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크래프트 컨트리
맷 러프 지음, 소슬기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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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크래프트 컨트리>는 짐 크로 법이 남아있던 195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짐 크로 법은 1965년까지 시행됐던 미국의 주법으로 남부 지역의 모든 공공기관에서 인종 분리를 할 수 있게 해 준 법이었다. 1865년이 아니라 1965년이다. 미국은 이때 인간을 달에 보낸다는 상상을 넘어 그걸 현실화할 수 있는 자원과 지식을 가진 유일한 문명국이었다.


공포 소설을 좀 읽어본 사람이라면 H.P. 러브크래프트라는 작가를 들어봤을 것이다. 러브크래프트는 스티븐 킹을 비롯해 수많은 공포 소설 마니아를 신도로 거느린 그 바닥의 신이다. 미국 게임에서 흔히 등장하는 촉수 달린 마신의 배경 신화를(크툴루 신화) 창조한 것도 바로 이 사람이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해봤다면 느조스, 요그사론, 크툰, 이샤라즈라는 고대신을 잘 알 것이다. 이 신들이 바로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를 배경으로 탄생했다.


그러나 러브크래프트는 심각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 다음은 그가 쓴 <깜둥이의 창조에 관하여>라는 글이다.


먼 옛날, 신들이 지구를 창조할 적에

제우스처럼 아름다운 형상으로 처음 인간을 빚었다.

그다음에는 역할이 덜 중요한 짐승을 만들었는데,

인간과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

그 틈을 메꾸고, 인간과 나머지 피조물을 연결하고자,

올림포스 거주자들은 기발한 계획을 구상했다.

인간에 준하는 형상으로 짐승을 빚어

그 안을 악덕으로 채우고는 깜둥이라 칭했다.


<러브크래프트 컨트리>는 러브크래프트가 쓴 소설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수많은 신도 중 하나가 써낸 오마주인가?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을 늘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형태로 읽고 싶었던 내게 이 소설은 괜찮은 선택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책장을 연 순간 러브크래프트 월드를 넘어선 뭔가가 이 소설에 담겨 있음을 알게 된다. 고대 주술, 비밀스러운 종교, 마법, 저주 기타 등등. 작가는 러브크래프트스러운 오컬트를 켜켜이 쌓은 생크림 위에 검은 딸기 하나를 올려놓는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흑인이다.


그러니까 <러브크래프트 컨트리>는 가장 러브크래프트스러운 이야기를 가장 러브크래프트답지 않게 그리는 신비한 소설이다. 짐 크로 법이 흉흉한 눈을 빛내며 살아있던 시대에 검은 피부의 주인공이 나타나 고대 주술에 통달한 백인 갑부를 물리치는 이야기라니. 사상 최악의 인종차별자 소설가에게 내리는 복수로 이보다 더 우아한 걸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러브크래프트 컨트리>는 한국전 참전 용사 애티커스와 그들의 가족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연작 소설이다. 애티커스는 고대 새벽 수도회라는 비밀 종교의 수장이 부리던 한 흑인 노예의 자손인데, 짐작했겠지만 그 뿌리가 백인 주인에게 닿아 있다. 고대 주술을 완성시키기 위해 수장의 혈통이 필요했던 백인이 애티커스에게 마수를 뻗침으로 이 가족의 험난한 모험이 시작된다.


마법과 주술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근원과 원리 등을 상세하게 기술하는 소설은 아니다. 소재는 딱 분위기를 만들어낼 만큼만 적당히 사용된다. 이런 쪽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환상이 현실의 경계를 침범하는 걸 견딜 수 없는 사람이라면 강도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것이다.


