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약탈 국가 - 아파트는 어떻게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이 되었는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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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이 시끄럽다. 대한민국 서민들의 영원한 꿈, 내 집 마련은 한해 한해 멀어져만 간다. 영끌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리는데,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히려 행복한 거다. 영혼을 팔고 싶어 악마를 찾아갔지만 악마조차 사주지 않는 영혼. 우리 대부분은 그런 영혼을 안고 살아간다.


부동산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여전히 공급이 부족하다 말하고 하나는 투기 세력과 다주택자들을 지적한다. 무엇이 맞는지는 갑론을박이다. 하지만 이 갑론을박은 사실에 근거하기보다는 자기 이익에 편향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수도권에 경제적 정치적 기반을 둔 세력은 공급의 문제를, 부의 불평등 해소로 표와 자기만족을 얻는 세력은 후자를 지지한다. 그렇다면 사실은 어떤가? 확인하는 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새로 공급된 주택을 누가 가져갔는지를 보면 된다. 차명 소유 등 갖가지 편법이 동원되어 정확한 파악이 어렵다면 고위 공직자들과 그들 가족의 다주택 현황을 보는 것도 한 방편이 될 것이다. 그들이 '어디'에 집을 갖고 있는지도 함께.


<부동산 약탈 국가>는 대한민국 부동산 문제의 근본적 해결 방안을 탐구하는 책은 아니다. 짧게는 한두 페이지, 길어도 다섯 페이지가 넘지 않는 챕터들이 단편적으로 이어진다. 주로 현정부의 정책 실패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내려받은 무주택자의 넋두리가 내용의 큰 축을 이룬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 속에 흩어진 조각들을 주워 모으면 저자 강준만 교수가 지적하는 문제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


문제는 부동산이 아니라 국가 균형 발전이다. 대한민국은 명실공히 서울 공화국, 넓게봐도 수도권 공화국을 벗어나지 못한다. 사실 벗어나려는 노력 자체를 하지 않으며, 모든 정권을 통틀어 가속화하는데만 열을 올리고 있다. 제3기 신도시나 그들을 이어주는 수도권 광역 철도는 부동산 문제를 잡기는커녕 오히려 확대시킬 가능성이 높다. 왜 그럴까? 인서울에 집을 갖지 못하는 사람을 외곽으로 돌리는 대신 출퇴근이 용이한 교통 시설을 갖추는 건 꽤나 논리적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확장된 수도권은 수도의 인구를 분산시키는 효과를 발휘하는 동시에 지방의 인구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된다. 서울 주변에 아무리 신도시를 많이 지어도 공급이 수요를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서울에 몰리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곳에 '명문대'와 '일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 두가지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부동산에 관한 한 백약이 무효하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노무현 정부의 행정 수도 이전은 그래서 중요했다. 정치력의 심각한 부재로 무려 위헌 판정까지 받아버린 대실패작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 의지를 직접적으로 이었다고 여겨지는 문재인 정부가 지금 다시 이 카드를 꺼내 든 건 그래서 환영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마냥 박수를 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강준만 교수는 현 정부의 행정 수도 이전 발언이 부동산 정책의 실패를 감추기 위한 국면 전환용 카드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해당 건은 야당의 일부 충청권 의원들마저 찬성하는 사안인 데다 여론의 지지까지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야당을 내적, 외적으로 압박할 수 있고 실패하더라도 그 책임을 온전히 야당에 전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균형발전에 그토록 관심이 있었다면 집권 초기부터 뚝심 있게 밀고 나갔으면 될 일이다. 그런데 그걸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서야 꺼내 든다? 잡히지 않는 부동산 가격에 쏠려있는 국민의 눈을 남쪽 땅으로 돌려야 한다! 국가의 대계를 오로지 정략으로 활용하는 태도는 이 정부가 무능을 넘어 교활해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공무원을 비롯한 국가 권력자들이 국가 균형 발전에 관심이 없는 이유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들에겐 자식을 서울의 명문대에 보내고 싶은 욕망과, 부동산 가격 상승의 혜택을 누리고 싶은 탐욕과, 이런 의지를 실행해나갈 능력과 정보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주요 부처를 지방으로 옮겨도 당당히 다주택자의 길을 걸으며, 비난이 쏟아지면 묵묵히 지방의 집을 팔고 서울의 집을 남기는 것이다. 대통령의 지엄한 명령은 5년을 넘기지 않지만 강남의 부동산은 평생을 간다.


