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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대담한 작전
유발 하라리 지음, 김승욱 옮김, 박용진 감수 / 프시케의숲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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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중세에서 르네상스 시대에 벌어진 전쟁들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했던 특수 작전들에 대해 얘기한다. 하라리에 따르면 특수 작전은 근대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UDT, 네이비씰, 파라레스큐, S.A.S, 그린베레 등 화려하게 등장한 특작부대의 전설적 이야기에 매료된 것일 뿐, 특수 작전은 시대를 막론하고 실행된 중요한 군사 작전이었다.


물론 그 규모에선 차이가 있다. 오늘날의 특작부대는 최첨단 헬기를 타고 사막의 폭풍을 뚫고 들어가 요새의 방어 병력을 무력화 시킨 뒤 요인을 사살하거나 댐, 발전소, 다리, 산업 시설 등 중요한 인프라를 소수의 인원으로 파괴한다. 반면 1,000년의 특작 부대는 야음을 틈타 몰래 성벽을 넘거나 적국의 '방앗간'에 침투해 맷돌과 물레방아를 파괴했다. 이 규모의 차이 때문에 특수 작전이라는 말에 헛웃음이 나올 수도 있지만 작전의 성공이 초래하는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일례로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강력한 왕이었던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는 전력상 한 주먹거리도 되지 않는 프랑스를 거의 망국 직전까지 몰고갔지만 적 특작부대의 습격으로 방앗간이 파괴돼 전군을 퇴각시켜야만 했다. 곡식을 가공할 수 없었던 황제의 군대는 설사병을 비롯 온갖 질병에 시달려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전투에서 죽은 사람보다 먹을 것 때문에 사망한 사람이 더 많았다. 황제의 군대가 완전히 퇴각했을 때 처음 국경을 넘었던 6만명은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만약 황제에게 방앗간이 두개만 남아 있었어도 유럽의 정치 지도는 오늘날과 확연히 달랐을 것이다.


이처럼 특수 작전은 정규전에 비해 훨씬 효율적이었다. 중세의 기사들이 기사도 운운하며 정의로운 전쟁을 치렀다지만(전쟁이 정의로울 수도 있나?) 그들이 저지른 수 많은 암살, 납치, 감금 사건들을 보면 그 고귀한 기사들도 야비한(?) 특수 작전이 가져다 주는 달콤한 결과의 유혹에 무적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전쟁은 대단히 많은 자원이 들어가는 일이고 대단히 많은 희생을 필요로 한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전쟁에 져서 망한 국가 못지않게 전쟁에 이기고도 망한 국가가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쟁은 전형적인 고비용 저효율 사업이었던 것이다.


특수 작전의 실행 계획이 대단히 창의적이었나 하면 그렇지도 않다. 특별한 재능을 가진 소수만이 할 수 있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고작 인맥을 이용해 내부의 배신자를 포섭하거나 가장 허술한 성벽을 타고 오르거나 밤새 걸어 방앗간을 파괴한 뒤 기마병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산길로 행군을 했을 뿐이다. 그야말로 대담함 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계획. 이는 굳건해 보이는 시스템도 의외로 수많은 취약점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는 늘 창조적 파괴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오늘날의 기업 경영자들에게도 귀감이 될 만한 사실이다.


