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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 테리 이글턴의 아주 특별한 문학 강의
테리 이글턴 지음, 이미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2월
평점 :
Chapter 1. 도입부
어떤 작품이 “문학적”이라고 말할 때 그 의미의 일부는, 이야기되는 내용이 이야기되는 방식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작품을 뜻합니다. 내용이 그것을 전달하는 언어와 분리될 수 없는 글이지요. 언어는 현실이나 경험을 구성하는 요소이지, 그것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문학 작품에서 일어나는 것을 그것이 일어나는 방식에 의해 봐야 한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 두 가지가 늘 말끔하게 딱 들어맞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들쥐의 일생을 밀턴의 무운시에 맞춰 기술할 수 있겠지요. 혹은 자유에 대한 열망을 몸을 옥죄는 듯한 엄격한 운율에 맞춰 쓸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흥미롭게도 형식과 내용이 반목하게 됩니다. 소설 『동물농장』에서 조지 오웰은 복잡다단한 볼셰비키 혁명사를 농장 동물들에 관한 표면상 단순한 우화 형식으로 그려냈습니다. 이런 경우에 비평가들은 형식과 내용의 긴장 상태에 대해 언급하겠지요. 그들은 이 불일치를 그 작품의 의미의 일부로 간주할 것입니다. 12)
- 시작, 그 중요한 단서에 관하여
E. M. 포스터의 『인도로 가는 길』의 도입부 문장으로 논의를 시작해봅시다. 첫 문장의 네 구절은 거의 운율에 맞는 리듬과 균형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삼보격 시행이나 각각 세 개의 강세가 있는 시행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Except for the Marabar Caves 마라바 동굴을 제외하면 / And they are twenty miles off 그 동굴은 이십 마일 떨어져 있다. / The city of Chandrapore 찬드라포르 시는 / Presents nothing extraordinary / 특별히 내보일 만한 것이 없다.〉 이 작가는 예리한 감식안을 갖고 있는데, 그 눈은 냉정하게 거리를 유지합니다. 영국인의 전통적 습성에 따라 그는 흥분이나 열광을 거부(그 시는 “특별히 내보일 만한 것이 없다.”)하지요. “내보이다”라는 단어는 의미심장합니다. 이 단어 때문에 찬드라포르 시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기보다는 관객을 위해 꾸며진 곳처럼 여겨집니다. 대체 누구에게 “특별히 내보일 만한 것이 없다.”는 말일까요? 물론 관광객이지요. 17-8)
이 화자를 역사적 인물 E. M. 포스터와 반드시 동일시할 필요는 없지만, 그가 인도의 내부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방금 배에서 내려 육지에 발을 내디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갠지스 강이 성스러운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은연중에 찬드라포르 시를 아(亞)대륙의 다른 도시들과 비교하고 있을지 모르지요. 이 화자가 인도를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쉽사리 감명을 받지 못하는 듯이, 이 단락에는 약간 넌더리 난 기분이 감돕니다. 어쩌면 이 단락은 인도를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곳으로 여기는 낭만적 기대감의 김을 빼려고 작정했는지 모르지요. 이 소설의 제목 『인도로 가는 길』은 서구의 독자에게 그런 기대감을 일으킬 테고, 그런 다음에 소설의 첫머리에서부터 그런 기대감을 심술궂게 꺾어버리려는 겁니다. 어쩌면 이 단락은 오물과 쓰레기보다는 더 신비로운 것을 기대한 독자에게 미칠 영향을 조용히 음미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19)
이 소설은 부인(否認)으로 시작하고 곧 거기에 단서를 붙입니다. 찬드라포르 시에는 특별한 것이 없는데, 마라바 동굴은 예외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마라바 동굴은 실로 특별한 곳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툭 내던지듯이 덧붙인 종속절에 들어 있으므로, 구문 때문에 결국 이 말의 의미가 축소됩니다. 이 문장은 “마라바 동굴이 예외”라는 점이 아니라 “찬드라포르 시에는 특별한 것이 없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마라바 동굴이 도시보다 매력적이지만, 구문은 정반대를 암시하는 듯이 보이지요. 동굴이 언급되자마자 다음 순간에 휙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동굴에 대한 우리의 호기심은 더 강해질 뿐이지요. 마라바 동굴이 실제로 특별한 곳인지와 관련된 이 모호함은 『인도로 가는 길』의 중심에 자리 잡은 문제입니다. 바로 이 소설의 핵심이 추출되어 그 도입부에 환영처럼 드리워져 있는 것이지요. 독자는 아직 이런 점을 알지 못할 터이므로, 그것은 구조적 아이러니를 이루며 심지어 독자를 골리는 듯합니다. 20)
마라바 동굴은 소설의 도입부에서 암시된 것처럼 어느 모로 보나 중요한 곳으로 드러납니다. 소설의 중요한 행위가 그곳에서 일어나니까요. 하지만 이 행위는 비(非)행위일 수 있습니다. 동굴에서 과연 무슨 일이든 일어났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어려우니까요. 소설 속에서도 그 문제에 관한 다양한 견해가 제시됩니다. 동굴이란 말 그대로 속이 빈 곳입니다. 따라서 마라바 동굴이 소설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는 말은 소설의 핵심에 일종의 공백이나 공허가 존재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포스터 당대의 많은 모더니즘 작품처럼 이 소설은 그림자처럼 흐릿하고 포착하기 어려운 것을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작품의 핵심에 실로 어떤 진실이 있다 하더라도, 그 진실을 명확히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도입 문장은 소설 전체의 작은 견본이 됩니다. 그것은 동굴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구문상으로 폄하하는데, 이렇게 깎아내리는 것이 또한 그것을 강조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지요. 21)
- 독자에게 처음 보내는 신호들
〈많은 재산을 소유한 독신 남자가 아내를 얻고자 한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인정된 진실이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의 첫 문장은 아이러니의 걸작으로 간주됩니다.. 부유한 남자가 아내를 필요로 한다는 말은 보편적 진리로 제시되고, 그래서 그 말은 기하학 원리처럼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것인 듯이 여겨집니다. 그것이 실로 대자연의 엄연한 사실이라면, 미혼 여성들이 부유한 남자의 장차 신붓감으로 중뿔나게 나서더라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부유한 총각들의 욕구에 반응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스틴의 빈틈없는 전략적 발언은 젊은 아가씨들과 그들의 뻔뻔스러운 어머니들이 탐욕적이라든가 계층 상승을 꾀한다는 비난을 받지 않게 보호해줍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이런 일을 하고 있음을 독자가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줍니다. 바로 이 부분에 아이러니가 숨어 있는 것이지요. 사람은 자신의 비열한 욕망을 자연 질서의 한 부분으로 합리화할 수 있을 때 더 편안해한다고 이 문장은 암시합니다. 26-7)
