 사례가 있었다. 작가는 프랑스인 남편과 자주 다투는 편이라고 한다. 사이좋게 대화하다가도 한 사람이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하며 다른 의견을 내놓으면 그 때부터 점화가 된다. 아이를 안 낳기로 결정한 건 잘 한 일이라고 말하던 부부는, ‘아이가 있다면’의 주제로 넘어가면 둘의 의견 차 때문에 대화가 점점 격해진다. 학교 문제로 대립하다가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며 평소 마음에 안 들어 하던 부분이나 서로의 어린 시절까지 들추기에 이른다. 한 명이 “어쨌든 아이는 없으니 이제 그만 얘기하자.”고 하면 겨우 끝난다고.
1부도 좋았지만 나는 2부 내용에 공감이 많이 되었다. 8개의 꼭지에는 프랑스어로 된 한 문장과 그에 관한 에피소드를 실었다. 오랫동안 주치의였던 의사 선생님이 은퇴하며 헤어지게 되는 이야기에서는 까칠하기만 할 것 같은 프랑스 사람 중에 저렇게 정 많은 사람도 있구나 했다. 그와 함께 프랑스의 주치의 시스템도 알게 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프랑스인의 이미지는 수다스럽고 과장되다는 것인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다. ‘쎄빠말’(나쁘지 않네)를 다룬 꼭지에서는, ‘거참, 그 사람들...’이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작가도 처음엔 프랑스인의 말투에 상처도 받았지만 이젠 적절하게 끊거나 대응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샤캉 쉐르쉬 쏭 샤’(각자 자기의 고양이를 찾아 다닌다)에서는 영화를 배운 작가가 영화 일을 하지 않게 된 사연을 풀어냈다. 작가는 자신의 고양이를 찾은 것 같다. 작가는 영화를 전공하러 왔다가 글로 밥벌어 먹고 살게 되었다. 2021년 공쿠르상을 받은 작가 ‘모하메드 움브가르 사르’의 글에서 공감한 내용을 인용하며 이렇게 썼다.
"각자 자신의 고양이를 찾아다닌다. 가느다란 선 위를 걷는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어쩌면 '그럴 수 있다'는 가느다란 희망을 품고서. 어느 길모퉁이에 다다르면 고양이가 나를 향해 달려오는지, 고양이는 사실 어디에도 없었던 건지, 실은 그것을 찾아다닌 모든 여정 속에 고양이가 있었는지, 그건 그때 가서 보는 수밖에."
젊은 사람들이 말했을 때나 어울릴법한 말이 내게도 적용되는지 잠시 갸웃했다. 이 나이 먹도록 나는 아직 고양이를 찾아다니는 건가. 100세 시대니 아직 좀 더 찾아다녀도 되는 걸까? 무튼 ‘샤캉 쉐르쉬 쏭 샤’를 계속 소리내어보면 동글동글한 듯 끊기는 듯 묘한 매력이 있다.
한국에서 프랑스로 돌아가는 길, 에필로그에서는 프랑스에서 치열하게 살며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쓰지만 모국어의 포근함은 모국어에서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모국어의 무게로 가방이 무거워질수록 국경을 넘는 이민자의 마음은 든든하다. 이방인의 처지가 서러워 잠들지 못하는 밤이 오면, 이 책들을 꺼내 떠나온 곳의 사람들이 지어놓은 아름다움을 더듬고, 마음을 덥힐 것이다.
이 책으로 곽미성 작가 글의 매력에 빠졌다. 단단하면서 부드럽고 웃음짓게 만드는 글이었다. 작가의 다른 책들 찾아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