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수학이 필요한 순간 + 다시, 수학이 필요한 순간 - 전2권
김민형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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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이 필요한 순간], [다시, 수학이 필요한 순간]을 읽었다(저자의 친절한 제안대로 수식 부분은 폴짝 건너뛰고...). 과학 책을 한 권 두 권 읽다 보니 수학 책을 읽고 싶었고, [파토의 과학하고 앉아 있네](아마 카오스 재단에서 주관한 강연 시리즈의 일환이었던 것 같다)에서 들은 수학자 김민형의 강의가 좋았기에 병영도서관에서 책을 발견하자마자 자리로 데려왔다. 훈련소 시절에 읽은 [뉴턴의 아틀리에]에서 유지원 선생님은 일반적으로 대수로 푸는 문제를 기하로 치환시켜 푼다고 했다. 머릿속에 기하학적 형태들을 그려놓고 문제를 푸는 방식을 그의 고등학교 수학선생님은 풀이 과정은 남들과 다르지만 답이 성립한다고, 정답에 이르는 또 다른 올바른 길임을 확인(인정)해줬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유지원 선생님처럼 기하학적으로 수학을 사유했다고 한다. 대수학은 데카르트의 좌표계 발명이란 혁명적 기여를 토대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고도로 추상적인 수학과 그렇지 않은 수학(정확히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물리적이고 구체화된 형태를 갖는 수학??) 등 수학도 ‘소문자 수학들‘이 존재하는 듯 보였다



책의 부제는 각각 인간은 얼마나 깊게 생각할 수 있는가, 질문은 어떻게 세상을 움직이는가 이다. 그렇다고 했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내적 평정을 찾고 싶을 때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면 차분해지는 사람이 있다고. 수포자였지만 내게도 그런 경험이 한 번 있었다. 중1 때 조금 어려운 수학문제집 숙제를 주말에 혼자서 하는 상황이었다. 초반에 쉬운 문제들을 해치우고나자 좀 더 난이도 있는 문제에 막혀 (아마도) 답지를 보고 베끼고 싶은 유혹에 시달렸다. 그때 유혹을 견디고 생각에 몰두하자 문제를 풀어낼 수 있었고, 그 잔잔한 쾌감과 성취감의 기세를 몰아 2-3시간 만에 숙제를 끝마칠 수 있었다. 그 이후에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진득하게 붙들고 늘어지지 않/못했던 적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한 문제를 풀더라도 원리를 온전히 이해하고, 수학적으로 생각하는 연습의 축적이 본질적인 실력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더러 한 문제에 막혀 시간을 ‘허비‘하느니 다른 문제나 과목을 공부하는 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조급함과 불안함 때문에 제대로 공부를 못 했구나 새삼 자각하게 된다.



이런 경험이 보편적인지 몰라도 한국의 수학교육을 비판하는 단골 레퍼토리는 수학이 아닌 산수를 시킨다, 수학의 근본적인 원리를 이해하고 수학적 사고력을 키워줘야 하는데 문제를 빨리 푸는 기계, 질문하기보다 정답을 빠르게 산출하는 데 혈안이 된 ‘질문하지 않는 학생‘을 키운다는 것이다. 창의성을 요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부합하는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 ... 하지만 김민형에 따르면 공식을 외우고, 계산을 해서 문제를 많이 풀어보는 수학교육/학습의 방법론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유럽의 학생들은 계산은 계산기에 맡기고 어쩌구하는 얘기와 달리 공식을 외우고 계산을 하는 학습을 통해 자연스럽게 앎을 체득할 수 있다고. 교육자마다 이견이 있을 수 있는 사안이지만 교육방법론보다도 교육/입시 제도 등 외부의 복잡한 맥락을 고려해야 하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



