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 찾아오면 의자를 내주세요 사계절 1318 문고 1
미리암 프레슬러 지음, 유혜자 옮김 / 사계절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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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물지 못할 바에는 이빨을 드러내지 마라>
내 비밀 일기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기적이 일어날 것을 절대로 바라지 마라. 기적이란 그것을 기대하지 않을 때, 그제서야 일어난다."
그 글은 로유 이모가 나의 법적 후견인 자격을 두 번째로 신청했다가 또다시 실패했을 때 적어 놓았던 말이다. -11쪽

"고통이 어떤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면 왜 날 그렇게 학대했죠?"
하고 나는 물었다. 로우 이모는 나를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쓰다듬어 주면서 눈물을 내비쳤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네 엄마는 영혼에 병이 들었단다. 할링카야. 사람은 겉으로만 상처를 입는 게 아니란다. 그보다 더 깊이 들어가면 영혼도 다칠 수 있지. 사람이 끔찍스럽고 아주 무서운 일을 겪었다고 해서 저절로 더 나은 사람이 되라는 법은 없단다. 오히려 그 사람 자체가 스스로 끔찍스럽고 무시무시한 사람이 될 수도 있지."
단지 그 말 뿐, 이모는 그 이상 말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
단어들 가운데 어떤 것은 듣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오고, 금방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말이 있다. 정말 그렇다. 그 말이 어떤 일과 관계되어 있든 전혀 상관이 없다. '학대하다'라는 단어도 그런 것들 중의 하나다. -13쪽

<가난한 사람은 도둑이 무섭지 않다>
"신경쓰지 마. 가난한 사람은 도둑이 무섭지 않은 거야."
로우 이모는 언제나 내게 말했었다.
내 생각으로는 그 말이 맞지 않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이 얼마 되지 않은 것을 빼앗기지나 않을까 두려워할 것 같다. 부자는 어차피 많이 갖고 있으니까 어쩌다 도둑을 맞는다고 해도 큰 일은 아닐 테니 말이다. 부자는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손가락만 툭 퉁기면 다 가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누군가 나의 이 작은 담요를 훔쳐 가 버린다면 내게는 너무나 슬프고 치명적인 일이 될 것이다. 부자도 물건에 따라서 딱 하나만 갖고 있는 것이 있겠지만, 그는 그것을 언제라도 새것으로 살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돈이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 -27쪽

헤르링 상가의 이불 가게 점원은 이것을 '낮잠 담요'라고 불렀다. 자잘한 꽃들이 촘촘이 박혀 있는 적갈색 담요였다.
"별로 예민하지 않은 무늬야. 때가 잘 타지 않거든."
로우 이모가 그것을 보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난황색 눈동이 나물이 많이 찍혀 있는 담요가 오히려 더 좋아 보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돈은 어차피 이모의 주머니에서 나갔으니까. 더 강한 자가 언제나 옳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았던 그 때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28쪽

<궁전을 꿈꾸는 자는 오두막집마저 잃게 된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면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방법도 찾을 수 있다. 대개 그것은 가능한다.
.....
정말로 나는 친구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중에 아이들 모두를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전부 잊어버리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보다 더 적다. -40쪽

<통통한 오리를 잡아먹고 싶으면 먼저 잘 먹여야 한다>
내 몸은 상처가 나거나 멍이 들면 다른 아이들보다 두 배 더 확실하게 나타난다.
"알레르기 반응입니다."라고 요양원의 의사는 말했었다.
"피부가 자극에 대해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지요."
내 옆에 있던 로우 이모는 내 손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었다.
"아이의 영혼도 그래요."
의사는 이모가 무슨 못 할 말이라도 한 것처럼 이모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부끄러웠다. 로우 이모가 낯선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할 때면 언제나 부끄럽다. 하지만 우리끼리 있을 때에는 그런 말이 듣기 좋다. 이모는 아름다운 표현들을 정말 많이 알고 있다. -54쪽

<행복이 찾아오면 의자를 내주세요>
제일 먹고 싶은 것은 건포도가 들어 있고, 흰 설탕 시럽이 덮여 있는 빵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냉정한 사람은 손으로 뭔가를 건네 주기보다는 호주머니 속에 찔러 넣고 주먹을 말아 쥐는 것을 더 좋아하는 법이니까. 그런 인색함에 스스로 짓눌려 버릴 날이 오기를 바랄 수밖에!-65쪽

나는 오늘 실패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다 얻었다. 다만 로우 이모에게 갈 수 있는 10마르크만은 받지 못했다.
갑자기 초콜릿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졌다.
"가슴 속이 쓰면 입에 설탕을 넣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이것도 역시 로우 이모의 말이다. -67쪽

<머릿속이 어두우면 마음도 밝아질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개는 크고 털이 검은 색이며, 외로운 늑대처럼 눈 덮인 숲을 쓸쓸히 걸어다니는 개다. 폴란드에는 늑대가 있다고 로우 이모가 말했었다. 러시아에서 건너온다고 한다. 늑대는 무섭다. 하지만 큰 개라면 마음에 들 것 같다. 게다가 내가 "물어!"하고 명령만 내리면 되는 그런 개라면 더욱 좋겠다. 그런 개가 도깨비 방망이 보다 훨씬 나을 것 같다. -75쪽

<동전을 보고 몸을 굽힌 사람만이 그것을 주머니에 넣을 수 있다>
사실 내게는 상품이 무엇이든 상관 없다. 거의 상관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로우 이모에게 가는 것이다.
물론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짓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원칙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해서는 안되는 일이 어차피 부지기수로 많은데.
"동전을 보고 몸을 굽힌 사람만이 그것을 주머니에 넣을 수도 있다."
로우 이모는 말했었다. 나는 몸을 굽히고 싶다.
......
나는 도둑질이 별로 나쁜 짓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로우 이모는 내 것과 네 것 사이에는 엄연한 구분이 있다고 했다. 다만 배가 몹시 고플 때는 경우가 조금 다르다고 이모는 말했었다. 그 때도 훔치는 것을 옳지 않지만, 이해될 수는 있는 일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모. 그리움도 배고픔과 비슷한 거 아닌가요. 내 말이 맞죠, 안 그래요?
그리움은 영혼이 허기진 거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82-83쪽

