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신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0
손보미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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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경찰대를 졸업한 수재다. 경찰청에서 3년을 근무한 뒤 민간 조사원이 됐다. 실력이 좋았고 고객은 탄탄했다. 그는 매일 정해진 루틴을 따른다. 그가 이 루틴을 깨는 경우는 한계치에 이르렀을 때다. 이른바 '포화'라고 부르는 단계에 다다르면 그는 모든 일을 중단하고 휴가를 떠난다.


그런데 그가 휴가를 떠나는 날 VIP 고객으로부터 의뢰를 하나 받는다. 그는 한번도 자신의 원칙을 어겨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아무리 중요한 고객의 부탁이라도 딱 잘라 거절할 수 있을만큼 고객층도 탄탄하다. 하지만 의뢰인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그는 7년 동안 단 한 번도 취소해본 적 없는 휴가를 미루고 프랑스로 출국한다.


여자는 프랑스로 입양을 간 동양인이다. 거기서 대학을 졸업했고 뉴욕의 전시 에이전시를 거쳐 지금은 예술재단에서 일하고 있다. 그녀는 프랑스인도 미국인도 동양인도 아니었다. 그녀의 친구는 끊임없이 타오르는 담배 연기 뿐이다.


어느날 그녀에게 고등학교 동창의 편지가 도착한다. 동창은 그녀와 같은 동양인이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녀를 미워했다. 따돌렸다. 동창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편지는 그의 어머니가 보냈다. 그녀에게 남긴 유서와 유품이 있으니 프랑스로 와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그녀는 의아했지만 프랑스로 가보기로 결심한다. 대학 졸업 이후 영원히 떠나버린 나라. 나쁜 기억의 고향으로.


우리가 운명이라고 부르는 모든 사건은 사실 우연에 불과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삶은 우연과 우연이 주고 받는 상호작용의 결과다. 당신과 함께 하는 그 혹은 그녀는 당신과 어떠한 운명으로도 얽혀 있지 않다. 당신은 인연을 맺기까지 연계된 수 많은 우연을 보고 감탄할 지도 모른다. 그토록 많은 우연의 결과라면, 그토록 희박한 확률의 결과라면,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건 결과론적인 얘기일 뿐이다. 인간은 단 한 번의 삶을 살기에 현재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연은 운명으로 가장된다. 돌이켜볼 수록, 되짚어볼 수록, 우연은 운명처럼 보인다. 완전한 착각이다.


<우연의 신>은 재료만 잔뜩 꺼내 놓고 채 끝내지 못한 요리 같다. 우연을 계기로 맺어진 두 남녀의 관계가 흥미진진하게 흘러가는 듯 싶지만 어느덧 탄산이 빠진 맥주처럼 거품이 사그라든다. 추리와 멜로가 교묘하게 맛을 이룬 케이크를 기대했지만 씹고 삼키는 동안 둘 중 어느 맛도 기억에 남지 않는다.


급작스럽게 끝나는 이야기는 우연을 운명으로 가장하지 않기 위한 장치일지도 모른다. 엔딩은 없다. 완결은 없다. 인생은 끊임없이 얽히고 설키는 우연의 연속일 뿐이니까. 우연히 만난 두 남녀는 역시 우연에 따라 허무하게 헤어질 수 있다. 그리고 두 남녀는 '포화'에 이른 남자가 떠난 휴가지에서 다시 만날 수도 있다. 그걸 운명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우연은 우연일 뿐이다. 우연의 사전엔 운명이라는 단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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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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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김영하에 거는 기대도 달랐다. TV로 접한 작가는 생각했던 것보다 소양의 깊이가 깊었다. 엄청난 독서량은 말할 것도 없고,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새겨둘만한 점이 많았다. 이야기에 거는 기대가 컸고, 들려오는 소문도 그에 합당한 듯 보였다.