책임을 온전히 개인의 도덕 문제로 돌리는 것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실 그들의 행동은 대단히 합리적이고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합리적 판단의 합이 집단의 이기심으로 드러난다면 그건 더이상 개인이 아닌 구조의 문제다. 구조는 1~2년의 노력으로 변하지 않는다. 수십 년  뚝심 있게 밀고 나가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가의 대계가 빈대떡 뒤집듯 바뀌는데 무슨 수로 구조를 개혁하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민의 각성이 중요하다. 눈을 부릅뜨고 무엇이 옳은 일인지 지속적으로 성찰하고 요구하는 것. 부동산 코인에 올라타지 못한 자신의 무능에 분노하는 대신 이런 구조를 만든 사람들에게 그 분노를 돌리는 것. 뜬구름 잡는 얘기 같지만 답은 이것밖에 없다. 세입자가 내 집을 폐허로 만들고 있다면 주인이 나서서 쫓아내야 한다. 그러니 이 대한민국을 바꾸는 걸 누가 해야겠는가? 국가의 주인, 바로 우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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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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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의 길이와 재미는 반비례한다. <캐비닛>은 같은 형식의 농담들이 무려 350페이지에 걸쳐 반복된다. 굉장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김언수는 책의 끝머리에 '세상의 모든 독자들은 작가에게 관용이란 걸 베풀 필요가 없다.'(p.391)라고 썼다. 그리고는 '당신이 이 저열한 자본주의에서 땀과 굴욕을 지불하면서 힘들고 어렵게 번 돈으로 한 권의 책을 샀는데 그 책이 당신의 마음을 호빵 하나만큼도, 붕어빵 하나만큼도 풍요롭고 맛있게 해주지 못한다면 작가의 귀싸대기를 걷어올려라.'(p.391)라고 덧붙였다. 맞을 각오가 되어 있다면, 나는 때릴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책은 심토머라 불리는 괴상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마땅히 소개할 줄거리가 없다. 화자는 오랜 고생 끝에 한 공기업에 취직하지만 아무런 일도 주어지지 않아 무료한 일상을 보낸다. 그러다 권박사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연구원이 자료를 보관해 놓은 캐비닛에 손을 댄다. 그걸 계기로 화자는 권박사의 조수가 되어 캐비닛을 관리하고 거기에 기록된 심토머들의 고충을 들어준다.


심토머들 중 거론할만한 사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키메라: 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거나 혀 밑에 도마뱀이 사는 등 이종간 교배 현상을 보이는 사람들

2. 타임 스키퍼: 갑자기 현재의 시공간에서 사라져 몇 시간, 몇일 심지어 몇 년 뒤에 다시 나타나는 사람들

3. 토포러: 곰이나 다람쥐처럼 주기적으로 동면에 빠지는 사람들

4. 메모리모자이커: 물리적, 화학적, 신비주의적 방법을 이용해 기억을 삭제하고, 채워 넣고, 변형시키는 사람들


이 중에 관심있는 심토머가 있다면 <캐비닛>을 읽어보자.


김언수는 이 긴 농담을 마무리하기 위해 고문기술자라는 무리수를 둔다. 기술자는 캐비닛 속 정보 중 키메라의 높은 경제적 가치를 본 기업이 고용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화자가 키메라를 만드는 기술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 20억을 제안하지만 여의치 않자 그를 납치한다. 하지만 그가 알리가 있나! 화자는 손가락과 발가락이 잘린 채 폐인이 되어 세계 밖으로 사라진다.