아무튼 자연과학 계열은 수학, 인문사회 계열은 언어 가 기초 공사를 담당하는 영역 이라고 하니 일단은 언어 공부를,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수학 공부를 조금씩 해볼까 한다. 꾸준히 오래오래. 깊게 생각하기 위해, 정확한 질문을 잘 던지기 위해. 틀리지 않기 위해, 아니 틀리더라도 과정에서 배우는 법을 익히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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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돌로지 - 아이돌+팬덤+산업의 변신
류진희 외 기획 / 빨간소금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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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예스24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아이돌 음악 많이 듣니? 군대에 가면 아이돌 음악에 전문가가 돼서 나온다고 하던데. 근데 딱 시기가 제대하기 전까지에 멈춰 있고. [프로듀스 101]을 팬덤의 문화현상으로 분석한 학위논문을 쓴 친구가 내게 물었다. 응, 많이 보지(케이팝은 단순히 하나의 음악 장르가 아니라 시각문화다/126). 자대배치 받은 이후에는 다들 스마트폰을 끼고 사니까 좀 덜한데 훈련소에서 IPTV로 뮤비를 많이 봤어. 에스파, 레드 벨벳, 트와이스, 스테이씨, 스우파 등등. 트와이스는 다 알더라. 내 또래부터 21, 22살 얘들도 다 좋아하더라고. 한 번은 주말에 다 같이 트와이스 히트곡 메들리를 틀어놓고 [cheer up]이랑 [likey] 군무를 췄다니까 !

친구가 남돌의 전문가여서 그랬는지 몰라도 우리의 아이돌 얘기는 더 이상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평소에 아이돌 음악을 잘 듣지 않는 남성들, 하지만 군대에서 한시적으로 아이돌 음악이란 장르에 전문가/덕후가 되는 현상. 그랬다. 그동안 내가 군대에서 만난 이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발라드를 듣는 사람과 힙합을 듣는 사람. 발라드의 외연을 넓혀 해외 POP 장르까지 포함시킬 수 있긴 하지만 전통의 강호(?) 발라드와 2010년대 이후 한국에서 청년 세대를 대표하는 하위문화의 장르로 우뚝 선 신흥 강호 힙합의 우세는 명약관화했다(한 번은 재즈 음악을 틀었다가 누가 이런 이상한 음악을 틀었냐고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듣기 좋은 음악이자 따라 부르기 위한 노래 장르로서의 발라드, 스트릿 문화의 주요 항이자 청춘의 분노와 우울, 꿈(자수성가, 영앤리치?)을 대변하는 가사와 감각적인 비트의 힙합.

발라드 음악을 좋아하는 한 친구를 보면 ‘듣기 좋은 음악‘으로 발라드 취향이 공고해서 그런지 아이돌 음악을 왜 듣는지 모르겠다고 의구심을 내비친 적이 있다. 꽤 오래 전부터 아이돌 음악에 해외의 유명 프로듀서가 참여해왔고, 다양한 장르를 섞기도 하고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운 화성구조를 사용하기도 하는 등 음악성의 수준이 상당히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이돌 음악은 음악성이 떨어지고 ‘눈요기‘를 위한 쇼 엔터테인먼트의 성격이 강하다는 편견이 잔존해 있는 듯하다.

음악성에 대한 폄하도 문제지만 사실 이 ‘눈요기‘에 대해 이전과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학자 로라 멀비가 논의했던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의 응시는 아이돌을 ‘소비‘하는 주요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적 대상화에 대한 비판이 자칫 섹슈얼리티에 대한 억압, 그리고 아이돌의 주체성을 지우는 환원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어 주의할 필요가 있다. 내 주변에 아이돌 덕후를 보면 다른 무엇보다 비주얼/얼굴의 우선성을 강조하는데(‘얼굴을 파먹기 위해 덕질한다‘) 오히려 이 얼굴성이 추동하는 정동적 관계를 생산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독법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얼굴을 위시로 신체를 포획하여 자본친화적 미의 규범에 예속되게 만드는 자기규율의 테크놀로지가 작동하는 사회에서 신체와 자기의 관계를 어떻게 재구축할 수 있을까. 몸에 대한 주권의 회복, 아니 몸들의 배치 속에서 타자와 자유롭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몸의 회복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리하여 타인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일, 그리고 읽는 일(우리는 얼굴에서 피부 상태나 관리된 표면이 아닌 감정과 생각의 기미를 읽어내는 능력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에서 코드화된 욕망의 발현에서 벗어나 ‘벌거벗은‘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까. 눈을 마주치고 상대방의 얼굴을 다정하게 들여다보는 일. 얼굴에 새겨진 고유한 시간성을 감각하고 체득하는 일. 얼굴에 대한 질문을 앞으로 이어가보고 싶다.

