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개
이언 매큐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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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러미는 8살 때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고아로 평생 다른 사람의 부모에 집착하며 살아왔다. 결혼 후에는 당연히도 그 대상이 장인, 장모였는데, 제러미는 격동의 유럽사와 포개어진 그들의 기이한 결혼 생활에 강렬한 매혹을 느껴 그들의 회고록을 쓰기로 결심한다.


한때는 모두 공산주의에 심취했던 준과 버나드. 같은 신념과 애정으로 이어진 부부는 신혼여행에서 맞닥뜨린 기묘한 사건으로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준은 '그 사건' 이후 공산단을 나와 영적 세계를 탐구하는 은둔자가 됐다. 버나드는 소련의 헝가리 침공 때 탈당하지만 현실 세계를 변혁할 수 있는 건 날카로운 이성과 합리적 판단, 그리고 실천이라는 믿음에 계속 정치계에 투신, 나중에는 노동당 의원을 지내게 된다.


두 사람의 삶은 인간이 난관을 만났을 때 취할 수 있는 양극단을 대표한다. 고통은 구체적 현실이 낳는 물리적 실체일까 아니면 그저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일까? 전자라면 끊임없는 행동을 통해 현실의 조건을 개설하는 것만이 답이다. 하지만 후자라면 '실천' 따위 말만 번지르르한 껍데기일 뿐 그저 물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헛짓에 불과하다.


준은 날카로운 이성과 과학적 사고로 무장한 그 잘나빠진 공산주의가 세상을 끝없는 나락으로 몰아넣는 것을 보고도 여전히 이성에서 답을 찾으려는 버나드를 이해하지 못한다. 버나드는 준이야말로 오히려 배신자라고 비난한다. 버나드는 준이 신혼여행에서 겪은 '그 사건'을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으로 여길뿐이다. 이성적 판단이 부족한, 임신한 탓에 신경이 곤두선 '감성적인' 여자의 마음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두 사람의 미래는 이미 그날 정해졌다. 그럼에도 준과 버나드는 평생 이혼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같이 사는 것도 아닌 이상한 결혼 생활을 이어간다. 이는 매일 고된 훈련으로 단련된 운동선수가 결정적 순간에 이르러 신께 기도를 올리는 인간의 모순을 상징하는 것 같다. 우리는 준과 버나드처럼 어느 한쪽에 완전히 투신하지 못한 채 비틀비틀 둘 사이를 오간다.


강력한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여기서 '그 사건'을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이 '검은 개'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개는 나치가 점령지 주민을 감시하고 고문하기 위해 훈련한 개라는 것만 말해두자. 나는 준이 경험한 그 압도적 공포가 실제라고 믿는다. 그것은 결코 버나드가 폄하할 수 없는 절대 악의 현현이었다. 하지만 이후 그녀가 취한 삶의 태도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그 압도적 공포에서 탈출하기 위해 그녀가 손에 들었던 것은 무엇인가? 준이 그 개에게 남긴 표식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후 그녀가 정신에 몰입함으로써 '그 사건'이 남긴 트라우마를 치유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만약에, 만약에 준이 다시 한번 그 개를 맞닥뜨린다면 그녀는 어떤 행동을 취할까? 오랜 시간 은둔자로 살아가며 수행한 정신이 그 앞에서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이언 매큐언이 실수를 하지는 않았을 테니 아마 내가 준이 취한 삶의 본질을 오해하는 걸지도 모른다. 버나드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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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 경제학
도모노 노리오 지음, 이명희 옮김 / 지형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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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 경제학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내가 사람의 행동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싶어 하는 구제불능의 소시오패스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건 48.6% 맞는 말이고, 사실 예전부터 비주류 학문의 혁신 이론들에 크게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남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통념에 알 수 없는 부아가 치밀어 깽판을 치고 싶은 청개구리의 마음이랄까. 아무튼 너무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당연하게 생각할수록 그것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바쳐왔던 기억이다.


물론 괴벽에 따른 선호기는 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도 이 분야에 한번 발을 디디면 서서히 스며들어 결국 헤어 나올 수 없는 매력을 지닌 게 바로 행동 경제학이다. 모두가 Yes라고 할 때 큰 소리로 No를 외치는 과감한 판단은 과연 세상의 이치를 꿰뚫는 놀라운 이성의 발현일까 아니면 그냥 비뚤어진 심리의 발현일까?