<살인자의 기억법>으로 김영하 전체를 평가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그는 멈추지않고 쓰는 작가이며 이 책은 수많은 작품중에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김영하는 이 책을 쓰는 게 그 어떤 작품보다도 어렵다고 고백하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여럿 있다. 이 소설은 살인자의 내레이션만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사건은 기억속에서 전진하는데 문제는 이 화자가 치매를 앓는 노인이라는 점이다. 기억은 분절되고 점점 흐릿해진다. 작가는 이 안개 속을 깜빡이는 노인의 기억에만 의지한채 헤쳐나가야 한다. 모든 것이 불명확하고,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 단서는 토막난 시체가 뿌리는 핏자국처럼 점점이 흩어져 있다.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더 답답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소설가가 작품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인물이 탄생하는 순간 작가는 뒤로 물러나 화자의 말을 받아쓰는 필사가로 전락한다. 자유는 없다. 1인칭 시점은 작가를 똑같이 알츠하이머를 앓는 노인으로 전락시킨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소재가 전율을 일으키는 소설이다. 치매를 앓는 연쇄살인범의 주변에 새로운 연쇄살인이 발생한다. 주인공은 그 살인을 경계한다. 자신의 가족과 너무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치매는 가까운 기억부터 차례대로 사라지는 질병이다. 치매 노인의 기억은 최근에 발생한 그 사건들이, 과연 본인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확증해줄 수 있을까?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치매와 연쇄살인의 조합이 이토록 파괴적인 미스테리를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하지 못했다. 물론 김영하가 이 미스테리를 효과적으로 풀어냈는가는 별도의 문제다. 이 부분을 상세히 말하는 건 읽는 맛을 심각하게 떨어뜨릴 수 있어 조심스럽다. 단 하나의 단어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깜빡이는 노인의 기억은 채 200페이지를 넘기지 않는다. 짧은 악몽은 불행일수도, 다행일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의 판단은 어떨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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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도서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카트 멘쉬크 그림 / 문학사상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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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와 카트 멘시크의 조합은 <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동안 소설을 쓰지 못했던 하루키의 불안이 절묘하게 스며든 이 책은 멘시크의 기괴한 일러스트레이션과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그 어떤 공포 소설 보다도 무서웠던, 하루키의 소설 전체를 놓고봐도 참으로 이례적인 소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은 <버스데이 걸>이다(이는 출간 순서가 아닌 내가 이 시리즈를 접한 순서다). <잠>과는 달리 이 책은 하루키 소설의 전형을 담고 있다. 정체불명의 노인, 젊은 여자, 기이한 체험. 성인이 된다는 것, 특정한 공간, 특정한 시간에 선택한 뭔가가 인생의 방향을 결정할 수도 있다는 것. 스무살이라는 상징적 나이가 미스테리와 어울리며 독특한 분위기를 냈던 소설이다. 여기서도 카트 멘시크의 그림은 여자가 겪어야 했던 낯선 사건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했다.


그리고 <이상한 도서관>이다. 출간 시기는 <잠>과 <버스데이 걸>의 사이(한국 출간 기준)지만 이야기의 결은 정의 내리기가 어렵다. 하루키의 모든 작품들이 체계없이 용융된 느낌이랄까? 사건은 그야말로 괴괴하다. 우연히 책을 빌리러 갔던 남자가 시립도서관 지하에 있는 감옥에 갇히게 되는 이야기인데,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나 <양을 쫓는 모험> 그 밖에 판타지가 섞인 어떤 소설보다도 개연성이 떨어진다. 하루키의 소설엔 믿을 수 없는 환상이 현실에 버티고 있다거나 샌더스 대령(KFC 할아버지) 같은 엉뚱한 인물이 주요한 매개체로 등장하고, 주인공들이 그 낯선 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특징이 있지만 적어도 그들의 모험 자체에는 나름의 이유가 명확히 존재했다. 그들은 기괴하게 변한 현실의 늪을 빠져나가 원래의 자기 것을 구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그것이 자아든, 기억이든, 문자 그대로 세상 그 자체였든 간에 말이다. 그런데 <이상한 도서관>의 주인공은 감옥에 갇혀 우는 게 전부다. 그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견뎌낼 자신도 없으면서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답답한 태도를 취한다. 소설은 괴괴의 총집합을 작정이라도 한 듯 온갖 괴물들을 쏟아내지만 거기서 어떤 메타포를 읽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주인공이 처한 혼란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는 목적이었다면 성공이다. 하지만 나는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페이지와 페이지의 사이에서 완전히 길을 잃고 말았다.


<이상한 도서관>은 진짜로 이상하다. 이상한 걸로 따지면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하루키의 작품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인 '이상함'을 자랑한다. 그로테스크를 좋아한다면 한번 도전해 보길 바란다. 소설은 75페이지 밖에 안 된다. 책장을 펼치는 순간 당신은 양사나이의 손을 잡고 뇌를 빨아먹는 노인의 감옥에서 탈출해야 한다. 돕는 건 소녀와 찌르레기다. 그 앞을 여섯개의 발톱이 난 검은 개가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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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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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사실 이 책을 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는데는 이 한문장으로 충분했다. 나의 경우는 읽지 않는 쪽이었다. 건조함이 익숙한 나에게 저 말은 너무 달았다. 삼킬래야 삼킬 수 없는 끈적함이 입 안에 오래 남아 기분을 망칠 것 같았다.