한편 아이돌을 음악으로만 한정해 논의하기에 그 세계가 너무 다채롭고 풍부해서 아깝다는 생각이 앞선다. 아이돌은 ‘시각문화‘(패션과 ‘얼굴성‘의 비주얼, 역동적인 군무, 뮤직비디오와 직캠, 멤버별 영상 등 다양한 하위장르의 영상물로 구성된)이자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서사이기도 하다. 그룹의 서사 및 멤버 개개인의 서사, 소속사에서 제공하는 시놉시스 격의 설정 아래 뮤직비디오 등을 통해 팬들이 아이돌의 세계관과 서사를 추리하고 상상하고 보충하고 재구성하는 식으로 상호텍스트적 실천이 이뤄진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이 설명을 들은 상태에서 아이돌 음악을 접하니까 색다른 재미를 느꼈던 경험이 있다. 에스파의 ‘Next level‘을 보고 나니 이 독특한 컨셉과 세계관이 궁금해져서 전작 ‘black mamba‘을 찾아보는 것으로 에스파 디깅을 시작했던 것이다. 신곡이 나오면 스트리밍 한 번 하는 것으로 끝나곤 했던 아이돌에 대한 향유를 텍스트, 서사, 이미지, 퍼포먼스의 차원으로 다각화시키는 지평의 확장 - 여기에 내가 사랑하는 아티스트를 양육하고 성장시키고 성공시키고 싶다는 팬덤의 일원이 되는 차원까지 나아가지 않았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아이돌을 향유하는 방식이 남고와 군대에서 접한 또래 남성동성사회의 그것보다 훨씬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페미돌로지]를 비롯해 학술장에서 이뤄진 아이돌에 대한 논의를 살짝이나마 접해봤다. 일단 너무 중요한 문화 현상이자 개념이 되어버린 팬덤. 팬덤이라는 새로운 집단적 정체성, 일단 아이돌 세계에 국한해본다면 아이돌 가수와 소속사와 더불어 아이돌 시장에 내놓을 상품/작품을 만드는 데 참여하는 문화 기획자이자 실질적으로 시장에서 생명력을 구가하게 하는 소비자인 존재. 비판이론의 전통에서라면 이들이 후기 자본주의의 물신적 상품에 현혹돼 현실의 모순을 은폐하고 있는 문화상품에 종속된 우매한 대중의 형상으로 포착될 가능성이 높지만 ‘현실‘에서 이들은 다양한 정치집회/시위현장에서 팬덤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결집해 집단행동을 보여준 새로운 정치적 주체이다.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진 촛불집회의 시작은 이화여대에서 시작되었고, 이 학생들이 용기를 내 불의에 대항할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어준 노래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였다. 비단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의 민주주의, 소수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위에서 k-pop이 울려퍼졌다. 이렇듯 k-pop은 어느 시점부터 소수자들의 놀이터, 축제현장이 되었다고 한다([페미돌로지]에 수록된 글들 중엔 해외 언론이 만들어낸 이미지와 달리 k-pop의 가부장적 남성성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고, k-pop이 트랜스퍼시픽 콘텐츠의 상품으로 국제화되는 과정에서 시장의 수요를 영리하게 반영한 부분을 지적한다).

이런 팬덤의 정치는 정치의 팬덤화 현상을 기해 더욱 중요도가 높아졌다. 정치의 팬덤화는 ‘노사모‘ 열풍을 이끌어냈던 고 노무현 대통령 시절부터 지지난 대선 당시에 ‘나꼼수‘ 열풍,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제도권의 정당정치에 기대지 않고 이념과 당파를 막론하고 포퓰리즘의 문법으로 급부상한 정치인들의 활약을 떠올리게 된다. 대개 이민자, 난민, 여성, 소수인종, 성적 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동력으로 삼은 극우 포퓰리즘이 현실정치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낳았지만... 앞으로도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디지털 기술을 바탕으로 한 직접민주주의의 집단행동은 팬덤과 유사한 형식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 자신이 중시하는 이슈(이를 테면 동물권)를 선도적으로 이끄는 정치인이나 인플루언서와의 직접적인 교류(후원 등등) 및 결집과 같은 식으로 말이다.