작가란 세계의 사건과 자신의 경험, 기억, 판단 그리고 이것들이 연결되어 파생된 상상들을 차곡차곡 쌓아두는 존재다. 심토머의 자료들이 담긴 캐비닛처럼. 하지만 작가의 비극은 이 자료들이 그 자체로 소설이 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소설은 농담 같은 이야기에 특정한 '형식'이 부여돼야 비로소 탄생할 수 있다. 그 과정은 너무나 지치고 힘든 일이다. 마치 고문기술자에게 납치되어 손가락, 발가락이 모두 잘리는 것처럼 말이다.


<캐비닛> 속 화자는 끝내 그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내놓지 못해 세계 밖으로 쫓겨난다. 하지만 귀싸대기를 맞을 각오가 되어 있는 이 터프한 작가는 온갖 고시원과 산속을 전전하며 기어이 이 소설을 세상에 내놓았다.


재밌다는 말은 못하지만, 박수는 쳐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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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집 청소
김완 지음 / 김영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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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죽은 자의 집을 청소하는, 일명 특수청소업을 운영한다. 아마도 그런 일을 처음 겪었을, 다급한 요청 전화를 받고 찾아간 곳에는 집주인이 자신의 집과는 멀찌감치 떨어져 열쇠 또는 자동키의 비밀번호를 건네준다. 집주인은 떠나고 저자는 집안으로 들어간다. 문 앞에 섰을 때부터 그는 자신이 써야 할 게 방독마스크인지 아니며 방진인지 안다. 죽은 자의 빈방은 구더기들과 냄새가 차지한다. 발견된 시간이 길수록 정도는 심하다. 하지만 아무리 심해도 그건 포기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저자는 장비를 들쳐 메고 하나씩 죽음의 흔적을 지워나간다. 고독의 크기만큼 찐득하게 달라붙은 흔적들을, 저자는 어르고 달래 저세상으로 놓아준다.


남의 죽음으로 밥을 버는 일은 얼핏 잔인해 보인다. 타인의 절망으로 이득을 얻는 일이라니. 하지만 누가 죽든 말든 산 자들의 세상은 계속된다. 산자들의 세상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잔인하다. 죽기 전엔 이러쿵 저러쿵 할 일 조차 없는 데면데면 무명의 이웃이었지만 죽음 뒤에는 온갖 저주의 대상이 된다. 집주인은 집값이 떨어질까 무섭고 이웃은 냄새 때문에 분노를 참지 못한다. 더럽게 재수 없는 일. 나가서 곱게 죽지 못하고 기어이 방구석에서 뒈져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미친놈. 청소를 시작하는 저자를 향해 이웃이 나와 애먼 소리를 지르고 들어간다.


저자는 오히려 기사 한줄에도 기록되지 않는 그들의 죽음을 위로하고 배웅하는 유일한 친구다. 아무리 냄새가 지독해도, 현장이 참혹해도 그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 가스관 위에 내걸린 빨랫줄과 눌어붙은 짬뽕 국물과 먹다 남은 피자 조각을 통해 죽은 자의 고독을 이해하고 위로한다. 그는 단 한 번도 부잣집에 청소를 간 적이 없다. 살아생전 가난하고 외로운 자들은 죽어서도 고독하다. 죽은 지 며칠이 지나도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들. 그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건 경찰과 시체를 수거하는 사람들뿐이다. 그들은 신을 신고 들어와 건조한 조사를 마친 뒤 방 여기저기에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간다. 저자는 천천히 방안을 돌아보며 죽은 자의 삶을 복원한다. 그들의 남긴 옷가지에서, 책에서, 잠자리에서, 음식에서, 죽기 전 가지런히 쌓아 놓은 분리수거 쓰레기에서.