『오만과 편견』의 첫 문장이 전설적이라면, 미국 문학에도 똑같이 유명한 도입부가 있습니다. “나를 이스마엘이라고 불러달라(Call me Ishmael).” 멜빌의 『모비 딕』을 여는 이 간결한 첫 문장은 앞으로 나올 내용의 전조가 될 수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이 소설은 화려하고 장황한 문체로 유명하니까요. 이 첫 문장은 또한 약간 아이러니합니다. 이 소설에서 화자를 이스마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니까요. 그런데 그는 왜 독자에게 그렇게 불러달라고 요청하는 걸까요? 그것이 그의 진짜 이름이라서? 아니면 그 이름의 상징적 의미 때문에? 『성서』에 나오는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이집트인 하녀 하가르에게서 낳은 아들인데 버림받은 추방자이자 방랑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은 경험 많은 대양의 여행자에게 적합한 가명이 될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화자는 진짜 이름을 감추고 싶어 하는 걸까요? 만일 그렇다면, 왜 그럴까요? 개방적으로 보이는 그의 태도가 어떤 신비로운 비밀을 숨기고 있는 걸까요? 27-8)
“나를 이스마엘이라고 불러달라.”는 독자에게 건넨 말이고, 독자에게 건네는 말이 모두 그렇듯이, 그것은 작품의 허구성을 폭로합니다. 독자의 존재를 소박하게 인정하는 것은 그것이 소설이라고 고백하는 것이지요. “이스마엘”은 실제 이름이라기보다 문학적 이름으로 들리기 때문에, 그 이름은 우리가 허구에 직면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또 다른 신호일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 보면, 그 이름은 화자의 진짜 이름이 아니라 가명이기 때문에 허구적으로 들릴 수 있지요. 어쩌면 그의 진짜 이름은 프레드 웜인데,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서 더 이국적인 이름을 선택했을지 모릅니다. 그가 실제로 이스마엘이라고 불리지 않는다면 독자는 그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궁금하겠지요. 그런데 그의 진짜 이름이 독자에게 밝혀지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멜빌이 그 이름을 숨기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숨길 수는 없으니까요. 소설이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28-9)
- 겉으로 보이는 것과 늘 똑같은 것은 아니다
우리처럼 낭만주의 이후의 사람들은 감정과 관습이 별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진정한 감정은 인위적인 사회적 형식을 내던져버리고 가슴에서 직접 우러나오는 말을 하는 것이라고요. 그러나 제인 오스틴에게 진정한 감정이란 공적으로 표현되는 적합한 양식이 있었고, 그 양식은 사회적 관습에 의해 규제되었습니다. “관습(convention)”은 문자 그대로 “함께 모이는 것”을 뜻하는 단어인데, 내가 감정적으로 어떻게 행동하는가는 오로지 내게 달린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를 함축합니다. 내 감정은, 내 사유 재산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어떤 의미에서 나는 공동의 문화에 참여함으로써 감정적 행위를 배웁니다. 오스틴에게 예법이란 바나나를 칼과 포크로 먹지 않는 매너뿐 아니라 타인에게 민감하고 정중하게 처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손함이란 포도주 잔에 침을 뱉지 않는 것 따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야비하거나 교만하거나 이기적으로 굴지 않고 잰 체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35-6)
관습이 반드시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아닙니다. 관습은 어떤 감정적 반응이 너무 지나치다고 판단할 수 있지만, 너무 미약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감정과 관습이 함께 엮여 있다고 믿는가 아니면 서로 적대적이라고 믿는가는 셰익스피어의 극에서 햄릿과 클로디우스가 벌이는 언쟁의 핵심적 문제입니다. 햄릿은 슬픔과 같은 감정은 사회적 형식을 무시해야 한다고 개인주의적 입장에서 주장하지만, 반면 클로디우스는 감정과 형식이 그보다 더 친밀한 관계여야 한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시는 감정과 형식이 반드시 반목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형식은 감정을 억누르기도 하지만 감정을 강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이 아침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라는 문제보다 더 절박한 문제로 마음이 옥죄는 상황에서 여러분에게 좋은 아침 시간을 보내라고 말하더라도 가식적이지 않은 것처럼, 여기서도 가식의 문제는 없습니다. 36)
- 독자를 언어의 세계로 불러들이는 선언들
조지 오웰의 『1984』의 첫 문장입니다. 〈사월의 화창하고 차가운 날이었다. 시계가 열세 시를 울리고 있었다. 윈스턴 스미스는 지독한 바람을 피하려고 가슴팍에 턱을 붙이고는 빅토리 맨션의 유리문을 재빨리 미끄러지듯 지났다. 그렇지만 모래 섞인 먼지 소용돌이가 함께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민첩하진 못했다.〉 이 문장은 다른 점에서는 주목할 만하지 않은 묘사에 “열세 시”라는 단어를 신중하게 집어넣음으로써 효과를 얻습니다. 그 단어를 통해서 이 장면이 어떤 낯선 문명이나 미래에 설정되어 있음을 암시하지요. 어떤 점은 변하지 않았지만 (사월이라 불리는 달이 아직 있고 바람은 여전히 모질게 불 수 있지요.) 변한 것도 있고, 이 문장의 효과는 이처럼 일상적인 것과 낯선 것의 병치에서 생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이하게 울리는 시계가 약간 지나치게 작위적(voulu)이라고 느끼겠지요. 시계 묘사가 너무 부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건 공상과학소설이야.”라고 좀 너무 요란하게 선언하는 것이지요. 41)
윈스턴 스미스가 맨션에 들어갈 때 모래 섞인 먼지 소용돌이가 그를 따라 들어가 건물에 스며듭니다. 비록 이 소설은 모래의 침투를 (바람은 “지독”하게 불어댑니다.) 불길한 의미로 여기는 듯하지만, 독자는 이 모래 돌풍을 그리 불길하지 않게 느낄 수 있습니다. 먼지와 모래는 임의적이고 우연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그것들은 까닭도 이유도 없는 요소를 대변하고, 총체적이거나 의미심장한 계획을 구성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이 소설이 그려내는 전체주의적 체제의 정반대라고 볼 수 있겠지요. 마찬가지로, 바람은 인간의 통제에 반항하는 힘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람은 제멋대로 이쪽저쪽으로 불지요. 그 국가는 적어도 자연만은 그 목적에 맞게 이용할 수 없는 듯합니다. 그리고 전체주의 국가는 무력으로 압박하여 질서정연하고 통제 가능하게 만들 수 없는 것은 뭐든지 불편해하지요. 빅토리 맨션이 먼지를 완전히 내몰 수 없듯이, 그 체제는 우연적 요소를 완전히 쫓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41)
Chapter 2. 인물