이렇듯 당대의 정치와 미학, 경제와 기술이 첨예하게 맞부딪치는 장소로서 k-pop 장을 이끌어가는 행위자인 팬덤은 종래의 저항적 주체의 모델, 주체화의 형식으로 논의되어 온 민중, 시민과 또 다른 성격-소비자 정체성을 강하게 띠고 집단주의적이면서 정동의 공동체로 흥미로운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페미돌로지]는 이런 팬덤이 신자유주의적 논리를 내면화한 능력주의와 자본주의적 교환가치에 입각한 아이돌과 팬덤 내부에 대한 규율과 억압(성공이란 ‘같은 것‘을 공유한다는 신념 아래 행해지는 단속. 지불한 것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교환을 요구하는 소비자 정체성의 발현, 지불능력과 같은 진정한 팬의 규범에 따라 위계를 분할하는 문화. ‘배제를 통한 단결‘)에서 벗어나 아이돌과 함께 변화를 꿈꾸는 팬은 가능한지 묻는다. 내게 이 질문을 일차적으로 당신이 아이돌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한다면 그를 우상의 아우라를 지닌 아이돌뿐 아니라 정동 노동을 수행하는 노동자,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청년으로 바라봐줄 수 있는지 묻는 것처럼 들린다. 아이돌이니까, 팬들의 사랑을 받으려면 감내해야 한다고 자연화된 규율을 비판에 부쳐 아이돌의 인격을 착취하지 않고 팬들의 애정을 소진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지속가능한 사랑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 묻는 것처럼 들린다(나는 결국 이런 질문이 문화예술계 종사자/프리랜서들에게 너는 하고 싶은 일 하고 있으니까 낮은 경제적 대우와 사회적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는 욕망의 평등주의-안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 욕망을 유예하고 포기한 보상하는 심리-와 맞닿아 있다고 본다).

한편 어느 저자가 밝혔듯 남덕에 대한 논의가 거의 포함돼 있지 않아 아쉬웠다.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인증한 멤버가 포함된 아이돌 그룹의 CD를 부수는 인증샷을 남겼다고 하는, 여성혐오의 대표자로 고착된 이미지(이런 이미지가 과잉결정되었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소위 ‘이대남‘의 징후적인 면모를 노출시키는 사건이었기에 본문에 제시된 비판이 유효하다고 생각한다)에서 벗어나 k-pop 댄스를 커버하고 수행하고 헤게모니적 남성성에서 미끄러져 ‘퀴어한‘ 남성성을 실천하는 다양한 사례들(본문의 6장 ‘동아시아 베어 남성 댄스 팀의 걸그룹 커버댄스‘가 이를 다루고 있다)이 소개되었으면 좋겠다.

팬덤문화 이외에도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탐구하고 실천하는 장으로서 팬픽(최근 논란이 되었던 알페스를 비롯해 학문장에서도 굉장히 핫한 소재...), k-pop계의 ‘게임 체인저‘라 할 수 있는 BTS - 방탄 유니버스에 대한 논의, 버닝썬 사태가 몇몇 연예인의 일탈이 아니라 개발독재 시기 젠더화된 성별 분업에 따른 노동/여성에 대한 착취를 기반으로 성장한 기업이 아이돌 승리의 얼굴성을 기반으로 여성들을 끌어모아 수익성을 보장한 모델로서 ‘살아 있는 시체‘로서 여성에 대한 죽음정치적 폭력의 구조 속에서 발생한 사건임을 밝히는 페미니스트 정치경제학의 논의 등 개인적으로 공부가 많이 되었던 독서경험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연습생의 혹독한 트레이닝 체계를 거쳐 데뷔를 하고, 말 그대로 무한경쟁의 수레바퀴에서 살아남아 자신의 서사를 써내려가는 케이팝 아티스트. 그들의 탄생과 데뷔, 성장과 반목의 과정을 지켜보며 응원하고 덕질을 하는 팬. 서로에게 있어 서로 없어선 안 될 존재인, 하지만 일반적인 이성애 중심주의의 독점적 연애와 사랑과 또 다른 형태의 사랑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던 책. 십대 청소년과 또래에게 감수성의 형성부터 정치적 입장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아이돌이 건강하게 자신의 재능을 펼쳐나갈 수 있길, 팬이 누군가를 진정으로 좋아하는 힘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길, 그렇게 사랑의 피드백 루프가 오래오래 이어지고 널리널리 확산되길 응원한다.

