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경비원의 일기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0
정지돈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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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돈의 소설들은 좀 긴 잡담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문득문득 위트와 유머가 번뜩이고, 어려운 내용은 하나도 없다. 특기할만한 서사가 없기에 소개하기도 좀 애매한데,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야간 경비원들이 몇 명 등장하고 그중 하나가 쓰는 일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사람들은 서사가 파괴된 실험적 소설을 읽고 나면 대개 아래와 같은 반응을 보인다.


1. 이게 소설이야?

2. 내가 모르는 뭔가가 숨겨져 있는 게 분명해

3. 음... 그렇군


1에 속하는 사람들은 다시 두 부류로 나뉜다.


1.1 책을 거의 읽지 않는 사람

1.2 정말 대단히, 순수하게, 진심으로 스트레이트한 성격을 가진 사람


이들은 블랙 유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풍자나 해학, 한두 번 꼬인 시니컬한 표현에 뚱한 표정을 짓는다. 쉽게 말해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고 우리 세계는 대부분 이런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오늘도 정상 궤도를 질주한다. 스트레이트 하게, 나는 이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산다.


2에 속하는 사람들은 책 읽기에 열심히고 거기서부터 뭔가를 배우려는 사람들이다. 활자가 인쇄된 종이 무더기에 무의식적으로 권위를 부여하며 마음이 무언가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늘 뜨겁게 달아오른다. 그냥 먹고 끝내면 될 일인 평양냉면을 그 유래부터 진지하게 설명하거나 <테넷> 같은 영화에서 우리가 몰랐던 소름 돋는 복선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끈덕지게 늘어놓는 사람들이다. 음모론에 쉽게 빠지거나 간혹 앤디 워홀 같은 사람을 예술가로 만드는 실수를 저지르긴 하지만 대체로 마음이 순수하고 착한 사람들이다. 이들을 친근하게 '오덕'이라 부르기도 한다.


3에 속하는 사람들은 권위와 정돈된 이론에 태생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이다. 세상에 대해선 시니컬한 태도를 보이지만 그래도 사고는 꽤 열려있는 편이다. 이들에게 설명을 요구하면 '음... 뭐 그냥 그런 거지' 라거나 '네가 본 대로 이해하면 돼' 같은 하나마나한 대답을 한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다시 아래와 같이 분류할 수 있다.


3.1 설명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게 진정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사람

3.2 자기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


나는 한때 2에 속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내게 문학을 이해하는 능력이 전무하다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의 해석을 포기한 채 그냥 3-2처럼 살기로 했다. '살기로 했다'라고 말하면 마치 내가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무능력에 의한 것이니 그냥 3-2가 '되었다'라고 말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도 당신이 기대하며 찾았을 '정지돈 <야간 경비원의 일기> 해석' 같은 건 단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쓸데없는 얘기만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것이 문학적으로 어떤 실험을 하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정지돈의 소설들이 꽤 재밌다. 고르라면 장편보다는 단편인데, 처음 읽은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워낙에 재밌게 읽은 탓도 있고 잡담과 농담은 늘 길이와 재미가 반비례한다는 지론을 갖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지론은 개인적 취향이 반영된 것이긴 하지만 상당한 경험의 축적으로 귀납된 판단이라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한다.


자, 요약하면 2나 3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면 <야간 경비원의 일기>에서 무리 없이 재미를 느낄 것이다. 본인이 1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것도 경험이지, 도전! 하는 괜한 의욕은 접고 쿨하게 건너뛰기를 추천한다. 세상엔 읽어야 할 게 차고도 넘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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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9
김희선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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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곡 마을에 거주하던 노인들이 모두 사라졌다. 팔곡은 이름 그대로 8개의 계곡이 만나는 지점에 형성된 마을이다. 내륙으로 이어진 길은 크게 돌아가야 하고 앞에는 호수가 있어 배를 타고 들어와야 한다. 천혜의 밀실이다. 마을 이름부터 소년 탐정 김전일을 배경을 연상케 한다.


노인들의 실종을 처음으로 발견한 건 우체부였고 그가 관할 파출소에 신고해 조사가 시작된다. 썰렁한 마을엔 공포가 깔리고 이장의 집에 누워 있는 옥수숫대는 그로테스크를 더한다. 호들갑을 떨며 이상한 집념을 발휘하는 우체부와 달리 파출 소장 박 경위는 의심과 수긍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노인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꼭 사건으로 연결될 합리적 근거가 되는 건 아니다. 노인들이 단체로 배를 타고 나간 흔적은 없지만 육로는 막히지 않았다. 시골 노인들이 흔히 그러듯 관광버스를 전세 내 단체로 여행을 떠난 것일 수도 있다. 이장의 자녀와 연결이 됐지만 그의 대답도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는 없다. 잠깐 다녀오는 여행을 부모가 자식에게 일일이 보고할 필요는 없으니까. 자식이 모른다고 해서 단체 여행이 실종으로 바뀌는 건 아니다.


