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상한 소설이었다.

소설집이라 적어놓고는 하나의 이야기를 이어 적어가고 있었다. 정말은 연작이나 소설집이라 할 것이 아니라 '장편 소설'이라고 했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다. 이야기 속에 셋 혹은 그 이상의 이야기가 제각각 이어지니 나름의 소설이라고, 별개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을지 모른다. 아무렴 어떨까? 하나의 이야기로 되어있든 여러 개로 나뉘어 있든 놀라운 이야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것을.


 최근 광고인 박웅현 씨의 저서인 <여덟 단어>가 100쇄 기념 양장본을 출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00쇄, 대단한 기록이다. 그러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비할 바는 못된다. 이 작품은 순전히 작품성과 작가의 이름만으로 200쇄가 넘는 중쇄를 거쳤으며, 100만 부가 넘게 팔렸고, 여전히 팔리고 있다고 한다. 이 작품이 4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그 생명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 까닭을 설명하려면 이 소설이 담고 있는 내용을 드러내야만 한다. 그런데 그 까닭이란 것이 몹시 애달픈 것이라 차라리 이제는 그 생명이 끊어졌으면 싶기도 하다. 

 대단히 복잡해 보이는 이 까닭은 의외로 한마디로 바꾸어 적을 수도 있다. 이렇게 말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무엇하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난장이 가족'의 이야기다. 가족 모두가 난장이인 것은 아니다. 아버지만이 난장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난장이이기 때문에 가족 모두가 난장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된다. 다름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들은 난장이 그 자체다. 적어도 이 세계에서 그들은 모두 난장이다. 

 소설 속 난장이는 물론 키가 작다. 그러나 '난장이'는 단순히 키가 작은 것이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약자'를 의미한다고 봐야 한다. 사회적, 경제적으로 약한 자들이 겪어야만 했던 고난과 불행이 이 소설에는 담겨있다.


 이야기는 수학 선생님의 '뫼비우스의 띠' 이야기로 시작된다. 뫼비우스의 띠란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야기 속 난장이와 그 가족들, 동료들의 고난에는 끝이 없다. 누가 잘했거나 잘못해서가 아닌 거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굴뚝 청소를 하고 내려온 두 아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 아이는 얼굴이 깨끗하게 내려왔고, 다른 아이는 얼굴이 새까매져서 내려왔다. 선생님은 묻는다. 얼굴이 깨끗한 아이와 얼굴이 더러운 아이 가운데 어느 아이가 얼굴을 씼으러 가겠느냐고 말이다. 

 아이들은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한다. 

선생님이 일깨워준다. 얼굴이 깨끗한 아이가 얼굴이 더러운 아이를 보고, 자신도 그렇게 얼굴이 더러울 줄 알고 씻으러 갈 것이라고 말이다. 

 아이들은 질문이 끝난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다시 묻는다. 두 아이가 굴뚝청소를 하고 내려왔는데 한 아이는 얼굴이 깨끗하게 내려왔고, 다른 아이는 얼굴이 새까매져서 내려왔다. 어느 쪽 아이가 얼굴을 씻으러 가겠느냐고 말이다. 아이들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얼굴이 깨끗한 아이가 씻으러 갈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이번에도 선생님은 아니라고 한다. 둘이 같이 굴뚝을 청소하러 갔다면 애초에 한 아이만 얼굴이 깨끗하게 내려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처음부터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말이다. 


 약자로서 온갖 고난에 시달리는 난장이와 그 가족들, 동료들은 어떤 도움도 보호도 받지 못한 채 하루하루 약해져 간다. 그러나 그들을 부리는 자들은 나날이 부유해져 간다. 그러나 그 부유함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부당한 것은 아닌지에 대한 반성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 부를 소유하는 것과 누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된다. 정당한 노력의 대가로 얻은 것이 된다. 덜 주고, 더 부려 생겨난 이득을 자기 멋대로 다른 사람들과 세상을 위해 쓰겠다며 생색을 내기도 한다. 반항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은 그나마 그 자리에서 쫓겨나 길로 내몰린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그러나 그들을 돌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하기에 돌볼 수 없으며, 부유한 자들은 그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담긴 이야기들의 단편이다. 지금 이 시대, 21세기, 첨단의 시대에는 더 이상 난장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1%와 99%의 벽은 허물어졌는가? 오히려 0.1%와 99.9%로 그 벽이 높아지지는 않았는가?


 이야기 속 난장이 가족의 비극은 난장이로 태어났음에도 거인들의 삶을 살고자 했다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지내다가 기회가 오면 그 기회를 붙들고 놓지 말았어야 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난장이였다. 거인의 삶을 살아낼 수 없는 존재였다. 거인은 난장이를 착취하는 존재들이었다. 허기가 지면 난장이를 집어삼키는 존재들이었다. 거인들은 난장이들 가운데 몇몇에게 거인의 탈을 씌워주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이 난장이라는 것을 잊고 거인처럼 굴었다. 난장이를 속이고 착취했으며 집어삼켰다. 그들은 그들이 거인이 되었다고 믿었다. 

 

 이 책이 처음 나올 때도 그랬고 지금도 변함없이 거인들은 난장이의 100배, 1000배를 먹으면서도 허기져한다. 아끼고 아껴둔 마지막 한 조각의 빵까지 빼앗으려 한다. 배움의 기회를 빼앗아, 지식과 지혜를 차단한다. 모임이란 모임은 모두 불법으로 간주해 해산시키거나 잡아 가둔다. 그것도 아니면 낙인을 찍어 사람들이 멀리 하게 만든다. 모든 힘이 거인의 손에서 나왔고 모든 것이 거인의 손으로 들어갔다. 발전된 것은 경제와 산업이 아니라 착취의 수단인 것 같다. 이제는 어디에 가서 호소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면 구제받을 수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여기서는 저기로 가라 하고, 저기서는 여기로 가라 하는 무한히 반복되는 세계에 갇힌 탓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제목은 몹시도 아기자기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 아기자기함이 비극적이 분위기를 더 두드러지게 한다. 감상을 적기 시작하기 전부터 횡설수설하게 될 것을 예감했다. 그리고 적중하고 말았다. 더 어수선해지기 전에 얼버무리듯 보이더라도 여기서 마쳐야겠다. 

 

 이야기의 말미에 선생님은 사람들이 모르는 혹성으로 우주여행을 떠나기로 했다고 말한다. 내게는 그 말이 지구를 떠나기 전에는 이 절망이 그치지 않을 것 같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세계 어디를 봐도 다르지 않다. 난장이만의 세계 속에서는 그 가운데 조금 큰 난장이가 왕 노릇을 하려 할 것이 분명하다. 무언가 다른, 전혀 색다른 어떤 계기 혹은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계기란 간단히 발견되지 않을 것이고, 변화 역시 요원한 일이다. 앞으로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300쇄, 400쇄를 거듭할 것이고, 그 사이에 무수한 난장이가 쓰러져 한 줌도 되지 않는 재가되어 흩어질 것이다. 


 아, 나를 데리러 우주인이 왔다. 나는 이제 여러분이 모르는 혹성으로 우주여행을 떠날 것이다. 그 혹성에서 다시 만날 그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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