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물·동맹 - 행위자네트워크 이론과 테크노사이언스
브루노 라투르 외 지음, 홍성욱 엮음 / 이음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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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행위네트워크 이론: 불확실하고 변화하는 수상한 사물에 주목하라 (홍성욱)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은 우리가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래프, 설계도, 표본, 표준, 기관, 병균과 같은 '비인간'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형성되는 네트워크에 주목한다. 네트워크의 형성이 '번역(translation)'이라고 불리는 과정이다." "그렇지만 이 과정은 거의 항상 불분명하고 쉽지 않다. 네트워크의 형성을 특징짓는 여러 단계 중에 비인간을 '길들이는' 것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우리가 과학기술이라 부르는 것이다. 과학기술, 혹은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의 용어로 테크노사이언스(Technoscience)는 비인간을 우리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바꾸어주는 인간의 활동이다. 더 많은 행위자들을 포함하고 더 오래 지속되는 네트워크를 건설한 자가 그만큼의 권력을 갖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과학기술은 권력을 생성하는 데, 따라서 권력의 속성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다."(7-8)


프롤로그 


제1장 7가지 테제로 이해하는 ANT(홍성욱) 


# 7가지 테제

1. ANT는 경계넘기를 꾀한다 : ANT는 사회(주관적·성찰적)/자연(객관적·사실적)의 구분은 물론, 이러한 구분에서 파생되는 가치/사실, 주관성/객관성과 같은 경계도 거부한다.

2. ANT는 비인간(nonhuman)에 적극적 역할을 부여한다 : 비인간은 인간과 마찬가지 행위자(actor)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행위를 바꾸는 것처럼, 비인간도 우리 인간의 행위를 바꿀 수 있다는 의미의 행위능력(agency)을 가지고 있다.

3. ANT의 행위자는 곧 네트워크(network)이다 : 나는 나를 만드는 숱한 비인간 행위자들과 연결되어 있다. 나의 행위능력이란 나와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는 숱한 행위자들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 '관계적 효과'로 볼 수 있다.

4. 네트워크 건설 과정이 번역(translation)이며, 번역을 이해하는 것이 ANT의 핵심이다 : 행위자들의 네트워크는 역동적이고, 소멸되기 쉬우며, 이종적이다. 네트워크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자신의 특성을 재정의한다. 따라서 번역, 즉 네트워크의 건설은 결과가 아니라 끝없는 과정이며,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성공적인 번역 과정은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5. 네트워크를 잘 기술(description)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이론이다 : ANT는 이론(Theory)이라 불린다. 그렇지만 ANT 이론에는 잘 짜여진 체계가 없다. ANT는 성공했거나 실패한 네트워크 사례에 대한 역사적·인류학적 연구를 중시하는데, 실제로 ANT는 사례에 대한 경험적 연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6. ANT는 권력(power)의 기원과 효과에 대해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한다 : 인간은 다양한 비인간을 어떻게 조직하고 통제하는가에 따라서 더 큰 권력을 가질 수 있다. 권력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이해하면 그것을 어떻게 재분배할 것인가를 모색하는 데 도움이 된다.

7. ANT의 '사물의 정치학'은 민주주의를 위해 열려 있다 : 이 세상이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잡종적인 네트워크로 만들어져 있음을 인식하고, 그것이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의 상호작용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인정하면, 그러한 실천 속에서 대안 네트워크의 가능성이 찾아진다.


제1부 ANT 해부하기 


제2장 ANT에 대한 노트: 질서 짓기, 전략, 이질성에 대하여(존 로) 


"왜 우리는 행위자나 기관 조직 뒤에 존재하는 네트워크를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까.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텔레비전은 비교적 단순한 하나의 물체로 인식된다. 하지만 그것이 고장나면 사람들은 비로소 텔레비전이 전자부품과 인간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네트워크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건강한 사람에게는 자신 내부의 다양한 신진대사가 잘 인식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픈 사람, 혹은 의사들에게 신체는 인간적·의학적·약학적 과정들이 어우러진 복잡한 네트워크이다." "동어반복처럼 들리겠지만, 어떤 행위자가 단일 개체처럼 보이고 네트워크처럼 보이지 않는 까닭은 단순화에 있다. 모든 현상은 이종적인 네트워크의 산물이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세분화된 네트워크를 직접 대하지는 않는다." "ANT 이론가들은 이러한 불안정하고 가변적인 단순화를 결절(puntualization)이라고 부르며, 이러한 규칙화는 사회를 이루는 네트워크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이다."(47-8)


"결절은 과정이지 단번에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ANT에서 사회 구조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사회 구조는 건물의 뼈대처럼 계속 굳건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 과정 속에서 되풀이되고 재생산되는 갈등의 장에 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ANT는 일반적 의미의 다원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ANT는 힘이나 질서의 중심이 여러 개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ANT는 권력이 관계적이고 분배적 맥락에서 생성되는 것이지, 완성된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고전 사회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질서와 권력은 다툼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ANT에서는 질서를 향한 갈등에 대한 분석이 매우 중요하다. ANT의 목표는 규칙성, 사회적 조화, 질서와 저항의 과정들에 대해 연구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도구, 행위자, 기관, 조직 등과 같이 질서를 생성하는 번역의 과정을 연구하는 것이다. 즉 번역은 하나(행위자)가 다른 하나(네트워크)를 대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동사이다."(48-9)


제3장 번역의 사회학의 몇 가지 요소들: 가리비와 생브리외 만의 어부들 길들이기(미셸 칼롱) 


"세 명의 연구원이 구성한 질문과 그들이 제공한 기록을 보면 가리비, 생브리외 만의 어부 그리고 과학자 동료라는 다른 세 행위자들이 이야기에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연구원의 논문에서 그들이 전개한 주장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만약 가리비가 살아남기를 원한다면(이런 충동을 어떠한 메커니즘으로 설명하든지 상관없이), 만약 과학자 동료들이 이 주제에 관한 지식을 향상시키고자 한다면(그들의 동기가 무엇이든지 간에), 만약 어부들이 그들의 장기적 경제 이익을 보존하고 싶어한다면(그들의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렇다면 그들은 ①'어떻게 가리비가 부착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알아야만 하고, ②이 질문을 둘러싼 그들의 동맹이 그들 각각에게 이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그들의 전체 계획은 가리비의 부착이라는 질문 주변을 맴돌고 있다. 이 행위자들에게 선택은 분명하다. 목표를 바꾸든지, 또는 유생이 부착하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결과를 얻어내야 할 필요성을 인정하든지."(69-71)


"번역의 개념은 치환과 변형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문제제기 단계에서의 치환은 어부들에게 개인의 단기적 이해를 쫓는 대신 연구원의 연구를 따르기 위해 그들의 우선적인 문제와 계획의 초점을 바꿀 것을 권유했다. 관심끌기 단계에서 치환은 해저로 떨어지거나 해류에 떠밀리는 유생(어린 가리비)이 그물에 걸릴 때 이루어졌다. 상호 양보를 통해 동의가 얻어지는 등록하기 단계 동안의 치환은 유생을 더 효율적으로 포획하기 위해 새로운 위치로 옮기고, 유생 또한 연구원을 유생들의 영역으로 유인하는 일이었다. 동원하기 단계 동안의 필수적인 치환은 유생을 수집기에 부착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결국, 최종 단계의 치환은 불일치의 치환으로, 어부는 방벽에 잠입하고 연구원을 따르기를 거절하면서 가리비 보호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일련의 예측할 수 없는 치환에 힘입어, 이 모든 과정은 모든 행위자들을 세 연구원과 그들의 개발 계획을 지나쳐가도록 이끌어 여러 가지 변태와 변형의 결과를 낳게 한 번역이었다."(92)


"번역하는 것은 또한 다른 이들이 말하는 것과 원하는 것, 왜 그들이 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그들이 서로 어떻게 연합하는지를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대변인으로 세우는 것이다. 세 연구원은 가리비, 어부 그리고 과학자 공동체를 대신하여 이야기한다. 처음에 이 세 가지 우주는 분리되어 있었고, 서로 의사소통할 어떤 방법도 갖고 있지 못했다. 마지막에는 확실성의 담론이 그들을 통합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을 의미가 명료한 방식으로 서로 관계 맺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다양한 종류의 치환과 변형, 협상, 그리고 여기에 수반된 조정이 없었다면 이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번역의 레퍼토리는 갖가지 사회적·자연적 실체들을 같이 끊임없이 혼합하는 복잡한 과정의 대칭적이고 관용적인 묘사를 제공한다. 그것은 또한, 소수가 그들이 동원한 사회적·자연적 세계들의 수많은 조용한 행위자들을 대변하고 대표할 권리를 어떻게 얻는지에 대한 설명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93-4)


제4장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에 관하여: 약간의 해명, 그리고 문제를 더 복잡하기 만들기 (브루노 라투르)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은 사회적 법칙이나 자연적 법칙과 같은 보편 법칙으로부터 출발하여 국지적 우연성을 제거하거나 보호해야 할 기묘한 특수성으로 파악하는 대신, 환원할 수 없고 비교할 수 없으며 연결되지 않은 국지성에서 출발하는데, 이러한 국지성은 가끔 많은 비용을 치르면서 일시적으로 비교 가능한 결합들로 귀결되기도 한다. 이러한 배경/전경 뒤집기를 통해 ANT는 무질서로부터의 질서나 카오스 철학과 약간의 유사성을 보이며, 민속방법론(ethnomethodology)과 많은 실질적인 연관을 갖는다. 보편성이나 질서는 규칙이 아니라 설명되어야 할 예외이다. 구역들, 우연성들, 군집들은 육지에 점으로 찍혀 있는 호수라기보다는 바다 위에 떠 있는 군도와 더 유사하다. 덜 유비적으로 말한다면, 보편주의자들은 모든 표면을 질서나 우연성으로 채워야 하는 반면에 ANT는 국소적인 질서의 꾸러미들 사이나 이런 우연성들을 연결하는 실조각들 사이를 채우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00-1)


# 네트워크들의 공통된 성질들

1. 멀고 가까움 : 네트워크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거리의 횡포' 또는 근접성을 제거할 수 있다. 가까이 있지만 연결되지 않은 요소들은 무한히 멀어질 수 있고, 매우 멀지만 연결되어 있는 요소들은 오히려 가까워질 수 있다.

2. 크고 작음 : 거시/미시 구분 모델은 사회가 마치 실제로 상층부와 하층부로 이루어진 것처럼 위계 관계에 얽매여 있다. 한 네트워크는 결코 다른 네트워크보다 더 큰 것이 아니라, 단지 더 길거나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3. 내부와 외부 : 네트워크는 모두 내부와 외부가 없는 경계이다. 질문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두 요소 사이에 연결이 만들어졌는가 아닌가 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연결들 사이의 공간을 채우는 데 연연할 필요가 없다.


제5장 인간과 기계에 대한 '발칙한' 생각: ANT의 기술론(홍성욱) 


"엔지니어를 포함해서 기술에 대해 낙관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기술 그 자체는 가치중립적이지만 기술을 누가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이를 선하게도, 혹은 악하게도 쓸 수 있다고 본다. 라디오는 가치중립적이지만, 그 기술이 나치당에 의한 선전도구로 사용되었을 때에는 나쁜 용도로,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 조직의 메시지 전달용으로 사용되었을 때에는 좋은 용도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이러한 생각이 현대 기술의 복잡한 정치성을 왜곡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비판자들은 핵무기와 같은 기술은 어떻게 사용되어도 좋게 사용될 수 없다는 점을 반례로 지적한다." "이렇게 기술의 본질적인 정치성을 강조한 기술철학자 랭던 위너는, 흑인들이 주로 타던 버스가 통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존스비치(Jones Beach)로 향하는 고속도로 위의 고가를 일부러 낮게 설치한 뉴욕 건축가 로버트 모제스의 설계가 기술의 정치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주장한다."(139)


"그런데 기술의 정치성을 기술의 네트워크가 만들어낸 효과로 인식하면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다. 가령 뉴욕의 건축가 로버트 모제스가 인종차별주의의 영향을 받아 흑인들의 버스가 통과하지 못하도록 고속도를 낮게 설계했다고 해도, 흑인들이 수십 년 동안 이 문제 때문에 존스비치에 접근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상당한 논리적 비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모제스가 이를 설계했던 1930년대와 현재의 사이에는 흑인들의 권리가 현격하게 향상된 1960년대라는 문화혁명의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모제스는 자신이 낮게 설계한 고가도로가 20세기 중엽 이후에는 흑인들의 버스가 아닌 현대 물류의 주역 컨테이너를 막을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모제스의 고속도로는 이제 1930년대와는 다른 인간-비인간의 네트워크 속에 위치하며, 따라서 1930년대와는 다른 역할과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기술을 둘러싼 네트워크가 달라지면, 그 기술의 정체성도 변하는 것이다."(139-41)


"우리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기술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기술의 속성을 이해하려고 기술에 대해 연구하지만, 기술이 항상 우리가 계획한 대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다시 기술과 인간 모두가 네트워크이기 때문에 그렇다. 기계 부품들이 모여서 기술을 만드는데, 어떤 경우에는 새로운 부품을 하나 더함으로써 전혀 예상치 않은 결과를 얻곤 한다. 또 기술은 기존의 기술-인간의 네트워크 속에 편입되어 그 속에서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데, 이 네트워크가 새로 도입된 기술에 의해서 변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기술의 효과, 용도, 의미를 정확하게 예상하는 것이 어렵다. 그러므로 창의적인 혁신가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예상하는 예언자의 능력이 아니라, 기술의 궤적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의외의 결과에 당황하지 않고 새로운 네트워크의 형성 과정을 예의 주시하면서 그 속에서 과거에는 없던 인간-기술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기술을 새롭게 위치시키는 능력이다."(142-3)


"기술이 행위능력을 갖는다는 것은 기술이 다른 기술들, 인간들 속의 네트워크에 위치해서 서로를 바꾸는 식의 영향력을 주고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술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대신하기도 하지만, (인간과 결합함으로써)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기도 한다. 도시의 범죄를 줄이는 것은 경찰을 늘려서 치안을 강화하는 방식으로도 가능하지만, 공공 디자인을 개량함으로써도 가능하다. 그런데 범죄 예방 외에도 현저하게 범죄를 줄이는 데 성공한 도시 디자인을 마주치는 것은 무장 경찰과 마주치는 것과는 또 다른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사례에서 보듯이 기술의 행위능력에 주목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을 기술에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인간의 고유한 영역인 윤리적 문제에 개입할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만 윤리의 '목적'(end)이 적용되고 대상에게는 '수단'(means)만이 부여되는 근대 윤리학의 골격은 윤리학과 기술이 혼합되어 버리는 상황에서는 그 의미가 약화되기 때문이다."(150-1)


제2부 ANT 확장하기 


제6장 경제 행위자 조합하기: 헤지펀드의 아장스망 (이언 하디& 도널드 맥켄지) 


"칼롱의 분석에서는 경제 행위자가 개인적인 존재가 아니며, '제도, 규약, 개인관계 또는 집단 내에 배태된' 존재조차도 아니다. 칼롱에게 있어 행위자란 '인간의 몸체뿐 아니라 보철물, 기구, 설비, 기술장치, 알고리즘 등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달리 표현한다면 (언어 유희를 수반한) 아장스망(agencement)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아장세(agencer)는 배열하거나 서로 맞추는 일을 하며, 아장스망은 조립, 정리, 배열 또는 배치를 의미하게 된다." "아장스망에 대한 언어유희의 또 다른 측면은 아장스(agence)와 에이전시(agency)이다(여기서 '아장스망'은 일반적인 영어의 '배치assemblage'와 같은 표현과는 달리 다소 수동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행위자들은 본래적인 성질이나 고정된 존재를 갖지 않는다. 그들의 특질은 복수의 아장스망으로 만들어진 것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따라서 〈행위능력을 (재)형성한다는 것은 그것을 구성하는 사회기술적인 복수의 아장스망을 (재)형성한다는 의미이다.〉"(158-9)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행위가 항상 안정성을 촉진하지는 않는다. 아장스망의 구성과 형성으로 인한 또 다른 효과는 감염의 위험이다. 예컨대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들로 금융위기가 확산되는 것을 들 수 있는데, 여기에는 무역을 거의 하지 않거나 금융위기 발생국과 무관한 국가들도 포함된다." "결과적으로 다수의 국가들을 대상으로 투자를 확대하는 행위자들에게 있어 최적의 전략은, 다른 행위자들의 거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은 놀랄 만한 상호연결을 창출할 수 있다." "이때 행위능력(agency)은 물론 공통적으로 트레이더와 같은 개인에게 귀착되지만 또한 흔히 '높은 수준의' 실체들에도 귀착된다. 예컨대, 우리가 관찰한 헤지펀드는 하나의 법적인 실치이고, 계약법은 행위능력을 펀드에 귀착시킨다." "그럼에도 트레이더들에 대한 보상은 즉각적인 보너스의 형태로 온다. 그것이 지독한 시샘과 격렬한 분쟁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흔한데, 이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188-90)


제7장 위험의 실재성: 독일의 유전자 기술(로즈메리 로빈스) 


"통상 위험은 그것이 자연적으로 결정된다는 '실재론적' 위험과 사회제도 속에서 형성된다는 '상대주의적' 위험으로 나누어진다. 실재론적 위험은 위험을 자연적 대상으로 간주함으로써 실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반면 상대주의적 위험은 위험을 사회제도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위험을 사회제도에 따라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둘 다 위험이 추상적 실체라는 데 있어서는 의견을 같이 한다. 내 생각은 위험이란 물질성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위험은 연결망이 유지되는 한 현실 속에서 계속해서 (재)발생한다. 내 생각에 위험은 단일한 것도 아니고 복수적인 것도 아닌 다중적인 것이다. 여기서 위험을 평가하는 일반화는 추상적인 일반화가 아니라 인슐린 시설과 같은 미시적 세계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배열, 혹은 배열과정과 우연히 연계된 일반화로 이해해야 한다. 위험을 이처럼 물질적으로 우연적인 실재로 이해하게 되면 실재론적 위험과 상대주의적 위험을 구별해야 할 필요성이 사라진다."(196)


제8장 ANT관점에서 본 한국 최초 우주인 논쟁 : PUS와의 만남 (안형준) 


"ANT 방법론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행위자 따르기'를 통해 우주인 배출사업에 참여한 각 행위자의 입장을 사회적 맥락 안에서 면밀히 분석할 수 있다. 〈항우연: 차후 이루어질 항공우주개발 사업에 대한 국민적 정당성 확보, 과학계: 스타과학자 배출을 통해 이공계 위기를 타파할 좋은 기회, 스폰서 기업: 자사와 자사의 제품을 소비자에게 홍보할 수 있는 기회, 공군: '항공우주군 수립'이라는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기회, 언론: 주목도 높은 뉴스와 특종 공급원, 대중: 한국최초우주인에 대한 자긍심 고취〉 항우연은 이런 중층의 네트워크에서 '의무통과점'이라는 전략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각 행위자들에게 이해관계와 역할을 부여해 동맹을 형성하고, 그 행위자들이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분배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각 행위자들은 독자성을 갖고 네트워크를 형성하거나 강화해나갔다. 하지만 행위자의 배반이나 예상치 못한 특성 때문에 생겨난 돌발상황으로 네트워크가 와해되기도 했다."(236-7)


"항우연이라는 행위자는 우주인 배출사업을 진행하면서 '실험'이라는 수사를 동원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강화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ISS의 실험 공간에서 이소연과 실험장치 사이의 네트워크와 실험을 준비하는 지상의 과학자들 사이의 네트워크가 형성됐다. 그 결과 ISS에서 이루어진 실험도 모두 성공적으로 수행해 몇 편의 논문을 내고 유인우주실험의 경험과 노하우를 쌓는 등 나름의 성과를 거뒀다. 우주인선발프로그램 참여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우주로245' 같은, 우주인 사업을 적극 지지하는 행위자네트워크가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인터넷게시판을 중심으로 이 사업에 대한 반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더 큰 규모의 대중 네트워크가 차츰 형성됐다. 이들에게 이소연은, '실험 임무'가 아니라 '우주체험'과 동맹을 맺은 의무통과점으로 자리매김했는데, 항우연이 만든 '실험전문가 이소연'의 블랙박스는 해체됐고, 대중에 의해 '우주관광객 이소연'으로 다시 블랙박스화된 셈이다."(249)


제9장 현실정치에서 물정치로: 혹은 어떻게 사물을 공공적인 것으로 만드는가? (브루노 라투르) 


"지금까지의 정치철학자들이 강력한 객체 회피적 경향의 희생물이 되어왔다고 평가하는 것은 그다지 불공정하지 않다. 홉스에서 롤즈까지 그리고 루소에서 하버마스에 이르기까지, 많은 논의들이 적절한 집단(당)을 구성하고, 그것을 정당화하고, 그 대표성의 정도를 파악하고, 이상적인 연설 조건을 발견해내고, 합법적인 동의를 포착하고, 좋은 헌법을 쓰기 위해서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라는 차원, 즉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객체의 영역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원이 가지는 신성함과는 달리, '공화국'(res publica)은 그다지 많은 사물들(res, 즉 things)을 포함하지 않는다. 정당화하고 합법화하는 과정은 중요하지만, 이는 소집을 위한 조건 중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반은 문제 그 자체 속에, 문제가 되는 상황 그 자체에, 공중(public)을 만드는 '물'(res) 속에 있다. 그것들은 적절한 모임을 위해 재현되고, 정당화되고 합법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264)


"'객체 지향적 민주주의'라는 것은 이 편향을 고치려고 시도한다. 즉, 실제적으로는 항상 혼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으로는 분리된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말의 두 가지 의미를 통합하는 것이다. 첫 번째로, 법학과 정치학의 영역에서 잘 알려져 있듯이, 재현은 문제 주위로 정당한 사람들을 모으는 것을 지칭한다. 여기에서 적법한 절차가 뒤따르는 한 재현(즉, 대표)은 정당한 것이 된다. 두 번째는, 과학과 기술의 영역에서 잘 알려져 있듯이, 관심의 대상인 객체가, 모인 사람들의 눈과 귀에 어떻게 인지되는지를 표현 혹은 재-현(re-presentation)하는 것이다. … 문제를 재현하는 첫 번째 양상은 의회, 모임, 집회, 위원회 등으로 불리는 장소나 조직과 관련된 것이다. 두 번째 양상은 이러한 장소에 특정한 주제, 관심, 이슈, 개념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양상은 동시에 다루어져야 한다. 즉, 누가 관련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무엇이 고려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264-5)


"객체로 가득 차 있지만, 우리의 '정치'라는 개념 안에 그다지 잘 통합되지 않는 상황은 로렌제티의 유명한 프레스코 화[도시/시골에서의 좋은 정부/나쁜 정부의 효과]에서 보다 잘 드러난다. 많은 학자들이 이 그림에서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를 재현하는 상징의 복잡한 의미를 해석해왔고, 그 복잡한 계보를 추적해왔다. 하지만 동시대의 눈에 가장 뚜렷한 인상을 남기는 것은 도시, 풍경, 동물, 상인, 춤꾼, 그리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빛과 공간이다. 나쁜 정부는 단순히 혼란의 악마적 형상을 통해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색조와 파괴된 도시, 황폐한 풍경과 헐떡이는 사람들로 묘사된다. 좋은 도시는 단순히 미덕과 질서의 상징을 통해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투명한 색조와 단단한 건축물, 조화로운 풍경과 다양한 동물들, 원활한 인간관계와 풍요로운 생활을 통해 그려진다. 프레스코 화는 상징을 위한 단순한 장식을 넘어, 우리에게 좋음과 나쁨의 미묘한 생태학에 보다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267)


"우리가 '사물'(Ding)이라는 단어를 부활시키고, '현실정치'(Realpolitik)라는 단어를 '물정치'(Dingpolitik)라는 단어로 교체하려는 이유는 객관성이라는 값싼 개념으로부터 값비싼 증명으로의 변화를 강조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 객체는 너무 오랫동안 사실의 문제로 여겨졌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객체에서 사물로의 변환과 관련된 좋은 예가 바로 2003년 2월에 벌어진 콜롬비아 호 폭발이다. '어셈블리 드로인'(조립도면)이란 엔지니어들이 청사진의 발명을 표현하는 말이다. 하지만 콜롬비아 호의 잔해들을 커다란 전당에 모아놓고, 특별 위원회에서 온 조사관들이 기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연구하는 상황에서는 어셈블리(조립)라는 단어가 어딘가 기묘하게 들린다. 이는 고도로 복합적이고 기술적인 객체의 '분해도'(exploded view)['폭발한 관점'이라는 말도 되는]를 새롭게 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폭발한 것은 그것이 사물이 되었을 때 그것들이 어떤 객체인가를 이해하는 우리의 능력이다."(272-3, 277-8)


# 객체가 사물이 되었다는 말은 '사실의 문제'가 '복잡한 관계성'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뜻한다.


"월터 리프먼과 그에 대한 철학자 존 듀이의 논평에 의하면, 대부분의 유럽 정치철학은 몸과 국가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것들은 다중의 상반된 의지를 단일한 일반 의지로 재현하려는, 실현 불가능한 의회를 조직하려 했다. 이러한 기획에는 현실성이 치명적일 정도로 결여되어 있다. 전체적이고 완결적이며 투명한 경향에 의해 착안된 이러한 재현은 충실할 수가 없다." "더 많은 다양성을 흡수할 수 있는 장치(듀이 시대의 '위대한 사회' 혹은 우리가 '세계화'라고 부르는 것)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매우 특수하고 새로운 방식의 재현을 고안해내야만 한다. 이것이 통일성과 전체성을 꿈꾸는 이들을 실망시키기에, 리프만은 이를 유령이라고 칭했다. 신기하게도 이것은 근본주의의 유령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유일한 정신이며, 착한 유령이다." "미국의 철학자들은 이러한 전통을 실용주의라고 불렀다. 프라그마타(pragmata), 그리스어로 사물(things), 이것이 진정한 (그리고 값비싼) 현실주의인 것이다!"(296-7)


에필로그 


제10장 '두 문화'와 ANT의 관계적 존재론(김환석) 