그러나 박 경위는 피부에 와 닿는 위험을 감지한다. 우체통에 가득 찬 웰다잉협회의 우편물. 늦은 시각 배를 타고 들어오면서 시청한 웰다잉협회의 홍보 영상. 그리고 그 영상을 본 뒤 물로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하려 한, 자기 자신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일련의 경험은 박 경위의 기억 속에서 팔곡 마을의 과거를 끌어올린다. 팔곡은 장수로 유명한 마을이었다. 그걸 축하하기 위한 잔칫날, 노인들은 박 경위가 배 안에서 본 웰다잉협회의 영상을 단체로 시청한 경험이 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인 하나가 물에 빠져 죽는 사고가 나기도 했다. 모호한 단서들과 드문 드문 떠오르는 기억, 텅 빈 마을이 무거운 안개처럼 깔리며 긴장감을 조여 온다. 그리고 마침내 피가 폭발한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힘을 잃고 급속도로 하강한다. 짙게 깔렸던 안개는 순식간에 나타난 햇빛에 힘 한번 쓰지 못하고 증발해버린다. 여기서 자초지종을 모두 떠벌이면 스포일러가 될 테니 삼가겠지만 뒤틀린 사상에 경도된 어떤 단체가 등장한다는 것만 알아두자. 이야기는 논리적 매듭을 짓기를 포기한 채 이 단체에 무소불위의 힘을 부여한다. 때맞춰 경찰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며 정체를 밝힐 유일한 단서를 놓쳐버린다.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드리지요.


이 구절을 읊을때마다 절로 마음이 편해진다는 비밀 단체의 보스는 그렇게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의도는 어슴프레 짐작하지만 방법이 그것뿐이었는가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도입부가 너무 기대감을 높인 탓일 수도 있다. 뭐가 문제였는지 이야기는 장르 소설에서 급격히 유턴해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질주한다. 짙은 스키드 마크. 매캐한 고무 탄내. 사이렌을 울리며 따라가 묻고 싶다. 어딜 그렇게 급히 가느냐고. 이 길은 어디로 향하는 길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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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능력을 교환해드립니다
이누이 루카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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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능력을 교환해드립니다>는 7개의 연작으로 구성된 환상 소설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양이 신선? 요괴? 아무튼 무언가에게 사로잡혀 '바쿠리야'라는 가게를 떠날 수 없는 한 남자가 찾아오는 손님들의 능력을 교환해 준다. 이런 것도 능력이야? 라고 생각되는 것도 상관없다. 모든 여자에게 무한한 사랑을 받는 남자, 살던 곳을 떠나려고 하면 늘 폭우가 내리는 기인, 다니는 모든 회사를 파산시키는 저주왕 등등. 성격만 맞는다면 능력은 얼마든지 교환 가능하다. 단, 조건이 있다. 바뀌는 능력을 선택할 수는 없다는 것.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날 수도 있다. 그런 사태를 후회하지 않을 사람들만 '바쿠리야'에서의 교환이 가능하다. 참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다.


'바쿠리야'가 이야기의 중심인 것은 맞지만 7편의 소설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갖는다. 패턴이 좀 지루할 만도 한데 나름 요리조리 비틀어 각각의 등장인물들을 '바쿠리야' 앞에 데려다 놓는다. 각오가 되면 가게 구석에 앉아 쉬던 고양이가 손님의 손등을 할퀴고 주인은 그 피를 수집해 병에 담는다. 능력이 바로 교환되는 것은 아니고, 서로 성격이 맞아야 한다. 하지만 이 성격은 겉으로는 알 수 없다. 예컨대 제구가 되지 않는 강속구를 던지는 능력이 무언가를 잘 빠는 능력과 교환되는 식이다. 뭘 기대했는가?


