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VS 철학 -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 개정 완전판
강신주 지음 / 오월의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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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철학들을 전공자가 아니어도 쉽게 이해하고 읽을 수 있도록 너무나 탁월하게 작업해주셨습니다. 다만 선종 철학에 관해서는 저자의 선적 안목이 부족하여 관념적으로만 다뤄지고 곡해된 부분들도 적잖은 것 같습니다. 선불교의 철학을 너무 인문학적으로만 다루려는 경향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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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2022-10-30 0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047609 선생님이 말씀하실려는것이 이 책에서 말씀하실려는것이시지요? 저도 이 단순한걸 한참이 걸렸네요 선생님의 후기가 궁금합니다
 
송나라의 슬픔 - 근대의 문턱에서 좌절한 중국 문명을 반성하다
샤오젠성 지음, 조경희 외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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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지방은 그 지형 특성상 전제 통일 국가가 등장하기 힘들고, (물론 로마라는 예외가 있다) 도시국가 위주의 상업활동이 발달한다. 상업문화는 지역민들의 자립심, 독립심, 경쟁심을 고취시켜 공화제 탄생에 일조. 반면 거대한 내륙지방은 해양이라는 지형적 장애물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정복전쟁이 용이하다. 무역보다는 전쟁이 활발해지고 이는 곧 거대한 통일 제국 등장으로 이어진다. 내륙 특성상 농경문화가 발달하며 농경문화는 안정적. 가부장제. 순종적인 성향-> 전제 군주제 체재 적합해진다. 서양은 로마의 경우를 제외하고 역사상 대다수 국가들이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경쟁, 대립하며 발전. 제후국들이 대립하는 봉건사회에서는 이데올로기보다 현실직시의 실용주의, 적극적 인재등용, 사상의 다양화, 역동성과 개방성이 특징. 이는 훗날 자유주의로 이어진다. 반면 통일 전제국은 경쟁상대국이 없기 때문에 역동성과 개방성이 더뎌짐.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


저자는 진, 한, 원, 명, 청과 같은 통일전제국의 경직성을 비판. 반면 역동적인 춘추전국시대, 남송시대를 상당히 높이 평가하고 있다. 저자는 분봉제(봉건) 사회의 역동성이 오히려 문명의 발전을 촉발시킨다고 주장. 유럽과 일본이 봉건사회였다는 것을 미뤄볼 때 상당히 의미있는 이야기다.


한국이 근대까지 뚜렷한 발전을 하지 못했던 것은. 중국처럼 너무 이른 시기에 봉건사회가 끝나고 중앙집권국가가 등장했다는 것. 또 주변국인 중국이 너무나 거대하고 막강한 통일국가였다는 것이 어느 정도 영향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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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의 슬픔 - 근대의 문턱에서 좌절한 중국 문명을 반성하다
샤오젠성 지음, 조경희 외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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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 통일제국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기술함. (부국강병, 인권탄압, 황제독재, 공포정치) 반면 춘추전국, 위진남북조 시대 제후국들의 상호작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분봉제(봉건사회)에서 권력은 상호 견제를 통해 문명의 역동적 발전에 기여한다고 보고 있음. 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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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새로운 자본주의가 다시 온다
이언 브레머 지음, 차백만 옮김 / 다산북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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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국가자본주의에 관한 책. 겉보기와 다르게 상당히 짜임새있고 알찬 내용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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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앎의 빛 - ‘참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탁월한 통찰 Modern Spiritual Classic 8
루퍼트 스파이라 지음, 김인숙.김윤 옮김 / 침묵의향기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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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엄경에 이런 말이 있다. "돌려보낼 수 있는 모든 것은 네가 아니지만, 돌려보낼 수 없는 것은 네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 한 구절이 이 책의 메시지와 일맥상통할 것이다. 종교(또는 영성)는 삶과 죽음에 관한 가장 근원적인 불안의 극복을 목적한다. 원초적 불안은 존재의 국소적인 부분들, 이를테면 생각, 느낌, 지각 등에 대한 자기 동일시가 원인이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생각이다. 생각은 모든 부분들 중에 가장 강력하다. '인간은 자신이 언어를 부리는 줄 알지만, 사실은 언어가 인간을 부리고 있다.'---하이데거. 자아로부터 생각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자아를 형성한다. 생각이 재료로, 기억이 골조가 되어 자아를 구성한다. 여기서 무아에 대비되는 자아는 날 것의 1인칭 존재감이라기보단 자기동일성을 지닌 하나의 경향성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자기동일성을 지닌 하나의 경향성은 꾸준히 '나의 삶'을 직조해낸다. '나의 삶'은 그렇게 약하고 위태로운 감각들에 매달려있다. 뜬구름 물거품처럼 가볍고 덧없다. 생물학적 죽음없이 기억의 상실만으로도 '나의 삶'은 송두리째 사라진다. 기억이라는 가느다란 실에 매달려, 생각의 쉴새없는 주절거림을 통해, '나'와 '나의 삶'은 그리도 연약하고 실체없이 형성되어 있다.