"1920~30년대에 칼 만하임은 지식사회학의 기획을 그 선구자인 마르크스, 뒤르켐, 베버의 유산으로부터 확장시켜, 모든 지식의 존재구속성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제창하였다. 하지만 만하임은 다른 지식들과 달리 과학의 내용(즉 과학의 이론, 사실, 방법 등)은 보편합리성을 지니므로 지식사회학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이후 로버트 머턴이 과학의 사회적 구조에 초점을 둔 과학사회학을 구축하였으나 그 역시 과학의 내용은 블랙박스로 남겨놓았다." "토마스 쿤이 1962년에 발표한 『과학혁명의 구조』는 과학철학과 과학사에 큰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의도하지 않게 과학지식사회학(sociology of scientific knowledge, SSK)이라는 형태로 새로운 과학사회학이 출현하는 것을 돕는 역할을 하였다. 쿤의 패러다임 개념은 과학에서 관찰의 이론의존성을 지적한 것인데, 이는 과학이론의 선택이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관찰 사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실증주의적 과학관을 근본부터 뒤흔들어놓았다."(313-4)


"이처럼 근대세계가 중대한 위기에 당면하여 전환을 모색하게 된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두 문화에 대한 도전들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도전들 가운데 의식적으로 두 문화의 극복을 지향하는 대표적 분야가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STS)이라는 학제적 분야이다." "과학과 비과학을 철저히 분리하고자 했던 실증주의적 과학관에 대항하여 STS는 둘 사이의 구분이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거나 분명하지 않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즉 과학은 순수하게 자연 실재의 합리적 반영이고 인문학은 비합리성이 내포된 사회적 요인의 산물이라는 두 문화의 비대칭적 이분법이 신화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STS는 구체적인 경험적 연구를 통해 보이려고 했던 것이다. STS의 견해에 따르면, 인문학을 포함한 다른 지식들과 마찬가지로 과학 역시 사회적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며 따라서 지식의 내용에 사회문화적 요인들이 구성요소로서 포함된다고 했다."(308-9, 319-20)


"STS의 초기 흐름이었던 과학지식사회학(Sociology of Scientific Knowledge, SSK)의 문제의식은 인식론이었다. 지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즉 인간이 어떻게 세계에 대하여 알게(know)되는가에 대해 철학적 설명이 아니라 사회학적 설명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연구를 통하여 그들이 내린 결론은, 다른 지식들과 마찬가지로 과학은 인간의 상호작용 행위가 만든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것이었다. 즉 과학과 비과학 사이에 대칭성을 확립한 것인데, 그러한 대칭성은 사회를 설명의 근거로 삼았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었다. 다른 한편, STS의 후기 흐름을 주도하는 ANT의 주된 문제의식은 존재론이다. 그것은 지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느냐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했지만, 그 관심은 그러한 지식을 만드는 존재들은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발전하였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이른바 '자연'과 '사회'라는 실재가 세계 안에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두 학문영역이 분리되어야 할 근본적 이유란 없는 것이다."(321-2)


"라투르는 ANT가 생태적 위기 문제에 주는 함의에 대해 더 본격적인 성찰을 펼침으로써 일종의 새로운 정치생태학으로 그의 이론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는 '자연'이라는 범주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와 더불어 만들어진 근대주의의 구성물이라면, 절대적 '자연' 개념에 의존하고 있는 현재의 만은 녹색운동들은 근대주의 기획을 변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명을 연장시킬 뿐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이러한 근대주의의 한계를 벗어나 현재 세계가 당면해 있는 생태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술과학이 마땅히 논쟁과 타협이라는 정치적 과정을 거쳐야 하며, 이를 통해 인간과 비인간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결합되는 새로운 공생의 실험이 필요하다고 그는 역설한다. 라투르는 생태적 위기의 시대에 요청되는 정치는 '과학'과 분리된 영역으로서의 근대적 정치와 같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과학(즉 비인간 행위자들)의 문제를 정치적 토론에 포함하는 새로운 정치라고 주장한다."(3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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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아우또노미아총서 20
브뤼노 라투르 지음, 홍철기 옮김 / 갈무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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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위기


"근대성은 어쨌든 시간의 흐름을 지칭한다. '근대적'이라는 형용사는 시간에 있어서 새로운 체제, 가속, 파열, 혁명을 지칭한다. '근대적'이라거나 '근대화', '근대성'이라는 말을 쓸 때에 우리는 그 반대말로, 낡아빠지고 정적인 과거를 지칭한다. 나아가 그 말은 언제나 고대인과 근대인이라는, 승자와 패자가 있는 싸움의 한복판으로 던져진다. '근대적'이라는 말은 따라서 이중적으로 비대칭적인데, 우선 시간의 규칙적인 흐름에 있어서의 단절을 지시하며 또한 정복자와 피정복자가 있는 전투를 가리킨다." "몇 걸음을 되짚어보자. 우리는 근대성의 정의를 다시 생각하고 탈근대성의 징후를 해석하여 왜 우리가 더 이상 지배와 해방이라는 두 가지 과제의 핵심사항에 헌신할 수 없는가를 이해해야만 한다." "이 글의 가설은 다음과 같은 것인데, '근대성'이라는 말이 두 가지의 완전히 다른 실천을 지시하고 있고, 이 두 가지 실천은 그 효과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구분되어야만 하지만 최근에 이것들이 혼동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40-1)


"실천의 첫 번째 집합은 '번역'translation인데 이는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존재들 간의 혼합, 즉 자연과 문화의 하이브리드들을 만들어낸다. 두 번째는 '정화'purification로서, 전적으로 구분되는 존재론적 지대를 창출하는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인간 존재들의 존재론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비-인간 존재들의 존재론적 지대이다. '번역'이 없다면 '정화'는 헛되고 무의미할 것이다. '정화'가 없다면 '번역'은 느려지고 제한되거나 심지어 불가능해질 것이다. '번역'은 내가 연결망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응하며, '정화'는 내가 근대적인 비판적 입장이라고 부르는 것에 상응한다. '번역'은 예를 들어 고층대기의 화학과 과학적, 산업적 전략, 그리고 국가 정상들의 관심사, 그리고 생태주의자들의 근심 모두를 단일한 연속적인 사슬로 연결시킬 것이다. '정화'는 언제나 거기에 있어 온 자연세계와, 예측가능하고 안정적인 이익과 이해관계가 있는 사회, 그리고 지시대상과 사회 모두로부터 독립적인 담론들 사이에 분할을 수립할 것이다."(41-2)


"우리가 번역과 정화, 두 가지의 실천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한 우리는 진정으로 근대인이다─우리의 비판적 기획이 저 아래에서 하이브리드들의 증식proliferation을 통해서만 발전할 수 있을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정화 작용과 혼성화 작용에 주목하기만 한다면 그 즉시 우리가 현재에 근대인임을 멈추게 되고 우리의 미래는 변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우리가 근대인이어 왔다는 사실도 중단되는데, 우리가 회고적으로 실천의 두 가지 집합이, 이제는 끝나가는 역사적 시기 안에서 이미 언제나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과거는 변화하기 시작한다. 결국 우리가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었다면 우리가 다른 자연-문화들에 대해 유지해온 고통스러운 관계 또한 변형되게 될 것이다. 상대주의, 지배, 제국주의, 허위의식, 제파 혼합주의syncretism─인류학자들이 '대분할'Great Divide이라는 느슨한 표현 하에 요약하는 모든 문제들─는 다르게 설명될 것이고, 그에 따라 비교 인류학을 변형시키게 될 것이다."(42-4)


# 하이브리드(hybrid), 혼성화(hybridization) : 하이브리드는 인간과 자연, 주체와 대상의 범주 사이에 존재하면서 양자 어느 쪽으로 간단하게 환원되지 않는 중간적인 존재, 혹은 행위자를 지칭한다.


2장 헌법


# 헌법(Constitution) : 근대성의 기본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으로 '구조'보다는 가변적이며 문화나 공유된 신념보다는 실재적이다. 세계를 통치하고 관리하는 부문을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인간과 비-인간으로 분할하고 그 분할 상태를 유지하면서 각각의 영역의 자율성과 권리를 보장한다는 의미에서 권력 분립(separation of powers)과 기본권 보장을 목적으로 하는 근대 입헌주의 헌법과 유비적인 관계에 있다.


"셰핀과 셰퍼의 책의 탁월함은 홉스의 과학 저작들에 대한 발굴의 성공에서, 그리고 보일의 정치 이론을 망각에서 구출한 데에서 기인한다. 비대칭성을 수립하면서, 보일에게는 과학을, 홉스에게는 정치이론을 나눠주는 대신에 셰핀과 셰퍼는 오히려 훌륭한 사분법의 윤곽을 제시한다. 보일에게는 자신의 과학과 정치이론이 있고, 홉스에게도 자신의 정치이론과 과학이 있다." "다행스럽게도 둘은 거의 모든 것에 대해 동의했다. 두 사람 다 군주, 의회, 그리고 유순하고 통일된 교회를 원했고, 모두 기계론 철학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러나 비록 두 사람이 철저한 합리주의자였지만 실험, 과학적 추론, 그리고 정치적 주장에서─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인 공기펌프로부터─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에 관해서는 의견을 달리했다.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인 두 사람 간의 불일치는 이들을 새로운 인류학을 위한 이상적인 실험 재료, 즉 완벽한 초파리로 만들었다."(57-9)


"보일은 의견doxa을 위해 명증한 추론의 확실성을 포기했다. 이 의견을 대중들의 허황된 상상력이 아닌 동료학자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한 새로운 기제였다. 보일은 자신의 업적을 논리나 수학, 수사학 등 위에 정초하지 않고 재판의 흉내를 내는parajuridical 은유에 기댔다." "역설적이게도 구성주의자들의 핵심 질문─사실은 실험실에서 완전히 구축되는 것인가?─은 바로 보일이 제기하고 품었던 문제이다. 그렇다. 사실들은 실제로 실험실의 새로운 기자재들 안에서, 그리고 공기 펌프라는 인위적인 중재자에 의해 구축된다. 가스통 바슐라르 식으로 말하면 '사실들이란 제조되는 것이다.'" "신이 사물들에 대해서 아는 것은, 그가 그 사물들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실들의 본질을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완벽하게 통제하는 상황 하에서 그 사실들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식을 사실들로 이루어진 도구화된 자연으로 제한하고, 원인들에 대한 해석을 제쳐놓는다는 전제 하에서 우리의 약점은 힘이 된다."(60-2)


"홉스는 보일의 증명의 연극을 거부한다. 홉스에게 주권자는 사회 계약에 의해 임명된 행위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주권자가 자기 마음대로 행위하면서 리바이어던을 해체하기 위해 기댈 수 있는 신법divine law이나 최고의 존재란 없다. 지식이 권력과 동일한, 이 새로운 체제에서 모든 것─주권자, 신, 물질, 그리고 다중─은 그에 상응하는 수준으로 축소된다. 홉스는 심지어 자신의 국가학이 초월성에 대해 탄원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기각한다. 그는 모든 그의 과학적인 결과물들에 대해 의견이나 관찰, 혹은 계시를 통해서가 아니라 수학적 증명, 즉 만인이 동의를 하도록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논증의 방법을 통해 도달한다." "유명한 사회계약조차도 공포에 질린 모든 시민들이 자연 상태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해 갑자기, 그리고 동시에 도달하는 계산의 합일 뿐이다. 바로 이것이 홉스의 일반화된 구성주의로서 이것은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구상된 것이다. 구성주의는 어떤 형태의 초월성에도 의지하지 않는다."(64-5)


"보일은 정치가 배제되어야 하는 정치 담론을 창조하였고, 반면 홉스는 실험 과학이 배제되어야만 하는 과학의 정치를 상상했다. 달리 말해서, 그들은 우리의 근대 세계를 발명하였다. 이러한 근대 세계에서 실험실을 매개로 한 사물들의 표상은 사회 계약을 매개로 한 시민들에 대한 대표로부터 영원히 분리된다. 따라서 과학의 정치에 대해 보일이 취한 입장을 과학사가들이 간과한 바로 그때 정치 철학자들이 홉스의 과학을 무시한 것은 단지 실수가 아니다. 그들 모두는 홉스와 보일의 시대 이래로 '이중적으로 봐야' 했고 비-인간의 표상과 인간의 대표 사이에, 그리고 사실의 작위성과 정치체Body Politic의 인위성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를 수립해서도 안 되었다. 대표와 표상이라는 말은 동일하지만 홉스와 보일 사이에 일어난 논쟁은 이 단어의 두 가지 의미 간의 유사성을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오늘날 우리가 더 이상 완전히 근대인은 아니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의미는 다시금 보다 가깝게 접근하고 있다."(82-3)


"(근대인들이 인정하는) 초월성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동원 가능하고 인간화할 수 있고, 사회화할 수 있는 것으로 유지된다. 매일매일 실험실과 표본들, 계산과 이윤의 중심부, 조사기관과 연구기관들은 사회집단들의 다양한 운명들과 자연을 뒤섞는다. 반대로 사회는 우리가 계속해서 건설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를 능가하고 우리를 지배하며 그 자체의 법률을 지니고 있고, 그래서 자연과 마찬가지로 초월적이다. 매일 실험실과 표본들, 계산과 이윤의 중심부, 조사기관과 연구기관들은 사회집단들의 자유의 한계를 규정하고 인간들의 관계를 누구도 만든 적이 없는 지속가능한 사물로 변형시킨다. 근대인의 비판적 힘은 이와 같은 이중적인 언어에 놓여있다. 근대인은 자연을 인간으로부터 무한히 떨어뜨려 놓는 동시에 사회적 관계의 핵심에서 자연을 동원한다. 또한 그들은 사회의 법률을 불가피하고, 필연적이며 절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동시에 자신들의 사회를 만들고 허물 자유를 갖는다."(104-5)


"누구도 근대인이었던 적은 없다. 근대성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근대 세계는 존재한 적도 없다. 이것은 회고적인 감정의 문제이며 우리 역사를 다시 읽는 문제이다. 나는 우리가 새로운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우리는 더 이상 탈-탈-탈근대주의자의 무분별한 비행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는 것,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훨신 더 정교하고 더욱 비판적이며, '의심의 시대'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결코 근대의 시대에 들어서기 시작한 적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와 같은 회고적인 태도는 밝혀내기보다는 배치하며, 제하기보다는 부가하고, 비난하기보다는 친밀해지고, 폭로하기보다는 분류하는데, 이를 나는 근대적이지 않은 것nonmodern으로 (혹은 비非근대적인amodern 것으로) 규정한다. 근대인의 헌법과 함께 그 헌법이 증식시키기를 거부하면서도 허용하는 모든 하이브리드를 동시에 고려할 때에 누구나 비근대인인 것이다."(128-9)


"근대 세계는 '그 가능성에 있어서는'in potentia 과거와 단절하는 총체적이고 비가역적 발명품이다. 마치 프랑스 혁명과 볼셰비키 혁명이 '그 가능성에 있어서는' 탄생하는 새로운 세계의 산파였던 것처럼. 그러나 연결망으로서 볼 때에 근대 세계는 혁명처럼 실천들의 작은 연장, 지식의 순환에 있어서의 약간의 가속, 사회들의 조그만 확장, 행위자들의 수의 미미한 증가, 과거의 믿음에 대한 약간의 변경 이상의 어떤 것도 거의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것들을 연결망으로 간주할 때 서구의 혁신은 여전히 인지 가능하고 중요한 것으로 남지만 대신에 더 이상 영웅담의 소재로 충분치 않다. 그 영웅담은 급진적인 단절과 돌이킬 수 없는 운명, 비가역적으로 운이 좋거나 나쁜 거대한 어떤 것이다. 반근대인들은 탈근대인들처럼 그들 상대방의 경기장을 받아들였다. 다른 경기장이 우리 앞에 열려 있다. 이는 비근대적 세계들의 장이다. 그것은 중기 왕국Middle Kingdom이며 중국만큼이나 광활하면서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130-1)


3장 혁명


"탈근대인들은 한편으로는 물질적인 것과 기술적인 것의 총체적 분리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발화주체의 언어게임을 받아들임으로써─따라서 근대적 헌법의 하반부를 망각함으로써─, 혹은 자유롭게 부유하는 연결망과 콜라주의 혼성적 성격 안에서만 즐거워한다는 점에서─이 경우에는 근대적 헌법의 상반부를 망각함으로써─, 자신들이 여전히 근대인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근대인은 언제나 정화작용뿐만 아니라 하이브리드의 광범위한 팽창을 개념화하기 위해서 비밀리에 중간적 존재들을 증식시켜왔다. 보일의 진공펌프나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도 보았듯이 과학은 언제나 공동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근대적 모순이란 이중적 모순, 즉 한편으로는 자연과 사회라는 헌법의 두 보장간의 모순이자 다른 한편으로 정화와 매개의 작용간의 모순이다.〉" "탈근대인은 실제로는 지금까지 긴장을 일으킨 원인이었던 주 동인을 확실히 치워버리고 근대주의를 종결시킨다."(162-4)


"탈근대인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뿐이다. 그들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정말로 종언을 고한 것이 아니라 종말들의 종말을 고했다─즉 종말을 고하는 방식들의 종말이자, 훨씬 더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비판들이 한층 더 정신없이 빠르게 교체되는 연속성에 이르는 이행 방식들의 종말이다." "'포스트모던주의자들postmods'에게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그들이 진정으로 이 종말을 확고히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지나치게 순진하지 않다는 점을 과시하기 위해 그들은 스스로 이 종말을 즐긴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보드리야르와 리오타르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그렇다. 그들에게서 우리가 기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보드리야르가 항변하듯이 그들을 이번 천 년이 끝날 때까지 잠들어 있게 놔두고 우리는 갈 길을 가도록 하자. 즉 우리의 발걸음을 다시 따라가면서 더 이상 앞으로는 나아가지 않도록 하자."(164-5)


"니체가 오래 전에 관찰한바, 근대인은 역사주의라는 질병을 앓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과거와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간직하고 모든 날짜를 기록하고자 한다. 그들이 더 많은 혁명을 축적할수록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아낄 수 있고, 그들이 자본화를 더 심화할수록 그들은 박물관마다 더 많은 것들을 전시하게 된다. 광적인 파괴는 똑같이 광적인 보존에 의해 균형을 이룬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진정으로 과거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인가? 아니다. 근대의 시간성이 시간의 경과에 그리 많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따라서 과거는 남아 있고 심지어 '회귀'하기까지 한다. 이제 이러한 부활은 근대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이를 억압된 것들의 귀환으로 취급한다. 근대인들은 이를 의고주의archaism으로 본다. 그들은 '만일 우리가 조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것이고, 결국 암흑기로 떨어질 것이다'라고 생각한다."(180)


"근대인들에게 시간의 화살이란 애매하지 않다. 즉 시간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과거와 단절해야만 하고, 뒤로 가는 선택을 취할 수도 있지만 이미 자신들의 과거와 극단적으로 그 관계를 끊은 근대화의 전위들과 반드시 단절해야만 한다. 이러한 일방적 요구는 지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근대 사상을 조직했다. … 이제 와서야 다 알게 되었지만 우리가 할 수 없는 작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혁명이며, 그것이 과학, 기술, 정치학이나 철학에서의 혁명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을 하나의 실망스러운 일로 해석할 때, 마치 의고주의가 모든 것을 침범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때, 마치 이미 억압된 재료들을 우리 뒤에 쌓아둘 수 있는 공용 매립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할 때, 우리는 여전히 근대인일 것이다. 우리가 역대의 모든 요소들─오래되고 시대에 뒤쳐진─을 하나의 콜라주로 병치함으로써 이러한 실망감을 극복하려 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탈근대인으로 남게 될 것이다."(181-2)


"근대인들은 이 왕국을 이해할 방법을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준대상들을 단순히 억제하기만 원했다는 듯이 소거하거나 부정함으로써 사라지게 하지 않았다. 그 반대로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되 본격적인 매개자를 단순한 중간적 존재[중간매체]로 전락시킴으로써 그 역할을 제거했다." "그러나 매개자는 본원적 사건이며 번역하려는 대상이나 그 사이에서 매개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존재들을 직접 창조해 낸다. 우리가 단지 모든 행위자들에게 이 매개의 역할을 되돌려준다면 정확히 똑같은 존재들로 이루어진 바로 그 세계가 근대적이길 그치면서도 결코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 즉 비근대적인 것이 될 것이다." "잃어버린 통일체의 복원을 위해 중간매체를 증식시킬 필요성이 있다는 점은 꾸준히 인정되어왔지만 그 중간매체들이 순수 형태들의 혼합물로 이해되는 한 근대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지 않을 수 업다. 이 전체 차이는 겉보기에는 사소한 매개자와 중간매체 사이의 뉘앙스 차이에 달려있다."(200-2)


"분기점─그리고 합류점─은 출발점이 된다. 설명은 더 이상 순수한 형태들로부터 현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중심에서 극단들로 진행된다. 극단들은 더 이상 실재의 결합점이 아니라 무수한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결과물이 된다." "우리의 설명을 대상Object과 주체/사회Subject/Society라고 알려진 두 개의 순수 형태들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는데, 이들이 반대로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인 중심부에서 이뤄지는 실천의 부분적인 정화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설명으로 분명 자연Nature과 사회Society를 획득하게 될 것이지만, 그것은 최종 결과물로서이지 기원으로서가 아니다. 자연도 공전公轉을 하지만 주체/사회를 그 중심으로 삼지 않는다. 자연은 사물과 인간을 생성하는 집합체 주위를 선회한다. 주체는 공전하지만 자연의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다. 주체는 인간과 사물이 발생하는 집합체를 중심으로 공전한다. 마침내 중기 왕국이 표상/대표된다. '자연들'과 '사회들'은 이 왕국의 위상들이다."(202-4)


# 매개(mediation) : 매개란 기술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혹은 하이브리드와 하이브리드)를 연결하여 새로운 하이브리드를 창출하는 과정이다. 라투르는 이를 번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정화(purification) : 매개와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연결망으로서 존재하는 하이브리드, 즉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의 결합체가 분할되고 절단되며 순수한 주체와 대상, 사회(혹은 문화)와 자연이 추출된다.


"모든 매개자에게 자연과 사회 속에 구속되어 있던 존재[의 지위]를 제공함으로써 시간의 경과는 다시 한 번 쉽게 이해될 수 있게 된다. 모든 것이 자연과 사회의 극단들 사이에 갇혀있어야만 했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의 세계에서 역사는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자연은 단순히 발견되거나 사회는 전개되거나 무엇이던 다른 것에 적용될 뿐이었다. 현상이란 이미 존재하는 요소들과의 조우에 불과했다. 우연적 역사란 것이 분명 존재하였지만 인간에게만 허용되었고, 그것도 자연적 사물들의 필연성으로부터 분리된 것이었다. 우리가 중간에서 출발하자마자, 이 중간매체를 완전히 성장한 매개자의 신분으로 격상시키자마자 비로소 역사가 실제로 가능하다. 시간은 무의미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한다. 보일에게도, 공기의 탄성에도, 진공에도, 공기 펌프에도, 왕에게도, 홉스에게도 무언가 실제로 일어난다. 이들은 모두 변화한다. 역사는 더 이상 사람들people의 역사가 아니라 자연 사물들의 역사도 된다."(209-10)


4장 상대주의


"절대적 상대주의는 독립되고 통약불가능하며 어떤 형태의 위계에도 편입되지 않는 문화들을 가정한다. 이들은 자연을 판단에서 제외하므로 이들에 대해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이보다는 덜 명확한 문화적 상대주의의 경우에는 유일한 자연이 중요한데, 그러한 자연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과학의 작업, 사회, 구축활동, 동원, 연결망을 전제조건으로 가정하지 않는다. 아직 과학의 작업이 사람들의 관심영역밖에 머무르는 이유는 인식론에 의해 재검토와 수정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유일한 자연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계속되는 한 문화들은 저 유일한 자연에 대해 어느 정도 정확성을 지닌 너무나도 많은 관점들에 모두 분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특정 문화에 종속되지 않는 유일한 자연이 등장하게 되면 제3의 모델이 언제나 몰래 사용된다. 이 보편주의를 나는 '특수'하다고 부를 것이다. 오직 한 사회─그것은 언제나 서양이었다─만이 타자들의 위치를 포함하는 유일한 자연이라는 일반적 틀을 정의한다."(263-5)


"모든 자연들-문화들은 이들이 동시에 인간적인 것, 신적인 것, 비-인간적인 것들을 구성해 낸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 중 어느 것도 우리에게만 알려져 있는 외부적인 유일한 자연에 자의적으로 씌워진 기호나 상징의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어느 '자연들-문화들'도─특히 서양의 경우─사물들로만 이루어진 세계에 거주하지 않는다. 모든 자연-문화들은 기호를 담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류한다.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누구나 인간적 집합체들과 이를 둘러싸는 비-인간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집합체들을 구성함에 있어 어떤 사람들은 조상을 동원하고, 다른 종족들은 사자, 항성, 혹은 제물의 응고된 피를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 서구의 경우에는 유전학, 생물학, 천체물리학, 혈액의학 등을 동원했던 것뿐이다." "문화상대주의로부터 출발해 이제 우리는 '자연'상대주의로 나아간다. 전자는 우리를 말도 안 되는 결론으로 이끌었지만, 후자를 통해 우리는 다시 상식으로 복귀할 수 있다."(266-7)


"모든 집합체들은 서로 달라서 존재자들을 각자가 부여하는 속성에 따라서, 그리고 자신들이 용인한 동원 과정 속에서 나누어 버린다." "상대주의자들은 모든 문화들이 하나의 자연 세계에 대해 각자의 자의성에서 체계화된 것으로 봄으로써 이 문화들을 동일선상에 놓으려 애쓰지만 이러한 과정의 산물은 설명되지 못한다. 따라서 상대주의자들은 서로를 지배하려는 집합체들의 노력을 고려하지 못한다. 반대로 보편주의자들은 집합체간의 뿌리 깊은 동질성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는 그들이 서양인들에게만 자연에의 접근권을 부여하고 모든 타자들을 사회적 범주들 속에 속박시키기 때문이다. 타자들은 오로지 과학적 사고를 하거나 근대적 또는 서구적이 되어야만 이 범주들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과학과 기술이 훌륭한 것은 그것이 진실이라거나 효율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집합체 생성에 참여하는 비-인간적 요소들을 배가시키고 우리가 이들을 재료로 삼아 만드는 공동체를 보다 친밀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268, 271-2)


# 집합체(collective) : 기존의 공동체(community)를 대체하기 위한 개념. 공동체란 (자연, 대상, 사물과 분리된) 사회와 마찬가지로 순수한 인간 주체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집합체는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 모두를 포괄하는 집단, 사회, 혹은 공동체의 개념이다.