주 경계를 넘어 여행하는 건 차치하고 자기가 사는 지역을 벗어나는 것조차 쉽지 않던 시절에 펼쳐지는 흑인의 모험담은 신비주의와 어울려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실제적 비현실과 가공의 비현실이 나무뿌리처럼 얽혀있는 세계. <러브크래프트 컨트리>는 까다롭지 않고, 훈계하지 않으면서도 밝혀야 할 문제를 드러내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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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빈곤 - 개정판
헨리 죠지 지음, 김윤상 옮김 / 비봉출판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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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조지가 <진보와 빈곤>을 쓸 당시의 세상은 부의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다. 제임스 와트와 토마스 에디슨. 증기 또는 전기와 결합한 기계의 도입은 노동의 효율성을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사람들의 마음이 웅장 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태풍 같은 생산력 앞에 빈곤은 곧 꺼져버릴 등불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기대가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있다. AI를 필두로 생산성의 한계가 사실상 사라질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에도 오히려 빈곤은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진보와 빈곤>의 탁월한 점은 낮은 임금에 대한 문제를 자본과 노동의 대결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임금이 "자본이 아니라 노동의 직접 생산물에서 나온다"(p.169)고 말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사장님의 지갑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면 우리의 월급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우리가 한 달 동안 열심히 일해 삽 한 자루를 만들었다고 하자. 그리고 사장님이 당신에게 오천 원의 임금을 지급했다. 이때 사장님은 우리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로 돈을 준 것인가? 아니다. 우리가 만든 삽 한 자루를 오천 원에 사간 것이다!


스타트업에 투자되는 막대한 자본은 언뜻 이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초기 기업이라고 해서 생산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 상품화되지 못한 소스코드, 건조 중인 배, 자라고 있는 수박 기타 등등. 월급은 완성품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화량의 구매 대금으로 볼 수 있다. 이제 막 꾸려진 회사, 말 그대로 직원과 아이디어밖에 없는 회사라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투입되는 엔젤 머니는 이 팀과 아이디어를 구매한 대가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 이제 돈을 가진 사장님이 하해와 같은 아량을 가져 실패할지도 모를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는 게(선금 지급)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사장님은 우리의 '직접 생산물'을 싼 값에 가져가려는 유혹을 버리기가 힘들다. 이는 단순히 사장님이 탐욕을 부려서가 아니다. 사장님의 주장은 매입과 매출의 차이를 정교하게 계산한 값에 근거한다. <진보와 빈곤>은 바로 이 순간 우리가 진짜 눈여겨봐야 할 공동의 적이 누구인지를 가리킨다.


"생산력의 향상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최저액에 머무는 이유는, 생산력 향상과 더불어 지대가 더 큰 비율로 상승함으로써 임금이 낮게 유지되기 때문이다."(p.291)


문제는 땅이다.


"토지를 공동소유로 해야 한다."(p.335)


토지 재산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누가 나서서 그 땅을 개발하겠는가? 하지만 이는 토지와 토지를 이용해 만들어낸 생산물을 구분하지 않는 관습이 초래한 착각에 불과하다. 쉽게 말해 땅은 모두가 갖되 그 위에 지어진 건물은 개인이 가지라는 말이다. 건물주는 멋진 빌딩을 지어 월세를 받고 정부에 토지 사용의 대가를 지불한다. 헨리 조지는 토지에 대한 막대한 조세 수입으로 정부가 다른 직간접세를 폐지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건 우리의 소득이 더더욱 늘어난다는 말이고, 늘어난 소득이 소비로 이어져 경제는 뜨겁게 타오를 것이다.


물론 여러 반박과 이견이 있을 것이다. 공시지가를 올리는 것만으로 정권이 바뀔 수도 있는 '민주 사회'의 특성에 비추어 볼 때 지난 수백 년간 이어져온 기득권의 소유권을 단박에 무효화한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싶다. 토지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룬 나라들도 대부분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넘어가는 대혁명이나 주권 독립 같은 천지개벽을 틈타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설령 토지 공유화에 성공하더라도 그 토지를 관리할 행정력이 충분한가도 의문이다. 건물주가 실제로 얼마의 월세 수입을 올리는지, 그들이 세입자들과 이면 계약을 하는 건 아닌지, 정말로 객관적인 토지 가치의 평가가 가능은 한 건지 기타 등등. 저자는 다른 직간접세를 제거하고 오로지 이 분야에만 행정력을 집중하면 가능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대한민국처럼 조그만 땅에서조차 꾼들이 저지르는 부동산 투기를 근절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이를 AI가 해결할 수 있을까? 제발 그렇게 되기를)


