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비극
테리 이글턴 지음, 정영목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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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극은 죽었는가


모든 예술에는 정치적 차원이 있지만, 비극은 실제로 정치적 제도로서 삶을 시작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비극은 그 자체로 정치적 제도일 뿐 아니라, 아이스킬로스의 『에우메니데스』와 소포클레스의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 등 그 시대 비극 두 편은 공적 제도의 건립 또는 확보와 관련이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디오니소스 축제의 한 부분으로 공연되는 비극적 드라마의 자금을 도시국가가 지명하는 한 개인이 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합창단’을 훈련하고 그들에게 보수를 지급하는 것은 도시국가의 공적 의무였다. 국가는 최고 행정관의 지휘를 받아 이 절차 전반을 감독했으며, 공연 대본을 서고에 보관했다. 배우는 폴리스polis에서 보수를 받았고, 국가는 또 가난해서 돈을 낼 수 없는 시민의 입장료를 내줄 자금을 확보했다. 대회의 심사위원은 시민단이 선출했고 이들은 틀림없이 법정 배심원으로서 또 정치 집회의 구성원으로서 익숙하게 발휘하던 비판적 감각으로 극적 공연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12)


정치적으로 말해서 그리스 비극에는 이중적인 역할이 있는데, 사회제도를 승인하는 동시에 거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예술은 내용을 통해 사회질서를 정당화할 수도 있지만, 관객에게 심리적 안전밸브를 제공할 수도 있다. 무해한 환상을 육성하여 자신이 사는 체제의 더 불미스러운 측면들로부터 시선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s』은 비극을 무해한 환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잘못하면 사회를 파괴할 수도 있는 어떤 감정(연민과 공포)을 엄격하게 통제된 양만 먹이는 것으로 간주한다. 비극은 간단히 말해 정치적 동종요법의 한 형태다. 비극의 비판적 역할이라는 측면을 볼 때, 숭배받는 종교적 축제의 일부를 이루는 공식적인 정치적 사건이 고대 그리스 문명의 어두운 서브텍스트에―아무리 신중하게 신화적 과거 속에 집어넣었다고는 해도 광기, 존속살인, 근친상간, 영아살해 등에―그렇게 대담한 빛을 비출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다. 13)


고전적 관점에서 실생활의 참사는 날것 그대로의 고난의 문제이기 때문에 비극적이지 않다. 그런 고난이 예술에 의해 형태가 잡히고 거리가 두어져 어떤 더 깊은 의미가 풀려나올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본격적으로 비극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비극적 예술은 견딜 수 없는 것을 제시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한다. 그것은 동시에 우리에게 그 견딜 수 없는 것에 관해 사유하고 그것을 기리고 그것을 기억하고 원인을 조사하고 피해자를 애도하고 그 경험을 일상생활로 흡수하고 그 공포에 의지하여 우리 자신의 약점이나 필멸성과 마주하고 또 가능하다면 그 핵심에서 어떤 잠정적인 긍정의 순간을 발견하도록 권유한다. 이 긍정이란 우리가 보았듯이 그저 예술 자체가 계속 가능하다는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이론에서 문제는 그런 것들은 실생활의 재앙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런 재앙─가령, 2001년 미국 세계무역센터 공격 같은─이 오로지 고난일 뿐 다른 것은 아닌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17)


전통적 관점에서 비극적 예술은 신화, 섭리, 또 신들이라는 부담스러운 존재를 상실한 세계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히 언제 유령이 되느냐 하는 것은 논란이 있는 문제다. 마크 트웨인과는 달리 비극은 하나가 아니라 일련의 한 무더기의 때 이른 사망 기사의 주인공이었다(마크 트웨인 생전에 사망 기사가 잘못 보도된 적이 있다). 헤겔은 근대에 이르면 예술 그 자체가 생명이 다하며, 비극적 드라마가 계속 무대에 올라가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고대인의 세계 역사적 차원이 사라진 열등한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비극적 드라마는 그런 중대한 쟁점으로부터 윤리와 심리로 방향을 틀었는데, 이런 쇠퇴는 이미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서부터 나타났다. 니체에게 비극은 회의적인 에우리피데스와 지적인 소크라테스의 등장과 더불어 유아기에 요람에서 목이 졸려 죽었다.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운명이라는 관념이 고대 비극의 핵심이라고 보는데, 근대에는 설득력 있는 등가물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19)


프리드리히 셸링에게 비극적 행동은 내면화되고 심리화되고 개인화된 것이며, 이는 어떤 면에서는 그 자신이 충실하게 따른다고 믿는 고대 그리스 연극과 모순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행동의 문제인 것이 셸링에게는 의식의 문제다. 비극적 과정 전체가 역사적 조건이 아니라 존재의 내적 상태로부터 흘러나와야 한다. 갈등과 반역은 대체로 내적 문제이며, 주인공의 외롭고 우월한 영혼은 갈가리 찢기지만 결국 온전한 전체로 찬란하게 복원된다. 운명이라는 관념이 근대의 무작위적이고 우연적인 것들에 대한 감각에 패하여 사라지고 나서 아이스킬로스나 소포클레스의 예술은 이제 가능하지 않다. 이것은 헤겔이 그의 철학적 적수 프리드리히 니체와 공유하는 편견인데, 니체가 보기에 현대 비극론은 이제 공적 영역의 예술에서 물러나 개인화되고 내면으로 치달았다. 니체가 비극적 문화의 소생에 건 희망은 그 영역의 갱신에 달려 있는데, 여기에서는 공유되는 신화의 등장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25)


근대성은 비극을 망치기는커녕 생명을 새로 연장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잠재적인 비극적 주인공의 대오를 한없이 부풀려 놓았다. 민주주의 시대에는 누구라도 거리에서 뽑아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팍팍한 장소에 갖다 놓기만 하면 후보가 될 가능성이 있다. 리타 펠스키Rita Felski가 말하듯이 “고난에 대한 이런 민주화된 비전에서는 은행 직원이나 상점 여직원의 영혼도 중대하고 헤아릴 수 없는 힘들이 자신을 완전히 소진하는 전장이 된다.” 호라티우스는 시인들에게 신이 평민의 악센트로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고 조언하는데, 비극적 영웅도 마찬가지일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근대 영웅들로 오면서 이런 속물주의를 치워 버렸다. 계몽주의 이후로 우리는 인간이 지위, 성격, 성별 또는 민족적 기원 때문이 아니라 단지 인간 종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귀중하다는 마음을 흔드는 명제(기독교가 오래전부터 예고하던 명제)와 마주하게 된다. 26)


근대성이 비극을 좌절시키기보다는 촉진할 수 있는 다른 이유들이 있다. 우리는 이성의 한계, 한때는 자주적이었던 인간 주체의 연약함과 자기 불투명성, 통제 불가능한 수수께끼 같은 힘들에 노출된 상황, 힘과 자율성에 가해지는 제약, 인간의 행복에 완전히 무관심해 보이는 익명의 ‘타자’ 안에서 찾아야 하는 기원, 다원적 문화 안에서 선善들의 불가피한 갈등, 인간이 주는 피해가 장티푸스처럼 퍼질 수 있는 사회질서의 복잡한 밀도를 새삼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세계화된 행성에 함께 묶여 있기 때문에 원죄의 감각―우리가 무고하지만 죄를 지은 자들로서 이 빽빽한 연결망 안에서 움직이다 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복귀하고 있다. 어떤 역사적 시기도 근대처럼 인간의 힘을 풍부하게 풀어놓은 적이 없으며, 따라서 어떤 시기도 자신이 풀어놓은 힘에 정복당할 위험이 이렇게 컸던 적이 없다. 27)


2. 근친상간과 산술


오래전부터 『오이디푸스 왕Oedipus Tyrannus』에는 산술算術과 관련된 서브텍스트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성마르게 하나는 하나 이상이 아니라고 고집하는 오이디푸스는 아들이자 남편, 아버지이자 형제, 범죄자이자 입법자, 왕이자 거지, 원주민이자 이방인, 독이자 해독제, 인간이자 괴물, 유죄이자 무죄인 자로서, 또 맹목적이면서 명민하고, 거룩하면서 저주를 받고, 마음은 빠르면서 발은 느리고, 수수께끼를 푸는 자이자 판독 불가능한 수수께끼로서 그 자신이 바로 하나 이상인 하나다. 모든 남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상의 후손이며, 너무 많은 섬세한 가닥으로 짜여 있어 사실상 읽어 낼 수 없는 텍스트다. 어쨌든 소포클레스의 드라마를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모든 다수성이 자비로운 것은 아니며, 모든 혼종성이 천사 같은 것도 아니고, 모든 정체성 주장이 계몽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자기 자신이 되는 것에는 늘 어느 정도 연기가 따른다. 32)


오이디푸스는 또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신에 대한 인식과 ‘타자’의 관리하에 있는 자기 정체성의 다른 형태 사이에서 나뉘어 있다. 그 관점에서 보는 자신(근친상간을 저지른 친부 살해자)은 자신이 보는 자신이 아니며, 그가 자기도 모르게 하는 모호한 말의 진정한 의미는 여느 인간의 발언과 마찬가지로 일차적으로 그의 의식적인 의도가 아니라 ‘타자’(언어, 친족관계, 사회관계로 이루어지는 장場 전체) 안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 결정된다. 에고ego의 진실은 주체의 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오만하게 자기 결정을 하는 이 인물 내부에서 뭔가 이질적인 것이 행동하고 말을 하며, 이것이 그의 말 속에서, 사실 그의 이름 속에서도 수수께끼 같은 서브텍스트로 집요하게 남아, 그의 상상의 정체성을 탈중심화하고 마침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은 결코 단순하게 하나일 수 없다. 오이디푸스가 마침내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만날 때, 그 자아는 낯선 존재로서 그와 대면한다. 33)


근친상간 금기는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섹슈얼리티는 그런 제약에 순응하려 하지 않는다. 쌍둥이의 경우를 제외하면 일반적인 성적 재생산에서는 1+1=1이지만, 여성 파트너가 남편에게 아내이자 어머니이고 손자에게는 어머니이자 할머니라는 네 가지 역할을 합하고, 남성 파트너 또한 여자의 아들이자 남편이고 자식의 아버지이자 형제로서 비슷하게 여러 역할을 융합하고 있는 성적 재생산 행동에 맞는 공식은 무엇일까? 따라서 어떤 것이 그 자체인 동시에 다른 어떤 것이 되는 근친상간은 특별히 매혹적인 아이러니의 사례이며, 이런저런 종류의 아이러니는 소포클레스 걸작의 모든 조직에 스며들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일탈은 규범적 상태의 조건이다―이것은 문명화된 사회가 폭력적 기원으로부터 나타나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는데, 오이디푸스도 다친 발에서 출발했다. 애초에 상징적 질서를 만들어 내는 욕망은 늘 그 질서를 제자리에 붙잡아 두는 수칙을 무시할 수 있다. 33-4)


결국 가장 중요한 산술적 계산은 하나가 하나 이상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영이 영 이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오직 무無가 될 때만 뭔가가 될 수 있다―그리고 ‘창조’의 교리가 암시하듯이 뭔가와 무 사이의 차이는 모든 것에서 가장 근본적 차이다. “나는 인간으로 존재하기를 중단한 시간에 인간으로 만들어지는 걸까?” 그는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에서 묻는다. 리어가 코딜리아에게 경고하듯이 무에서 아무것도 나올 수 없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이 희곡 또한 산술의 서브텍스트를 가지고 있으며 더, 덜, 뭔가, 과잉, 전부, 무를 미묘한 차이로 표현해 낸다. 오이디푸스는 결국 그저 하찮은 사람, 스스로 추방한 거지 같은 존재로 끝난다. 그러나 그는 눈이 멀 때에만 진실을 파악할 것이며, 인간성이 벗겨져 나갈 때에만 진정으로 인간이 될 것이며, 궁핍해질 때에만 들어 올려질 것이다. 그는 이전의 자신보다 못한 존재가 되면서 더 큰 존재가 되는 데 성공한다. 39)


3. 비극적 이행


찰스 시걸은 『오이디푸스 왕』을 신화적이고 상징적인 사고로부터 더 추상적이고 담론적 사고로 이동하던 5세기 아테네 계몽주의의 문건으로 본다. 블레어 혹스비는 그리스 비극이 그렇게 단명한 문화적 형성물이라면 그것은 “이 비극이 종교적인 사고 습관이 이울면서도 여전히 어느 정도 힘을 소유하고 있고 책임이라는 법적 개념이 흐름을 타고는 있지만 아직은 견고하지 않은 문화적 이행의 순간에만 번창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장 피에르 베르낭과 피에르 비달 나케는 비극적 영웅은 일반적으로 이전의 신화적 시대 출신이며, 이제는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비극은 신화를 폴리스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시작된다―물론 쌍방향 운동에 따라 그런 신화가 또 자신을 검토하려 드는 합리성의 한계를 강조하기도 하지만. 영웅적·종교적 가치는 도시국가의 법적·윤리적·정치적 판단에 종속되는데, 도시국가는 권위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는 신화적 과거와 단절할 필요가 있다. 42)


그렇다 해도 사람들은 이제 비판적 사유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아직 자율적인 칸트적 주체로 진화하지는 못했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서 인간은 자신의 두 발로 서지만, 그것은 기고 절뚝거리는 사이의 짧은 막간 동안만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 자기 주인 노릇을 하지만 오직 의존이라는 더 깊은 맥락 안에서일 뿐이다. 바로 이런 이중 결정―자기 행동의 원천인 자아와 그 자아를 통해 말하고 행동하는 무녀 같은 ‘타자’ 사이의 긴장―에서 상당한 비극적 갈등이 생긴다. 그러나 ‘타자’에게는 타자가 있을 수 없다. 그것을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하는 관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타자’는 통일된 영토가 아니다. 올림포스산에서 다투는 신들이 단일한 통치권을 구성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은 ‘타자’로부터 자신을 돌려받는데, 이때 자신은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는 행위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일은 정신의 영토 밖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애초에 우리를 인지 주체로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3)


유구한 비극적 리듬에서 주체 자아는 객체 자아―눈멀고 약하고 초라하고 상처받기 쉬운―의 기초 위에서만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 영의 진정한 고귀함은 자신의 유한성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있다. 스핑크스에게는 인간의 머리가 있지만, 동물의 몸에 통합된 머리다. 정신은 오직 연약한 육신에 매달림으로써만 자신을 뛰어넘어 무가 되어 버리는 일을 피할 수 있다. 의식이 유아기에 신체적 상호작용에서 생겨난다는 것, 모든 인간에게 진실인 이것은 사실에서 가치로 바뀐다. 우리가 몸이라는 기초에서 올라와 자아로 들어가는 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서사의 산물이다. 『안티고네』 합창단이 노래하듯이 인간은 훌륭한 동시에 죄가 많다―어떤 자유주의적 지혜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단지 섞여 있고 다면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모순의 화신이며 모든 논리에 저항하고 그 자신의 합리성의 범위를 벗어나는 수수께끼다. 따라서 비극은 모든 이성을 넘어서는 이성의 한 형식이다. 인간에 대한 변증법적 지식의 모델이다. 45)


고대 그리스인의 감각만큼이나 매혹적인 질서 감각을 그것이 무너지면서 나올 수 있는 재앙과 함께 담아내지만, 안정성을 향한 이런 뜨거운 마음을 개인의 풍부하고 창의적이고 잠재적으로 파멸적인 힘에 대한 인본주의적인 감각, 고대 아테네에서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날카로운 감각과 결합하는 일군의 극적인 작품을 상상해 보라. 그러면 셰익스피어 비극의 성취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질서와 혼란 사이의 이런 충돌은 희곡에 담긴 시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시는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문법과 논리의 규칙성에 의존하면서도 아주 풍부하고 다가多價적이어서 자신의 기초를 허물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질서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믿음은 그것을 표현하는 바로 그 언어에 의해 위태로워진다. “말 없이는 [어떤 이유reason도] 내놓을 수 없군요.” 『십이야』에서 광대는 재담을 던진다. “하지만 말이란 너무 거짓되기 때문에 그걸로 이치reason를 이야기하는 것은 싫네요.” 48)


라신의 비극에서, 뤼시앵 골드만Lucien Goldmann은 『숨은 신Le Dieu Caché』에서 주장한다, ‘신’은 세상에 현존하는 동시에 부재하는데 이것은 비극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전능한 존재’는 자신의 ‘창조물’에서 물러나 자신이 창조한 연옥 세계에 등을 돌리고 그 결과 절대적 가치는 사라졌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여전히 불모의 실재에 드리워져 주인공은 초월을 찾는 과정에서 세계를 거부하게 된다. 절대적 가치는 실현될 수 없지만 그 유령을 완전히 쫓아낼 수도 없다. ‘전능한 존재’는 그를 찾는 성과 없는 탐색의 형태에서만, 또는 죄의 경험에서만 계속 살아 있다. 딜레마는 ‘신’이 세계에서 물러나면서 가치도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 납골당 같은 ‘창조물’의 세계가 존재하는 유일한 것이 되었으며, 따라서 사람들은 그것을 끌어안을 수도, 아니면 어떤 더 높은 영역을 위해 그것을 내칠 수도 없다. 세계에서 사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인데, 그것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하늘의 침묵이다. 49-50)


따라서 비극적 주인공은 골드만의 관점에서 보면 부재하는 ‘신’이 현존하는 곳에 살면서 세속적 맥락에서는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절대적 요구의 짐 때문에 비틀거리는 사람이다. 점점 합리주의적으로 바뀌는 사회질서는 그런 칙령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고, 우리가 그 권위에 고개를 숙일 조건을 제공할 수도 있다. ‘신’은 불가해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손에 잡히지 않는 ‘타자’에게 던져지는 질문은 히스테리 환자의 고전적인 의문이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당신이 나에게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따라서 히스테리 환자는 정의롭지 않을 뿐 아니라 이제는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는 질서와 마주한 인간 주체 전체를 대표하는 한 예가 된다. 이런 소박한 프로테스탄트의 비전에서 육은 영의 화신이 될 수 없다. 가치는 인간 주체 안에 존재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 실현될 수는 없다. 주인공은 사라진, 내재적 의미의 세계와 권력이나 욕망의 탐욕스러운 체제 사이에서 갈등하며 파괴된다. 50)


발터 베냐민은 비극의 이행적 본질에 관해서 『독일 비극적 드라마의 기원』에서 그만의 독특한 관점을 주장한다. 비극적 영웅은 자기도 모르게 신화와 신들의 구체제와 새로운 공동체 탄생 사이에 끼게 되는데, 새로운 공동체가 도입되는 데는 그의 희생적 죽음이 도움이 된다. 그는 어느 쪽 질서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고 결국 둘 사이에서 짓눌려 죽으며, 옛날 법과 미신의 언어와 아직 표현 불가능한 윤리―정치적 미래 담론 사이에 끼어 있다. 비극적 영웅은 희생 제물로서, 구체제의 잔재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쓰러뜨릴 수 있는 원칙을 대표하며, 그러한 존재로서 해방된 미래의 전조가 된다. 한 제도와 다른 제도 사이의 폭력적 이행 지점에 자리 잡은 영웅은 신들의 눈앞에 자신을 정당화하기를 거부하면서 운명과 결별한다. 베냐민은 비극적 주인공이 세속적 시기가 아니라 오직 메시아적 시기에만 가능한 완성을 이루지만, 실제로는 이런 양식의 시간성 속에는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에 영웅은 죽어야 한다고 본다. 55)


프레드릭 제임슨은 예술적 모더니즘이 아직 끝까지 가지 않은 근대화 과정에서 생겨난다고 본다. 페리 앤더슨도 모더니즘 예술의 파괴력 가운데 많은 부분을 설명해 주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전근대로 남아 있는 사회에 근대성이 가하는 충격이라고 주장한다. 근대적으로 바뀌는 일이 일단 완료되면 예술 운동으로서의 모더니즘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대체로 모더니즘은 막스 베버의 표현을 빌리자면, 점점 “마법에서 풀려나고 있지만” 여전히 신화, 우화, 민담, 초자연적인 것이 풍부하게 갖추어져 있는 문명의 산물이다. 사람들은 이런 자원을 근대성의 혐오스러운 특징으로부터 피난할 곳으로서 또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상징적 틀로서 활용할 수 있다. 세속적인 것은 아직 신성한 것의 모든 자취를 지워 버릴 만큼 견고하게 자리를 잡지 못했는데, 그 신성한 것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이 바로 예술이다. 이런 역사적 과도기에 그리스 비극 작가의 지혜는 불가결하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57)


