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스맨 프로젝트 - 신자유주의를 농락하는 유쾌한 전략
앤디 비클바움.마이크 버나노.밥 스펀크마이어 지음, 정인환 옮김 / 빨간머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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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상으로부터 미친놈 소리를 들어야 잘 사는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누구보다도 나 자신에게 떳떳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보고 나니 아직도 한참은 멀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자 앤디 비클바움과 마이크 버나노는 평범한 청년들이었다. 좀 남다른 점이 있다면 '신자유주의'를 싫어했다는 것 정도? 그런데 그 증오가 생각보다 대단했었나 보다. 어쩌면 범죄가 될 수도 있는, WTO에 그레이트 빅 엿을 날리는 작업 '예스맨 프로젝트'를 시작해 버렸으니까. 그것도 앞날이 창창하던 젊은 시절에 말이다. 이런걸 보면 역시 서양놈들은 여간내기가 아니라니까.

앤디 비클바움과 마이크 버나노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불신과 증오를 어떻게 표현해 낼지 궁리하다 우연히 GATT.org 도메인을 선물 받는다. GATT는 1944년에 창설된 무역협정으로 1995년 WTO가 대체하기 이전까지 세계 무역을 관장하던 협정인데, 다행인건(?) WTO의 대체 이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GATT와 WTO를 혼동한다는 사실이었다. 청년들은 여기서 빛을 보았다. 그들은 WTO의 홈페이지를 그대로 카피해 GATT.org 사이트를 만들었고 contact 페이지에 자기의 이메일을 연결해 놨다. 그들은 이 황당한 가짜가 과연 세계 유수의 엘리트들을 속일 수 있을지 궁금했다. 이 궁금증을 해소할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국제법률연구센터가 국제 무역을 주제로 강연을 요청해 온 것이다. 





앤디는 일정상 세미나에 참석할 수 없는 WTO 사무총장 마이크 무어를 대신해 강연을 맡은 앤드리아스 비클바우어 박사로 변신했다. 세미나가 열리는 오스트리아의 5성급 호텔에는 세계 유수의 법률회사 소속 국제무역 담당 변호사들이 다수 참석했다. 앤디는 이 사람들을 앞에 두고 이 세계에 만연한 '자유무역'을 가로 막는 방해물들이 무엇인지 설파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공정 무역을 옹호하는 유럽 연합과 다국적 기업의 자본 침식을 막는 개별 국가의 고유 문화, 그리고 각국의 의회였다. 

앤디는 특히 선거제도의 개혁을 통해 각국의 의회가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방법으로는 시민이 자신의 투표권을 파는 투표권 경매 시스템이 제시되었는데, 그 근거가 상당히 그럴싸 하다. 설명을 들어보자.

미국의 경우 기업은 정치인을 후원한다. 그 돈은 정치인의 홍보 대행업체를 통해 방송국으로 흘러 들어가고 방송국은 해당 정치인에 대한 정보를 유권자에게 제공한다. 유권자는 이 정보를 받아 투표를 하고 이렇게 당선된 정치인은 자신을 후원해준 기업의 이익을 대변한다. 전통적으로 군수 업체의 지원을 받은 공화당의 부시 부자가 대대적으로 전쟁을 일으켜 기업의 이익을 챙겨주는 것 처럼 말이다. 

앤디의 투표권 경매는 이 단계를 좀 더 깔끔하게 만들자는 시도다. 시민이 투표권 경매 사이트에 자신의 투표권을 팔면 기업이 그것을 구매하여 자신이 원하는 정치인에게 투표를 한다. 짜잔! 복잡하게만 느껴지던 민주주의가 아주아주 깔끔해 진 것 같지 않나?

앤디는 자신의 정신나간 강의가 시작되면 성난 관중석으로부터 토마토와 계란 세례를 받을 뿐만 아니라 신고를 받고 출동한 오스트리아 경찰에 의해 구치소로 연행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강연이 끝날때까지 변란은 없었다. 사람들은 앤디의 말을 경청했고 강연을 마치고 내려오는 앤디에게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내주었다. 

잘츠부르크에서의 성공을 만끽하기도 전에 연거푸 강연 문의가 들어왔다. 앤디는 세계를 돌며 강연을 했고 심지어 세계적인 방송국의 TV 토론회에 참가해 WTO를 대변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앤디는 노예 제도를 옹호하거나 자유무역에 반대하는 시위자들을 참수해야 한다는 등 반인륜적이고 몰상식한 주장을 되풀이 했지만 세계 어느 곳에서도, 어떤 지식인들도 앤디의 말에 반박을 하거나 그 정체를 의심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예스맨들은 부와 권력을 거머쥔 엘리트들이 얼마나 멍청한지, 또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강연에 쏟아지는 박수 세례로 확인해 나갔다. 이건 그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였다. 사람들이 분노하는 모습을 보길 원했던 그들은 좀 더 파격적인 강연 내용으로 뉴욕주립대를 찾았다. 앤디는 그곳에서 '굶주림은 빈곤층들이 열악한 근무 환경을 참게 만드는 특효약'이며 '외과 수술을 통해 빈곤층의 음식 섭취를 줄여야'하며 굶주림이 진정 문제라면 '똥을 정제하여 빈곤층의 식량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연은 대성공이었다. 학생들은 분노의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고 'WTO를 KO 시키자!'는 구호를 흔들어댔다.

2002년 5월 21일, WTO 개발경제연구부의 '킨니스렁 스프라트'는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회계사협회 오찬 강연에서 WTO가 전세계에 가난을 유포했으며 부자 나라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제 3세계를 유린해왔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에 WTO는 모든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새로운 무역 체계를 연구하는 단체로 다시 태어날 거라고 밝혔다. 킨니스렁 스프라트 박사가 강연을 마치자 오찬장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박수 갈채로 가득찼다. 킨니스렁 스프라트 박사, 아니 앤디 비클바움은 아직도 이 세계에 희망이 남아 있음을 느끼며 예스맨 프로젝트의 마지막 강연을 마쳤다. 



                                                                      <앤디 비클바움>


예스맨 프로젝트의 활약상을 쭉 보고나니 문득 나를 포함한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패기 없이 살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입시에 매달리고 학점에 무릎 꿇고 기업에 머리를 조아려 하루하루 젊음을 소진하는 우리들은 과연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는 걸까?

