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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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라는 존재는 어느 순간에 글을 그만 써야겠다고 마음먹게 되는 것일까? 

<네메시스>는 절필을 선언한 필립 로스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작가라는 존재의 속성 상 어느 날 갑자기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 또 다른 마지막 작품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앎과 사고에는 명백한 한계가 존재한다. 알 수 있는 것도, 볼 수 있는 것도,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지극히 제한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인간은 신을 만들어냈는지도 모른다. 절대적이며 모든 것을 헤아릴 수 있는 완벽한 존재를 말이다. 제목의 네메시스 역시 신 가운데 하나다. 


 지금까지는 네메시스를 단순히 복수의 여신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네메시스의 진정한 속성은 복수가 아닌 균형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물론 이 균형이란 것 또한 인간적인 의미와 개념의 균형은 아닌 것 같다. 왜 선한 자에게 불행이 그치지 않으며, 악한 자들에게 안락한 삶이 주어지는가 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물음에 답할 수 있겠는가? 인간에게 있어 행복과 불행은 어디까지나 '우연의 결과물'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불행과 불운으로 근심하기 시작한다면 불행을 하나 더 늘리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이야기는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던 1944년 미국의 한 도시다. 유난히 뜨거운 여름이었다. 주요 인물인 버키는 유진 캔터라는 이름의 체육 교사다. 그는 전쟁에 참전할 수 있기를 바랐다. 자신과 가장 친한 두 명의 친구처럼 말이다. 비록 키는 크지 않았지만 그의 신체는 완벽에 가깝게 단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력이 너무 나빠 군대에 갈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실망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한다. 체육교사인 그는 아이들의 방학 기간 동안 놀이터의 관리자로 일하게 된다. 아이들에게 그는 우상과 같은 존재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인근 마을에서 기승을 부리던 폴리오(소아마비)가 버키가 놀이터 관리자로 일하고 있는 마을을 덮쳐온다. 그리고 그가 사랑했으며 그를 존경하며 따르던 정말 우수한 아이와 너무나 착했던 아이가 폴리오로 갑작스럽게 목숨을 잃는다. 사람들은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 역시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나 두려움에 집어삼켜지기 않기 위해, 혼란의 강도를 키우지 않기 위해 놀이터에서의 놀이는 계속되었고, 그 이상의 확산을 막기 위해 나름의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마치 신은 버키의 최선을 비웃듯이 폴리오의 희생자들을 늘려간다. 어느 밤에는 하룻밤 사이에 열 명이 넘는 환자가 생기기도 한다. 그리고 그 환자 가운데에는 버키가 아끼고 사랑했으며 지키고자 했던 아이들이 꼭 한두 명씩 포함되어 있었다. 버키는 계속해서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쳐간다. 그러던 버키에게 그의 약혼녀가 자신이 있는 곳으로 와서 일할 것을 권한다. 버키는 갈등하지만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제안을 수락하고 자신이 사랑했던 아이들을 버리고 자신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 도망치듯 자리를 옮겨버린다. 그는 스스로가 위선자라고 생각한다. 거의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죄책감을 갖고 평생을 살아간다. 어쩌면 그것은 그 나름의 속죄였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결국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란 것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네메시스가 균형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균형이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신적인 것이라면 이야기 속의 희생의 제물이 누가 되었건 인간이 설명하거나 납득할 필요는 없어진다. 그저 받아들이고 극복해나가거나 쓰러지면 되는 것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 그토록 단순하기만 한 것일까? 버키는 신에게 분노를 표하기도 한다. 왜 그토록 사랑스럽고 착한 아이들의 목숨을 빼앗고, 재능 넘치는 아이들의 재능을 못쓰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느냐고 원망한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도 언급하는 것처럼 '반드시' 그 아이들이었어야 할 필연성은 어디에도 없다. 우연히 그 아이였을 뿐이었다. 그 아이가 재능이 있는지, 뛰어난지, 착한지 여부는 불행과 거의 무관하다. 흔히 권선징악이라 말하고, 사필귀정이라 말하지만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해도 언제쯤 그런 '심판'이 내려지는지는 알지 못한다. 우리가 보는 보편적인 현상을 기준으로 생각해보자. 정말 권선징악과 사필귀정이 세계의 법칙이라고 생각하는가? 오히려 그런 것은 거의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가? 그럼에도 버키, 우리의 캔터 선생은 그렇게 간단히 타협하지 않는다. 그는 그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거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것이다. 