4. 유익한 허위


플라톤의 이상적인 사회질서에서 통치자는 거짓말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받는다. 그들은 공익을 위하여 거짓을 말하는 것을 허락받는다. 플라톤 이후 많은 사상가에게 통치자가 무엇보다도 비밀로 지켜야 할 것은 개별 시민의 유래가 아니라 정치권력의 불미스러운 기원이다. 국가는 대부분 전쟁·침략·혁명·멸절의 결과이며 이런 원초적 잘못은 영토 방어를 위해 징집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감추어야 한다. 주권의 원죄는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역사를 오염시킬 위험이 있으며, 따라서 감추어야 한다. 버크의 관점에서 권력은 감각을 속여 고상한 기만과 계도적 허구를 낳아야 한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행복감과 위로다. 매슈 아널드는 소유와 국가의 기원을 말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유재산 몰수 시기의 폭력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정리되면 그런 폭력에 대한 속죄로 몰수 반대를 제안할 생각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상황이 정리되고 과거는 잊히는 게 훨씬 낫기 때문이다.” 64)


대중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되는 다른 추문은 도덕적 가치와 사회질서의 기초인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또는 존재한다 해도 그의 힘이 완전히 과대평가되었다는 사실이다. 지식인의 회의주의가 민중의 경건성에 다가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다중은 늘 몽매해진다고 생각한 볼테르는 자기 집 하인들이 자신의 종교적 이단성에 감염되지나 않을까 마음 졸였다. 아일랜드 철학자 존 톨런드(놀랍게도 급진파)는 신학적 소책자 『팬시이스티콘Pantheisticon』에서 ‘이성’의 진실을 군중의 미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데이비드 흄도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서 학식이 있는 자와 무지한 자 사이의 간극을 의식하지만 종교의 온건한 형태, 그 자신은 믿지 않는 형태가 정치적 안정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토머스 제퍼슨도 비록 자신은 공유하지 않지만 신에 대한 믿음은 사회의 단결에 핵심적이라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신을 믿지 않는 에드워드 기번도 대체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65)


스피노자가 보기에 우리에게 깊이 자리 잡은 환상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지금 행동하는 것과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순혈 결정론자로서 그에게 자유란 상황이 달라질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데서 나오는 마음의 고요apatheia이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것은 우리 주위에서 보이는 것의 필연성을 파악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우리의 힘을 늘리는 것이다. 대중이 자기 행동의 원천이 자유의지라고 잘못 아는 것은 진정한 원인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자연의 일반적 질서에 관한 한 정신은 자신, 몸, 다른 물질적 대상에 관해 “혼란스럽고 훼손된”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플라톤과 다른 부분은 이런 무지를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대중은 미망 속에서 뒹굴 필요가 없다. 그들의 욕망은 유연하여 다시 빚을 수 있으며, 계몽된 철학자에게 맡겨지는 과제는 바로 이것이지, 정치적으로 시의적절한 허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니다. 66-7)


유럽의 지배계급이 스피노자의 이름을 두려워하고 매도한 것은 그의 그런 믿음 때문이었다. 콩도르세는 자신이 이 네덜란드인 동료와 의견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체제의 원칙 가운데 하나가 민중의 도덕성은 가짜 의견 위에 세워져야 하고, 계몽된 사람들은 쓸모있는 오류를 제공하기만 한다면 다른 사람을 속여도 괜찮고, 그들 자신은 부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슬로 민중을 계속 묶어두는 것이 정당화될 수도 있다는 것인데, 이 체제에서 진실로 어떤 도덕성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는 그렇게 묻는데 이것은 이 신뢰할 수 없는 기획 전체에 대한 간결한 요약이다. 이런 점에서 콩도르세의 상속자는 지크문트 프로이트인데, 그는 『환각의 미래』에서 종교적 관념이 유아에게 들려주는 동화라고 일축하며, 자신의 후기 계몽주의 양식대로 그런 아편이 없어도 되는 미래를 바라본다. 에고에 미망이 어느 정도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해서 거기에 마귀나 눈물을 흘리는 동정녀상에 대한 믿음까지 끼어들 필요는 없다. 67)


플라톤, 마키아벨리, 볼테르를 비롯한 편리한 허구의 조달자 대부분은 거짓말 자체를 정당화하려 하지 않는다. 기만은 안타까운 일이고 정치적으로 불가결할 때만 대중 사이에 퍼뜨려야 한다. 기만은 진리의 일반적 체제 내에서 기능하며, 그 기초를 사보타주하는 행동은 전혀 하지 않는다. 사실 거짓은 진리를 가장함으로써 진리에게 경의를 표한다. 니체에게 거짓은 결코 안타까운 필수품이 아닌데, 그는 진실과 거짓에 일반적으로 할당되는 가치를 역전시키려 하며, 사기를 치는 사람들에 대한 찬가를 부를 만큼 뻔뻔스럽다. 그는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을 경멸하며, 그들에게 “진짜 거짓말, 진정하고 단호하고 ‘정직한’ 거짓말(그 가치에 관해서는 플라톤을 참조해야 한다)은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가혹하고 강력할 것”이라며 비웃는다. 이 관점에서 인간은 환각 없이는 살 수 없다. 거짓 판단을 포기하는 것은 삶 자체를 버린다는 뜻일 것이다. 70-1)


외양의 세계에서 현실성이 놀랄 만큼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눈에 두드러지는 한 가지가 바로 예술이다. 니체는 놀랄 만큼 대담한 태도로 예술과 진리 사이의 유서 깊은 관련을 끊어 버린다. 예술이 디오니소스적인 에너지의 분출로서 우리가 ‘실재’에 접근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재’는 보기에 무섭기 때문에 예술은 아폴론적인 위장으로 그것을 가리는 기능을 한다. 아편이라는 예술의 본질 또는 거짓 위안이라는 문화의 본질에 관해 이렇게 잔인할 만큼 솔직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무의식(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진실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꿈과 환상(아폴론적인 것) 속이지만, 오직 전치되고 신중하게 완화된 형태로만 드러난다. 예술이 승화시키는 야만성이 없다면 예술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문명의 가장 훌륭한 꽃은 야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것은 신정론의 한 종이다. 역사가 괴테 같은 인물이나 톨스토이 같은 인물을 내놓으려면 잔혹과 착취는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73)


# 신정론神正論. 악의 존재를 신의 섭리로 본다.


예술은 이중의 기만을 포함한다. (비)진리를 감추는 동시에 거기에 목소리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이런 의미에서 환각이다. 거짓말의 성화聖化다. 그러나 단순히 환각만은 아니다. 이것은 또 변화를 일으키고 삶을 고양하는 힘, 우리가 성장하고 번성할 수 있는 수단이 되는 비옥한 오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히 비극에서 진실이다. 니체에게 비극적인 것은 공포가 부정되지 않고 연금술에 의해 승리로 바뀔 수 있는 과정이다. 그렇다 해도 예술은 그 자체로 목표라기보다는 인간 번성의 수단이다. 이 점에서 다시 니체는 미학자 가운데는 드문 존재가 되는데, 이번에는 예술 작품을 솔직하게 도구로 보는 태도 때문이다. 세계는 자신을 낳는 예술 작품이며, 이런 자유로운 자기 생산 과정을 이용하여 우주의 소우주가 됨으로써 초인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를 이룰 수 있다. 그는 자신의 혼돈이 형식이 되도록 강요한다. 그는 웅장하게 살아난 예술 작품이며, 예술가·예술품·재료가 하나의 몸 안에 있는 존재다. 74-5)


진실이 양가적인 것이라면 무엇보다도 너무 많은 불쾌한 비밀이 드러나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인데, 특히 허위의식의 조종석이라고 할 수 있는 가족이 문제될 때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세일즈맨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가정의 노爐는 진실이 일상적으로 억눌리는 곳이다. 비극적 예술의 전통적인 현장―전장, 귀족의 집, 왕궁―에 대응하여 그와 똑같이 갈등·배신·폭정·반역이 넘쳐나는 근대의 등가물이 있는데, 그것은 부르주아 가족이라고 알려진 현장이다. 중간계급 사회의 근본 단위인 가족은 정신적으로 고통받고 죄책감이 곪아 가는 자리이지만, 공적 영역에서는 가정의 조화와 결혼의 행복에 대한 찬가가 계속 울려 퍼진다. 영웅 이후 시대에 비극이 번창하는 데는 악마나 반신半神이 필요 없다. 반대로 매우 숭배받는 제도 가운데 하나의 핵심에서 형언할 수 없는 것이 발견된다. 이것이 신화의 종말, 또는 공적 영역의 붕괴에도 비극이 죽지 않는 한 가지 이유다. 82-3)


5. 위로할 수 없는 자


중간계급 문명은 세계를 자신의 목적대로 형성하고자 하는 가운데 과학과 테크놀로지라는 대단히 막강한 도구를 진화시켰다. 그러나 과학은 우리에게 모든 물질적 현상이 어떤 엄격한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말을 해 줄 수밖에 없는데, 인간 자신이 이런 결정론에서 어떻게 면제될 수 있는지는 알기 힘들다. 자유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면 예측과 계산에 의지해야 하는데, 이것은 자유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기획이다.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것은 역사의 결말이 열려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동시에 어느 정도의 결정된 지식을 요구하며, 이런 종류의 지식은 예측 불가능한 세계에서는 얻기 힘들다. 만일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나뉘어 있는 두 영역이라면 인류는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도 뿌리를 내리지 않았고, 그 결과 우리는 우리의 고향 없는 상태를 대가로 자유를 사는 듯하다. 따라서 중간계급 사회의 기초―자유로운 주체―는 암반이라기보다는 심연인 듯하다. 94-5)


예술 작품은 하나의 전체로서 구체적 특수성 안에서 또 그 특수성을 통하여 작용하기 때문에 감각적 합리성의 모범―감각되는 것과 이해되는 것,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 필연과 자유, ‘자연’과 정신을 통일하겠다고 약속하는 이성의 한 형태의 모범―이다. 예술은 감각을 끌어들이며, 그래서 어떤 추상적 교의보다도 사람을 깊이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감각된 것들이 모여 제멋대로인 군중, 바스티유를 급습한 폭도canaille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예술의 감각적 내용은 일관된 기획에 의해 안으로부터 모양이 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성 자체가 감각화되는 것이며, 따라서 어떤 피도 눈물도 없는 합리주의로 방향을 틀기보다는 인간적 욕구나 감정과 접촉하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자유는 객관화되어 손에 잡히는 형태를 띠게 된다. 거의 모든 미학적 담론이 그렇듯이 예술 작품의 이런 모범 밑에는 신학적 개념이 잠복해 있다. ‘육화Incarnation’, 즉 육肉이 된 ‘말Word’이라는 개념이다. 97)


우리는 허구적 형식으로 죽음 충동을 마음껏 충족시킬 수 있다. 우리를 죽을 때까지 쫓아오는 힘들에게 마음껏 어떤 가상의 복수를 해도 우리가 실제로는 죽지 않을 거라는 믿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진정한 행복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나는 안전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것도 나를 해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데 있다. 오직 바다 같은 고난에 맞서 무기를 들 때에만 비극적인 것이나 숭고한 것은 우리가 그런 괴로움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다는 것을 가르쳐줄 수 있다. 또 아무리 무익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해도 정신은 자연 세계에 맞서 싸울 때에만 번창할 수 있다. 두 경우 모두 고난과 영웅적 저항을 통해서만 어떤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힘들의 물러서지 않는 현존을 느끼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이 그것과 정신적으로 동등하거나 심지어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 작품의 형식적 구조에서도 그렇듯이, 속박이나 필연은 자유의 근거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98)


셸링의 관점에서 오이디푸스가 실제로는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불법적 행동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인 것은 필연에 허리를 굽히는 동시에 필연에 숭고한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부당한 권위에 맞서 헛된 싸움을 벌이는 것은 자신이 자신을 낮추려는 힘들의 훌륭한 맞수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니체의 표현으로 하자면 이것은 승리를 거두는 패배의 문제다. 죽음에 순응하는 것은 적어도 자신을 파괴하려 하는 힘의 의지만큼 확고한 의지를 요구한다. 영웅은 몰락을 받아들이면서 자기 내부의 무한함을 드러내는데, 이런 면에서는 자신이 투쟁하는 힘들과 하나다. 이 힘들은 근엄한 필연성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이성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영웅의 힘의 근원에도 놓여 있다. 오직 주인공의 생물적 실존 너머에서 나오는 힘만이 그가 그런 실존을 포기하도록 허락할 수 있을 것이다. 영웅은 자유를 포기하고 필연성의 굴레를 뒤집어씀으로써 자신의 행동이 자신의 것임을 인정하는 바로 그 행동으로 자유를 증언한다. 101-2)


니체의 경우 비극에 비할 바 없는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무대 위 인물들의 번뇌가 아니라 구경꾼의 흔들리지 않는 눈길이다. 우리는 비극적 행동의 목격자로서 기뻐 어쩔 줄 모르며 죽음 충동에 우리 자신을 내주는 순간 그 충동을 속이고 영생에 대한 유아적 환상을 맛본다. 동시에 쇼펜하우어의 구경꾼처럼 시간을 벗어난, 의지도 없고 장소도 없는 순수한 명상의 중심으로 이동하여 추하고 볼품없는 것이 그보다 자비로운 특징들과 함께 긍정해야 할, 강력한 우주적 게임의 불가결한 측면임을 인정하게 된다. 다시 한번 비극은 신정神政의 한 형태다. 고통 없이는 지복이 있을 수 없고, 시듦 없이는 개화가 있을 수 없고, 자해 없이는 주권이 있을 수 없다. 모든 진정한 예술의 뿌리에는 괴로움이 있다. 비극적 예술가는 적극적으로 고난을 찾아 나서며, 인간 실존에서 의심스럽고 무시무시한 모든 것을 긍정한다. 고통과 자기 억압은 니체에게 초인 도래의 필수적 서곡이며, 이것이 그것들을 내칠 수 없는 한 가지 이유다. 116)


마르틴 하이데거는 신들의 귀환, 신화의 재연, 비극적인 것의 재탄생이 합리주의와 테크놀로지로 엉망이 된 시대에 유일한 구원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믿은 또 한 사람이다.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비극은 가장 심오한 철학적 사유로 우리에게 위험하고 폭력적이고 운명적이고 고향 없고 불가사의한 ‘인간’ 이미지를 제시한다. 그러나 미래에 어떤 쓸쓸한 희망을 품고 있다고는 해도 하이데거는 전통의 끝에서 쓰고 있다. 죄르지 루카치의 초기 에세이 「비극의 형이상학Metaphysik der Tragödie」에서 비극은 역사 자체보다 강력한 현상으로 거대하게 떠오른다. 비극적 비전만이 궁극적 진리의 현현으로서 인간 실존에 의미를 주입한다. 비극적 위기의 순간에만 우리에게 모든 경험적 또는 심리적 우연을 쳐낸 순수한 자아 경험이라는 특권이 주어진다. 비극 예술은 다름 아닌 ‘존재’ 자체가 자기를 드러내는 것, “인간의 구체적이고 핵심적인 것이 현실이 되는 것”으로, 인간 노력의 정점이며 신비한 황홀경의 계기다. 119)


고전주의 고대로부터 미국의 신비평에 이르기까지 통합된 전체 속에 부분이 용해되는 통일된 예술 작품이라는 신조는 놀랄 만큼 끈질기다는 것이 드러났다. 20세기 초에 유럽 아방가르드가 등장하고 난 뒤에야 이 교조는 어느 정도 규모로 논박이 이루어진다. 이제 불협화라는 관념이 기조를 이루며, 가장 훌륭한 이론가는 하이데거의 큰 적 테오도어 아도르노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의 그늘에서 글을 쓰는데, 그의 생각으로는 비극이 인간 고난에 모양이 잡힌 형식을 부여하여 그것을 배신할 위험이 있다. 비극은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억지로 떠안겨 그 잔혹성을 줄이는 데 성공할 수 있을 뿐이다. 아도르노가 그렇게 큰 빚을 지고 있는 프로이트에게도 여러 힘 사이의 최종적 화해는 있을 수 없다. 인간 주체는 자기 동일적이기보다는 분열되어 있다. 유아기의 격동에 대한 결정적 승리는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그저 최선을 다해 그 결과를 감당하며 살 수밖에 없다. 문명은 비극의 해독제라기보다는 그 예에 가깝다. 120)


고전주의적 고대에서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통일과 대칭은 높게 평가된 반면 불협화와 분열은 안정에 위협이 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관념론자, 낭만주의자, 19세기 목적론자에게는 투쟁과 낭비도 인간 역사의 행복한 진화에서 자기 나름의 역할이 있다. 통일은 기조로 남아 있는데, 이는 마침내 분열을 통합할 수 있는 통일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근대 후기에 화해에 대한 이런 믿음은 환상 또는 거짓 유토피아로 점점 불신임을 받았다. 그다음에 나오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로, 여기에서 갈등과 모순은 이제 다급한 문제가 아니다. 대신 차이와 다양성이 강조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질은 선배인 근대성의 기질과는 달리 대부분 비극적이지 않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깊은” 주관성에 대한 혐오는 영적 고통이나 존재론적 불안과 편하게 공존하지 못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구원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눈에 구원받을 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124)


칸트에서 하이데거에 이르는 비극 철학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윤리 정치적 목적에 적합하도록 그 예술의 범위와 다양성을 축소해 버렸다. 그 결과로 비극적인 것의 한 형태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일반적 의미의 비극이라는 말을 대체로 억누르는 역할을 한다. 예술에서 희극은 삶의 희극과 그리 거리가 멀지 않지만 비극은 미학적 의미와 일상적 의미 사이에 간극이 있다. 그게 다가 아니다. 그 말의 일상적 사용법이 우리가 지금까지 검토한 많은 이론보다 비극적 드라마 대부분을 오히려 더 충실하게 설명해 준다. 예를 들어 복구 불가능한 것이 해소 가능한 것보다 비극적이라는 일반적 의견은 당연히 옳다―그렇다고 해서 후자가 설 자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비극적인 것에 대한 이 이데올로기는 결국은 복구가 불가능한 곤경을 맞이한 사람, 결국은 대립물의 통일로 환원될 수 없는 갈등에 사로잡힌 모든 사람에게 몹쓸 짓을 한다. 그것은 위로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마땅히 그래야 할 만큼 존중하지 않는다.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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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얼 씽 - 문학 형식에 대한 성찰
테리 이글턴 지음, 이강선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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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사실 직시하기


1. 사실주의, 공감과 합리성 


"문학적 사실주의가 인간의 공감을 키울 수 있는 주된 방법은 두 가지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그려 냄으로써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여줄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행동과 태도를 이해하도록 만든다. 아니면 초점을 확대해 등장인물의 행동만을 다루기를 거부하고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해 조명함으로써 삶을 영위하는 맥락을 포함한다. 두 경우 모두, 독자가 개인의 상황에 대해 순전히 외부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도록 한다. 사실주의 소설은 이 두 가지 관점을 결합하는 데 있어 서사적 허구와 서정적 허구, 둘 모두보다 뛰어나다. 서사적 허구는 우리에게 행동의 맥락을 제시하지만, 인간의 복잡한 마음에 접근하도록 해 주지는 않는다. 반면 서정적 허구는 사회 환경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감정을 표현한다. 그러니 만일 우리가 사람들이 어떻게 실제를 경험하는지 재창조할 수 있다면, 동시에 보다 넓은 관점으로 그들의 행동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그들의 약함이나 혹은 범죄마저도 견딜 수 있을 것이다."(16)


"그렇지만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관용도 깊어진다는 선의의 교리는 다소 의심스럽다. 이 교리는 맥락을 고려하면 행동이나 개인이 처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혐오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맥락을 고려한다고 해서 항상 그 일을 더 많이 수용할 수 있게 되거나 더 많이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공감하더라도 오히려 그들에 대한 혐오가 깊어질 수 있다. 연쇄 살인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간다면, 상상했던 것보다 그가 더 혐오스럽게 보일 수 있다. 공감은 윤리를 구축할 기초가 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처지에 공감한다고 해서 그들을 도우려고 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실제로, 만약 당신의 자아가 그들의 자아 속으로 사라졌다면, 당신에게는 공감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다. 게다가, 상상력을 통한 공감 행위로 '누군가'가 되면 그들을 판단하는 데 필요한 거리가 사라지는 반면, 많은 사실주의 소설은 단순히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다."(18-9)