오늘날 이 땅의 젊은이들은 좋은 세상을 만드려는 노력보다는 이미 썩을대로 썩어버린 기존의 세계에 편입하기 위해 경주한다. 산더미처럼 쏟아지는 현실의 무게 아래선 오로지 한 방향을 향해 달릴 수 밖에 없으니까. 교활한 세상은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 언제나 실패에 대한 협박과 공포로 우리들의 눈을 가려 버린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는일, 좋은 학교에 입학하고 좋은 회사에 취직해 뭇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일, 이제 이런 일들은 너무나도 따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 따분한 레이스에 그레이트 빅 엿을 날리는 일은 한가지 뿐이다. 바로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를 듣자마자 뒤로 돌아 달리는 것. 

예스맨 프로젝트는 이같은 생각을 실천할 수 있는 큰 용기가 됐다. 때마침 2012년이 시작되는 지금, 올 한해는 더욱 더 미친놈이되서 이 세상에 큰 당혹감과 재미를 선사할 것을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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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이 말하지 않은 23가지 - 더 나은 자본주의를 위한 현실적 방안
송원근.강성원 지음 / 북오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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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은'과 관련된 책이라면 대한민국에 두 권이 있다. 하나는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라는 책이요, 둘은 '장하준이 말하지 않은 23가지'라는 책이다. 알다시피 전자는 신자유주의 격파의 선봉장이자 명망 높은 교수 장하준이 저자다. 그렇다면 두 번째 책은 과연 누가 지었을까? 여기저기 이름난 학교에서 공부하고 경제학을 업으로 살아가는 건 사실이라고 믿어주지, 하지만 명망을 부여 받기엔 턱없이 부족한 논리로 얼렁뚱땅 카피책을 써버린 경제학자 두명이 그 주인공이다.

나는 지난 달 두 책 중 후자를 구매했다. 제목을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는데, 이 책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장하준을 비판한다. 이유는 아무래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균형잡힌 시각을 갖고 싶었고 또 근래 들어 FTA와 관련하여 신자유주의를 비판만 하는 소리가 너무 많아 그 뭣모르는 세태에 일침을 가하고 싶어서 라고 하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고 젠장,

속아서 샀다.

나온지 2개월도 안된 책을 정가제 Free로 선전을해 버리는 바람에 완전히 속았다. 이게 얼핏 보면 그럴듯 하단 말이야. 나처럼 구간으로 풀리길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들은 딱 걸리게 되어 있어, 못 믿겠다면 자, 아래 사진을 보시게나.



 



나름 공감할 만한 내용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말도 안되는 책이었다. 일일이 꼽자면 그대로 책 한권을 써도 될만큼 많으니 그 중 가장 황당했던 것 몇 가지만 소개해 보겠다.


1. 소득 격차가 느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주장의 핵심은 이거다. 1980년대 이후 우리 경제는 소득 재분배에서 경제 성장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이 과정에서 소득 격차가 무진장 벌어진 건 사실이지만 빈곤층의 소득 또한 늘어 났으므로(1986~2000년 사이 하위 20%의 실질 소득은 연 평균 0.9% 증가하였다) 전혀 문제가 않된다는 얘기다. 이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절대적 소득이 적을 경우 인생을 사는데 몇 가지 중요한 문제점에 직면하게 된다. 우선 여유 자금을 모을 수가 없다. 여유 자금이 없으면? 노후 대비가 안된다. 그나마 쥐꼬리 만한 월급을 받고 있을 땐 그럭저럭 입에 풀칠을 한다 쳐도 퇴직을 하고 나면 완전히 절망이다. 비빌 언덕은 자식들 뿐인데, 빈자의 자식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어찌 부자일 수 있겠는가? 그러니 빈자의 자식은 안 그래도 빈한 자신의 몸둥아리를 간수하는 동시에 플러스 알파로 부모의 봉양까지 떠맡아야하니, 삶은 고해라고 누가 말했던가? 빈자에게 삶은 이중의 고해다.

둘째로 리스크 관리가 안된다. 돈 많은 사람이야 갑자기 큰 병에 걸려 수 억원씩 병원비를 쓰더라도 가산을 탕진할 일이 없다. 하지만 없는 사람은 다르다. 잘못해서 백혈병이나 당뇨에라도 걸려 버리면 가산을 탕진할 걱정을 떠나 가족을 위해 이대로 자살을 감행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딜레마에 빠져야 한다. 보험을 들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지만, 젠장 먹고 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무슨 보험이란 말인가. 게다가 어느 보험회사가 치료비가 수 억원씩 드는 병을 보장해 주겠는가? 설령 그런 보험이 있다 하더라도 그 상품은 일반 서민이 들 수 없을 만큼 비쌀게 분명하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어려울 수록 아끼고 아껴 돈을 모아야 되는거 아니냐고. 없는 사람들이 입을거 다 입고 쓸거 다 쓰면 돈은 언제 모으냐고. 그 썩어 빠진 정신상태 부터 고치고 아끼고 모아 돈을 벌라고. 참으로, 개소리다.

부의 가장 큰 특징은 부가 부를 부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의 집 앞 놀이터에 석유가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자. 놀이터 바닥을 한 번 탐사하는 데는 100만원이 든다. 하지만 석유를 발견하기만 하면 1,000만원의 수익을 거둘 수 있다. 석유를 발견할 확률은 10%. 단 돈 100만원이 있는 사람이 10%짜리 도박에 전재산을 거는 것은 미친 짓이지만 1,000만원을 가진 사람이라면? 확률적으로 이 사람은 돈을 잃을래야 잃을 수가 없다. 여기서 조금 더 여유가 있고 머리가 좀 돌아가는 사람이라면 어디서 석유가 나올 가능성이 높은지 또는 매장량은 어느 정도 되는지에 대한  고급 정보를 사들여 보다 정교한 탐사를 시도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석유 발견이라는 판타스틱 초대박 로또는 정작 그것이 절실한 빈자들이 아닌 부자들에게 돌아갈 확률이 훠얼~씬 높아진다.