진정한 안전을 원한다면, 정말로 안전한 것에 정체성을 두어야 합니다. 사라지는 것은 정말로 안전할 수 없습니다. 안전과 그에 따른 평화를 원한다면, 나타나거나 움직이거나 변하거나 사라지지 않는 것, 안전한 것에 정체성을 두어야 합니다. 생각, 느낌, 감각, 지각 등 마음으로 찾을 수 있는 대상은 (아무리 미묘하더라도) 오고 갑니다. 우리의 삶 내내 늘 존재하는 단 하나의 앎이며, 우리는 그 앎으로 모든 경험을 압니다. 이 앎은 우리가 마음으로 찾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떤 대상이 아니며, 관찰되거나 지각될 수 있는 성질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앎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직 그것으로 존재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앎을 알아차리면서 앎으로 존재하는 방법은 우리의 정체성을 더는 앎이 아닌 다른 것에 두지 않는 것, 우리의 정체성을 더는 생각, 느낌, 감각, 지각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순수한 앎의 빛, p.64-65



저자는 '앎'을 강조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통상 느끼는 의식적 앎과는 전혀 다른 앎이다. 저자는 '생각, 느낌, 감각, 지각' 등의 대상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주장한다. 생각, 느낌들 뿐 아니라 '지각'마저도 대상이며 벗어나라고 권고하고 있다. 뉴에이지나 불교 쪽에 관심갖고 수행하다보면 문득 '생각'의 동일시에서 벗어나는 경험이 찾아온다. 생각이 낯설게 느껴지고, 초점이 생각에서 생각에 대한 관찰로 옮겨간다. 관찰의 힘은 점점 깊어진다. 이 관찰은 생각에 대한 동일시를 파괴시키는데 아주 유용한 도구이지만, 관찰 또한 결과적으로는 생각과 다르지 않은 대상이므로, 차후 관찰과의 동일시에서도 벗어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생각, 지각(관찰)과의 동일시 파괴는 이해가 아닌 경험으로 이뤄진다. 원초적 호기심이 유용한 도구가 된다. 항상 낯설게 의심해야 한다.


책에서 주의할 점은, 저자가 강조하는 순수한 '앎'이 통상적으로 의미하는 관찰, 의식, 지각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앎이라는 표현은 곧잘 의식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저자의 순수한 앎은 가장 근원적이고 선험적인 바탕이다. 마음챙김, 알아차림 보다도 더 깊은,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본질적인 <현실>이다.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적멸, 열반이다.) 우리는 존재하고 있다. 몸이 있고, 몸을 알아차리고 세계를 인식하는 마음도 있다. 그러나 그 몸과 마음이 있기 전,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 그리고 지금도 모든 현상들을 현전시키는 아주 굳건한, 그러나 전혀 알 수 없는, 바탕.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순수한 앎의 속성이다. 대상이 아니다. 때문에 경험되어질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경험이 이미 이것을 바탕으로 현성하고 있기 때문에 구태여 찾을 필요가 없다.