오늘날 ‘캐릭터(character)’라는 단어는 문학 속의 인물뿐만 아니라 기호나 문자 혹은 상징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 단어는 독특한 표시를 만드는 ‘타발 금형’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데, 그런 뜻에서부터 개인의 서명처럼 개인의 각별한 특징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추천서(character reference)라는 단어에서 쓰이듯이 캐릭터라는 말은 한 개인이 어떤 인물인지 보여주는 표시나 초상화, 묘사를 뜻했고, 얼마 후에 개인 그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지요. 개인을 나타내던 표시가 개인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그 표시의 독특함은 그 인물의 고유함을 나타내게 되었지요. 그러므로 “캐릭터”라는 단어는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는, 제유법이라는 비유법의 일례입니다. 우리를 서로 구분해주는 것은 우리가 공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톰 소여를 톰 소여로 만드는 것은 그가 헉 핀과 공유하지 않는 속성입니다. 맥베스 부인을 그녀 본연의 존재로 만드는 것은 그녀의 맹렬한 의지와 공격적 야심입니다. 46)
- 유형은 인물의 개성을 보존하며 더 넓은 배경을 부여한다
개인의 유형(type)을 정한다는 것은 그들을 어떤 범주 안에 넣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을 유일무이한 존재로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 생각을 모든 인간에게 적용한다면, 우리 모두는 특유함이라는 동일한 자질을 공유하게 됩니다. 우리가 공통으로 가진 것은 우리 모두가 비범하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이 특별하지요. 이 말은 곧 누구도 특별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사실 인간은 어느 정도까지만 비범합니다. 한 인간에게만 특이한 자질은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오로지 한 개인만 성미가 급하거나 앙심이 깊고 혹은 치명적으로 공격적인 세계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서로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 사실을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엄청난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인간의 성격을 논하기 위해 사용하는 어휘들을 통해 밝혀집니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 자신을 개체화하게 되는 사회적 과정도 공유합니다. 50)
스탕달과 발자크에서부터 톨스토이와 토마스 만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유럽 사실주의 소설의 업적 가운데 하나는 인물과 전후 상황이 밀접하게 엮인 관계를 예시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소설에서 인물은 복잡한 상호 의존의 관계망에 사로잡혀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더 막강한 사회적, 역사적 힘에 의해 형성되고, 그들이 어쩌다 자각할 사회적 과정에 의해 빚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이런 힘의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형성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실제 상황은 멋지게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몇몇 위인의 배짱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지요. 사실주의 소설은 개인의 삶을 역사와 공동체, 친족 관계, 제도를 통해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아는 바로 이러한 틀 안에 박혀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이러한 사실주의적 기획과 모더니즘 소설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모더니즘은 빈번히 홀로 고립된 의식을 제시하니까요. 56-7)
모더니즘 작품은 또 다른 방식으로 전통적인 인물 개념을 해체하려 합니다. 이것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 자아를 형성하는 어떤 힘을 일부 밝히려는 것이지요. D. H. 로렌스는 성격이나 인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그가 파헤치려는 자아의 심연은 의식적 에고보다 더 깊은 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프로이트 이후로, 정통적인 정체성 개념은 의문시될 수밖에 없습니다. 의식적 삶은 이제 자아라는 빙산의 꼭대기에 불과하니까요. 로렌스가 탐구한 자아는 관념이나 감정, 성격, 도덕적 관점이나 일상적 관계를 넘어선 어딘가에 존재합니다. 모호하고, 원시적이고, 심원하며 비개인적 존재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사실주의 작가들이 발을 내디디려 하지 않았던 영역입니다. 로렌스에게 자아는 인간이 지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는 그 나름의 수수께끼 같은 논리가 있고, 그 나름의 유쾌한 방식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로 자기 자신에게 이방인이 되는 셈입니다. 59)
- 시대가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인물
토머스 하디의 『무명의 주드』에 나오는 수 브라이드헤드는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에서 가장 놀랍도록 독창적으로 묘사된 여성에 속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독자가 수를 비뚤어진 성미에 바람둥이에다 짜증스럽게도 변덕스러운 여자로 인식하도록 일부러 유혹하는 듯합니다. 그녀가 질투를 하거나 변덕을 부리고, 짜증스럽게도 모순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수의 행위에서 많은 부분이 일단 성에 대한 깊은 두려움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고 나면 이해가 됩니다. 그녀가 빅토리아 시대의 정숙한 체하는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정확히 정반대의 이유 때문이지요. 그녀는 개화된 젊은 여성으로서 결혼과 성에 관한 대담하게 진보적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종교적 신앙에 관해서는 회의주의적이기도 합니다. 역설적인 점은 그녀가 인습에 구애되지 않는 자신의 견해 때문에 성을 경계한다는 것이지요. 그녀는 결혼과 성이 여자의 독립성을 뺏는 덫이라고 간주합니다. 61-2)
수와 주드의 실패는 자연이나 은총, 악의적인 신과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다만 그들의 실험이 시기상조였던 것이지요. 역사가 아직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비평가들이 수를 불감증에다 신경과민인 여자로 간주하기 쉬운 한 가지 이유는, 그녀가 대체로 다른 사람들의 눈을 통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녀의 내면에 거의 접근하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서술에서 그녀는 자기 나름의 권리가 있는 인물이 아니라 주드가 겪는 경험의 한 가지 함수로 존재합니다. 그녀가 몹시 감질나게도 불투명하게 보인다면, 그것은 그녀가 주인공 주드의 욕구와 욕망, 망상을 통해 여과되기 때문입니다. 한 비평가가 말했듯이, 그녀는 자기 나름의 주체가 아니라 주드의 비극의 도구로 존재합니다. 주드가 죽은 후 그녀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놀랍지 않은 일이지요. 그 정도로 소설 스스로도 여주인공을 바깥으로 내모는 데 공모합니다. 하지만 그녀를 제시할 때는 특히나 예리한 통찰력을 보여주었지요. 63-4)