그는 이 일을 하기전엔 출판 업계에 몸을 담은 적이 있고 시인으로도 활동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도 깊은 감정을 담는다. 이 책은 온통 죽음과 그 상실이 가져온 고통으로 빼곡하지만 저자의 따뜻한 시선을 통해 오히려 위로받는 듯한 기분이 든다. 설령 내가 그렇게 죽더라도 이 분이 찾아와 내 마지막을 기억해줄 것 같은. 죽은 뒤에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겠지만, 아무도 찾지 않을 내 죽음을 떠올리며 외로워지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살아있는 삶이다. 그러니 이런 위로는 무의미하지 않다.


삶과 죽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있고 저자는 그 사실을 매일 실감하고 산다. 죽음과 손을 잡고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늘 서늘한 공포가 뒤통수를 오싹하게 만들까? 하지만 그건 생각보다 나쁜 일이 아닌 것 같다. 어렵고 힘들고, 도저히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의 고난을 맞을 때면 나는 늘 죽음을 떠올린다. 그러고 나면 이상하게 차분해지면서 힘이 난다. 어차피 죽으면 다 끝인데 뭘, 하고 생각하면 내 앞에 놓인 모든 것들이 하찮아 보인다. 그도 어쩌면 이런 마음이 드는 걸지 모른다.


살아생전 고통에 시달리던 인생도 죽음 뒤엔 평온을 얻는다. 지옥이니 천국이니 하는 말은 뼛속까지 잔인해지기로 작정한 인간들의 악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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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 만든 공간 - 새로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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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 만든 공간>을 읽어보면 유현준 교수가 왜 '알쓸신잡'의 쟁쟁한 입담들 사이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고 끝없이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었는지 알게 된다. 건축은 재료를 쌓아 형태를 만드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형태를 만드는 것보다 왜 그 형태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근원을 밝히는데 더 큰 관심이 있는 것 같다. 근원을 탐구하는 사람에겐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 수밖에 없다. 이 책은 건축으로 설명하는 빅히스토리다.


유현준 교수에 따르면 동서양의 공간 차이를 만든 결정적 요인은 바로 '강수량'이었다. 기준은 1,000 밀리미터. 이보다 많이 오는 곳에선 벼를, 그보다 적은 곳에선 밀 농사를 짓게 된다. 그런데 밀과 벼는 재배 방식에 큰 차이가 있어 이를 행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에도 큰 차이를 만든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서양 문화를 '개인주의', 동양 문화를 '집단주의'로 구분하는데 그런 가치관이 형성된 이유는 단순하다. 벼농사를 짓기 위해선 많은 물을 다뤄야 하기에 다 같이 모여 치수를 위한 대규모 토목 공사를(보, 저수지, 관개수로 등) 진행하기 때문이다. 물을 사용하는 방식에서도 자기 논에 물을 댄 뒤 다시 길을 터 다른 사람의 땅으로 보내줘야 한다. 괜히 아전인수라는(자기 밭에만 물을 대는 행위를 탓하는 말) 말이 생긴 게 아닌 것인가.


반면 밀농사는 파종법부터 다르다. 밀은 혼자서도 충분히 씨를 뿌릴 수 있다. 밀은 맨땅에서 자라고 물이 많이 필요 없으며 집중호우 없이 일 년 내내 골고루 비가 내리는 지역에서 농사를 짓기 때문에 관개수로를 내거나 기타 토목공사를 할 필요도 없다. 당연히 같이 모 여살 필요도 없어 개인주의적 문화가 만들어지게 된다. 벼농사 지역에 비해 밀농사 지역의 이혼율이 높은 것도, 대자연에 띄엄띄엄 떨어져 사는 유럽의 시골과 여러 집이 옹기종기 마을을 이룬 동양의 시골 풍경 차이도 이러한 배경으로 설명할 수 있다.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사는 공간의 모습도 달라진다. 서양 건축의 중심은 벽돌로 쌓은 벽이다. 영역을 구분하기도 쉽고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강수량이 많지 않기에 지붕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적당히 경사만 내서 얹어주면 그만이다. 반면 동양에선 여름철에 집중호우가 내려 땅이 물러지기 때문에 무거운 벽돌로 집을 지으면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가벼운 목재가 주재료가 되고 방수를 위해 땅에 닿는 면에는 주춧돌을 놓는다. 기둥에 떨어지는 비를 막기 위해 처마도 길게 낼 수밖에 없다.