교환될 능력이 결정되면 각각의 주인들에게 '바쿠리야'의 편지가 도착한다. 그리고 그날 자정 능력이 교환된다. 번개가 치고 돌풍이 부는 건 아니고 그냥 스르륵 무언가가 빠졌다가 들어간다. 자기가 어떤 능력을 갖게 됐는지는 느낌으로 알 수 있다. 대개는 해피엔딩인데, 때로는 그렇게만은 부를 수 없는 결말이 기다린다. 인생지사 역시 새옹지마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소설은 쉽고 간결하다. 치밀한 심리 묘사나 가슴을 탁 치는 문구 같은 건 없다. 문장은 오로지 전개를 위해서만 헌신한다. 이야기는 파바박, 책장은 훌훌 날아다닌다. 솔직히 일본 장르 문학의 전형적 특징을 답습한다. 오로지 재미를 위해서 읽는 책이다.


나는 이런 소설을 읽을 때마다 외국의 크고, 다양한 출판 시장이 부러워진다. 우리는 책과 독서라는 행위에 너무 커다란 짐을 지우는 경향이 있다. 생각 없이 TV를 키는 것처럼 책을 펼 수는 없는 걸까? 심심풀이 땅콩 역할을 하는 책이 과연 저 위대한 문학들보다 가치가 떨어지는 걸까? 따지고 보면 문학이라는 것도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게 얼마 안 됐는데 말이다.


<당신의 능력을 교환해드립니다>를 읽는다고 해서 대단한 소양이나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킬링타임. 요즘 같은 시국에 시간을 잘 때울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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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2-14 0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의 효용은 무궁무진. 킬링타임에도 최고죠. ^^

한깨짱 2021-02-15 14:11   좋아요 0 | URL
최고의 친구죠!
 
광기와 우연의 역사 (최신 완역판) - 키케로에서 윌슨까지 세계사를 바꾼 순간들 츠바이크 선집 (이화북스) 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상원 옮김 / 이화북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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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우연의 역사>는 역사의 굵직한 분기점을 개인과 세계의 관점에서 조망한다. 문명의 향방을 가른 사건에서부터 개인의 인생을 뒤바꾼 결정적 순간까지. 이 책은 이런 에피소드 14개를 엮어 만든 선집이다. 여기에 그 몇 개를 소개하니 당신의 구미를 당기는지 확인해 보라.


1. 키케로의 죽음과 로마 공화국의 종말

시저를 강아지 사료의 브랜드로만 알고 있는 사람은 정말 불행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로마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독재자가 '브로콜리 너마저!'(농담임) 라는 말을 남긴 채 절친의 손에 죽고 만다. 혼돈에 빠진 공화국을 구하기 위해 역사는 키케로를 무대 위에 올린다.


2. 동로마 제국의 종말

콘스탄티노플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지금은 이스탄불이라 불리는 터키의 수도가 한때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던(같은 편에게 한번 당한 적이 있긴 하지만) 서양 문화의 총아는 야심만만한 투르크 젊은이의 위협에 직면한다.


3. 불멸을 향해 질주하다

오늘날 남미의 정치불안과 가난은 1513년 깡패 발보아가 태평양을 발견하면서 시작된 걸지 모른다. 지극히 보잘것없는 개인의 우연한 모험이 500년이 넘는 역사의 방향을 결정했다면 믿어지는가?


4. 세계사를 결정지은 워털루 전투

유배지에서 탈출한 나폴레옹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유럽과 맞선다. 그러나 이 마지막 전투의 승부를 가른 건 나폴레옹의 실수도, 적군의 우수함도 아니었다. 우직하고 성실하지만,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는 인간이 난세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는지 알아보자.


5. 괴테의 마지막 사랑

유럽 최고의 지성이라 불리는 일흔네 살의 괴테가 열아홉 살 소녀에게 청혼을 한다. 한때 괴테는 그 소녀의 어머니를 사랑하고 흠모했다. 프로이트는 이드의 욕망이 '승화'되면 예술가가, 그렇지 못하면 범죄자가 된다고 말했다.


6. 황금의 땅 엘도라도의 저주

실리콘밸리가 들어산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는 한때 그 전체가 개인의 땅이었다. 미국 최고의 갑부! 그 이름은 록펠러도 카네기도 듀폰도 아니다. 단언컨대 당신은 그 남자의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7. 미국과 유럽을 잇는 해저 케이블

모두가 안된다고 하는 일에 끈질기게 도전하며 비웃음을 사는 사람이라면 이 이야기에서 작은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부침을 거듭한다.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인간은 최후의 순간 대개 원하는 자리에 우뚝 선다.