- 감정 이입 vs. 비판적 이성의 고양
많은 사실주의 소설은 독자가 그 인물들과 동일시하기를 요청합니다. 사실주의 소설은 우리가 상상을 통해 다른 인간의 경험을 재창조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인간적 공감을 확장하고 심화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세계를 파악할 수만 있다면, 그들이 어떻게 해서,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우월한 외적 관점에서 그들을 비난하려는 충동이 줄어들겠지요. 이해하면 용서하게 됩니다. 이처럼 자비로운 주장은 많은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릇된 점도 많이 있지요. 한 가지 잘못된 점을 들자면, 모든 문학 작품이 우리에게 등장인물과 동일시하기를 권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것을 들자면, 감정이입이 유일한 이해 방식은 아닙니다. 실은 문자 그대로 해석해보면, 감정이입은 이해를 도모하는 형식이 전혀 아닙니다. 내가 당신이 “된다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는 내 능력을 상실하니까요. 누가 뒤에 남아서 이해를 하겠습니까? 65-6)
소포클레스는 독자가 오이디푸스에게 감정을 이입하기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그 연극은 우리가 불운한 운명의 주인공에게 동정심을 느끼리라고 가정하지만, 누군가에 대해서 느끼는 것(동정)과 그 사람으로서 느끼는 것(감정이입)은 차이가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히틀러 시대에 글을 쓰면서, 무대 위의 인물들에게 감정이입을 한다면 우리의 비판 능력이 무뎌질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권력을 쥔 사람들에게 대단히 편리한 방편이 되겠다고 그는 생각했지요. 감정이입은 비판적 이성보다 감정을 고양시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브레히트는 사회적 존재가 모순적인 것들로 구성되고 이 모순들이 사람들의 정체성의 핵심을 이룬다고 믿었습니다.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변덕스럽고 일관성이 없고 자기 분열된 존재를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인물이 통합되고 일관성 있다는 개념은 사회적 변화를 촉진할 자아 내부의 갈등을 억압한다는 것이지요. 66)
Chapter 3. 서사
전지(全知)한 화자는 작품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육체에서 분리된 목소리에 가깝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익명의 인물로서 화자는 작품 자체의 마음으로 작용합니다. 그렇더라도 화자가 작가의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대변한다고 가정해서는 안 됩니다. 삼인칭 전지적 서술은 일종의 메타언어입니다. 이 말은, 적어도 사실주의 소설에서는 그런 서술이 서사 안에서 비평이나 논평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이야기 그 자체의 목소리이므로 문제시할 수 없어 보입니다. 서사가 잠시 중단되고 그 자체에 대해 숙고할 때만 그것에 대해 의문시할 수 있지요. 이른바 서한체 소설, 즉 인물들이 서로 주고받는 편지로 구성되는 소설에서는 그런 메타언어 혹은 해설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끼어들 수 없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드라마 형식에서도 그렇지요. 드라마에서는 인물들의 말을 듣게 되니까요. 이런 까닭에 희곡의 경우에는 어떤 관점을 옹호하거나 배척하는지를 알기 어렵습니다. 71, 75)
- 서사는 주인공과 세계와 은밀히 공모한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동물들이 농장을 점령해서 스스로 운영하려다가 비참한 결과를 맞는 이야기이지요. 이 소설 자체는 소비에트 연방 초기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붕괴에 대한 알레고리로 쓰였습니다. 하지만 실은, 동물은 농장을 경영할 수 없습니다. 손이 없고 발굽만 있을 때는 수표에 서명하거나 원료 공급자에게 전화하기 어렵지요. 사실 이런 이유 때문에 동물들의 실험이 실패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실은 이 이야기에 대한 독자의 반응에 무의식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기울어진 것입니다. 이야기가 그 조건을 설정한 방식이 그 목적을 입증하는 데 효과적인 것이지요. 이 알레고리는, 물론 좌파인 작가의 의도와는 반대로, 노동자들이 너무 어리석어서 자신들의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는 의미를 함축할 수 있습니다. 첨언하자면, 이 소설의 제목은 반어적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동물”과 “농장”은 당연히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어울리지 않지요. 82)
어떤 서사가 보여주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에는 불일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존 밀턴의 『실낙원』에서 아담은 죽음을 일으키는 사과를 나눠 먹음으로써 이브와 운명을 함께하려고 결정합니다. 아담은 이브에 대한 정절로 인해 자신의 생명을 위험에 내맡길 용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과를 먹을 때는 시의 어조가 뚜렷이 달라집니다. 〈그는 주저 않고 먹었다, / 자신의 더 나은 판단력에 거슬러, 속아서가 아니라 / 어리석게도 여자의 매혹에 압도되어.〉 “어리석게도 여자의 매혹에 압도되어”는 조금 전에 시가 그려낸 아담의 마음 상태를 노골적으로 비틀어버립니다. 아담이 연인 옆에서 자기 목숨을 내던질 각오로 사과를 받을 때, 이 시는 갑자기 그에 대한 공감을 내버립니다. 대신 엄격한 재판관의 어조를 띠고는, 아담이 이 사건의 파국적 결과를 충분히 알면서 자기 기만 없이 자유롭게 사과를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교리가 드라마를 압도하면서, 신학자 밀턴이 인문주의자 밀턴의 뒤를 이어받은 것이지요. 82-3)
“결국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한결같은 외침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계속 읽어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싶더라도, 그 충족을 경계해야 합니다. 결말의 기쁨이 너무 일찍 나오면, 긴장의 즐거움이 깨질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확언을 갈망하지만, 그것이 연기되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호기심을 채울 필요가 있지만, 결말을 알지 못하는 불안감을 즐기기도 하지요. 해결책이 잠정적으로 연기되지 않으면, 이야기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서사가 계속 이어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잃어버린 강아지나 에덴동산처럼 그것이 복원되기를 갈구합니다.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의 화자는 소설 끝머리에서 커츠가 죽은 후 그의 약혼녀를 만났을 때 그녀를 위로하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 이야기는 그 약혼녀를 해피엔딩을 추구하는 전통적 독자로 취급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콘래드 자신은 행복한 결말은 거의 없을뿐더러 어떤 경우에도 명확한 결말은 없다고 생각했지요. 86-7)