<대담한 작전>은 한국에 소개된 유발 하라리의 네 번째 책이지만 쓰여진 시기는 <호모 사피엔스>나 <호모 데우스>보다 이전이다. 아직 학계에서 뚜렷한 존재감은 없던 시절이었는지 지난 두권의 책에서 보여줬던 유발 하라리의 대담한 해석과 도발적인 문제 제기는 전무하다. 마치 보수적인 교수에게 제출하는 논문처럼 문장은 얌전하고, 겸손하고, 모범적이다. 지겨울 정도로 계속되는 사실의 나열은 사료 수집에 대한 저자의 노력을 인정하는 계기가 될 수는 있어도 이 책을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지는 않는다. 지난 두 책의 전율을 기대한 사람이라면 이 책 <대담한 작전>에서는 결코 대담한 주장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내 마음 속엔 오로지 하나의 생각만이 강렬하게 떠올랐다. 나는 <호모 데우스> 이후의 하라리가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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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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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편집에는 아주 중요한 소설 두 개가 담겨 있다. 하나는 <상실의 시대>의 프리퀄이라 볼 수 있는 <반딧불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영화 <버닝>의 원작 <헛간을 태우다>이다. 두 작품 모두 하루키의 전매특허인 부유하는 인간들의 피상적 관계 맺기가 그려진다. 이야기는 언제나 그렇듯 뿌연 안개 속에서 길을 잃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부분을 하루키 특유의 허세라거나 같잖은 센티멘탈로 치부하는데 나도 이런 생각에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역시 같은 책에 수록된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의 일부를 인용하면, 하루키는 구체적인 사물이 아니라 정경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 너무 사실적인 정물은 사람들로 하여금 고정불변의 판단을 강요한다. 예컨대 우리 눈 앞에 코카콜라 병이 나타난 순간 우리는 그것을 코카콜라 병 이외의 것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하나로 뭉쳐진 정경으로 제시된다면, 우리는 그 모호함으로 인해 오히려 더 많은 의미를 마주하게 된다. 의미의 범람은 혼란이 아니라 축제다. 정해진 것이 없다는 것은 그 무엇도 될 수 있다는 말.


사람들은 뿌리 없이 부유하는 삶에 대해 대부분 부정적 태도를 갖고 있지만 나는 글쎄, 그건 그대로 꽤 괜찮은 삶이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생각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강해진다. 나에게 관계란 말은 너무 뜨겁고 그 열기는 언제라도 나를 질식시킬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이 좀 더 차가워졌으면 좋겠다. 부유하는 삶에 밧줄을 던져 자꾸만 땅으로 끌어내리지 말고 유유히 하늘을 날 수 있도록 내버려뒀으면 좋겠다. 가까운 사람들은 이런 말에 서운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나는 그들이 하루 빨리 진실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타인은 타인일 뿐이다. 이 진실의 허무를 외면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강하게 서로를 잡아당겨 그 공허를 메우려하지만 서로의 숨통을 더 옭아맬 뿐이다. 우리는 결국 혼자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우리의 관계는 늘 폭력으로 변질될 위험을 잉태한다.


<헛간을 태우다>의 '나'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나'는 땅 위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헛간들, 속이 텅 비었고 언제든 다시 짓거나 허물어 버릴 수 있는 헛간, 즉 부유하는 인간들을 언제나 내 눈 앞에, 내 손과 발이 닿는 곳에 놔두려 한다. 아프리카 남자가 나와 아주 가까운 헛간을 태우겠다고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의 헛간을 지키기 위해 매일 아침 그 주위를 달린다. 그는 애초에 잡아둘 수 없는 것들, 잡아 둬선 안 되는 것들을 잡아두려 하는 것이다.


아프리카 남자는 헛간을 태우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완전히 옳은 일이며 심지어 헛간은 자신이 태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헛간을 태운다는 의미는 유유히 부유하려는 삶을 끝끝내 땅 위에 매어 두려는 세상의 온갖 시도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뜻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 남자를 악당으로, 심지어 그가 그녀를 죽인 거라고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독이 되는 사람은 오히려 '나'다. 쿨한척 가벼운 만남을 즐기는 것 같지만 '나'는 이미 그녀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헛간(그녀)를 지키기 위해 매일 아침 수 킬로미터를 달리며 그녀로부터 연락이 끊어지자 집을 찾아가기도 한다.