언뜻 행동 경제학의 실험 결과들은 항상 최적의 판단을 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수를 하면서 배워나가는 게 인생의 기본인데, 실험실에서 저지른 작은 실수 하나로 인간의 본성을 매도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 이는 행동 경제학이 세상에 나온 지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행 중인 논쟁이다.


이 학문의 치명적인 단점은 몇 개의 공리로부터 쌓아 올린 단일 이론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컨대 전통 경제학은 모든 경제 주체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다는 대명제를 통해 그들의 행동을 예측한다. 생산비용과 이익이 주어진다면 경영자는 몇 명을 고용해 몇 개를 생산할지 계산할 수 있다. 현대 경제학은, 특히 금융의 경우 아예 로켓을 개발하던 물리학자들이 대거 투입되어 오로지 수치와 공식이 정의하는 학문이 됐다. 행동 경제학에도 원리가 있지만 이는 상황별로 정의된다. 이럴 때는 이렇게 행동하고 저럴 때는 저렇게 행동한다는 걸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기술한다는 말이다. 게다가 그 결론은 구체적인 공식으로 정리하지도 못한다. 예컨대 인간은 자기 자본의 30%를 잃게 되는 상황에서 그 손해를 만회할 수 있지만 오히려 더 크게 만들 수도 있는 리스크를 취할 확률이 46.24% 증가한다 와 같은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행동 경제학을 읽고 나면 곁가지만 만지다 끝난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재미있는 얘기는 참 많이 들었는데,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거다. 그래서 나는 책에서 소개한 상황들을 내 인생과 직업 생활에서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들과 1:1로 대응시킨 뒤 각각 어떤 행동을 취해야 가장 이득이 되는지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사람들이 손실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리스크를 취하고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상황에선 이득이 줄더라도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선택을 한다면 이를 이용해 내 서비스의 팝업 문구는 어떻게 적어야 할까?라는 질문을 적고 다양한 해결책을 궁리해보는 것이다.


문구 하나 바꾸는 걸로 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오겠느냐 의심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사실 거의 전부다) 몇 번의 실험을 통해 충분히 의미가 있음을 데이터로 확인한 바 있다. 그러니 혹시 비슷한 상황에 있다면 용기를 갖고 끝까지 진행해보기 바란다. 사람들이 다 안된다고 하는 걸 끝까지 추구해 뒤통수를 치는 것만큼 통쾌한 일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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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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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암살 조직을 다룬 이야기가 내 기억으로는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소지섭이 주연한 영화 <회사원>이고 하나는 김언수 작가의 <설계자들>이다. 둘 다 좋은 기억이 있다. <회사원>은 중반부터 흐르는 로맨스에 결론이 뻔해지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도심 한복판에 버젓이 차려 놓은 청부살인 업체의 존재, 그리고 평범하게 출근해서 평범하게 사람을 죽이는 회사원들의 모습에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무엇인지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고, 아무튼 꽤 신선했다. <설계자들>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세세한 줄거리가 기억나지 않는 걸로 봐선 엄청난 충격까지는 아니었나 보다. 사실 김언수 작가는 <뜨거운 피> 아니겠습니까? 여담이지만 <뜨거운 피>가 아직이라면 당장 가서 읽어보기 바란다. 천명관의 <고래>와 더불어 이야기의 재미로는 따라올 작품이 없으니까.


그리고 나는 구병모의 <파과>에 이르렀다. 암살 이야기로는 세 번째, 구병모로서는 두 번째인데, 암살 이야기의 결로 따지면 <회사원>에 가깝고 구병모의 결로 보자면 흠, 읽은 게 딱 두 권이라 뭐라 할 말이 없다. 하하. 하지만 들은 바를 종합하면 아마 <아가미> 류에 좀 더 가깝지 않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파과>, 상당히 재밌습니다. 제가 워낙 이 쪽 이야기를 좋아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유를 살펴보자면 극단의 양면이 한 인간의 내면에 공존하는 아이러니에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사람의 피를 묻히고 돌아와 손을 씻은 뒤 그 손으로 밥을 짓고 과일을 깎고 로션을 바른다. 이 소름 끼치는 평범함이 관찰 카메라로 훔쳐보는 화려한 스타의 소탈한 일상처럼 잔잔한 평화를 준다. 이상한 일이다. 따지고 보면 이들은 다 사이코패스 또는 소시오패스인 건데, 거기서 평화를 느낀다니!