"나선형의 확장, 그것으로 촉진될 참여, 과학기술이 이 존재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무한히 확장하는 거리가 바로 근대적 과학의 특징이지, 결코 과학 이전 시대로부터의 완전한 어떤 인식론적 단절이 아니다. 근대적 지식과 권력이 특이한 것은 사회적인 것의 전제로부터 마침내 탈출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사회적 연결 관계를 재구성하고 그 규모를 확장하기 위해 더 많은 하이브리드들을 추가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공기 펌프 뿐만 아니라 세균, 전기, 원자, 항성, 이차방정식, 인조인간과 로봇, 풍차와 피스톤, 무의식과 뉴런이 모두 포함된다. '우리'에게 과학과 기술은 사회를 반영하지 않는데, 이는 '그들'에게 자연이 더 이상 사회구조를 반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누구도 더 이상 거울을 가지고 장난치지 않는다. 문제는 점점 커지는 규모로 집합체들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물론 차이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규모의 차이일 뿐이다. 자연적인 차이는 없다─문화적으로는 더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272-3)


"근대 사회학자, 경제학자들은 개인 상호간의 접촉이라는 '미시적' 차원에 머무르거나 갑자기 '거시적' 차원으로 이동해 '탈맥락화'되고 '탈개인화'한 합리성을 제외한 모든 것들과 단절한다. 영혼이 제거되고 구체적인 행위자가 부재한 관료제가 존재한다는 신화는 순수하고 완벽한 시장이 존재한다는 것이나 보편적 과학 법칙이 존재한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의 판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에서 세계로,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비-인간의 세계로 연속적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아리아드네의 실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실천과 도구, 서류와 번역의 연결망으로 이루어진 끈이다. 조직이나 시장, 제도는 조잡한 국지적 지상세계의 관계들을 재료로 삼아서 만들어진 천상의 대상이 아니다. 조직, 시장, 제도는 하이브리드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스스로를 묘사하기 위해서 수많은 객체들을 동원해야 한다." "국지적, 세계적이라는 양 극단보다는 우리가 연결망이라고 부르는 중간의 배치들이 훨씬 흥미로운 주제이다."(300-2)


"우리가 근대 세계를 포기한다고 해서 다른 누군가 혹은 다른 무엇인가가 되는 것은 아니며 우리가 어떤 본질에 도달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의 과정, 하나의 운동, 하나의 이행, 문자 그대로 공놀이에서 말하듯이 누군가에게 패스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연속되고 위험한─위험하기 때문에 연속적인─존재로부터 기원하는 것이지 하나의 본질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불변성이 아니라 현존의 상태에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매듭vinculum 그 자체, 수많은 통로와 관계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집합적인 동시에 실재하고 담론적인 이 관계와 무관한 출발점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새로운 존재나 언어라는 더 최신 개념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의미의 세계와 존재의 세계는 동일한 세계로서, 번역의 세계이고 교체의 세계이며 이행의 세계이자, 위임의 세계이기도 하다. 모든 영속성, 견고성, 영구성은 그것의 매개자들에 의해 대가가 지불될 것이다."(318-9)


5장 재분배


"우리는 먼저 인간, 즉 인간주의가 충분히 공정하게 대하고 있지 않은 인간의 위치를 재조정해야 한다. 우리는 어디에 인간을 위치시켜야 하는가? 준대상과 준주체의 역사적 연쇄 속에서 인간을 우리가 오랫동안 알았던 것처럼 하나의 본질로서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다. 인간의 역사와 인간에 대한 인류학은 너무나 다양해서 그것을 하나의 최종적인 정의로 확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영리한 시도, 즉 인간을 의미의 진공상태인 자연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는 자유로운 실존으로 정의하는 것은 분명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우리는 모든 준대상에 대해 행위, 의지, 의미, 심지어 언어능력까지 허용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렇다면 자연 속으로 흡수되어야만 하는가? 그러나 만일 우리가 특정한 과학 분양의 특정한 결과를 찾음으로써 뉴런, 충동, 이기적 유전자, 기본적 욕구, 그리고 경제적 계산으로 움직이는 이 로봇에 옷을 입혀야 한다면 우리는 결코 괴물들과 가면들의 수준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336-8)


"우리는 엄숙하게 인간의 죽음을 선언하고 따라서 인간을 언어 게임이나 모든 지성 작용을 빠져나가는 비인간적 구조의 일시적인 반영으로 분해해야만 하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연에 속하기 보다는 담론에 더 속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나 인간을 자신의 내부로 분해시키고 인간의 죽음을 선언할 만큼 충분히 비인간적인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러기에는] 인간의 의지, 인간의 행위, 인간의 말은 너무나 풍부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저 자연일 뿐인 것으로부터 영원히 분리시킬 인간에 대한 초월적인 정의를 통해 문제를 회피해야만 할까? 이는 근대성의 헌법의 한 극으로 후퇴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인권선언이나 헌법 전문들에 기입된 어떤 임시적이고 특수한 정의를 확장하도록 힘을 행사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두 번의 대분할을 다시 한 번 따라가는 것이며 또한 근대화를 믿는 일이 될 것이다."(339)


# 제1 대분할은 내적 분할로서, 우리(서구인) 안의 '자연'과 '사회'를 분리하는 것이며, 제2 대분할은 외적 분할로서, '우리'와 '그들'을 분리하는 것이다.


"우리는 준대상들을 표상하는 데 전념해왔다. 따라서 반드시 억제되어야 하는 것은 근대성의 헌법이 보장하는 사항─권력분립, 즉 정부의 두 부문이 분리된 상태, 그리고 정확하게 구획된 상태─인데, 그것이 근대인들의 분석의 연속성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연과 사회는 구분할 수 있는 양극이 아니라 사회-자연들의, 그리고 집합체들의 연속된 상태의 동일한 산물이다. 따라서 우리의 새로운 초안의 첫 번째 보장사항은 준대상, 준주체들의 분리불가능성이 될 것이다. 집합체들의 연속적인 배치를 방해하는 모든 개념, 제도, 실천들, 그리고 그것들에 입각한 하이브리드들에 대한 실험은 위험하고 해롭고─또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텐데─부도덕한 일이 될 것이다. 매개 작용은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이중의 권력의 가장 중심이 될 것이다. 연결망은 은신상태로부터 벗어날 것이다. 중기왕국은 대표/재현될 것이며, 제3신분, 즉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들은 이제 전부가 된다."(345-6)


# 근대/비-근대의 헌법


1. 근대적 헌법 : 자연은 초월적이지만 동원가능하다(내재적이다). / 비근대적 헌법 : 자연과 사회는 사회-자연들의, 집합체들의 연속된 상태의 동일한 산물이다(준대상, 준주체들의 분리불가능성).

2. 근대적 헌법 : 사회는 내재적이지만 우리를 능가한다(초월적이다). / 비근대적 헌법 : 객관적인 자연의 산출과 자유로운 사회의 산출에 대한 계속되는 추적. 마지막 분석에서는 결국 자연의 초월성과 사회의 내재성이 존재하지만 양자는 분리될 수 없다.

3. 근대적 헌법 : 자연과 사회는 전적으로 구분되며 정화작용은 매개 작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 비근대적 헌법 : 자유는 더 이상 동질적인 시간적 흐름에 기대지 않는 하이브리드들의 조합들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으로 재정의 된다.

4. 근대적 헌법 : 소거된 신은 완전히 부재하지만 정부의 두 부문 사이의 중재를 책임진다. / 비근대적 헌법 : 하이브리드들의 산출은 표면적이고 집합적인 성격을 갖게 되면서 하이브리드의 산출의 박자를 조절하고 늦출 수 있는 확장된 민주주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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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피고인 김재규 - 10·26 비공개 재판 통합 증언록
김재홍 지음 / 폴리티쿠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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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0· 26 거사, 김재규는 왜 박정희를 쏘았는가?


10·26의 주역인 김재규의 군사재판 진술을 총정리해서 정제해낸 박정희 살해의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유신독재에 대한 미국의 비판과 그것에 반발해 반미 노선을 감행하려는 박정희를 보며 김재규는 국가적 위기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미국은 유신체제를 고쳐 민주헌정으로 복원하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압박했다. 당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대외정책에서 강력한 인권 보호를 내걸었다. 김재규는 카터 미국 행정부의 요구를 박정희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박정희는 “미국놈들 갈 테면 가라고 해”라고 내뱉었다. 김재규는 그것을 6·25 전쟁이 재발하는 상황이라고 보았다. 김재규는 박정희 정권에서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이라는 두 개의 국가안보 책임 자리에 임명된 유일한 실력자로 국가안보 지상주의자였다. 그는 박정희의 유신독재와 미국의 견제, 이어지는 박정희의 반미 행보로 인해 국가안보가 위기를 맞았다고 판단했으며 이를 방관할 수 없었다. 6-7)


둘째, 1979년 10월 중순 폭발한 부산·마산시민항쟁이 단순한 재야 민주화 운동권이나 대학생 단체의 행동을 넘어서 전국적으로 독재 반대의 민심이 발화점에 이르렀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당시 부마항쟁의 현장에 파견된 특전사 예하 공수부대는 그로부터 7개월 뒤 광주항쟁에 투입되는 동일한 진압군인 1·3·5 공수여단이었으며 여단장도 동일 인물이었다. 부마에서 진압군은 전차를 세워놓고 무력 과시 위주로 시위대를 압박했으며 가혹한 폭행을 하지 않았고 더구나 발포는 없었다.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부마항쟁 중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 공수부대가 광주에서는 참나무 몽둥이로 시민·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했으며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시민군과 자치공동체를 조직하자 아예 발포하기에 이른 것이다. 최고권력자가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바뀌었으며 지역이 부산·마산과 광주라는 차이일 뿐이지만 가해 행위와 피해 상황은 큰 차이를 보였다. 7-8)


10·26 사건의 셋째 원인은 대통령 박정희의 사생활 문제였다. 소행사·대행사로 불리는 ‘술과 여자’를 즐기는 박정희의 부도덕한 사생활에 대한 김재규의 인간적 환멸감이었다. 박정희는 궁정동에 사실상 비밀 요정인 안가를 두고 여기서 사흘에 한 번꼴로 외부에서 여자를 불러들여 술자리를 가졌다. 국가 위기관리의 핵심기관인 중앙정보부의 기밀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안전가옥 (안가)에서 최고권력자가 측근들을 불러놓고 빈번하게 주색 유희에 빠져든 것이다. 동석하는 여자는 항상 두 명으로 가수나 영화배우 등 기성 연예인과 나이 어린 연예인 지망생이었다. 혼자서 여자와 술 마실 때는 소행사라 했으며 청와대 비서실장·경호실장·중앙정보부장 등 핵심 측근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는 대행사라고 했다. 10·26 당일도 유명 가수와 연예계 지망 여대생이 동석한 대행사였다. 박정희의 비밀 요정 궁정동 안가와 소행사·대행사를 관리하는 직책이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으로 대통령의 채홍사라 불리기도 했다. 8)


1장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재판이 시작되다(계엄보통군법회의 1회 공판, 1979년 12월 4일)


변호인단은 근본적인 문제를 따지고 나섰다.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직후에 선포한 비상계엄이 법적으로 유효하냐는 지적이다. 유신체제 아래서 오랫동안 길들어져 정부가 하는 일이 법적으로 옳으냐의 여부를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하게 생각해온 풍토였다. ‘위’에서 결정된 대로 따르는 데 익숙해 있었지 그것을 비판하고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는 일 자체를 불순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바로 구체제가 무너진 직후가 아닌가. 공포통치체제였던 박정희 정권 아래서 무서움의 상징이었던 중앙정보부장, 바로 ‘남산의 부장’이 정권을 타도했다. 과연 새 세상이 올 것인가. 선거가 제대로 치러지고 언론 비판, 사법적인 논의가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10·26 사건에 대한 군사재판은 이런 앞날의 전망을 짐작케 해주는 풍향기였다. 변호사들은 구체제 아래서의 법 적용이나 판례를 뛰어넘어 ‘과도적 혁명기’에 걸맞은 새로운 법리논쟁을 끌어내려 했다. 30)


처음부터 재판장과 심판관, 법무사, 검찰관들은 한 세대의 정치사가 끝나고 새 시대가 시작되리라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군부가 그런 의식을 갖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또 그 후 신군부의 등장을 보더라도 과히 틀리지는 않은 생각이었다. 그만큼 군인정치체제는 최고권력자 한 사람이 사라진다 해서 금방 민주화로 바뀔 수 없을 만큼 이미 뿌리가 깊었다. 재판 자체도 보안사를 중심으로 구성된 합동수사본부의 지침에 따라 진행됐다. 군사법정의 진행 상황은 유신체제 아래서 중정에 파견됐던 공안검사들에 의해 면밀히 청취되고 시나리오가 짜였다. 이들이 재판정의 막 뒤에서 그때그때 지침을 적은 쪽지를 보냈다. 그래서 이 군사재판에 대해 ‘쪽지재판’이라는 비아냥거림이 나돌기도 했다. 이는 10·26 사건의 군사재판이 구체제 타도자에 대한 체제 수호 세력의 단죄를 위한 각본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증거였다. 역사적 전환기를 가져온 사건의 원인과 의미를 가리는 순수한 재판이 될 수 없었다. 33)


2장 집권 쿠데타인가 민주 회복 거사인가(2회 공판, 12월 8일 오전)


10·26 사건에 대한 재판관할권이 군법회의가 아니라 민간법원에 있다는 변호인단의 재정신청은 대법원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법원은 이 사건을 군법회의에서 재판하는 것이 옳다고 판시했다. 지난 19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로 인한 계엄령 때도 똑같은 재정신청이 있었으나 대법원은 그때 군법회의 재판권을 인정했다. 그것이 판례가 된 것이다. 이에 따라 12월 8일 김재규 피고인 등에 대한 군사재판의 2회 공판이 속개됐다. 또 재판부는 법적으로 허용돼 있는 피고인 진술에 대한 변호인의 녹음도 일절 금지했다. 변호사들은 변론자료 준비를 위해 휴대했던 녹음기를 법정에 들어오면서 모두 맡겨야 했다. 변호인단이 녹음권을 계속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불허 결정을 내렸다. 피고인들이 전직 중앙정보부장, 청와대 비서실장 등 국가 최고 기밀을 취급하는 직위에 있던 사람들이라는 이유다. 재판정의 녹음은 계엄사 당국 외에는 일절 금지됐다. 38)


12월 6일 기존의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에서 최규하 대통령이 선출된다. 그는 당선 다음 날로 민주화와 정치 발전을 위한 첫 조치를 취했다. 우선 헌법 개정 등 정치적 논쟁을 일체 금지시켰던 대통령 긴급조치 9호를 해제했다. 이에 따라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감 중인 인사들이 석방됐다. 지난 1973년 여름 도쿄에서 강제납치되었다 살아 돌아온 후 6년 반 동안 가택연금 상태에 묶여 있던 김대중 씨는 12월 8일 0시를 기해 자유의 몸이 되었다. 또 국회도 헌법개정심의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최 대통령은 12월 21일 취임사에서 1년 이내 개헌을 완료하고 가능한 빠른 시일 내 총선 실시 등 향후 정치 일정을 제시했다. 이렇게 민주화가 실천돼가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두 번째 공판이 열린 날은 바로 긴급조치 해제와 정치범 석방, 김대중 씨 연금 해제 등 가장 눈에 띄는 조치가 나온 날이었다. 변호인단이 10·26에 대해 그런 민주화를 불러온 역사적 사건이라고 역설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44)


변호인들이 김재규 피고에 대해 계속 ‘장군’이라고 부르자 검찰 측이 경고 발언을 했다. 군 검찰은 국가원수를 살해하고 국헌 문란을 기도한 국사범을 영웅시하는 것은 신성한 법정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경고했다. 이에 변호인단은 법적으로도 판결에 따라 유죄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죄인이 아니며 전관예우를 한다고 해서 문제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이날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확인된다. 첫째, 당일 오후 4시 차지철 경호실장이 박 대통령의 연회를 전화로 통보하자 김재규는 4시 15분경 정승화 육참총장과 김정섭 중정 2차장보를 초대했다는 점이다. 대통령의 행사가 있는 시각에 같은 장소에 다른 손님을 부른다는 것은 보통은 없는 일이었다. 둘째, 그는 이어 권총에 실탄을 장전하고 검사까지 했다. 이는 그가 박 대통령과 차지철로부터 정국 문제에 관해 힐난을 받은 데 자극받아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이라는 보안사 측의 주장에 반대되는 정황이다. 즉 사전에 결심했다가 이날로 결행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38, 53)


10·26 사건의 주역은 역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최측근인 박선호 의전과장 및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의 거사에 대해 김 부장의 두 부하는 사전에 알지 못했다. 김 부장은 연회장에서 나와 권총을 주머니에 넣고 쏘러 들어가기 직전에야 두 부하를 불러 함께 행동할 것을 지시했다. 처음 두 부하는 모두 꺼렸다. 박선호는 “각하까지입니까?”라고 확인한 뒤 “경비원이 7명이나 되므로 오늘 밤은 피하는 게 좋겠습니다”고 경호원 수를 3명이나 부풀려 거짓 보고를 했다. 박흥주도 깜짝 놀라 묵묵부답의 태도를 보였다. 김 부장은 주머니 속의 권총을 툭 쳐 보인 데 이어 “저쪽에 육참총장과 제2차장보도 와 있다”고 말했다. 박흥주 대령은 이 말에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일들이 상당히 진행돼온 것으로 생각했다. 박선호도 어차피 김 부장은 결행할 기세였고 이미 그 얘기를 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살아나기 어렵다고 느꼈다. 두 부하는 이렇게 해서 엄청난 사건에 즉석에서 끌려 들어가게 된 것이다. 58)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이어 그는 옆에 앉은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의 팔을 툭 치면서 “대통령 각하 좀 똑똑히 모시시오”라고 말하고는 권총을 빼 들었다. 첫 발은 “이 버러지 같은 놈!”이라고 소리치며 경호실장 차지철을 쏘았다. 곧바로 두 번째를 박 대통령의 가슴에 발사했다. 박 대통령은 옆으로 비스듬히 쓰러졌으나 차지철은 팔목에 맞아 화장실로 피신했다. 권총을 계속 쏘려 했으나 탄피가 빠져나오지 않는 바람에 발사되지 않았다. 그는 밖으로 뛰어나가 박선호의 권총을 낚아채 들고 다시 들어갔다. 화장실에서 나와 문갑을 잡고 있는 차지철에게 재차 사격한 뒤 그는 박 대통령에게 다가갔다. 그는 권총을 박 대통령의 뒤통수에 바싹 갖다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말 그대로 확인사살이었다. 냉혹한 방법이었지만 완전한 제거를 위한 최후의 가격이었다. 후에 그는 법정진술에서 부하들이 박 대통령의 병원 후송 여부를 물어왔다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63)


결행이 끝나자마자 그는 정승화 육참총장과 김정섭 중정 제2차장보와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을 차에 태우고 궁정동을 나섰다. 정 총장이 차 안에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김 부장은 말없이 오른편 엄지손가락을 세워 밑으로 뒤집는 시늉을 해 보였다. 정 총장이 재차 물었다.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까?” “적이 알면 큰일입니다.” “외부의 침입입니까, 내부의 일입니까?” 김 부장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차는 효자동길과 종합청사 앞, 시청 앞, 신세계를 거쳐 퇴계로의 세종호텔에 다다랐다. 여기서 김 부장은 “어디로 가지?”라고 물었다. 이 대목이 그의 사후 계획은 조직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지적을 낳게 했다. 또 그것이 그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게 만든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김 부장의 이 물음에 정 총장은 “육본으로 가시지요”라고 받았다. 위기 시에 자기 사무실로 가려고 하는 것은 별 계획 없이도 나타날 수 있는 반사행동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10·26의 역사적 운명을 결정짓는 분수령이 돼버린 것이다. 68)


김재규 부장이 처음으로 ‘혁명’이라는 용어를 쓴 것은 이 육본 벙커에서였다. 육본 벙커에 들어왔던 총리 이하 국무위원들이 국방부로 자리를 옮기자 김재규 부장과 김계원 실장은 잠시 둘만 남게 됐다. 김 실장이 힐난조로 말했다. “이 사람아, 어떻게 각하까지 그렇게 했어.” 이 말에 김 부장은 단호하게 받아쳤다. “그런 얘기는 그만하시오. 사태 수습이 더 급선무입니다.” 이어 그는 차후의 계획을 내비쳤다. “보안유지를 해야 됩니다. 하루빨리 계엄사령부 간판을 내리고 혁명위원회로 바꿔 달아야 합니다.” 이 혁명이란 말에 김 실장은 사태를 새로이 파악했다. 그는 후에 법정진술에서 이때 비로소 김 부장이 분명하게 박 대통령을 겨냥해서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다. 보안사 측은 김재규가 처음에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가 나중에 변호인 접견을 통해 ‘의식화’돼서 민주화 혁명이란 말을 내놓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해석은 육본 벙커에서 두 사람이 나눈 대화 내용에 비추어 보면 맞지 않는다. 73)


김 피고는 자신이 3군단장으로 재임중이던 때인 1972년 유신 선포 직후 새 헌법은 박 대통령이 계속 집권하기 위해 만든 헌법임을 알고 이의 타도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1976년 중정부장이 된 후에는 순리적인 방법으로 유신체제를 바꿔놓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고 그는 진술했다. 그러자 검찰관은 그에게 물었다. “긴급조치 9호는 날이 무디어졌습니다. 긴급조치 10호라는 시퍼런 칼날을 주십시오, 이렇게 건의한 일이 있지요?” 그는 그러나 새로이 긴급조치 10호의 제정을 박 대통령에게 건의했던 것은 9호의 독소를 뽑아버리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했다. 검찰 측은 그의 이 주장을 계속 반박하며 믿지 않았다. 이에 김재규 피고인은 박 대통령의 성격에 관한 체험담을 소개하며 부연 설명했다. “대통령 각하께 우리가 ‘완화하십시오’라고 약하게 나오면 각하는 꼭 반대로 강하게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9호의 독소조항을 뺀 것을 만들려면 우리는 강화하는 인상을 주는 작전을 써야 합니다.” 78)


김재규 피고인은 유신체제 타도의 동기를 설명하는 가운데 한미관계의 악화에 큰 비중을 두었다. 유신체제 때문에 미국이 한국을 버리려 하고 있다고 그는 위기감을 토로했다. 미국은 한국에게 독재체제를 그만두고 민주주의체제로 환원하라는 선의의 권고와 충고를 여러 번 했다는 것이다. 유신체제의 실질적인 권력 2인자였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진술은 당시 반체제 인사들의 비판과 똑같았다. 그는 바로 며칠 전까지 현직 중정부장이었다. 중앙정보부가 잡아들이고 고문했던 반체제 세력의 주장을 중정부장이 그대로 하고 있었다. 그가 계속해서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해서 서유럽의 민주주의와 다를 수 없다며 유신헌법에 대해 비판하려 하자 재판부와 검찰 측이 함께 소리를 질렀다. 재판장이 “지금 변호인 측과 피고는 국가안보에 관한 중요한 발언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잠시 10분간 휴정하겠습니다” 하고 선언했다. 그 뒤부터 김재규의 진술은 국가기밀 보호를 이유로 비공개 재판에 부쳐졌다. 97)


3장 국가안보를 이유로 비공개 재판으로 전환되다(2회 공판, 12월 8일 오후)


재판부가 비공개 선언을 하고 신문을 계속하려 할 때 시각은 이미 오후 6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것도 토요일 오후였다. 변호인단은 이날 공판을 종료하자고 제의했지만 재판부는 변호인 신문을 재촉했다. 그러자 변호인단은 신문을 포기했고, 이어 재판부의 법정신문이 시작됐다. 김재규 피고인은 독재자 박정희 한 사람을 제거한 것이지 체제를 전복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박 대통령이 건재하면 자유민주주의가 회생될 수가 없었기에 박 대통령 스스로 그런 숙명관계로 몰고 갔다고 진술했다. 미국이 유신체제를 좋지 않게 생각하니 한번 완화해보자고 건의하면 박 대통령은 내정간섭을 받을 필요가 있느냐고 대꾸했다. 그는 “미국놈들 갈 테면 가라고 해” 하고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또 김재규가 직선제 대통령선거로 바꿀 것을 건의하자 다른 수석비서관과 상의해보라고 외면했다. 김재규는 이 같은 체제 완화 건의가 일절 먹히지 않는다고 깨닫고 민주화의 방법으로 혁명을 택했다는 것이다. 103, 109)


법무사는 대통령을 살해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소아를 버렸다면 김 피고 자신도 자결할 생각은 해보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그는 처음엔 박 대통령과 같이 없어지는 방법도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혁명을 결행하고 나서 그 뒤치다꺼리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생각이 달라졌다고 답변했다. 그는 4·19 혁명으로 민주당 정부가 들어섰지만 얼마 못 가서 무능하다는 이유로 군사혁명에 의해 무너졌지 않았느냐고 지적했다. 새 혁명정부가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도록 보호하고 지원해야 할 책임이 혁명을 결행한 사람에게 있기 때문에 자신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김재규 피고인은 구치소에서 변호인 접견 시 바깥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귀담아듣고 있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긴급조치를 해제한 것과 유신헌법을 고치겠다는 담화 등을 그는 10·26 거사의 성과로 꼽았다. 박 대통령 한 사람이 없어지니까 그런 민주화 조치가 가능해지지 않았느냐고 지적했다. 115)


4장 청와대 비서실장 김계원을 신문하다(3회 공판, 12월 10일)


10·26 사건의 피고인 8명 중 김계원 피고인의 진술은 다른 이들과 입장 차이가 가장 두드러졌다. 김계원 피고인은 처음부터 이 사건 자체를 비난했다. 자신이 연루돼 법정에 선 것은 오해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또 김재규 피고인의 거사 동기에 대해서도 민주 회복 혁명이니 대의 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는 진술이 많았다. 사건 당일 밤 현장에서 자극을 받아 우발적으로 저지른 행동이라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자신이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서 함께 죽지 못한 것은 불충이라고 자책했다. 이런 입장인 그가 법정진술에서 유신체제나 박 대통령의 독재에 대해 한마디 비판도 하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그가 핵심권력 내부의 일에 관해 공개한 것은 경호실장 차지철의 월권과 오만방자한 태도뿐이었다. 김재규 피고인도 김계원 실장에 대해 혁명인 줄 알았으면 결코 따라오지 않았을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 같은 김재규 피고인의 비난은 오히려 그에게 사형을 면하게 해준 변론의 효과가 됐다. 120)