더 큰 문제는 상대적 박탈감이다. 부자일 수록 1%의 금리차에 민감하고 빈자일 수록 그 차이에 둔감한 경향이 있는데 이건 결코 빈자들이 멍청하거나 허영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1,000만원을 예금해봐야 1%라면 10만원 밖에 안된다. 그저 외식 몇 번 안하고 말지! 하지만 100억을 가진 사람에겐 1억이다. 그러니 민감할 수 밖에! 이렇게 상대적 박탈감이 크다 보니 서민들은 1% 금리에 둔감해 지면서 도리어 대박을 노리는 고위험 투자를 선호하게 되고, 급기야 전재산을 앞마당 놀이터에 쏟아 붓는 미친짓을 하게 된다.

뭐 어때! 잃어봐야 100만원인데!

빈부 격차가 커질 수록 서민들이 극단적 선택을 할 확률은 높아진다.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될 확률은 없다. 그렇다면 인생 뭐 있나. 한방. 딱 한방으로 끝내 보자. 바로 이런 생각으로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 지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된다.

이래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2. 개인의 경제적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이 말만 두고 보면 문제가 될 게 하나도 없다. 개인의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지 않고 어떻게 국가가 유지될 수 있단 말인가. 문제는 이 사람들이 개인의 경제적 자유를 국민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보편 타당한 의무로서가 아니라 부자들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도록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지나칠 정도로 개인의 경제적 자유를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현재 대한민국이 부자들의 경제적 자유를 상당히 침해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도대체 대한민국은 어떠한 방법으로 부자들의 경제적 자유를 침해하고 있을까? 예측컨대, 그것은 세금을 겨냥한 말일 것이다.

이를테면 현재 논의되고 있는 부자감세안이 지지부진한 것을 두고 이들은 국가가 부자들의 경제적 자유를 침해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법인세와 고소득자들의 소득세를 인하해 '개인의 경제적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노령 연금, 무상 급식, 반 값 등록금 등의 복지 예산을 책정하는 국가를 내 지갑에서 돈을 뺏어가는 도둑놈으로 매도하고 싶다. 나아가 국민의 생존권이 달려 있는 국민연금과 건강보험 또한 세금 낭비의 주적으로 여기며 '우리가 뭣하러 피같은 세금을 내 가난한 놈들의 배를 채워줘야 한단 말인가!'라고 외치고 싶다.



 

 




부자들의 생각을 듣고 있으면 마치 자기만의 세상에서 오직 자기들만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이 사는 세상에 '함께' 또는 '다 같이'라는 단어가 존재할까? 소득세나 법인세 같은 직접세를 내려 '부자들의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게 되면 그 만큼 줄어든 세수를 위해 간접세 비중이 높아진다. 이렇게 간접세 비중이 높아지면 물건에 붙는 부가가치세 등이 늘어나는데, 이런 세금은 삼성의 이건희나 트럭에서 떡볶이를 파는 아저씨나 똑같이 내는 것이다. 부자들은 흔히 '공짜 점심은 없다'라고 얘기한다. 오늘날 이 말은 '가난한 놈들에게 공짜 점심은 없다'라고 해야 옳다.


3. 개인의 이익 추구는 언제나 바람직한 방향으로 경제를 이끈다

국가 경제가 위태로울 때를 생각해 보자. 대규모 구조조정이 일어난다. 잔뜩 긴장한 국민들은 지갑을 꽁꽁 닫아 걸고 소비를 줄인다. 줄어든 소비 탓에 내수 경기가 얼어 붙고 이 탓에 개인 사업자와 기업이 도산한다. 또다시 대규모 구조조정이 일어나고...

수학적으로 봤을 때 전체는 언제나 부분의 합과 같다. 그러나 경제는 다르다. 앞에서 제시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개인의 올바른 경제적 판단이 언제나 국가 경제의 회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의 이익 추구가 궁극적으로는 경제 발전으로 이어진다는 저자들의 논리에도 정확히 대입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전력 회사의 사장이라고 치자. 난 회사의 이익을 극대화 하기 위해 투자 대비 수익이 낮은 도시의 전기 공급을 중단키로 했다. 이 결정은 이사회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나의 CEO 직을 지켜줬고 여기서 얻은 이익으로 배당을 하니 주주들이 기뻐 날 뛴다. 

반면 전기가 끊긴 지역에선 공장이 가동을 멈췄고 시민들은 직장을 잃고 노숙자가 됐다. 시민들이 낙담해 고향을 버리고 옆 마을로 몰려들자 옆 마을의 생필품 물가가 급등하고 주거 문제가 심각해 지면서 할렘을 형성한다. 이 지역에선 밤마다 범죄가 들 끓는다. 늘어난 범죄에 대처하기 위해 시 예산이 추가 편성되고 늘어난 예산에 맞춰 세금이 폭증하자 시민들의 생활 수준이 전반적으로 하락한다.



 

 




너무 극단적인 예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 기업의 탐욕은 이미 도를 넘어 섰다. 월가의 금융 회사들을 보라. 탐욕스런 인센티브 잔치와 투기에 가까운 운영으로 금융 위기를 맞은 회사들은 그 때마다 정부에서 주어지는 막대한 공적자금으로 위기를 탈출한다. 그리고 보란듯이 살아 남아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욕망의 파티를 벌인다.

시장 옹호론자들은, 개인의 이익 추구가 언제나 바람직한 방향으로 사회를 인도할 것이라 믿는 사람들은, 시장이 위기 때마다 부실 기업을 퇴출시키고 탐욕에 눈이 먼 미치광이들을 몰아낼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모두가 미쳐있다면? 이 시장 전체가 탐욕에 눈이 먼 미친개들의 소굴이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절대 다수가 악마인 지옥에서 선한 양은 그대로 희생양이 될 뿐이다. 외눈박이 마을에선 두눈 박이가 병신이듯이, 사악한 기업들의 시장에서 선한 기업은 단지 위선자가 될 뿐이다.