유럽 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서양의 건축물들은 이렇게 화려하고 웅장한데 왜 우리의 건축물들은 그렇지 못한 지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이유 역시 벽에 있다. 벽으로 만든 집은 가로로 큰 창을 내면 무너지므로 좁은 창을 세로로 낼 수밖에 없다. 유리가 발명된 것도 한참 뒤라서 창문은 나무로 만들어진다. 닫아 놓으면 바깥의 풍경이 완전히 사라지고, 열어둔다 하더라도 작게 보인다. 그러니 밖에서 건물을 보는 데 중점을 두고 디자인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 건축물은 비를 잘 처리하기 위한 지붕과 그걸 이고 있는 기둥이 중심이다. 기둥 구조는 답답한 벽을 만들어 지붕을 받칠 필요가 없다. 그러다 보니 기둥과 기둥 사이에 뻥 뚫린 개방감을 갖게 된다. 시골집의 대청마루를 떠올려보자. 도대체 이것이 집의 내부인지, 아니면 외부인지 모호한 경계를 이룰 만큼 열려있지 않은가? 비가 오는 날에도 긴 처마 탓에 마루에 앉아 밖을 볼 수 있고 방에서 창을 열어도 비가 들이치지 않는다. 이처럼 안에서 밖을 보는 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에 동양의 건축물은 안에서 밖이 어떻게 보이냐가 더 중요한 건축 요소가 된다.


교통수단의 발달로 인해 공간은 압축되고 문명의 차이는 줄어든다. 오늘날 전 세계가 서로 비슷비슷한 모습을 하는 이유는 발달된 미디어 때문에 압축된 공간이 거의 0에 가깝게 수렴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의 결과로 인류는 증기선, 기차, 비행기 등의 교통수단을 발명했고 이로 인해 동서양 문화의 이종교배는 가속화됐다. 건축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특히 철근콘크리트의 발명으로 건축계는 구조를 만드는 데 자유를 얻게 된다. 이 과정에서 동서양 건축의 특징을 절묘하게 결합한 위대한 건축가들이 탄생한다. 미스 반 데에 로에, 르 코르뷔지에, 루이스 칸, 안도 다다오. <공간이 만든 공간>은 무려 3개의 장을 할애해 이들이 꽃피운 모더니즘 건축의 탄생을 소개한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리처드 니스벳의 <생각의 지도>,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등에서 익숙히 보아온 개념으로 구성되지만 거기에 '건축'을 더함으로써 내용을 훨씬 미시적으로 만든다. 빅히스토리의 매력은 논리적 상상력과 추론이 현상을 정확히 설명하는데서 오는 쾌감에 있다. 하지만 그 주인공은 지리나 기후, 또는 다 무너진 고대 유적같이 우리가 눈에 그리기 어려운 것들이다. <공간이 만든 공간>은 인터넷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건축물들이 그 공백을 메운다. 심지어 그중엔 우리가 매일 오가며 보는 한국의 건축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빅히스토리가 어렵게만 느껴졌던 사람이라면 이 책으로 시작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공간이 만든 공간>은 그 큰 상상력들에 비해 훨씬 손에 잡히는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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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커버
아마릴리스 폭스 지음, 최지원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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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 비밀 첩보원의 일상을 자세히 알고 싶다면 <언더커버>를 읽자. 법이 허용하는 한에서, 이 책은 엘리트 첩보원이 경험한 훈련, 임무 그리고 그들이 펼치는 전략을 가감 없이 전달한다. 형식은 에세이지만 내용은 소설을 방불케 한다. 영화에서만 보던 비밀 접선과 암약하는 무기 밀매상, 테러 단체의 요인들이 바로 우리 옆에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면 왠지 모를 스릴이 느껴진다. 허름한 건물 2층에 버젓이 차려놓은 무역회사가 실은 정보부의 공작 본부일 수도 있다. 이 책을 읽은 뒤로 나는 주변의 것들에 한층 의심 어린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공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 있다.