8. 봉인 열차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는 스위스 구두공의 다락에 세 들어 살던 러시아 망명자였다. 1915년부터 1918년까지 스위스는 탐정 소설의 주무대였다. 식당 종업원에서 호텔 벨보이, 귀부인, 사업가, 국회의원까지 거의 모든 사람이 하나씩 비밀업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이 키 작은 사내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남자는 치외법권으로 인정되는 봉인된 열차를 타고 러시아로 향한다. 기차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는 순간 수만 명의 노동자와 온갖 무기를 든 의장대가 망명지에서 돌아온 혁명가를 위해 인터내셔널가를 노래한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레닌은 장갑차에 서서 민중을 향해 첫 연설을 한다.


<광기와 우연의 역사>를 읽고 나면 역사의 본질은 역시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스테판 츠바이크는 역사적 사실에 문학적 상상력을 덧붙여 시간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다. 역사는 진심으로 재미있다. 정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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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얼굴들
황모과 지음 / 허블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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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얼굴들>은 제목에 이끌려 집어 든 책이다. 만화가이자 게임회사 직원이었던 작가 황모과가 6편의 단편 소설을 엮어 만든 SF 단편선이다.


SF! 그러나 이 작가가 과학 기술을 이용해 그리려는 이야기들은 다른 SF 소설들과 차이를 보인다. 휘황찬란한 미래 세계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신기한 개념, 우울한 디스토피아 등에 집중하기보다는 과거의 아픈 역사, 소외된 이들이 과학에 힘입어 어두운 감옥에서 해방된다.


이제는 말할 수 있게 된, 진위가 명백해진 역사조차 다양한 집단의 은폐와 공격에 상처를 입는 경우가 허다하다. 역사의 희생자들은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한다. 황모과의 SF는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해 그들을 위한 위로제를 열어준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 기술 앞에서는 어떠한 진실도 은폐될 수 없다. 논란에 종지부를 내리는 과학. 어둠의 장막을 찢는 진실의 검.


그러나 기술의 역할은 딱 여기까지다. 진실이 영원불멸의 석판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잊히지 않는 것은 아니다. TV 뉴스와 신문에 선명하게 찍힌 사실들이 우리 기억 속에서 풍화되는 속도를 떠올려보자. 황모과의 소설들은 혼돈의 웅덩이에서 진실을 꺼내오는 건 기술이지만 그걸 지키고 기억할 의무는 우리에게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설의 재미는 그 '착한 의도'에 비례하지 않는다. 솔직히 너무 직설적이다. 너무 명백한 의도가 되레 폭력적으로 다가온다. 두고두고 곱씹을 만한 감상의 묘가 없이 꽉짜인 통조림 같다. 어떤 면에선 너무 착해서 답답하기도 하다. 너무 순진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물론 이는 순전히 개인적 호오에 의한 평이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역사의 희생자들을 조명하는 방식은 수만 가지가 있겠지만, 윤리니 도덕이니, 사실이니 아니니를 다 떠나 무엇에서 가장 위로를 받았나 생각하면 늘 쿠엔틴 타란티노가 떠오른다. <바스타즈: 거친 녀석들>이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이 남자가 저지른 일들을 떠올려보자. 이것이 바로 우리, 아니 우리라는 말은 생각이 다른 이들에게 불쾌감을 조장할 수 있으므로 '나의 진심'이라고 말하겠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이라면 한 번쯤 히틀러의 대가리에 직접 총알을 박아 넣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지 않을까? 사실 지루하기까지 했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도 디카프리오가 찰스 맨슨 패거리를 화염방사기로 불태워 죽이는 장면에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리 민족은 이완용의 무덤을 발로 밟는 것으로 나라를 잃은 한을 풀었다고 한다. 누군가는 그의 무덤을 파헤쳐 매질을 하는 상상을 해본 적도 있을 것이다. 윤리와 도덕은 현실의 규칙이지 이야기의 규칙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런 상상을 통해 억눌렸던 욕망을 분출하고, 그렇게 가벼워진 몸으로 현실이라는 짐을 질 수 있는 거 아닐까? 나는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진짜 의미라고 생각한다. 허락되지 않는 상상을 하는 것. 나의 적들을 모두 그러모아 소각장에서 불태워 없애는 것.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모든 것은 개취에 의한 평이다. 취향이 참 이상하네요 라고 말한다면 개취란 게 원래 그런 거 아닌가요? 라고 되묻고 싶다. <밤의 얼굴들>은 착한 의도로 가득한 무자극 SF다. 한 권을 후루룩 읽고 나니 칼칼한 게 땡겨 라면을 하나 끓여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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