하지만 토지 재산권에 근거가 없다는 주장만큼은 크게 공감이 된다. 지구는 우리의 것이다. 그 누구도 자연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다. 이는 윤리적일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지금 대한민국에 땅을 가진 사람들은 과연 누구에게 그 권리를 이양받은 걸까? 조선으로부터 국토를 물려받는 대한민국인가? 그렇다면 조선은 누구에게 땅을 이어받았는가? 태조는 공양왕(고려의 마지막 왕)과 양도 계약을 맺고 한반도를 차지한 것인가? 태조가 고려의 땅을 무력으로 빼앗아 조선을 세웠다면 지금 우리가 무력으로 다른 사람의 토지를 빼앗을 때 그 권리를 인정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어디 있는가? 끝까지 따지고 들면 우리는 명백한 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땅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것이다.


<진보와 빈곤>은 내용이 어려운 데다 번역도 친절한 편이 아니고 무려 570페이지에 달하는 책이라 쉽게 펼치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 주장이 세상 어떤 사상가와도 결을 달리한다는 점에서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다. 헨리 조지는 19세기 사람이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삶이 그때와 별반 다를 거 없다는 거, 아니 오히려 더 악화됐다는 건 우리의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 같은 주장은 동일 국가 내에선 별문제 없이 받아들일 수 있더라도 국가 대 국가의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좀 더 깊이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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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3-07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지의 공유개념은 오래된 개념인데 이렇게 보니 또 새롭네요. 실현여부는 의문이 많이 들지만.... 하지만 실현과 상관없이 이런 생각을 점점 퍼뜨러가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깨짱 2021-03-09 13:48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모든 혁명은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이니까요. 맘 먹고 하면 또 못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모두가 한 마음만 먹는다면요.
 
야간 경비원의 일기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0
정지돈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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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돈의 소설들은 좀 긴 잡담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문득문득 위트와 유머가 번뜩이고, 어려운 내용은 하나도 없다. 특기할만한 서사가 없기에 소개하기도 좀 애매한데,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야간 경비원들이 몇 명 등장하고 그중 하나가 쓰는 일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사람들은 서사가 파괴된 실험적 소설을 읽고 나면 대개 아래와 같은 반응을 보인다.


1. 이게 소설이야?

2. 내가 모르는 뭔가가 숨겨져 있는 게 분명해

3. 음... 그렇군


1에 속하는 사람들은 다시 두 부류로 나뉜다.


1.1 책을 거의 읽지 않는 사람

1.2 정말 대단히, 순수하게, 진심으로 스트레이트한 성격을 가진 사람


이들은 블랙 유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풍자나 해학, 한두 번 꼬인 시니컬한 표현에 뚱한 표정을 짓는다. 쉽게 말해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고 우리 세계는 대부분 이런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오늘도 정상 궤도를 질주한다. 스트레이트 하게, 나는 이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산다.


2에 속하는 사람들은 책 읽기에 열심히고 거기서부터 뭔가를 배우려는 사람들이다. 활자가 인쇄된 종이 무더기에 무의식적으로 권위를 부여하며 마음이 무언가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늘 뜨겁게 달아오른다. 그냥 먹고 끝내면 될 일인 평양냉면을 그 유래부터 진지하게 설명하거나 <테넷> 같은 영화에서 우리가 몰랐던 소름 돋는 복선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끈덕지게 늘어놓는 사람들이다. 음모론에 쉽게 빠지거나 간혹 앤디 워홀 같은 사람을 예술가로 만드는 실수를 저지르긴 하지만 대체로 마음이 순수하고 착한 사람들이다. 이들을 친근하게 '오덕'이라 부르기도 한다.


3에 속하는 사람들은 권위와 정돈된 이론에 태생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이다. 세상에 대해선 시니컬한 태도를 보이지만 그래도 사고는 꽤 열려있는 편이다. 이들에게 설명을 요구하면 '음... 뭐 그냥 그런 거지' 라거나 '네가 본 대로 이해하면 돼' 같은 하나마나한 대답을 한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다시 아래와 같이 분류할 수 있다.