2. 사실과 해석 


"사실주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고자 추구하는 것으로, 사실주의의 대표적인 예시는 우리가 죽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듣기보다 더 고된 일이다. 프리드리히 니체와 포스트모던의 후계자들에게 사물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아는 특별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우리의 입장과 그것을 해석하는 이해의 틀에 따라 우리에게 수많은 다른 외피를 입고 나타난다. 실제로 우리가 사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니체가 단순히 해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가치 있는 유일한 것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 행위 그 자체라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선택하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이다. 이는 실존주의와 청소년기의 공통된 관점이다." "그러나 삶의 중심을 이루는 대부분의 것들, 핵전쟁의 발생 여부, 부모가 우리를 대하는 방법, 유전적 구성, 사랑에 빠지는 대상, 피부색 등등을 선택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27-30)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진실이란 세상을 어떻게 조직해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이익을 증진하느냐의 문제다. 세상은 발견된 것이 아니라 제조된 것이다. 우리가 방금 언급한 것처럼 이 관점에서는 그러한 것이 없기 때문에 사물이 그 자체로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근거가 없다." "더욱 화려한 포스트모던 사상의 전파 활동에서는 진실이 개인과 관련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 사례가 우리와 같이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사회적 감각이 점차 위축된 사회에서 번성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둘 중 하나를 '옳음'으로 표시하고 다른 하나를 '틀림'으로 표시하는 것은 독단적이고 계급적이므로 두 주장 모두 존중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관점을 거짓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에 대해 불쾌할 정도로 엘리트주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사이먼 블랙번(캠브리지 대학 교수)이 말했듯이, 〈상대주의는 (···) 누군가가 말하는 것을 반대할 권리를 약화시키는 것이다.〉"(36-8)


3. 인지적 사실주의와 도덕적 사실주의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무관하지만 그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은 인지적 사실주의로 알려져 있다." "이 이론의 진실은 세상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라는 데 있다. 이 말은 마음이 발견 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사실은 마음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만들고 식별하고 설명하고 구성하는 방법, 어떤 부분이 우리에게 중요하고 어떤 부분이 중요하지 않은지, 그것을 실제로 사용하는 방법,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필요, 관심 및 가치와 관련이 있다." "도덕적 사실주의는 도덕적 자질이 세계의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단순히 사실을 진술하거나 단순히 가치 판단을 내릴 때에도, 두 행위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스티븐 멀홀은 〈사실의 진술이 가치 판단이 아니라, 오히려 사실 진술과 가치 판단은 둘 다 인간 본성이 지닌 동일한 능력을 말한다─오직 가치 판단을 할 수 있는 생물만이 사실을 진술할 수 있다〉고 말한다."(45-8)


"모든 덕행의 근거에는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려는 시도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윤리학과 인식론은 하나가 된다. 고전적인 도덕적 질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상황을 고려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이다." "그러나 도덕적 사실주의자가 적절하게 행동하려면 사물이 우리에게 어떤 것인지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이 통찰력을 얻는 것 자체가 다양한 도덕적 미덕을 요구할 수 있다: 정직과 집념, 자기비판 능력, 사욕이나 자기 망상 없이 세상을 보려는 노력, 세상에 우리 자신의 사적인 환상을 강요하지 않으려는 거부 등이 그것이다. 진리 그 자체는 원래 (믿음 또는 충성을 의미하는) 도덕적 개념이었다." "추악하고 불편한 것에 맞서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지적 용기가 필요할 수도 있고, 사물의 반항과 현실에 대한 개방성을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객관성이 의미하는 바이다. 객관성이란 자기 중심성의 반대이다. 이런 종류의 사실주의는 자발적 충동이 아니라 도덕적 충동이다."(50-1)


II. 사실주의란 무엇인가? (1)


1. 사실주의, 이상주의 그리고 중간계급 


"대개의 경우, 사실주의는 냉정하고 넌센스가 아니며, 더 오래되고 귀족적인 사회 질서의 양식화된 예술에 적대적이다. 사실주의는 대부분 중간계급이 선호하는 형태로 그들은 자신의 세계에 안주하고 자신이 제작하는 예술의 거울에 비춰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을 즐긴다. 그들은 낭만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인 것, 예의 바르고 정교한 것, 공상적이고 멋진 것을 경계하는 경향이 있다. 조지 엘리엇이 쓴 것처럼, 사실주의는 〈감정의 안개 속에서 상상력으로 자란 모호한 형태〉를 〈확실하고 실질적인 현실〉로 대체하는 연구이다. 19세기의 많은 독자들은 자연에 대한 이 겸손한 연구에 너무 많은 것이 있어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여겼다. '사실주의'라는 용어는 성적으로 추악하고 도덕적으로 외설적인 것을 의미하게 되었고, 사실주의 소설에 부르주아 문명에 대한 위협으로서의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가 합류하게 되었다. 사실주의가 경박하고 자유를 사랑하는 프랑스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 명성을 더욱 악화시켰다."(58)


"사실주의는 사회적 존재의 안정성을 신뢰하는 동시에 그 불안정성을 인식한다. 따라서 이는 중간계급 사회의 두 가지 상반된 측면과 일치한다. 사실주의의 도덕적 가치는 신중함, 예의 바름, 절제이지만, 그의 사회 및 경제적 삶은 위험, 투쟁 및 끊임없는 기업의 문제다. 만약 중간계급이 집에서는 차분하고 존경스러운 사람이라면, 공공 영역에서는 모험적인 산업가의 모습을 띤다." "그러므로 사실주의는 이중으로 매력을 발휘한다. 익숙한 이미지로 자신을 위로하는 소심하고 가정 중심의 영혼들뿐만 아니라, 위험, 모험, 지속적인 노력에 영감받는 모험적인 유형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매혹적이다. 그러나 중간계급은 질서와 마무리에 문제가 있다. 시장 경제에는 우아하게 대칭적인 형태가 없고, 재산 취득에도 자연스러운 끝이 없다. 오히려, 끊임없이 축적해야 한다." "돈보다 더 불안정한 것은 없으며, 돈은 인간 존재 전체를 끊임없는 모험으로 만든다. 가장 풍부하고 믿기 어려운 현상인 돈과 환상은 논리적으로 함께 간다."(66-8)


2. 사실주의, 현실, 묘사 


"소설의 세계는 묘사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묘사와 제안을 종합한 것일 뿐이다. 소설은 자신에게 명백한 '외부'를 투사하지만, 이는 내부 작동 모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맨스필드 파크나 보물섬은 소설 제목으로 이 소설들이 알려 주는 것과 구분되는, 실제로 존재하는 맨스필드 파크나 보물섬은 없다. 이 소설들은 순전히 그것을 구성하는 언어로 존재한다. 사실주의의 비결은 그들의 존재가 언어와 무관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표현된 것과 그것이 표현되는 방식 사이에는 실제적인 균열이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문학적 사실주의는 어떤 면에서는 철학자들이 반사실주의라고 부르는 것과 가깝다. 반사실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세상은 그것에 대한 우리의 설명으로 귀결된다. 이는 복제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사실을 생산하는 사실주의 소설에도 해당된다. 따라서 사실주의 작품을 읽는 것은 일종의 인지 부조화를 수반한다. 우리는 그것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실에 동의한다."(80-1)


3. 허구, 반영, 가상 


"문학 작품을 재현으로 보는 것은 작품들을 비물질화할 위험이 있다. 작품이 그 자체로 존재하기보다는 단순히 다른 것의 복사본으로 축소되는 것이다. 작품의 힘은 순전히 그것이 묘사하는 것에서 나온다. 작품의 진실은 작품 밖에 있다. 플라톤은 예술을 사물의 창백한 반영으로 여겼고, 결국 예술을 이념의 창백한 반영으로 느꼈으므로 예술을 의심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러시아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는 자신의 추상 캔버스가 프레임 외부의 이미지가 아니라 그 자체로 물질적 현상이기 때문에 사실주의라고 생각했다. 구성주의의 흔들의자는 흔들의자를 재현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서 사물이 그 자체와 동일하다는 것보다 더 쓸모없는 제안은 없다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가장 사실주의적인 예술은 전혀 아무것도 묘사하지 않는다. 작품이 물질세계나 감정의 '내면' 영역을 적게 반영하면 할수록 작품은 더욱 더 사실적이 되는 것이다. 예술은 자기 영역을 넘어서서 예속되지 않을 때만 자유롭다."(94-5)


4. 사실주의와 이데올로기 


"사실주의의 언어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투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 그 자체 앞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 이런 추정에 따르면, 사실주의는 자신이 제시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도록 만들며, 우리에게 그것을 자명한 것으로 취급하도록 설득한다. 예를 들어 주식 시장이나 심한 불평등과 같은 것들이 이 자리에 계속 남아 있을 것이라고 믿게끔 하는 것이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의 이익에 부합할 수 있으므로, 이런 예술을 일종의 이데올로기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이 관점에서 이데올로기는 '당연한 일' 혹은 '물론'이라는 식으로 나타난다. 이런 방식은 대규모 실직을 햇볕처럼 불가피한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이 사례에 대한 고전적인 진술은 롤랑 바르트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는 신화나 이데올로기가 사물을 실제보다 더 순진하게 보이게 만드는 간주한다. 그는 신화가 〈(사물)에게 자연스럽고 영원한 정당화를 제공하며 설명이 아닌 사실 진술의 명확성을 제공한다〉고 쓴다."(106-7)


"발자크, 스콧, 엘리엇, 톨스토이와 같은 작가들은 정치적 영역을 형성하는 근본적인 사회적 세력을 탐구하기 위해 정치적 영역을 쪼개고 추진하는 것보다 더 깊이 탐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적 사실주의 소설은 다양하고 인구 밀도가 높은 풍경, 한 활동 영역에서 다른 활동 영역으로 이동하고 숨겨진 소속을 드러내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즉, 사실주의가 본질적으로 보수적이라면 때로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그럴 수도 있다. 사실주의는 정치 엘리트에게만 관심을 국한하는 것을 거부하고 민주적 정신을 바탕으로 훨씬 더 넓은 범위의 사회생활을 계획하고자 한다." "모든 혁명은 변화된 것보다 변하지 않은 것이 더 많다. 정치적 불안 속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빵이 필요하고 심지어 베이비 시터도 필요하다.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정치적 봉기가 아니라 그 뒤를 잇는 장기간의 사회적·문화적 혁명이다. 혁명적 단절에 적대적인 것은 사실주의라기보다는 그것을 생산하는 중간계급의 문명이다."(117-9)


III. 사실주의란 무엇인가? (2)


1. 사실주의, 예술과 환상 


"자신의 서사를 편집하는 것은 문학적 사실주의에는 필수불가결하지만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사실주의 소설은 독자에게 사실을 일대일로 설명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소설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사실은 예술적으로 형성되고 선택되었다. 독자가 이것을 너무 의식하면 사실주의적 환상이 드러날 위험이 있다. 예술은 디자인되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이 사실의 무질서한 본질에 충실할 수 있는가? 노스럽 프라이는 〈사실주의 작가는 문학적 형식과 그럴듯한 내용에 대한 요구 사항이 항상 서로 대립한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고 썼다." "이 일은 어느 정도의 조작 없이는 소화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야기는 그것이 피하고자 하는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낼 위험이 있다. 실제와 시적 정의 사이의 간극이 당황스러울 만큼 커 보인다. 제인 에어는 로체스터와 결혼할 수 있지만, 그것은 소설이 개입하여 그의 첫 번째 아내를 죽였기 때문이다. 행복을 향한 우리의 유토피아적 갈망에 진실성이 희생되는 것이다."(126-7)


"프레드릭 제임슨은 소설 형식이 어떻게 사회적 사실을 '탈신성화'하는지에 대해 쓴다. 소설 형식은 우화와 로망스의 환상에 구멍을 뚫고 세상에서 거룩함의 후광을 벗겨 낸다. 제임슨은 전근대 사회에서 사물은 상징적·신화적·초자연적 의미를 부여받았다고 주장한다. 대조적으로 중간계급 문명에서는 사물은 단순히 극명하게 그 자체이다. 우리는 사실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탈신성화되고 탈마술적이며 상식적이고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현실〉을 말하고 있다. 사실주의 소설은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환멸의 세계라고 부르는 것에 적합하다. 그러나 신화, 우화, 마술, 초자연적인 현상이 단순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주의가 그 자체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할  때, 예상치 못한 해결책을 찾아내기 위해 마법과 동화의 자원을 활용할 수도 있다." "사실주의 소설은 낡아 빠진 비사실주의 예술에 계속 빚을 지고 있다. 소설이 종결의 필요성을 포기할 때만 이러한 작위적인 장치를 버릴 수 있을 것이다."(135-6)


2. 사실주의와 토머스 하디 


"작가로서의 모호한 위치 때문에, 대도시 독자층을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자신이 자란 영국 시골을 묘사하는 하디는 어떤 종류의 소설을 써야 할지 고민한다. 그가 설명하는 농업 세계에 속해 있다면 그는 교육과 작가로서의 지위 때문에 이 공동체에서 반외지인이기도 하다. 하디의 소설을 그토록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갈등이다." "하디의 사실주의는 좀 더 전통적인 문학 형식을 되돌아보기 때문에 '불순'하지만, 여전히 설명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노력하기 때문에 '불순'하다." "일부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소설의 역할 중 하나가 교화하고 고양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울함은 이념적으로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불만은 반대를 낳는다. 노동계급을 감염시키면 봉기의 형태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무신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여겨졌는데, 레프러콘처럼 신을 더 이상 믿지 않는 중간계급 평론가들조차 마찬가지였다. 하디와 조지 엘리엇은 영문학 최초의 자칭 무신론자 주요 소설가들이었다."(143-4)


3. 필연성과 우연성 


"사실주의는 우연성과 필연성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한다. 실제 생활은 무작위적인 사건으로 가득 차 있지만, 사실주의 소설에서 전화벨이 계속 울리는 경우, 그것이 줄거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단순한 전화벨 소리로 밝혀지면 우리는 어리둥절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사실주의 소설에서 발견되는 많은 세부 사항이 임의로 선택되었으며, 따라서 그 자체로는 특별한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주의적 글쓰기에서는 우연이 계속해서 필연성으로 바뀌고 있다. 우연하게 시작된 일이 결국에는 선택 불가능한 일로 끝날 수도 있다. 사실주의 작품은 상황을 마음대로 설정하지만 그 제약에 얽매이게 된다. 사실주의 서사에서 영웅이 어느 시점에서 혼수상태에 빠진다면 모더니즘 작품에서와는 달리, 모더니즘에서는 이런 일이 쉽게 일어나지만, 이 영웅은 10초 후에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할 수 없다. 사실주의적 글쓰기에는 조건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 사이에 끊임없는 상호 작용이 있다."(148-51)


IV. 사실주의의 정치학


1. 사실주의와 명목론 


"대부분의 근대 문학 유형은 타고난 명목론들이다. 아이리스 머독의 소설 《그물을 헤치고》에 등장하는 어느 인물은 〈이론과 일반성에서 멀어지는 움직임이 진실을 향한 움직임〉이라고 선언한다. 〈모든 이론화는 도피다. 우리는 상황 자체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데, 그 자체가 말할 수 없이 특별하다.〉 확실히 그럴 수 없다. 처음에 상황을 식별하는 일 자체가 개념 사용을 포함하며, 모든 개념은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일반적이다. 상황은 구체적일 수 있지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구체적이지는 않다. 어떤 경우에는 우연의 일치라고 알려진 것들도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눈에 띌 수 있다. 마이클 폴라니는 〈개별 사항이 더 구체적이기 때문에 그 지식이 사물에 대한 진정한 개념을 제공한다는 믿음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라고 썼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의 관심을 처음으로 사로잡는 것은 세부 사항이 아니라 패턴이나 통합된 전체다. 사실, 더 큰 맥락으로부터 끌어낸다는 의미에서 구체적인 것은 추상적이다."(159-60)


2. 죄르지 루카치의 경우 


"진정한 사실주의 예술은 루카치가 셰익스피어와 발자크의 특징으로 본 개성과 전형성을 결합한다. 이러한 예술 양식은 사회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을 융합함으로써 통일성이 분열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소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사실주의는 단순히 테크닉의 문제가 아니다. 말하자면 사실주의는 세계 자체가 표현되기를 원하는 방식이며, 세계의 가장 깊은 구조를 표현하는 예술이다. 루카치가 비판적 사실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스탕달에서 토마스 만에 이르는 소설의 위대한 전통을 의미하는데, 그는 그것을 중간계급 인문주의의 소중한 유산의 일부이며, 야만적인 파시즘에 맞서 재확인되어야 할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모더니즘과 파시즘은 비합리주의의 쌍둥이 형태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부르주아 예술가와 사상가를 가장 존경하는 조상으로 올려놓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결국 마르크스 자신도 헤겔과 수많은 저명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로부터 지속적으로 배웠던 것이다."(165-6)


"그러나 루카치는 여전히 역사적 조건을 우선시한다. 중간계급 사회가 퇴화하기 시작하면서 비판적 사실주의도 쇠퇴하기 시작한다. 루카치가 보기에 1848년의 패배는 부르주아지의 '진보' 단계의 종말을 예고한다. 루카치는 이 침체의 마지막 단계를 모더니즘의 재앙으로 본다. 모더니스트 운동의 정점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알려진 중간계급 문명의 붕괴와 일치한다. 이 시대에는 군사적 학살뿐 아니라 사회적 혼란, 경제 위기, 정치적 반란이 목격되었다. 이러한 문제에 휩싸인 중간계급은 남아 있는 비전의 힘을 모두 상실했고, 더 이상 역사적 발전을 이룰 수 없음이 입증되었다. 한때 혁명적 세력이었던 것이 반동적 세력으로 변하고 있다. 그 쇠퇴는 역사적 경쟁자인 노동계급 운동이 이제 현장에 등장했다는 사실로 인해 더욱 가속화된다. 사회의 전반적인 논리를 파악할 수 있는 사회계급만이 혁명적 행동을 할 수 있다. 이는 중간계급이 전성기에 달성했던 폭넓은 사회적 비전을 노동계급이 계승해야 함을 의미한다."(167-8)


3.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19세기 후반의 자연주의는 모든 현상이 영적, 초자연적 또는 심리학적 설명에 의존할 필요 없이 자연적이거나 과학적 용어로 설명된다는 확신에 기초하고 있다. 한마디로 물질주의의 한 형태이다. 사실, 근대 유럽 역사에서 때로 두 용어는 동의어였다. 사실주의가 예술적 스타일을 가리키는 것과는 달리 자연주의는 자의식적인 운동에 가깝다." "작가는 주변 환경을 관찰하는 준과학적 관찰자로서 냉정하고 극도로 객관주의적인 스타일로 인물과 사건을 조사한다. 작가를 매료시키는 것은 인간보다는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물질적·심리적·생리학적 법칙이다. 사실주의 작가들은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과 감정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그들의 영웅이나 여주인공과 은밀하게 사랑에 빠졌을 수도 있지만, 자연주의는 이것을 낭만적인 방종의 한 형태로 일축했다. 자연주의는 엄격한 비인격성이 핵심이다. 예술이 과학을 이길 수 없다면 적어도 과학에 합류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다."(178-9)


"(에밀 졸라와 그의 동료들의 작품에서)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와 가난한 농민이 중앙 무대로 이동함에 따라 소설의 전체 계급 기반이 바뀌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적 행위자라기보다는 연구의 대상으로 더 많이 제시된다. 사회 다윈주의와 유전 이론의 영향을 받은 일부 박물학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문명화된 우월한 사람들보다 동물의 왕국에 더 가깝다고 여겼다. 자연주의의 천박함이 중간계급의 독자들에게 혐오스럽다면, 일반 사람들에 대한 그 비하적인 태도는 오히려 더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임상적인 것과 선정적인 것을 혼합한 이 소설 브랜드는 포르노에 가까울 수 있다. 그 소설은 냉철함과 추악함을 동시에 지닌 예술이다." "소설은 더 이상 예의 바르고 도덕적으로 교화적인 일이 아니다. 사실이란 기괴하고 혐오스럽고 기형적이거나 병적인 것이다. 가치는 문학적 자료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그것을 표현하는 꼼꼼한 수단에 있다. 그렇다면 자연주의는 형식주의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186-7)


V. 사실주의와 평범한 삶


1. 평범함의 가치 


"기독교의 〈평범한 삶에 대한 확언〉을 말하는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군사적 용맹과 귀족적 명예가 있었던 중세 시대에서 근대 중간계급의 개신교나 청교도 윤리로의 전환을 간략하게 설명한다. 테일러는 개신교 윤리가 〈좋은 삶의 중심을 특별한 범위의 상위 활동에서 벗어나 '삶' 그 자체로 옮겨 놓는다. 이제 자기 충족적인 인간 생활은 한편으로는 노동과 생산의 측면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결혼과 가정 생활로 정의된다〉고 주장한다. 혈통과 귀족에 대한 개념은 시민과 직업에 자리를 내준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일의 영역, 가정생활, 물질적 획득이다. 노동은 이전에 거부되었던 존엄성을 부여받고, 결혼한 사랑은 성적인 탈선과 낭만적인 불화보다 더 높이 평가된다. 근대 사실주의 소설이 탄생한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창조주의 눈에는 모든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기 때문에 공격적인 개인주의에는 어느 정도의 민주주의와 평등주의가 결합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은 사실주의적 글쓰기에 반영된다."(201-3)