 신이 내리는 재앙과 시련 앞에 인간은 한 없이 작고 무력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인간은 자기의 만족을 먹고사는 존재다. 신의 응답을 확인하는 것도 멋지지만 자기만의 진리를 추구하는 삶 또한 아름답게 느껴진다. 미련스럽고 고집스러운 존재들이 남기는 어떤 유산들이 종종 오랜 시간 사랑받게 되는 이유가 거기 있지 않을까?


 한 가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고 해석이니 받아들이지 않아도 괜찮다.

이야기 속에서 폴리오의 희생자가 되는 아이들이 모두 버키, 즉 캔터 선생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의 '반드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버키가 유난히 사랑스럽다고 생각하고, 버키를 사랑하고 존경한 아이들 모두가 희생자가 됐다. 버키를 '우상'처럼 여긴 아이들이 그 주요 희생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떠오른 배경이다. 버키는 유대인이다. 버키가 포함된 사회도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아이들도 거의 대부분이 유대인이다. 유대인에게는 유일무이한 신이 있다. 그리고 그 신은 우상을 섬기는 것을 금하고 있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에게 내려지는 형벌은 언제나 가혹하고 무시무시해서 겁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죽음이기도 하고, 질병이기도 하며, 박해일 수도 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이 모든 것이 등장한다. 죽음도, 질병도, 박해도 말이다. 가장 뛰어난 아이들조차 자신의 선생을 우상처럼 여기고 따른 것으로 벌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지나친 것일까?

 그렇다. 이것은 분명 지나친 생각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거의 모든 것은 우연이다. 불행도, 행복도, 갑작스러운 사고나 질병조차도 말이다. 

 

 평생 담배를 피워온 흡연자는 90살 100살까지 살지만 한 번도 담배를 피워보지 않은 그의 부인은 이른 나이에 폐암으로 사망했다고 해보자. 이 결과를 두고 역시 간접흡연이 더 위험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학적인 설명 가운데 하나이며, '가능성'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건강을 위해 담배를 멀리 한 사람이 폐암에 덜 걸리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신의 의지, 뜻과 같은 것으로는 이러한 '불합리'를 설명하지 못한다. 착한 사람에게 거듭되는 불행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 책은 사실 그렇게 흥미진진하지도, 유쾌하지도, 의미심장하게 읽히지도 않았다. 거의 마지막 부분을 읽을 때까지 최대의 궁금증이란 게 고작 "이 소설은 도대체 시점이 어떻게 되어 먹은 거야?"하는 것이었을 정도다.

 '버키'였다가, '캔터 선생님'이었다가, '나'였다가 하다 보니 시점을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웠던 탓이다. 물론 이 시점에 대한 비밀은 마지막 장에서 풀린다. 정말 그 한 줄에 거의 모든 혼란이 정리가 되었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깔끔하게 말이다. 


 신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결국 이 소설 속 이야기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2차 세계대전의 혼란과 나치의 유대인 학살, 미국 내의 유대인 차별과 같은 사회적인 논란들을 들추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간의 믿음과 두려움에 대해서도 이야기 싶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이 작품은 지나치게 미국적이다"는 것이었다. 필립 로스가 노벨상을 번번이 놓치는 이유 역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뭐, 이것 역시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다. 그러나 어쩐지 필립 로스는 노벨상을 받지 못하고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은 확신에 가까운 예감으로 떠올라 버렸다. 이렇게 적었는데 다음 해에 필립 로스가 노벨상을 받아도 전혀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할 거다. 왜냐하면 그것 역시 '우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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