아프리카 남자는 그녀가 '나'를 정말로 신뢰한다고 말한다. '나'와 그녀 사이에 이미 재앙의 싹이 튼 것이다. '나'와 그녀는 유부남과 미혼녀라는 사회적 관계를 초월해 진정 인간대 인간으로, 존재대 존재로, 한 영혼과 영혼으로서의 관계를 만들 수 있었을까? 그리하여 두 사람은 영원히 부유하는 삶을 마치고 단단한 땅 위에 뿌리를 내려 시간의 물결에 씻겨나가지 않도록 서로의 존재를 지킬 수 있었을까?


나는 세상이 좀 더 쿨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존재를 옭아매는 건 언제나 타자의 존재다. 관계는 결코 영혼을 살찌울 수 없다. 누군가와 쌓은 신뢰를 영원히 지키는 법은, 애초에 신뢰를 쌓지 않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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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형사 부스지마 스토리콜렉터 64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김윤수 옮김 / 북로드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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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작 소설집이 나카야마 시리치 작품 세계의 전형이라면, 내 여행은 여기서 끝인 것 같다. 그의 다른 책은 읽을 필요도 없다. <작가 형사 부스지마>는 사실 드라마 각본이라고 불러야 더 마땅한 소설이다. 지문은 짧고 대화는 "에엣?" 하는 일본 드라마 특유의 오버액션이 서슴지 않고 등장한다. 전반적으로 가볍고 뻔하고 납작하다. 이것이 이른바 새시대의 요구라면 그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내 능력의 한계에 아득함이 느껴진다.


작가 그리고 형사 부스지마는 과거 유명한 경찰이었으나 지금은 미스테리 소설을 써 50만부 정도는 거뜬히 팔아치우는 잘나가는 작가다. 경찰은 퇴직을 하자마자 수사 지도원으로 재취업을 했는데, 그 탓에 형사 사건 수사와 소설 쓰기를 같이 하는 독보적 캐릭터가 된다.


이 독보적 형사, 아니 작가님의 파트너로는 누가 좋을까? 수사과의 베테랑 형사들은 모두 손을 내젓는다. 부스지마(毒島)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그 작가 선생의 유별난 성격과 독설은 이미 경찰서에서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시 신참 여형사 밖에 없다.


우당탕탕. 좌충우돌. 아직 완전한 형사가 되기 전의 반푼이 신참. 이 소설을 읽고 있으면 일본 드라마가 여성 캐릭터를 소비하는 전형적 만행을 볼 수 있다. 그 나라 남자들은 어딘가 좀 모자란 여자, 그리하여 남자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여성 캐릭터를 좋아한다는 걸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독설에 일가견이 있는 베테랑 작가 형사와 신찬 여형사의 조합은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 <리갈 하이>를 연상시킨다. <작가 형사 부스지마>도 차라리 처음부터 드라마로 나왔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랬어도 별로였을 것이다. 다섯 편의 연작 소설은 모두 출판계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다루는데, 아무리 그 바닥이 엉망진창이어도 그렇지 어떻게 매번 살인 사건이 벌어지겠는가? 에피소드가 세번만 이어져도 벌써 현실감이 떨어진다.


어떻게보면 그게 이 책의 매력일 수도 있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했던 말 같은데, 어차피 소설이란 그저 재밌자고 읽는 킬링타임용 콘텐츠 아닌가. 철학이 그렇다면, 그건 그 나름대로 존중해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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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에트가르 케레트 지음, 장은수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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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에는 서른여섯 편의 소설이 담겨있다. 7, 800페이지 짜리 책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 고작 260페이지가 넘는 짧은 단편집이다.


2페이지에서 3페이지, 심하면 한 페이지 만으로 끝나버리는 초단편 소설을 읽으며 들은 생각은, 참으로 부럽다는 것이었다. 천편일률, 1만 6천자에 끼워져 있는 우리 나라 단편 소설들이 안쓰럽기도 했다. 코르셋에 비명을 지르는 구시대의 여자들처럼, 소설이 내지르는 고통의 비명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어떤 이야기들은 섬광처럼 지나가야 한다. 할 얘기를 다했으면 그게 단 한 문장 뿐이더라도 소설은 펜을 놓고 책상을 떠나야 한다. 규격을 맞추기 위해 구질구질 이야기를 늘이는 건 단어의 낭비다.