<파과>가 다른 점은 주인공이 노인, 그것도 여자라는 점이다. 육체적 강인함이 최고로 요구되는 이 바닥에서 노인, 그것도 여자가 살아가는 모습은 어떨까? 회사원은 늘 둥지에서 쫓겨나는 공포 속에 살지만 '여자' 회사원들은 그 공포가 두 방향에서 들어온다. 하나는 성별에서, 하나는 나이에서. 운 좋게 이 모두를 피해 간 사람도 결국 '늙은 여자'라는 그물에서는 빠져나올 수가 없다. 이런 감정이 층층이 쌓여 <파과>는 신선하다. 액션이 조금 떨어지는 맛은 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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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드 오브 타임 - 브라이언 그린이 말하는 세상의 시작과 진화, 그리고 끝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 와이즈베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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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좋아한다면 브라이언 그린의 책을 읽으며 행복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읽어본 적이 없다면 진심으로 부럽다. 그린의 책을 읽는 동안 최소한 수개월은 즐겁게 보낼 수 있을 테니까. 굳이 따를 필요는 없지만 순서를 얘기하면 <엘러건트 유니버스>, <우주의 구조>, <멀티 유니버스>, <엔드 오브 타임>이다. 음, 써놓고 보니 출간 순이랑 똑같다. 하하.


<엘러건트 유니버스>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었을 때와 비슷한 충격을 받은 양자 물리학 또는 초끈이론 최고의 입문서다. 제목 그대로 우.아.하.다. <우주의 구조>는 좀 어렵긴 하지만 <엘러건트 유니버스>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견딜만하다. <멀티 유니버스>는 듣기만 해도 가슴이 바운스 바운스 한 평행우주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아주 깔끔하게 정리한다. 무한한 우주의 무한한 시간 안에서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그리고 <엔드 오브 타임>이 왔다. 때때로 전능한 신이라면 자신을 무능하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모든 걸 아는 존재니까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겠지만 실제로 행할 수는 없다. 신에게 불가능한 게 있다면, 물론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이것이 유일한 일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우주에도 동일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무한한 우주의 무한한 시간 속에서 모든 일이 가능하다면, 공간과 시간이 '무'로 돌아가는 것도 가능할까? 아무리 작은 집합이라도 공집합을 포함한다. 우주처럼 무한한 집합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엔드 오브 타임>은 시간의 종말에 대한 책이고 그 가능성을 같이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이는 책이다. 더 놀라운 건 아무런 의도를 갖지 않는 단순한 물질의 집합체가 의식이란 걸 갖게 된 것, 나아가 그 의식의 종말까지 내다보고 있다는 점이다. 지구는 언제까지 존재할 수 있을까? 태양은? 초인류들은 태양이 식고 난 다음에도 살아갈 방법을 찾아낼 정도로 충분히 똑똑할 테지만 우주 자체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의 생각, 의식, 사고는 모든 물질이 소멸한 뒤에도 남을 수 있을까? 언젠가 우리 인류는 물질의 한계를 극복해 영원히 존재하는 신이 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복잡다단한 현실의 고통이 하찮게 느껴진다. 거대한 바다는 자신의 얼굴을 때리는 비에 아파하지 않는 법이다. 현실의 허물을 벗고 더 큰 세계로 나아가 나 자신을 바라보면, 이 큰 우주에 지구라는 별이 태어나 초기의 몇 개 원소가 결합하여 새로운 분자를 만들고 그중에 하나가 물이 되고, 거기서 생명체가 탄생해 이제는 그 과정을 돌이켜보는 지적 존재가 됐다는, 실로 기적이라는 말 말고는 더 이상 표현할 길이 없는 경이로움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언젠가 인간의 의식은 인간이라는 종 자체를 극복할 수도 있다. 뇌도 생명도 결국엔 우주에 존재하는 몇 안 되는 원소들의 특정한 배열의 결과물일 뿐이니까. 저 머나먼 우주에는, 혹은 미래에는, 사고가 가능한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물질의 집합체가 존재하는 것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의식을 만들어내는 원천이 굳이 단백질 덩어리일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오직 생명만이 의식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왜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그럼 어떤 모습이 가능할까? 이어지는 상상에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빠져든다.