로우 이모는 '보육원'이라는 단어를 듣자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이모는 속마음을 전혀 감추지 못한다. 나도 전에는 그랬지만 이제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모름지기 사람은 마음 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표현도 하지 말고, 말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생각을 할 때에도 조심을 많이 해야 한다. 스스로를 위해 조심해야 할 생각들이 있기 때문이다. -84-85쪽

<에덴 동산이라도 혼자뿐이라면 즐겁지 않다>
선생님한테 그 꽃을 보이며 이름을 물어 보니, 치코리라고 했다. 아주 예쁜 이름이었다. '길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라는 의미의 꽃이었다.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물론 나였을 것이다. 요양원에서도 가끔 그 꽃 생각을 했고, 그 꽃이 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그 후 다시는 그 꽃을 보지 못했다. -101쪽

"폴란드에는 도마뱀이 아주 많지."
내가 그 말을 했을 때 이모는 내게 말했었다.
"여름에는 도마뱀들이 나와서 따뜻한 돌 위에 누워 있단다. 사람이 꼬리를 붙잡으면 꼬리가 그냥 떨어져 버리지."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도마뱀이 안됐다고 생각했지만, 이모가 그 꼬리는 금방 자란다고 말해 주었다. 참 편리할 것 같았다. 인간은 그렇지 않다. 누군가 다른 사람을 너무 꽉 움켜잡으면 시퍼런 멍이 들고, 피가 맺히고, 온몸이 아프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잘려 나간 팔 같은 것이 다시 자라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나도 도마뱀이 되어 따뜻한 돌 위에 누워 있을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더구나 숲 속의 빈 터 같은 곳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으리라. 나무 그루터기도 땅에 떨어지는 낙엽들처럼 갈색이다. 그리고 언제나 약간 스산해 보이는 마른 덤불도 그렇다. -102-103쪽

<빵을 찾으면 나이프도 찾을 수 있다>
"빵을 찾으면 나이프도 찾을 수 있다."
로우 이모는 말했었다.
하지만 순서대로 해야 된다. 나에게는 오래 된 버릇이 하나 있다. 등을 깔고 누워 눈을 감은 다음,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며 마음 속으로 그것을 한 번 더 경험하는 것이다. 사물 하나하나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낫었는지 차례대로 생각해 보는 것이다. 단어든 몸짓이든 색깔이든.....
그런 식으로 하면 아름다운 것이 쉽게 잊혀지지 않고, 여러 번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도 익숙해지게 마련이라서 계속 하면 약간 지루해진다. -107쪽

"소원은 아주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무조건 쟁취하려고 하면, 전혀 엉뚱한 것이 되어 버릴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난 이해하지 못하겠어. 왜 그런 말을 적어 놓았지?"
그 애가 정말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팠었어..... 난 자주 아파."
그러다가 난 얼른 말문을 닫았다. 누군가 나에 대해 아는 것이 싫어서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똑같은 이유 때문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비밀 일기에 그대로 적지 않고, 상징적인 말로만 적는다. 내가 써 놓은 문장을 읽으면 그 때의 상황이 다 기억나기 때문에 나는 이해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결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하필 이제 와서 예외를 만들어야 한단 말인가?-113쪽

나는 숫자세기도 시작할 수 없었다. 기분이 좋은지, 아닌지 잘 알 수 없었다. 사실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 더 신중을 기했다면 좋았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을 너무 많이 보여 주지 않는 것이 좋았을 텐데.
......
그 때 레나테가 불쑥 내 침대가에 나타나서 몸을 숙여 내게 키스했다. "잘 자."라고 속삭이며....
나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펠리카놀 냄새를 맡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냥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116-117쪽

<암소의 털을 깎고, 숫양의 젖을 짰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했는데, 스스로도 참 한심한 암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잘못하고 말았다.
오늘 잠에서 깨어날 때에도 바로 그런 느낌이 들었다.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암소의 털을 깎고, 숫양의 젖을 짰다."
로우 이모는 내가 하려고 한 일이 모두 잘못되어 낑낑대고 있을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

다만 모든 것이 난처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나는 아무에게도 상관없을 그런 이야기를 해버리고 말았다. 실제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아이들처럼 말이다. -119. 121쪽

허리가 아프고, 숨쉬기가 거북하고, 다리 근육에 쥐가 날 때까지 뛰고 또 뛰었다. 외침 소리도 어느 새 작아졌고, 분개하는 것처럼 들리지도 않았다. 끝없는 반복..... 더 이상 통증이 없게 하려면 모든 것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 자꾸 생각하면 즐거운 기억만 빛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안좋은 것도 역시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122쪽

<가난한 아이를 친구로 두는 것이 부자를 적으로 두는 것보다 낫다>
로우 이모, 걱정할 필요 없어요. 앞으로 싫어하는 아이들 모두를 흠씬 두들겨 패 줄 생각은 없으니까요. 정말로요. 하지만 부득이한 경우에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이 기뻐요. 명언은 반대로 말해도 말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로우 이모, 이렇게 얘기하면 어떨까요. "깨물 수 있으면 마음 놓고 이빨을 드러내도 된다."라고요. 이제는 엘리사벳에게 더 이상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을 거예요. 그런 시절은 이미 지나갔어요.
....

로우 이모, 제일 처음 맞는 것이 충격 때문에 가장 많이 아파요. 하지만 일단 맞고 나면 통증에 단련이라도 된 것처럼 전혀 고통스럽지 않아요. 심지어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게 되지요. 다만 처음이 끔찍할 뿐이에요. 사실 그런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난 그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이제야 그것을 다시 깨달았어요. 하지만 로우 이모, 모든 것이 다 지나고 나면 피곤해요. 정말 피곤해요.. -136~137쪽

나중에, 그 아이가 가고 난 다음 언젠가 다시 가방 창고에 갈 수 있으면 비밀 일기에 꼭 적고 싶은 글귀가 생각났다.
"혼자가 아닐 때 우는 것은 전혀 다르다. 혼자 우는 것은 끔찍하다."
내게도 이제 친구가 한 명 생겼다. 힘도 세지 않고, 많은 도움은 안 되겠지만, 상관없다. 그 대신 내가 강하면 되니까. 나는 이미 내가 좀더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가난한 아이를 친구로 두는 것이 부자를 적으로 두는 것 보다 낫다."
로우 이모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143쪽