- 질서가 와해된 곳에서 이야기가 태어난다
스토리가 전개될 수 있는 까닭은 초반에 어떤 질서가 와해되었기 때문입니다. 뱀 한 마리가 행복한 정원에 슬쩍 들어서고, 이방인이 마을에 찾아오며, 돈키호테는 훤히 트인 대로에서 돌격하고, 러브레이스는 클래리사에 대한 연정을 품고, 톰 존스는 후원자의 시골 대저택에서 쫓겨나며, 로드 짐은 돌이킬 수 없이 배에서 뛰어내리고, 요제프 K는 죄명도 모르는 범죄로 체포됩니다. 수많은 사실주의 소설의 결말은 이 질서를, 어쩌면 더 풍부한 형태로, 복원하고자 합니다. 원죄는 갈등과 혼란을 빚어내지만, 그런 상태가 결국에는 회복되겠지요. 에덴동산에서의 타락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복된 죄(felix culpa)” 혹은 다행스러운 결함입니다. 원죄가 없으면 이야기도 없을 테니까요. 따라서 독자는 위안과 용기를 얻습니다. 독자는 현실에 내재된 논리가 있으며 소설의 임무는 그 논리를 참을성 있게 밝혀내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어마어마한 플롯의 일부입니다. 88)
고전적 사실주의에서는 세계 자체가 이야기로 형성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많은 모더니즘 소설에서는 독자가 스스로 구성하는 질서 말고는 다른 질서가 없습니다. 독자가 구성하는 질서는 임의적이므로, 소설의 시작과 결말도 그렇습니다. 신이 명한 기원도, 자연스러운 종결도 없습니다. 이 말은 곧 사리에 맞는 중간도 없다는 뜻이지요. 한 사람에게는 목적으로 여겨지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기원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키는 대로 어디서나 시작할 수도, 중단할 수도 있습니다. 세계에 목적과 기원이 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모든 일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세계가 아니라 여러분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어디서 시작하든 간에, 이미 엄청나게 많은 일이 일어났다고 명확히 인식하겠지요. 그리고 여러분이 어디서 중단하든 간에 그와 상관없이 대단히 많은 것이 지속되겠지요. 그래서 일부 모더니즘 작품은 서사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88-9)
역사적으로 말하면, 서사는 먼 과거에서부터 이어져 옵니다. 스토리텔링은 인류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가진 듯합니다. 우리는 서사 안에서 말하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꿈꾸고, 행동한다는 얘기도 때로 들립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모두 시간의 산물이니까요. 하지만 모든 인간이 이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삶을 일관성 있는 이야기로 간주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상이한 문화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인생에 멋진 인물들이 몇 명 있었는데 문제는 내가 플롯을 만들지 못하는 거야.”라는 오래된 농담이 생각나는군요.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는 진부한 은유는 목적과 지속성의 의미를 내포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은유가 의미를 밝혀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다고 생각할까요? 예술 작품이 그렇듯 인생은 목적이 없더라도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94-5)
- 서사와 플롯이 항상 공존하지는 않는다
서사와 플롯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 두 가지를 구별하는 한 가지 방법은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크리스티의 범죄 스릴러는 거의 다 플롯뿐입니다. 배경 설정이나 대화, 분위기, 상징, 묘사, 숙고, 심층적 성격 묘사 등 서사의 다른 특징들이 가차 없이 제거되어 남은 것은 적나라한 사건의 뼈대뿐입니다. 그렇다면 플롯은 서사의 일부이지만, 그것으로 서사를 완전히 다룰 수는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플롯이라는 단어는 이야기의 의미 있는 행위를 뜻합니다. 그것은 인물들과 사건, 상황이 상호 연관되는 방식을 의미하지요. 플롯은 서사의 논리 혹은 내적 동력을 가리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플롯은 “이야기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나 사물의 조합”을 의미합니다. 어떤 이야기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 누군가 우리에게 물어볼 때 우리가 찾아내는 답이 플롯의 요약입니다. 『맥베스』에서 뱅쿼우의 살해는 플롯의 일부이지만 “내일, 내일 그리고 내일…”로 시작되는 대사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96)
Chapter 4. 해석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텍스트는 기본적으로 사실을 제공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닙니다. 대신 독자에게 사실을 “상상”하도록 요청합니다. 사실로부터 상상의 세계를 구성한다는 의미에서 말이지요. 그러므로 작품은 진실이면서 동시에 상상일 수 있고, 사실적이면서 동시에 허구적일 수 있습니다. 런던에서 파리로 가기 위해 넓은 바다를 건너야 하는 것은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의 허구 세계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실이지만 마치 소설에 의해 “허구화”된 듯이 보이지요. 그것은 그것의 진실성이나 허위성이 중요하지 않은 문맥 안에서 작용합니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작품의 상상의 논리 안에서 어떻게 쓰이는가, 라는 점이지요. 사실에 진실한 것과 인생에 진실한 것은 다릅니다. 『햄릿』에 많은 진실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고 해서 어떤 덴마크 왕자가 실제로 존재했고 그가 미쳤거나 미친 척했거나 아니면 둘 다였고 여자 친구를 가증스럽게 다루었다는 뜻은 아니지요. 101-2)
- 문학의 현실과 독자의 현실 사이
어떤 작품이 사실주의적이라고 묘사할 때, 어떤 절대적인 방식에서 그 작품이 비사실주의적 문학보다 현실에 더 가깝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 작품이 어떤 특정한 시대와 장소의 사람들이 현실로 간주하는 것에 부합된다는 뜻이지요. 우리가 어떤 고대 문화권에서 작성된 글 한 편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그 글이 희한하게도 등장인물들의 정강이뼈의 길이에 관심을 쏟는다고 상상해봅시다. 우리는 그 글이 이국적이고 아방가르드적인 상상력의 비약이라고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동일한 문화권의 역사 기록을 우연히 읽고는, 정강이뼈의 길이가 사회의 어느 계층 조직에 속하는지를 결정하는 요인이었음을 알게 될 수 있습니다. 센타우루스 자리의 알파성에서 지구를 찾아온 방문객이 전쟁과 기근, 종족 근절과 대량학살로 점철된 인류의 역사서를 본다면 그것을 터무니없는 초현실주의적 텍스트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어떤 경우이든, 순전히 사실주의적 작품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105-6)