에필로그

다 써 놓고 보니 생각보다 덜 황당한 얘기들만 잔뜩 인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실제로 이 책을 읽어 보면 교묘한 말장난과 속임수들이 도처에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장하준 책의 특징은 실제 사례와 데이터가 풍부하게 제시된다는 것인데 이 책은 그런 면에서 너무나 빈약하다. 또 제시되는 몇몇 데이터들은 그 진위 여부가 확연히 의심되어 이 책에 실린 전반적 통계 자료의 신뢰도를 극적으로 떨어뜨리는 역할을 한다. 특히 1일 1달러 이하로 생활하는 절대 빈곤층의 수가 1974년 세계 인구의 20%였던 것에 반해 신고전주의 경제 정책이 도입된 후 1998년에는 5.4%로 급락했다는 제시 자료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현재 전세계적으로 1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절대 빈곤층은 10억, 2달러 미만의 빈곤층은 30억에 달한다).

이 사람들의 말대로라면 분명 우리 사회는 급격한 발전을 이뤄냈고 엄청나게 살기 좋아졌을텐데 우리의 삶은 왜 여지껏 이모양 이꼴이란 말인가?


 

 

                                                              <조르주 드 라투르의 사기꾼>


무엇이 옳으냐 하는 문제를 정확히 판단하기 위해선 스스로가 각종 통계를 찾아 보고 그 허와실을 판별해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내가 이 사안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며 그 통계 자료 또한 정확히 찾아보지는 않았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한 권의 책 안에서도 앞 뒤가 맞지 않는 주장을 한대서야 도대체 누가 그 말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사기꾼들의 경제학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말이 좀 과하다면 적어도 거짓말쟁이들의 경제학 정도로 이 책의 수준을 가늠할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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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2 - 한니발 전쟁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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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전투를 얘기 하자면 포에니 전쟁을 빼놓을 수 없고, 포에니 전쟁을 얘기 하자면 한니발이 빠질 수 없다. 

포에니란 라틴어로 '페니키아인의'라는 뜻이다. 따라서 포에니 전쟁이란 페니키아인의 전쟁 또는 페니키아인과의 전쟁을 의미한다. 역사가들은 대략 기원전 264년 부터 201년 까지 있었던 로마와 카르타고의 두 차례의 전쟁을 통틀어 포에니 전쟁이라 부른다. 물론 중간에 휴전 기간이 있기는 했다. 편의상 이 기간을 기준으로 전쟁을 둘로 나눠 기원전 264년 부터 241년 까지를 제 1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19년과 201년 사이를 제 2차 포에니 전쟁이라고 부르게 됐다. 

제 1차 포에니 전쟁은 바다에서 결판이 났다. 아테네 이후 최강의 해운국이 되어 있던 카르타고는 싸움이라곤 육지에서 치고 박는 것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로마의 개미떼들을 바다로 끌어 냈다. 승리는 카르타고의 것이 분명했다. 병력 상으로 봐도 카르타고의 해군은 로마의 1.5배에 달했다. 항해술은 말할 것도 없지.

흔들리는 파도 위에서 배를 일렬로 세우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로마군을 보고 지중해 최강의 해군은 배를 잡고 웃었다. 웃고 즐기는 사이 두 선단은 얼굴을 마주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이윽고 로마군의 뱃전에서 '까마귀'라 불리는 덫이 내려지자 두 대의 배는 그대로 하나로 엉켜 육지가 되었다. 이 육지 위로 유럽 최강의 군단, 로마의 중무장 보병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제 1차 포에니 전쟁은 바다를 육지로 만들어 버린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그날 로마 해군의 엉성함을 비웃던 군사들 사이에도, 패배로 인해 시칠리아를 떠나야 했던 카르타고인들 사이에도 한니발은 없었다. 카르타고의 군신(軍神). 고독한 전술의 대가 한니발은 기원전 219년, 로마인들이 '한니발 전쟁'이라 부르는 제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역사의 첫 장을 장식한다.






제 2차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 개인과 로마 제국 전체의 승부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엔 아무런 깜냥이 없는 나이지만, 그래도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건 있다. 이 전쟁은 한니발이라는 사자를 광장에 풀어 놓은 뒤 수 많은 사람들이 둘러싸 창으로 찌르는 형국이었다. 처음에 이 사자는 힘이 세고 아주 젊었다. 도저히 군대가 넘을 수는 없다고 여겨진 알프스를 그것도 코끼리를 이끌고, 겨울에 넘었다. 냉혹의 산을 넘어 이탈리아에 발을 딛자 마자 광장의 사람들은 속수 무책으로 쓰러져 갔다. 사자는 단 한 개의 창도 자신의 살갗에 닿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로마는 참패했다.

참패한 곳은 시칠리아나 스페인같은 속주 도시가 아니었다. 이탈리아 본토. 로마의 앞 마당이었던 것이다. 파죽지세로 조국을 파괴해 오는 한니발을 막아 세운 건 평민 출신의 집정관 샘프로니우스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로마는 한니발의 위력을 과소평가 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극심한 패배를 당한 직후라도 절대 평정심을 잃지 않고 비상 상황에 대응하는 로마다. 전투에는 졌지만 전쟁은 이제 시작이다. 뿐만 아니라 로마에게는 제 1차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자심감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니발은 달랐다. 한니발은 지금껏 로마가 상대해왔던 그저그런 장군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군신. 신에게 이기기 위해 인간은 그저 필승의 마음을 다지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그야말로 총체적 역량, 조국의 역사 전부를 거는 심정으로 싸움에 임해야 한다.


<한니발>


트레비아에서 군신을 두 번째로 맞은 로마군은 2만명의 전사자를 냈다. 집정관은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도망쳤다. 카르타고 군의 피해는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헤아릴 가치도 없을 만큼 적었다'고 한다. 로마에 종말의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니발은 전투 뿐만이 아니라 정치에도 능했다. 붙잡힌 수 만의 포로 중 유독 로마군에게만 혹독했다. 로마 연합의 일원으로 병력을 제공했던 동맹국 군사들에게는 충분한 음식과 따뜻한 모닷불이 제공됐다. 강력한 개미 군단을 거느리는 여왕도 휘하의 개미들을 잃고 나면 한낱 무력한 곤충일 뿐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한니발은 동맹국 포로들을 조건없이 풀어 줌으로써 카르타고의 적은 오로지 '로마'임을 천명했다.

로마 공략이 시작된 지 2년 째, 30세가 된 한니발은 로마 연합의 커다란 축인 에투르리아인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토스카나 지방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세 번째 싸움터는 안개가 짙게 깔린 트라시메노 호수였다.