<닭은 무슨 꿈을 꾸나? 수수, 언제나 수수 꿈을 꾼다>
"여기. 너도 뭘 적을래?"
레나가 비밀 일기를 무릎 위에 얹어 놓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종이만 쳐다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아."
그 애가 한참 만에 말했다.
나는 그 애 옆에 앉아 그 애의 손에서 비밀 일기를 빼앗아 들었다. 나도 생각나는 말이 없었지만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적어 나갔다.
"반쪽 진실은 완전한 거짓이다. 하지만 맞지 않는 말일 수도 있다. 어쩌면 반쪽 진실은 그냥 반쪽 진실일 뿐일지도 모른다."
레나가 웃었고, 촛불이 더 이상 차갑게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그 애의 얼굴을 예쁘고, 거의 유쾌해 보이게까지 만들었다. 그 애가 내 손에서 비밀 일기를 가져가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친구가 있다면 반쪽 진실이든, 온전한 진실이든 전혀 중요하지 않다."-168쪽

<신은 오랫동안 기다렸다가 이자와 함께 값을 지불한다>
제대로 곰곰이 생각을 모으면 모든 것을 상상할 수 있다던 로우 이모의 말은 틀린 말이었다. 그 곳에서 내가 본 것들은 전혀 모르던 것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상상이 불가능했다.
로우 이모,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해요.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 상상할 수 있을 뿐이에요. -193쪽

<설탕도 충분히 단데 꿀은 왜 필요한가요?>
물이 상쾌하게 차가웠다. 몸을 구부려 한 모금 마시고, 얼굴에도 물을 묻혔다. 거울 속의 내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얼굴이 다르게, 조금 더 성숙하게 변한 것처럼 보였다. 반창고를 떼고, 꿰맨 자리를 살펴보았다. 상처가 잘 낫고 있다고 쭈레거 선생님이 말했었다. 머리를 기르면 흉터는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내일 실밥을 뽑고 나면 그렇게 큰 반창고를 붙일 필요가 없게 된다.
내 생각에 나는 방금 전에 행복한테 의자를 내주었던 것 같다.
얼굴의 물기를 닦고, 세면실에서 나갔다. 우리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문가에 잠시 멈춰 섰다. 레나에게 곧바로 말할 생각이다.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었다. 작은 인형이 손에 잡혔다. 재 보았다너 13센티미터 반이었다. 어차피 나도 별로 크지 않으니 나한테 아주 잘 어울린다. 레나가 인형의 머리카락을 다시 검정색으로 물들여 놓았다.
이모, 사랑하는 로우 이모, 설탕만으로도 단데 꿀은 왜 필요한가요?-209~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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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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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 배신자처럼 우리를 덮쳤다. 새로운 태양은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적들과 결탁이라도 한 것 같았다. 불면의 밤을 보내고 난 뒤, 우리의 내부에서 요동치든 갖가기 감정들, 자포자기, 쓸모없는 반항심, 종교적 체념, 두려움, 절망감이 이제 한 덩어리가 되어 제어할 수 없는 집단적 광기 속으로 흘러들었다. 명상의 시간, 결정의 시간은 끝났다. 이성적인 활동은 모두 격정적인 혼란 속에서 흩어져버렸고, 그 순간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너무나 가까운, 우리의 집들에 대한 따뜻한 기억들이 섬광처럼 번득이며 칼에 베인 것 같은 날카로운 아픔을 안겨주었다. -16-17 쪽

거기서 우리는 최초의 구타를 당했다. 너무나 생소하고 망연자실한 일이어서, 몸도 마음도 아무런 통증을 느낄 수 없었다. 단지 무척 심오한 경이로움만을 느꼈을 뿐이다. 어떻게 분노하지 않고도 사람을 때릴 수 있을까?-17쪽

우리가 말을 해도 그들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설사 들어준다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이름마저 빼앗아갈 것이다. 우리가 만일 그 이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다면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찾아내야만 할 터였다. 그 이름 뒤에 우리의 무엇인가가, 우리였던 존재의 무엇인가가 남아 있게 할 수 있는 힘을 찾아내야만 했다. -34쪽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울타리인 카베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이 아주 연약한 것이며 이 인간성이야말로 우리 생명보다 더 위태롭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략)
아픈 인류로 미어터질 듯한 막사에 언어가, 추억이, 다른 아픔이 들어찬다. 다른 아픔이란 독일어로 '하임베'(향수병)라는 것이다. '집을 행한 아픔'이라는 뜻의 아름다운 단어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다. 바깥 세상에 대한 기억들은 우리의 꿈을, 깨어 있는 시감을 가득 채운다. 놀랍게도 우리가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떠오르는 모든 기억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선명하게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80쪽

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슬픔과 아픔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겪더라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전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원근법에 따라 앞의 것이 크고 뒤의 것이 작다. 이것은 신의 섭리이며, 그래서 우리가 수용소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삶에서, 인간이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라는 말을 그토록 자주 듣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인간이 애초에 완전한 행복의 상태를 누릴 수 없어서라기보다 불행의 상태가 지니는 복잡한 성질을 늘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없이, 차례대로 늘어선 그 불행의 이유들이 단 하나의 이름을, 가장 큰 이유의 이름을 갖게 된다. 그 이유가 힘을 잃어버릴 때까지 말이다. 그런데 그 때 우리는 그 뒤로 또 다른 이유가 등장하는 것을 본다. 비탄에 잠길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뒤로 또 다른 이유들이 줄을 서 있다.
그리하여 겨우내 우리의 유일한 적이었던 추위가 가시자 우리는 배가 고프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똑같은 오류를 범하며 오늘 "배만 고프지 않다면!"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배가 고프지 않기를 바랄 수 있단 말인가? 수용소 자체가 배고픔이다. 우리 자신이 배고픔, 살아있는 배고픔이다. -110쪽

몇 시간 동안 우리는 자유로운 인간들 식으로 불행할 수 있다. -116쪽

그러나 우리에게 수용소는 벌을 받는 곳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끝이 정해져 있지 않다. 수용소는 게르만식 사회구조 한가운데에서 시간 제한 없이 우리에게 부과된 존재방식일 뿐이다. -125쪽