그러나 두세페이지 짜리 소설들로 창작 활동을 계속해나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정기적인 연재 코너가 있을까? 매회 분량을 맞춰야 할테니 그건 어려울 것이다. 이 정도 작가가 개인 블로그에 작품을 올리진 않을거고, 그렇다면 오직 단행본을 통해서라는 건데 전세계적으로 불황인 출판업계, 그것도 비주류에 속하는 단편 소설이 전세계의 심을 받는다는 건 이 책의 저자 에트가르 케네트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스타일과 주제 의식, 기발한 상상력을 갖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그러나 나는 이 책의 주제 의식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 도저히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모르겠는 소설도 많았다. 외국에선 현대인의 실존적 혼란, 인간의 어두운 그림자, 부조리 등을 언급하며 이스라엘의 카프카 혹은 고골로 평하는 모양인데 나에겐 이런 것들이 그닥 중요하지 않다. 어떤 작가가 카프카에 비견된다고 해서, 혹은 그가 부조리를 다룬다고 해서(물론 후자는 검토해볼 여지가 있다) 이야기가 더 재밌어지는 건 아니다. 나에겐 스타일이 훨씬 중요하다. 그것은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주제를 종이에 써서 눈 앞에 들이미는 게 아니라 어렴풋한 인상을 남긴다. 인상은 늘 실체보다 오래남고 시간에 따라 하늘하늘 다양한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건 기발한 상상력이다. 이야기를 읽으며 "아, 세상엔 아직도 쓰여지지 않은 이야기가,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이토록 많구나." 하는 충격을 주는 쪽이 나에겐 진정 위대한 소설이다.


그런 면에서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는 말 그대로 낯선이의 방문이 선사하는 신선함과 떨림을 아낌없이 선사하다. 마치 마그리트 그림 속의 오브제들이 가득한 방으로 초대된 것처럼. 눈을 떠보니 양복을 입은 참다랑어가 내 손 등에 축축한 지느러미를 올려놓으며 그날 오후 자신이 겪은 신비한 이야기를 떠들고 있다. 샹들리에에는 빛을 내는 박쥐가 거꾸로 매달려 있고 작업복을 입은 낙타가 씽크대의 배관을 수리하는 중이다. 지렁이 DJ가 트는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모두들 빨갛고 노랗고 파란 술잔을 들고 있다. 그리고 등 뒤엔 칠흑같이 어두운 현관문 하나가 알수없는 불안을 뿜어댄다. 방안의 누구도 그 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지만 문의 존재를 모른다기 보다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바로 그때 문 뒤에서 "쾅, 쾅." 하는 노크 소리가 들린다. 방안의 모두는 그 노크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한 듯 여전히 신나는 음악에 몸을 흔들고 있지만 눈을 한번 깜빡 할 정도의 시간, 아주 찰나의 순간 손에 잡힐듯 경직된 침묵을 느낀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검은문을 쳐다본다. 나는 참다랑어와 낙타와 박쥐와 지렁이 그 밖의 모든 존재의 외면을 무시하고 문으로 향한다. 다시 한번 "쾅, 쾅." 노크 소리가 들린다. 이제 그 소리는 방안의 누구도 깜짝 놀래킬만큼 명확하고 우렁차다. 하지만 그들은 애써 소리를 무시한다. 나는 참다랑어를 쳐다본다. 그의 몸 위를 흐르는 물기가 바닷물인지 아니면 땀인지 알 수 없다. 나는 그들이 온 힘을 다해 부정하려는 불안을 못본채하며 문고리를 잡는다. 그리고는 마침내, 


