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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리영희 평전을 읽는 것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읽는 것에 다름 아니다. 책을 읽다보면 한 나라의 운명이 개인의 운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리영희 선생에게는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군부체제를 거쳐 소위 문민정부라는 김영삼, 노태우,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까지가 그가 거친 체제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아홉 번 연행당하고, 다섯 번 구치소에 가고, 세 번 재판을 받아 총 1012일의 감옥생활을 하고, 언론계에서 두 번 퇴직당하고, 교수직에서 두 번 해직 당’했다.
감옥살이를 하거나 퇴직, 해직을 당한 이유는 대부분 그가 쓴 글 때문이었고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읽은 그의 책 때문이었다. 전 노무현 대통령이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된 ‘부림사건’에도 리영희의 책이 들어있었다. 전두환 세력이 저항세력을 뿌리 뽑기 위해 학생운동을 정리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엮어 넣은 부림사건은 ‘사건’ 없는 ‘사건’으로 알려져 있는데, 연루된 사람들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비롯해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같은 책을 읽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사람들이 모여 책을 읽은 것이 문제된 것이다. 이외에도 『분단을 넘어서』, 『베트남 전쟁』『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등 지배자의 논리로 보았을 때 ‘의식화의 원흉’으로 불릴 만한 많은 저작과 편역서가 있다. 그가 과연 '의식화의 원흉'이었는지, '사상의 은사'였는지는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
시대를 꿰뚫어보는 그의 이런 저작들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는 ‘노다지’라는 말이 생겨난 운산광산이 있는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났다. 노다지는 no touch에서 유래된 말이다. 다섯 살 때부터는 삭주군에서 자라게 되는데 그는 이미 유치원 때 한글과 일본어 기초를 다 깨쳤다고 한다. 서울로 유학해 경성공립학교, 해양대학을 나와 유엔군 연락장교로 군에 입대한다. 그는 통역장교로 전쟁이 끝난 후까지 7년 동안 군에 근무한다. ‘혐오스러운 국군 복무의 한 가지 선물’로 받은 영어실력으로 제대 후 그는 합동통신의 외신부기자를 시작으로 언론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기자라는 직업은 특히 정치부나 외신부 기자들은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시대였다. 하지만 그는 결혼 후 40년이 되어서야 온수가 나오는 집으로 처음 이사를 할만큼 궁핍했고 고정적으로 두 개 이상의 부업을 하면서 그 생활을 감내했다. 국군연합참모부의 ‘일일국제정세 분석보고’도 그 부업 중의 하나였다. 그러니까 리영희는 한글, 일본어,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실력에다가 세계정세를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부업과 외신부기자를 겸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는 3·15 부정선거, 4· 19혁명, 5·16 쿠데타 등을 겪으면서 워싱턴포스터지, 뉴리퍼블릭지 등에 원고를 기고하여 한국의 실정을 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한다. 기자로 재직하는 동안 그는 특종 ‘사고’ 메이커였다. 또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알리고 참상을 고발하는가 하면 주한 미국감축에 관한 글, 중국 근대화 100년사 탐구, 친일 군상과 일본교과서 왜곡의 본질 등에 관해 정연한 논리를 폈다. 그런가 하면 한겨레신문을 창간하고 극우, 반공세력이 자신들의 영구집권을 위해 부당하게 과장하여 공포와 불안을 조성하자 그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남북한 전쟁능력 비교연구’라는 시론을 발표했다. 정리해보면 폭력과 권력에 맞서 그가 무기로 들고 있었던 것은 오직 붓 하나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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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 쓰는 정신이랄까, 마음가짐이랄까 하는 것은 바로 루쉰의 그것이에요. 글 쓰는 기법, 문장의 아름다움, 속에서 타는 분노를 억누르면서 때로는 정공법으로, 때로는 비유·은유·풍자· 해학·익살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세련된 문장작법을 그에게서 많이 배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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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을 글쓰기의 은사로 삼았다는 그의 생활신조는 Simple Life, High Thinking이다. 자신의 신념과 어긋남이 없이 일생을 살았다는 것을 이 평전은 말해주고 있다. 고은 시인은 리영희 선생의 회갑 기념 문집에
사상의 은사
시대의 선구자
60년대 70년대 80년대 대표적 지성
아 이 한반도의 살아있는 정신
불
얼음
우리들의 전위와 후방
이라고 썼다. 나는 고은 시인 특유의 오버 액션이 못마땅한 사람 중의 하나다. 때문에 이 평전을 읽지 않았다면 저 말도 오버라고 치부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이런 기우와는 달리 시인은 리영희 선생의 삶을 꿰뚫고 있었다.
600여 쪽에 달하는 분량이지만 글은 의외로 잘 읽혔다. 평전을 쓴 작가의 글보다 리영희 선생의 저작을 인용한 글의 부피가 더 많았기 때문이었을까? 작가가 리영희 선생의 평전을 쓰는 것이 아니라 리영희 선생이 작가를 끌고 가고 있는 느낌이 들정도로 인용이 많다. 어려운 이론에 기대지 않고 철저하게 현실에 바탕을 둔 논리적인 글쓰기 때문이었을까? 무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으면서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리영희 선생의 다른 저작들도 찾아 읽어야겠다는 각오를 다시 하게 된다.
사족 : 오탈자.
* 374쪽 : 리영희가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것은 한국 정치 즉 정권 담당자를 저들의 이익에 맡은 자(맞는 자)를 ‘간택’했다는 데 있었다.
* 417쪽 : 그 사이에 한국에서는 정태기, 임재경, 임병주(이병주) 등이 해직기자들을....
* 422쪽 : 그 군대가 광주에서 감행한 학살과 여러 해를 듣고(두고) 자행한 수많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