- 문학은 의미를 내포하지 않고 생산한다
우리가 작품의 원래 의미에 접근할 수 있다고 가정할 때, 그 원래 의미가 그 작품이 후에 얻게 될 의미보다 높은 지위에서 늘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과거의 작품을 그 당대인들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령 현대 심리분석학적 통찰을 통해서 우리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경험의 노래」를 그 당시에 통용된 지식으로 가능했던 수준보다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20세기의 폭정을 경험했으므로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더 풍부해질 수 있지요.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이 의미하는 바는 유대인 대학살 이전과 그 이후가 똑같을 수 없습니다. 어떻든, 한 역사적 사건을 겪으며 사는 것은 그것을 이해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완전히 상실한 역사적 지식 형태가 있습니다. 『햄릿』이 처음 상연되었을 때 그것을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이 복수의 도덕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우리는 결코 명확히 알 수 없겠지요. 115-6)
문학 작품은 고정된 의미를 가진 텍스트가 아니라 전반적으로 다양한, 가능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모태라고 간주하는 것이 제일 좋겠지요. 작품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기보다는 의미를 생산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렇다고 해서 어떤 의미라도 가능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한 가지 이유는 의미가 공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 소유한 땅 덩어리처럼 오로지 나 혼자 소유한 의미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의미는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나 혼자서 “해석학적 현상”이라는 구절이 “메릴 스트립”을 뜻하게 하겠다고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의미는 언어에 속하고, 언어는 우리가 집단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의미를 추출합니다. 언어는 자유로이 떠다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현실에 작용하는 방식이나 한 사회의 가치, 전통, 가설, 제도, 물적 조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언어를 결정적으로 변화시키려면, 적어도 행위의 일부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117-8)
- 유도하기, 강요하기, 자극하기
독자가 끊임없이 추측을 하지 않으면 문학 텍스트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픽션의 문장은 과학적 가설과 조금 비슷합니다. 가설을 실험하듯이,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해야 합니다. 반면에, 문학 작품은 독자에게 태도를 암시할 수 있습니다. 어떤 작품은 독자를 옛 친구처럼 붙잡고 늘어지며 긴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고, 아니면 독자에게 딱딱하고 쌀쌀한 태도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어떤 작품은 독자가 그 자체와 똑같이 문명화된 가치를 공유하는 박식하고 한가한 사람이라고 가정하면서 독자와 무언의 조약을 체결할 수 있습니다. 혹은 어떤 작품은 그것을 집어 드는 사람을 혼란스럽고 어리둥절하게 만들려고 나서서 독자의 판단력을 공격하고 독자의 확신을 낯설게 만들거나 독자의 예절 의식을 침해합니다. 또한 독자에게 등을 돌리고 자기들끼리 은밀히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들의 사색이 어쩌다 귓결에 들리도록 마지못해 내버려두는 듯한 작품들도 있습니다. 120-1)
- 소설가를 믿지 말고, 이야기를 믿어라
모든 지식은 어느 정도로는 추상화의 과정에 의해 결정됩니다. 문학 비평의 경우에 이 말은 작품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그것의 전모를 개괄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작업은 쉽지 않은데, 문학 작품이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과정이라서 전체적으로 펼쳐놓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는 뒤로 물러서서도 작품의 확고한 실체와 계속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시나 소설을 하나의 전체로 파악하기 위해 시도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그 주제를 탐구하는 것입니다. 주제란 곧 우리가 작품에서 발견하는 주된 관심사의 패턴을 뜻하지요. 디킨스는 혁명가가 아니라 개혁주의자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위대한 유산』은 디킨스의 몇몇 후기 작품처럼, 작가의 실제 견해가 작품 속에 드러난 태도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예시합니다. 이 소설은 디킨스를 그토록 우상화했던 사교계가 아니라 범죄자의 지하세계에 공감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122, 127)
-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라
『위대한 유산』에 등장하는 몇 가지 중요한 이미지의 패턴이 그 주제를 심화하는 작용을 합니다. 하나는 쇠의 이미지인데 수많은 다양한 형태로 불쑥 나타납니다. 가령 매그위치의 족쇄는 올릭이 나중에 조 부인을 폭행하는 데 사용되지요. 핍이 조에게서 훔치는 줄도 이야기의 후반부에 다시 등장합니다. 무거운 정박용 닻사슬에 묶여 있는 유형선은 “죄수들처럼 차꼬에 채워진” 듯이 보입니다. 조 부인의 결혼반지는 어린 핍을 벌줄 때 그의 얼굴을 긁어 벗겨놓습니다. 매그위치는 핍에게 비유적으로 족쇄를 만들어 씌웁니다. 금과 은으로 만든 족쇄이지만요. 핍은 법적으로 도제로 “구속”되어 있고, 경멸스럽기 짝이 없는 대장장이의 삶에 속박되어 있지요. 그래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쇠는 폭력과 감금을 상징하지만, 또 한편으로 그것은 새티스 하우스와 런던 상류사회의 공허한 세계와 대조되는 견고함과 소박함을 갖고 있습니다. 대장간과 범죄자들의 지하세계의 가혹하고 불편한 면뿐만 아니라 진정한 면을 암시합니다. 131)