아침 안개를 틈타 기습에 돌입한 한니발의 군대는 플라미니우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에게 배수진을 치게 했다. 그곳은 곧 사지였다. 전투보다는 살육에 가까웠던 그 날의 싸움은 로마군의 전멸로 끝이 났다.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도 전사했다. 민회를 소집한 법무관이 로마 시민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완패당했다'는 말 뿐이었다.





그대로 수도 로마를 공략할 수도 있었지만 한니발은 군대를 이끌고 남하한다. 한니발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을 속이기 위해선 자기편 부터 속이라는 말도 있지만 한니발은 자기편 장교들에게까지 철저히 본인의 의중을 속였던 모양이다. 나는 이런 대목에 이르러선 도무지 상사의 속내를 알 수 없어 답답하기 그지 없는 부하들의 심정을 헤아리기 보단, 연승으로 일기충천해 있으나 여전히 거대한 적군이 버티고 있고 심지어 본국의 원조조차 전무한 전쟁을 묵묵히 이끌어 나가는 한 남자의 지독한 고독을 느끼게 된다.

한니발은 제 2차 포에니 전쟁을 치르는 동안 끝내 혼자였다. 이미 아프리카의 비옥한 땅을 차지하고 있던 카르타고인들은 한니발의 전쟁을 달가워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지원은 지지부진, 가까스로 결정된 지원군 파병 마저도 상륙할 항구를 확보하지 못해 번번히 실패했다. 한니발은 이런 싸움을 20년이나 지속했다.

씁쓸한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루고 다시 환호에 휩싸인 한니발의 군대를 만나보기 위해선 기원전 216년 8월로 돌아가야 한다.

평상시 보다 전력을 증원한 로마의 4개 군단(로마는 집정관 한 명이 2개 군단을 이끈다), 총 87,200명의 병력은 한니발의 5만 병력이 있는 칸나이로 향했다. 서로를 앞에 둔 두 군대가 포진을 마치자 이윽고 전투가 벌어졌다. 먼저 각 진의 좌, 우익을 담당하는 기병들이 뒤엉켜 혈전을 벌였다. 잠시 후 중앙에 위치하고 있던 로마의 보병들이 쏟아져 나오자 한니발 군의 선봉 갈리아 보병들이 좌우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틈으로 로마의 자랑 중무장 보병들이 치고 들어왔다. 보병끼리의 전투는 확연히 로마의 우세로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기병은 달랐다. 한니발 전술의 핵심은 뭐니뭐니해도 기병이었다. 지난 세 번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것도 바로 이 기병의 활약 덕분이었다. 전술 뿐만 아니라 수적으로도 우세였던 한니발의 기병은 로마 기병을 물리친 뒤 로마군의 배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 때 전투 초반 좌우로 도망쳤던 갈리아 보병들이 로마군의 좌우를 막아 세웠다. 로마군은 완전히 포위 당했다. 

이튿날, 전사자에게서 빼앗을 물건을 추리는 데만 한니발의 5만 병력이 꼬박 하루가 걸렸다고 하니 이 날 한니발 군이 거둔 전과는 실로 어마어마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로마에 모여든 패잔병의 수는 채 1만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한니발이 칸나이 전투에서 보여준 포위 전술


내리 4연승을 이끌어낸 한니발의 군대가 이후 어떻게 됐는지는 이 책을 읽는 독자의 몫으로 남기고 싶다. 다만, 이후 한니발과 로마 집정관 스키피오 사이에 있었던 일화는 꼭 소개하고 싶다. 아마도 이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은 전쟁의 최후를 짐작할 수도 있으니 독서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여기서 그만 리뷰 읽기를 멈추시기 바란다.

(본문 364~366p. 일부 내용 생략)
12세 연상인 한니발에게 스키피오가 정중하게 물었다.

"우리 시대에 가장 뛰어난 장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은 즉석에서 대답했다.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요."
스키피오가 다시 물었다.
"그러 두번쨰로 뛰어는 장수는 누굽니까?"
한니발은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요."
스키피오는 다시 질문을 계속했다.
"그렇다면 세번째로 뛰어난 장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카르타고의 명장은 이 질문에도 주저없이 대답했다.
"그건 물론 나 자신이오."
자마 전투를 승리로 이끈 업적으로 '아프리카누스'라는 존칭까지 받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이 말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약 장군께서 자마에서 나한테 이겼다면?"
한니발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 순위는 피로스를 앞지르고 알렉산드로스도 앞질러 첫번째가 되었을 거요."

이 일화에 등장하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한니발이 대승을 거둔 네 번의 전투 중 세 번의 전투에 참여했고 세 번 모두 가까스로 살아 남은 로마의 귀족이었다.

이런걸 보면 역사란 정교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따분한 기계같은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 세번의 전투 중에 스키피오가 전사했다면, 그리하여 이후 자마 전투에 참전한 집정관이 스키피오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세계의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흔히 역사에 가정은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들 말하지만, 역사를 공부하는데 있어서 가정이야 말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라는 것 또한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수 많은 우연이 모여 굴러가기에, 가정은 결코 의미없는 일이 아니다. 애초부터 그렇게 되리라고 결정되어 있는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세상은 그저 거대한 우연 덩어리. 후세의 우리들이 생각하는 수 많은 가정들은 실제로 몇 개의 변수만 작동했더라면 충분히 현실이 되고도 남았을 것들이다. 그러니 이렇게 우연의 체스판 위로 끊임없이 말들을 움직이며 가정해 보는 것, 이게 바로 역사를 공부하는 진정한 재미가 아닐까?




로마인 이야기 1권 이후로, 사실 나는 더 이상 로마인 이야기를 보지 않기로 결심했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우선 재미가 없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전매 특허인 르네상스 시대의 지중해와는 다르게 로마인 이야기에는 좀처럼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딱딱함과 건조함이 있었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뇌까지 누렇게 변색시켜 버릴 것 같은 지중해의 햇빛이 내리쬐는 것 같아 심히 권태로웠다. 하지만 2권의 제목은 무려 '한니발 전쟁'이다. 역사에 재미를 갖는 사람치고 어찌 전쟁 이야기를 마다할 수 있겠는가.