레드벨벳, 오마이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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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진 세계를 넘어 - 우리는 계속해서 말할 것이다,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채세린.박지현 지음, 장상미 옮김 / 슬로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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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예스24 서평단에 선정돼 작성한 서평입니다.


디아스포라. 산포된 자. 자신이 살던 땅에서 추방당한 뿌리뽑힌 존재 혹은 생존을 위해 자신이 살던 땅을 떠나 타지에 이식된 존재.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디아스포라의 존재와 기억은 조금 낯선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금 멀게는 100년 전, 일제 식민치하에서 조선인들은 만주로, 일본으로, 하와이로, 멕시코로, 중앙아시아 등지로 강제 이주를 당하거나 살아남기 위해 반강제적으로 떠나야 했다. 가깝게는 50년 전만 해도 지방의 아이/청소년/청년들은 농촌으로부터 값싼 노동력을 대량으로 수혈받아 노동집약적 산업화 정책의 일환으로 ‘뿌리 뽑힘‘을 경험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군사정권 치하에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던 사람들이 미국을 포함해 외국으로 떠밀리듯 이주를 감행해왔다. 이제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한국인들이 더 이상 정치적 난민의 입장으로 대규모의 이주를 떠나는 상황은 아니지만 우리 주변에서 디아스포라를 찾아보기 힘들어졌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다. ‘탈조선‘을 한 국외 한국인 디아스포라, 이주민뿐 아니라 새로운 삶을 위해 한국 땅을 찾은 국내 디아스포라, 이주민들이 있다. 외국인노동자, 다문화가정, 탈북민, 새터민, 불법체류자 등 이미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만 아직 잘 보이지 않는 이웃들이 있다.

시리아, 예멘, 아프가니스탄. 세 나라의 공통점은 최근 내전 등으로 인한 국내정치의 불안정한 정세로 인한 대규모의 난민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난민에 대한 인도적 책임을 지기 위해 난민을 수용하는 쪽과 난민을 적극적으로 타자화시켜 혐오하는 방식으로 쇄국 정책을 펴는 쪽 중 한국은 대체로 후자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인권에 기반을 둔 보편적 인류애와 국가이익과 국민정서에 기반을 둔 배타적 민족주의, 환대와 혐오, 다양성을 포용하고 약자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는 성숙한 열린 사회와 닫힌 사회. 현실은 이렇게 이분법적 잣대로 분별을 하기 힘든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을 테고, 점점 더 개인화되고 부족적으로 분열하는 공동체를 하나로 엮을 수 있는 도덕적 합의를 도출해내기 힘들어지고 있다.

이렇게 추상적이고 거대한 질문 대신 초점을 작은 개인에 맞추면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답변을 얻어낼 가능성이 높아진다. 나는 한국사회의 일반성과 평범성의 범주를 벗어나는 낯선 타인의 이야기를 얼마만큼 경청할 수 있는가. 나와 상관없는, 혹은 그렇게 느껴지고 인식되는 타인의 이야기에 무관심한가, 교양 있는 시민으로서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긴 하지만 거기서 멈추는가, 연대의 사회적 기술을 실천할 수 있는가. 고정된 답을 확실하게 꺼내놓긴 힘들 것 같다. 나 하나 건사하기 때때로 벅찬 세상에서 그때그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선의를 지키자는 태도를 견지하려 한다는 정도의 답을 대신 건넨다.

사유화된 위험, 유동하는 공포에 휩쓸려 매몰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위험을 조절하고 관리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타인들과 함께 더불어 즐겁게 살 수 있는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궁리하고, 타인의 고통과 이야기에 감응할 수 있는 상상력과 감수성을 키우기 위해 시와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고, 마음이 맞고 고민거리가 비슷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곤 한다. 표면적인 논리의 형태로는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었던 페미니즘의 주장에 대해 친구들이 여성 동료 시민으로서 구체적으로 증언해준 서사를 통해 내가 서 있는/있었던 위치와 그들이 서 있는/있었던 위치가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다른지 깨달았던 것처럼.