김계원 피고인은 김재규 중정부장의 경질설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오히려 김 부장 자신이 그만두어야 할 시기를 사전에 귀띔해줄 것을 수차 부탁해왔다는 것이다. “시오도키가 다이지라고 남자란 일하다가 뺄 때, 그만둘 때가 중요하니 나도 중정부장을 언제 그만두는 것이 가장 좋은지를 사전에 좀 알려주십시오.” 박정희, 김계원, 김재규 등 군 출신 정권의 최고권력자들은 대부분 일본군 출신이어서 자기들끼리 술 마실 때나 은밀한 대화를 나눌 때 일본말 속어를 쓰곤 했다. 김 실장은 “대통령께서 요직 개편 문제에 대해서 금년 중에 고려하고 계시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김재규 피고인이 박 대통령의 신임을 잃어 경질당할 것으로 알고 범행을 저질렀다는 보안사 측의 수사 결과와는 상반되는 진술이다. 그는 또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해 직무정지 가처분신청을 법원에 낸 뒤 들어선 정운갑 총재대행 체제가 제대로 가동되도록 한 것은 중앙정보부의 공작이었다고 공개했다. 128)


사건 당일 밤 연회가 시작되기 전 박 대통령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김재규 부장은 김계원 실장에게 “오늘 해치워버릴 테니 뒷일을 부탁한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김 실장은 이 말을 들은 기억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의 진술 중에는 대질신문 등을 통해 검증해야 할 부분이 많았다. 대통령을 살해한 범인에 대한 체포권은 우선 경찰이 가졌다고 보아야 하며 또 대통령 경호실도 임무 수행상 체포할 수 있다. 사실상 군은 민간인 신분인 중정부장을 체포할 권한과 책임이 없다. 그러나 중정부장 김재규를 대통령 살해범으로 체포한 것은 군 헌병과 보안부대였다. 그때는 계엄이 선포되기도 전이다. 법적인 근거를 가릴 것 없이 중정부장을 체포할 능력은 경찰이 아니라 군이 갖고 있다고 판단한 사람은 김계원 실장이었다. 그는 내무장관과 경호실 차장(이재전 중장)도 있었으나 이들을 제쳐두고 국방부 장관과 육참총장에게 김재규 부장의 체포를 주문했다. 137, 144)


보안사는 사건 발생 후 3시간여 만에 외부 기관으로는 가장 빨리 박 대통령의 사망 사실을 알았다. 이 정보 확인 작전의 주역은 참모장 우국일 준장이었다. 보안사는 이같이 엄청난 사건이 터졌을 때 냉철하게 파고드는 자세를 보였다. 당시 국내에서 중앙정보부와 함께 가장 조직적인 위기관리 촉각을 가진 집단이 보안사였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중정은 이미 대통령 살해 집단으로 전락했으므로 보안사가 유일한 핵심 조직인 셈이다.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이 청와대에 가 김계원 비서실장으로부터 사건 개요를 청취한 것은 10·26 다음 날 오후 5시 반. 그는 수사관 2명을 대동했다. 평상시 같으면 보안사령관이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범죄 사건을 설명해 달라고 청하는 것 자체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죽었고 계엄 아래서 보안사가 그 사건의 수사기관임을 전 소장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권력에 대한 후각은 군인 차원을 훨씬 넘어선 골수 정치군인의 그것이었다. 161)


5장 궁정동 안가의 대행사 소행사(4회 공판, 12월 11일)


박선호 피고인은 해병대 대령 출신의 중정 의전과장으로 김재규 부장이 가장 신임하는 오른팔이었다. 당시 대통령과 중앙정보부장, 청와대 비서실장 등 핵심권력자들이 술을 마시는 궁정동 안가는 이미 요정화 돼 있었다. 관립 요정인 셈이다. 그 관립 요정의 관리를 중정이 맡았고 중정 의전과장이 지배인격이었다. 박선호 피고인은 의전과장의 임무 중에서도 술 시중 여인을 구하는 일이 가장 괴로웠다. 그는 중간에 몇 번 그만두겠다고 사의를 표했다. 그러나 그런 일을 심복이 아니면 맡길 수도 없어 김재규 부장은 박 과장을 계속 붙들었다. 박선호 피고인은 법정에서 그런 김 부장에 대해 한마디도 원망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김 부장에 대해 상관으로서 존경하고 신뢰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오히려 박 대통령의 사생활에 문제가 있었다는 증언을 남겨 김재규 부장의 10·26 결행이 정당한 판단이었음을 부각시켰다. 그는 1980년 5월 24일 김 부장 등 5명의 피고인들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3)


박흥주는 동기생 중 항상 1차로 진급하는 그룹으로 분류된 육사 18기의 선두주자였다. 정치군인 집단인 하나회와는 거리가 먼 야전군인이었다. 중령 시절 12사단 포병대대장 보직을 마치고 육군본부에서 근무하다 김재규의 부름을 받고 중앙정보부장 비서실 수행비서관이 되었고 대령으로 진급했다. 그는 군사정권에서 손꼽히는 엘리트 장교였고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장의 최측근이었다. 중정부장 수행비서관 보직에서 일선 연대장으로 나가기를 희망했으나 김재규가 몇 달만 더 하라고 붙잡는 바람에 박 대령의 운명은 극적으로 뒤바뀌었다. 1979년 10·26 사건 때 김재규의 지시로 안가 경비원 이기주,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 차량 운전사 유성옥과 함께 식당에 있던 경호원 사살에 가담하였고 김재규가 보안사에 체포되면서 본인도 구속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박흥주는 10·26 당시 현역 군인이었기에 1심 선고만으로 사형이 확정됐고 1980년 3월에 사형이 집행됐다. 208)


김재규는 박흥주와 박선호에게 “똑똑한 놈 세 명만 골라서 나를 지원하라”고 지시했고 이에 중앙정보부 소속의 안가 경비조장인 이기주와 운전기사 유성옥, 경비원 김태원이 합류했다. 이들은 함께 식당에서 총격을 가해 2명 살해, 3명 살인미수로 동일한 죄가 적용되었다. 김태원은 영문도 모른 채 명령에 따랐다가 사형을 받았지만 재판 과정에서 가장 의연한 모습을 보여 변호인들조차 감명을 받았다.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여러 차례 그들에게는 선택의 기회가 없었다며 “저에게 극형을 내려주시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극형만은 면해 주시기 바란다”고 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재규와 박선호·이기주·유성옥·김태원은 1980년 5월 20일 대법원의 사형선고를 받았고 선고 나흘 후인 1980년 5월 24일 사형이 집행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5·18 광주민주항쟁이 최종적으로 발포 진압된 5월 27일을 사흘 앞둔 날 서둘러 사형을 집행한 것이다. 232, 249)


6장 중앙정보부 의전과장과 청와대 경호관의 권총 대결(4회 공판, 12월 11일)


강신옥 변호사는 박선호 피고인이 검찰관 측의 신문에 답변하면서 내비친 궁정동 안가의 대행사·소행사에 착안했다. 대통령 박정희의 연회행사와 그 자리에 동원된 외부의 여자들. 국정 최고책임자가 술과 여자에 지나치게 빠져 있었다고 느껴졌다. 권력자의 부도덕성으로 예부터 언제나 문제를 일으켰던 것이 바로 술과 여자가 아니던가. 그리고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총으로 쏜 사건의 배경에 대해 품었던 자신의 의혹이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통령의 타락상과 판단력 마비 때문에 국가 위기가 다가옴을 절감했을 것이다. 국내적으로 부산·마산의 시민데모가 심각했고 밖에서는 미국 측의 압력이 전해져 오고 있었으니 그것이 국가 위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강 변호사는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으로 대통령의 채홍사 역할을 해온 박선호 피고인을 통해 박 대통령의 부도덕성을 폭로하기로 마음먹었다. 박 대통령의 부도덕성을 부각시킬수록 그만큼 10·26 거사의 정당성이 커지는 것이다. 261)


박선호의 죄목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청와대 경호관들인 정인형과 안재송 등을 사살한 것이고 두 번째로는 이른바 ‘확인사살’ 지시를 내린 장본인이라는 혐의다. 확인사살 지시에 대해서 중정 경비원들이 주장했으나 박선호 본인은 이를 부인했다. 그러나 경호관들에게 총을 쏜 것은 자신도 시인한 범죄사실이다. 그 경호관들 중에서도 정인형 경호처장은 박선호와 해병대 장교 임관동기로 친구 사이였다. 10·26 당일 밤, 그 전우에게 권총을 겨누며 박선호는 “함께 살자”고 설득을 시도했다. 극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그 옆에는 한국에서 속사권총의 1인자로 올림픽 대표선수 출신인 안재송 경호부처장이 함께 있었다. 정인형과 안재송은 ‘이게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서로 쳐다보았다. 이내 속사수 안재송이 권총에 손을 댔다. 그러나 아무리 빠르다 한들 이미 권총을 겨누고 있는 박선호에게 대항하기는 무리였다. 박선호의 권총은 안재송에 이어 정인형에게 불을 뿜었다. 268)


7장 거부할 수 없는 운명(5회 공판, 12월 12일)


12월 12일 오전 10시, 박흥주 대령에 대한 변호인 반대신문이 시작됐다. 박 대령은 명문 서울고교 출신으로 육사 18기의 유망주. 유망주였기 때문에 힘깨나 쓰는 장성인 김재규의 부관으로 발탁됐으나 그것이 자신의 운명을 단축시킬 줄이야…. 게다가 그가 살았던 집은 찻길조차도 안 닿는 산동네 꼭대기의 단칸방으로 밝혀져 주위 사람들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현역 군인인 그는 재판도 다른 피고들과 달리 항소심이 없는 단심이었다.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은 김재규 부장이 김형욱 전 중정부장 실종사건과 긴급조치 10호 건의문제 등으로 애를 쓰고 있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김 부장은 왕조시대의 어전에 나가는 신하와도 같았다. 집무실에서 양치질과 세면을 다시 하고 거울 앞에서 복장을 비춰보았다. 그리고 대통령에게 진언할 보고서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일일이 검토했다. 그러니까 그가 권총을 쏜 대통령 박정희는 이미 개인적인 동향이라거나 육사 동기(2기) 사이라는 정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276)


법무사는 박흥주 대령에게 군인의 윤리 문제를 물었다. 직속상관의 명령에 따르는 것과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을 보호하는 일, 그것이 서로 상충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박 대령은 직속상관인 김재규 부장의 명령에 따라 대통령 살해를 거들었다. 그는 고민했지만 상관의 명령에 따랐다. 갑자기 당한 긴박 상황에서 국가변란 같은 것보다도 자신의 처신만을 생각했다고 그는 법정에서 토로했다. 그는 순간적으로 판단을 잘못했다고 진술했다. 박선호 피고인이 확신범이라면 박 대령은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휩쓸린 우발범에 가까웠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대통령 박정희의 사생활을 얼마나 아느냐에서 비롯된 것이다. 박선호 피고인은 대통령의 채홍사 역할을 하면서 최고권력자의 타락상에 혐오감을 가졌었다. 이에 비해 박흥주 피고인은 그런 베일 속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이런 두 사람의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이 판이한 것은 당연했다. 이는 일반 국민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304)


8장 기타 반주 속의 총성(6회 공판, 12월 14일)


12월 14일 오전 10시, 계엄보통군법회의 6회 공판이 열렸다. 본래 13일 속개하게 돼 있었으나 12·12 군사반란 다음 날이어서 이날 공판이 열리지 못했다. 이 군사재판의 최고책임자(관할관)인 계엄사령관이 바뀐 것이다.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참총장이 이 사건과 연루된 혐의가 있다며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가 그를 체포해버렸다. 12·12 군사반란은 변호인단의 변론을 위축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재판부는 더욱 보안사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일례로 중정 경비원은 이기주 피고인 확인사살 장면은 안 봤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확인사살을 실행한 김태원 피고인은 이기주 피고인과 함께 들어가 한 명을 쏘는 것은 그가 지켜보았다고 수사 과정에서 진술했다. 보안사 수사관은 이기주 피고인에게 김태원 피고인의 진술을 인정하라고 종용했다. 이기주는 마지못해 “김태원이 정 그러면 내가 인정하겠다”고 말했다. 꿰맞추기 수사로 확인사살 행위가 크게 부각된 것이다. 311, 337)


현역 군인 박흥주 대령에 대한 신문이 계속되었다. 박흥주 대령의 말에 의하면 그는 10·26 당일 저녁에야 김재규의 계획을 들었고 상관의 명령을 이행했을 뿐이었다. 그는 사건이 벌어진 안가의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했고 육본으로 가서도 어떤 조치를 취할 만한 여건도 아니었다. 그의 솔직한 진술을 듣고 있으면 상명하복의 군대보다 더 엄정한 조직인 중정에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든 강직한 젊은 군인의 비극적 운명이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김재규는 1978년 10월 1일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었다. 당시는 국내적으로는 양대 선거, 대외적으로는 미국과의 갈등이 깊었던 시기였다. 대통령 박정희의 독선은 1979년에 들어 그 강도가 심해졌다. 그는 건강이 안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일을 하고 대통령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그의 모습은 부하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박흥주는 본받아야 할 롤모델이자 상사로서 김재규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따랐다. 343, 348)


9장 승리했으나 포로가 된 장군(7회 공판, 12월 15일)


12월 15일 오전, 제7회 공판이 시작됐다. 국선변호인 안동일 변호사는 주로 김재규의 개인사와 삶에 대한 질문을 했다. 그는 사표를 낸 적이 있냐는 질문에 “내고 싶었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며 건강 악화로 인해 중앙정보부장의 직무를 내려놓고 싶었던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김재규는 10·26 거사가 결코 우발 충동행위가 아니었다며 유신헌법이 선포된 직후인 1972년 11월 이미 박 대통령을 연금하고 하야를 권고하려 했다고 말했다. 당시 김재규 피고인은 3군단장이었다. 유신헌법을 구해 읽어보니 완전히 개인의 영구집권을 위한 내용임을 알고 박정희를 밀어낼 계획을 세웠었다고 그는 주장했다. 박 대통령은 그를 신임해 전방 부대 순시 때면 그의 임지에 가서 머물다 가곤 했다. 그런 기회에 그는 박 대통령을 연금하고 하야할 것을 요구하려 했다는 주장이다. 진실인지 완전히 검증된 주장은 아니나, 그가 박 대통령의 독재권력에 문제의식을 오래전부터 품어왔다는 한 지표였다. 389, 396)


[김재규 진술] 저는 정권을 잡을 생각은 한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군인이고 혁명가입니다. 군인이나 혁명가가 정권을 잡으면 독재를 하게 마련입니다. 독재를 마다하고 혁명을 하는 사람인 제가 정권을 잡아서 독재할 요인을 만든다는 것은 전혀 말이 안 됩니다. 금번 대통령 각하를 희생해서 혁명을 했습니다만, 개인의 의리라든가는 제가 혁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부득이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어느 한쪽을 취하려면 다른 한쪽은 안 버릴 수가 없습니다. 각하는 자신의 운명과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완전히 숙명적 관계로 만들어놨습니다. 각하께서 희생되셔야만 자유민주주의가 회복되고 각하께서 희생되지 않으면 자유민주주의가 회복이 안 되는 그런 관계가 되어 있어요. 그래서 부득이 각하는 제가 희생시켰지만, 제가 각하의 무덤 위에 올라설 정도로 제 도덕관은 아직 그렇게 타락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한 적이 없습니다. 398)


[김재규 진술] 저는 10·26 혁명이 없었다면 이 나라에는 지금 현재까지도 자유민주주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천하의 공지사실입니다. 10·26 혁명이 있었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는 완전히 회복될 것이 보장되어 있어요. 이것은 최 대통령께서 권한대행 때 국민 앞에 공약했습니다. 국회에서는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었고요. 이런 일련의 행위가 10·26 혁명 없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를 생각할 때, 혁명의 목적은 완전히 달성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저는 죽어도 아무 여한이 없습니다. 저는 죽어도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키기 위한 투사로서, 영웅으로서 저는 평가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혁명과업을 마지막까지 수행하지 못하고… 하고 말았기 때문에 앞으로 해야 할 혁명과업이 많습니다. (···) 제 지금 기분이 전쟁에서는 승리를 한 장군이 우연한 기회에 적에게 포로가 된 기분입니다. 저는 혁명을 완성해놓고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409-10)


10장 대통령의 죽음을 둘러싼 증언(8회 공판, 12월 17일)


12월 17일 오전 10시 제8회 공판이 열렸다. 이날 궁정동 안가의 연회 담당 사무관인 남효주와 국군서울지구병원장 김병수 공군 준장 등 증인들이 법정에 나와 진술했다. 대통령의 주치의였던 국군서울지구병원장에 따르면 시신의 얼굴은 피로 흠뻑 젖은 수건으로 가려져 있었고 중정 경비원들이 보안조치라며 들여다보지 못하게 제지했다고 했다. 병원장이 시신의 신원을 확인한 것은 사망진단을 하기 위해 복부를 들추어보았을 때였다. 배꼽 아래 흰 반점이 눈에 들어오자 그는 시신이 박 대통령임을 알아보았다. 언젠가 박 대통령이 흰 반점을 제거할 수 없겠느냐며 보여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을 절명케 한 것은 제2탄이었다. 1탄을 발사한 후 김재규 부장은 권총이 고장 나 밖에 나가 박선호 피고의 총을 가져왔다. 그는 박 대통령에게 다가가 권총을 그의 머리에 바싹 들이대고 2탄을 발사했다. 이 총알이 그의 머리를 관통했다. 병원장은 이 두부 관통상으로 박 대통령이 소생 불능 상태가 됐다고 말했다. 445)


박 대통령의 사망을 궁정동 술자리에 참석했던 사람들 외에 가장 먼저 알았던 곳은 보안사였다. 병원장이 시신의 신원을 알아차린 직후 첩보 보고를 받은 보안사 참모장 우국일 준장이 전화로 병원장을 찾았다. 그는 병원장이 외부에서 온 경비원들의 감시 아래 있어 부자유스럽다는 낌새를 알아챘다. “지금 병원장은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묻는데 대해 ‘예’나 ‘아니오’로만 대답하시오. 병원에 들어온 시신이 비서실장이나 경호실장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닌데요.” 그러자 우 준장은 다급하게 다시 물었다. “그러면 ‘코드 원’입니까?” 이 말에 병원장은 짧게 응답했다. “예.” 우 준장은 곧바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찾았고 사건을 알게 된 전 소장은 다음 날 낮 청와대로 가 김계원 비서실장으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청취한다. 전 소장은 이때부터 권력의 중심권에 진입할 채비에 들어간 셈이다. 그 당시 이미 보안사는 나라의 중요 정세를 예의주시해온 핵심집단이었다. 451)


11장 보통군법회의 최후진술(9회 공판, 12월 18일)


재판부는 12월 18일 제9회 공판으로 사실심리와 증인진술, 증거조사 등을 모두 끝냈다. 공판이 시작된 지 14일 만에 이런 절차를 마친 것은 사법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초고속 재판이었다. 그것도 국가원수 살해라는 엄청난 사건임을 생각하면 법조인이면 누구든지 혀를 내두를 만큼 속도전으로 밀어붙인 재판이었다. 김재규 피고인의 최후진술을 마지막으로 남겨놓고 법정은 10분간 휴정에 들어갔다. 휴정하는 동안 재판부는 방청객들을 모두 내보냈다. 그가 최후진술에서 국가기밀을 공개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법정은 비공개로 들어갔다. 이날 오후 6시 반, 김 피고인은 물을 한 컵 청해 마시고는 정성껏 다듬은 문장과도 같은 최후진술을 전개해나갔다. 메모를 준비하지 않은 채 30여 분간 이어진 웅변을 통해 그는 ‘10·26 혁명’의 의의와 불가피성을 설득력 있게 정리해놓았다. 당시 비공개법정의 장막에 갇힌 그의 최후진술은 군 당국의 녹음기에만 기록돼 훗날의 역사적 평가와 재심을 기다려야 했다. 473)


[박흥주 진술] 실로 이번 일은 국민과 국가와 전 세계에 영향을 크게 미친 충격파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본인으로서는 예기치 않았던 일이고, 행동에 참여는 했지만 큰 계획도 모르고 실시했던, 생각해보면 많은 복잡한 생각을 가져오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 당일 갑자기 부장께서 “나라가 잘못되면 자네나 나나 죽는 거야”라고 말씀하시고 “민주주의를 위하여!”라고 외치며 들어가실 때, 본인은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단지 부장의 평소의 인격과 평소의 판단력과 본인 스스로 갖고 있던 사태·소요에 대한 핵심, 이런 것들만 생각하고 실제 행동에 옮겼던 것입니다. 물론 사건이 다 끝난 오늘에 와서는 생각되는 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가장 적절하고 가장 정확한 판단에 의해서 지시되는 사항으로 알고 거기에 순응했던 것입니다. 이제 본인은 궁정동의 비극이 발전하는 민주 대한의 활력소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유족 여러분에게 죄송한 말씀 드립니다. 이상입니다. 475)


[박선호 진술] 부장님은 다른 사람과 달라서 국민이 거꾸로 돌아가도 거꾸로 돌아갑니다가 아니고 바로 돌아갑니다 하는 것, 국민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고 아픈 데를 어루만져줄 수 있는 정확한 판단하에서 일을 집행하시는 점에서 제가 존경하고 따랐던 것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이 나라에서 정보 면에서 가장 정확하게 많이 알고 계시는 분이 정보부장을 3년가량 하신 김 부장님이라는 것은 국민 모두가 아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면 이분께서 직접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서 건의해도 안 되고 마지막으로 부산까지 가셔서 실제 체험을 하고 오셨고 또한 부산과 같은 상황이 서울에서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에 이르렀고, 막아지지 못했을 때는 옛날의 4·19는 어린아이 장난에 불과하다고 판단했고, 부장님도 그렇게 판단하심으로써, 이번 거사를 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로 인해서 최소한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이 갈망했던 민주 회복을 10~20년은 앞당겨놓은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476)


[김계원 진술] 각하로부터 말할 수 없는 총애와 신뢰를 받아오던 접니다. 하해 같은 은덕으로 생각해보지도 못하던 영광된 자리에까지 올라와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각하께 홍모의 보은도 드리지 못하고 마지막에 국립묘지까지 모시고 가지 못한 불충을 지금 백 번 만 번 사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만 각하의 명복을 빌고 그 유족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가호가 같이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각하를 그렇게도 숭상하시던 국민 여러분, 각하의 서거를 그렇게도 애통해하던 국민 여러분, 군 장병 여러분, 죄송합니다. 각하 보필을 제대로 못 한 것을 사과드립니다. 바라건대 새로운 영도자를 모시고 모든 국민이 일치단결해서 각하께서 이룩하지 못한 민족중흥의 대업을 한시바삐 완성시켜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 명분이 제아무리 좋고 어떠한 미명하에서도 이와 같은 인륜 도덕을 무시하는 모반사건이 이 나라에서 다시 재현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런 사건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되어야 하리라고 생각됩니다. 477)


[김재규 진술] 오늘날 자유민주주의는 우리 대한민국 전체 국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3,700만이 다 같이 갈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을 회복시키는데 어찌하여 내란죄의 적용을 받아야 되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또 10·26 혁명은 순수하고 깨끗합니다. 집권욕이나 사리사욕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오로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겠다는 일념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혁명의 결과 자유민주주의는 완전히 회복되었고 보장되었습니다. (···) 또 이 혁명은 5·16 혁명이나 10월 유신에 비해서 그야말로 정정당당합니다. 허약한 자유민주당 정권을 무력하다는 이유로 밀어치우는 것과 앞마당에서 한바탕해서 자유주의를 말살하는 것에 비하면, 서슬이 시퍼렇고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유신체제를 정면에서 도전해서 유신체제를 타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데 완전히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10·26 혁명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정정당당한 혁명이다라고 생각합니다. 479)


[김재규 진술] 나는 최 대통령 각하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자유민주주의가 대문 앞에까지 와 있는데 지금 문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가 들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빨리 회복시키는 데 절대로 혼란이 올 리 없습니다. 자유당 때 자유민주주의 해서 혼란이 온 것이 아닙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안 하고 부정선거를 해서 혼란이 온 겁니다. 공화당 정권 되고 난 이후에 국민을 우롱하는 사건을 만들어내니까 혼란이 왔지, 자유민주주의 해서 혼란이 온 게 아닙니다. 물론 지나치게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3~4개월이나 5~6개월이면 충분하지 1년이나 1년 반씩 끌 아무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빨리 민주주의 회복을 안 하고는, 자꾸 끌다가는 내년 3~4월이면 틀림없이 민주 회복 운동이 크게 일어납니다. 그때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 나는 그래서 이런 문제가 될 만한 요인을 미리미리 없애라고 권고드리고 싶습니다.  482)


[김재규 진술] 나는 지금 모든 것을 체념하고 내 앞일을 청산하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을 때 가장 염려스러운 것이 내가 한 혁명이 원인이 되어서 이 나라에 혼란이 오고 경우에 따라서는 국기마저 흔들릴 요인이 생길까 봐 몹시 겁이 납니다. (···) 일시적인 감정이나 감상에 사로잡혀서 국사를 그르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나는 오늘 마지막으로 이 나라에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켜놓았다, 20~25년 앞당겨놨다 하는 자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에 자유민주주의가 만만세가 되고 10월 26일 혁명이 만만세가 되도록 기원합니다. 다만 내가 이 세상을 빨리 하직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가 이 나라에 만발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가는 그 여한이 한량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이 기약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못 보았다뿐이지 틀림없이 오기 때문에 나는 웃으면서 갈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심판장님께서는 소신껏 심판해서 제게 알맞은 형벌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483)