2. 아우어바흐의 사실주의적 비전 


"아우어바흐의 관점에서 사실주의는 구체적인 문학 양식이다. 구체적이고, 유동적이며, 정확하게 특정되고, 다양하고, 개방적이며, 사회적으로 포용적이며, 역사적 사고를 갖고, 포퓰리즘적 정신을 갖고 있으며, 개인을 존중하고 추상적인 생각과 경직된 프로그램을 불신한다. 하지만 특정 시대나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창세기부터 에밀 졸라까지 쭉 등장한다." "아우어바흐가 자신의 책 《미메시스》를 썼을 때, 대중 민주주의의 해체는 나치 정권의 두드러진 특징이었고, 따라서 유대계 독일인인 아우어바흐는 튀르키예로 피신했다. 그가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영웅적·계급적·신화적 문학은 나치즘의 예술과 이데올로기에 반영되어 있다. 이와 대조적인 사실주의는 본질적으로 반파시스트적인 형태로 보일 것이었다. 아우어바흐가 1942년에서 1945년 사이에 튀르키예 이스탄불에 망명 중에 쓴 《미메시스》는 비판적 사실주의에 대한 루카치의 찬미가 스탈린주의에 대한 은밀한 비판인 것처럼 파시즘에 대한 암호화된 대응이다."(212-3)


3. 사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과거는 현재가 약탈할 스타일과 모드의 레퍼토리로 전환되고, 변화된 미래에 대한 희망은 헛된 비전이 된다. 미래는 현재와 매우 비슷할 것이다. 단지 더 매력적인 옵션들이 배열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을 고려할 때, 사실주의는 아마도 역사상 가장 끈질긴 예술 형식일 것이다. 아방가르드주의자들이 끊임없이 훈계하는 것처럼,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얼굴을 보려는, 보기 흉한 열망은 쉽게 나르시시즘의 병리로 빠져들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자신의 얼굴만이 아니다. 대량 학살, 전쟁, 질병, 빈곤, 대규모 이주, 점진적인 자연의 죽음으로 뒤덮인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세상에서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요구 중 하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의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하는 것이다. 픽션·다큐멘터리·보도 등 사실주의의 임무 중 하나는 우리에게 '인지 지도'를 제공하고 대부분의 다른 형태의 글로벌 지식보다 더 즐겁게 이를 수행하는 것이다."(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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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작심하고 다시, 기자 - 권력의 비리를 감시하고, 추적하고, 고발하는 기자, 장인수의 취재 열전
장인수 지음 / 시월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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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김건희와 디올백 – 최초보도 : 2023년 11월 27일, 서울의소리


권력자, 특히 보수정당이나 검사의 비리와 관련한 특종 보도에 대해 국내 언론은 애써 외면해왔다. 하지만 사건이 크게 불거져 제도권으로 넘어오면 기성 언론들은 그제야 보도하기 시작한다.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무슨 정당의 대표가 이렇게 말했다’, ‘전격 압수수색했다’, ‘누구를 소환했다’, ‘정부부처가 조사에 착수했다’와 같은 기사들이 전형적인 출입처 기사의 형태다. 디올백 사건으로 빚어진 윤·한 갈등은 국민의힘이라는 출입처에서 벌어지는 일이었고 기자들은 그제야 열심히 받아쓰기 시작했다. 단순 전달 보도이니 쓰기도 쉽고 나도 쓰고 너도 쓰고 다 같이 쓰기 때문에 리스크도 없다. 그래서 출입처 기사는 기자들과 언론사가 열심히 쓴다. 디올백 사건을 처음으로 보도하는 건 다르다. 취재가 어렵고 단독으로 써야 하니 리스크도 크다. 디올백 사건을 발표해줄 정부 기관도 없으니 출입처 기사가 아니고 따라서 취재 대상도 아니다. 그러니 나도 안 쓰고, 너도 안 쓰고, 다 같이 안 쓴다. 한국 언론의 고질적인 문제다. 50)


PART 2. MBC와 7시간 녹취록 보도의 진실 - 최초보도: 2022년 1월 16일, MBC


이명수 기자는 2021년 8월 30일 서초동 코바나컨텐츠 사무실을 방문해 김건희를 만났다. 그 당시 이 기자는 코바나컨텐츠 직원들을 상대로 강의했다. 당시 코바나컨텐츠 직원 3명과 윤석열 캠프에서 왔다는 젊은 남녀 2명이 이 기자의 강의를 들었다. 부장은 이 젊은 남녀 2명이 누군지 알아내 현재 윤석열 캠프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부장이 제정신이 맞나 싶었다. 김건희가 한 문제적 발언들이 많은데 아무도 관심없는 20대 청년 2명이 누군지를 알아내서 그걸 주요 내용으로 기사를 쓰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판단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부장의 정확한 의도를 몰라 답답해했다. 지금 생각하면 수법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기사 아이템을 본인이 직접 킬하지 않고 의미도 없고 취재가 가능하지도 않은 내용을 알아보라고 지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기사가 못 나가도록 하는 전략이다. ‘내가 킬한 게 아니라 네가 취재를 못 해서 보도가 안 나간 거야’라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70)


부장은 작성된 기사를 회사 시스템을 통해 송고하지 못하도록 했다. 일반적으로 기자들은 기사를 쓰고 회사 기사작성·송고시스템(MBC는 MARS라고 한다)으로 전송한다. 그러면 데스크와 부장이 접속해 기사를 확인하고 수정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송고하는 대신 작성한 기사를 유에스비에 담아 데스크에게 전달했다. 데스크가 수정을 마치자 부장은 데스크 자리로 가서 데스크 컴퓨터에 있는 기사를 고쳤다. 자신의 컴퓨터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은 것이다. 부장은 7시간 녹취록 보도 준비 내내 카카오톡으로도 보고받지 않았다. 모든 보고와 지시는 구두로만 이뤄졌고 전자파일은 남기지 않았다. 처음부터 검찰 수사를 대비했던 것 같다. 작성된 기사는 처참한 수준이었다. 어디서 어긋났는지 명확히 알게 됐다. 보도를 잘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문제가 안 되는 게 더 중요했다. 이러려면 진작에 킬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왜 상황을 이렇게까지 끌고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80-1)


PART 3. 한동훈과 검언유착 - 최초보도: 2020년 3월 31일, MBC


첫날 보도 직후 KBS 법조팀이 자료를 공유해달라고 요청해 왔다. 적극적으로 보도하겠다는 의지도 함께 전해왔다. KBS 같은 큰 언론에서 후속 보도를 해주면 MBC 보도는 더 큰 특종이 된다. 제보자X의 동의를 얻어 대부분의 취재 자료를 KBS에 넘겼다. 한 가지 찜찜한 게 있었다. KBS 법조 기자들이 자료를 친한 검사들에게 넘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KBS는 4월 1일 뉴스9에서 19번째(마지막)에 리포트 하나를 보도했다. 딱 봐도 면피용 보도였다. 아무 보도도 안 했다는 욕을 먹지 않기 위한 보도를 보고 찜찜함은 더 커졌다. 하지만 어쩌랴, 자료는 이미 넘긴 것을. 그나마 KBS가 나은 것이었다. 많은 언론이 MBC 보도를 외면했다. 하지만 뒤에선 그렇지 않았다. 기자들의 관심사는 이동재·한동훈·이철이었고, MBC 보도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세상은 온통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한데 지면에는 그 사건 보도가 한 줄도 나오지 않는 기현상. 대한민국에서 가끔 벌어진다. 보도 초반 채널A 사건이 딱 그랬다. 102-3)


검언유착 의혹 보도는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사건에 연루된 두 명, 이동재와 한동훈 모두 처벌받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보면 기자로서 힘이 빠지지 않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보도 이후 벌어진 사회적 파장과 논란은 누가 통제할 수도 없거니와 기자가 개입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다. 그러니 분노할 필요도, 힘 빠질 일도 없다. ‘기자의 역할은 보도까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보도를 통해 가시적인 결과가 나오면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보도가 곧바로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온다고 생각하면서 보도하는 경우는 드물다. 김건희의 디올백 수수 사건을 보도했지만, 검찰이 윤석열·김건희를 수사해서 그에 따른 처벌을 내릴 거라고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나. 기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도하는 사람’이다. 만약 시청자들이 보도를 보고 분노하거나 집단행동을 해서 정치권이나 정부기관이 움직여 어떤 변화가 만들어진다면 가장 좋은 일이겠지만 이 역시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다. 112)


PART 4. 손준성과 고발사주 - 최초보도: 2021년 9월 6일, 뉴스버스


채널A 검언유착 사건에서 이동재 기자와 한동훈 검사장의 공조는, 드러난 것만 보면 개인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다. 채널A라는 언론사와 검찰 조직이 어떻게 유착했는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고발사주 사건은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처음부터 검찰이 조직적으로 고발장을 작성해 미래통합당에 넘겼다. 보수언론은 그 내용을 약속한 것처럼 일제히 보도했다. 검찰과 보수언론 사이에 조직적인 검언유착이 이뤄진 것이다. 고발사주 사건을 통해 검찰과 언론이 어떻게 공생하는지 극명하게 드러났다. 가장 강력한 두 권력 집단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최소한의 윤리는 고사하고 법도 가볍게 깔아뭉갰다. 총선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미래통합당은 실제 고발을 하진 않았다. 대신 보수단체가 나중에 고발을 진행했다. 검찰은 내가 실제 권언유착을 했을 거라고 믿는 듯했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공상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한동훈과 보수언론은 여전히 검언유착 보도를 권언유착의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다. 119-20)


2021년 10월 6일, MBC는 김웅과 조성은의 통화 내용에 윤석열이 언급된다는 내용을 단독 보도했다. 국민의힘은 ‘오보다. 윤석열 이름 없다’라며 난리 쳤다. 보수언론들도 윤석열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보도를 쏟아냈다. MBC는 궁지에 몰렸고 이후 공개될 녹음파일에 ‘윤석열’이 없으면 회사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10월 19일 MBC PD수첩은 통화녹음 파일을 공개했다. 〈김웅. 제가 가면 윤석열이 시켜서 나오게 되는 거예요.〉 보수언론 기자들은 실제로 ‘윤석열’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아닌 줄 알면서도 윤석열과 검찰이 원하니 그렇게 썼을 것이다. MBC 보도를 권언유착이라고 공격하던 기자들은 정말 그렇게 믿었을까? 대한민국 기자들이 그렇게 멍청할 리 없다. 오보를 낸 언론들은 어떠한 사과도 없었다. 마음에 안 드는 MBC 보도가 나오면 무지막지한 공격을 퍼부어 대지만, MBC 보도가 맞는 걸로 드러나면 마치 없었던 일처럼 행동한다. 언론의 이런 행태는 여전하다. 122)


PART 5. TV조선 방정오 대표와 그 딸의 ‘계급질’ - 최초보도: 2018년 11월 16일, MBC


저는 사실 이게 계급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남양유업과 비교해보면 거기는 이게 본사 영업사원이 대리점 사장한테 욕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영업사원과 대리점 사장이라는 관계에서 나오는 그 계약관계 갑을 관계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갑질이라고 하는 건데 이거는 그게 아니에요. 이 여자 아이가 기사한테 막 할 수 있는 그 근본적인 우월적 지위가 태생에서 나오는 겁니다. 태생에서. (···) 그리고 또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게 남양유업 같은 경우는 영업사원이 갑질을 하는 이유가 목적의식이 있습니다. 판매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오는 이 폭언은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순수합니다. 나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한 멸시와 혐오가 깔려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갑질이 끝까지 가면 갑질이 극단화가 되면 결국 그 마지막 단계는 신분제 사회, 계급 사회가 있는 거고 이 사람들은 이미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 세계를 만들어놓고 그렇게 살고 있었던 겁니다. 137)


PART 6. 이시원과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 - 최초보도: 2020년 6월 8일, MBC


군사정권 시절엔 정권 유지를 위해 간첩이 필요했다. 민주화 이후 이런 공포정치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국정원과 공안 검사들은 간첩을 원한다. 자신들의 승진을 위해서다. 문제는 진짜 간첩을 잡는 게 아니라 승진을 위해 간첩을 만들어낸다는 거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우성 씨다. 뉴스타파가 보도한 ‘밴드 여간첩 사건’도 있다. 대법원은 그녀의 간첩죄를 인정해 징역 3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우리는 잘 모르고 지나갔다. 검찰이 작성한 이 사건의 공소장은 가관이다. 간첩이 된 탈북자는 국정원 합동신문센터에서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받았다. “당신은 간첩이냐”는 질문에 “아니요”라고 답했고 진실 반응이 나왔다. 두 차례 조사가 이뤄졌는데 마찬가지였다. 국정원과 검찰은 북한 보위부 소속 과학자들이 간첩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드는 ‘신비의 약’을 개발했고 이 간첩은 거짓말 탐지기 조사 직전에 이 약 성분이 든 패치를 몸에 붙여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통과했다고 공소장에 적었다. 143-4)


국정원 합동신문센터는 통상 탈북자들이 처음 입소할 때 알몸 조사를 벌인다. 국정원은 이 여성이 ‘신비의 약’을 브래지어에 숨겨 들어왔다고 했다. 그러면 브래지어는 왜 조사하지 않았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검찰과 국정원은 답하지 않았다. 한편 국정원의 거짓말 탐지기 조사는 불시에 이뤄진다. 검찰 공소장대로라면 이 여성은 2번이나 거짓말 탐지기 조사 시점을 미리 알고 직전에 패치를 붙였어야 한다. 불가능한 일이다. 공소장에 따르면 이 여성의 남자 친구도 간첩이다. 둘이 함께 지령을 받고 내려왔다는 건데 검찰은 여성은 기소했지만 남자 친구는 기소하지 않았다. 여성은 나중에 자포자기한 나머지 간첩이라고 자백했지만 남자 친구는 끝까지 자백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코미디지만 어찌됐든 그녀는 간첩이 됐다. 검찰과 언론을 바꾸지 못하면 누군가는 제2의 유우성이 될 것이다. 검찰은 조작하고 억울하다고 외쳐도 언론은 외면할 테니까. 이보다 완벽한 빅브라더의 세계가 있을까? 144)


맺음말 저널리스트 그리고 다시 기자 284


12.3 내란 사태를 보며 언론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윤석열-김건희의 비리와 문제점을 찾아내 나름 열심히 보도했다. 디올백 수수, 김건희 7시간 녹취록, 김대남 녹취록, 김건희 처가 문제 등등…. 그런데 윤석열-김건희는 애초에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놔두고 지엽적일 수도 있는 이들의 행태와 비리를 찾아내 폭로했던 것은 아닐까? 기자들은 총체적인 비판을 하지 않는다. 기자들은 팩트를 신봉한다. 팩트가 없으면 쓸 기사도 없다. 윤석열-김건희가 잘못된 행동을 하면 기자는 그걸 찾아내야 비로소 보도할 거리가 생긴다. 하지만 이같은 방식의 견제와 감시는 애초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윤석열-김건희 상대로는 부질없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윤석열 같은 자가 국가 지도자가 되지 못하도록 하는 게 기자가 하는 일이다. 건전한 언론이 살아있는 국가에서 윤석열 같은 사람이 최고지도자가 될 수 없다. 우리 언론은 총체적으로 실패했다. 나는 예외라고 말할 수 있을까?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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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 테리 이글턴의 아주 특별한 문학 강의
테리 이글턴 지음, 이미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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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도입부


어떤 작품이 “문학적”이라고 말할 때 그 의미의 일부는, 이야기되는 내용이 이야기되는 방식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작품을 뜻합니다. 내용이 그것을 전달하는 언어와 분리될 수 없는 글이지요. 언어는 현실이나 경험을 구성하는 요소이지, 그것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문학 작품에서 일어나는 것을 그것이 일어나는 방식에 의해 봐야 한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 두 가지가 늘 말끔하게 딱 들어맞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들쥐의 일생을 밀턴의 무운시에 맞춰 기술할 수 있겠지요. 혹은 자유에 대한 열망을 몸을 옥죄는 듯한 엄격한 운율에 맞춰 쓸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흥미롭게도 형식과 내용이 반목하게 됩니다. 소설 『동물농장』에서 조지 오웰은 복잡다단한 볼셰비키 혁명사를 농장 동물들에 관한 표면상 단순한 우화 형식으로 그려냈습니다. 이런 경우에 비평가들은 형식과 내용의 긴장 상태에 대해 언급하겠지요. 그들은 이 불일치를 그 작품의 의미의 일부로 간주할 것입니다. 12)


- 시작, 그 중요한 단서에 관하여


E. M. 포스터의 『인도로 가는 길』의 도입부 문장으로 논의를 시작해봅시다. 첫 문장의 네 구절은 거의 운율에 맞는 리듬과 균형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삼보격 시행이나 각각 세 개의 강세가 있는 시행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Except for the Marabar Caves 마라바 동굴을 제외하면 / And they are twenty miles off  그 동굴은 이십 마일 떨어져 있다. / The city of Chandrapore  찬드라포르 시는 / Presents nothing extraordinary / 특별히 내보일 만한 것이 없다.〉 이 작가는 예리한 감식안을 갖고 있는데, 그 눈은 냉정하게 거리를 유지합니다. 영국인의 전통적 습성에 따라 그는 흥분이나 열광을 거부(그 시는 “특별히 내보일 만한 것이 없다.”)하지요. “내보이다”라는 단어는 의미심장합니다. 이 단어 때문에 찬드라포르 시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기보다는 관객을 위해 꾸며진 곳처럼 여겨집니다. 대체 누구에게 “특별히 내보일 만한 것이 없다.”는 말일까요? 물론 관광객이지요. 17-8)


이 화자를 역사적 인물 E. M. 포스터와 반드시 동일시할 필요는 없지만, 그가 인도의 내부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방금 배에서 내려 육지에 발을 내디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갠지스 강이 성스러운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은연중에 찬드라포르 시를 아(亞)대륙의 다른 도시들과 비교하고 있을지 모르지요. 이 화자가 인도를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쉽사리 감명을 받지 못하는 듯이, 이 단락에는 약간 넌더리 난 기분이 감돕니다. 어쩌면 이 단락은 인도를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곳으로 여기는 낭만적 기대감의 김을 빼려고 작정했는지 모르지요. 이 소설의 제목 『인도로 가는 길』은 서구의 독자에게 그런 기대감을 일으킬 테고, 그런 다음에 소설의 첫머리에서부터 그런 기대감을 심술궂게 꺾어버리려는 겁니다. 어쩌면 이 단락은 오물과 쓰레기보다는 더 신비로운 것을 기대한 독자에게 미칠 영향을 조용히 음미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19)


이 소설은 부인(否認)으로 시작하고 곧 거기에 단서를 붙입니다. 찬드라포르 시에는 특별한 것이 없는데, 마라바 동굴은 예외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마라바 동굴은 실로 특별한 곳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툭 내던지듯이 덧붙인 종속절에 들어 있으므로, 구문 때문에 결국 이 말의 의미가 축소됩니다. 이 문장은 “마라바 동굴이 예외”라는 점이 아니라 “찬드라포르 시에는 특별한 것이 없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마라바 동굴이 도시보다 매력적이지만, 구문은 정반대를 암시하는 듯이 보이지요. 동굴이 언급되자마자 다음 순간에 휙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동굴에 대한 우리의 호기심은 더 강해질 뿐이지요. 마라바 동굴이 실제로 특별한 곳인지와 관련된 이 모호함은 『인도로 가는 길』의 중심에 자리 잡은 문제입니다. 바로 이 소설의 핵심이 추출되어 그 도입부에 환영처럼 드리워져 있는 것이지요. 독자는 아직 이런 점을 알지 못할 터이므로, 그것은 구조적 아이러니를 이루며 심지어 독자를 골리는 듯합니다. 20)


마라바 동굴은 소설의 도입부에서 암시된 것처럼 어느 모로 보나 중요한 곳으로 드러납니다. 소설의 중요한 행위가 그곳에서 일어나니까요. 하지만 이 행위는 비(非)행위일 수 있습니다. 동굴에서 과연 무슨 일이든 일어났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어려우니까요. 소설 속에서도 그 문제에 관한 다양한 견해가 제시됩니다. 동굴이란 말 그대로 속이 빈 곳입니다. 따라서 마라바 동굴이 소설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는 말은 소설의 핵심에 일종의 공백이나 공허가 존재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포스터 당대의 많은 모더니즘 작품처럼 이 소설은 그림자처럼 흐릿하고 포착하기 어려운 것을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작품의 핵심에 실로 어떤 진실이 있다 하더라도, 그 진실을 명확히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도입 문장은 소설 전체의 작은 견본이 됩니다. 그것은 동굴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구문상으로 폄하하는데, 이렇게 깎아내리는 것이 또한 그것을 강조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지요. 21)