해석이란 부분적이고 잠정적입니다. 최종적인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서사의 흐름에서 뒤로 물러서서 되풀이되는 관념이나 관심사에 주목합니다. 그것은 어떤 유사성이나 대조, 관련성을 주목합니다. 인물을 고립시켜 보는 것이 아니라 주제와 플롯, 이미지와 상징을 포함하는 패턴의 한 요소로 보고자 합니다. 언어가 분위기와 감정적 상태를 조성하는 데 어떻게 사용되는지 간략히 검토합니다. 이야기가 들려주는 것만이 아니라 서사의 형식과 구조에 관심을 기울여 설명합니다. 소설이 그 자체의 인물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를 숙고합니다. 또한 텍스트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문학 양식(사실주의, 우화, 판타지, 로맨스 등등)을 훑어봅니다. 나는 또한 이 소설의 도덕적 비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하지만 독자는 그 비전이 얼마나 타당한 것인지 언제나 묻고 싶겠지요. 이런 질문은 더할 나위 없이 타당합니다. 우리는 한 문학 작품이 세상을 보는 방식에 찬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133-4)
- 문학 작품을 읽는 몇 가지 방법
영국의 상류층 남녀의 이름은 노동 계층 동포의 이름보다 더 긴 경향이 있습니다. 음절이 많다는 것은 다른 종류의 풍요를 가리킬 수 있지요. 피요나 포르테스큐-아르부스노트-스마이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조 도일이라는 사람과 달리 리버풀의 뒷골목 출신일 가능성이 없습니다. 『해리 포터』의 헤르미온느 그레인저는 영국의 중상류층 사회에서 꽤 흔한 이름에다 큰 시골 저택을 암시하는 성(그레인저)을 갖고 있는데, 다 합해서 음절이 여섯 개나 되고, 세 명의 주인공 중에서 가장 세련된 인물입니다. 인습적인 중산층 출신인 해리 포터의 이름은 말끔하게 균형 잡힌 네 음절로 되어 있는데 부족하지도, 지나치지도 않지요. 반면에 하층민 출신의 론 위즐리는 보잘것없이 세 음절뿐입니다. 그의 성(Weasley)은 기만적이거나 부정직한 인간을 뜻하는 “위즐(weasel)”을 연상시킵니다. 족제비는 사실 당당한 동물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론처럼 하층민 출신인 인물에게 편리하게 붙일 수 있는 이름입니다. 139)
Chapter 5. 가치
신고전주의자들의 눈에, 수백만의 인간이 수백 년의 세월에 걸쳐서 찾아낸 진실은 최신의 어떤 관념보다도 존중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눈에 핏발이 선 천재가 새벽 두 시에 퍼뜩 떠올린 생각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인류가 공유한 지혜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유사성이 차이점보다 더 주목할 만하고, 공통적인 것이 독자적인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예술의 임무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의 생생한 이미지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현재란 대체로 과거의 재순환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대한 충실성이 현재에 정통성을 부여합니다. 현재를 구성하는 것은 대체로 과거이고, 미래는 이미 지나간 것을 주제로 한 일련의 가벼운 변주곡들을 연주하겠지요. 변화에 대해서는 의혹을 품고 다뤄야 합니다. 그것이 진전보다는 퇴보를 의미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물론 변화는 불가피한 것이지만, 인간사의 변화무쌍함은 인간의 타락한 상태를 보여주는 징후입니다. 에덴동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요. 141-2)
낭만주의자들의 눈에 인간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무궁무진한 힘을 소유한 창조적 정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은 정적이 아니라 역동적인 것이고, 변화란 대체로 겁내기보다는 환영해야 할 것이지요.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존재이고, 무한한 진보를 이룰 수 있는 잠재력이 있습니다. 이 멋진 신세계에 들어서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쇠사슬을 채운 세력을 떨쳐내기만 하면 됩니다. 창조적 상상력은 우리의 가장 깊은 욕망의 이미지에 따라 세계를 개조할 수 있는 예지력입니다. 그것은 시뿐 아니라 정치 혁명에도 영감을 불어넣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재능이 새롭게 강조됩니다. 가장 소중한 예술 작품이란 전통과 관습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런 작품은 노예처럼 과거를 모방하지 않고, 풍부하고 낯선 것을 탄생시킵니다. 그렇지만 낭만주의 작가들 역시 그들이 스스로 만들지 않은 재료를 가지고 자신들의 예술을 주조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작은 신이라기보다는 벽돌공에 더 가깝지요. 142-3)
모더니즘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낭만주의의 충동을 물려받았습니다. 모더니즘 예술 작품은 모든 것이 표준화되고 정형화된 듯이 보이는 세계에 항거하는 자세를 취합니다. 그것은 이 기성품화된 중고 문명을 넘어선 영역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상투적 인식을 강화하기보다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것이지요. 낯섦과 특이성을 추구하면서 그것은 그저 또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하는 것에 저항하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예술 작품이 완전히 새롭다면 우리는 그것을 전혀 알아볼 수 없겠지요. 가령 진짜 외계인이 팔다리가 많이 달린 난쟁이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눈에 보이지 않게 우리 무릎에 앉아 있는 존재인 경우처럼 말입니다. 작품은 예술로 인정받기 위해서 우리가 이미 예술로 분류하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결국에 그 범주를 변형시켜서 전혀 알아볼 수 없게 만들더라도 말이지요. 혁신적 예술 작품이라도 그것이 혁신적으로 변화시킨 것에 관련해서만 혁신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143)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하면서 새로움에 대한 갈망은 시들기 시작합니다. 포스트모던 이론은 독창성을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습니다. 혁신을 멀찌감치 뒷전에 밀어놓았지요. 대신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떤 것을 재활용하고, 바꾸고, 풍자하고, 본떠서 다른 것을 만드는 세계를 열렬히 수용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복사본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면 어딘가에 원본이 있다는 의미가 함축될 텐데,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본은 없이 모조품만 있습니다. 태초에 모조품이 있었지요. 혹시 원본처럼 보이는 것이 우연히 발견된다면, 그것도 복사본이거나 모방작 혹은 모조품으로 판명 나리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절망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진짜가 아니라면, 그 무엇도 가짜일 수 없으니까요. 모든 것이 가짜가 되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겠지요. 조이스의 표현을 살짝 빌리자면, 포스트모더니즘은 “결코-변화하지 않고 언제나-변화하는” 문화입니다. 144)
- 소설의 언어: 작위적 기교 vs. 독창적 표현
〈쇠꼬챙이처럼 배싹 마르고, 키는 더 크지만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나온 오드리 헵번처럼 보조개가 들어가고 턱이 각진, 은은하게 빛나는 모델이 희미한 빛으로 꼬아진 듯한 드레스에 경주용 에그헬멧을 걸치고 은밀한 미소를 지으며 차에서 걸어 나왔다.〉