12장 항소심 진술 - 박정희의 술과 여자(고등군법회의 2~3회, 1980년 1월 23, 24일)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김재규 등 피고인 7명은 고등군법회의에 항소했다. 1980년 1월 22일 오전 10시, 계엄고등군법회의가 개정됐다. 이날은 김계원·김태원 피고인만 출정시켜 검찰부가 1심 공판 때의 사실심리 내용을 확인하는 데 그쳤다. 검찰부는 1심에서 김계원 피고인에게 적용됐던 ‘내란 목적 살인죄’를 ‘단순 살인’으로 바꾸었다. 다음 날인 1월 23일 항소심 2회 공판이 열렸다. 김재규·박선호·이기주·유성옥·유석술 피고인 등 5명에 대한 검찰과 변호인단의 사실심리가 진행됐다. 유일한 현역 군인인 박흥주 대령은 단심으로 이미 사형이 확정된 상태였다. 1980년 1월 24일 오전 10시, 고등군법회의 3회 공판이 열렸다. 피고인들이 진술하는 것으로 마지막인 결심공판이다. 대법원의 상고심은 대법관들이 군법회의가 법률을 제대로 적용했는지만을 검토하는 이른바 법률심이다. 대법원은 군법회의 재판이 다시 검토해야 할 만한 잘못이 없다고 판시했다. 이로써 이들의 사형이 확정된 것이다. 486)


1심에서의 판결은 그대로 2심 항소심에 이어졌다. 심지어 군사법원에서 내려진 판결과 대법원의 심리결과 간에도 큰 차이가 없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재판이 이미 정해진 결론을 실천하기 위한 요식행위가 아니냐는 비판 시각에 상당한 근거를 제공했다. 재판부는 이 판결문을 작성하는 데 법률가뿐만 아니라 정치학자, 역사학자 그리고 수려한 문장으로 이름 있는 언론인 등에게 자문을 구했다. 지식인들은 자문 요청에 “법률적으로만 충실하게 하는 게 좋겠다”는 말로 대부분 거절했다. 보통군법회의 판결문(1979년 12월 20일)의 최종 선고는 이러하다. 〈피고인 김재규·김계원·박선호·박흥주·이기주·유성옥·김태원을 각 사형에, 유석술을 징역 3년에 처한다. 피고인 유석술에 대하여 판결 선고 전 구금 일수 중 50일을 위 징역형에 산입한다. 압수된 증거 제36호 및 37호, 32구경 권총 1정과 동 실탄 4발은 김재규로부터 몰수한다.〉 1979년 12월 20일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재판장 육군 중장 김영선 521-3)


# 피고인 김계원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형을 복역하다가 1982년 5월 1일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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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끝의 버섯
애나 로웬하웁트 칭 지음, 노고운 옮김 / 현실문화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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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얽히게 하는 것들 


"'제1의 자연'은 (인간을 포함한) 생태적 관계를 의미하고 '제2의 자연'은 자본주의적으로 변형된 환경을 뜻한다고 상상해보라. 대중적으로는 생소한, 자연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윌리엄 크로넌의 책 『자연의 메트로폴리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내 책은 '제3의 자연'을 제안하는데, 그것은 곧 자본주의 속에서도 삶을 살아내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제3의 자연을 깨닫기 위해서라도 미래가 단일한 방향으로 뻗어나간다는 가정을 버려야 한다. 양자장의 가상 입자들처럼 복수複數의 미래가 수많은 가능성과 함께 출몰한다. 제3의 자연은 이런 시간적 다성음악 안에서 창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보에 관한 이야기들이 우리 눈을 멀게 했다. 이 책은 진보의 이야기 없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삶이 얽혀 있는 방식의 '열린 배치open-ended assemblages'를 그려낼 것이다. 이들 열린 배치가 많은 종류의 시간적 리듬과 조화를 이루면서 합쳐지기 때문이다. 나의 형식 실험과 내가 펼치는 주장은 서로를 뒷받침한다."(9-10)


프롤로그: 가을 향기 


"이 책은 불확정성과 불안정성의 상황, 즉 안정성에 대한 약속이 부재하는 삶을 탐구하기 위해 버섯과 함께 떠난 나의 여행 이야기이다. 1991년에 소련이 무너지자 갑자기 정부 지원을 못 받게 된 수천 명의 시베리아인이 버섯을 따러 숲으로 달려갔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내가 쫓는 것이 이러한 버섯은 아니지만, 이 이야기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담겨 있다. 바로 우리 것인 줄만 알았던 통제된 세계가 실패했을 때, 통제받지 않는 버섯의 삶이 선물이자 길잡이가 되어준다는 것이다." "한때 우리는 근대화와 진보의 꿈에 기대어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다 같이 알고 있다고 여겼다. 이제 내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꿈에 대한 비판 대신, 그런 발판 없이 사는 삶에 상상력을 동원해 도전해보는 일이다. 만약 우리가 송이버섯 진균이 갖는 매력에 마음을 연다면, 송이버섯은 우리를 호기심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다. 그러한 호기심이야말로 불안정한 시대에 협력해 생존하기 위한 첫 번째 필요조건이다."(22-4)


1부 남은 것은 무엇인가? 


1. 알아차림의 기술 


"1910년대 오리건주 케스케이드산맥 동부의 우뚝 솟은 폰데로사소나무와 포틀랜드에 밀집해 있는 목재 저장소 간에 산업적 연결망[철도]이 연결되었다. 벌목된 소나무가 멀리 떨어진 시장으로 마구 실려 나갔다. 제재소는 새로운 정착민을 맞이했으며, 제재소 노동자가 늘어감에 따라 마을도 성장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이야기다. 개척자와 진보 이야기, 그리고 '텅 빈' 공간이 산업 자원을 지닌 장소로 탈바꿈한 이야기다.〉" "그러나 벌목꾼의 일자리는 목재 회사가 기계화되고 최상의 목재가 고갈되면서 점점 줄어들었다. 1989년에 이르러서는 이미 많은 제재소가 문을 닫았고, 벌목 회사들은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가고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이야기다. 산업적으로 탈바꿈한다는 것은 생계 터전을 잃고 풍경을 훼손하게 될 물거품 같은 약속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런 기록에 미처 담기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쇠락의 결말로 마친다면 모든 희망을 저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46-7)


"산업화의 약속이라는 유혹과 그에 따른 붕괴를 넘어, 훼손된 풍경에서 창발하는 것은 무엇인가? 1989년 무렵 오리건주의 벌목된 숲에서는 또 다른 일이 시작됐다. 바로 야생 버섯 무역이다. 처음부터 이것은 전 세계의 붕괴와 연관된 일이었다. 1986년 체르노빌 참사로 유럽의 버섯이 오염되자 무역업자들은 버섯을 구하러 태평양 연안 북서부로 오게 됐다. 일본이 높은 가격에 버섯을 수입하기 시작했을 당시는 실직 상태의 인도차이나 난민들이 캘리포니아주에 자리를 잡던 시기와도 맞아떨어지는데, 이때 버섯 무역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수천 명이 이 새로운 '백금'을 얻기 위해 태평양 연안 북서부로 몰려들었다. 숲을 두고 '일자리냐 환경이냐' 하는 논쟁이 한창 진행되던 때였지만, 어느 쪽도 버섯 채집인을 신경쓰지 않았다. 일자리 옹호론자들은 건강한 백인 남성의 임금 계약만을 상상했다. 환경보전론자들은 인간이 숲을 교란하지 못하게 하려고 투쟁했다. 그러나 수천 명의 버섯 사냥꾼은 대체로 눈에 띄지 않았다."(47-8)


"대체로 우리는 불안정성을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에서 예외적 상황이라 여긴다. 불안정성은 체계에서 '예외'라고 말이다. 그런데 만약 불안정성이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 시대의 조건이라면 어떨까? 아니, 달리 말해서 우리 시대가 불안정성을 인지할 단계에 이른 것이라면 어떨까?" "불안정성은 타자들에게 취약한 상태를 말한다. 예측 불가능한 마주침은 우리를 변모시킨다. 우리는 우리 자신조차 통제할 수 없다. 공동체의 안정적인 구조에 의존할 수 없는 우리는 가변적인 배치로 내던져지고, 이로써 우리와 관계된 타자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재형성된다. 우리는 현재의 상황에 의존할 수 없다. 우리의 생존 능력을 포함한 모든 것이 유동적이다. 불안정성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다른 방식의 사회 분석이 가능하다. 불안정한 세계는 목적론이 없는 세계다. 시간 본연의 무계획성을 뜻하는 불확정성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지만, 불안정성을 놓고 생각해보면 불확정성도 삶을 가능케 한다는 사실이 명확해진다."(51-2)


"배치assemblage는 유용한 개념이다. 생태학자는 때로 고정되고 제한된 함의를 갖는 생태적 '공동체'를 벗어나 배치로 관심을 돌렸다. 하나의 배치 안에 존재하는 여러 생물종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서로 영향을 끼치는지는 결코 정해져 있지 않다. 어떤 것은 서로를 방해하고 (혹은 먹고) 어떤 것은 생존을 위해 협력한다. 또 어떤 것은 자신들이 같은 장소에 있음을 이제 막 우연히 알게 됐다. 이처럼 배치는 열린 모임gathering이다." "배치에서는 의도치 않은 조율coordination 패턴이 발달한다. 그런 패턴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다양한 삶의 방식이 모여 빚어내는 시간적 리듬 및 규모scale의 상호작용을 지켜본다는 뜻이다." "배치는 자본과 국가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므로, 정치경제가 작동하는 방식을 관찰하기에 좋은 장소가 된다. 자본주의에는 목적성이 없다고 할 때, 우리는 어떤 것이 이미 구조적으로 마련된 방식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병치되는 과정을 통해서 한데 모이는지 또한 볼 필요가 있다."(56-8)


2. 협력으로서의 오염


"어떻게 모임은 그 부분들의 합보다 더 큰 '사건'이 되는가? 한 가지 답은 오염이다. 우리는 마주침을 통해 오염된다. 우리가 다른 존재들에게 길을 열어줌에 따라 마주침이 우리 존재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오염을 통해 세계-만들기 프로젝트가 변화하면 상호적인 세계와 새로운 방향이 창발할 수도 있다. 모든 존재는 오염의 역사를 수반한다. 순수성은 선택지에 없다. 불안정성을 유념하는 태도가 갖는 한 가지 장점은 상황에 맞게 변화하는 것이 생존의 방식임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는 점이다. 여기서 생존이란 무엇인가? 미국에서 유행하는 판타지를 살펴보면, 생존이란 항상 다른 존재와 싸워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을 뜻한다. 미국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외계 행성 이야기에 등장하는 '생존'은 정복과 팽창의 동의어다." "그러나 어떤 생물종이든 살아 있기 위해서는 살기에 적합한 협력이 필요하다. 협력이란 차이를 수용하며 일한다는 의미로, 이것은 곧 오염으로 이어진다. 협력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죽는다."(63-4)


3. 규모에 따른 문제 


인터루드: 냄새 맡기


"우에다 고지는 교토의 전통 시장에서 아름답게 꾸민 채소 가게를 경영한다. 그가 말하길, 송이버섯 시즌 동안 상점을 방문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버섯을 구매하기보다는(그가 파는 송이버섯은 비싸다) 냄새를 맡으러 온다고 한다. 가게에 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일본의 송이버섯 애호가들은 송이버섯 냄새가 요즘 젊은이들이 절대 알지 못하는 과거를 회상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송이버섯에서는 조부모님을 찾아뵙고 잠자리를 쫓던 어린 시절 및 시골 생활 같은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지금은 산에서 밀려나 사라지고 있는 툭 트인 소나무 숲을 생각나게 한다. 그 냄새와 함께 많은 소소한 기억들이 돌아온다. 한 여성은 그 냄새가 시골 마을에서 실내문으로 사용한 장지문을 생각나게 한다고 설명했다. 그의 할머니가 새해마다 문종이를 갈았고, 새해의 버섯을 싸는 데 그 종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송이버섯은 잃어버린 시간temps perdu의 냄새가 난다."(99-101)


"일부 일본인들이 자신들이 교란한 숲에서 노스텔지어 냄새를 맡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러한 야생의 공간에서 항상 노스텔지어의 감정만을 떠올리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유럽 출신 사람들은 그 냄새를 견디지 못한다." "이러한 불확정성에는 아주 흥미로운 자연-문화의 매듭이 있다. 서로 다른 방식의 냄새 맡기와 서로 다른 속성의 냄새가 함께 쌓여 있다. 버섯 안에 함께 응축되어 있는 모든 문화사와 자연사를 이야기하지 않고 송이버섯 냄새를 설명하기란 불가능한 것 같다.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뒤얽힌 것을 완벽히 해체하려고 하면─예를 들면, 인공적인 송이버섯향이 그러한데─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 "송이버섯 냄새는 기억과 역사를 둘러싸고 뒤엉키며, 비단 인간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다. 냄새는 그 자체로 강력한 박진력을 가진 정동affect으로 가득한 매듭 속에 여러 존재 방식을 집합시킨다. 송이버섯 냄새는 마주침을 통해 발생했기에 우리에게 역사의 형성 과정을 보여준다."(104-7)


2부 진보 이후에: 구제 축적 


4. 가장자리를 작업하기


# 구제salvage. 자본주의적 통제를 받지 않고 생산된 가치를 써먹는 것. 석탄, 석유 같은 자연 원료나 공동체에서 길러진 숙련 기술 등이 있다.


"오리건주의 숲에서 일하는 송이버섯 채집인과 일본에서 그 버섯을 먹는 사람을 연결하는 공급사슬은 놀라운 일과 문화적 다양성으로 가득 차 있다. 거기에는 우리가 공장 노동을 통해 알고 있는 자본주의가 거의 없다. 그러나 공급사슬은 오늘날의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대목 중 하나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노동이나 원료를 합리화하지 않고도 부의 축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합리화하는 대신에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공간을 가로질러서 번역하는 작업이 필수적인데, 나는 그러한 공간을 생태학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빌려 '패치'라고 부르겠다. 사쓰카 시호에 따르면, 번역은 하나의 세계-만들기 프로젝트를 또 다른 세계-만들기 프로젝트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번역이라는 말 때문에 언어에 주목하게 되지만, 이는 부분적인 조율이 일어나는 다양한 형식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차이가 존재하는 장소를 교차하며 행해지는 번역이 '바로' 자본주의다. 그러한 번역이 행해져야만 투자자는 부를 축적할 수 있다."(118-9)


5. 오리건주의 오픈티켓


"21세기의 첫 십 년 동안 오리건주 송이버섯 상업의 중심지는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곳, '인적이 끊긴 어딘지도 모르는 곳'이었다. 버섯 거래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곳이 어디인지 알았지만, 그곳은 마을이나 휴양지가 아니었다. 공식적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구매인은 고속도로를 따라 한 무리의 텐트를 세웠고 매일 밤마다 채집인, 구매인, 현장 중개인이 그곳에 모여 생생한 서스펜스와 액션의 무대를 연출했다. 내가 합성해서 만든 그 현장의 이름은 '오리건주의 오픈티켓'이다." "오픈티켓은 자유를 수행하는 장소이다. 매일 밤 교환되는 것은 버섯과 돈만이 아니다. 채집인과 구매인, 현장 중개인은 그들 각자가 이해하는 의미대로 극적인 자유를 공연하는 것에 관여하고, 서로를 격려하면서 자신들의 트로피(돈과 버섯)와 함께 자유의 공연을 교환한다. 때때로 정말 중요하게 교환되는 것은 자유이며, 버섯과 돈이라는 트로피는 자유 수행의 연장선에 존재하는 증거처럼 보였다."(142-3)


"여기서 채집인들이 이야기하는 자유란 용어는 개인의 합리적 선택의 규칙성을 논하기 위해 경제학자들이 사용하고 상상하는 그것이 아니다. 정치적 자유주의도 아니다. 버섯 관계자들의 자유는 불규칙적이며, 합리화의 외부에 존재한다. 공연 성격을 띠고, 공동체에 따라 다양하며, 기운이 넘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장소의 소란스러운 코즈모폴리터니즘과 관련이 있다." "오픈티켓은 권력의 집결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기에 이 공간은 도시와는 정반대다. 사회질서는 보이지 않는다." "오픈티켓은 도시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이 뒤죽박죽 섞인 곳이다. 백인 베트남전쟁 참전용사들은 전쟁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해 제어할 수 없는 공황 발작을 야기하는 군중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고 했다. 몽인과 미엔인은 자유를 약속해놓고 조그만 도시 아파트에 자신들을 몰아넣은 미국에 실망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아파트 생활에서 벗어나 산속의 삶이 주는 자유를 누렸다. 돈은 자유보다 덜 중요했다."(143-5)


"송이버섯 채집은 '노동'이 아니지만 노동이라는 유령에 사로잡혀 있다. 재산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송이버섯 채집인은 마치 숲이 대규모 공유지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 땅은 공식적으로 공유지commons가 아니다. 주로 국유림이며, 근처에 주 정부로부터 완전히 보호받는 사유지가 있다. 그러나 채집인들은 최선을 다해 재산에 대한 질문을 무시한다. 백인 채집인은 연방 자산에 대해 특히 짜증을 내며 사용 제한을 무산시키려고 최선을 다한다. 동남아시아계 채집인은 일반적으로 정부에 대해서 더 관대한데, 정부가 좀 더 많은 일을 하기 바란다." "그러나 국유림 내에는 더는 사용되지 않고 버려진 벌목 목재 운반용 도로가 복잡하게 교차한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채집인은 광활한 산림지를 돌아다닐 수 있다. 젊은 사람들은 또한 금지 구역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가장 고립된 버섯 자생 지역을 찾아서 수 마일을 등산할 의향이 있다. 버섯을 구매인에게 선보일 때 아무도 그에 대해 따져 묻지 않는다."(148-50)


"채집인은 자신들이 배제될 가능성이 유령처럼 떠도는 공유지에 계속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자산을 법적으로 소유자 미정인 상태로 묶어두려고 최선을 다한다. 자유와 유령에 사로잡힘은 동일한 경험의 양면이다. 그것은 다음 일로 넘어가는 방법인 동시에 이전 일을 기억하는 방법이다. 채집은 자유를 향한 열병을 앓으며 행해지기에, 그것은 산업 생산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 즉 사람과 사물이 분리되는 일에서 벗어나게 된다. 버섯은 아직 소외된 상품이 아니다. 버섯은 채집인이 실천하는 자유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유일한 이유는 그 양면적 경험이 이상한 종류의 상업에서 인정되기 때문이다. 구매인은 '자유 시장 경쟁'이라는 극적인 공연에서 연기하며 자유의 트로피를 무역으로 번역한다. 그리하여 집중된 권력, 노동, 자산, 소외를 유보시키는 것이 강력하고 효과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면서, 시장의 자유는 뒤죽박죽 섞인 자유의 무더기 속으로 들어간다."(151-2)


6. 전쟁 이야기 


"태평양 연안 북서부의 산과 숲에는 변방 낭만주의frontier romanticism가 강하게 나타난다. 백인한테서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미화하면서 '또한' 그들을 말살시키려 했던 정착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성향이 흔하게 나타난다. 그들은 자급자족, 극렬 개인주의, 백인 남성성의 심미적 힘을 자랑스러워한다. 많은 백인 버섯 채집인은 미국의 해외 점령, 제한된 정부limited government, 백인우월주의를 옹호한다. 그러나 이 북서부의 시골 지역은 히피와 인습타파주의자들iconoclasts도 모이는 곳이다. 미국-인도차이나전쟁에 참전한 백인 참전용사들은 이 거칠고 독립적인 혼합물에 자신들의 전쟁 경험을 가지고 들어오면서 분노와 애국심, 트라우마와 위협의 독특한 혼합물을 첨가한다. 전쟁에 대한 기억은 이같이 적합한 곳을 형성하는 데 방해가 되는 동시에 생산적인 것이다. 전쟁은 피해를 주지만 동시에 사나이를 만든다고 그들은 말한다. 자유는 반전反戰뿐 아니라 전쟁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163-4)


"캄보디아인 난민은 이미 구축되어 있는 태평양 연안 북서부의 유산에 쉽게 동참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미국에서 자유와 관련된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어야만 했다. 이러한 역사는 미국의 폭격과 그 뒤를 이은 크메르루즈 정권과 내전의 공포뿐만 아니라, 그들이 미국으로 입국한 시기에도 영향을 받는다. 즉 1980년대가 되자 미국의 복지 제도는 끝이 났던 것이다. 어느 누구도 캄보디아인에게 복지 수당이 포함된 안정적인 직업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유란 무엇인가? 백인 참전용사가 자유는 인종적으로 완전히 분리된 풍경 속에 있다고 상상했다면, 캄보디아인은 전쟁이 어떤 사람을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편에서 저편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두 번째로, 백인 참전용사가 전쟁으로부터 얻은,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자유를 실행하기 위해 가끔 산으로 들어왔다면, 캄보디아인은 미국식 자유의 숲에 회복이라는 좀 더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하고 있었다."(166-7)


"미국-인도차이나전쟁 기간 동안 몽 사회는 라오스를 정복하고자 하는 미국의 최전방이 되었다. 방 파오 장군이 동원한 마을들 전체가 농업을 포기하고 CIA가 공중에서 투하한 식량 배급으로 연명했다. 그들이 미국의 폭격기를 유도하고 최전방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싸운 덕분에 미국인들은 공중에서 그 나라를 파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전략으로 인해 몽인과 폭격의 목표물이 된 라오인 사이의 갈등 관계가 악화된 것은 당연한 결과다. 몽계 난민들은 미국에서 비교적 잘 지내고 있지만, 전쟁 기간에 보고 겪은 라오스의 풍경이 몽계 난민들의 마음 속에 생생히 살아서 자유에 대한 정치적 견해와 매일 실행하는 자유의 행위, 둘 모두의 형상을 빚는다." "버섯 채집을 통해 라오스와 오리건주, 전쟁과 사냥이 함께 겹겹이 층을 이루며 쌓인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라오스의 풍경이 현재의 경험에 스며든다. 내가 버섯에 대해 질문하면 몽계 채집인들은 라오스를, 사냥을, 전쟁을 말하면서 그 질문에 답했다."(169-72)


"미국이 라오스에 가한 폭격으로 시골 인구의 25퍼센트가 도시로, 그리고 외국으로 피난을 가야만 했다. 라오인은 불교 신자로서 사냥에 반대하는 편이다. 대신에 그들은 버섯 캠프의 경영인이다." "백인 채집인처럼 내가 아는 라오인들도 출입이 금지된 곳에 숨겨진 송이버섯 패치를 찾아다녔다. (반면에 캄보디아계, 몽계, 미엔계 채집인은 잘 알려진 공유지를 주의 깊게 관찰하는 방식을 더 자주 사용했다.) 라오계 채집인이 백인과 공유하는 또 한 가지 특성은 법망을 벗어나 행하는 약탈과 그에 따른 위험에서 벗어나는 능력을 즐겨 자랑한다는 점이다. (다른 채집인들은 좀 더 조용하게 법을 어겼다.) 라오인은 기업가로서, 중재에 뒤따르는 온갖 위험을 감수하고 즐거움을 누리는 중재자였다." "대부분의 라오계 채집인은 난민 신분이었기 때문에 미국 시민권자였으며, 자유의 개념을 포용함으로써 자신들이 미국 사회에서 더욱 잘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매진했다."(173-5, 178)


7. 국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두 종류의 아시아계 미국인 


"개신교의 부흥운동은 미국독립혁명 이래로 미국 정치 조직에서 '우리'를 구성하는 데 열쇠가 되어왔다. 더욱이 개신교 교회는 무표적unmarked 자유주의 형식을 장려하면서 자유주의적이지 않은 기독교 교리를 거부하도록 디자인된 20세기 미국의 세속화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수전 하딩은 20세기 중반에 미국의 공교육이 어떻게 세속화 프로젝트에 의해 형성되었는지를 연구했는데, 특정한 형태의 기독교가 '관용'의 예로서 장려되는 반면, 다른 형태의 기독교는 그 이전 시대의 이국적인 잔존물로서 지방화되었다는parochialized 점을 증명했다. 그렇다면 그 특정한 세속적 형식에서는 우주론적 정치학cosmological politics이 기독교를 초월한다. 즉 미국인이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가 아니라 미국 민주주의로 개종되어야 한다. 이민자는 백인 미국인의 행동과 담화 습관을 온전하게 따름으로써 '개종'될 것이라고 기대되었다. 담화는 특히 중요했다. 그것은 '우리'를 말하는 것이었다."(192-3)


"일부 백인 채집인과 구매인은 인종 통합에 반대하고, 다른 집단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자신들만의 가치를 즐기고 싶어 한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자유'라고 부른다. 그것은 다문화 방침이 아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인종 통합에 반대하는 정서가 미국 역사상 가장 코즈모폴리턴적인 문화 형성에 일조했다. 그들이 동화를 해체하자 새로운 형성체가 창발한다. 중앙에서 세운 방침이 없기 때문에 이민자와 난민은 자신들이 가진 것 중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가능성을 움켜쥔다. 그들의 전쟁 경험, 언어, 문화가 그러한 가능성이다. 그들은 '자유'라는 단어 하나로 미국식 민주주의에 합류한다. 그들에게는 초국적 정치와 무역의 자유가 있다. 그들은 이전 시대의 이민자와는 대조적으로 뼛속까지 미국인이 되려고 공부할 필요가 없다. 복지국가의 뒤를 이어 동시에 발생한 자유에 관한 이슈가 제멋대로 다양하게 존재함에도 현시대의 중심을 차지했다."(198-9)


8. 달러화와 엔화 사이에서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은 모든 국가가 자국의 제품을 수출하고 싶어 하는 최고의 목적지였다. 그러한 미국은 일본산 수입 상품에 엄격한 할당량 제도를 적용했다. 역사학자 로버트 캐스틀리는 일본이 미국의 수입 할당량 제한을 피하기 위해 어떻게 한국의 경제 건설을 도왔는지 설명한다. 일본의 무역업자들은 경공업을 한국으로 이전함으로써 미국에 좀 더 많은 상품을 자유로베 수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은 일본의 직접 투자에 반감을 드러냈다. 그래서 일본은 캐스틀리가 '내놓기putting-out' 방식이라고 부른 것을 도입했다. 〈그 방식은 상인(또는 기업)이 하청업체가 상품을 생산하거나 마무리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대출, 신용, 기계류 또는 장비를 조달하고, 그렇게 생산된 상품을 상인(또는 기업)이 멀리 떨어진 시장에 판매하는 방식을 지칭한다.〉" "내놓기 시스템은 수익성이 더 적은 제조업과 낡은 산업 기술을 한국으로 이전하면서 일본의 비즈니스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213-4)