우리는 명백하고 손쉬운 추론을 믿지 않는다. 모든 문명적 상부구조가 제거되면 인간의 행동은 기본적으로 잔인하고 이기적이고 우둔하다는 추론 말이다. 이러한 추론에 따르면 '해프틀링'은 거리낌 없는 인간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 생각에 도출될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궁핍과 지속적인 육체적 고통 앞에서 수많은 사회적 습관과 본능이 침묵에 빠진다는 것뿐이다. -132쪽

그들은 끊임없이 교체되면서도 늘 똑같은, 침묵 속에 행진하고 힘들게 노동하는 익명의 군중, 비인간들이다. 신성한 불꽃은 이미 그들의 내부에서 꺼져버렸고 안이 텅 비어서 진실로 고통스러워할 수도 없다. 그들을 살아 있다고 부르기가 망설여진다.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 앞에서, 그들의 죽음을 죽음이라고 부르기조차 망설여진다.
얼굴 없는 그들의 존재가 내 기억 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 우리 시대의 모든 악을 하나의 이미지로 형상화할 수 있다면, 나는 내게 친근한 이 이미지를 고를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구부정하게 구부린, 뼈만 앙상한 한 남자의 이미지이다. 그을 얼굴과 눈에서는 생각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136쪽

'이해하려 애쓰지 마라, 미래를 상상하지 마라, 모든 게 어떻게 언제 끝나게 될지 생각하며 괴로워하지 마라'는 게 우리의 지혜였다. '다른 사람에게 질문하지도, 스스로 자문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179쪽

살아 있는 인가들에게 시간의 단위들은 항상 어떤 가치를 지닌다. 그것을 통과해 살아가는 사람이 거기서 내적 자원을 많이 얻으면 얻을수록 가치도 더 커진다. 그러나 우리에게 한 시간, 하루, 한 달은, 즉 우리가 가능한 한 빨리 제거하고 싶었던 이 무가치한 잉여의 물질은 생기없이, 그리고 항상 너무 느리게 미래로부터 과거로 내려앉았다. 하루하루 생기 있게, 소중하게, 돌이킬 수 없이 흘러가던 시기가 끝나고 잿빛의 불투명한 미래가 우리 앞에, 마치 넘을 수 없는 장벽처럼 서 있었다. 우리에게 이야기는 정지되어 있었다. -179-180쪽

우리의 배고픔이 한 끼를 굶은 사람의 그것과 같지 않듯이, 우리의 추위에도 특별한 이름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허기'라는 말을 쓴다. '피로', '공포', '고통'이라는 말도 쓴다. '겨울'이라는 말도. 하지만 이것은 전혀 다른 것들이다. 자기 집에서 기쁨을 즐기고 고통을 아파하며 살아가는 자유로운 인간들이 만들어내고 사용하는 자유로운 단어들이다. 만일 수용소들이 좀더 오래 존속했다면 새로운 황량한 언어들이 탄생했을 것이다. 영하의 날씨에 바람 속에서 셔츠와 팬티, 올이 성긴 천으로 만든 윗도리와 바지만 입은 채, 더할 수 없이 허약해지고 굶주린 육체로, 종말이 다가와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하루 종일 노동하는 것의 의미를 설명하려면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189쪽

오늘은 바람이 불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이상하게도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이, 어쩌면 아주 보잘것없을 수도 있는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절망의 문턱을 넘지 않도록 해주고 계속 살아가게 해준다. 비가 오지만 바람이 불지 않는다. 혹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 하지만 오늘 저녁 내가 추가로 죽을 배급받을 차례라는 것을 안다. 혹은 상황이 더 안 좋아서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보통 때와 다름없이 배가 고프다. 그러면 정말로 바닥에 누워 있는 것 같을 때마다 종종 그렇듯 정말로 마음 속에 고통과 지루함밖에 느껴지지 않는데,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좋다, 나는 내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을 건드리거나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 수 있다. 그러면 비는 끝날 것이다. -201쪽

바로 기억이라는 고통이다. 의식이 어둠을 뚫고 나오는 순간 사나운 개처럼 내게 달려드는, 내가 인간임을 느끼게 하는 잔인하고 오래된 고통이다. 그러면 나는 연필과 노트를 들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을 쓴다. -216쪽

우리는 망가지고 패배했다. 이 수용소에 적응할 수 있었다 해도, 마침내 우리의 식량을 마련하는 법을 배우고 고된 노동가 추위를 견디는 법을 배웠다 해도, 그리고 우리가 다시 돌아갈 수 있다 해도 그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229쪽

지금 나는 아우슈비츠가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 시대에 그 누구도 신의 섭리에 대해 말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241쪽

수용소에서 지내는 동안 희망을 갖는 버릇, 자신의 이성을 신뢰하는 버릇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수용소에서는 모든 일이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벌어지기 때문에, 생각이라는 것은 쓸모없었다. 그것은 위험하기도 한다. 고통의 원천이자, 그 고통이 일정한계를 넘으면 자연의 섭리에 의해 무뎌져버리는 감수성이라는 것을 되살려내기 때문이다.
기쁨, 두려움, 그리고 고통과 마찬가지로 기다림도 우리를 지치게 한다. -262쪽

우리 존재의 일부분은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의 눈에 하나의 사물일 뿐인 시적을 보낸 사람의 경험이 비인간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세 사람은 대부분 거기에 물들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샤를과 나의 우정이 지속될 수 있는 이유다. -2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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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영혼의 편지 (반양장) 반 고흐, 영혼의 편지 1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 / 예담 / 2005년 6월
품절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게 되고, 자신이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사랑을 느낄 때인 것 같다. (1979.8.15)-12쪽

나는 지금 내가 선택한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공부하지 않고 노력을 멈춘다면, 나는 패배하고 만다. 묵묵히 한길을 가면 무언가 얻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나의 최종 목표가 뭐냐고 너는 묻고 싶겠지. 초벌그림이 스케치가 되고 스케치가 유화가 되듯, 최초의 모호한 생각을 다듬어감에 따라 그리고 최초의 덧없이 지나가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실현해감에 따라 그 목표는 더 명확해질 것이고, 느리지만 확실하게 성취되는 것이 아닐까. -18-19쪽