- 독자에게 처음 보내는 신호들


〈많은 재산을 소유한 독신 남자가 아내를 얻고자 한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인정된 진실이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의 첫 문장은 아이러니의 걸작으로 간주됩니다.. 부유한 남자가 아내를 필요로 한다는 말은 보편적 진리로 제시되고, 그래서 그 말은 기하학 원리처럼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것인 듯이 여겨집니다. 그것이 실로 대자연의 엄연한 사실이라면, 미혼 여성들이 부유한 남자의 장차 신붓감으로 중뿔나게 나서더라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부유한 총각들의 욕구에 반응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스틴의 빈틈없는 전략적 발언은 젊은 아가씨들과 그들의 뻔뻔스러운 어머니들이 탐욕적이라든가 계층 상승을 꾀한다는 비난을 받지 않게 보호해줍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이런 일을 하고 있음을 독자가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줍니다. 바로 이 부분에 아이러니가 숨어 있는 것이지요. 사람은 자신의 비열한 욕망을 자연 질서의 한 부분으로 합리화할 수 있을 때 더 편안해한다고 이 문장은 암시합니다. 26-7)


『오만과 편견』의 첫 문장이 전설적이라면, 미국 문학에도 똑같이 유명한 도입부가 있습니다. “나를 이스마엘이라고 불러달라(Call me Ishmael).” 멜빌의 『모비 딕』을 여는 이 간결한 첫 문장은 앞으로 나올 내용의 전조가 될 수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이 소설은 화려하고 장황한 문체로 유명하니까요. 이 첫 문장은 또한 약간 아이러니합니다. 이 소설에서 화자를 이스마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니까요. 그런데 그는 왜 독자에게 그렇게 불러달라고 요청하는 걸까요? 그것이 그의 진짜 이름이라서? 아니면 그 이름의 상징적 의미 때문에? 『성서』에 나오는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이집트인 하녀 하가르에게서 낳은 아들인데 버림받은 추방자이자 방랑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은 경험 많은 대양의 여행자에게 적합한 가명이 될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화자는 진짜 이름을 감추고 싶어 하는 걸까요? 만일 그렇다면, 왜 그럴까요? 개방적으로 보이는 그의 태도가 어떤 신비로운 비밀을 숨기고 있는 걸까요? 27-8)


“나를 이스마엘이라고 불러달라.”는 독자에게 건넨 말이고, 독자에게 건네는 말이 모두 그렇듯이, 그것은 작품의 허구성을 폭로합니다. 독자의 존재를 소박하게 인정하는 것은 그것이 소설이라고 고백하는 것이지요. “이스마엘”은 실제 이름이라기보다 문학적 이름으로 들리기 때문에, 그 이름은 우리가 허구에 직면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또 다른 신호일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 보면, 그 이름은 화자의 진짜 이름이 아니라 가명이기 때문에 허구적으로 들릴 수 있지요. 어쩌면 그의 진짜 이름은 프레드 웜인데,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서 더 이국적인 이름을 선택했을지 모릅니다. 그가 실제로 이스마엘이라고 불리지 않는다면 독자는 그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궁금하겠지요. 그런데 그의 진짜 이름이 독자에게 밝혀지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멜빌이 그 이름을 숨기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숨길 수는 없으니까요. 소설이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28-9)


- 겉으로 보이는 것과 늘 똑같은 것은 아니다


우리처럼 낭만주의 이후의 사람들은 감정과 관습이 별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진정한 감정은 인위적인 사회적 형식을 내던져버리고 가슴에서 직접 우러나오는 말을 하는 것이라고요. 그러나 제인 오스틴에게 진정한 감정이란 공적으로 표현되는 적합한 양식이 있었고, 그 양식은 사회적 관습에 의해 규제되었습니다. “관습(convention)”은 문자 그대로 “함께 모이는 것”을 뜻하는 단어인데, 내가 감정적으로 어떻게 행동하는가는 오로지 내게 달린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를 함축합니다. 내 감정은, 내 사유 재산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어떤 의미에서 나는 공동의 문화에 참여함으로써 감정적 행위를 배웁니다. 오스틴에게 예법이란 바나나를 칼과 포크로 먹지 않는 매너뿐 아니라 타인에게 민감하고 정중하게 처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손함이란 포도주 잔에 침을 뱉지 않는 것 따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야비하거나 교만하거나 이기적으로 굴지 않고 잰 체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35-6)


관습이 반드시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아닙니다. 관습은 어떤 감정적 반응이 너무 지나치다고 판단할 수 있지만, 너무 미약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감정과 관습이 함께 엮여 있다고 믿는가 아니면 서로 적대적이라고 믿는가는 셰익스피어의 극에서 햄릿과 클로디우스가 벌이는 언쟁의 핵심적 문제입니다. 햄릿은 슬픔과 같은 감정은 사회적 형식을 무시해야 한다고 개인주의적 입장에서 주장하지만, 반면 클로디우스는 감정과 형식이 그보다 더 친밀한 관계여야 한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시는 감정과 형식이 반드시 반목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형식은 감정을 억누르기도 하지만 감정을 강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이 아침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라는 문제보다 더 절박한 문제로 마음이 옥죄는 상황에서 여러분에게 좋은 아침 시간을 보내라고 말하더라도 가식적이지 않은 것처럼, 여기서도 가식의 문제는 없습니다. 36)


- 독자를 언어의 세계로 불러들이는 선언들


조지 오웰의 『1984』의 첫 문장입니다. 〈사월의 화창하고 차가운 날이었다. 시계가 열세 시를 울리고 있었다. 윈스턴 스미스는 지독한 바람을 피하려고 가슴팍에 턱을 붙이고는 빅토리 맨션의 유리문을 재빨리 미끄러지듯 지났다. 그렇지만 모래 섞인 먼지 소용돌이가 함께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민첩하진 못했다.〉 이 문장은 다른 점에서는 주목할 만하지 않은 묘사에 “열세 시”라는 단어를 신중하게 집어넣음으로써 효과를 얻습니다. 그 단어를 통해서 이 장면이 어떤 낯선 문명이나 미래에 설정되어 있음을 암시하지요. 어떤 점은 변하지 않았지만 (사월이라 불리는 달이 아직 있고 바람은 여전히 모질게 불 수 있지요.) 변한 것도 있고, 이 문장의 효과는 이처럼 일상적인 것과 낯선 것의 병치에서 생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이하게 울리는 시계가 약간 지나치게 작위적(voulu)이라고 느끼겠지요. 시계 묘사가 너무 부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건 공상과학소설이야.”라고 좀 너무 요란하게 선언하는 것이지요. 41)


윈스턴 스미스가 맨션에 들어갈 때 모래 섞인 먼지 소용돌이가 그를 따라 들어가 건물에 스며듭니다. 비록 이 소설은 모래의 침투를 (바람은 “지독”하게 불어댑니다.) 불길한 의미로 여기는 듯하지만, 독자는 이 모래 돌풍을 그리 불길하지 않게 느낄 수 있습니다. 먼지와 모래는 임의적이고 우연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그것들은 까닭도 이유도 없는 요소를 대변하고, 총체적이거나 의미심장한 계획을 구성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이 소설이 그려내는 전체주의적 체제의 정반대라고 볼 수 있겠지요. 마찬가지로, 바람은 인간의 통제에 반항하는 힘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람은 제멋대로 이쪽저쪽으로 불지요. 그 국가는 적어도 자연만은 그 목적에 맞게 이용할 수 없는 듯합니다. 그리고 전체주의 국가는 무력으로 압박하여 질서정연하고 통제 가능하게 만들 수 없는 것은 뭐든지 불편해하지요. 빅토리 맨션이 먼지를 완전히 내몰 수 없듯이, 그 체제는 우연적 요소를 완전히 쫓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41)


Chapter 2. 인물


오늘날 ‘캐릭터(character)’라는 단어는 문학 속의 인물뿐만 아니라 기호나 문자 혹은 상징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 단어는 독특한 표시를 만드는 ‘타발 금형’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데, 그런 뜻에서부터 개인의 서명처럼 개인의 각별한 특징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추천서(character reference)라는 단어에서 쓰이듯이 캐릭터라는 말은 한 개인이 어떤 인물인지 보여주는 표시나 초상화, 묘사를 뜻했고, 얼마 후에 개인 그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지요. 개인을 나타내던 표시가 개인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그 표시의 독특함은 그 인물의 고유함을 나타내게 되었지요. 그러므로 “캐릭터”라는 단어는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는, 제유법이라는 비유법의 일례입니다. 우리를 서로 구분해주는 것은 우리가 공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톰 소여를 톰 소여로 만드는 것은 그가 헉 핀과 공유하지 않는 속성입니다. 맥베스 부인을 그녀 본연의 존재로 만드는 것은 그녀의 맹렬한 의지와 공격적 야심입니다. 46)


- 유형은 인물의 개성을 보존하며 더 넓은 배경을 부여한다


개인의 유형(type)을 정한다는 것은 그들을 어떤 범주 안에 넣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을 유일무이한 존재로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 생각을 모든 인간에게 적용한다면, 우리 모두는 특유함이라는 동일한 자질을 공유하게 됩니다. 우리가 공통으로 가진 것은 우리 모두가 비범하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이 특별하지요. 이 말은 곧 누구도 특별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사실 인간은 어느 정도까지만 비범합니다. 한 인간에게만 특이한 자질은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오로지 한 개인만 성미가 급하거나 앙심이 깊고 혹은 치명적으로 공격적인 세계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서로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 사실을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엄청난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인간의 성격을 논하기 위해 사용하는 어휘들을 통해 밝혀집니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 자신을 개체화하게 되는 사회적 과정도 공유합니다. 50)


스탕달과 발자크에서부터 톨스토이와 토마스 만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유럽 사실주의 소설의 업적 가운데 하나는 인물과 전후 상황이 밀접하게 엮인 관계를 예시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소설에서 인물은 복잡한 상호 의존의 관계망에 사로잡혀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더 막강한 사회적, 역사적 힘에 의해 형성되고, 그들이 어쩌다 자각할 사회적 과정에 의해 빚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이런 힘의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형성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실제 상황은 멋지게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몇몇 위인의 배짱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지요. 사실주의 소설은 개인의 삶을 역사와 공동체, 친족 관계, 제도를 통해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아는 바로 이러한 틀 안에 박혀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이러한 사실주의적 기획과 모더니즘 소설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모더니즘은 빈번히 홀로 고립된 의식을 제시하니까요. 56-7)


모더니즘 작품은 또 다른 방식으로 전통적인 인물 개념을 해체하려 합니다. 이것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 자아를 형성하는 어떤 힘을 일부 밝히려는 것이지요. D. H. 로렌스는 성격이나 인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그가 파헤치려는 자아의 심연은 의식적 에고보다 더 깊은 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프로이트 이후로, 정통적인 정체성 개념은 의문시될 수밖에 없습니다. 의식적 삶은 이제 자아라는 빙산의 꼭대기에 불과하니까요. 로렌스가 탐구한 자아는 관념이나 감정, 성격, 도덕적 관점이나 일상적 관계를 넘어선 어딘가에 존재합니다. 모호하고, 원시적이고, 심원하며 비개인적 존재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사실주의 작가들이 발을 내디디려 하지 않았던 영역입니다. 로렌스에게 자아는 인간이 지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는 그 나름의 수수께끼 같은 논리가 있고, 그 나름의 유쾌한 방식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로 자기 자신에게 이방인이 되는 셈입니다. 59)


- 시대가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인물


토머스 하디의 『무명의 주드』에 나오는 수 브라이드헤드는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에서 가장 놀랍도록 독창적으로 묘사된 여성에 속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독자가 수를 비뚤어진 성미에 바람둥이에다 짜증스럽게도 변덕스러운 여자로 인식하도록 일부러 유혹하는 듯합니다. 그녀가 질투를 하거나 변덕을 부리고, 짜증스럽게도 모순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수의 행위에서 많은 부분이 일단 성에 대한 깊은 두려움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고 나면 이해가 됩니다. 그녀가 빅토리아 시대의 정숙한 체하는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정확히 정반대의 이유 때문이지요. 그녀는 개화된 젊은 여성으로서 결혼과 성에 관한 대담하게 진보적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종교적 신앙에 관해서는 회의주의적이기도 합니다. 역설적인 점은 그녀가 인습에 구애되지 않는 자신의 견해 때문에 성을 경계한다는 것이지요. 그녀는 결혼과 성이 여자의 독립성을 뺏는 덫이라고 간주합니다. 61-2)


수와 주드의 실패는 자연이나 은총, 악의적인 신과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다만 그들의 실험이 시기상조였던 것이지요. 역사가 아직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비평가들이 수를 불감증에다 신경과민인 여자로 간주하기 쉬운 한 가지 이유는, 그녀가 대체로 다른 사람들의 눈을 통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녀의 내면에 거의 접근하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서술에서 그녀는 자기 나름의 권리가 있는 인물이 아니라 주드가 겪는 경험의 한 가지 함수로 존재합니다. 그녀가 몹시 감질나게도 불투명하게 보인다면, 그것은 그녀가 주인공 주드의 욕구와 욕망, 망상을 통해 여과되기 때문입니다. 한 비평가가 말했듯이, 그녀는 자기 나름의 주체가 아니라 주드의 비극의 도구로 존재합니다. 주드가 죽은 후 그녀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놀랍지 않은 일이지요. 그 정도로 소설 스스로도 여주인공을 바깥으로 내모는 데 공모합니다. 하지만 그녀를 제시할 때는 특히나 예리한 통찰력을 보여주었지요. 63-4)


- 감정 이입 vs. 비판적 이성의 고양


많은 사실주의 소설은 독자가 그 인물들과 동일시하기를 요청합니다. 사실주의 소설은 우리가 상상을 통해 다른 인간의 경험을 재창조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인간적 공감을 확장하고 심화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세계를 파악할 수만 있다면, 그들이 어떻게 해서,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우월한 외적 관점에서 그들을 비난하려는 충동이 줄어들겠지요. 이해하면 용서하게 됩니다. 이처럼 자비로운 주장은 많은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릇된 점도 많이 있지요. 한 가지 잘못된 점을 들자면, 모든 문학 작품이 우리에게 등장인물과 동일시하기를 권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것을 들자면, 감정이입이 유일한 이해 방식은 아닙니다. 실은 문자 그대로 해석해보면, 감정이입은 이해를 도모하는 형식이 전혀 아닙니다. 내가 당신이 “된다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는 내 능력을 상실하니까요. 누가 뒤에 남아서 이해를 하겠습니까? 65-6)


소포클레스는 독자가 오이디푸스에게 감정을 이입하기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그 연극은 우리가 불운한 운명의 주인공에게 동정심을 느끼리라고 가정하지만, 누군가에 대해서 느끼는 것(동정)과 그 사람으로서 느끼는 것(감정이입)은 차이가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히틀러 시대에 글을 쓰면서, 무대 위의 인물들에게 감정이입을 한다면 우리의 비판 능력이 무뎌질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권력을 쥔 사람들에게 대단히 편리한 방편이 되겠다고 그는 생각했지요. 감정이입은 비판적 이성보다 감정을 고양시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브레히트는 사회적 존재가 모순적인 것들로 구성되고 이 모순들이 사람들의 정체성의 핵심을 이룬다고 믿었습니다.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변덕스럽고 일관성이 없고 자기 분열된 존재를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인물이 통합되고 일관성 있다는 개념은 사회적 변화를 촉진할 자아 내부의 갈등을 억압한다는 것이지요. 66)


Chapter 3. 서사


전지(全知)한 화자는 작품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육체에서 분리된 목소리에 가깝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익명의 인물로서 화자는 작품 자체의 마음으로 작용합니다. 그렇더라도 화자가 작가의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대변한다고 가정해서는 안 됩니다. 삼인칭 전지적 서술은 일종의 메타언어입니다. 이 말은, 적어도 사실주의 소설에서는 그런 서술이 서사 안에서 비평이나 논평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이야기 그 자체의 목소리이므로 문제시할 수 없어 보입니다. 서사가 잠시 중단되고 그 자체에 대해 숙고할 때만 그것에 대해 의문시할 수 있지요. 이른바 서한체 소설, 즉 인물들이 서로 주고받는 편지로 구성되는 소설에서는 그런 메타언어 혹은 해설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끼어들 수 없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드라마 형식에서도 그렇지요. 드라마에서는 인물들의 말을 듣게 되니까요. 이런 까닭에 희곡의 경우에는 어떤 관점을 옹호하거나 배척하는지를 알기 어렵습니다. 71, 75)


- 서사는 주인공과 세계와 은밀히 공모한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동물들이 농장을 점령해서 스스로 운영하려다가 비참한 결과를 맞는 이야기이지요. 이 소설 자체는 소비에트 연방 초기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붕괴에 대한 알레고리로 쓰였습니다. 하지만 실은, 동물은 농장을 경영할 수 없습니다. 손이 없고 발굽만 있을 때는 수표에 서명하거나 원료 공급자에게 전화하기 어렵지요. 사실 이런 이유 때문에 동물들의 실험이 실패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실은 이 이야기에 대한 독자의 반응에 무의식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기울어진 것입니다. 이야기가 그 조건을 설정한 방식이 그 목적을 입증하는 데 효과적인 것이지요. 이 알레고리는, 물론 좌파인 작가의 의도와는 반대로, 노동자들이 너무 어리석어서 자신들의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는 의미를 함축할 수 있습니다. 첨언하자면, 이 소설의 제목은 반어적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동물”과 “농장”은 당연히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어울리지 않지요. 82)


어떤 서사가 보여주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에는 불일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존 밀턴의 『실낙원』에서 아담은 죽음을 일으키는 사과를 나눠 먹음으로써 이브와 운명을 함께하려고 결정합니다. 아담은 이브에 대한 정절로 인해 자신의 생명을 위험에 내맡길 용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과를 먹을 때는 시의 어조가 뚜렷이 달라집니다. 〈그는 주저 않고 먹었다, / 자신의 더 나은 판단력에 거슬러, 속아서가 아니라 / 어리석게도 여자의 매혹에 압도되어.〉 “어리석게도 여자의 매혹에 압도되어”는 조금 전에 시가 그려낸 아담의 마음 상태를 노골적으로 비틀어버립니다. 아담이 연인 옆에서 자기 목숨을 내던질 각오로 사과를 받을 때, 이 시는 갑자기 그에 대한 공감을 내버립니다. 대신 엄격한 재판관의 어조를 띠고는, 아담이 이 사건의 파국적 결과를 충분히 알면서 자기 기만 없이 자유롭게 사과를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교리가 드라마를 압도하면서, 신학자 밀턴이 인문주의자 밀턴의 뒤를 이어받은 것이지요. 82-3)


“결국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한결같은 외침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계속 읽어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싶더라도, 그 충족을 경계해야 합니다. 결말의 기쁨이 너무 일찍 나오면, 긴장의 즐거움이 깨질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확언을 갈망하지만, 그것이 연기되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호기심을 채울 필요가 있지만, 결말을 알지 못하는 불안감을 즐기기도 하지요. 해결책이 잠정적으로 연기되지 않으면, 이야기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서사가 계속 이어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잃어버린 강아지나 에덴동산처럼 그것이 복원되기를 갈구합니다.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의 화자는 소설 끝머리에서 커츠가 죽은 후 그의 약혼녀를 만났을 때 그녀를 위로하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 이야기는 그 약혼녀를 해피엔딩을 추구하는 전통적 독자로 취급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콘래드 자신은 행복한 결말은 거의 없을뿐더러 어떤 경우에도 명확한 결말은 없다고 생각했지요. 86-7)


- 질서가 와해된 곳에서 이야기가 태어난다


스토리가 전개될 수 있는 까닭은 초반에 어떤 질서가 와해되었기 때문입니다. 뱀 한 마리가 행복한 정원에 슬쩍 들어서고, 이방인이 마을에 찾아오며, 돈키호테는 훤히 트인 대로에서 돌격하고, 러브레이스는 클래리사에 대한 연정을 품고, 톰 존스는 후원자의 시골 대저택에서 쫓겨나며, 로드 짐은 돌이킬 수 없이 배에서 뛰어내리고, 요제프 K는 죄명도 모르는 범죄로 체포됩니다. 수많은 사실주의 소설의 결말은 이 질서를, 어쩌면 더 풍부한 형태로, 복원하고자 합니다. 원죄는 갈등과 혼란을 빚어내지만, 그런 상태가 결국에는 회복되겠지요. 에덴동산에서의 타락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복된 죄(felix culpa)” 혹은 다행스러운 결함입니다. 원죄가 없으면 이야기도 없을 테니까요. 따라서 독자는 위안과 용기를 얻습니다. 독자는 현실에 내재된 논리가 있으며 소설의 임무는 그 논리를 참을성 있게 밝혀내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어마어마한 플롯의 일부입니다. 88)