[가려진 세계를 넘어]를 한 번 읽어봐야겠다고 마음 먹게 한 내적 동기가 두 가지 있다. 대학 시절, 한국장학재단을 통해 활동했던 다문화탈북자가정 멘토링 프로그램을 통해 탈북자 가정 출신의 중학생과 멘토/멘티의 관계로 만남을 가졌던 기억이 있다. 언어 능력을 한창 발달시켜야 할 시기에 이사를 자주 다닌 영향으로 말이 어눌해서 중학생 아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했다. 또 탈북자라는 프레임에 맞춰 중학생 아이를 대하고, 얕은 호기심으로 가족사에 대해 물어보는 일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탈북민 출신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제각각 다르겠지만 미디어에 노출되고 소비되는 유형과는 다른 이야기를 읽어보고 싶었다. 들어보고 싶었다.

다른 하나는 현재 내 신분과 관련이 있다. 군 복무를 하고 있는 군인으로서 북한을 직간접적으로 의식할 기회가 잦다. 군사훈련이나 교육을 받을 때면 ‘주적‘으로 북한을 호명하게 되고, 가끔 통일의 파트너 혹은 짝으로 거론하기도 한다. 통일대박론부터 세금 폭탄 및 사회 혼란의 디스토피아적 전망까지 북한에 대한 다양한 논의에서 북한 인민/시민의 자리는 어디에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인상을 받는다. 3대 세습의 독재 체제 아래 고통받는 북한 시민들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대의에 동의하면서도 오랜 기간 동안 형성되어 온 북한 시민들의 정체성과 그에 따른 언어적 문화적 차이를 어떻게 조율하고 대화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빠져 있는 관점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냉전이 종식되었다고 하지만 철의 장막은 여전히 한반도의 허리에 굳건히 세워져 있다. 군사적 대치 상황을 뛰어넘어 더 이상 한민족이란 집단기억에 기반한 통일의 당위성에 공감하지 못하는 세대가 품고 있는 마음의 분단, 마음의 장막을 걷는 일이 더 요원할 지도 모른다. ‘두 여성의 이야기에 담긴 두 한국의 역사/부조리 너머, 화합을 위한 열망의 증거를 보여준다‘는 책 소개글에 마음이 동했다. 손쉽게 화해나 통일, 용서를 말하는 이를 믿지 않는 편이지만 두 여성이 함께 지어낸 공동의 서사와 그 이면에 자리한 공감과 이해의 제스처를 확인해보고 싶었다.

내게 [가려진 세계를 넘어]가 흥미로웠던 지점은 두 한국여성이 새로 뿌리내린 장소와 만남의 장소, 뜻밖의 물리적 언어적 국경의 월경/번역이었다. 이 책은 영국에서 북한 여성들의 인권을 위해 인권운동을 펼치는 함경북도 청진 출신 박지현과 프랑스에서 자라 영국으로 이주해 살고 있는 채세린이 국제엠네스티 캠페인을 계기로 만나 채세린이 박지현의 이야기를 채록한 구술사 작업의 결과물이다. 옮긴이의 말에 적힌 내용대로 불어로 집필된 [두 한국 여성]이 영어로 한 번, 영문번역본이 한국어로 한 번 더 언어의 국경을 넘는 여정을 거쳐 한국 독자들에게 도착할 수 있었다.

‘고난의 행군‘ 시기 가족을 살리기 위해 매매혼을 통해 북한에서 중국으로 떠나고, 중국에서 북한으로 송환되어 수용소에 갇히고, 재탈출을 시도해 중국에서 고비 사막을 건너 영국으로 건너가 정치적 난민으로 인정받기까지 박지현의 처절하고 핍진한 가난과 고통, 여성으로서 당한 폭력의 증언이 책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 자체로도 북한 현실에 대한 르포이자 자서전적 자기서사로서 좋았지만 나는 책에 미처 적히지 못한, 책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두 사람이 사이를 오간 표정과 침묵에 관심이 갔다. 여전히 신변의 위협 가능성이 남아 있긴 했지만 겨우 되찾은 안온한 일상과 평범한 행복의 생활을 포기하고 직면하기 끔찍히 고통스러웠을 기억과 대면해야 했을 박지현이 지새웠을 차가운 밤의 시간들. 같은 ‘한국‘‘여성‘이었기에 박지현은 말할 수 있었고, 채세린은 들을 수 있었다.