3.1 설명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게 진정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사람

3.2 자기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


나는 한때 2에 속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내게 문학을 이해하는 능력이 전무하다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의 해석을 포기한 채 그냥 3-2처럼 살기로 했다. '살기로 했다'라고 말하면 마치 내가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무능력에 의한 것이니 그냥 3-2가 '되었다'라고 말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도 당신이 기대하며 찾았을 '정지돈 <야간 경비원의 일기> 해석' 같은 건 단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쓸데없는 얘기만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것이 문학적으로 어떤 실험을 하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정지돈의 소설들이 꽤 재밌다. 고르라면 장편보다는 단편인데, 처음 읽은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워낙에 재밌게 읽은 탓도 있고 잡담과 농담은 늘 길이와 재미가 반비례한다는 지론을 갖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지론은 개인적 취향이 반영된 것이긴 하지만 상당한 경험의 축적으로 귀납된 판단이라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한다.


자, 요약하면 2나 3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면 <야간 경비원의 일기>에서 무리 없이 재미를 느낄 것이다. 본인이 1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것도 경험이지, 도전! 하는 괜한 의욕은 접고 쿨하게 건너뛰기를 추천한다. 세상엔 읽어야 할 게 차고도 넘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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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9
김희선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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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곡 마을에 거주하던 노인들이 모두 사라졌다. 팔곡은 이름 그대로 8개의 계곡이 만나는 지점에 형성된 마을이다. 내륙으로 이어진 길은 크게 돌아가야 하고 앞에는 호수가 있어 배를 타고 들어와야 한다. 천혜의 밀실이다. 마을 이름부터 소년 탐정 김전일을 배경을 연상케 한다.


노인들의 실종을 처음으로 발견한 건 우체부였고 그가 관할 파출소에 신고해 조사가 시작된다. 썰렁한 마을엔 공포가 깔리고 이장의 집에 누워 있는 옥수숫대는 그로테스크를 더한다. 호들갑을 떨며 이상한 집념을 발휘하는 우체부와 달리 파출 소장 박 경위는 의심과 수긍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노인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꼭 사건으로 연결될 합리적 근거가 되는 건 아니다. 노인들이 단체로 배를 타고 나간 흔적은 없지만 육로는 막히지 않았다. 시골 노인들이 흔히 그러듯 관광버스를 전세 내 단체로 여행을 떠난 것일 수도 있다. 이장의 자녀와 연결이 됐지만 그의 대답도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는 없다. 잠깐 다녀오는 여행을 부모가 자식에게 일일이 보고할 필요는 없으니까. 자식이 모른다고 해서 단체 여행이 실종으로 바뀌는 건 아니다.


그러나 박 경위는 피부에 와 닿는 위험을 감지한다. 우체통에 가득 찬 웰다잉협회의 우편물. 늦은 시각 배를 타고 들어오면서 시청한 웰다잉협회의 홍보 영상. 그리고 그 영상을 본 뒤 물로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하려 한, 자기 자신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일련의 경험은 박 경위의 기억 속에서 팔곡 마을의 과거를 끌어올린다. 팔곡은 장수로 유명한 마을이었다. 그걸 축하하기 위한 잔칫날, 노인들은 박 경위가 배 안에서 본 웰다잉협회의 영상을 단체로 시청한 경험이 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인 하나가 물에 빠져 죽는 사고가 나기도 했다. 모호한 단서들과 드문 드문 떠오르는 기억, 텅 빈 마을이 무거운 안개처럼 깔리며 긴장감을 조여 온다. 그리고 마침내 피가 폭발한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힘을 잃고 급속도로 하강한다. 짙게 깔렸던 안개는 순식간에 나타난 햇빛에 힘 한번 쓰지 못하고 증발해버린다. 여기서 자초지종을 모두 떠벌이면 스포일러가 될 테니 삼가겠지만 뒤틀린 사상에 경도된 어떤 단체가 등장한다는 것만 알아두자. 이야기는 논리적 매듭을 짓기를 포기한 채 이 단체에 무소불위의 힘을 부여한다. 때맞춰 경찰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며 정체를 밝힐 유일한 단서를 놓쳐버린다.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드리지요.