제발 내가 포기했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라. 나는 꽤 성실한 편이고, 변했다 해도 여전히 같은 사람이니까. 내 마음을 괴롭히는 것은, 내가 무엇에 어울릴까, 내가 어떤 식으로든 쓸모있는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 어떻게 지식을 더 쌓고 이런저런 주제를 깊이있게 탐구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뿐이다. 게다가 고질적인 가난 때문에 이런저런 계획에 참여하는 것이 어렵고, 온갖 필수품이 내 손에는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것만 같다. 그러니 우울해질 수밖에 없고, 진정한 사랑과 우정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빈 것처럼 느껴진다. 또, 내 영혼을 갉아먹는 지독한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사라이 있어야 할 곳에 파멸만 있는 듯해서 넌더리가 난다. 이렇게 소리치고 싶다. 신이여,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요!-20쪽

이 감옥을 없애는 게 뭔지 아니? 깊고 참된 사랑이다. 친구가 되고 형제가 되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최상의 가치이며, 그 마술적 힘이 감옥 문을 열어준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죽은 것과 같다. 사랑이 다시 살아나는 곳에서 인생도 다시 태어난다. 이 감옥이란 편견, 오해, 치명적인 무지, 의심, 거짓 겸손 등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1880. 7.)-24쪽

크고 작은 고충은 수수께끼같다. 힘들더라도 해답을 찾으려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다. (1881년 11월 10일 - 11일)-35쪽

그림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한 요즘, 작업을 방치해둔 채 감상에 젖거나 낙담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봄에 딸기를 먹는 일도 인생의 일부이긴 하지만, 그건 1년 가운데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하고, 지금은 가야 할 길이 멀다. (1881년 12월 21일)-39 쪽

내가 예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너에게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싶다. 사물의 핵심에 도달하려면 오랫동안 열심히 일해야 한다. 내 목표를 이루는 것 지독하게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내 눈이 너무 높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그림을 그리고 싶으니까. (.....) 그것이 나의 야망이다. 이 야망은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원한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왔고, 열정이 아니라 평온한 느낌에 기반을 두고 있다. (.....) 예술은 끈질긴 작업,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한 작업, 지속적인 관찰을 필요로 한다. '끈질기다'라는 표현은, 일차적으로 쉼없는 노동을 뜻하지만 다른 사람의 말에 휩쓸려 자신의 견해를 포기하지 않는 것도 포함한다. (1882년 7월 21일)-57쪽

화가의 의무는 자연에 몰두하고 온 힘을 다해서 자신의 감정을 작품 속에 쏟아붓는 것이다. 그래야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이 된다. 만일 팔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면 그런 목적에 도달할 수 없다. 그건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행위일 뿐이다. 진정한 예술가는 결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진지하게 작업을 해나가면 언젠까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게 된다. (1882년 7월)-62쪽

노력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고, 절망에서 출발하지 않고도 성공에 이를 수 있다. 실패를 거듭한다 해도, 퇴보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해도, 일이 애초에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돌아간다 해도, 다시 기운을 내고 용기를 내야 한다.
네가 들려준 사람들의 삶이 엄한 규칙에 따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을 멸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문제는 추상적인 생각이 아니라 행동에 있다. 규칙은 지켜졌을 때에만 인정받을 수 있고 가치가 있다. 깊이 생각하고 늘 신중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한 까닭은, 그런 자세가 우리의 에너지를 집중하고 다양한 행동을 하나의 목표로 모아주기 때문이다. 네가 말한 사람들도 자신이 하려는 일에 대해 더 분명한 생각을 가졌더라면 의연하게 일했을 것이다.
(....)
위대한 일은 분명한 의지를 갖고 있을 때 이룰 수 있다. 결코 우연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규칙이 먼저 있고 인간이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인지, 인간의 행동에서 규칙이 추론되는 것인지 하는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처럼 규정할 수도, 또 그럴 필요도 없는 문제인 것 같다. 그러나 사고력과 의지력을 키우려고 노력하는 것은 긍적적이고 중요한 일이라고 본다 . (1882년 10월 22일)-82-83쪽

너는 아직도 네가 평범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다고 했지. 그러면서 너는 왜 네 영혼 속에 있는 최상의 가치를 죽여 없애려는 거냐? 그렇게 한다면, 네가 겁내는 일이 이루어지고 말 것이다. 사람이 왜 평범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그건 세상이 명령하는 대로 오늘은 이것에 따르고 내일은 다른 것에 맞추면서 세상에 결코 반대하지 않고 다수의 의견을 따르기 때문이다. (1883년 12월 17일)-98-99쪽

캔버스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무한하게 비어있는 여백, 우리를 낙심하게 하며 가슴을 찢어놓을 듯 텅 빈 여백을 우리 앞으로 돌려 놓는다. 그것도 영원히! 텅 빈 캔버스 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삶이 우리 앞에 제시하는 여백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삶이 아무리 공허하고 보잘것 없어 보이더라도, 아무리 무의미해 보이더라도, 확신과 힘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어서 쉽게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난관에 맞서고 일을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간단히 말해, 그는 저항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1884년 10월) -106쪽

종교나 정의나 예술이 그렇게 신서할까? 자신의 사랑과 감정을 어떤 이념을 위해 희생시키는 사람보다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 더 거룩한데. 그건 그렇다 치고, 글을 쓰고 싶다면 행동을 하라. 인생에 대해 무언가를 담고 있는 그림을 그리든지.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살아 있어야 한다. 그러니 네 스스로 퇴보하길 바라지 않는 이상 공부는 필요하지 않다. 많이 즐기고 많은 재미를 느껴라.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이 예술에서 요구하는 것은 강렬한 색채와 강한 힘을 가진 살아 있는 어떤 것임을 명심해라. 네 건강을 돌보고 힘을 기르고 강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최고의 공부다.
(........)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거나 전혀 알지 못할 때라도.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약국에서 파는 약보다 더 좋은 약이 될 것이다. 대부분의 일은 저절도 더 이루어지는 것이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발전하게 돼 있다. (1887년 여름~가을)
-141-142쪽

우리는 삶 전체를 볼 수 있을까 아니면 죽을 때까지 삶의 한 귀퉁이밖에 알 수 없는 것일까? 죽어서 묻혀버린 화가들은 그 뒷세대에 자신의 작품으로 말을 건다.
지도에서 도시나 마을을 가리키는 검으 점을 보면 꿈을 꾸게 되는 것처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늘 나를 꿈꾸게 한다. 그럴 때 묻곤 하지. 프랑스 지도 위에 표시된 검은 점에게 가듯 왜 창공에서 반짝이는 저 별에게 갈 수 없는 것일까?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듯,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에 갈 수가 없다.
증기선이나 합승마차, 철도등이 지상의 운송수단이라면 콜레라, 결석, 결핵, 암 등은 천상의 운송수단인지도 모른다.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간다는 것이지.
(1888년 6월)-177~178쪽