고전적 사실주의에서는 세계 자체가 이야기로 형성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많은 모더니즘 소설에서는 독자가 스스로 구성하는 질서 말고는 다른 질서가 없습니다. 독자가 구성하는 질서는 임의적이므로, 소설의 시작과 결말도 그렇습니다. 신이 명한 기원도, 자연스러운 종결도 없습니다. 이 말은 곧 사리에 맞는 중간도 없다는 뜻이지요. 한 사람에게는 목적으로 여겨지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기원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키는 대로 어디서나 시작할 수도, 중단할 수도 있습니다. 세계에 목적과 기원이 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모든 일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세계가 아니라 여러분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어디서 시작하든 간에, 이미 엄청나게 많은 일이 일어났다고 명확히 인식하겠지요. 그리고 여러분이 어디서 중단하든 간에 그와 상관없이 대단히 많은 것이 지속되겠지요. 그래서 일부 모더니즘 작품은 서사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88-9)


역사적으로 말하면, 서사는 먼 과거에서부터 이어져 옵니다. 스토리텔링은 인류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가진 듯합니다. 우리는 서사 안에서 말하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꿈꾸고, 행동한다는 얘기도 때로 들립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모두 시간의 산물이니까요. 하지만 모든 인간이 이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삶을 일관성 있는 이야기로 간주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상이한 문화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인생에 멋진 인물들이 몇 명 있었는데 문제는 내가 플롯을 만들지 못하는 거야.”라는 오래된 농담이 생각나는군요.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는 진부한 은유는 목적과 지속성의 의미를 내포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은유가 의미를 밝혀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다고 생각할까요? 예술 작품이 그렇듯 인생은 목적이 없더라도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94-5)


- 서사와 플롯이 항상 공존하지는 않는다


서사와 플롯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 두 가지를 구별하는 한 가지 방법은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크리스티의 범죄 스릴러는 거의 다 플롯뿐입니다. 배경 설정이나 대화, 분위기, 상징, 묘사, 숙고, 심층적 성격 묘사 등 서사의 다른 특징들이 가차 없이 제거되어 남은 것은 적나라한 사건의 뼈대뿐입니다. 그렇다면 플롯은 서사의 일부이지만, 그것으로 서사를 완전히 다룰 수는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플롯이라는 단어는 이야기의 의미 있는 행위를 뜻합니다. 그것은 인물들과 사건, 상황이 상호 연관되는 방식을 의미하지요. 플롯은 서사의 논리 혹은 내적 동력을 가리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플롯은 “이야기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나 사물의 조합”을 의미합니다. 어떤 이야기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 누군가 우리에게 물어볼 때 우리가 찾아내는 답이 플롯의 요약입니다. 『맥베스』에서 뱅쿼우의 살해는 플롯의 일부이지만 “내일, 내일 그리고 내일…”로 시작되는 대사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96)


Chapter 4. 해석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텍스트는 기본적으로 사실을 제공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닙니다. 대신 독자에게 사실을 “상상”하도록 요청합니다. 사실로부터 상상의 세계를 구성한다는 의미에서 말이지요. 그러므로 작품은 진실이면서 동시에 상상일 수 있고, 사실적이면서 동시에 허구적일 수 있습니다. 런던에서 파리로 가기 위해 넓은 바다를 건너야 하는 것은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의 허구 세계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실이지만 마치 소설에 의해 “허구화”된 듯이 보이지요. 그것은 그것의 진실성이나 허위성이 중요하지 않은 문맥 안에서 작용합니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작품의 상상의 논리 안에서 어떻게 쓰이는가, 라는 점이지요. 사실에 진실한 것과 인생에 진실한 것은 다릅니다. 『햄릿』에 많은 진실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고 해서 어떤 덴마크 왕자가 실제로 존재했고 그가 미쳤거나 미친 척했거나 아니면 둘 다였고 여자 친구를 가증스럽게 다루었다는 뜻은 아니지요. 101-2)


- 문학의 현실과 독자의 현실 사이


어떤 작품이 사실주의적이라고 묘사할 때, 어떤 절대적인 방식에서 그 작품이 비사실주의적 문학보다 현실에 더 가깝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 작품이 어떤 특정한 시대와 장소의 사람들이 현실로 간주하는 것에 부합된다는 뜻이지요. 우리가 어떤 고대 문화권에서 작성된 글 한 편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그 글이 희한하게도 등장인물들의 정강이뼈의 길이에 관심을 쏟는다고 상상해봅시다. 우리는 그 글이 이국적이고 아방가르드적인 상상력의 비약이라고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동일한 문화권의 역사 기록을 우연히 읽고는, 정강이뼈의 길이가 사회의 어느 계층 조직에 속하는지를 결정하는 요인이었음을 알게 될 수 있습니다. 센타우루스 자리의 알파성에서 지구를 찾아온 방문객이 전쟁과 기근, 종족 근절과 대량학살로 점철된 인류의 역사서를 본다면 그것을 터무니없는 초현실주의적 텍스트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어떤 경우이든, 순전히 사실주의적 작품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105-6)


- 문학은 의미를 내포하지 않고 생산한다


우리가 작품의 원래 의미에 접근할 수 있다고 가정할 때, 그 원래 의미가 그 작품이 후에 얻게 될 의미보다 높은 지위에서 늘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과거의 작품을 그 당대인들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령 현대 심리분석학적 통찰을 통해서 우리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경험의 노래」를 그 당시에 통용된 지식으로 가능했던 수준보다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20세기의 폭정을 경험했으므로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더 풍부해질 수 있지요.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이 의미하는 바는 유대인 대학살 이전과 그 이후가 똑같을 수 없습니다. 어떻든, 한 역사적 사건을 겪으며 사는 것은 그것을 이해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완전히 상실한 역사적 지식 형태가 있습니다. 『햄릿』이 처음 상연되었을 때 그것을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이 복수의 도덕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우리는 결코 명확히 알 수 없겠지요. 115-6)


문학 작품은 고정된 의미를 가진 텍스트가 아니라 전반적으로 다양한, 가능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모태라고 간주하는 것이 제일 좋겠지요. 작품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기보다는 의미를 생산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렇다고 해서 어떤 의미라도 가능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한 가지 이유는 의미가 공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 소유한 땅 덩어리처럼 오로지 나 혼자 소유한 의미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의미는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나 혼자서 “해석학적 현상”이라는 구절이 “메릴 스트립”을 뜻하게 하겠다고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의미는 언어에 속하고, 언어는 우리가 집단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의미를 추출합니다. 언어는 자유로이 떠다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현실에 작용하는 방식이나 한 사회의 가치, 전통, 가설, 제도, 물적 조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언어를 결정적으로 변화시키려면, 적어도 행위의 일부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117-8)


- 유도하기, 강요하기, 자극하기


독자가 끊임없이 추측을 하지 않으면 문학 텍스트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픽션의 문장은 과학적 가설과 조금 비슷합니다. 가설을 실험하듯이,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해야 합니다. 반면에, 문학 작품은 독자에게 태도를 암시할 수 있습니다. 어떤 작품은 독자를 옛 친구처럼 붙잡고 늘어지며 긴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고, 아니면 독자에게 딱딱하고 쌀쌀한 태도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어떤 작품은 독자가 그 자체와 똑같이 문명화된 가치를 공유하는 박식하고 한가한 사람이라고 가정하면서 독자와 무언의 조약을 체결할 수 있습니다. 혹은 어떤 작품은 그것을 집어 드는 사람을 혼란스럽고 어리둥절하게 만들려고 나서서 독자의 판단력을 공격하고 독자의 확신을 낯설게 만들거나 독자의 예절 의식을 침해합니다. 또한 독자에게 등을 돌리고 자기들끼리 은밀히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들의 사색이 어쩌다 귓결에 들리도록 마지못해 내버려두는 듯한 작품들도 있습니다. 120-1)


- 소설가를 믿지 말고, 이야기를 믿어라


모든 지식은 어느 정도로는 추상화의 과정에 의해 결정됩니다. 문학 비평의 경우에 이 말은 작품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그것의 전모를 개괄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작업은 쉽지 않은데, 문학 작품이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과정이라서 전체적으로 펼쳐놓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는 뒤로 물러서서도 작품의 확고한 실체와 계속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시나 소설을 하나의 전체로 파악하기 위해 시도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그 주제를 탐구하는 것입니다. 주제란 곧 우리가 작품에서 발견하는 주된 관심사의 패턴을 뜻하지요. 디킨스는 혁명가가 아니라 개혁주의자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위대한 유산』은 디킨스의 몇몇 후기 작품처럼, 작가의 실제 견해가 작품 속에 드러난 태도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예시합니다. 이 소설은 디킨스를 그토록 우상화했던 사교계가 아니라 범죄자의 지하세계에 공감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122, 127)


-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라


『위대한 유산』에 등장하는 몇 가지 중요한 이미지의 패턴이 그 주제를 심화하는 작용을 합니다. 하나는 쇠의 이미지인데 수많은 다양한 형태로 불쑥 나타납니다. 가령 매그위치의 족쇄는 올릭이 나중에 조 부인을 폭행하는 데 사용되지요. 핍이 조에게서 훔치는 줄도 이야기의 후반부에 다시 등장합니다. 무거운 정박용 닻사슬에 묶여 있는 유형선은 “죄수들처럼 차꼬에 채워진” 듯이 보입니다. 조 부인의 결혼반지는 어린 핍을 벌줄 때 그의 얼굴을 긁어 벗겨놓습니다. 매그위치는 핍에게 비유적으로 족쇄를 만들어 씌웁니다. 금과 은으로 만든 족쇄이지만요. 핍은 법적으로 도제로 “구속”되어 있고, 경멸스럽기 짝이 없는 대장장이의 삶에 속박되어 있지요. 그래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쇠는 폭력과 감금을 상징하지만, 또 한편으로 그것은 새티스 하우스와 런던 상류사회의 공허한 세계와 대조되는 견고함과 소박함을 갖고 있습니다. 대장간과 범죄자들의 지하세계의 가혹하고 불편한 면뿐만 아니라 진정한 면을 암시합니다. 131)


해석이란 부분적이고 잠정적입니다. 최종적인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서사의 흐름에서 뒤로 물러서서 되풀이되는 관념이나 관심사에 주목합니다. 그것은 어떤 유사성이나 대조, 관련성을 주목합니다. 인물을 고립시켜 보는 것이 아니라 주제와 플롯, 이미지와 상징을 포함하는 패턴의 한 요소로 보고자 합니다. 언어가 분위기와 감정적 상태를 조성하는 데 어떻게 사용되는지 간략히 검토합니다. 이야기가 들려주는 것만이 아니라 서사의 형식과 구조에 관심을 기울여 설명합니다. 소설이 그 자체의 인물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를 숙고합니다. 또한 텍스트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문학 양식(사실주의, 우화, 판타지, 로맨스 등등)을 훑어봅니다. 나는 또한 이 소설의 도덕적 비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하지만 독자는 그 비전이 얼마나 타당한 것인지 언제나 묻고 싶겠지요. 이런 질문은 더할 나위 없이 타당합니다. 우리는 한 문학 작품이 세상을 보는 방식에 찬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133-4)


- 문학 작품을 읽는 몇 가지 방법


영국의 상류층 남녀의 이름은 노동 계층 동포의 이름보다 더 긴 경향이 있습니다. 음절이 많다는 것은 다른 종류의 풍요를 가리킬 수 있지요. 피요나 포르테스큐-아르부스노트-스마이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조 도일이라는 사람과 달리 리버풀의 뒷골목 출신일 가능성이 없습니다. 『해리 포터』의 헤르미온느 그레인저는 영국의 중상류층 사회에서 꽤 흔한 이름에다 큰 시골 저택을 암시하는 성(그레인저)을 갖고 있는데, 다 합해서 음절이 여섯 개나 되고, 세 명의 주인공 중에서 가장 세련된 인물입니다. 인습적인 중산층 출신인 해리 포터의 이름은 말끔하게 균형 잡힌 네 음절로 되어 있는데 부족하지도, 지나치지도 않지요. 반면에 하층민 출신의 론 위즐리는 보잘것없이 세 음절뿐입니다. 그의 성(Weasley)은 기만적이거나 부정직한 인간을 뜻하는 “위즐(weasel)”을 연상시킵니다. 족제비는 사실 당당한 동물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론처럼 하층민 출신인 인물에게 편리하게 붙일 수 있는 이름입니다. 139)


Chapter 5. 가치


신고전주의자들의 눈에, 수백만의 인간이 수백 년의 세월에 걸쳐서 찾아낸 진실은 최신의 어떤 관념보다도 존중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눈에 핏발이 선 천재가 새벽 두 시에 퍼뜩 떠올린 생각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인류가 공유한 지혜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유사성이 차이점보다 더 주목할 만하고, 공통적인 것이 독자적인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예술의 임무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의 생생한 이미지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현재란 대체로 과거의 재순환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대한 충실성이 현재에 정통성을 부여합니다. 현재를 구성하는 것은 대체로 과거이고, 미래는 이미 지나간 것을 주제로 한 일련의 가벼운 변주곡들을 연주하겠지요. 변화에 대해서는 의혹을 품고 다뤄야 합니다. 그것이 진전보다는 퇴보를 의미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물론 변화는 불가피한 것이지만, 인간사의 변화무쌍함은 인간의 타락한 상태를 보여주는 징후입니다. 에덴동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요. 141-2)


낭만주의자들의 눈에 인간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무궁무진한 힘을 소유한 창조적 정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은 정적이 아니라 역동적인 것이고, 변화란 대체로 겁내기보다는 환영해야 할 것이지요.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존재이고, 무한한 진보를 이룰 수 있는 잠재력이 있습니다. 이 멋진 신세계에 들어서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쇠사슬을 채운 세력을 떨쳐내기만 하면 됩니다. 창조적 상상력은 우리의 가장 깊은 욕망의 이미지에 따라 세계를 개조할 수 있는 예지력입니다. 그것은 시뿐 아니라 정치 혁명에도 영감을 불어넣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재능이 새롭게 강조됩니다. 가장 소중한 예술 작품이란 전통과 관습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런 작품은 노예처럼 과거를 모방하지 않고, 풍부하고 낯선 것을 탄생시킵니다. 그렇지만 낭만주의 작가들 역시 그들이 스스로 만들지 않은 재료를 가지고 자신들의 예술을 주조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작은 신이라기보다는 벽돌공에 더 가깝지요. 142-3)


모더니즘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낭만주의의 충동을 물려받았습니다. 모더니즘 예술 작품은 모든 것이 표준화되고 정형화된 듯이 보이는 세계에 항거하는 자세를 취합니다. 그것은 이 기성품화된 중고 문명을 넘어선 영역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상투적 인식을 강화하기보다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것이지요. 낯섦과 특이성을 추구하면서 그것은 그저 또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하는 것에 저항하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예술 작품이 완전히 새롭다면 우리는 그것을 전혀 알아볼 수 없겠지요. 가령 진짜 외계인이 팔다리가 많이 달린 난쟁이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눈에 보이지 않게 우리 무릎에 앉아 있는 존재인 경우처럼 말입니다. 작품은 예술로 인정받기 위해서 우리가 이미 예술로 분류하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결국에 그 범주를 변형시켜서 전혀 알아볼 수 없게 만들더라도 말이지요. 혁신적 예술 작품이라도 그것이 혁신적으로 변화시킨 것에 관련해서만 혁신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143)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하면서 새로움에 대한 갈망은 시들기 시작합니다. 포스트모던 이론은 독창성을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습니다. 혁신을 멀찌감치 뒷전에 밀어놓았지요. 대신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떤 것을 재활용하고, 바꾸고, 풍자하고, 본떠서 다른 것을 만드는 세계를 열렬히 수용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복사본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면 어딘가에 원본이 있다는 의미가 함축될 텐데,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본은 없이 모조품만 있습니다. 태초에 모조품이 있었지요. 혹시 원본처럼 보이는 것이 우연히 발견된다면, 그것도 복사본이거나 모방작 혹은 모조품으로 판명 나리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절망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진짜가 아니라면, 그 무엇도 가짜일 수 없으니까요. 모든 것이 가짜가 되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겠지요. 조이스의 표현을 살짝 빌리자면, 포스트모더니즘은 “결코-변화하지 않고 언제나-변화하는” 문화입니다. 144)


- 소설의 언어: 작위적 기교 vs. 독창적 표현


〈쇠꼬챙이처럼 배싹 마르고, 키는 더 크지만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나온 오드리 헵번처럼 보조개가 들어가고 턱이 각진, 은은하게 빛나는 모델이 희미한 빛으로 꼬아진 듯한 드레스에 경주용 에그헬멧을 걸치고 은밀한 미소를 지으며 차에서 걸어 나왔다.〉


존 업다이크의 소설 『토끼 잠들다』의 한 문장은 좀 부주의하게도 반복된 거의 비슷한 단어(“은은하게 빛나는”, “희미한 빛”)를 별도로 치면 대단히 숙련된 글입니다. 지나치게 교묘하고 계획적입니다. 모든 단어를 일일이 까다롭게 선택해서 문지르고 다른 단어들에 말끔하게 끼워 맞추고 그런 다음에 매끄럽게 다듬고 그 위에 마무리로 광택을 낸 듯합니다. 머리카락 한 올도 흩어지지 않았지요. 너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단어가 미진한 부분이나 변칙적인 부분 하나 없이 세심하게 배치되어서 지나치게 기교적인 느낌이 듭니다. 결과적으로, 이 문장은 기교적이지만 생명이 없습니다. 이 문장은 상세한 묘사를 시도하지만, 복잡한 형용사가 너무 많고 절들이 겹겹이 쌓여 있어 언어 차원에서 너무 많은 일이 진행됩니다. 그래서 독자는 묘사되고 있는 대상에 집중하기 어렵지요. 이 언어는 그 자체의 능란한 솜씨에 독자가 주목하고 경탄하게 합니다. 153)


〈그들은 대체로 불편한 기차 여행 후 돌풍이 이는 어느 사월 오후에 도착했다. 그들은 역에서 택시를 타고 콘월의 먼 도로를 따라서 화강암 오두막들과 폐기된 고풍스러운 주석공장을 지나 8마일을 달려갔다. 그 집의 우편주소에 적힌 마을에 이르러 마을을 통과하고 그 높은 둑에서 갑자기 나타난 좁은 길을 따라 나아가다가 절벽가의 탁 트인 목초지에 들어서자, 하늘 높이 구름이 재빨리 흘러가고 바닷새가 머리 위에서 빙빙 돌고, 발치의 풀밭은 바람에 나부끼는 야생화들로 활기차게 흔들리고, 공기 중에 짠 냄새가 배어 있고, 저 밑에서는 대서양이 바위에 부딪쳐 포효하고, 중경에서는 남색 물결이 뒹굴며 흰 포말을 일으키고, 그 너머에 수평선이 잔잔한 호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 그 집이 있었다.〉


이와 달리 에벌린 워의 단편소설 「전술 훈련」에서 발췌한 산문은 선명하고 불순물이나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말을 억제하고, 과시적이지 않습니다. 가령 “그 집의 우편주소에 적힌 마을”에서부터 “수평선이 잔잔한 호를 이루고 있었다.”까지 꽤 많은 종속절을 통해 한 문장을 이끌어가면서도 긴장감이나 기교를 전혀 느낄 수 없게 하는 솜씨를 의식하지 않는 듯합니다. 구문과 풍경이 각각 만들어내는 확장감은 “여기 그 집이 있었다.”는 간결한 문장과 대조를 이룹니다. 이 짧은 문장은 스토리와 그것이 전달되는 방식의 중단을 알려주지요. “대체로 불편한 기차 여행”은 유쾌하게 빈정대는 기미를 드러냅니다. “고풍스러운”은 좀 지나친 형용사이지만, 그 행의 균형 잡힌 운율은 대단히 경탄스럽지요. 발췌문 전체에 조용한 가운데 효율적인 분위기가 감돕니다. 신속히 솜씨 좋은 몇 번의 필치로 풍경을 그려내는데, 너무 많은 세부 묘사로 텍스트를 어수선하게 하지 않으면서 생동감이 넘치게 묘사합니다. 154)