이 구절을 읊을때마다 절로 마음이 편해진다는 비밀 단체의 보스는 그렇게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의도는 어슴프레 짐작하지만 방법이 그것뿐이었는가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도입부가 너무 기대감을 높인 탓일 수도 있다. 뭐가 문제였는지 이야기는 장르 소설에서 급격히 유턴해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질주한다. 짙은 스키드 마크. 매캐한 고무 탄내. 사이렌을 울리며 따라가 묻고 싶다. 어딜 그렇게 급히 가느냐고. 이 길은 어디로 향하는 길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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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능력을 교환해드립니다
이누이 루카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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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능력을 교환해드립니다>는 7개의 연작으로 구성된 환상 소설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양이 신선? 요괴? 아무튼 무언가에게 사로잡혀 '바쿠리야'라는 가게를 떠날 수 없는 한 남자가 찾아오는 손님들의 능력을 교환해 준다. 이런 것도 능력이야? 라고 생각되는 것도 상관없다. 모든 여자에게 무한한 사랑을 받는 남자, 살던 곳을 떠나려고 하면 늘 폭우가 내리는 기인, 다니는 모든 회사를 파산시키는 저주왕 등등. 성격만 맞는다면 능력은 얼마든지 교환 가능하다. 단, 조건이 있다. 바뀌는 능력을 선택할 수는 없다는 것.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날 수도 있다. 그런 사태를 후회하지 않을 사람들만 '바쿠리야'에서의 교환이 가능하다. 참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다.


'바쿠리야'가 이야기의 중심인 것은 맞지만 7편의 소설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갖는다. 패턴이 좀 지루할 만도 한데 나름 요리조리 비틀어 각각의 등장인물들을 '바쿠리야' 앞에 데려다 놓는다. 각오가 되면 가게 구석에 앉아 쉬던 고양이가 손님의 손등을 할퀴고 주인은 그 피를 수집해 병에 담는다. 능력이 바로 교환되는 것은 아니고, 서로 성격이 맞아야 한다. 하지만 이 성격은 겉으로는 알 수 없다. 예컨대 제구가 되지 않는 강속구를 던지는 능력이 무언가를 잘 빠는 능력과 교환되는 식이다. 뭘 기대했는가?


교환될 능력이 결정되면 각각의 주인들에게 '바쿠리야'의 편지가 도착한다. 그리고 그날 자정 능력이 교환된다. 번개가 치고 돌풍이 부는 건 아니고 그냥 스르륵 무언가가 빠졌다가 들어간다. 자기가 어떤 능력을 갖게 됐는지는 느낌으로 알 수 있다. 대개는 해피엔딩인데, 때로는 그렇게만은 부를 수 없는 결말이 기다린다. 인생지사 역시 새옹지마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소설은 쉽고 간결하다. 치밀한 심리 묘사나 가슴을 탁 치는 문구 같은 건 없다. 문장은 오로지 전개를 위해서만 헌신한다. 이야기는 파바박, 책장은 훌훌 날아다닌다. 솔직히 일본 장르 문학의 전형적 특징을 답습한다. 오로지 재미를 위해서 읽는 책이다.


나는 이런 소설을 읽을 때마다 외국의 크고, 다양한 출판 시장이 부러워진다. 우리는 책과 독서라는 행위에 너무 커다란 짐을 지우는 경향이 있다. 생각 없이 TV를 키는 것처럼 책을 펼 수는 없는 걸까? 심심풀이 땅콩 역할을 하는 책이 과연 저 위대한 문학들보다 가치가 떨어지는 걸까? 따지고 보면 문학이라는 것도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게 얼마 안 됐는데 말이다.


<당신의 능력을 교환해드립니다>를 읽는다고 해서 대단한 소양이나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킬링타임. 요즘 같은 시국에 시간을 잘 때울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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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2-14 0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의 효용은 무궁무진. 킬링타임에도 최고죠. ^^

한깨짱 2021-02-15 14:11   좋아요 0 | URL
최고의 친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