선입견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나는 이 상냥한 남자에게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낀 것 같다. 우연한 결심이 아니었다면 평생 김연수의 책을 볼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오후, 서점에서 김연수의 책을 발견한 순간 마음 속에 이상한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과거에도, 앞으로도 절대 읽지 않을 책을 읽어보자는 것이었다. 그 갑작스런 충동이 나를 김연수에게 이끌었다. 그리고 나는 내 편견이 얼마나 단단한 껍질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은 언뜻 멜로처럼 보이지만 추리 소설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의 긴장감을 유발한다. 어릴 때 입양을 갔던 한국 여자 카밀라가 양모의 죽음을 계기로 생모를 찾아 한국에 오는 식상한 이야기지만, 거기에 얽힌 진실이 매서울 정도로 차갑다. 카밀라를 방해하려는 사람들과 끝까지 진실에 가 닿으려는 그녀의 전진이 마음 속에 선연한 자국을 남긴다.


나처럼 편견을 가졌던 사람들에게 이 책은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김연수는 한국 사회의 어두운 일면과 가슴 따뜻한 드라마를 엮어내는데 대단한 재능이 있는 것 같다. 주제와 재미, 둘 중 어느 것도 놓치지 않는다. 쓰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해낸다. 특히 이야기를 전개하는 기술에 있어선 감탄이 나올 정도로 훌륭했다. 중요한 순간 진실을 던져놓고 이야기를 끊는 시점이 책장을 덮을 수 없게 만드는 절묘함이 있다. 충격적인 답을 보고 나면 그 풀이를 알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배경인물들이 산만하게 등장하고 충분히 소비되지 못한다는 점, 시간과 화자를 이리저리 바꾸는 탓에 줄거리를 따라가기 힘든 점은 있지만 그만한 재미를 얻기 위해 충분히 희생할만한 불편함이라 생각한다. 300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책이니 속도감을 즐기다 보면 언제 도착했는지도 모르게 결말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날 오후 이 책을 손에 든 건 좋은 판단이었고, 건강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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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 그리고 신은
한스 라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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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만든 뒤 신은 대단히 곤란했을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신의 예측을 완전히 벗어났다. 이브와 아담은 하지 말라는 것 중 가장 치명적인 것만을 쏙쏙 골라했고 생긴지 얼마되지 않은 낙원에서 쫓겨나 광야로 도망쳤다.


그때부터는 완전히 재앙이었다. 형은 신을 사랑하는 동생을 시기해 몽둥이로 쳐죽였다. 용서를 구하는가 싶더니 그는 여기저기 자손을 퍼뜨려 국가를 만들고 전쟁을 일으켜 살인을 대량생산하는데 성공했다. 신은 어디에도 마음을 둘 곳이 없었는데, 죽이는 쪽과 죽임을 당하는 쪽, 죽었다 복수를 하는 쪽 모두 신의 이름으로 그 행위를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의 입장에서 보면 그때가 그나마 좋았던 시절이었으리라. 당시엔 뭐만하면 신의 이름이 거론됐다. 전쟁도, 정치도, 경제도, 결혼도, 식사도 모두 신의 뜻에 의해 행해진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영광은 짧았고 망각은 길었다. 요즘엔 아무도 신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를 미워하는게 아니라, 아예 잊어버린 것이다. 어쩌면 신은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낸 존재고 따라서 우리가 그에 대한 생각을 거두는 순간 세상에서 사라져버리는 존재일지 모른다. 지금쯤 신은 축소된 힘과 영향력으로 인해 전전긍긍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버젓이 살아있는 자신을 믿지않는 사람들에게 분노하며 지진과 해일을 일으키고 간혹 마음을 따뜻히 적시는 기적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신은 이제 무엇을 해야할까? 그 우울한 마음을 누구에게 털어놔야할까? 신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그도 심리상담사를 만나 치료를 받고 싶지 않을까?


<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는 위기에 처한 신이 인간 심리상담사를 만나며 벌어지는 일들을 기록한 소설이다. 늙고 작은 신은 스스로 신이라 고백하지만 그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없다. 지치고 힘든 신은 급기야 죽음을 생각한다. 신은 전능하므로 스스로를 무능하게 만들어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는 어떻게 될까? 신은 우울 속에서 죽음을 맞을까? 다시 기운을 차리고 세상 속으로 달려갈까?


이 책은 신과 인간, 그리고 믿음에 대한 메타포로 가득하다.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신은 많은 소동을 벌이지만 인간의 믿음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인간은 신을 눈 앞에 두고도 그의 존재를 부정한다. 심지어 그를 핍박하고, 사기꾼으로 몰아세운다. 이 모든 상황은 인간과 신이 관계를 맺는 법, 우리의 신앙 생활을 절묘하게 상징한다. 그 적확성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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