〈내 뒤의 운전자는 어깨에 봉을 넣은 옷과 올가미 같은 콧수염 때문에 전시용 마네킹처럼 보였다. 지붕이 접히는 그의 차는 오로지, 눈에 보이지 않는 고요한 실크 밧줄로 초라한 우리 차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 같았다. 광택이 도는 그의 멋진 기계는 우리 차보다 몇 배나 힘이 좋았기에 나는 속도를 내서 그를 따돌리려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O lente currite noctis equi! 오, 부드럽게 달려라, 악몽이여! 우리는 긴 비탈길을 올랐고 다시 내리막길을 굴러 내려갔고, 제한 속도에 주의했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아이들을 봐주었고 커브 길의 노란 방패 위에서 꿈틀거리는 검은 곡선들을 더 크게 돌아 재현했다. 우리가 어떻게, 어디를 달리든 간에, 마법에 걸린 사이 공간은 온전히, 정확하게, 신기루처럼 미끄러져 내려갔다. 마법 융단에 상응하는 도로였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에 나오는 이 문단에서 미국의 고속도로를 운전하는 일상적 행위와 그것을 묘사하는 점잖고 격조 높은 언어(“눈에 보이지 않는 고요한 실크 밧줄”, “광택이 도는 그의 멋진 기계”)는 익살스럽게 괴리되어 있습니다. 이 문장은 점잔 빼는 문체를 구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우아한 척하거나 지나치게 세련된 문체를 뜻합니다. 하지만 이 단락이 그런 문체를 무리 없이 잘 구사하는 까닭은, 그런 문체가 약간 재미있기도 하고, 풍자적으로 그 자체를 의식하고 있기도 하고, 또한 화자가 중년의 욕정을 느낀 십대의 소녀를 사실상 납치해서 차에 태워가면서 자신이 처한 약간 추접스러운 궁지를 상쇄해보려는 절실한 방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극히 정교하고 약간 점잔 빼는 문학적 언어는 사실 이 소설의 교양 있고 구식 인물인 화자, 험버트 험버트의 속성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와 그를 둘러싼 환경의 갈등이 산문 문체에 반영되는 것이지요. 155-6)


- 시의 언어: 감상적 고백 vs. 정제된 상상력


〈풍부한 물줄기가 등심초 꽃에 스며들고, / 무성하게 자란 풀이 여행자의 발을 그물로 잡고, / 젊은 태양의 흐릿하게 신선한 불꽃이 붉게 물든다, / 이파리에서 꽃으로, 꽃에서 열매로. / 열매와 이파리는 황금과 불처럼 타오르고, / 칠현금 너머로 보리피리 소리가 울리고, / 발굽이 박힌 사티로스의 발꿈치가 / 밤나무 밑동의 밤껍질을 짓밟는다.〉


앨저넌 찰스 스윈번의 『캘리던의 애틀랜타』에 나오는 이 시에는 숨 가쁘게 하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어느 하나도 아주 선명하게 보지 않는 데서 비롯됩니다. 이 시행은 시각적 흐릿함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지요. 모든 것이 너무나 달콤하고, 너무나 서정적이고, 너무나 질릴 정도로 감상적입니다. 모든 것이 음향 효과를 위해 가차 없이 희생되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정확하게 묘사되지 않습니다. 이 시는 반복과 두운으로 인해 흐름이 막혀 있고, 그것은 “젊은 태양의 흐릿하게 신선한 불꽃이 붉게 물든다.”에서 부조리함의 극치에 이릅니다. 묘사는 대체로 낭랑한 음악적 조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모든 구절은 “시적”인 효과를 의식합니다. 어조는 너무나 열광적이고, 언어는 너무나 단조롭습니다. 흐릿한 광택이 표면에 감돌기는 하지만 그 밑에는 부서지기 쉬운 시행이 존재합니다. 현실의 돌풍이 조금만 일어도 이 부서지기 쉬운 문학 창조물은 땅으로 무너져 내리겠지요. 160)


〈하얀 꽃, / 밀랍, 비취, 줄 없는 마노의 꽃, / 얼음 표면에 / 연선홍색 그림자가 드리운 꽃. / 온 정원에서 그런 꽃이 어디 있지? / 별들이 라일락 이파리 사이로 모여들어 / 너를 바라본다. / 낮게 걸린 달이 너를 은빛으로 환히 비춘다.〉


스윈번의 시를 에이미 로웰의 시 「풍향계가 남쪽을 가리키네」와 대조해봅시다. 여기서 시인의 눈은 그 대상을 한결같이 응시합니다. 이 시행에는 경이로움과 경탄이 울려 퍼지지만 그런 감정은 정밀한 묘사를 위해 억제됩니다. “별들이 라일락 이파리 사이로 모여들어 / 너를 바라본다.”에서는 상상력의 비약이 약간 허용되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상상력이 실제적인 것에 종속됩니다. “낮게 걸린 달이 너를 은빛으로 환히 비춘다.”에서는 마치 달이 꽃에 경의를 표하는 듯이 들리는데, 이것은 상상에 의한 표현이라 하더라도, 사실의 진술이기도 합니다. 스윈번의 시는 최면성의 반복적 리듬으로 가득하고 음절이 너무 많은 구절들을 연결한 반면, 로웰의 리듬은 간결하고 억제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언어는 제어되어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그녀는 꽃의 아름다움에 동요되어도 냉정함을 잃지 않습니다. 스윈번의 시행은 열광적으로 내달리는 반면, 로웰은 모든 구절을 따져보고 균형을 맞춥니다.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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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검찰의 심장부에서 - 대검찰청 감찰부장 한동수의 기록
한동수 지음 / 오마이북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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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검찰의 심장부에서

—대검 감찰부장의 기록


검찰 출신은 검찰을 나가서도 검찰 내부의 일에 대해서는 일제히 침묵한다. 따라서 법무부나 청와대와 같은 조직에서도 검찰 내부 정보와 조직의 작동원리, 생리 같은 것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나는 그것이 검찰개혁의 지지부진함과 한계를 야기한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누군가 검찰의 심장부에 들어가 기록하고 증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검 감찰부는 검찰의 온갖 비위정보가 모이고 징계 감찰을 하는 곳이므로 검찰의 실상을 파악하고 개선하는 데 적소(謫所)의 자리라고 생각했다. 검찰총장 윤석열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나의 결심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는 박근혜 대통령 국정농단 사건, 양승태 대법원장 직권남용 사건에 대해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검찰총장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높았고, 나도 그랬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적폐청산에 대한 의지와 추진력이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사법연수원 23기이고, 나는 24기이니 기수 차이도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19)


2019년 10월 18일 대검찰청에 부임하던 첫날, 윤석열 검찰총장이 이야기한 몇 가지 사항이 있다. 첫 번째는 감찰에 착수하기 전에 총장에게 보고하고 총장의 승인을 받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대검찰청 감찰본부 설치 및 운영 규정 제4조 제1항에 따르면, 감찰부장은 감찰개시 사실과 그 결과만을 검찰총장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 사전 보고와 승인은 규정과 맞지 않는다. 더군다나 2013년 국정원 댓글 수사 및 재산등록과 관련해 감찰대상이 되어 정직처분을 받은 적이 있는 윤 총장이 이 규정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는데도 규정과 다른 이야기를 한 것이다. 윤 총장은 또 매일 오전 열리는 대검 부장회의에 감찰부장은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역대 감찰부장은 대검 부장회의에 들어오지 않았고, 감찰부장 입장에서도 대검 부장회의에 들어오지 않으면 편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대검 부장회의에 참석하길 원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역대 대검 감찰부장은 대검 부장회의에 참석해왔다. 20)


2020년 3월 19일 회식 자리에서 나온 윤 총장의 발언을 기억나는 대로 기록으로 남긴다. 그가 한 말은 검찰조직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이기도 하다. 〈일제 때 태어났으면 마약판매상이나 독립운동을 하였을 것이다.〉, 〈만일 육사에 갔더라면 쿠데타를 했을 것이다. 쿠데타는 김종필처럼 중령이 하는 것인데 검찰에는 부장에 해당한다. 나는 부장 시절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조선일보 사주를 만났다. 조선일보 일가는 평안도에서 내려온 사람들이고, 반공의식이 아주 투철하다.〉, 〈평안도 출신의 결속력은 아주 대단하다. 평안도 출신 사람들은 같은 평안도 출신인 리영희 기자에 대해 진실을 보도한 기자일 뿐 빨갱이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동아일보는 전북 출신인데 전라도 사람이 보수적인 입장을 가지게 되면 더욱 강하게 된다.〉, 〈검찰 역사는 빨갱이 색출의 역사다.〉 나는 윤석열 총장이 검찰에 있을 때나 대통령 선거 후보로 나섰을 때 자주 사용한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은 반공이데올로기를 의미한다고 이해했다. 25-6)


2020년 3월 19일은 이른바 ‘제보자X’로 알려진 지현진 씨가 며칠 후 채널A 본사를 방문해 유시민 관련 제보를 하기로 약속한 날의 며칠 전이었다. 윤 총장은 한동훈 반부패·강력부장으로부터 이 사실을 보고받고 있었을 것으로 추론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한동훈은 점심 또는 저녁 식사 중에도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페이스북이나 유시민 씨의 유럽 출국 정보를 수시로 총장에게 전할 정도로 많은 것을 보고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김유철 수사정보정책관과 고등학교, 대학교 선후배 사이였고, 청와대 행정관으로 함께 근무한 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수사정보정책관실(수정관실)로부터는 업무상 각종 정보를 보고받는 위치에 있었다. 수정관실은 그 무렵 총선 관련 여론조사 결과를 수시로 수집·정리하고 있었다. 외부에서는 잘 모르지만, 검찰은 업무와 관련된 사항이 있으면 정말 사소한 것까지 상급자에게 보고한다. 그래서 나는 윤석열 총장도 ‘제보자X’의 동태를 그때그때 잘 알고 있었으리라고 합리적으로 추론한다. 27)


2020년 당시 차장급이었던 특별감찰단장 황병주는 대검 권순정 대변인과 연수원 29기 동기이고, 카카오톡으로 총장에게 감찰 업무를 수시로 보고하는 등 대검 내 위치가 상당한 편이었다. 그때 그는 감찰부장실에서 확신에 차서 화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이번 총선에서 야당이 승리할 것이다. 근무 중 자리를 비운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이 법무부 차관 등을 만났다면 공무상 비밀 누설로 영장을 쳐야 하는 사안이다.” 윤 총장으로서는 이른바 ‘대호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사주와의 만남을 통해 대권에 대한 내심의 야망이 싹트고 있었을 때다. 결국 이날 총장의 호기어린 다수의 말들은 4월 총선에서 야당이 승리해 검찰개혁 입법이 원점으로 돌아가고, 대권을 향한 자신의 입지에 무언가 생기기를 기대하던 차에 나온 게 아닐까 생각한다. ‘쿠데타’라는 단어까지 사용한 것을 보면, 군대에 의한 무력 쿠데타가 아니라 검찰 수사를 통한 쿠데타를 의식했던 것은 아닐까. 27-8)


충돌의 전초는 한동훈 관련 사건이었다. 내가 감찰부장으로 근무한 지 두 달여 만에 임은정 검사가 감찰제보시스템을 통해 한동훈 검사에 대해서 내부제보를 했다. 한동훈이 자신의 지위를 부정하게 이용해서 처남인 진동균 검사가 법무심의관실에 배치되도록 부당한 인사청탁을 했는지, 그리고 사법농단 수사와 관련해 구 모 판사의 소환 시기를 기자에게 알렸는지 여부를 조사하는 일이었다. 사건의 경위와 검찰의 관행이 어떻든 자신의 처남 인사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고, 또한 언론에 수사상황을 알리는 행위 역시 부당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런데 황 단장은 이런 나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처남 문제에 대해서는 “인사청탁 사실이 없다”, 수사정보 유출에 대해서는 “오보 대응” 차원의 일이라고 했다. 황 단장은 또 “(감찰을 계속하면) 임은정 검사의 정치행위에 이용된다. 별 사안이 아니다”라며 “지난 금요일(15일)에 한동훈 부장으로부터 어떻게 되었느냐는 전화를 받았다”라고 전했다. 29)


충돌의 시작도 한동훈이 관련된 ‘채널A 사건’이었다. 2020년 3월 31일과 4월 1일 MBC는 신라젠 수사와 관련해 채널A 기자가 검사장과의 유착관계를 바탕으로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비위를 캐려고 했다는 의혹을 보도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4월 2일 검찰총장(감찰3과장)을 수신자로 지정해 ‘최근 언론보도 관련, 진상확인 보고 지시’를 내렸다. 총장실로 들어가니 윤 총장은 책상에 다리를 올려놓은 채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얼굴이 붉어져 있어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총장에게 사건을 매일 보고하면 감찰조사에 개입할 여지가 커지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총장실을 나와서 허정수 감찰3과장과 함께 대책을 논의하려고 7층 감찰부장실로 이동하는데, 구본선 대검 차장이 감찰3과장을 호출했다. 허 과장에 따르면, 총장실에서 총장, 차장, 자신(감찰3과장)이 함께 만났는데 윤 총장은 법무부 장관이 감찰부장에게 감찰을 지시하는 법적 근거가 무엇인지 검토할 것을 차장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30-1)


한동훈은 2021년 인사발령으로 대검을 떠나기 직전에 감찰부장인 내 방으로 찾아왔다. 내 방 탁자 유리 아래에는 모 작가의 판화인 개복치 인쇄 그림이 끼워져 있었다. 바다를 유유히 다니는 개복치는 최대로 성장하면 길이 4미터, 무게 2톤에 이르는 대형 어류다. 그 형상과 움직임이 묘한 평화를 주는 생물인데, 검찰의 바다를 유영하는 나 자신 같기도 했다. 그런데 한동훈이 자신도 개복치를 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명함을 건네주었다. 이상했다.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는 자리도 아니고, 이미 휴대전화번호도 알고 있는데, 왜 명함을 내밀었을까. 이상했지만 뭔가 앞으로 자신과 친하게 지내자는 의미로 다가왔다. 그렇게 느낀 이유가 있다. 2010년 한명숙 전 국무총리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을 수사하던 서울중앙지검의 어느 특수부 검사가 참고인에게 명함을 건네주었다는 일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회유수단이었다. 참고인은 그때부터 그 검사와 자신이 특별한 관계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진술했다. 32-3)


정진웅은 한동훈을 수사하다 역으로 기소되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이른바 2020년 7월 29일 발생한 ‘한동훈 독직폭행’ 사건이다. 기소 후 불과 일주일이나 지났을까. 나는 윤석열 총장으로부터 정진웅에 대한 직무집행정지를 법무부에 요청하는 공문을 작성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나는 정진웅과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가 아니다. 그러나 정진웅에 대한 직무정지는 채널A 사건의 수사와 공판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진실을 덮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실체적 진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검찰청법에 따라 검찰총장에게 이의제기서를 제출했다. 일신상의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정진웅 사건의 부당성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피의자인 한동훈이 검찰총장의 최측근이고, 법무부 장관이 검찰총장을 배제하고 수사팀의 독립적 수사를 보장하는 취지의 수사지휘권을 발동한 사안이라는 점을 감안해 대검 규정에 따라 대검 부장회의에서 이 건을 논의해달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나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42-4)


윤 총장은 마치 언론사와 약속된 것처럼 직무정지요청 공문 상신을 강행했고, 이는 언론에 일제히 보도되었다. 나는 이 건의 직무에서 배제되었고, 감찰부장 결재란이 빠진 상태로 공문이 작성되어 법무부에 제출되었다. 한동훈이 검찰총장, 서울고검장 등과 사전 교감을 한 상태에서 진정서를 제출할 대상으로 서울고검을 선택했다는 말이 들려왔다. 당사자가 자신에게 유리한 법원을 찾아다니는 포럼쇼핑(forum shopping)과 유사한 행위다. 원래 고검은 항고 사건과 관련된 보완수사를 하는 곳이지 고소고발 사건을 처리하는 곳이 아니므로 진정 사건으로 시작해 수사로 전환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견해도 있었다. 이러한 방법을 찾아낸 것도 기술이고 실력이라고 평가할 수 있지만, 검찰조직 내에 윤석열 검찰총장과 한동훈을 따르는 세력과 힘이 강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문재인의 검찰’이 아니라 ‘윤석열의 검찰’이었던 것이다. 검찰은 어느 정부의 검찰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저 늘 검찰의 검찰이었을 뿐이다. 44-5)


심재철 서울남부지검 차장검사는 2020년 1월 대검 반부패·강력부장으로 부임했다. 대학 후배라는 이유인지 처음부터 “선배님” 하면서 붙임성 있게 나를 따랐다. 그런 그가 2월 26일 〈주요 사건 재판부 분석〉이라는 6쪽짜리 문서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약간 격앙된 상태였는데, ‘수사정보정책관실에서 이런 것을 만들었다’, ‘전임 반부패·강력부장인 한동훈에게 주던 것을 나에게도 생각 없이 전달한 것 같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당시 언론에서 보도되고 있는 중요 사건인 “청와대 및 조국 일가 관련 사건, 사법농단 사건, 국정농단 사건, 국회의원(손혜원) 사건, 세월호 수사팀 관련 사건” 순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도표 안에 그 사건을 다루는 재판부 판사들에 대한 정보가 기재되어 있었다. 수사정보정책관실은 총장의 귀와 눈이라는 점, 또 반부패·강력부장에게 교부될 정도의 문서라는 점에서 이 문건은 검찰총장 승인하에 작성된 것이 명백했다. 감찰부장 단독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조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47)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2020년 11월 법무부로부터 윤석열 총장에 대한 징계조사를 위해 출석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채널A 감찰방해 사건과 감찰개시 사실의 언론유출 등과 관련해 진술을 요청하는 취지였다. 출석 당일이었던 2020년 11월 6일 오전에 자료를 정리하고 출력했다. 오후에는 연가를 내고 친한 신부님, 임은정 검사와 서래마을에서 점심을 먹고 개인 차량을 이용해 법무부로 향했다. 조사를 담당한 이정화 검사는 대전지검에서 법무부 감찰담당관실로 파견돼 윤 총장 감찰사건을 맡은 인물이다. 조사실에서 만나 몇 마디를 나눴는데, 사법연수원 교수로 재직했던 이준호 감찰본부장을 평가하는 대목 등에서 그의 인식 수준과 역량이 느껴졌다. 그래서 박은정 법무부 감찰담당관을 불러달라고 했다. 나는 이정화 검사, 박은정 감찰담당관이 동석한 자리에서 ‘판사사찰’ 문건을 제시했다. 박은정 담당관은 “이 문건은 조사대상이 아니다”라고 하면서도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49)


# 이정화 검사는 차후의 윤석열 총장에 대한 징계 국면에서 감찰조사 내용을 누설하고 박은정 법무부 감찰담당관을 비난하는 등 윤 총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윤석열 징계 국면에서 일부 언론은 심재철과 한동수가 사전에 짜고 ‘판사사찰’ 문제를 제기했다고 공격했다. 오로지 나만의 판단으로 제보한 일인데 언론의 이런 음모론적이고 일방적인 추측 보도는 너무도 부당하고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일부 검사들과 기자들은 사전에 짜고 무언가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일이 잦은가 보다. 당시 심재철 법무부 검찰국장은 판사사찰 문건을 내가 제보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나 혼자 단독으로 결정하고 내부고발자의 심정으로 제보한 것이다. 법무부 징계기일에 출석했을 당시에 문건의 제공자와 제공받은 시기를 말하지 않은 것은 내가 오해를 받더라도 문건 제공자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 것이 감찰부 업무를 하는 공무원으로서 내가 지켜야 할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제보하지 않았다면 판사사찰 문건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나는 감찰부장이었지만 감찰을 할 수 없는 여건이었으니 내부고발자로서 공익신고를 한 것이다. 50)


2021년 11월 9일 대검 출입기자 10여 명이 김오수 검찰총장실 앞에 몰려왔다. 감찰부장 면담과 재발방지를 요구하면서 김 총장을 몸으로 막았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대치했다. 대검 기자단은 같은 날 밤 9시경 대검 감찰부의 입장문을 보이콧하겠다고 결정하고, 관련 보도를 거부했다. 검찰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고 지나친 행동이었다. 윤석열 총장 시절 대검 대변인이었던 권순정 검사는 고발사주 사건과 관련하여 공수처에 입건된 피의자이자 감찰조사 대상자였다. 대검 감찰부는 2021년 10월 29일 권 검사가 사용하다가 대변인 직원이 보관 중이던 공용 휴대전화를 대변인실로부터 임의 제출받아 디지털 포렌식을 진행했다. KBS, 중앙일보, 헤럴드경제 등은 권순정 전 대변인의 입장을 기반으로 일방적인 보도를 쏟아냈다. 〈영장없는 압수 과정에서 휴대전화를 사용한 전직 대변인들에게 압수 사실을 알리지 않은 데다 해당 휴대전화에는 언론사 취재 문의 내용이 기록돼 있어 사실상 언론 검열이라는 비판도 제기됩니다.〉 82-3)


# 수사가 아닌 감찰이므로 영장은 필요 없다. 압수가 아닌 임의 제출이다. 현직 대변인의 휴대폰을 압수하거나 임의 제출받은 것도 아니다. 전직 대변인이 사용하다가 수회 초기화되어 보관 중이던 휴대전화 한 대를 임의 제출받았을 뿐이다. 공영방송인 KBS가 명백히 사실과 다른 오보를 낸 것이다.