젊은 물고기가 나이든 물고기에게 물었다. '바다를 찾고 있어요.' '바다?' 나이든 물고기 말했다. '여기가 바로 그 바다야.' 젊은 물고기가 말했다. '여기요? 여긴 그냥 물인데. 내가 원하는 건 바다라구요!' 이 일화는 모든 구도 여정에서 구도자가 빠지기 가장 쉬운 함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진리는 어떤 대상이 아니다. 대상이 아니므로 경험할 수 없고, 경험하는 주체 또한 허용되지 않는다. 다만 있는 것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통찰할 뿐이다. 우리는 '빛'을 직접 볼 수 없다. 다만 빛에서 비롯된 그림자만을 볼 뿐이다. 그림자를 그림자라고 확실히 알게 될 때, 비로소 '빛'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결국 넌센스이다. 우리 자신이 본래부터 '빛'이었으니까. 모든 구도란 결국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기억해내기 위한 시도들이다. 그리하여 선사들은 줄곧 이야기했던 것이다. "밖에서 구하지 말지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문화는 행복을, 우리 '존재'에 대한 늘 있는 단순한 앎에서 몸의 즐거운 감각이나 마음의 확장된 상태로 격하시켰습니다. 그러나 참된 행복은 이런 것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 다른 모든 현상과 마찬가지로, 즐거운 감각과 마음의 확장되거나 평화로운 상태는 오고 갑니다. 만약 행복이 이런 감각이나 상태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행복은 늘 왔다가 가 버리고, 그 때문에 우리는 (짧은 순간씩만 중단될 뿐) 평생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행복 추구'라 부르든 '깨달음 추구'라 부르든 차이가 없습니다. 같은 것입니다. -----순수한 앎의 빛, p.121-122


종교나 영적 가르침에서 주장하는 행복은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행복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이른바 소확행이라던가 즐겁고 기쁜 순간들, 충만감, 지복감, 건전한 정신적 쾌락 같은 것들은 종교적 행복과는 조금 다르다. 종교적 행복은 가장 원초적인 불안을 극복하는 것이다. 행복이라기보단 평화, 안심 쪽에 가깝다. 물론 이러한 평화와 안심도 감각적 평화, 감각적 안도감이 아니다. 그보다 더 배후에, 삶과 죽음에 대한, 존재의 무근거성에 대한 불안, 실존의 불안에의 해소에서 오는 안도감이다. (원초적 불안은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을 통해 상당히 구체화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본질적인 평화와 안도는 현상에서의 공포와 불안을 제거하지 않는다.


종교나 영성 분야에서는 행복과 평화를 강조하지만, 사실 행복과 평화보다도 경이성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종교적 혹은 영적 가르침은 일상성에서 은폐되어져 온 존재의 경이로움을 드러낸다. 어째서 이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가. 불안을 극복한 종교적 인간은 새로운 눈으로, 세계와 자기 자신을 낯설게 목격한다. 언어에 방해받지 않고, 존재한다는 것의 날 것을 직관한다. 삶은 그 자체로 경이로움이다. 매우 심오하고 거대하다.


이 책의 저자 루퍼트 스피라는 예술대학을 졸업한 영국의 도예가이자 영적 교사이다. 가르침이 아주 명료하고 간결하며 군더더기가 없다. 대다수의 종교인들과 영적 교사들이 그러하듯, 그 또한 어릴적부터 실존에 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17살에 명상을 배우고 북인도에서 20년 동안 아드바이타 베단타를 공부하고 수행했다. 아드바이타 베단타는 인도의 우파니샤드(힌두교의 이론적 · 사상적 토대를 이루는 철학적 문헌들의 집성체)를 근거로한 비이원론 사상이다. 외에도 루미(페르시아의 신비주의 시인이자 이슬람 이맘),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라마나 마하리쉬, 니사르가닷타 마하라지 등을 깊이 공부했다. 1997년 프란시스 루실이라는 개인적 스승을 통해 영적 통찰을 얻은 듯 하며 이후 도예가이자 영성 교사로서 도자기를 만들고 에세이 저술, 명상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자신에게 물어모십시오. "나의 경험을 아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경험‘이란 마음, 몸, 세계를 말합니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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