"일본의 위협은 미국에 혁명을 촉발시켰다. 역흑선은 미국적 체계를 전복시켰으나 그것은 미국의 자체적인 노력에 따른 결과였다. 대중은 미국이 쇠락할 가능성에 공포심을 느꼈고,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결코 발언 기회를 얻지 못했을 소수의 주주행동주의 투자자activist shareholders와 경영대 교수들이 미국인 기업들을 해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힘을 회복하기 위해 기업을 전문 경영인의 손에 맡기지 않고 기업의 주인인 주주들이 되찾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그들은 기업을 사서 자산을 뺀 후 되팔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이르자 '기업 담보 차입 매수'의 급진적인 성향이 '기업 인수 합병'의 주요 투자 전략이 되었다. 이 전략은 투자자에게 매우 유리했기 때문에, 20세기가 끝날 무렵 미국의 비즈니스 리더들은 이 전략으로 전환하게 된 계기가 비즈니스 세계에서 우위를 점유하기 위한 몸부림의 일부였다는 것을 잊어버렸고, 진화 과정을 통해 도달한 첨단 기술인 것처럼 이야기를 재구성했다."(216-7)


"1985년이 되자 미국의 비즈니스 리더들은 이 상황으로 인해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은 '플라자합의Plaza Accord'라는 국제 협약을 고안해냈다. 달러화의 가치는 낮춰졌고 엔화의 가치는 올라갔다. 1988년이 되자 엔화의 가치는 달러화보다 거의 두 배 가깝게 높아졌다. 일본 소비자는 송이버섯을 포함해 거의 모든 외국 제품을 살 수 있었다. 민족적 자부심이 높아졌다. 이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일본 제품의 가격이 너무 높아졌기 때문에 일본 회사가 상품을 수출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일본 회사들은 더 많은 생산 공정을 해외로 옮겨가면서 그러한 상황에 대응했다. 한국, 대만, 동남아시아에 있는 그들의 공급자들 또한 통화 가치의 변화에 타격을 받았고 똑같이 반응했다." "공급사슬 자본주의는 세계 곳곳에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쇼크 상태에 빠진 일본은 더는 공급사슬을 좌지우지하지 못하게 되었다."(219-20)


9. 선물에서 상품으로, 그리고 그 반대로 


"나는 사회적 교환의 유형으로서 선물의 특별한 속성에 주목한 인류학적 유산의 도움을 받고자 한다. 브로니슬라브 말리노프스키는 쿨라환kula ring, 즉 뉴기니의 멜라네시아 동부 지역에서 만들어진 목걸이와 조개 팔찌의 교환을 연구하면서 선물의 특별한 속성에 주목했다. 놀라운 사실은 그 장신구들이 일반적인 교환의 매개체도 아니고 자체적으로 흥미로운 특성을 지닌 것도 아니기에 특별히 유용한 물건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 장신구들은 '오로지' 쿨라에서 가지는 역할 때문에 가치가 있다. 그것들은 선물로서 관계와 명성을 만든다. 이것이 그것들이 가치다. 그러한 종류의 가치는 경제적 상식을 뒤엎는다." "쿨라에서 사물과 사람은 함께 형성되는데, 선물을 통해 사물은 사람의 연장extension이 되고 사람은 사물의 연장이 되기 때문이다. 쿨라환의 귀중품들은 그것들이 형성하는 개인 간의 관계를 통해 알려진다. 그리하여 사물은 사용되거나 상품으로 교환될 때만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226-7)


"많은 분석가는 가치를 생산하는 양상에서 쿨라와 자본주의 사이의 차이가 너무 커 보였기에, 가치를 만드는 서로 다른 논리의 '선물 경제'와 '상품 경제'로 세계를 나눌 수 있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이분법이 그렇듯이, 선물과 상품의 대조는 현실 세게에서 제대로 이루어지기 힘들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선물과 상품의 이상적인 유형은 병치되어 있거나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거나 그 성격과 정의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송이버섯의 최종 목적지를 살펴볼 때도 유용하다. 일본에서 송이버섯은 거의 항상 선물용으로 쓰인다. 가장 낮은 등급의 송이버섯은 슈퍼마켓에서 팔리고 식품 제조업에서 재료로 사용된다. 그러나 더 높은 등급의 송이버섯은 알려진 대로 전형적인 선물이다. 송이버섯을 그냥 먹으려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송이버섯은 관계를 형성하며, 이 버섯은 선물로서 그러한 관계와 분리될 수 없다. 송이버섯은 선물 경제에서 가치를 정의 내리는 특성, 즉 사람이 연장된 것이다."(227-9)


"특산물 식료품점과 비싼 음식점은 자신의 고객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 최고의 송이버섯은 이런 곳에서 팔린다. 어떤 식료품점 주인은 자신이 거래하는 최고의 고객들을 잘 안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결혼식과 같이 송이버섯을 사용할 수 있는 의례가 언제 열릴지 알고 있다. 그 식료품점 주인에게 버섯을 판매하는 중간 도매업자 또한 이미 특정 고객을 생각하고 있다. 그가 그 고객들에게 연락하는 것은 단지 상품을 판매하려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송이버섯의 가치는 상업적인 교환에서만 기인하지 않고 주는 행위에서도 만들어지는 것이다." "많은 분야와 문화에서 중재인은 자본주의적 상품을 다른 가치 형태로 전환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는 사람과 사물이 생산되는 비자본주의적 방식과 공존하는데, 이렇게 공존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가치 번역의 행위에 이러한 중재인이 관여한다."(232-4)


"그러나 밤이 깊어지면 그들을 둘러싼 버섯과 돈은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 된다. 버섯이 일본으로 수송되기 위해 주기장駐機場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되면, 그 버섯에서 그것을 트로피로 만들었던 독특한 자유의 경제와 관련된 흔적을 찾기는 힘들어진다." "송이버섯은 그것이 삶의 선물로서 시작되고 선물로 끝나는 자본주의 상품이다. 그것이 온전히 소외된 상품으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몇 시간일 뿐이다. 주기장에서 수송 상자에 담겨 재고품의 일부로 기다리는 시간과 비행기에 실려 이동하는 시간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은 중요하다. 공급사슬을 지배하고 구조화하는 수출업자와 수입업자 간의 관계는 그 시간의 가능성 안에서 접합되어 있다. 재고품으로서의 송이버섯은 수출업자와 수입업자에게 이윤을 낳게 하는 산출算出이 가능하도록 하기에, 그들의 입장에서는 송이버섯의 상품사슬을 조직하는 작업이 가치 있는 일이다. 이것은 비자본주의적 가치 체제로부터 자본주의적 가치를 창출하는 구제 축적이다."(236-9)


10. 구제 리듬: 교란되고 있는 비즈니스


"자본주의 그 자체는 상품과 사람을 전 세계적으로 모집하면서 배치의 성격을 띤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또한' 부분들의 합으로 제한하는 기묘한 장치인 기계의 특성이 있는 것 같다. 이 기게는 우리가 그 내부에서 삶을 살아가는 총체적 기관total institution이 아니다. 대신에 이 기계는 세계를 자산으로 바꾸기 위해 생활환경을 번역한다. 그러나 모든 번역이 자본주의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가 후원하는 모임은 개방형이 아니다. 한 무리의 기술자와 경영인이 불쾌한 부분을 제거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법정과 총부리에서 나오는 힘이 있다. 이는 기계가 고정된 형태로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일본-미국 무역 관계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내가 주장했듯이, 자본주의적 번역의 새로운 유형은 항상 생겨난다. 쉽게 가늠할 수 없는 마주침은 자본주의의 형태를 빚는 과정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야생의 풍성함은 아니다. 모종의 헌신이 힘force을 통해 지속된다."(244-5)


# 총체적 기관total institution.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이 말한 개념으로, 요양원, 특정 병상, 수도원, 감옥, 원양어선 등과 같이 구성원들이 사회에서 격리되어 살아가야 하는 닫힌 체제의 사회적 기관을 지칭한다.


"나의 생각 중 두 가지가 특히 중요하다. 첫째, 소외는 자본주의적 자산이 형성될 수 있는, 얽힘이 풀린disentanglement 형태다. 자본주의 상품은 다음 단계의 투자를 가능하게 하는 발판으로 사용되기 위해 생활-세계에서 제거된다. 그 결과 중 하나는 무한한 필요다. 다시 말해서 투자자가 원하는 자산의 크기에는 한계가 없다. 따라서 소외는 축적, 즉 투자 자본의 축적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관심사다. 축적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소유를 권력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자본이 있는 사람들은 공동체와 생태계를 전복시킬 수 있다. 자본주의는 통약성commensuration이 있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가치 형태들은 차이의 거대한 순환 회로를 가로지르면서도 번창한다. 돈은 투자 자본이 되고, 이는 더 많은 돈을 낳을 수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 및 비인간의 방식을 모두 포함하는, 모든 종류의 생계 방식으로부터 자본을 생산하기 위해 작동하는 번역 기계[비자본주의적 가치 → 자본주의적 자산]다."(245)


인터루드: 추적하기


"'균근mycorrhiza'이라는 용어는 '곰팡이'와 '뿌리'를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들의 합성어다. 곰팡이와 식물 뿌리는 균근 관계를 맺으며 친밀하게 얽힌다. 곰팡이도 식물도 상대방의 활동 없이는 번창할 수 없다. 곰팡이 입장에서는 좋은 양분을 얻는 것이 목표다. 곰팡이는 식물의 탄수화물 중 일부를 빨아들이기 위해 특화된 인터페이스 구조를 통해 숙주의 뿌링 몸체를 연장한다. 곰팡이는 이 양분에 의존하지만 완전히 이기적이지만은 않다. 첫째, 곰팡이는 식물에 더 많은 물을 제공하면서, 둘째, 세포의 소화를 하기 때문에 식물이 섭취할 수 있는 영양분을 만들면서 식물 성장을 촉진한다. 식물은 균근을 통해 칼슘, 질소, 칼륨, 인, 기타 무기질을 얻는다." "숲에서 곰팡이는 같은 생물종의 나무만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종종 많은 생물종을 연결한다. 어떤 해설가들은 균근 네트워크를 '우드와이드 웹woodwide wep'이라고 부른다. 균근은 숲을 가로질러 정보를 나르면서 생물종 간 상호 연결의 인프라를 형성한다."(253-5)


"생물학자 스콧 길버트와 그의 동료들은 다음과 같이 적는다. 〈거의 모든 발달은 공동 발달이다. 우리가 말하는 공동 발달이란 한 생물종의 세포가 다른 생물종 신체의 정상적인 구성을 지원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통찰이 진화의 구성단위를 바꾼다. 일부 생물학자는 '진화의 홀로게놈hologenome 이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복합 유기체와 그들의 공생자symbionts를 하나의 진화 단위, 즉 '홀로비온트holobiont'로 명시하는 것을 말한다." "길버트와 그의 동료들은 발달의 중요성에 더해 '심바이오포이에시스symbiopoiesis'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홀로비온트의 공동 발달을 말한다. 이 용어는 오토포이에시스autopoiesis를 통해 스스로 형성되며, 내부적으로 스스로 조직하는 시스템으로서의 생명에 초점을 둔 이전의 관점과는 대조되는 것이다. 그들은 〈연구할수록 공생symbiosis은 예외가 아니라 '규칙'인 것 같다. ··· 자연은 개체나 게놈보다는 '관계'를 선택하는 것 같다〉라고 썼다."(260-1)


3부 교란에서 시작되다: 의도치 않은 디자인 


11. 숲의 삶 


"교란은 생태계에 명백한 변화를 야기하는 환경 조건의 변화다. 홍수와 산불은 교란의 형태다. 인간 및 다른 생물 또한 교란을 야기할 수 있다. 교란은 생태를 파괴할 수도, 재생시킬 수도 있다. 교란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는 규모와 같은 여러 요소에 달려 있다. 어떤 교란은 사소하다. 숲의 나무가 쓰러지면 작은 공백이 만들어진다. 어떤 교란은 거대하다. 이를테면 쓰나미는 핵발전소를 무너뜨린다. 시간의 규모 또한 중요하다. 단기간의 손상이 무성한 재성장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교란은 새로운 풍경의 배치를 가능케 하면서 변형을 가능케 하는 마주침이 발생하도록 그 풍경을 개방시킨다." "교란이라는 용어에는 교란 이전에는 조화로운 상태였다는 전제가 없다. 국면은 무생물(예를 들어 홍수와 산불)의 교란 또는 생물체의 교란으로 시작될 수 있다. 유기체는 세대 간의 생활공간을 만들면서 환경을 다시 디자인한다. 생태학자들은 유기체가 그들의 환경에 일으킨 효과를 '생태계 공학기술'이라고 부른다."(284-7)


12. 역사 


"'역사'는 인간의 스토리텔링 실천이자 우리가 과거로부터 남겨진 일련의 것을 이야기로 전환한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관례적으로 인간이 남긴 것만 살펴보지만, 우리가 공유하는 풍경에 공헌해온 비인간의 자취와 흔적으로 관심을 넓히지 않을 까닭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자취와 흔적은 '역사적' 시간을 구성하는 요소인, 일련의 중요한 사건이 탄생시킨 국면conjuncture과 우발적인 사건에 의한 우연성의 시기에 생물종의 경계를 넘어서 이루어지는 얽힘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얽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식으로만 역사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 다른 유기체가 '이야기를 하든' 하지 않든 간에, 그들은 우리가 역사로 인식하는, 서로 겹치는 자취와 흔적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 근대 산림관리는 소나무 역사의 한순간을 포착할 수 있지만 (버섯과의) 마주침에 기반한 시간의 불확정성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역사는 인간과 비인간에 의한 세계 만들기의 수많은 궤적의 기록이다."(294-7)


13. 부활 


"소농민이 그루터기에서 싹이 다시 자랄 것을 기대하면서 나무를 베어 넘어뜨리는 행위를 '코피싱coppicing'이라 부르는데, 코피싱된 참나무 산림지대는 소농민 숲의 전형적인 예다. (벌채된 참나무는 소나무와 달리 잘 죽지 않는다.) 코피싱된 나무는 항상 젊고 빨리 자란다. 그 나무들은 새로운 싹보다 더 잘 자라서 숲의 구성을 안정시킨다. 코피싱된 숲은 개방적이고 밝기 때문에 간혹 소나무가 자랄 공간이 생긴다. 소나무는 (그들의 곰팡이와 함께) 벌거숭이가 된 공간을 차지한다. 소나무는 이렇게 소농민이 연속해서 교란시키는 과정에서 다른 곳을 채우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의 교란이 없으면 소나무는 참나무 및 다른 활엽수와의 경쟁에서 이기지 못한다. 소농민 숲이 온전한 상태를 이루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소나무-참나무-인간의 상호작용이다. 인간이 계속해서 황폐화시킨 언덕에서 빠른 속도로 자라던 소나무가 수명이 긴 코피싱된 참나무 임분으로 대체되면서 숲의 생태계는 재생되고 지속된다."(318)


"일본의 소나무는 소농민 교란이 만든 생물이다. 이 나무는 그늘을 드리우고 자신들에게만 이로운 풍부하고 깊은 부엽토층을 만드는 활엽수와 경쟁할 수 없다. 화석식물학자paleobitanist들은 수천 년 전 인간이 일본의 풍경에서 처음으로 산림을 없애기 시작했을 때, 그 전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던 소나무 꽃가루의 양이 극적으로 증가한 것을 발견했다. 소나무는 벌초와 코피싱 덕분에 밝은 햇빛을 받고, 농민이 갈아엎은 나지裸地의 무기질 토양에서 영양을 얻으면서, 농민이 벌이는 교란과 함께 번성한다. 참나무는 농민이 개간한 산비탈에서 소나무를 몰아낼 수 있다. 그러나 코피싱 및 식물성 비료를 모으는 작업을 통해 코나라 참나무와 소나무 모두에게 이로운 공간이 만들어졌다. 송이버섯은 소나무가 산등성이와 침식된 비탈에 발을 딛고 설 수 있도록 도우면서 소나무와 함께 자랐다. 특히 송이버섯은 벌거벗은 지역에서 소나무와 함께 번창하면서 숲에서 가장 흔한 버섯이 되었다."(327-8)


14. 뜻밖의 기쁨 


15. 폐허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오리건주에서 전후의 벌목 호황이 한창일 때 지역 목재를 수출할 가장 중요한 시장은 일본이었다. 그러나 새롭게 등장한 동남아시아산 목재 값이 너무 싸서 결국 오리건주는 경쟁에 낄 수 없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좀 더 잘 알고 있는, 환경 관련 소송 증가가 끼친 영향만큼이나 오리건주 목재 회사의 도산에 크게 기여했다." "목재 회사들이 떠나자 산림청은 목표와 자원을 모두 잃었다. 목재를 얻기 위한 집중 관리가 더는 필수적이지도, 가능하지도 않았다. 우세종 이식하기, 체계적으로 솎아내고 선별하기, 벌레와 잡초를 죽이기 위해 독약 살포하기 등 그 어떤 것도 논의할 가치가 없었다. 이러한 프로그램이 실행되었다면 송이버섯은 고통받았을 것이다. 집중 관리되는 플랜테이션 농장은 송이버섯에게 맞지 않는다. 이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채집인들은 값비싼 목재 사이에서 환영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리건주의 송이버섯 숲은 또한 글로벌 목재의 낮은 가격 덕분에 번성하게 되었다."(378-9)


16. 번역으로서의 과학 


# '번역'은 브뤼노 라투르와 존 로의 행위자-연결망 이론에서 핵심 개념이다. 행위자-연결망 이론에서 '번역'은 인간과, 인간과 함께 작동하는 비인간(예를 들면 기술이 있다) 간의 절합(articulation)을 지칭한다. 이러한 용례에서 인간과 비인간을 평등하게 포함하는 행위의 연결망은 번역을 통해 창발한다. 383)


"일본의 과학자들은 인간의 교란이 거의 없을 때 송이버섯 숲은 위험에 처한다고 주장한다. 버려진 마을 숲은 소나무에 그늘을 드리우고, 송이버섯을 잃게 된다. 반면에 미국의 과학자들은 송이버섯 숲은 인간의 교란이 너무 많이 일어날 때 위험에 처한다고 주장한다. 무모하게 수확하므로 송이버섯 종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반된 주장에 대한 토론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두 과학자 집단은 모두 국제적으로 활동함에도 자신들의 입장에 대해 서로와 소통한 적이 거의 없다는 말이다." "중국에서 송이버섯 과학과 산림관리는 일본과 미국의 궤도 사이에 갇혀 있다. 중국인 학자들은 자신들의 일이란 '국제적인' 것, 즉 영어권 과학을 따라잡는 것이라고 여긴다. 한 젊은 과학자가 설명했듯이, 젊고 야망 있는 사람들은 절대 일본어 자료를 읽지 않는데, 그 이유는 영어를 못하는 나이 든 구식 학자들이나 일본어 자료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윈난성의 숲은 미국의 송이버섯 숲과 완전히 다르다."(387-8)


17. 날아다니는 포자 


"숲에서도, 과학에서도 포자는 우리의 상상력이 또 다른 범세계적인 위상 구조topology에 이르게 한다. 포자는 미지의 목적지를 향해 날아가고, 유형을 교차해 교배하며, 최소한 가끔씩 새로운 유기체를 낳는다. 새로운 종류의 시작이다. 포자는 분명하게 정의하기 힘들다. 그것이 포자의 품격이다. 풍경을 생각할 때 포자는 우리를 개체군 내부에 존재하는 이질성으로 안내한다. 우리가 과학에 대해 생각해볼 때, 포자는 열린 의사소통과 과잉의 모델이 되어 사변思辨의 즐거움을 준다." "응용 산림관리의 불연속적인 패치들과는 달리, 송이버섯의 종 형성을 연구하는 과학은 패치와 같은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방법론에서 국제적인 합의를 이루려고 노력한다. 그 덕분에 연구 재료들, 즉 버섯 샘플과 DNA 염기서열은 국경을 넘어 유포된다. 여기에는 학계도 없고 패치도 없다. 이 모든 작업은 근무 외 시간에 이루어진다. 어느 누구도 누대의 시간을 넘는 버섯의 여행을 공부할 수 있도록 연구비를 지원하지 않기 때문이다."(403-5)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캠퍼스의 산림 병리학자 이그나시오 차펠라는 '생물종'이라는 아이디어가 종류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제한한다는 점을 더욱 단호하게 주장했다. 〈생물에 이름을 붙이는 이명명법二命名法은 완전히 가공된 것입니다〉라고 그는 내게 말했다." "〈곰팡이나 박테리아로 가면 시스템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의 기준으로 본다면 완전히 이상합니다. 수명이 긴 복제 생물은 갑자기 성적sexual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큰 덩어리의 염색체 전체에 도입되는 이종 교배가 가능합니다. 완전히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는 다배체화多倍體化 또는 염색체 복제도 이루어집니다. 다른 박테리아를 수용하는 것을 뜻하는 공생화symbiotization를 하기도 하는데, 다른 박테리아 전체를 자신의 일부로 만들 수 있거나 다른 박테리아의 DNA 중 일부분을 자신의 게놈으로 변환할 수 있을 때 발생합니다. 하나의 개체가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 됩니다. 어느 지점에서 생물종을 나눌 것입니까?〉"(413-4)


"포자는 송이버섯 개체군에 새로운 유전적 물질을 더한다. 버섯은 많고 많은 포자를 생산하고 오직 몇 개 만이 발아해 짝짓기 한다. 그러나 그 수는 버섯 개체군을 세계적으로 퍼뜨리고 다양하게 유지하기에 충분하다. 그 다양성 중 일부는 포자를 생산했던 모체 내부에 있다. 그 어떤 '하나'의 곰팡이 몸체도 쉽게 규정할 수 없는 마주침에서 제외된 채 자급자족해 살지 않는다. 곰팡이 몸체는 나무, 다른 생물과 무생물, 그리고 다른 형태로 바뀐 곰팡이와 역사적으로 합류하는 지점에서 생겨난다. 과학자들은 진화와 송이버섯의 전파를 포함하는 열린 질문들에 대해 포자와 같은 방식으로 탐구한다. 그러한 생각들 중 대부분은 전혀 차이를 만들지 않지만, 차이를 만드는 몇 안 되는 생각이 그 분야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다. 범세계적인 지식은 생물과 무생물 연구 대상, 그리고 다른 형태로 바뀐 그 지식이 역사적으로 합류하는 지점에서 발전한다. 패치들은 생산적이지만 포자도 존재한다."(426-7)


인터루드: 춤추기


"채집인들에게는 송이버섯 숲을 알아차리는 그들만의 방식이 있다. 그들은 버섯의 생명선을 찾는다. 이런 방식으로 숲에 존재하는 것은 춤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들은 감각, 움직임, 방향 설정orientations을 통해 생명선을 추구한다. 이 춤은 숲 지식의 한 형태다. 그러나 보고서에는 문서화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모든 채집인이 춤을 추지만 모든 춤이 비슷한 모습은 아니다. 각각의 춤은 이질적인 미학과 지향점을 담고 있는 공동의 역사들에 따라 각기 모양을 갖춘다." "내가 서술한 버섯 채집인들은 그들 자신만의 숲의 춤을 추는 공연자일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삶의 공연을 보는 관찰자이기도 하다. 그들이 숲의 모든 생물에 관심을 가지지는 않는다. 사실 그들은 꽤 선택적이다. 그러나 그들이 주의를 기울이는 방식은 다른 이들의 삶의 공연을 그들 자신의 공연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교차하는 생명선은 숲에 관한 지식의 한 가지 방식을 창조하면서 그 공연을 안내한다."(429, 443)


4부 한창 진행 중인 상황에서 


18. 송이버섯 운동가: 곰팡이의 활동을 기다리며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일본은 급격히 도시화되었다. 농민들은 시골을 떠났고, 한때 소농민의 생계를 이어준 시골 지역은 방치와 유기의 공간이 되었다. 시골에 남은 사람들에게는 사토야마 숲을 유지할 이유가 점점 줄어들었다. 일본의 갑작스러운 '연료 혁명'으로 외딴 시골의 농민들도 1950년대 말부터는 난방, 요리, 트랙터 운전에 화석연료를 사용하게 되었다. 장작과 숯은 버려졌다. 이리하여 소농민 숲이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던 방식은 사라졌다. 코피싱은 장작과 숯 사용이 급격히 감소됨에 따라 중단됐다. 풋거름을 모으기 위해 하던 갈퀴질은 화석연료 성분의 비료가 도입되면서 사라졌다. 초지草地 유지와 지붕을 이는 재료인 짚을 얻기 위한 벌초 또한 초가지붕이 없어지면서 사라졌다. 방치된 숲들은 바뀌어서 관목과 새롭게 형성된 상록수 활엽수로 빽빽해졌다. 죽순대와 같은 교란종이 밀려들었다. 빛을 좋아하는 약초들의 하층 식생이 사라졌다. 소나무는 그늘에 가려 숨막혀 죽었다."(460-1)


"사토야마 회생 운동은 다른 존재들과 사회관계를 형성하는 활동이기 때문에 아노미 문제를 다룬다. 인간은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많은 참여자들 중 하나일 뿐이 된다. 참여자들은 나무와 곰팡이가 인간과 사귀기를 기다린다. 그들은 인간의 행동을 필요로 하지만, 그 필요를 초월하는 풍경을 작동시킨다. 21세기 초에 이르자 수천 개의 사토야마 회생 집단이 일본 전역에서 생겨났다. 어떤 집단은 물 관리나 자연 교육 또는 특정 꽃이나 송이버섯 서식지에 집중한다. 모든 집단이 풍경뿐 아니라 사람들의 재생에도 관여한다." "상호 배움도 중요한 목표다. 그들의 목적 중 하나가 참여를 통한 배움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실수를 하고 그것을 관찰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그 과정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송이버섯 숲 회생은 구원보다는 오히려 소외의 무더기를 살핀다. 봉사자들은 과정 중에 있는 세계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다종의 다른 존재들과 섞일 때 필요한 인내력을 얻는다."(465-7)