고난의 현대사-80년대부터 이미 ‘고난의 행군‘이 예고되었던 북한에게는 좀 더 가혹한 형태로 실현되었지만, 온정적 가족주의-가족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한 박지현에게 가족은 좀 더 복잡한 의미로 다가오겠지만, 한과 정-한국인 특유의 심성(망탈리테)이라고 보기에 미심쩍은 부분도 있지만 두 사람의 ‘케미‘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였던, 여성-두 개의 한국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분열된 두 세계에서 같은 여성으로서 함께 아파하고 웃었을.

이런 책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런 만남, 이런 대화가 없었더라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이야기, ‘가려진 세계를 넘어‘ 우리를 연결시키고 확장시키는 이야기. 잘 듣고, 잘 옮기는 ‘기록자‘들이 좀 더 조명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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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 봐, 우릴 위해 만든 노래야
이환희.이지은 지음 / 후마니타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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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 작가님의 출판하는 마음에서 처음 이환희 편집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소영 선생님의 책읽아웃 방송에서 지상에서 이환희 편집자의 마지막 여정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렇게 그가 만든/만들었을 책들을 계속 읽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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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리포트 - 탈코르셋부터 소수자 차별 금지까지, 기자 4인이 추적한 우리사회 변화의 현장들
김아영 외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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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지난 5년 간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느낀다. 페미니즘 운동이 가져온 변화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20대 학생인 내게 공부대상인 문학 장의 전반적인 기조와 분위기부터 인간관계를 구성하는 요소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고도 총체적인 영향을 미쳤다. 불과 몇 년 전에 흠모했던 작가와 작품 들이 다르게 읽혔고, 마르크스를 처음 접했을 때처럼 어린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생애를 꼼꼼히 검토하고 비판적으로 재해석하게 되었다. 마르크스가 눈치 보고, 망설이고, 부끄럽고, 소외감이 들었던 지난 날을 위로해준 반면 페미니즘은 남성동성 사회에서 느꼈던 불편함과 괴로움을 설명해주기도 했지만 체제의 수혜자이자 가해자로서 내 치부를 아프게 찌르곤 했다. 처음 내가 페미니즘에 별다른 거부감 없이 입문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차별과 억압에 저항하는 진보와 해방의 학문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일종의 보편적인 지식이자 교양으로서 페미니즘은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었으나 현실의 디테일한 이슈에 대한 입장을 세우고, 나와 다른 의견을 지닌 상대방과 대화/토론을 할라치면 곧잘 난관에 봉착했다. 되돌아보면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든 '상황적'이든 지식을 생산하는 학문의 영역과 정치-운동의 영역, 일상의 영역은 각기 다른 층위와 맥락을 지니고 있고, 이를 섬세하게 매개하지 않고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식으로 환원주의적 해석을 가하면 모순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규범적 남성성에 대한 비판이 곧 대안적 남성성의 정립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었고, 일상의 다양한 맥락에서 여전히 규범적 남성성을 요구받거나 자발적으로 수행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그리고 또래 남성들과 얘기할 때면 내 포지션은 페미니즘 쪽으로 크게 기울어져 있었고,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는 친구들(대부분 여성)과 얘기할 때면 친구들의 의견이 과격하거나 급진적이라 느껴질 때가 꽤 있었다. 재밌는 지점은 전자의 상황에서 나는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며 논리적으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언술을 구사할 수 있었던 반면 후자의 상황에서 나는 감정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태가 돼서 내면에서 조용하게 홀로 논쟁을 이어가거나 고민에 빠지곤 했다. 특히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 여성혐오적 사고방식을 기저에 깔고 있는 언행, 동성애자-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스스로 혐오나 차별이라고 생각/인정하지 않는. '보고 싶지 않은 욕구')를 대학원 밖에서 만난 남성들이 드러냈을 때 이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가면 좋을지 당황스러웠다. 나 또한 그런 종류의 문제들을 크고 작게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무결한 존재만 발언권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말할 자격이 부족하다고 느껴서, 말에 책임을 질 자신이 없어서 말을 삼켰다. 결과적으로 말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멀어지기도 하고, 장문의 카톡으로 상세하게 설명해서 상대방에게 손절당하기도 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 이슈에 대한 의식과 감수성의 차이, 그동안 암묵적으로 묵인되거나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던 관습이 문제화되면서 많은 연인들이 갈라섰던 것처럼.

