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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결말을 바꾼다 - 삶의 무의미를 견디는 연습 ㅣ 철학은 바꾼다
서동욱 지음 / 김영사 / 2025년 10월
평점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가제본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철학도 유행이 있는 건지, 아니다 철학자 좋아하는 것도 유행이 있는지, 니체 책이나 어록이 오래 유행했는데 최근엔 쇼펜하우어가 어땠다더라는 책 제목을 필두로 쇼펜하우어 바람이 불었다. 기실 철학 전공자가 아닌 다음에야 철학자가 했다는 말은 한 번 듣고 흘리기 쉽고 무슨 뜻인지도 정확하게 모른다. 따져 새기기에 일반인은 어렵다. 그런데 철학이 유행가 같을 때가 있다. 지금 내게 닥친 현실과 딱 맞아떨어지는 가사를 들으면 격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다 못해 눈물을 흘리기까지 한다. 노래와 철학을 같은 선상에 놓을 순 없겠으나 누군가에게는 이 둘 모두가 무관심한 대상이다가도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과 맞으면 몹시 가깝게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노래만 계속 듣는 것처럼 그 철학자의 책을 찾아 읽게 된다.
서동욱 철학자의 신간 <철학은 결말을 바꾼다>를 가제본 서평단 자격으로 받아 읽었다. 43편의 글들이 읽기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내가 최근 고민하는 것에 대한 내용에서 공감하며 읽었다. 이렇게 많은 철학자와 책 제목, 예술 작품을 언급하는 책일 경우 독자는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맞는 것(현 관심사나 고민)만 취하게 된다. 그래도 읽을 게 적지 않다. 예를 들면, 2부의 여덟 번째 글 ‘사랑과 질투’에 언급된 책은 5권이고 그 중 철학서는 스피노자의 <에티카>이다.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도 언급했다.(다른 글에 비하면 적은 편) 그 파트에 인용된 책들을 다 읽어야 하는 건 아니다. 저자가 철학을 여러 작품들과 연결해 독자에게 ‘사랑과 질투’를 잘 전달하려고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고 우리는 덕분에 그 화두에 대해 색다르게 생각해볼 기회를 가지게 된다. 연결되는 여러 작품들을 소개받는 것은 덤이고 그 책들을 찾아 읽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다행이 인용된 작품의 주석이 첨부되어 있어서 일일이 찾는 수고를 덜 수 있다.
이런 책은 호불호가 있다. 너무 많은 정보가 담긴 책을 선호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철학자를 많이 다루면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다. 삶에서 만나는 여러 문제들을 두루두루 짚으면서 그에 맞는 철학으로 연결해 주는 것을 좋아한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이렇게 많은 철학자와 작품을 다루는 책은 목차를 보고 자신의 관심사를 먼저 읽으면 좋다. 그런데 끌리지 않는 제목의 페이지를 펼쳤다가 의외의 수확을 하게 되기도 하므로 천천히 두고두고 읽기 좋다.
‘사랑과 질투’편으로 다시 돌아가 본다. 사랑이고 질투고 그런 감정이 내게 언제 있었나 싶을 정도로 까마득하여 사실 심드렁하게 읽었다. 후반부에 이르러 ‘사랑 속에서 죽는 일을 숭고하고 선한 일로 여길지도 모른다’와 ‘자신에게 닥치는 손실에 대한 모든 계산을 넘어선 것, 한마디로, 죽어도 좋은 것’에서 나는 사랑은 역시 힘들고도 어려운 것이라 생각했다. 각자의 가치관과 경험에 따라 지극히 다른 일이겠지만 나는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서 죽을 수 있다. 책에서는 이성과의 사랑에 한정해서 이야기했기 때문에 나는 모든 걸 바쳐 (자식 빼고)누군가를 죽을 만큼 사랑한 적이 있었나 생각해보니...
얼마 전 보았던 애니메이션 <LOST&FOUND>가 떠올랐다. 공룡은 사랑하는 친구(혹은 연인, 어쩌면 자식) 여우를 위해 자신이 사라지더라도(인간에겐 죽음에 해당) 그를 구하려고 했다. 털실로 만들어진 공룡은 물에 빠진 여우를 구하기 위해 뛰어가는데 그 동안 실이 다 풀려 버리고 몸 속의 솜도 모두 터져 나왔다. 7분이 채 되지 않는 그 애니매이션을 보며 가슴이 찡했고 요즘 저런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사랑과 질투’의 마지막 줄, 자신에게 닥치는 손실에 대한 모든 계산을 넘어선 것을 읽다가 공룡 인형의 실이 다 풀려 그 끝이 여우에게 가닿는 장면이 오버랩 되었다.
