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 - 장영희가 남긴 문학의 향기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25년 7월
평점 :

고 장영희 선생님의 책 <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의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2009년 세상을 떠난 뒤에 나온 이 마지막 산문집이 유고집의 성격이 강했다면 이번에는 문장에 집중할 수 있도록 편집했다. 나는 선생님의 책을 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의 제목은 낯설어서 책장을 뒤져보니 없었다. 그래서 샘터사 서평단에 신청했는데 당첨되어 감사히 받아 읽었다.
요즘 자극적인 소설을 많이 읽다가 오랜만에 만난 선생님의 글은 산소 같았고, 제목처럼 나슬나슬 나리는 꽃비를 기분 좋게 맞았다. 역시 좋은 글은 시간이 지나도 낡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 교수로 당신이 겪은 경험과 영문학자로 유명 작품이나 문장을 연결한 짧은 글 한편 한편은 매일 아침 명상하듯 읽으면 좋을 것 같다. 머리와 마음을 정화해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물론 언제든 어느 쪽을 펼치든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자연스레 지금의 나, 우리, 세계로 생각이 뻗어나갔다. 작금의 전쟁이나 정치 상황에 대입해도, 최근 내가 읽은 소설 속 인물이나 내 마음에 대입해도 어쩜 그리 똑 맞아 떨어지는지 놀라웠다. 책 속 문장을 다 인용하고 싶을 정도였으나 내 생각의 가지가 우불구불 뻗어나가게 한 문장들 위주로 소개한다.
1장 “장영희가 사랑한 사람과 풍경”에서는 ‘사랑과 미움 고리를 이루며’를 골랐다. 선생님은, 우리 삶의 모든 일은 결국 사랑과 미움의 관계로 귀착된다고, 살면서 만나는 보통 세 부류의 사람들을 이렇게 분류했다.
첫째 친근감을 느끼는 사람들로 다섯 걸음쯤 떨어져 있어서 서로 넘어져도 다치지 않을 만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둘째 사랑하는 이들은 한 걸음쯤 떨어져 있는데 내가 넘어질 때 기꺼이 손 내밀거나 함께 넘어지고 서로 부축해 함께 일어난다. 셋째는 나를 미워하는 이들인데 등을 맞대고 밀착되어 있다.
- p.45
아, 이 부분에서 놀랐다. 미워하는 이들과 밀착되어 있다? 어째서! 설명은 이러하다.
숨소리 하나까지 나의 움직임에 민감하며 여차하면 나를 밀어버리기 위해 꼭 붙어 있다고. 이렇게 등 맞대고 서있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것 같다고.
물론 글은 아름답게 마무리 된다.
이 세상에 나 같은 사람들이 마음을 바꾸어, 너무 멀리 서 있다면 조금 더 가까이, 등 맞대고 서있으면 조금 멀리, 함께 넘어지고 일어나며 운명을 같이하는 한 걸음의 거리를 유지한다면, 이 세상에 저런 몹쓸 전쟁 따위는 없을 텐데...
나는 내 주위 사람들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살고 있을까. 다섯 걸음, 한 걸음인 사람과 등 맞대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 하나씩 스쳐지나갔다. 선생님 말대로 나를 밀어버리려고 꼭 붙어 있는 사람과 한 걸음의 거리를 유지해야겠지. 그런데 요즘 너무 책 속 사람들을 만나느라 바쁜 나머지 실제 사람들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는데 이건 좋은 건지, 나쁜 건지...ㅎㅎ
소설 속 인간 관계의 문제를 보면 대부분 가족 때문에 갈등이 많이 벌어진다. 가족이기 때문에 함부로 하는 경우가 더 많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행동은 등 맞대고 있는 이들처럼 군다. 최근 읽은 소설들에서 가족 내 관계들을 보면, 과도한 믿음은 반드시 큰 실망과 상처가 되었다. 엄마가 자녀를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은 스스로를 과하게 믿은 것이고, 신적인 존재였던 엄마의 실체를 알게 되는 자녀에게는 엄마의 언행은 폭력이었다. 물론 전쟁 같이 휘몰아치던 갈등은 소설가에 의해 해소되고 어떻게든 결말에 도달한다. 장영희 선생님 말대로 한 걸음의 거리를 유지한다면... 그럼 소설이 너무 밍숭맹숭해지려나?
2장 “장영희가 사랑한 영미문학”에서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 ‘만약 내가’에 붙인 글을 골랐다.
불가에서는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들판에 콩알을 넓게 깔아놓고 하늘에서 바늘 하나가 떨어져 그중 콩 한 알에 꽂히는 확률이라고 합니다. 그토록 귀한 생명 받아 태어나서, 나는 이렇게 헛되이 살다 갈 것인가. 장영희가 왔다 간 흔적으로 이 세상이 손톱만큼이라도 좋아진다면, I shall not live in vain...
- p.201
에밀리 디킨슨이나 선생님처럼 살지 못하는 우리는 그저 고개 숙일 수밖에 없다. 선생님이 집필한 영어 교과서로 공부한 학생들, 선생님께 직접 배운 대학생들, 수많은 번역 문장들과 우리말 문장들을 만난 독자들에게 얼마나 선한 영향력을 미쳤는데요! 선생님처럼 헛되지 않게 사신 분이 이렇게 생각하셨다니 윤동주의 서시가 떠오릅니다! (앗, 급 존댓말 모드로 변환~)
욕망과 허세에 찌든 시대에 선생님의 깨끗하고 산뜻한 문장들이 우리를 정화시켜 주시니, 헛되이 살지 않으신 게 맞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헛되이 살지 않겠다고 다짐할 것입니다. 저도요~~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