이곳에 오면서 겪었던 발작 후에 나는 더 이상 어떤 계획도 세울 수가 없고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다. 건강은 확실히 좋아졌지만 희망이나 무언가를 이루려는 욕망은 완전히 부서져버렸다. 이제는 오직 필요에 의해, 정신적으로 너무 많이 고통받지 않기 위해, 그리고 마음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그림을 그릴 뿐이다. (1888년 7월)-183쪽

화가가 자기 그림에 너무 몰두해서 감정적으로 점점 피폐해지고 가정생활이나 다른 일에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간다고 할 때, 그래서 그가 단지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자기 희생과 자기 부정, 그리고 상처받은 영혼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면,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일 역시 그만큼 힘든 일이다. 너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 화가와 똑같은 방식으로 너 자신을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1888년 7월 25일)-185쪽

요람에 누워있는 아이를 바라보면, 눈 속에 무한이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게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잘 모르겠다'는 이 느낌이 현재의 우리 삶을 단순한 철도여행에 비유할 수 있게 해준다.
기차를 타고 빨리 전진할 때면, 아주 가까이서 지나치는 대상도 분간할 수 없고 무엇보다 기관차 자체를 볼 수 없다. (1888년 8월)
-186-187쪽

나는 늘 두 가지 생각 중 하나에 사로잡혀 있다. 하나는 물질적인 어려움에 대한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색에 대한 탐구다. 색채를 통해서 무언가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서로 보완해주는 두 가지 색을 결합함으로써 연인의 사랑을 보여주는 일, 그 색을 혼합하거나 대조를 이루어서 마음의 신비로운 떨림을 표현하는 일, 얼굴을 어두은 배경에 대비되는 밝은 톤의 광채로 빛나게 해서 어떤 사상을 표현하는 일, 별을 그려서 희망을 표현하는 일, 석양을 통해 어떤 사람의 열정을 표현하는 일, 이런 건 결코 눈속임이라 할 수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걸 표현하는 것이니까.
(1888년 9월 3일)-196쪽

사랑하는 동생아, 너에게 진 빚이 너무 많아서 그걸 모두 갚으려면 (꼭 갚게 되리라고 믿고 있다) 내 전 생애가 그림 그리는 노력으로 일관돼야 하고, 생의 마지막에는 진정으로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건 문제가 아니다. 유일한 문제는 그림 그리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질지도 모른다는 사실, 그리고 늘 이렇게 많이 그리지 못할 거라는 사실이다.
지금 그림이 팔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히는 까닭은, 네가 그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 말처럼 내가 아무런 소득이 없다는 사실이 너에게 폐가 되지 않는다면, 사실 나에게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1888년 10월 24일)-205쪽

신경의 열기 혹은 정신적인 광기 속에서(어떻게 써야 할지, 뭐라 불러야할지 잘 모르겠네) 내 생각은 많은 바다를 항해했네. 네덜란드 유령선의 꿈도 꾸었지. 요람을 흔드는 여인이 선원을 잠에 빠지게 하려고 노래하는 것을 듣기도 했고, 음악을 모르는 문외한인 주제에 베를리오즈의 음악을 색의 배치를 통해 그림으로 표현하려던 모습도 떠올랐고, 어릴 때 들었던 자장가를 듣기도 했다네. (1889년 1월 22일)-213쪽

우리가 용감하다면 고통과 죽음을 완벽하게 받아들임으로써, 그리고 스스로의 의지와 자기애를 깨끗이 포기함으로써 오히려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런 건 나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고, 사람을 만나고 싶고, 그리고 우리 삶을 만드는 모든 것, 네가 원한다면 인공적인 것이라 불러도 좋은 그 모든 것을 접하고 싶다. 그래, 진정한 삶이란 다른 어떤 것일 테지. 그러나 나는 살아가고 고통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사람은 못 되는 것 같다.
붓을 한 번 움직이는 것은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바람에, 태양에, 사람들의 호기심에 노출된 야외에서는 별다른 생각없이 잔뜩 몰두해서 캔버스를 채운다. 그것이 진실된 것, 본질적인 것을 잡아내는 방법이다. 가장 어려운 일이지.
(중략)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작은 성공을 누리고 있지만, 과거에 정신병원 철창을 통해 밭에서 수확하는 사람을 내다보면서 느꼈던 고독과 고통을 그리워하는 나 자신. 그런 불길한 예감이다.
성공하려면, 그리고 계속되는 행운을 즐기려면, 나와는 다른 기질을 타고 나야 할 것 같다.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 소망하고 이루려고 해야 할 일을 나는 이루지 못했고 결코 이룰 수 없을 것이다. (1889년 9월 7일 - 8일)-234쪽

이곳 사람들이 그림에 대해 가지고 있는 다소 미신적인 생각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슬프게 한다. 사실 그 말이 꽤나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화가는 눈에 보이는 것에 너무 빠져 있는 사람이어서, 살아가면서 다른 것을 잘 움켜쥐지 못한다는 말. (1890년 1월)-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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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소녀 카르페디엠 8
벤 마이켈슨 지음, 홍한별 옮김, 박근 그림 / 양철북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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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존중하고, 가지를 꼭 붙들지 않으면, 떨어져 다칠 수 있다. 오래 전이지만, 엄마는 내가 나무를 존중한다는 걸 알았다. 엄마는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가지를 꼭 붙들듯이 네 꿈도 꼭 붙들어라, 가비."
그 때는 너무 어려서 꿈을 잃어버리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느낄 수가 없었다. -10쪽

아빠는 다정하게 웃더니 천천히 이렇게 말했다.
"가비, 넌 마야인이야. 세계는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숨가쁘게 변해 간다. 변화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익히지 않으면 그 안에서 무너져 버릴 거다. 교육을 통해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거야. 널 학교에 보내서 우리 가족도 희망이 생겼다. 앞으로 언젠가는 네가 우리 모두를 가르쳐야 해. 엄마와 아빠한테 그러겠다고 약속하렴."-19쪽