1부 ‘권태를 여행으로 극복해 볼까’에서는 그동안 내가 했던 관광을 여행이라 불렀다는 게 낯부끄러웠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치부를 들킨 것 같아 얼굴이 심하게 달아올랐다. 저자는 하이데거의 <기술에 대한 물음>을 인용하여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는 미지의 영역을 향해 여행한다기보다는 이윤을 계산해 개발에 뛰어든 관광청과 관광사의 사업장을 구경하는 셈이다.”
아, 지난 달 장가계 패키지 여행을 다니며 들었던 내 생각이 정확한 문장으로 적혀있었다. 또한 내가 여행 때마다 하던 짓 역시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여행자는 장소만 이동했을 뿐 늘 영위하던 일상을 거의 그대로 가져가는 셈이다. 애초에 여행에서 기대했던 것 가운데 한 가지는 무엇인가? 권태로부터의 탈출이다. 보통 우리가 관광이라고 일컫는 여행은 어떤 점에선 이 일상을 가능한 한 많이 여행 가방 안에 싸 가지고 다니는 여행이다.”
그간 나는 여행 가방을 싸면서 여행지에서 한 치의 불편함도 허용할 수 없다는 의지를 불태웠는데 딱 내 얘기가 아닌가! 장가계 여행에서 제공한 식사는 우리나라 식당에서 먹는 것과 다를 바 없었으며 가이드는 여행객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전전긍긍하는 것처럼 보였다. 남이 해주는 밥을 먹고, 내가 어지럽힌 것을 청소하지 않으며, 기암괴석을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로 불편함 없이 오르내렸다. 그 대가로 물품을 구매해야 했다. 구매를 강요하지 않았지만 기이한 좌불안석에서 눈치를 보아야 했다.
글의 마지막에 저자는 미셸 트루니에의 인터뷰를 인용했는데 또 나였다.
“관광객(또는 나쁜 여행자)은 그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출발 시와 마찬가지로 그대로 되돌아옵니다. 반대로 훌륭한 여행자는 여행으로 인해 다른 모습으로 변모됩니다. 그는 여행 동안 고생을 하고 배워서 풍요해집니다.”
나는 나쁜 여행자다. 소비만 했을 뿐 풍요로워지지 않았다. 그동안 편리하다는 장점에 눈멀어 패키지 여행만 다녔던 어리석고 나쁜 여행자였다. 이번 장가계 여행 후에 들었던 허무함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행에서 돌아와 찜찜했던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했고, 나이를 먹으면 경험한 것에서만큼은 능숙해질 줄 알았으나 늘 시행착오라는 제자리를 맴돌 뿐이고, 인문학 공부를 하겠다며 책을 그렇게 읽어도 삶을 한 톨도 변화시키지 못했다. 이 책은 내 밑바닥과 가식을 드러나게 했다. 2장 ‘경험이 삶의 스승이다’에서 처절하게 확인했다. 저자는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인용하여 경험의 필수성을,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으로는 경험은 우리가 어떤 ‘유한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준다고 했다. 경험에서 배우지 못하고 유사한 실수를 또 저지른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자신의 유한성 앞에서 겸손의 지혜와 극복의 의지를 배우게 된다’고 했는데 절로 고개 숙여졌다. 경험으로 겸허를 배우지 못했으니 부끄럽다. 삶을 바꾸는 생각은 실패한 경험에서 오는 것 같다.
이 책의 부제가 ‘삶의 무의미를 건너는 법’인데 나에게는 ‘너의 민낯을 보는 법’이 되었다. 모두에서 이 책은 호불호가 있을 수 있다고 썼다. 나는 이 책이 읽기 쉽지 않았으나 부끄러운 내 모습을 까발려주어서 좋았다. 이 무슨 SM성향인가 싶겠지만 이렇게 날 부끄럽게 한 책은 없었기도 하거니와 내가 긴가민가하거나 인지하지 못했던 것까지 콕콕 짚어주었다. 등짝을 후려칠 죽비가 필요할 때마다 이 책을 꺼내 읽어야겠다.
그리고 하나 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기에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동안 숱한 글이나 문학에서 인용되어 온 작품이지만 읽기를 시도하기엔 겁을 주는 멘트들이 적지 않아서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저자가 자주 인용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일부들을 읽으며 원 도서의 맛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슬슬 피어올랐다. 이 책의 수많은 각주 중 내가 픽한 책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