[페미니즘 리포트]는 이렇게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약 5년 동안 지금까지의 세상이 누군가의 불편함과 고통, 희생을 통해 유지돼온 평화였는지 묻기 시작한 여성들이 어떻게 사회를 바꿨는지 최전선에서 현장을 기록해온 기자들의 보고서이다. 탈코르셋 운동, 디지털 성범죄, 여성 노동, 소수자 차별금지 크게 네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중간착취의 지옥도]를 읽을 때도 느꼈지만 간결하고 명확한 문체 덕분에 경쾌한 독서를 할 수 있었다.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전달되었고, 각 챕터 말미에 기자님들이 쓴 산문에서 자연인-시민으로서 고민과 기자로서 직업정신-문제의식이 교차하고 합쳐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 흥미로웠다.

여성 혐오, 성적 대상화, 시선 강간, 꾸밈 노동, 유리 천장, 핑크 택스, 감정노동, 가스라이팅, 페미사이드, 성인지 감수성 같은 말들이 더 이상 대중에게 낯설지 않게 됐다(개인적으로 핑크 택스는 이 책에서 처음 접했다). 개념-지식은 구성된 현실을 또렷하게 지시하고, 현실을 다르게 구성하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기존 사회질서가 얼마나 기울어져 있었는지 마치 빛의 굴절원리를 깨달은 것처럼 익숙한 세계가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안주인'과 '바깥 양반'이란 말이 차별적인 인식에 기초한 표현인지 안다(필요하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된 유구한 서양철학의 여성혐오 전통이나 가부장제에 대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 더 이상 예술가의 데뷔작을 '처녀작'이라 부르지 않는다. 페미니즘의 새로운 물결이 불러온 인식과 감수성의 변화는 규범적 여성성에 종속돼왔던 자신의 몸을 주체적 차원에서 바라보고 사용하자고 하는 탈코르셋 운동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가해자의 편에 서서 법적 판결을 내려온 사법 시스템을 바꿔 누군가의 인생을 파괴시키는 범죄 기록물을 야동이란 이름으로 생산, 유통, 소비해온 범죄자-공모자들에게 조금이나마 합당한 처벌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여성인권에 대한 의식과 감수성은 사회적 약자를 향한 공감과 연대, 사회적 상상력으로 이어져 동물을 비롯한 비인간존재, 성 소수자(LGBT), 장애인, 생태 이슈로 연결, 확장하기도 한다. 본문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모든 종류의 차별에 반대하고 모두가 인간적으로 존재하길 바라는 사람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다고. 각자 가지고 있는 페미니즘/페미니스트의 정의는 다를 수 있겠지만 기성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에 부치는 주변부의 목소리로부터 세상은 좀 더 나은 곳으로 변화해왔다. 역사의 진보는 나선형을 그리며 진행된다는 말을 상기해본다면 4부에 배치된 차별금지법안이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지만 다음 리포트에서 차별금지법안 통과가 2020년대 가장 빛나는 성과 중 하나로 기록될 거라 믿는다.

본문에 소개된 일화 하나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페미니즘 글쓰기 모임에서 한 남성은 기자님에게 여자친구와의 대화에서 벽에 가로막히는 순간이 있다며 이 장벽을 뛰어넘고자 수업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동기를 밝혔다고 한다. 서로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선을 긋는 순간 오해와 불화에서 오는 불편함과 답답함이 쉽게 대상화된 인식-편견의 재생산과 혐오로 이어진다. 한쪽에서 '알고 싶지 않은 마음', 무지를 향한 열정이 들끓고 있지만 다른 쪽에서 타자를 이해하고자 번역의 모험을 감행하는 마음이 있다.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내 사람'을 넘어 모든 사람, 비인간존재를 포괄한 '지구생활자'의 모든 친구들에게 사랑이 퍼져나갈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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