아직 로마인 이야기 전권을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2권 '한니발 전쟁'을 읽어본 사람으로서 평하건데, 이 시리즈는 이 한권의 책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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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1-12-19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로 조금 오래된 책을 중심으로 읽으신가 봅니다. 로마인이야기를 읽은지 언제인지 까마득한데 님의 리뷰를 읽으며 다시 한번 한니발이라는 인물, 로마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리뷰 감사합니다.

한깨짱 2011-12-20 13:12   좋아요 0 | URL
네 저는 공짜로 생기지 않는 한 신간을 사서 보지는 않습니다. 대단한 이유가 있는건 아니고 쿠폰 적용이 안되서요! 한니발은 딱 제 스타일에 맞는 인물인 것 같습니다. 고독하고, 최후가 쓸쓸했던... 아무튼 좋게 읽어 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팜북 2012-04-21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마인 이야기는 5권 카이사르 까지 100미터 달리기 하듯 읽히다가 6권부터 갑자기 마라톤이 되더군요^^;
아! 5권까지 스토리가 아직 제 머리에 버티고 있을때 얼렁 다시 시작해야겠습니다.

한깨짱 2012-04-21 18:33   좋아요 0 | URL
시오노 나나미는 정말로 글을 잘 씁니다. 재미에 관한한 이 사람에 대해 이론을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 책만큼은 그렇게 재미있는 편이 아니더라고요. 그게 쉽게 도전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전 2권에서 멈췄어요.
 
프로파간다 - 대중 심리를 조종하는 선전 전략
에드워드 버네이스 지음, 강미경 옮김 / 공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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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paganda라는 말은 Congregatio de propaganda fide, 즉 '신앙 선전실'이라고 번역되는 가톨릭교의 부서 이름에서 유래했다. 1622년, 당시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가 급속하게 확산되는 프로테스탄티즘 세력을 억제하고자 로마 교회에 '신앙 선전실'이라는 이름의 선교 부서를 개설했던 것이다. 

이처럼 '프로파간다'라는 말에는 처음부터 나쁜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 단어는 성스러운 로마 교회의 - 과연 당시의 교회를 성스럽다고 해야 할지 의문이지만 - 선교 부서가 그 뿌리였다. 이 단어가 본격적으로 타락하기 시작한 것은 역시 1차 세계대전, 인간의 욕망과 협잡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던 20세기 초였다. 

 

 

<광부 아들 돼지. 마틴 루터> 

 

미국은 원래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미합중국의 대선 후보 우드로 윌슨이 '승리 없는 평화'라는 슬로건으로 대통령에 당선됐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막대한 권력과 이권이 걸려 있는 전쟁, 그것도 전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최초의 빅마켓을 어찌 미국이 가만 두고 볼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참전을 결정했다. 이제 미국은 참전에 걸림돌이 되는 한 가지 문제를 처리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노암 촘스키는 이 과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지만 그는 전쟁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전쟁에 반대하는 국민들을 어떻게 광적인 반독일 미치광이로 만들어 모든 독일인을 죽이러 가고 싶어 하도록 만드느냐 하는 문제가 생겼다.' 

얼마전까지 반전을 외치던 국민들을 어떻게 전쟁광으로 만들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프로파간다(propaganda, 선전)가 필요했다. 미국은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연방 선전 기관을 설치했다.  

태생은 고귀했으나 성장이 비천했다. 전쟁이 끝나자 타락한 선전을 입양한 것은 기업들이었다. 경영자들은 선전이 전쟁에서 이룩한 빛나는 전과에 주목했다. 그들은 선전이 미국 국민을 전쟁광으로 만들었듯이 소비자의 기호 또한 자신이 원하는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고객을 최면에 걸어 더 많은 물건을 사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최종 목표였다. 

 

 

 

이 책의 저자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이 같은 시대의 요구에 영웅처럼 응답한 선전계의 선구자였다. 특히 그는 선전에 노출된 사람이 그것이 선전인지 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은밀한 선전술의 창시자였다. 버네이스 이전의 홍보가 '값싸고 맛 좋은 베이컨을 사드세요'였다면 버네이스의 홍보는 보다 간접적이고 치명적이었다. 우선 신뢰성있는 의사를 확보한다. 그런 다음 의사가 라디오 방송에 나와 이렇게 말한다. '오랫동안 건강한 생활을 하기 위해선 올바른 식습관이 필수다. 특히 아침이 중요한데, 매일 아침 섭취하는 풍부한 단백질이야 말로 무병장수의 근원이다'. 버네이스는 커피와 토스트 일색이던 당시 미국인들의 아침 식사를 모조리 베이컨과 달걀로 바꿔 버렸다.  

버네이스는 군중심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주변의 열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은 그 열 사람의 생각대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사람은 천성적으로 홀로 있는 것을 두려워 하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집단의 생각을 받아들인다. 물건을 고르거나 음악을 듣거나 아니면 책을 보거나. 사람들은 이 모든 것들을 자신의 취향에 따라 선택한다고 믿지만, 천만의 말씀. 당신의 취향은 철저히 강요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부화뇌동하는 군중들을 이끄는 것은 누구일까? 연예인, 의사, 변호사, 고위 관료, 기업의 최고위 임원, 이른바 공인이라 불리는 오피니언 리더들이 바로 그들이다. 오늘날 많은 기업들이 드라마 주인공들의 손에 휴대폰을 쥐어주고 열심히 그들의 의상을 협찬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그들에게 수 많은 대중을 이끌어 갈 파괴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5년 만에 귀국한 서태지의 파격적 공항 패션과 검거당시 신창원의 티셔츠가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사실을 거론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 선전의 위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선전의 무서운 점은 심지어 선전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에게조차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거다. 신자유주의와 물신만능주의, 지나친 상업주의를 비판하는 젊은이들은 유행을 거부하고 공정 무역을 주장하며 대량생산과는 거리가 먼 개성있는 '상품'에 눈길을 돌린다. 그들은 자신들이 세상에 길들여 지지 않은 야생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풍조를 만들어 내는 것은 누구인가?  