19. 일상적인 자산 


"마이클 해서웨이와 내가 윈난성 시골에서 행한 연구의 중심이 된 작은 마을에서는 세 명의 남자가 핵심 역할을 하는 송이버섯 '라오반老板', 즉 사장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들은 그 지역에서 나는 송이버섯의 대부분을 구매해 더 큰 마을에 판매하는 상인들이었다." "사장들과 그들의 대리인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그들이 가격과 등급을 높여서 협상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특히 흥미를 느꼈다." "채집인들이 구매인들의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시장체제의 경쟁적인 협상이 중심을 차지하던 오리건주에서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이 모든 행위가 완전히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이는 윈난성 상품사슬의 하류에서 일어나는 일들과도 꽤 달랐다. 버섯 특선 시장에서는 가격 및 등급 협상이 지속적이고 치열하게 일어났다. 수많은 도매상이 서로 경쟁했고, 최상의 가격과 가장 적합한 등급 선정을 결정하는 쟁탈전에 모든 사람의 관심이 쏠렸다. 상류에서는 그와 대조적으로 구매가 조용히 이루어졌다."(479-80)


"시골의 가장자리에서 우리가 이야기를 나눈 모든 사람들은 관련인들 사이에 형성된 오래된 관계와 신뢰 때문에 가격 흥정이 없는 구매가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사장들은 채집인들에게 최고의 가격을 지불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여기서 '신뢰'란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한 이점을 취하게 하는 자질이 아니다. 나는 '신뢰'를 동의나 평등과 혼동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사장들이 송이버섯으로 부자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고, 누구나 개인 재산을 모으는 데 그들이 이룬 성공을 모방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들의 관계는 호혜적인 의무로 연결된 얽힘의 한 형태다. 그래서 송이버섯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한, 송이버섯은 완전히 소외된 상품이 아니다.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송이버섯 교환 행위에서는 적절한 사회적 역할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버섯이 교환을 위한, 완전하게 소외된 생물이 되면서 자유로워지는 곳은 더 큰 마을의 버섯 시장뿐이다."(480-1)


"사유재산에 대한 욕망은 드문 경우에만 숲에 이롭다. 이 욕망은 종종 기대하지 않았던 파괴의 후원자가 된다. 어떤 경매 우승자는 수확권을 딴 송이버섯 숲에서 더 많은 부를 짜내기 위한 방법을 어떻게 배웠는지 내게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그는 송이버섯 계약에 속한 마을 숲에서 희귀종 꽃나무를 파냈다. 희귀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종이었기 때문에 더욱 가치 있는 나무들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윈난성의 성도省都인 쿤밍시의 행정 담당관들이 갑자기 가로수가 없는 길을 성장한 나무로 꾸미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그와 다른 기업가들은 다 자라는 나무들을 도시에 이식했다. 이식한 나무들 중 대부분은 뿌리채 뽑혀 이동하면서 받은 충격 때문에 죽어버렸다. 그러나 돈을 지불받을 때까지 살아남은 나무들은 작은 이윤을 가져다주었다. 숲의 입장에서는 최소한으로 잡아도 다양성을 잃었고, 꽃나무의 아름다움도 함께 잃었다. 이와 같은 기업가적 곡예가 오늘날 중국에서 부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의 일부를 이룬다."(482-3)


20. 끝맺음에 반대하며: 그 과정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 


포자가 만든 자취. 더 멀리 나아가는 버섯의 도전 


"21세기 초반의 사유화와 상품화 프로젝트에서 가장 이상한 것 중 하나는 학문을 상품화하려는 움직임이다. 유럽에서는 행정가들이 학자의 업적을 숫자로, 학술적 교환이 이루어지는 삶에 대한 총계로 축소하는 평가 활동을 요구한다. 미국에서는 학자가 연구를 시작하는 첫날부터 스타가 되는 길을 찾고 자신들을 브랜드화하면서 기업인이 되기를 요구받는다. 이러한 프로젝트들은 협업이 필수적인 작업을 사유화함에 따라 학문의 숨통을 끊어놓는다." "그렇다면 끝맺기를 거부하는 이 책은 어떠한 종류의 책인가? 송이버섯 숲처럼, 각각의 우연한 모임은 예상하지 못한 풍부함으로 다른 모임들을 지원한다. 학문의 상업화를 반대하며 한계를 넘어서지 않았다면 이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숲 또한 플랜테이션 대농장과 노천 채굴 광업을 공격한다. 그러나 숲을 완전하게 사라지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학술적인 숲도 마찬가지다. 공동의 놀이에서 탄생한 아이디어는 여전히 유혹의 손짓을 한다."(499, 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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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한국인의 탄생 - 한국사를 넘어선 한국인의 역사, 개정증보판
홍대선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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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한국인이라는 미스터리


한국인은 불운한 운명의 자식이자 혁명의 후손이다. 누가 이 한국인들, 달리 말해 남한인과 북한인, 재일교포, 조선족(재중동포), 카레이스키(고려인), 재미교포에 이르는 이들 모두를 만들었는가? 첫 번째로 지목할 우리 한국인의 공통 조상은 신화적 영역에 있는 단군 할아버지다. 역사적인, 실체를 가진 조상은 두 분이 더 계신다. 먼저 고려 임금 현종이다. 현종은 거란과의 전면전쟁을 통해 한반도 주민을 처음으로 하나의 민족이라는 틀 안에 그러모았다. 다음은 유학자이자 신국가 조선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이다. 정도전은 한국인의 구체적인 특질을 창조해냈다. 역사는 우연과 필연이 나선처럼 교차를 거듭하며 이어진 줄기다. 수많은 이들과 사건, 투쟁의 성취와 좌절이 거듭된 결과다. 그러므로 단 세 명을 중심으로 한국과 한국인을 말하려는 시도는 심한 압축이며 비약이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은 ‘한국사의 모든 것’이 아니라 ‘한국인에 대한 이해’다. 이해에는 지름길이 있으며, 굳이 먼 길을 돌아갈 필요가 없다. 8)


1부 한반도에 사로잡히다


1장 창세기


한반도의 자연은 거칠고 척박하며 위험하고, 많은 인내와 지혜가 필요하다. 유럽 역사에서 흔히 나타나는 순수한 폭력과 완전한 정복은 한반도에서 불가능했다. 일본과도 다르다. 일본 문명은 한반도에서 도래한 야마토(大和)인이 원주민인 에조(蝦夷)인을 ‘인종 청소’하는 과정에서 형성됐다. 일본 열도에서는 외부세력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원주민과 결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반대로 한반도 문명에서 외부와 토착세력의 타협은 단군뿐 아니라 고구려 신화에서도 나타난다.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皺牟王)은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이렇게 묘사된다.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郎 나는 하늘의 아들이요, 내 어머니는 하백(河伯, 강물의 신)의 딸이시다.〉 단군처럼 부모의 혈통 중 하나는 외부세력(하늘)이며, 다른 하나는 토착세력(하천)이다. 만약 원래의 주인과 허락받지 않은 방문자 둘 중 어느 한쪽이 확실한 우세를 점했다면 혈통이 공평하게 섞인 것이 통치의 근거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12-3)


# 추모왕(皺牟王). 보통 주몽(朱蒙)과 혼용되는 이름이자 고구려의 제1대 왕. 재위는 기원전 37년부터 기원전 19년까지다. 다른 익숙한 호칭은 동명성왕(東明聖王)이다.


고조선뿐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 역시 원주민과 이방인의 평화적 결합체다. 분명히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결과적' 평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융합이 이루어진 후부터는 강한 결속력을 발휘하는 운명공동체가 되어 외세에 맞섰다는 점이 한반도 문명의 특수성이다. 처음에 예맥과 한은 달랐다. 한반도 남부에서 농경 문명을 세운 고대 한인들의 세 나라를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이라고 한다. 이를 합치면 삼한(三韓)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三國)은 원래 삼한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고구려는 예맥인이 지배층과 중간층을 구성한 나라이며, 백제와 신라 그리고 신라에 흡수 통합된 가야는 예맥인과 한인이 혼합된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시대에 이르러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배층은 삼국을 삼한이라고 일컬었다. 즉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를 한반도의 토착민인 한(韓)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는 정복민과 피정복민이 철저히 불평등한 관계로 나뉜 세계관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14)


2장 평화는 생존의 지옥이다


한반도인에게 평화는 평화가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생존투쟁이다. 한반도인은 무엇이든 잘 먹고, 어떤 식으로든 먹는 방법을 개발해왔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그래야만 할 정도로 먹을 것이 부족했다는 의미가 된다. 모든 먹거리 중에서도 인구부양력이 가장 높은 쌀에 대한 집착은 한국인의 유전자와도 같다. 식문화는 환경을 드러내는 거울이다. 한식은 밥을 보다 수월하고 많이 먹을 수 있도록 개발되었다. 밥 자체엔 별다른 자극이 없다. 반찬은 그대로 먹으면 너무 짜고 자극적이다. 밥과 함께 먹었을 때 간이 맞아떨어지도록 계산되어 있다. 그래서 두부와 부침처럼 짜지 않은 반찬은 간장 양념에 찍어 굳이 짜게 만든 후 입에 넣는다. 반찬의 사명은 어디까지나 밥의 파트너가 되는 것이다. 신 김치는 입에 침이 고이게 해 밥이 목구멍에 잘 넘어가게끔 돕는다. 국물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의 식사는 밥, 국물, 찬으로 이루어진다. ‘밥과 밥을 돕는 나머지’는 한식의 기본 구성이다. 19)


쌀농사에 억지로 성공한 한국인에게 콩은 그 억지스러움을 유지하는 최고의 파트너다. 콩은 척박한 환경에서 잘 자라는 작물이면서, 논두렁에 콩을 심으면 병충해를 막아 벼를 보호해준다. 더욱이 땅의 영양소를 빨아들이기는커녕 뿌리에 공생하는 박테리아가 천연 비료 역할을 하면서 땅의 지력(地力), 즉 땅의 생산력을 회복시킨다. 그러므로 콩으로 장을 담그는 기술의 원류가 한국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더 깊이 원조를 따지면 고구려 계통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은 한반도에서 콩장이 유래되기 전까지 동남아시아와 마찬가지로 생선을 삭힌 간장(피시 소스, Fish sauce)을 사용했다. 에도 시대의 정치가이자 유학자였던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1719년 경 전 20권에 이르는 일본어 사전 《동아(東雅)》를 집필했는데 거기 고려장(高麗醬)에 관한 사실이 명확히 기술되어 있다. 〈고려의 장인 말장(末醬)이 일본에 건너와서 그 나라 방언 그대로 미소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글은 고려장이라고 표기하였다.〉 23)


한반도에 진정한 의미의 태평성대란 있어본 적이 없다. 평화 역시 개인들의 생존투쟁으로 꽉 채워져 있다. 다만 혼자서 생존투쟁을 할 순 없다. 집단노동으로 쌀을 수확하기 위해 한국인은 싫어도 좁은 거리에서 부대끼며 살아야 했다. 그리하여 쌀이 인구를 부양하고 사람들은 머릿수를 유지하기 위해 쌀농사에 매달리는, 악순환인지 선순환인지 구분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나는 남들의 논에서 일해주어야 한다. 남들은 내 논에서 일해준다. 내 논에서 수확된 쌀은 나의 재산인데도 그렇다. 그러다 보니 한국인들에게는 공공의 영역과 개인의 영역을 나누는 복잡 미묘한 감각이 발달했다. 중요한 것은 한국인에게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정밀하게 뒤섞여 있었으며, 그러한 감각을 마을 공동체 구성원이 공유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환경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감시하고 비교하게 된다. 간수가 죄수를 억압하듯 감시하는 것은 아니다. 느슨한 감시다. 다른 말로 하면 면밀한 관찰이라고 할 수 있다. 25-6)


‘한국인은 매우 무속적이다’는 말은 틀렸다. 한국인은 무속 그 자체다. 한국은 반도체와 전투기를 만드는 나라면서도 공식적으로 등록된 무당만 30여만 명이며, 실제로는 50여만 명으로 추산된다. 여기에 신기(神氣)가 아닌 도구와 점술법, 풍수와 같은 지식체계를 활용해 길흉을 점치는 역술인까지 합하면 약 100만 명으로 추정된다. 본질적으로 모두가 무당인 한국인은 길몽을 꾸면 복권을 사고, 꿈자리가 사나우면 하던 일을 다시 생각해본다.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 느낌이 좋거나 나쁘다거나, 촉이 왔다거나, 감을 잡았다거나 하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미심쩍은 장소에 대해서는 ‘음기(陰氣)가 느껴진다’는 말로 불운을 미리 피하려고 한다. 이런 말들은 따지고 보면 모두 영적 능력을 나타내는 언어다. 한국의 무당은 ‘무당들의 무당’이다. 그만큼 개성도 강해서 이타적이고 동정적인 무당도 많지만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무당도 흔한데, 한국에서 타락한 무당은 고객에게 매우 위험한 존재다. 36-7)


3장 전쟁은 산성이다


한반도 문명은 가까스로 죽음을 피해왔다. 중국은 태생적으로 통합적이며 팽창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진시황(秦始皇, 진나라의 시황제)은 최초로 중원을 통일하는 동시에 중국이라는 개념을 창조했다. 한족 문명의 뿌리는 화하(華夏) 문명이며, 화하족은 한족의 원류다. 최초로 중국을 만든 진나라가 금방 멸망하고 한(漢)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하면서 화하족은 한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족은 혈통이 아니라 문화적인 개념이다. 한족은 전쟁에서 졌을 때도 결과적으로는 이겼다. 중국은 분열하면 통합하고, 통합하면 팽창하며, 팽창에 실패하면 분열한다. 통일 중국은 팽창을 향해 달려갔다. 진나라는 현재의 베트남을, 한나라는 고조선을 쳤다. 한반도 문명은 여러 번 멸망할 뻔했다.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한사군(漢四郡)에 의해 중국화 될 뻔했으며,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후 치러진 나당전쟁(羅唐戰爭, 신라-당 전쟁)에서 자칫 패했더라면 꼼짝없이 사라질 뻔했다. 42-3)


산성(山城)은 말 그대로 산세를 따라 산에 지은 성이다. 한국에서는 꼭 첩첩산중이 아니더라도, 경사지에 지은 성을 산성이라고 한다. 한국인이 산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주지와 번화가 대부분은 지리학적으로 산이다. 한반도인은 흙을 조금만 파면 드러나는 암반 지대를 정복할 수 없었다. 한반도는 2/3 이상이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화강암과 변성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변성암의 대부분은 역시 단단한 편마암으로 구성된다. 침공해온 이상 외적도 한반도 안에 갇혀 있기는 마찬가지다. 한반도의 지형은 끝없이 이어지며 이지러진 단단한 산맥에 의해 침공해온 적이 행군에 이용할 수 있는 길이 정해져 있다. 그래서 한반도인은 웬만해서는 적이 뒤에 남겨놓고 지나칠 수 없는 요지에 산성을 축조했다. 산성을 짓기 위해 기본적으로 꼭 필요한 정도만 산을 깎다가 멈춘다. 한반도에는 더 이상의 노동을 할 인력과 식량이 '없다'. 깎으며 나온 화강암으로 필요한 나머지를 만들어 화강암 산성을 완성한다. 49-51)


적에게 고통을 강요하기 위해서는 이쪽도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산성 방어 체계의 첫 번째 단계는 청야(淸野, 들판을 깨끗이 비움)다. 청야는 성내에 결집하기 전에 적이 사용할 수 있는 일대의 식량과 물자를 모두 없애는 행위다. 성안에 채울 수 있을 만큼 채우고 남은 것은 불태운다. 주거공간까지 불태우는 경우도 허다하며, 우물에 독을 풀기도 한다. 그러나 침공군도 전쟁의 전문가인 이상 성안에서 버티는 시간이 대체로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외적은 한국인이 산성 안에서 저항하는 시간에 충격을 받곤 했다. 인내력이야 당연하다. 한반도에 사는 이상 단군에게 강제로 배운 셈이다. 문제는 그 인내력을 다 함께 발휘해야 한다는 점에 있다. 정직한 평지 위에 누가 봐도 합리적인 방식으로 세운 성은 ‘정직한’ 한계를 갖고 있다. 적의 인구와 물량 앞에 정직하게 무너진다. 한국 성의 본질은 산성이다. 한국인의 선조는 외적이 침입하면 수없이 산성으로 이동했고, 거기서 함께 견디며 싸웠다. 52-3)


평양성(平壤城)은 성에 대한 한반도의 관념이 한 곳에 모두 담긴 걸작이자 그로테스크한 괴작이다. 먼저 평양성은 지형상 평지에서 산으로, 평지성에서 산성으로 올라가는 순서대로 외성(外城)-중성(中城)-내성(內城)-북성(北城)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도를 침탈한 적은 고구려의 성을 평지성으로 착각하고 진입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중성에서 갇히고, 중성을 돌파하면 내성에 다시 갇힌다. 이때는 미리, 아니 애초부터 고지를 점령한 상태인 고구려의 최후 수비군에게 격퇴당하는 구조다. 이때 격퇴당한 적은 거꾸로 내성에서 중성으로, 중성에서 내성으로 성벽을 뚫고 탈출해야 한다. 성벽을 완전히 탈출해도 병목현상에 걸린다. 평양성은 천연 해자(垓子)인 강물에 둘러싸여 있는데, 성 안팎을 통하는 각 문은 나가자마자 응당 있어야 할 교량 대신 곧바로 강물을 만나도록 설계되어 있다. 좁은 길을 따라 우회해야 교량을 만날 수 있다. 이때쯤에는 탈출행렬이 얽혀 이미 매복한 고구려 군사를 만나게 마련이다. 59-60)


# 평양성(平壤城). 고구려 시대에는 장안성(長安城)으로 불렸다.


4장 전쟁은 사격이다


한반도에서 생존공간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군은 덜 죽고 적군은 더 죽여야 한다. 한반도가 ‘중국’을 상대하는 경우에는 교환비가 아군에 극단적으로 유리해야 한다. 유리함은 '비로소' 승부를 가를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즉 압도적인 교환비는, 있으면 좋은 수준을 넘어 공기처럼 당연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은 한국인이 집착하는 무기의 형태를 규정했다. 그것은 원거리 발사 무기다. 화약 무기가 출현하기 이전에 한반도를 상징하는 무기는 활이다. 한국의 활은 북방 유목민 계통의 활로 합성궁(合性弓)이다. 합성궁이란 두 가지 이상의 이질적인 재료로 활대를 제작하는 활이다. 고대부터 이어진 한국의 합성궁은 초식동물의 뿔과 목재를 결합해 만든다. 그런데 활에 쓰는 초식동물의 뿔은 굵고 길며 형태가 단순해야 한다. 이 조건에 가장 잘 들어맞는 동물은 물소와 야크(Yak)다. 한반도에는 둘 다 없다. 그래서 조선 시대 내내 활을 만들기 위해 동남아시아산 물소 뿔을 수입한 기록이 자세히 남아 있다. 63)


# 두 가지 이상의 다른 목재를 사용한다면 이는 합성궁이 아니라 복합궁(複合弓)이다.


한국인에게 화포란 ‘강한 활’이며, 쏜다는 점에서 같다. 산성과 발사는 떨어질 수 없는 한 쌍이다. 산성은 기어 올라오는 적을 쏘아 맞히기에 가장 이상적인 장소이며, 발사는 산성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행위다. 가장 천재적인 특별함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경우다. 13척의 배로 133척의 적 전선을 제압한 명량해전(鳴梁海戰)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적 장면 중 하나다. 그런데 이 전투가 이순신이 정밀하게 설계한 산성 방어와 사격전의 조합이라는 사실은 무시되곤 한다.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일부러 먼저 역류(逆流)를 맞는 선택을 했다. 산성 방어에서는 적이 알아서 몰려들어야 전과를 얻을 수 있다. 물론 그가 불과 13척의 전함을 지휘하는 모습을 본 일본군은 한시라도 빨리 철천지원수를 없애버리고 싶어서 다가오지 말라고 해도 달려왔겠지만, 명량은 달려드는 순간 거센 물줄기를 타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격파되기 위해 기계적으로 떠밀려가는 곳이었다. 67-8)


이순신이 관망하던 아군 전함을 불러모아 전투에 참여시킨 시각은 물살의 방향이 바뀌기 직전이었다. 그는 약 세 시간을 배 한 척으로 혼자 싸웠다. 소집 명령을 내릴 시간은 많았다. 그러므로 왜 굳이 그 시점이었는가 하는 비밀은 물살에 있다. 물살이 바뀌면 일본군 전함은 역류를 맞아 자동적으로 밀려가고, 조선군이 순류(順流)를 타고 전진하게 된다. 즉 일본군은 산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난다. 이순신이 원래는 육군 장교였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그는 한반도가 중국의 백만대군을 육지에서 상대해온 방식을 사용했다. 〈적의 공성을 좌절시킨다. 실패한 적이 물러갈 때 하나 혹은 여러 산성에서 나온 아군이 결집한다. 마지막으로 철수하는 적의 뒤를 쳐 대량살상한다.〉 이순신은 적의 공성과 후퇴가 자연의 힘에 의해 강제로 이루어지도록 계산했다. 물살이 바뀌자 전투는 일방적인 학살로 바뀌었다. 이순신은 마지막 단계인 대량살상에서까지도 지상전의 이상적 결과를 해전으로 옮겨왔다. 70)


한반도 주민에게 자연과 농토는 애증의 대상이다. 저주하지만 결코 남에게 빼앗길 수는 없는 무언가이다. 이는 삶을 저주하는 동시에 사랑하는 한국인의 인생관과 직결되어 있다. 주어진 환경이 척박할수록 먹고살기 위해 부대끼고 씨름하고, 결국에는 깊게 이해하게 된다. 척박한 논밭에서 죽기 직전까지 노동해 수확한 곡물로 밥을 지으면 밥그릇에 달라붙은 곡식 한 톨도 버릴 수 없다. 인간은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고통을 감내하지만, 이 순서는 바뀔 수도 있다. 반대로 고통을 감내한 결과 소중해지기도 한다. 깊은 이해는 사랑이다. 그 사랑은 찬양이나 감격과는 다르다. 인도인이나 프랑스인이 끝없이 펼쳐진 풍요로운 농경지를 바라보며 느끼는 숭고함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인은 자연에 감사하지 않지만 숭고함보다 진하고 끈끈한 애착을 느낀다. 인간에게는 타인도 환경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한국의 자연과 인간이 한국인에게 가장 미움받고,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73-4)


5장 전쟁과 평화 


산성 방어는 숙명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전쟁만이 숙명은 아니기에 한국인은 재난 상황에서도 산성 방어를 수행한다. IMF 구제금융 사태가 터지자 재난 상황을 맞아 한국인들은 결집했다. 금 모으기 운동이 과연 얼마만큼의 실효성이 있었는지는 논란이 많다. 한 가지, IMF가 강제적으로 올린 금리를 인하하는 결과를 가져온 건 분명하다. 이는 한국 경제가 외국 자본에 완전히 잠식되는 사태를 막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외환위기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과정 전체에서 금 모으기 운동의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는 영 계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금 모으기의 실질적 효과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주제는 한국인의 행동 양식이지 행동의 결과가 아니다. 약 227톤의 금이 모였는데, 참여자는 무려 351만여 명이었다. 전국적으로 4가구당 1가구가 자신의 손해를 감수했다. 세계적으로 이런 사건은 극히 드물지만, 한국인처럼 나라에 불만이 많은 국민이 반대편으로 돌변하는 경우로는 아예 유일할 것이다. 75-7)


한국인이 의인으로 변하는 작동 원리와 의인의 행동 양식은 외국과 다르다. 평소에 한국인은 세상은 돈과 지위가 최고일 뿐인 지저분한 정글이고, 자신 역시 철이 좀 든 대가로 돈만 아는 속물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누군가의 재난 상황을 발견하면 자신만의 산성 전투에 임한다. 2001년 일본에 유학 중이던 대학생 고 이수현 씨는 신오쿠보(新大久保) 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기 위해 선로에 뛰어들었다가 숨지고 말았다. 한국에는 이수현 씨와 비슷한 영웅이 정말로 흔하다. 2015년 의정부 오피스텔 건물에 큰 화재가 발생했을 때, 지나가던 간판업자인 이승선 씨는 옆 건물 옥상을 통해 불타는 건물로 진입했다. 그는 작업할 때 쓰는 밧줄에 몸을 의지한 채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화염과 연기가 타오르는 건물 벽에 매달려 열 명의 시민을 구조했다. 건물 주민들의 체중을 오직 팔 힘만으로 견디며 구해냈는데, 당연히 생사의 위기를 여러 번 오갔다. 그리고 그는 세상의 관심을 피해 재빨리 도망갔다. 82)


한국인은 자신이 속물이라고 착각할 뿐 아니라, 착각이 진실임을 확인하기 위해 노력한다. 평소에 한국인은 남들을 무시할 수 있는 잘난 ‘년놈’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렇듯 평시의 한국인은 평범함을 거부한다. 그러나 전시의 한국인은 특별함을 거부한다. 남들보다 희생적이면서 누구보다 조용한 존재가 되려고 한다. 외적에 맞서는 산성 안은 혼자만 주목받아서는 안 되는 공간이다. 원치 않게 영웅으로 추대되기라도 할라치면 자신을 뭉툭하게 깎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한국인의 선조가 한반도에 사로잡힌 탓에 얻은 특질을 천박한 숭고함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한국인은 어떤 인간집단인가? 한국인은 '숭고한 속물'이다. 숭고한 속물은 평시와 전시, 생존의 지옥과 멸망의 그림자 사이에서 태어난 별종이다. 그러나 한반도가 한국인의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한반도는 민족성의 얼개가 잡힌 틀이지, 민족성 자체는 아니다. 민족성이 형성되려면 먼저 하나의 민족이 탄생해야 한다. 84-5)