저자 아마릴리스 폭스는 어린 시절 친했던 친구를 테러로 잃으며 세계의 위협이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어른이 된 후 버마(지금의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을 도우며 아웅산 수치 여사의 비밀 인터뷰 영상을 BBC에 전달할 정도로 세상을 바꾸는 일에 깊이 개입한다. 그녀는 미국으로 돌아와 9.11 테러를 목격하고, 세상에 난무하는 폭력을 막기위해 테러를 연구하는 대학원에 진학한다. 그리고 거기서 써낸 논문 하나가 CIA의 눈에 띈다.


처음엔 사무직이 되어 입수한 정보를 분석하는 업무를 맡았지만 오래지 않아 CIA 요원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될 수 있는 공작원으로 발탁된다. 훈련 성적이 우수했던 그녀에게 배정된 지역은 당연히도 '중동' 이었다. 그녀는 테러의 심장부에서 무기 밀매상을 회유하고 테러 단체 수장들과 담판을 벌인다.


흥미진진한 영화 시나리오 같지만 사실 이 책은 아내로서, 엄마로서 그리고 CIA 공작원으로서 겪어야 하는 심리적 압박과 도덕적 딜레마를 밀도 높게 그려낸다. 내 아이의 안전을 위해 시작한 일이 다른 나라의 무고한 아이들을 죽일 수도 있는 현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속여야만 하는 비밀 첩보원의 일상. 하나부터 열까지 거짓말로 채워진 '나'는 수많은 위장 신분 사이에서 자아를 잃고 방황한다.


공작이 거듭될수록 폭스는 폭탄 테러를 제압하는 드론 공습으로는 테러를 종식시키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가 찾은 해답은 화해였다. 그리고 화해를 이루기 위해선 신뢰가 필요했다. 신뢰는 너와 내가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는데서 시작된다. 어느날 그녀는 폭탄 테러 첩보를 입수한 뒤 네팔로 떠난다. 테러 단체의 수장과 담판을 벌인 장소는 먼지 가득한 아파트였다. 그는 기침을 멈추지 않는 아이를 안고 있었다. 폭스는 천식이냐고 묻는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가방에서 항상 들고 다니던 정향유를 꺼내 건넸다. 그맘때 아이들은 종종 천식을 앓았고 정향유는 폭스의 아이에게 잘 드는 약이었다. 남자는 테이블 위에 놓인 하얀 꽃잎을 몇 개 뜯어 폭스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몇 개를 더 뜯어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꽃잎은 기침에 쓰는 그 지역의 민간 약재였다. 둘 다 총과 폭탄을 들고 있지만 폭스도 남자도 결국 자기 아이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두 부모의 행동은 무언의 공감으로 이어진다. 복수가 계속되는 한 언젠가 무고한 희생자들 속에 자신의 아이들도 포함될 수도 있다는 생각. 다음날 폭스는 신문을 통해 네팔에서 어떠한 테러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물론 폭스의 고백들에서 미화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원인을 따져보면, 테러를 막기 위해 미국이 존재한다기보다는 사실상 미국이 존재해 테러가 벌어진다는 말이 더 사실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된다.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하다 이제는 그게 잘못임을 깨달았다는 히틀러의 고백을 우리는 잠자코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실컷 때려놓고 이제는 그게 부질없음을 깨달았다며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미국을 편견 없이 바라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 개인의 깨달음과 변화의 의지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도 옳지 않은 일이다. CIA를 관둔 폭스는 난민촌을 돌며 자신이 구상해온 화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언젠가 먼지 가득한 아파트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던 원수들이 동그랗게 앉아 서로가 다른 존재가 아님을 깨닫는다. 설령 이런 노력이 세계를 삽시간에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변화는 원래 그런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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