존 업다이크의 소설 『토끼 잠들다』의 한 문장은 좀 부주의하게도 반복된 거의 비슷한 단어(“은은하게 빛나는”, “희미한 빛”)를 별도로 치면 대단히 숙련된 글입니다. 지나치게 교묘하고 계획적입니다. 모든 단어를 일일이 까다롭게 선택해서 문지르고 다른 단어들에 말끔하게 끼워 맞추고 그런 다음에 매끄럽게 다듬고 그 위에 마무리로 광택을 낸 듯합니다. 머리카락 한 올도 흩어지지 않았지요. 너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단어가 미진한 부분이나 변칙적인 부분 하나 없이 세심하게 배치되어서 지나치게 기교적인 느낌이 듭니다. 결과적으로, 이 문장은 기교적이지만 생명이 없습니다. 이 문장은 상세한 묘사를 시도하지만, 복잡한 형용사가 너무 많고 절들이 겹겹이 쌓여 있어 언어 차원에서 너무 많은 일이 진행됩니다. 그래서 독자는 묘사되고 있는 대상에 집중하기 어렵지요. 이 언어는 그 자체의 능란한 솜씨에 독자가 주목하고 경탄하게 합니다. 153)
〈그들은 대체로 불편한 기차 여행 후 돌풍이 이는 어느 사월 오후에 도착했다. 그들은 역에서 택시를 타고 콘월의 먼 도로를 따라서 화강암 오두막들과 폐기된 고풍스러운 주석공장을 지나 8마일을 달려갔다. 그 집의 우편주소에 적힌 마을에 이르러 마을을 통과하고 그 높은 둑에서 갑자기 나타난 좁은 길을 따라 나아가다가 절벽가의 탁 트인 목초지에 들어서자, 하늘 높이 구름이 재빨리 흘러가고 바닷새가 머리 위에서 빙빙 돌고, 발치의 풀밭은 바람에 나부끼는 야생화들로 활기차게 흔들리고, 공기 중에 짠 냄새가 배어 있고, 저 밑에서는 대서양이 바위에 부딪쳐 포효하고, 중경에서는 남색 물결이 뒹굴며 흰 포말을 일으키고, 그 너머에 수평선이 잔잔한 호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 그 집이 있었다.〉
이와 달리 에벌린 워의 단편소설 「전술 훈련」에서 발췌한 산문은 선명하고 불순물이나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말을 억제하고, 과시적이지 않습니다. 가령 “그 집의 우편주소에 적힌 마을”에서부터 “수평선이 잔잔한 호를 이루고 있었다.”까지 꽤 많은 종속절을 통해 한 문장을 이끌어가면서도 긴장감이나 기교를 전혀 느낄 수 없게 하는 솜씨를 의식하지 않는 듯합니다. 구문과 풍경이 각각 만들어내는 확장감은 “여기 그 집이 있었다.”는 간결한 문장과 대조를 이룹니다. 이 짧은 문장은 스토리와 그것이 전달되는 방식의 중단을 알려주지요. “대체로 불편한 기차 여행”은 유쾌하게 빈정대는 기미를 드러냅니다. “고풍스러운”은 좀 지나친 형용사이지만, 그 행의 균형 잡힌 운율은 대단히 경탄스럽지요. 발췌문 전체에 조용한 가운데 효율적인 분위기가 감돕니다. 신속히 솜씨 좋은 몇 번의 필치로 풍경을 그려내는데, 너무 많은 세부 묘사로 텍스트를 어수선하게 하지 않으면서 생동감이 넘치게 묘사합니다. 154)
〈내 뒤의 운전자는 어깨에 봉을 넣은 옷과 올가미 같은 콧수염 때문에 전시용 마네킹처럼 보였다. 지붕이 접히는 그의 차는 오로지, 눈에 보이지 않는 고요한 실크 밧줄로 초라한 우리 차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 같았다. 광택이 도는 그의 멋진 기계는 우리 차보다 몇 배나 힘이 좋았기에 나는 속도를 내서 그를 따돌리려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O lente currite noctis equi! 오, 부드럽게 달려라, 악몽이여! 우리는 긴 비탈길을 올랐고 다시 내리막길을 굴러 내려갔고, 제한 속도에 주의했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아이들을 봐주었고 커브 길의 노란 방패 위에서 꿈틀거리는 검은 곡선들을 더 크게 돌아 재현했다. 우리가 어떻게, 어디를 달리든 간에, 마법에 걸린 사이 공간은 온전히, 정확하게, 신기루처럼 미끄러져 내려갔다. 마법 융단에 상응하는 도로였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에 나오는 이 문단에서 미국의 고속도로를 운전하는 일상적 행위와 그것을 묘사하는 점잖고 격조 높은 언어(“눈에 보이지 않는 고요한 실크 밧줄”, “광택이 도는 그의 멋진 기계”)는 익살스럽게 괴리되어 있습니다. 이 문장은 점잔 빼는 문체를 구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우아한 척하거나 지나치게 세련된 문체를 뜻합니다. 하지만 이 단락이 그런 문체를 무리 없이 잘 구사하는 까닭은, 그런 문체가 약간 재미있기도 하고, 풍자적으로 그 자체를 의식하고 있기도 하고, 또한 화자가 중년의 욕정을 느낀 십대의 소녀를 사실상 납치해서 차에 태워가면서 자신이 처한 약간 추접스러운 궁지를 상쇄해보려는 절실한 방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극히 정교하고 약간 점잔 빼는 문학적 언어는 사실 이 소설의 교양 있고 구식 인물인 화자, 험버트 험버트의 속성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와 그를 둘러싼 환경의 갈등이 산문 문체에 반영되는 것이지요. 155-6)
- 시의 언어: 감상적 고백 vs. 정제된 상상력
〈풍부한 물줄기가 등심초 꽃에 스며들고, / 무성하게 자란 풀이 여행자의 발을 그물로 잡고, / 젊은 태양의 흐릿하게 신선한 불꽃이 붉게 물든다, / 이파리에서 꽃으로, 꽃에서 열매로. / 열매와 이파리는 황금과 불처럼 타오르고, / 칠현금 너머로 보리피리 소리가 울리고, / 발굽이 박힌 사티로스의 발꿈치가 / 밤나무 밑동의 밤껍질을 짓밟는다.〉
앨저넌 찰스 스윈번의 『캘리던의 애틀랜타』에 나오는 이 시에는 숨 가쁘게 하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어느 하나도 아주 선명하게 보지 않는 데서 비롯됩니다. 이 시행은 시각적 흐릿함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지요. 모든 것이 너무나 달콤하고, 너무나 서정적이고, 너무나 질릴 정도로 감상적입니다. 모든 것이 음향 효과를 위해 가차 없이 희생되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정확하게 묘사되지 않습니다. 이 시는 반복과 두운으로 인해 흐름이 막혀 있고, 그것은 “젊은 태양의 흐릿하게 신선한 불꽃이 붉게 물든다.”에서 부조리함의 극치에 이릅니다. 묘사는 대체로 낭랑한 음악적 조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모든 구절은 “시적”인 효과를 의식합니다. 어조는 너무나 열광적이고, 언어는 너무나 단조롭습니다. 흐릿한 광택이 표면에 감돌기는 하지만 그 밑에는 부서지기 쉬운 시행이 존재합니다. 현실의 돌풍이 조금만 일어도 이 부서지기 쉬운 문학 창조물은 땅으로 무너져 내리겠지요. 160)
〈하얀 꽃, / 밀랍, 비취, 줄 없는 마노의 꽃, / 얼음 표면에 / 연선홍색 그림자가 드리운 꽃. / 온 정원에서 그런 꽃이 어디 있지? / 별들이 라일락 이파리 사이로 모여들어 / 너를 바라본다. / 낮게 걸린 달이 너를 은빛으로 환히 비춘다.〉
스윈번의 시를 에이미 로웰의 시 「풍향계가 남쪽을 가리키네」와 대조해봅시다. 여기서 시인의 눈은 그 대상을 한결같이 응시합니다. 이 시행에는 경이로움과 경탄이 울려 퍼지지만 그런 감정은 정밀한 묘사를 위해 억제됩니다. “별들이 라일락 이파리 사이로 모여들어 / 너를 바라본다.”에서는 상상력의 비약이 약간 허용되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상상력이 실제적인 것에 종속됩니다. “낮게 걸린 달이 너를 은빛으로 환히 비춘다.”에서는 마치 달이 꽃에 경의를 표하는 듯이 들리는데, 이것은 상상에 의한 표현이라 하더라도, 사실의 진술이기도 합니다. 스윈번의 시는 최면성의 반복적 리듬으로 가득하고 음절이 너무 많은 구절들을 연결한 반면, 로웰의 리듬은 간결하고 억제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언어는 제어되어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그녀는 꽃의 아름다움에 동요되어도 냉정함을 잃지 않습니다. 스윈번의 시행은 열광적으로 내달리는 반면, 로웰은 모든 구절을 따져보고 균형을 맞춥니다. 1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