"남자 애한테도 요리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어요?"
내가 물었다. 엄마는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랑은 치마만 입는 게 아니란다. 재료를 섞는 거나 불을 피우는 건 쉬운 일이지. 그렇지만 사랑을 담아 요리를 해야 좋은 음식이 되는 거야."
엄마가 나에게 준 것이 사랑이었다. (....) 매일 하루가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엄마가 나에게 가르쳐 준 교훈은 사랑이었다.
엄마는 다정함도 가르쳐 주었다.
"다정함은 사랑보다 더 소중하단다. 다정하다는 건 사랑을 나눈다는 뜻이야."-28쪽

아빠는 한 단어 한 단어를 신중하게 고르며 천천히 말했다.
"존중과 희망이란 건 싸워서 얻을 가치가 있는 거야."
"그래요. 난 이제 열세 살이니까 조금만 있으면 나가서 싸울 수 있어요."
레스테르가 말했다. 아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싸울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없어. 반군 지도자들 중 상당수는 과테말라 사람도 아니야. 그런 사람들이 너나 나, 조그만 우리 마을 같은 것에 신경이나 쓰겠니? 반군이나 정부군이나 식량과 정보를 얻기 위해 우릴 이용할 뿐이야. 우릴 위해서 싸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39쪽

"에스파냐 어를 안다거나, 다른 것들을 배웠다고 해서 미래를 준비했다고는 할 수 없어. 네 미래는 올바른 질문을 찾아내고 용기 내어 그 질문을 던지면서 찾아 나가는 거다. 좋은 질문은 좋은 대답보다 훨씬 중요한 거야. 그렇지만 질문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지. 가브리엘라, 넌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알겠지. 하지만 왜 사는지도 알겠니?"
마누엘 선생님이 나한테 말하려고 하는 걸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알 수 없었다. -46쪽

나는 나무 사이에서 신뢰를 구한다. 공기처럼 고요히 앉아 있으면, 올빼미나 독수리가 내 몸에 부딪힐 정도로 가깝게 스쳐간다. 나는 한 번도 손을 뻗어 새를 잡으려고 해본 적이 없다. 그렇게 하면 숲의 신뢰를 저버리는 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더 신뢰하고 신뢰받을 수 있는 곳이 절실했다. -48~49쪽

"조용히 해, 아가야! 네 목숨을 구하려고 그러는 거야. 살고 싶으면 날 도와 줘야 돼. 난 네 엄마도 아니고, 세상은 언제나 친절하기만 한 건 아냐."
내 말을 알아들었을 리는 없지만, 아기는 딸꾹질을 하더니 울음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아기를 보면서, 군인들도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이렇게 작고 연약하고 순진무구한 존재였을까, 정말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무엇이 인간을 그렇게 타락하게 만들었을까?
나는 아기를 가슴에 안고 천천히 흔들면서 엄마가 불러 주던 노래를 불렀다. -108쪽

사람들은 대부분 패쇄적으로 지냈다. 옆에 있는 사람을 믿지 않았고 금방 헤어질 사람과 사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각각 기억, 분노, 회한으로 이루어진 작은 세계 안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난민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회피하려 했다. -153쪽

"공 한 개 구해 주실 수 있어요?"
미국인 구호 요원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여기가 놀이터니? 여긴 난민 수용소잖아."
"아이들은 다시 행복해지는 법을 배워야 돼요."
구호요원이 화를 내지 않을까 겁이 났지만 나는 계속 매달렸다.
"행복해지려면 놀이가 필요해요. 놀기 위해서 제대로 된 공이 필요하고요."
"수용소에 필요한 건 의약품과 식량이야."
요원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이 약이에요. 아이들을 다시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약이오."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169쪽

사람들은 밤마다 미국으로 탈출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토론은 늘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해서 사실을 일깨워 주며 끝이 났다.
"불법이고 위험해요. 무엇보다 돈이 있어야 하고."
내 생각에, 살아가는 건 이미 언제나 위험했다. 난민 수용소에서 돈을 버는 건 불가능했다. (....) 그리고 희망을 구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희망은 쌀이나 콩처럼 트럭 뒤에서 나눠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73쪽

어느 날 밤 나는 마리오에게 물었다.
"전쟁이 언제 끝날 거라고 생각하세요?"
"어떤 전쟁?"
마리오가 되물었다.
"군대와 반군이 벌이는 이 전쟁말고 다른 전쟁이 또 있어요?"
마리오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여러 전쟁 가운데 하나일 뿐이야. 네 경우에는, 여자라는 것도 평생 치러야 할 전쟁이야. 그리고 우리 둘 다, 인디오이기 때문에 군인들이 등장하기 전부터 전쟁을 해왔다고 할 수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나는 그 전부터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
"우리가 싸워야 할 적, 치러야 할 전쟁은 한둘이 아니야."
마리오가 말했다. -177쪽

"지금으로선 여기가 우리 집이고, 몇 년을 더 있어야 할지 모르잖아요. 아이들은 교육을 받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인디오라는 걸 평생 수치로 여겨야 할 거예요."
마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긍지와 자부심을 배우지 못하면 아이들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말거야."
그 순간 나는 마리오 살바도르가 훌륭한 선생님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훌륭한 선생님은 자기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라 어린 여자 애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는 이유로 그 생각을 무시하지 않는 사람이다. 좋은 선생님은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인다. 마누엘 선생님이 그랬듯이. -180쪽

"나무소녀는, 아주 특별해. 겁쟁이가 아니야.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스스로를 나무라지 않아. 나무소녀는 높이 올라가면 떨어질 수 있다는 걸 알지. 그렇지만 올라가면 새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알아. 아주 강하기 때문에 삶에서 좋은 것을 누리기 위해서 나쁜 일을 겪어야 할지라도 그걸 피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어. 희망을 찾기 위해 어떤 고통에도 굳세게 맞서지. 삶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찾기 위해 추한 것들을 만날 위험도 무릅쓰고. 나무소녀는 다른 사람들은 무서워서 감히 덤비지 못할 때에도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어."
알리시아는 가지 위에 말없이 앉아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나무소녀는 아주 특별한 존재야. 그렇지만 무서운 것이 있다고 그걸 피해 달아나면 나무소녀가 될 수 없어. 너를 겁에 질리게 하는 것에 당당히 맞서야 나무소녀가 될 수 있어. 그러려먼 먼저 말을 해야 해."
알리시아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언니도 나무소녀냐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195~197쪽