사실 언론매체의 이러한 태도는 판사사찰 문건 때와 패턴이 유사하다. 대검 감찰부는 이 행위가 직권남용죄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뒤 범죄인지서를 작성하고 수사에 착수했으며 수사정보정책관실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집행했다. 그런데 일부 언론들은 내가 심재철 검찰국장과 사전에 짜고 판사사찰 문건을 문제 삼았다고 보도했다. 조남관 대검 차장에게 범죄 인지와 압수수색영장 청구 등을 보고하지 않았다며 대검 감찰부를 공격했다. 피의자인 윤석열 총장 및 수사정보정책관실을 지휘 감독한 조남관 총장 직무대행에게 범죄인지 및 압수수색영장 청구를 사전 보고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조 대행은 그러한 언론보도를 등에 업고 2021년 12월 대검 감찰부장에 대해 직무이전 조치를 하고 사건을 서울고검 감찰부로 넘겼다. 내가 감찰 업무를 수행할 때 어떤 언론은 대검 감찰부장을 검찰총장의 ‘상왕’이라고 칭하면서 감찰권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84)


2부 검찰의 도그마

—검찰개혁의 과제


감찰부의 독립을 보장받기 위해 내가 원했던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검찰청법상 법률로서 감찰부장의 업무상 독립을 보장받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임은정 검사와 같이 내부의 관계망에 얽히지 않고 내·외부의 압박에 굽히지 않는 독립된 검사다. 나는 절차에 따라 이 두 가지 요청을 피력하고 전달했다. 2020년 6월 감찰부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규정을 신설하자는 검찰청법 일부 개정안이 발의되었으나, 국회 법사위에서 채택되지 않았다. 2000년 검찰의 기소권과 공소유지권을 감독하고 검찰 제반업무를 감찰하기 위한 검찰감찰청을 독립기관으로 설치한 영국의 사례를 참고해볼 만하다. 우리나라 역시 종래 대검 감찰부가 검찰조직 내에서 검사들의 비위를 축소하고 감싸는 역할에 그치는 부작용을 해소하고, 신속성과 엄정함이라는 감찰 고유의 특성과 강점을 통해 조직 내부의 기강을 유지하는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제자리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 검찰조직은 여전히 감찰의 독립성에 대해 소극적이다. 96-7)


특수수사를 지휘하는 검찰 리더들은 수사를 ‘전쟁, 사냥 또는 게임’으로 보는 것 같다. 2013년 당시 윤석열 국정원 댓글사건 수사팀장(여주지청장)은 국정원 직원 체포영장 집행 등과 관련해 ‘표범이 사슴을 사냥하듯’ 신속한 수사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사냥식 수사를 경험한 피의자는 여우몰이, 토끼몰이를 당하는 기분이라고 했다. 게임은 전략적이고 목표 지향적이다. 특수수사를 게임에 대비해보면, 군사가 대치한 상태에서 장수(지휘하는 검사)가 적군의 종심을 가르고 적장(피의자)을 베거나 포획하는 장면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한동훈 검사는 내가 감찰부장으로 부임하던 첫날 점심자리에서 ‘죄가 될 만한 것은 어떻게든 찾으면 나오게 마련이므로 성과를 내지 못하면 무능한 검사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했다. 판사는 자신이 영장을 발부했더라도 증명이 없거나 죄가 안 되면 무죄판결을 선고한다. 수사를 하다가 안 되면 수사를 그만둘 줄도 아는 것이 순리인데, 그와 배치되는 말이어서 기억에 오래 남았다. 98)


표적수사, 하명수사, 인권침해적 강압수사, 높은 무죄율 등으로 비판을 받던 대검 중수부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등으로 그 인력과 수사기법이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대검 중수부 검사들은 이제 대통령, 법무부 장관 등으로 중앙권력을 잡았다.

그런 의미에서 대검 중수부는 해체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커졌다. 2013년 12월 기준으로 한국법조인대관을 검색하면 대검 중수부 재직 경험이 있는 검사로는 대검 중수부장 안대희(전 대법관), 박영수(국정농단 수사 특검), 이인규(노무현 대통령 수사 지휘), 김홍일(현 방송통신위원장), 대검 중수2과장 윤석열(현 대통령), 검찰연구관 한동훈(전 법무부 장관), 이원석(현 검찰총장), 이복현(현 금융감독원장), 이정섭(현 대전고검 검사직무대리) 등이 나온다. 어느 특수부 검사는 이렇게 말했다. “한동훈의 수사 스타일은 피의 사실을 박박 긁어서 중요 범죄는 무죄가 나더라도 사소한 범죄로 기어코 유죄를 받아낸다는 점에서 중수부 시절보다 더욱 잔인해졌다.” 99-100)


검찰에는 오만원짜리 현금이 많이 돈다. 특수활동비다. 기획재정부가 규정한 정부 예산집행지침에 따르면 특수활동비는 ‘기밀유지가 요구되는 정보 및 사건 수사, 기타 이에 준하는 국정수행활동에 직접 소요되는 경비’를 말한다. 국가정보원을 포함하여 검찰청, 법무부, 경찰청, 국방부 등이 쓰는 예산이다. 특활비를 쓰면 ‘집행내용확인서’라는 지출 증빙 자료를 남기게 되어 있다. 검찰총장이 특활비를 현금으로 지급하면 이를 받은 쪽에서 반드시 현금수령증을 작성하는데, 검찰 내부에서는 이를 ‘영수증’이라고 한다. ‘집행내용확인서’에는 특활비 집행 건별로 금액, 수령일자, 집행내용, 수령인의 성명을 기록하도록 되어 있지만, 이 ‘영수증’에는 검찰총장 비서관이 이미 날짜, 금액을 적은 것에 수령인의 이름을 적고 서명하는 것이 전부다. 집행내용이 무엇인지는 기록하지 않는 것이다. 특활비의 최종 지출자는 자유롭게 현금을 쓰면 되고, 그 지출 내역을 기록하거나 증빙서류를 첨부하는 등 보고의무가 없다. 109-10)


검찰이 사용하는 특활비 등은 매해 수백억 원에 달하는 상당한 액수다. 그런데 본래 목적과 용도대로 집행되지 않고 검찰총장의 전권에 맡겨져 있으며 감시통제가 전혀 없는 사각지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활비에서 주된 목적으로 내세우는 정보수집 활동은 사실 대검 감찰부 정보팀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인데, 감찰부 정보팀 수사관에게 배분되는 액수는 특수부, 공안과, 대검 수사정보정책관실에 지급되는 액수에 비해 현저히 적다. 반면 언론의 관심을 받는 주요 사건의 수사팀에게는 상당한 액수의 특활비가 내려가는 것으로 안다. 검찰총장의 특활비는 수사에 영향을 미치고, 총장 개인의 ‘인맥관리비’로 쓰이고, ‘통치자금’으로 쓰인다. 일선 검사들에게 특활비를 지급하면 수사의 속도와 방향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효과가 있다. 특활비의 본래 취지와 달리 공정한 수사를 해치게 된다. 나 역시 고발사주 사건과 관련하여 수시집행된 특수활동비를 받고 나니 신속하게 성과를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112-3)


대검에서 총장 주재 회의를 하면 총장의 보도자료, 메시지가 먼저 준비된 다음 그것을 확인하는 회의일 때가 많았다. 회의가 끝나면 대변인은 대검 기자단 간사에게 곧바로 카톡으로 보내준다. 그러면 그 내용이 각 언론에 보도된다. 자기가 한 수사·지휘, 자신의 언행이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리면 우쭐해질 수밖에 없다. 칭찬과 비난에 초연하다면 그것은 도인의 경지다. 대검은 일선 청의 수사, 공판, 집행업무를 최정점에서 지휘하는 기관인데, 실제 대검에서 하는 업무의 절반은 언론 대응과 여론 관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변인은 정례적으로 기자들을 만나고, 적당한 정보를 제공한다. 과거에는 검사가 알아내기 힘든 정보를 기자를 통해 수집하도록 하는 등 검사와 기자가 수사를 함께하던 시절도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채널A 사건과 관련해 과거와 달리 검사가 수용자를 마음대로 소환조사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 되자 중간 매개체로 채널A 이동재 기자를 이용하게 되었다는 견해를 들은 적도 있다. 115-6)


조직상으로 우리나라 검찰청의 원류는 ‘조선총독부 직속 검사국’이다. 검찰총장, 각급 검찰청의 기관장을 칭하는 검사장은 일본의 ‘검사총장’, ‘검사장’, ‘검사정’에 각각 대응되는 명칭이다. 우리나라 검사들과 일본 검사들의 교류관계는 매우 친밀하다. 감찰부장실 계장이 일본 ‘사쿠라(벚꽃)’ 사진이 있는 새해 일본 달력을 내게 주기도 했다. 무슨 달력이냐고 물었더니 주한 일본대사관 소속 일등서기관 오키무라 토시유키(奧村寿行) 검사의 명함을 건네준다. 그 후 2022년 오키무라 검사는 대검 공청회에 지정토론자로 초대받아 검찰개혁의 핵심 의제인 ‘검찰의 직접수사권 축소 입법’에 반대하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일본은 영장청구권을 경찰도 가지고 있고, 검찰은 경찰에 대한 수사지휘권이 없으며 중대범죄만 수사하는 등 법제와 관습이 다른데 그러한 일본의 일개 검사가 왜 한국의 검찰청법 개정 논의에 토론자로 초대받아 왈가불가하고 나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121)


검사동일체는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 강요하던 것을 해방 후 이승만 정권과 ‘권위주의 정부’가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특히 대검 중수부에 근무하면서 권력과 선배의 말에 절대복종하고 검찰조직에 충성하며 검찰을 나간 선배들을 전관특혜로 ‘잘 모시는’ 검사동일체를 더욱 체질화하는 것 같다. 대검 중수부의 수사기법을 계승한 검사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사무라이’와 같은 ‘칼잡이’라고 인식하는 듯하다. 밤이 되면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잔인한' 속내를 숨기지 않고 과시하듯 드러낸다. 현행 형사소송법에 피의자 ‘출석요구’로 규정되어 있음에도 일제강점기 조선형사령에 근거한 수사용어인 피의자 ‘소환’을 비롯해 검찰에서 한 진술을 법정에서 그대로 유지하기 위한 ‘증인 단도리’, 특수부 체질에 적합함을 뜻하는 ‘특수 무끼’, 사건의 얼개를 뜻하는 ‘와꾸’, 수사 실패 등 일이 끝났을 때 쓰는 ‘시마이’, 초보자를 말하는 ‘시로또’ 등 일본식 수사용어가 버젓이 검찰업무에 사용되는 것이 현실이다. 122)


고위직 검사일수록 무속과 친하다. 무속과 관련된 몇 가지 이야기를 적어본다. 국가디지털포렌식센터(NDFC) 건물 옆에 조성된 작은 공원 한편에 해치상 조형물이 놓여 있다. 원래는 1999년 5월 1일 법의 날을 맞아 대검 청사 1층 로비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법률신문 기사에 따르면, 1999년 발생한 옷로비 사건에 검찰총장이 연루되어 구속되자 “해치의 외뿔이 대검 간부들의 집무실을 들이받아 검찰이 수난을 겪는다”라는 검찰 내 여론이 일면서 건물 밖 외진 지금의 자리로 슬쩍 옮겨졌다고 한다. 마치 군대에서 빈총이라도 맞으면 불길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해치의 뿔이 가리키면 해(害)가 되므로, 해치의 뿔이 대법원 쪽으로 향하게 해치상 방향을 잡았다는 것이다. 대검 감찰부의 한 검찰 서기관은 이러한 사연을 들려주면서 검찰 내부에는 그렇게 해치상을 옮기고 해치의 뿔을 대법원 중앙 쪽으로 향하게 하여 양승태 대법원장이 사법농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고 믿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123)


3부 어둠 속에서 별은 빛이 난다

—한동수의 생각


윤석열 검찰총장의 장모 최은순 씨 사건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우선 약정서의 진정성립(문서의 작성과 내용이 명의자의 의사대로 이루어져 진정성이 인정됨)을 부인하는 민사판결이 있었다. 이어 서울동부지검, 서울동부지법, 고양지청 등에서 윤 총장 장모에 유리한 구속영장 청구와 판결, 불기소결정이 연쇄적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약정서 작성이 강요된 행위라며 진정성립을 부인한 판결이 눈에 들어왔다. 처분문서는 그 진정성립이 인정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처분문서에 기재된 내용대로 당사자의 의사를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민사재판의 확고한 법리다. 나 역시 오래도록 민사재판을 했지만 법원에서 처분문서의 진정성립을 부인한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로 극히 드물었다. 그 이유를 따져보니, 백 모 법무사의 증언과 서울동부지검의 수사가 있었다. 그러면서 구속영장 청구, 불기소결정, 공소제기, 형사판결 등의 수사결과가 민사재판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40)


이 사건을 통해 법기술자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지를 수 있는 악행을 추론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선행 결정으로 재판을 비롯한 후행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재심 사유에 해당할 수 있는 위증죄를 적용하지 않는다. 민사재판 변론종결 후 (판사들에게 죄질이 아주 안 좋은 것으로 평가되는) 변호사법 위반죄로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그 자료를 재판부에 추가 송부서류로 제출한다. 의뢰인은 일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검사와 증인을 매수한다. 서류를 위조한다.’ 예를 들어, 징역형이 아닌 벌금형을 다루는 약식명령 사건을 대형로펌이 대리하고 있다면, 배후에 금액이 큰 민사사건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민사소송에서 이기기 위해 검사의 무혐의결정이나 구속영장, 공소제기 결정을 받아내려고 노력할 것이고, 이것이 선행 결정으로 후행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고백하건대 나도 판사로 일하면서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하면 무언가 죄를 지은 나쁜 사람이라는 예단을 먼저 가졌다. 140)


한명숙 전 총리 사건의 1심과 2심 판결문을 보면 임관혁, 이정호, 신응석, 양석조, 김민아, 엄희준 검사 등이 수사와 기소, 공판에 관여했다. 전부 무죄를 선고한 1심 재판부는 김우진, 김기수, 김대권 판사이고(서울중앙지방법원 2011. 10. 31), 전부 유죄를 선고한 2심 재판부는 정형식, 김관용, 윤정근 판사였다(서울고등법원 2013. 9. 16). 정형식 판사는 재판장으로 2008년 8월 20일 정연주 KBS 사장 해임처분의 집행정지신청 기각, 2008년 2월 5일 이재용 삼성 부회장 집행유예 판결을 내린 이력이 있다. 3심인 대법원 전원합의체 13인 대법관 중 8인(양승태, 권순일, 김신, 김창석, 민일영, 고영한, 박상옥, 조희대)은 9억 원 전부를 유죄로 봤고, 5인(이인복, 이상훈, 김용덕, 박보영, 김소영)은 1차 3억 원 외에 2, 3차 6억 원에 대해서는 범죄의 증명이 없어 무죄라는 취지의 반대의견을 냈다(대법원 2015. 8. 20). 대법원장은 보통 다수의견에 한 표를 더하는 것이 관행이므로 실질적으로 7대 5라고 할 수 있다. 144)


검찰 수사기록에서 증거서류가 사본 형태로 편철되어 있는 경우에는 그대로 믿지 말고 원본의 존재 및 원본과의 동일성 및 발견 경위를 세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원본 자체가 없거나 원본과 다른 내용의 사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결정적인 물증으로 작용한, 경리 직원이 작성한 장부는 원본이 아닌 ‘사본’이다. 이 사건에서 신 모 검사는 ‘공소외 7’을 데려와 검사실에서 한만호 씨와 대면하게 했고, 한만호 씨는 ‘공소외 7’로부터 이 사건은 윗선에서 이미 방향이 정해진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듣고 심적으로 무너졌다. 그 후 한명숙 전 총리에게 돈을 건넸다는 자술서를 썼다. 그래서 형사소송법은 거듭되는 인권침해, 허위자백과 그로 인한 오판이라는 오랜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공판중심주의와 전문법칙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과도한 반복소환, 규정을 벗어난 사적 편의제공 등 수사비례의 원칙을 어긴 경우에는 더욱더 수사기관의 조서를 믿지 말고 법정에서의 증언을 더 믿으라는 것이다. 147)


# 전문법칙(hearsay rule)은 ‘전문증거는 원칙적으로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문증거는 경험자 자신이 법원에 직접 보고하지 않고 다른 형태[진술을 기재한 서류(조서, 진술서, 컴퓨터용 디스크 등 기타 정보저장매체)와 타인의 진술을 내용으로 하는 진술 등]로 법원에 제출하는 증거를 말한다.


형사법의 저명한 권위자인 미국의 리처드 레오(Richard A. Leo) 교수는 미국 수사관들은 결코 중립적이거나 불편부당하지 않고 오히려 대단히 편파적이고 전략적이며 목표 지향적이라고 결론지었다. 피의자 신문실에서는 통상적으로 ‘반복 추궁’과 ‘범행 부인에 대한 공격’(피의자의 말을 막아버리거나 손이나 팔을 들어 방해하거나 피의자를 무시한 채 이야기하는 등), ‘속임수 또는 역할 기만’(피의자의 대변자인 척하는 것), ‘기망’(피의자에게 불리하게 증거를 조작하거나 왜곡하는 것) 등의 방법이 사용된다고 분석했다. 우리나라는 미국보다 훨씬 더 검찰 중심적이고 자백 증거에 의존한다. 수사 과정에서 ‘압박, 거래, 속임수’라는 세 단어로 요약될 수 있는 부당한 수사가 개입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통상의 법관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허위자백일 가능성이 많다. 이처럼 수사기관에 의해 유도된 허위자백은 오판을 야기하는 가장 두드러지고 지속적인 원인이므로 재판 과정에서 각별한 경각심이 필요하다. 150-1)


수사검사가 공소제기 후 공판에 직접 관여하는 이른바 직관 제도는 과감히 폐지하거나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 직관을 지지하는 견해는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든다. 하나는 수사한 검사가 사건의 전 과정을 잘 알고 있으므로 유죄를 인정하는 데 필요한 주장과 증거자료를 효율적으로 제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공판관여 검사가 이미 사건을 잘 알고 있으므로, 불필요한 기일 공전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이유는 형사소송의 대원칙에 반한다. “무고한 사람 한 명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것보다 열 명의 죄인을 풀어주는 것이 더 낫다”는 영국 법학자 윌리엄 블랙스톤(William Blackstone)의 경구를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두 번째 이유는 공판관여 검사의 수를 대폭 늘림으로써 그 검사가 수사검사와 다른 시각에서 충분히 기록을 검토할 시간을 확보해주면 해결될 수 있다. 법률을 개정하여 검사로 하여금 수사권을 갖지 않고 기소 및 공소유지만 담당하도록 하면 공판관여 검사의 수를 확보할 수 있다. 153)


우리나라 검사는 수사와 기소, 영장청구권 등 세계에서 유례없을 정도로 아주 광범위한 권한과 재량을 가지고 있다. 반면 그 권한과 재량의 일탈, 남용 행위에 대한 실질적인 사전·사후 통제는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 대법원은 2021년 10월 14일 ‘간첩증거조작’ 사건 피해자 유우성 씨를 불법 대북송금 혐의로 뒤늦게 기소한 것이 공소권남용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이것이 검찰의 공소권남용을 인정한 첫 사례다. 대법원은 검사의 자의적인 공소권 행사의 의미에 대해 “미필적으로나마 어떤 의도가 있어야 한다”라고 판시해오고 있다. 따라서 검사는 백이면 백 그런 의도가 없다고 부인할 것이고, 검사의 의도를 추단할 수 있는 수사자료 등이 법정에 잘 제출되지도 않는 재판구조에서는 그 증명이 매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실체진실 발견을 위해 노력하는 판사라면 변호사가 검찰 또는 공범과 특별한 이해관계가 있는지, 피의자·피고인의 주장이나 입증계획을 부당하게 중단·변경시켰는지 등을 반드시 살펴봐야 한다. 154)


나는 법원 판결이 당사자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인지 깊이 실감한 적이 있다. 2020년 제주지검 사무감사를 갔다가 서울로 복귀하는 길에 비공식 일정으로 제주4·3평화공원을 방문했다. 이때 관계자 한 분이 “법원의 재심 판결이 유족들의 가슴에 맺힌 트라우마를 씻어준다”라고 말했다. 승용차 안에서 몇 분간 아주 짧게 나눈 대화인데도 그분은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눈물을 보이셨고, 내 마음에도 강한 울림을 남겼다. 영구 보존되는 공적인 문서인 판결문에 기재된 “피고인은 무죄”라는 선언은 참으로 목메고 복받치는 치유인 것이다. 그때 법원 판결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법원은 국민의 권리와 형벌을 정하고, 검찰은 형벌을 집행하는 막강한 권력이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처럼 늘 위협을 받는 존재다. 강제력을 가진 국가권력은 언제라도 인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이 역사의 경험이다. 그러니 법조인은 최고 규범인 헌법 가치를 준수하고 각자 내면화해야 할 것이다.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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