<엔드 오브 타임>은 브라이언 그린의 책 중에서 가장 과학적이지 않은 책이다. 실제로 6장 '언어와 이야기: 마음에서 상상으로'부터 9장 '지속과 무상함: 숭고함에서 최후의 생각으로'까지 약 18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은 이른바 빅 히스토리 류의 책들이 논하는 인류와 문화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미 그런 내용을 많이 접한 사람이라면 지루할 수도 있지만 얼핏 우리의 일상과는 관련 없어 보이는 물리학을 인간의 삶에 연결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엔드 오브 타임>은 가장 과학적이지 않은 책이지만, 오히려 그의 저작 중에서 생각할 거리를 가장 많이 던져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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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T - 내가 사랑한 티셔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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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에세이를 들고 걷는 출근길은 늘 가볍다. 이번에는 무라카미씨가 평생 모아 온 티셔츠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동안 이 작가가 출간해온 수많은 시시껄렁한 에세이 중에서는 그래도 괜찮은 축에 속한다. 고작 티셔츠가? 나도 참 의외다.


지금도 웬만해서는 물건을 잘 버리지 않는 성격인데 어릴 적엔 수집욕도 꽤 있었다. 자랑할만한 건 우표 정도. 수집을 멈춘 건 오래지만 400년 뒤의 내 후손이 큰 몫을 잡아 각박한 인생을 극복할 기회로 쓰라고 잘 모셔뒀다. 가치가 떨어질까 봐 거의 열어보지도 않는다. 이거 말고는 책 정도가 있는데 고르고 골라 천 권 정도가 남아있다. 치매로 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는 이상 이것만큼은 도저히 버릴 수가 없다. 책이 없어지면 팔다리가 뜯기는 기분이다. 햇빛을 받아 누렇게 변색된 걸 봐도 가슴이 아프다. 할 수만 있다면 하나하나 종이에 싸서 보관하고 싶지만, 나나 걔들이나 그저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을 온몸으로 맞는 거 말고는 도리가 없지 싶다. 게다가 책은 엄연히 '사용하는 물건'이니까.


뭔가를 모은다는 건, 반드시 그걸 가져야겠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도 있겠지만 내게는 버릴 수 없다는 쪽이 더 가깝다. 모을라고 모은 게 아니라 버릴 수 없어서 쌓인 것이다. 그렇다고 쌓인 물건에 애정이 없는 건 아니다.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러니까 사실 수집이란 말은 맞지 않을 수 있다. 구체적인 목적을 갖고 소유한 게 아니니까. 우연한 기회로 만나 그저 쭉 같이 살게 된 것이다. 한 번 인연은 평생 인연. 이것이 바로 나의 수집이다.


하루키의 티셔츠도 그렇게 해서 모인 게 아닐까? 쓰는 글들을 볼 때 고급 패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의 페이보릿은 티셔츠인 것이다. 똑같은 무지 티셔츠가 한두 색깔로 수십 장씩 있을 것 같은 이미지이지만 실제로는 독특한 그래픽이 얹힌 귀여운 티셔츠를 좋아한다. 소문난 달리기 광이다 보니 대회를 나갈 때마다 기념품으로 나눠준 티셔츠들도 한 무더기다. 여러 나라에 번역 출간될 때마다 각 나라에서 홍보용으로 제작한 티셔츠들도 많은데, 고이 모셔둘 뿐 실제로 입은 적은 없다고 한다. 어지간한 나르시스트가 아니고서야 자기 책 제목과 이름이 적힌 티셔츠를 입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티셔츠를 정말로 좋아한다. 풍파를 맞아 하얗게 바랜 것들은 달리기를 할 때만 입다 그것마저 힘들 정도로 낡아버리면 잠옷으로 사용한다. 그러다 보니 <무라카미 T>는 여러모로 공감이 가는 책이었다. 티셔츠도 좋고 무라카미도 좋고 달리기도 좋다. 거기다 풀컬러로 찍힌 티셔츠들이 페이지마다 실려 있으니 뭐랄까, 쇼핑하는 마음으로 훌훌 읽어버렸다. 몇 배는 상쾌한 에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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