모든 것들을 스스로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면 크나큰 오산이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기존의 상업은 반대급부마저 모조리 포섭할 생각으로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 선전은 기존 상업의 퇴폐성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그것에 반대하는 수 많은 사람들을 충동질한다. 이 세계는 잘못 되었다. 우리는 다른 것이 필요하다. 우리 스스로 대안을 만들어 보자. 이렇게 해서 체 게바라의 사진이 박힌 커피잔과 티셔츠가 팔리고 DIY 가구 붐이 일어난다. 한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몇몇 수입 제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홍대를 중심으로 수공예품 시장이 형성된다. 자유와 개성을 되찾는 싸움? 그것이 누구를 위한 싸움인지, 우리는 평생을 가도 알지 못할 것이다.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대중이 소수의 엘리트들에 의해 조종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사람이다. 권력자들의 목표는 대중을 아무런 생각없이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좀비로 만드는 것이다.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런 세상을 개선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점을 철저히 활용하려 든다는 점에서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선전론은 너무나 불쾌하고 화가난다. 

에드워드 버네이스가 뿌려 놓은 선전의 씨앗은 결국 히틀러를 만들어냈다. 그 누구보다도 선전의 위력을 알고 있던 히틀러는 나치를 위한 선전 기구 책임자로 에드워드 버네이스를 영입하려 했다. 비록 그는 거절했지만 그에게 영감을 받은 히틀러는 라디오 연설과 정치 영화로 대중을 선동하는데 성공했고, 그리고는 2차 세계대전이 있었다. 

오늘날의 히틀러들은 군대와 의회가 아닌 기업과 언론의 꼭대기에 앉아 있다. 그들은 더욱 막강해졌고 우리는 보다 더 약해졌다. 우리가 그들의 간섭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유로운 '나'로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나는 5년이나 10년 뒤에도 우리의 세상이 이 질문에 답 할 수 없는 세상이 될까봐, 너무나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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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1-12-15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방향에서 보면 어쩌면 인간이라는 종자체가 기본적으로 좀비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인가 머릿속에 채워져야 살아갈수 있는 필연적인 존재죠. 생명체의 속성이 생존과 종족보존의 본능을 프로그램된 로보트와 별다를게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제가 너무 나갔는지는 모르지만 저도 최근 제모습을 보면사 좀비와 별다를게 있을까 싶습니다.

한깨짱 2011-12-16 20:37   좋아요 0 | URL
세계를 과학적으로 환원하다 보면 결국 인간은 물리 법칙 안에서 돌아가는 자동 기계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군자란님의 생각에 동의해요.

하지만, 이 부질없는 껍데기 안에 재미나고 신나는 일을 가득 채워 예기치 못한 사건들을 무한 발생, 그리하여 이 딱딱하고 재미없는 세상에 빅엿을 날려주는 게 우리 인간이 가진 진정한 잠재력이자 의무 아닐까요?

저는 최근에 회사를 때려치고 사회적 기업을 창업하여 운영 중인데,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애정으로 불끈 불끈 힘이 솟곤 한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커트 보네거트의 `타임 퀘이크`를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군자란님과 아주 잘 어울리는 책이 될 것 같아요.

군자란 2011-12-17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오정환 옮김 / 한길사 / 200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 전 창덕궁 후원(비원)을 다녀오고 많은 것을 느꼈다. 요즘 사람들에게 창덕궁이니 덕수궁이니 이제는 시멘트 바닥이 깔리고 미술관으로 변해버린 옛 건물에 전혀 감흥이 생기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나, 그것이 역사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아무래도 이야기가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국 사람이 한국의 고궁을 탐방하면서 가이드의 도움을 받는 것은 어쩐지 쑥쓰러워, 감상이란 대상과 자신의 내면 사이에 일어나는 은밀한 대화인 법이지, 그러니 이것저것 알아볼 필요없이 그냥 둘러보자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역사는 과묵하다. 과묵한 상대와의 대화는 언제나 힘들 수 밖에.  

게다가 당신의 눈썰미는 생각보다 날카롭지 못하다.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액자로 만들어 주는 정자 기둥의 장식과 다른 문들과 적어도 두 단 이상은 높이 올라있는 솟을 대문의 미묘함을, 당신은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칠 확률이 높다. 설령 그 차이를 가까스로 알아냈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담긴 의미까지는 아무리 애를 써봐도 나오지 않는다. 당신에게 가이드가 필요한 시점이다. 

 

 

시오노 나나미로 따지자면 지중해 역사, 그 최고의 가이드다. 로마, 콘스탄티노플, 베네치아, 피렌체, 메디치 가, 가톨릭 교회와 교황, 그리고 투르크인. 한 마디로 지중해와 연관된 모든 국가 모든 인물들을 매의 눈으로 철저히 해부하는 외과 의사(그녀는 이탈리아인 외과 의사와 결혼했다!). 만일 우리가 시오노 나나미를 읽지 않은 채 혼자 이탈리아를 여행한다면 그 유구한 역사를 눈으로 보면서도 '이게 뭐야?'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왜냐구? 우리는 가이드가 필요한 사람들이니까. 

이런 점에서 시오노 나나미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행운이다. 만일 그녀가 이탈리아어나 프랑스어 혹은 독어로 책을 썼다면 우리는 이토록 유려한 가이드를 이토록 쉽게 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과연 아시아인으로서는 도저히 견줄자가 없을 정도의 식견. 게다가 이런 역사책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수 백권의 역사 자료(원서에다 따분한!)를 검토해야 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수 십권에 쏟아야할 에너지를 단 한권에 쏟아 붓는 작가 치고 다작을 하기 힘든 법인데, 이 70세가 넘은 노파는 소시적부터 어마어마한 집필욕을 보여줬다. 1988년, 이런 여인의 감성을 자극해 기어이 펜을 들게 만든 주제가 바로 피렌체의 마키아 벨리다. 