"더 높이 올라가면 안 돼?"
알리시아가 물었다. 들릴락 말락,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숨이 턱 막혔다. 내 동생의 목소리에, 온 세상이 순간 정지한 것 같았다. 나는 나뭇가지 위에서 몸을 돌려 알리시아를 숨이 막힐 정도로 꼬옥 끌어안았다. 알리시아의 목소리 뒤에 이어진 평화로운 침묵 속에서, 나는 알리시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래, 더 높이 올라가자. 나무에 오르면, 하늘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어."-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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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구판절판


의심을 인생철학으로 선택하는 것은, 운송수단으로 '정지'를 선택하는 것과 비슷하다. -45쪽

신은 '궁극적인 실체'이자 존재를 떠받치는 틀이건만, 마치 신의 힘이 약해서 자기가 도와야 된다는 듯 나서서 옹호하는 자들이 있게 마련이다. (중략)
이런 자들은 겉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신을 옹호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분노의 방향을 자신에게 돌려야 한다는 것 모른다. 바깥의 악은 내면에서 풀려나간 악인 것을...... 선을 위한 싸움터는 공개적인 싸움장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에 있는 작은 공터인 것을.... 과부와 집 없는 아이들의 운명은 너무 힘들다. 그러니 독선적인 자들이 편들어주러 달려갈 곳은 신이 아니라 그런 이들인 것이다. -96쪽

사람들은 조바심에 시달려 이주한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아무것도 못 얻을 거라는 불안감이 야금야금 파고들어서. 일 년 걸려 쌓은 것이 남의 손에 하루 만에 무너지리라는 불안감 때문에. 장래가 꽉 막힌 것 같아서. 본인은 괜찮지만 자녀들은 그렇게 살면 안되겠기에.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느낌 때문에. 행복과 번영을 다른 곳에서만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107쪽

그는 수줍은 사람이다. 그는 살면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자랑하면 안된다는 것을 배웠다. -109쪽

어떤 이들은 한숨지으며 생명을 포기한다. 또 어떤 이들은 약간 싸우다가 희망을 놓아버린다. 그래도 어떤 이들은 - 나도 거기 속한다 -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운다. 어떤 대가를 치르든 싸우고, 빼앗기며, 성공의 불확실성도 받아들인다. 우리는 끝까지 싸운다. 그것은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놓아버리지 않는 것은 타고난 것이다. 그것은 생에 대한 허기로 뭉쳐진 아둔함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188쪽

근본을 흔드는 공포, 생명의 끝에 다가서서 느끼는 진짜 공포는 욕창처럼 기억에 둥지를 튼다. 그것은 모든 것을 썩게 한다. 그것에 대한 말까지도 썩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힘껏 싸워야 한다. 거기에 말의 빛이 비추도록 열심히 싸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피하려 하고 심지어 잊으려 하는 고요한 어둠으로 다가오면 우리는 더 심한 공포의 공격에 노출된다. 우리를 패배시킨 적과 진정으로 싸우지 않았으므로. -204쪽

내가 겪는 고통이 있는 모습 그대로 보였다. 유한하고 미미했다. 그리고 난 아직 존재했다. 괜찮았다. (저항심이 일어나는 것은 한낮이었다. "안돼! 안돼! 아니야! 내 고통이 중요해. 난 살고 싶어! 내 인생을 우주와 섞어 생각할 수밖에 없어. 삶은 엿보는 구멍이야. 광활함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입구란 말이야. 사물에 대해 갖고 있는 이 순간의 복잡한 시각을 품고 살 수밖에 없잖아? 이 작은 구멍이 내가 가진 전부인데 어쩌겠어!")-222쪽

신을 믿는 것은 마음을 여는 것이고, 마음을 풀어 놓는 것이고, 깊은 신뢰를 갖는 것이고, 자유로운 사랑의 행위이다. 하지만 때로는 사랑하기가 너무도 힘들었다. 때로는 내 마음이 분노와 절망과 약함으로 급속히 가라앉아서 태평양 바닥에 처박힐 것 같았다. 거기서 다시 올라오지 못할까 두려웠다.
(중략)
절망은 빛이 드나들지 못하게 하는 무거운 어둠이었다. 그것은 이루 표현 못 할 지옥이었다. 그것이 늘 지나가게 해주시니 신께 감사하다. (중략) 어둠이 휘휘 젓다가 결국 물러갔고, 그 때마다 신은 내 마음에 환한 빛으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계속 사랑하면 됐고. -260쪽

구명보트에서의 삶은 생활이라고 할 게 없다. 그것은 몇 개 되지 않는 말을 가지고 하는 체스 게임의 마지막 판과 같다. 구성요소는 더할 수 없이 간단하고, 판돈도 크지 않다. 생활은 육체적으로 너무나 힘들고, 정신적으로 죽어간다. 살아나고 싶다면 적응해야 한다. 많은 것이 소모된다. 가능한 곳에서 행복을 얻어야 한다. 지옥의 밑바닥에 떨어져서도 팔짱을 끼고 미소를 지어야 한다. 그러면 지상에서 가장 복 받은 사람이 된 기분이 된다. 왜일까?-270쪽

상황이 좋을 때는 기분이 처지고, 상황이 나쁠 때는 기운을 낸다. 나 같은 처지가 되면, 당신 역시 기운을 낼 것이다. 상황이 나쁠수록 정신은 위로 오르고 싶어하는 법이니까. 그건 자연스런 현상이다. 끊임없는 고난 속에서 슬프고 절망적일 때, 신께로 마음을 돌려야 했다. -352쪽

인생에서 일을 알맞게 마무리 짓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야만 놓아버릴 수 있으니까. 그러지 못하면 우리는 꼭 해야 했지만 하지 못한 말을 남기게 되고, 후회로 마음이 무거워진다. 작별인사를 망친 일이 오늘날까지도 마음에 상처로 남아 있다. -354쪽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죠. 안그래요? 그리고 뭔가를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뭔가를 갖다 붙이지요. 아닌가요? 그게 인생을 이야기로 만드는 게 아닌가요?-3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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