검은색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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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신이 된 시장 : 시장은 어떻게 신적인 존재가 되었나
하비 콕스 지음, 유강은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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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된 시장>이라는 제목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우선 시장을(market)을 시장(mayor)으로 읽을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본 순간 그렇게 오해했고 꽤 흥미로운 '소설'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내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이 책이 말하는 시장(market)은 시장(mayor)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제목에서 우리는 현대 경제 체제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자조를 섞어 던졌던 말이 기억난다. 정치 권력은 이제 경제 권력의 노예가 됐다(명확한 표현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이런 의미였던 것 같다). 바야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쟁취한 '물신'의 등장. 물신의 지배 아래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 몇몇은 레지스탕스를 조직하여 아직 영생을 얻지는 못한 물신에 마지막 비수를 꽂아 넣으려 한다. 오공의 머리에 금고아를 씌우는 삼장처럼, 양손에 목줄과 족쇄를 들고 폭주하는 물신을 잡으려 한다. 그렇다면 <신이 된 시장>은 레지스탕스를 모집하는 공고문일까?


내 기대는 또 한번 박살났다. 이 책은 시장의 부패한 이면을 들춰 사람들을 자각시키고 그들의 마음 속에 저항의 씨앗을 심으려는 의도가 없다. 이 책은 저항의 마음보다는 지적 호기심의 향취를 따라 제목에 대한 나름의 이유를 밝힌다. <신이 된 시장>은 시장이 신성화 되가는 과정을 낱낱히 파헤치기보다는 현대의 시장이 얼마나 신과 닮았는지를, 현대의 신이 얼마나 시장을 닮으려 하는지를 밝힌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시장과 신이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깨닫고 놀라게 된다. 시장은 늘 신과 함께였다. 신약 성서에서 시장과 관련된 가장 유명한 대목을 떠올려보자. 예수가 성전 앞에 줄지어선 장사치들의 좌판을 뒤엎으며 그들에게 내뱉었던 독설을 말이다. 중세로 가면 인류 역사상 최초의 쇼핑몰이 바로 성당을 마주한 길가를 따라 형성되는 걸 볼 수 있다. 과거엔 성당 건축물이 인류 최대의 엔터테인먼트였다. 높은 천장, 색색의 빛으로 스며드는 스테인드글라스, 사방을 채운 아름다운 벽화들. 오늘날 대형 쇼핑몰은 정확히 고대 성당의 유산을 계승한다. 이뿐인가? 신자유주의자들이 IMF와 세계은행을 이용해 온갖 나라의 시장을 개방하려는 노력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는 성경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된걸까? 과거에는 고작 신에게 기생하여 자기 생명을 유지하던 시장이, 어느새 신과 마주 앉아 서로의 이익을 논하더니, 이제는 도리어 신을 몰아내고 그 왕좌를 차지하게 된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걸까?


결국 지상의 신은 인간문화의 산물일 뿐이고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흥망성쇠의 운명을 따라 자기 생을 다하는 것일까? 인간은 지구상 그 어떤 생명체 보다도 자기 입맛에 따라 사는 동물이다. 오늘날 우리는 좌판을 발로 차며 그들에게 도덕적 각성을 촉구한 예수의 말씀보다는 그 좌판을 어떻게 채워야 더 많은 상품을 팔 수 있는지 알려주는 시장의 말을 더 선호한다. 하지만 예수의 분노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물신은 21세기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은 2018년에도, 서기 30년에도 '시장에 쏠려 있었던' 것이다. 


이 쏠린 마음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 나타났을 때부터 함께했을지 모른다. 달라진게 있다면 한때 신의 말과 심판을 두려워했던 우리가 지금은 주택담보대출과 카드 연체를 더 두려워한다는 것. 오늘날 신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은 물신의 영원한 번영을 위해 축복을 내리고 그것이 늘 우리와 함께 하기를 기도해 주는 것 뿐이다.


인간이 변한걸까? 아니면 시장이 강해진걸까?


다음엔 꼭 이 질문의 답을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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