렌체로 말할 것 같으면 칠흑같은 중세를 깨부순 르네상스의 요람이다. 당시의 피렌체에는 최후의 만찬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천지 창조의 미켈란젤로가, 비너스의 탄생의 보티첼리가 있었다. 이름만 들으면 역사를 모르는 사람도 아하!하고 무릎을 칠 금융업의 대부호 메디치 가(家)도 있었다. 그러나 시오노 나나미의 마음을 뒤흔든 건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 칭송받는 예술가도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를 두 손에 놓고 주물럭 거리던 대부호도 아니었다. 그 당시 피렌체에는 또 한 명의 유명인이 살고 있었다. 오늘날에야 유명인이지만 당시에는 말단 공무원에 불과했던 남자. 1988년, 피렌체 근교의 한 산장에는 눈을 지그시 감은채 이 산장의 주인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곰곰히 그리고 있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는 시오노 나나미의 여타 지중해 시리즈와는 달리 소설이 아니다. 구체적 사실을 늘어 놓는 다는 점에선 '로마인 이야기'와 닮아 있지만 그 보다 훨씬 부드럽고 따뜻하다. 이는 시오노 나나미가 평생을 걸쳐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사모했기 때문이다. 시오노 나나미에게 있어 마키아벨리는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그녀는 60년대 일본의 학생 운동이 실패로 그치자 이탈리아로 넘어와 역사를 독학하기 시작했다. 혁명 실패로 인한 사상의 공허, 헛헛한 마음의 공백을 인간성의 현실을 잔인할 정도로 냉철하게 그리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이 채웠던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마키아벨리에 대해 '자신의 전부'라고 말했다. 그녀는 목적과 수단을 단칼에 분리하는 명쾌함에, 악한 일을 해 놓고 '악한 일을 했다'고 말하는 솔직함에 마키아벨리의 팬이 되었다.  

사실 마키아벨리라 함은 우리에게 있어 협잡과 기회주의, 아첨과 아부를 상징하는 전형이다.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하며 이를 부끄러워 할 필요 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뻔뻔함. 권력층의 비위를 맞춰 한 몫 잡아보려는 천박한 공명욕. 그러나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입신양명을 위한 뇌물같은게 아니었다. 물론 공직에서 파면된 후에 평생 복직을 바라며 살아온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마키아벨리가 그토록 복직을 원하던 직책은 피렌체 제2서기국 서기관,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오늘날 행정 부처의 실무 과장쯤되는 말단직에 불과했다. 고작 정부 부처의 말단 행정직을 얻어내기 위해 그토록 위험한 책을 썼단 말인가? 군주론은 진정으로 조국을 사랑하고 조국의 미래를 걱정했던 한 남자의 뛰어난 정치사상서였다. 

 

<군주론의 모델이 되었던 체사레 보르자> 

 

 편집증에 가까운 시오노 나나미의 디테일은 이러한 부분에서 빛을 발한다. 저명한 사실에서부터 저명하지 않은 사실까지, 모조리 잡탕된 역사의 웅덩이 안에서 그녀는 사실과 정황적 증거를 조합해 조목조목 마키아벨리에 대한 변론을 시작한다. 이 디테일은 실로 놀라울 정도인데, 특히 계약금을 챙긴 뒤 그림을 완성하지 않고 밀라노로 튀어버린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계약금 반환을 요청하기 위해 출장을 떠나는 모습, 그리고 출장비가 적다고 끊임없이 자신의 상사에게 출장비 증액을 요청했던 마키아벨리의 일화를 읽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치며 감탄하게 된다. 

오늘날에야 '군주론'의 유명세 탓에 마키아벨리를 굉장한 엘리트로 오해하기 쉽지만 사실 마키아벨리는 대학을 나오지도, 집안이 훌륭하지도 못했다. 그는 평생 일을 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었다. 이런 가장이, 귀족들의 눈에는 코끼리 눈꼽만치도 못한 말단직을 얻어 내기 위해 고군분투한 사실을, 400년이 지난 오늘날 취업과 승진을 위해 이보다 더 뻔뻔한 일도 서슴치 않는 우리가, 과연 비난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마키아벨리의 절친이었던 프란체스코 베트리는 로마 주재 피렌체 대사로서 교황을 보필하는 직책에 있었다. 또 다른 절친 프란체스코 구이차르디니 또한 명문가 출신의 스페인 대사였다. 둘 모두 피렌체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지만 끝내 피렌체의 멸망을 막지는 못했다. 행정 실무가로서, 외교관으로서, 정치사상가로서 이 두 귀족들과 비교도 되지 않는 능력을 지녔던 마키아벨리의 직책은 파면당한 제2서기국 서기관이었다.  

파면당한 제2서기국 서기관이지만 타고난 재능까지 폐기된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마키아벨리의 독이었다. 능력은 있지만 쓰임 받지 못하는 남자의 괴로움을 안다. 누구보다 좋은 연기를 할 수 있지만 끝끝내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배우의 눈물을, 나는 안다. 마키아벨리 자신은 그다지 큰 야망이 있었던 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원했던 직책은 끝까지 로마 대사도 스페인 대사도 아닌 제2서기국 서기관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소박한 꿈조차 이루지 못했기에 그의 절망은 더더욱 처참했던게 아닐까? 

 

<니콜로 마키아벨리> 

1527년 5월, 자신을 중용하지 않았던 메디치가가 피렌체에서 실각했다는 소식을 듣자 당시 구이차르디니의 부탁으로 교황군에 합류해 있던 마키아벨리는 친구에게 상황을 알리지도 않은 채 곧장 고향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 해 6월 마키아벨리는 부활한 피렌체 공화국의 제2서기국 서기관으로 입후보한다. 결과는, 

찬성을 의미하는 흰 강낭콩을 던진 자 12명.
반대를 의미하는 검은 강낭콩을 던진 자 555명. 

반대표를 던진 사람 중 하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知)의 사람이 아니라 충(忠)의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p. 564) 

지(知)의 사람 마키아벨리는 그로부터 10일 뒤 병으로 쓰러진다. 이틀 뒤인 1527년 6월 22일, 마키아벨리는 죽었다. 세상의 빛을 본지 58년 하고도 1개월이 되던 해였다.  

나는 마키아벨리의 죽음이 뛰어난 평민의 능력을 시시콜콜하게 여긴 귀족들의 간접 살인이었다고 생각한다. 평민 하나가 죽든 말든 그 놈이 능력이 있었든 없었든 부모 잘 만난 탓에 온갖 혜택을 누렸던 귀족들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대체할 사람이야 얼마든지 넘쳐나니까. 이 무관심과 무책임함에 나는 분통이 터지고 치가 떨린다. 

내가 400년도 더 된 한 남자의 죽음에 이토록 광분하는 이유는,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고 생각되는 그가 웬지 우리 시대에 태어났더라도 반드시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라는 걸 요즘 어렴풋이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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