2부 민족의 탄생


6장 고려는 고구려다


한국인들은 고구려가 통치했던 만주와 요동을 잃었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아쉬워하는 나머지, 고구려의 영토뿐 아니라 고구려 자체가 사라졌다고 착각한다. 고구려는 사라지지 않았다. 고려는 고구려다. 현대에는 고씨 왕가의 첫 번째 왕조와 왕씨 왕가의 두 번째 왕조를 시대적으로 구분할 필요성이 있다. 그래서 고대 국가를 고구려로, 중세 국가를 고려로 구분해 부른다. 물론 나도 이 구분법을 따를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 시대부터 고구려와 고려는 동의어였다. 고구려는 첫 번째 고려고, 고려는 두 번째 고구려다. 삼한/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흔들리자 군벌이 난립하는 후삼국 시대가 펼쳐졌고, 고구려계 유민들이 후삼국 시대에 고구려를 계승해 고려를 세워 삼한을 재통일했다.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교과서에서 본 이 명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고려 건국 세력은 세간에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는 착각처럼 고구려 계승을 ‘정치적으로 표방’하지 않았다. 그들 자신이 고구려인이었다. 87)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를 친척지국(親戚之國, 친척의 나라)이라고 불렀다. 고려인과 발해인은 고구려인이라는 의식을 공유했다. 실제로 발해는 외교문서에서 자국을 ‘고려’라고 표기하기도 했다. 두 나라 모두 왕성(王姓, 왕가의 성)은 고구려 왕가인 고(高)씨가 아니었다. 고려는 왕(王)씨의 나라이고 발해는 대(大)씨의 나라이니, 친척이라는 표현이 그림처럼 들어맞는다. 다만 이때 친척이라는 말은 현대인의 느낌보다 훨씬 강렬한 표현이다. 친척(親戚)에서 친(親)은 요즘의 ‘친구’, ‘친하다’에 함께 쓰이는 한자지만, 지금처럼 편하게 써도 되는 말은 아니었다. 親은 피로 맺어진 혈족이란 뜻이며, 한 부모에게서 나왔다는 의미다. 반면 혼인으로 맺어진 외척을 뜻하는 척(戚)은 어느 정도의 거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친척지국’을 현대적 느낌으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한 배에서 나온 친형제자매지만 지금은 각자의 집에서 따로 사는 사이.〉 발해가 멸망함으로써 왕건은 고구려 종주권 논쟁을 공짜로 피할 수 있었다. 90-1)


나당연합군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을 때 당나라의 군주는 고종(高宗)이었다. 고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해동(한반도)의 두 나라를 원정했지만, 고구려가 요수(遼水, 요하강)를 건너 쳐들어온 것도 아니었고, 백제가 바다(황해)를 건너 쳐들어온 적도 없다. 해마다 많은 병사를 보내느라 우리의 소모가 컸다.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후회된다.〉 지나치게 값비싼 실험을 한 후 한반도와 중국은 이후 암묵적 합의에 이르렀다고 확신한다. 중국은 한반도가 고개를 숙여주기만 하면 건드리지 않기로 결론을 굳히고 행동했다. 한반도 왕조는 중국이 책봉하는 제후국의 지위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체면을 세워주는 대신 실질적인 영향력 행사는 거부하기로 했다. 이러한 타협은 그 자체로 평화다. 하지만 유목 전사들은 한반도 왕조와 주민이 중국 보병과 나눈 교훈을 알지 못했다. 고려는 유목 제국에도 같은 교훈을 주입해야 할 운명에 놓였다. 그 상대는 거란이었다. 92-3)


7장 추남과 사생아


강감찬은 고려의 개국공신 강궁진(姜弓珍)의 아들인 데다 신분과 상관없이 실력만으로 과거시험을 치러 장원급제를 거둔 수재 중의 수재였다. 그러나 늦은 나이에 예부시랑(禮部侍郎, 외교부 겸 문화부 중급 공무원)으로 취직했다는 이야기를 빼면 오랫동안 그의 기록은 별 다른 게 없다. 있다면 백발노인이 될 때까지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채 지방 행정관 노릇을 전전했으리라는 암묵적 흔적뿐이다. 강감찬이 초특급의 배경과 재능으로도 평생에 걸쳐 소외된 이유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는 네 글자다. 사료는 그의 생김새를 잔인하게도 ‘체모왜루(體貌矮陋, 몸은 조그맣고 생김새는 너저분함)’라고 기록한다. 한자로 쓰인 전근대 동아시아의 전통 역사기록은 외모에 대한 평가를 아끼는 특징이 있다. 정말로 특별한 외모만이 묘사된다. 고려는 외모지상주의 사회였다. 한국인은 외모를 떠나 인품과 실력만으로 인물을 평가해야 마땅하지 않냐는 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유교적 가치가 국가 이념이었던 조선 시대의 영향이다. 97)


거란의 1차 침공은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아는 그 유명한 서희(徐熙)의 담판으로 끝났다(993년, 성종 12년). 하지만 1010년 말 겨울, 2차 침공에 나선 거란군의 말발굽이 개경에 드리우자 조정은 정신적으로 붕괴했다. 모두가 현종을 에워싸고 항복을 부르짖었다. 유목 전사들은 농경민의 도시를 공격할 때 항복과 저항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한 후, 저항할 경우에는 함락한 도시의 주민 모두를 죽이는 습관이 있었다. 30만 야전군이 사라진 조정이 현종에게 항복을 요구한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종은 항복이 과연 옳은지 확신할 수 없어 버텼다. 유일하게 강감찬이 몽진을 주장했다. 그건 왕의 도시(개경) 대신 왕의 나라, 바로 고려의 전 국토를 걸고 끝까지 해보겠다는 뜻이었다. 애초에 현종은 개경에서부터 신하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배신당했다. 현종이 꼭두각시 사생아 임금이라는 사실이 두고두고 문제였을 것이다. 사생아 임금과 나이든 추남(강감찬)은 뜻을 합쳤다. 현종은 몽진을 결행했다. 104)


요 성종이 통주전투에서 승리하고 남하를 시작할 때, 양규는 흥화진에서 700명의 병사를 끌고 나와 자신만의 전쟁을 시작했다. 양규는 전투가 벌어진 통주로 간 후, 패잔병을 수습해 전력을 1700명으로 보강했다. 그의 별동 타격대는 이어서 거란군에게 넘어간 곽주성(郭州城)을 되찾았다. 곽주성을 지키는 거란군은 6천이었는데, 불과 1700의 병력으로 기습에 성공한 것이다. 이로써 양규는 흥화진-통주성-곽주성을 잇는 선을 확보했다. 거란 침공군과 거란 본토의 연결을 완전히 끊는 치명적인 선이었다. 양규는 현종을 잡기 위해 남하하는 거란군의 후방과 보급선을 쉬지 않고 타격했다. 양규는 유격전을 치르던 중에 귀주(龜州)를 지키던 별장(別將, 중하급 장교) 김숙흥(金叔興)과 연합해 작전을 함께하는 관계가 되었다. 김숙흥은 따로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거란군 1만 명의 머리를 베는 전과를 올렸다. 두 사람이 요 성종이 남겨둔 후방을 타격해 진격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면 현종은 붙잡히고 말았을 것이다. 106)


쉴 새 없이 움직인 양규-김숙흥 연합 특수부대의 싸움은 1011년 3월 5일 끝났다. 애전(艾田)에서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둔 직후, 두 장수의 부대는 마침내 그들을 노리고 있던 요 성종의 본대(本隊)와 조우했다. 애전에서 죽은 1천 명의 거란군은 요 성종이 던진 미끼였다. 요 성종은 자신의 전쟁을 망친 주범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양규와 김숙흥은 죽음이 예정된 마지막 전투를 피하지 않았다. 최후의 결사대는 구출한 고려인들이 피신할 시간을 벌기 위해 전면 돌격을 감행했다. 양규와 그의 군사들은 고려의 평민들을 한 명이라도 더 구출하기 위해 전원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는 국가의 두 가지 측면 모두에 충성했다. 하나는 왕조, 하나는 백성이다. 이것은 하나의 철학이다. 현대에는 당연한 상식이지만, 11세기의 중세 전사에게는 비범한 정신세계인 것이다. 고려왕조 역사에 영웅은 많지만, 그처럼 도덕적으로 완성된 영웅은 없다. 그러하기에 현종은 양규가 죽음으로 던진 질문에 정답을 제출해야 하는 숙명에 내던져졌다. 107)


8장 싸움터에 솟아오른 비명(碑銘)


현종은 재위 기간인 22년 전부를 극심한 가뭄, 메뚜기떼, 지진, 산사태, 거란의 2차 침공이 남긴 피폐함, 여진족과 해적의 약탈에 시달렸다. 그 상태에서 거란의 3차 침공에 대비할 비용과 인력을 마련해야만 했다. 1014년, 경군(京軍, 중앙군)의 영업전(永業田)을 회수한 일로 고위장교 김훈(金訓)과 최질(崔質)이 벌인 난을 진압한 이후, 현종은 이때부터 전쟁에서 공을 세운 전사들을 홀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죽거나 다친 사람들을 위해 국가 예산을 집행했다. 높은 계급이나 군반씨족뿐 아니라 병졸, 즉 일반 백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현종은 국가는 백성과 계약의 관계라는 사실을 11세기에 받아들였다. 백성이 소유물이 아니라 계약당사자일 때 국가는 백성에게 책임을 진다. 책임이란 손해를 감수할 줄 아는 것이다. 다음 전쟁이 다가오는 중인데 현명한 행동이었을까? 전쟁이 다가오기에 현명했다. 자신과 가족이 존중받아야 충성하는 보람도 있는 법이다. 고려는 애국할 가치가 있는 나라여야만 했다. 112-4)


계약만으로 한반도 주민을 하나로 결집하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다시 말하지만 고려는 고구려와 동의어다. 국명이 고려인 나라에서 신라계와 백제계 주민이 하나가 되려면 또 하나의 역사적 진보가 이루어져야 했다. 현종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역대 군주들의 능묘를 정비했다. 그리고 누구라도 삼국의 능묘를 지날 때는 의무적으로 말에서 내리고(하마, 下馬)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법을 제정했다. 그러므로 고구려인은 신라왕의 무덤에, 신라인은 백제왕의 무덤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이러면 원칙적으로 삼국의 역사는 공동체가 공유하는 역사가 된다. 원칙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정작 필요한 순간이 오면 의외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백제인인 내가 어째서 고려의 졸병이 되어 말 타는 오랑캐 놈들한테 돌격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 법한 순간에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력으로 나라를 세워놓고도 관념적인 건국의 원리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짜내왔다. 114)


1018년 말, 이번에도 한반도의 겨울에 10만 명의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선봉은 우피실군과 천운군(天雲軍)이었다. 우피실군이 카간 개인이 소유한 군대라면 천운군은 요나라의 정규군 중 최강의 기병이었다. 요련장군(遙輦帳軍)도 포함되었다. 요련씨(遙輦氏)는 황가인 야율씨와 황후가인 술률씨를 제외하면 거란족 중 가장 고귀한 가문으로, 요련장군은 거란 모든 부족의 자체 군대 중 가장 고급이며 정예였다. 요나라는 향병(鄕兵)제도를 운영했는데, 향병이란 점령지 주민이나 피정복민을 민족 단위로 징병해 구성한 군대였다. 가장 강력한 향병 부대는 발해군(渤海軍)이었다. 이번 원정에는 발해군도 포함되었다. 총사령관은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소배압(蕭排押)이었다. 이에 반해 현종이 임명한 총사령관(상원수, 上元帥)은 군대를 처음 지휘하게 된 60대의 강감찬이었다. 총 병력 20만 8천 3백 명으로, 통주전투에 투입된 병력의 2/3 수준이었다. 현종과 강감찬은 단 한 번의 도박으로 전쟁을 결론짓기로 했다. 115)


귀주대첩 이후 현종은 사과의 뜻까지 전하며 거란에 입조했다. 거란군의 대패에 환호하던 송나라만큼이나 요나라도 황당해할 일이었다. 여기엔 비밀이 있다. 고려가 황제국이 되면 다른 두 황제국과 제국 경쟁을 벌여야 했다. 여기엔 조공보다 넉넉한 하사품으로 조공국을 모집하는 출혈 경쟁도 포함된다. 제국이냐 왕국이냐는 백성의 삶의 질과 같은 실용적인 문제와는 동떨어져 있다. 동아시아 역사는 실패한 제국들의 무덤으로 가득하다. 현종은 송, 요에 뒤진 3등 제국 대신 1등 왕국이 되기로 했다. 1등 왕국이 어느 나라에 입조하는지에 따라 현재의 진정한 천자국이 결정된다. 이때부터 고려는 동북아시아의 균형을 결정하는 조정자가 되었다. 요나라의 패전 직후였으므로 무게 추가 송나라 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그러므로 현종은 망설이지 않고 요나라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현종 이후 고려는 물론 조선까지 중원 제국이 가장 중요하게 대하는 1순위 왕국의 지위는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다. 123)


현종은 거란과의 모든 전쟁이 끝난 후 아직 살아있을 때부터 하늘이 내린 성군이라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그는 심지어 조선왕조에서도 한반도 역사가 낳은 특출난 성군으로 우대받았고, 조선왕조는 그에게 제사를 올렸다. 《조선왕조실록》의 여러 기사를 보면 현종을 단순히 좋은 군주로 여기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조선의 사관(史官, 역사를 기록하는 관료)뿐 아니라 왕들까지도 현종을 한반도 역사를 다시 세운 위인이자, 역사 자체가 현종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의식을 가졌다. 단군이 신화적이고 상징적인 시조라면, 현종은 실존했던 진짜 단군인 셈이다. 현종은 1031년 38세의 나이에 쓰러졌다. 전쟁이 끝난 후 몇 년 연속 풍년이 들어도 국가를 복구하기 버거웠겠지만, 현종은 십 년이 넘도록 멈추지 않는 가뭄과 씨름했다. 그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다음 달 사망했다. 사인은 과로사로 추정된다. 이 해에 요 성종과 강감찬도 명을 달리했다. 124-5)


3부 민족성의 탄생


9장 천명과 혁명 


현재 조선을 건국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은 대략 ‘여말선초 신진사대부(고려말~조선 초의 신흥 유학자 집단)’일 것이다. 하지만 명칭은 본질이 아니다. 그들이 기본적으로 '철학자'라는 사실이야말로 중요하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들이 왕성(王姓, 왕의 성씨)을 왕씨에서 이씨로 바꾸고 새로운 체제를 만든 일은 혁명이다. 당시 말로 역성혁명(易姓革命)이다. 그들은 혁명으로 좋은 나라를 세우고자 했다. 문제는 진리와 진리가 충돌한다는 데 있다. 혁명은 하늘을 배신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범죄다. 그런데 좋은 나라를 건국하는 일은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혁명이란 명, 즉 천명을 갈아치운다는 뜻이다. 천명은 받는 것이고, 혁명은 하는 것이다. 천명이 수동이라면 혁명은 능동이다. ‘나를 위해’, ‘동지들을 위해’ 뒤집어엎는 행위는 역성혁명은 될 수 있어도 진정한 혁명은 아니다. ‘사회구성원 모두를 위해’ 체제를 전복하는 결단이야말로 혁명이다. 혁명의 목표는 신체제에 있다. 130-1)


자신이 섬기던 왕조를 배반하는 일은 정도전에게 커다란 좌절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혁명에 몸을 맡겼기에 돌이킬 수 없었다. 혁명, 즉 범죄를 정당화하는 방법은 분명했다. 반드시 결과가 좋아야만 했다. 조선 건국의 아버지들은 스스로 역사의 감옥에 걸어 들어갔다. 백성을 잘 먹고 잘살게 하는 일에 실패하면 죄를 짓는 셈이었다. 존재하지 말았어야 하는 자들이 된다. 신진사대부들은 철학자였지만, 동아시아 철학자였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동아시아에서 철학은 현실이며 정치철학이다. 간단히 말해 결과주의다. 성리학 이전의 전통 유교는 논리적이지 않다. 유교가 질서를 사랑하는 이유는 질서 잡힌 사회에서 사람이 덜 죽고 괜찮게 먹고 살기 때문이다. 공리주의(公理主義)란 간단히 말해 사회 전체에 되도록 행복은 많고 불행은 적게 하자는 말이다. 서양에서 공리주의는 치열한 철학적 증명을 거친 영국 경험론의 결론이다. 동아시아에서 공리주의는 기본 전제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묻지 않는다. 131-2)


자녀를 보살피는 일이 가장의 역할이라는 점에서, 국가를 사유물로 여기는 유럽 국가보다 동아시아의 유교 국가들이 공익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처자식을 어떻게 대할지는 결국 가장인 임금의 마음에 달려 있다. 가장의 권위는 확실하지만 그의 의무는 모호하다. 이런 나라에서 백성은 임금에 대해서 착한 가장이길 바라는 기대만 가질 수 있다. 조선은 달랐다. 조선은 그때까지의 다른 동아시아 나라들에서 한발 더 나아가 사대부가 임금을 감시하고 끝없이 일을 시키는 체제를 만들었다. 조선에서 임금은 공공시설이자 한 명의 정치인, 그리고 한 명의 공무원이었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막대한 재산을 국고에 귀속시키려고까지 했었다. 개인 재산 없이 궁궐에서 숙식을 제공받으며 나라에 필요한 일만 하라는 거였다. 조선의 정궁(正宮, 최고 권위의 공식 궁궐)인 경복궁은 임금을 갑갑하게 옥죄고 감시하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경복궁에서 임금은 궁을 향유하는 사람이 아니다. 궁이라는 시설의 일부다. 134-5)


10장 임금의 


한국인은 조선인일 때부터 관(官)의 존재 목적을 백성을 위한 도구로 인식했다. 도구에는 임금도 포함된다. 조선에서 군주는 쓸모가 있을 때만 인정받는다. 쓸모란, 현실에서 ‘사용 가능’한 ‘실재’여야 한다. 백성이 임금을 공무원으로 사용한 확연한 예는 신문고다. 신문고 앞에는 줄이 길게 서있었기에 조선인들은 격쟁(擊錚)을 더 선호했다. 격쟁이란 문자 그대로는 두들겨 쇳소리를 낸다는 뜻으로, 일반 백성이 궁궐에 침입하거나 왕의 행차 길에 난입해 북과 꽹과리를 두들기며 억울한 일을 호소하는 행위였다. 격쟁이 소란스러움으로 이목을 끌고자 했다면 글로 조목조목 주장을 했던 상언(上言)도 있다. 상소(上疏)가 공적인 문제에 대해 공인의 자격으로 행하는 입장 표명과 요청이었다면, 상언은 사인(私人)으로서 주로 가문이나 친족, 스승이나 학우(學友) 등의 명예에 관련된 일을 진정하는 행위였다. 국가적 차원에서 민의 수렴과 민원 해결에 노력했던 정조 때에 상언과 격쟁이 가장 활발했다. 136-7)


상소는 아래에서 위를 향한다. 왕에게 전달하는 글이니 당연하지만, 비교적 대등한 관료와 사대부끼리 벌이는 말싸움도 있다. 정파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탄핵(彈劾, 상대의 죄를 책망함)이다. 한번 탄핵당하면 어떻게든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 탄핵한 측은 상대를 유배 보내는 데까지는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한직으로 좌천시키는 일 정도는 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탄핵의 책임을 지고 자신이 불이익을 받아야 한다. 한국인에게 시비,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은 너무나 중요해서, 오죽하면 시비를 건다는 말의 뜻이 바뀌어버렸다. ‘시비를 건다’는 원래 말뜻 그대로 ‘논쟁을 제안한다’는 말이다. 현재는 싸움을 거는 모든 종류의 짓거리를 뜻한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말 중 하나는 ‘힘없는 서민’이다. 논리력을 발휘할 때도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만큼 편하고 강력하기 때문이다. ‘힘없는 서민’이라는 말이 즐겨 사용되는 이유는 이것이 어디까지나 공격이기 때문이다. 144)


이상적으로 제시된 기본 일과에 따르면 조선 임금은 밤 11시부터 6시간 취침한다. 기상 후 한 시간은 자신보다 항렬이 높은 왕실의 어르신에게 문안을 하고, 문안을 받는다. 이 한 시간은 유교 국가의 왕으로서 유교적 가치를 재확인하는 시간이다. 이후 오전 수업과 오전 업무를 소화한다. 점심 식사 후에도 역시 수업과 업무를 치른다. 오후 5시부터는 궁궐 내 야간 숙직자를 확인한다. 숙직자 확인은 사소해 보이지만 국가비상사태가 발생하거나 암살의 위협에 대비하려면 필수적이다. 군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야간 근무와 암구호가 얼마나 필수적인지 잘 안다. 조정은 언제나 깨어 있는 상태여야 하니, 궁궐의 가장이자 군 통수권자로서 해야만 하는 일인 것이다. 저녁 식사 후에는 또 공부하고 왕실 저녁 문안 행사를 완수한 후, 임금 앞으로 날아온 상소문을 읽어야만 잠자리에 들 수 있다. 여기까지가 이상적인 일과다. 현실은 더 복잡하고 고단했다. 조선의 모든 불만이 임금에게 배달되었기 때문이다. 149-50)


한국인이라면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태종 이방원이 정도전과 그의 일파를 암살하고 왕위에 올라 독재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안다. 그런데 어디까지나 현대 한국의 기준에서 그렇다. 태종은 동시대 외국의 군주들은 물론 현대의 독재자들보다도 훨씬 불편한 생활과 많은 의무를 감당해야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역대 임금의 질병과 스트레스 증상이 즐비하게 널려 있다. 태종은 왕이 되는 데 성공하고 왕권(王權)이 신권(臣權)과 경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하지만 결국 정도전이 세운 나라의 왕이라는 틀 밖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태종은 정도전의 조선 설계도면 거의 전부를 물려받았다. 정도전은 공식적으로만 역적이었을 뿐 조선왕조 내내 조선 사대부의 시조로 추앙받았다. 무력은 철학자를 죽일 수 있지만, 철학을 이기지는 못한다. ‘왕의 나라’ 조선의 군주는 결국 ‘사대부에 의한 나라’에 갇힌 존귀한 포로였다. 동시에 사대부 역시도 그들 자신에게 부과한 도덕률의 포로가 될 운명이었다. 151)


11장 사대부에 의한 


현대 한국인은 민주주의 국가에 살기에 조선의 건국 이념인 민본(民本)을 멋지게 생각한다. 백성을 위한 나라라니, 대단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고려 시대에 혁명을 결심했다. 애초에 백성이 대체 무엇인데 신진사대부는 그들을 위해 그토록 목숨을 걸었는가? 전근대 엘리트에게 ‘민중의 삶의 질’이 목숨을 걸고 혁명을 저지를 만큼 중요했던 적은 없다. 아무리 고려왕조에 의해 민족이 탄생했다고 해도, 고려 체제는 바깥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백성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지, 국가가 백성의 도구라는 사고방식은 그때껏 출현해본 적이 없다. 어엿한 국가가 탄생한 후 민중은 줄곧 국가의 재산이었다. 세금(곡물이라면 조세)은 날것으로 말하자면 착취였다. 그런데 신진사대부는 신기하게도 민중의 고통에 공감했다. 이것이 철학의 위대함이자 이념의 힘이다. 조선은 이념 국가다. 현재까지 역사에 이름을 남긴 국가 중 조선과 가장 비슷한 체제는 단언컨대 소련(소비에트 연방)이다. 154)


조선이 아무리 도덕적 이념 위에 세워진 국가라 한들, 사대부층이 백성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생략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일방적인 엘리트주의다. ‘혁명이 좋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으니 너희는 그저 믿고 따라오면 된다.’ 조선의 천재 중 한 명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대표작은 《목민심서(牧民心書)》다. 여기서 ‘목’은 목양, 목축, 유목의 목이다. 백성은 가축을 치듯 ‘이끄는’ 대상이다. 사(士, 사대부)와 민(民, 백성)의 서열은 분명하고, 아주 권위적이다. 사대부가 이 정도 권위를 가질 근거가 지식이 아니라면, 남는 것은 오직 도덕성이다. 사대부의 도덕성은 백성보다 우월해야 하므로, 선량한 본바탕으로 태어나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선량하기 위해 매일같이 노력해야만 한다. 정도전과 그의 동지들이 후대의 사대부들에게 떠넘긴 숙제다. 조선의 사대부는 높은 학문적 식견을 가진 경우에도 예외 없이 뻔하디뻔한 도덕 주문을 자신에게 주입했다. 157-8)


사대부는 공부하는 사람이면서, 자신이 아닌 다수의 타인을 위해 공부하는 사람이다. 유학이라는 틀 안에서 인문과 기술은 분리되지 않는다. 열 살도 되기 전에 달달 외운 ‘소학’을 죽을 때까지 읽고 또 읽으며 수양하는 것도, 계단식 논에서 쌀 생산에 성공하는 일도 똑같이 사대부의 업이다. 20세기 한국 역사학자들은 유학이 서구의 실용적 기술에 패배했다는 콤플렉스 때문에 ‘실학’이라는 없던 단어를 억지로 만들어냈다. 그들은 ‘고리타분한 유학’과 ‘현실적인 실학’을 인위적으로 분리해냈다. 그다음 유학자들 속에서 주장에 맞아떨어져 보이는 이들을 솎아내 ‘실학자’라고 이름 붙였다. 마침내 실학과 실학자의 존재를 정설로 만들어내 교과서에 싣기까지 했다. 실학(實學)이라는 말에는 기존의 유학이 뜬구름 잡는 허학(虛學)이라는 가히 폭력적인 전제가 깔려 있다. 하지만 ‘실학자’들은 어디까지나 그들 스스로는 ‘유학자’로서 실용을 추구했다. 진실을 말하자면 유학은 한 번도 실학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160-1)


12장 백성을 위한 


조선의 별명 중 하나는 대식국(大食國), ‘많이 먹는 나라’였다. 임진왜란 시기 조선과 일본 양쪽의 기록은 모두 조선인의 식사량이 일본인의 3배라고 증언한다. 그래서 전쟁 초기에는 조선군과 일본군 모두 정탐에 실패했다. 식량 소비량을 탐지해 적의 군세를 판단하는 건 동아시아에서 전술의 기본이었다. 외국에서 온 동맹군도 놀랐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은 이렇게 많이 먹는데 나라가 운영되는 게 가능한가 진심으로 물었을 정도였다. 다만 이여송은 조선의 임금과 집권층이 얼마나 가난한 살림을 유지하는지는 상상하지 못했다. 조선인들은 충분히 먹었지만, 거의 곡물과 섬유질로 영양을 채웠기 때문에 균형 잡힌 영양식은 아니었다. 서양인들은 조선인이 이웃 나라보다 고기를 많이 먹는다고 했지만, 먹을 수 있을 때 먹는 양과 자주 먹을 수 있는 사정은 다르다. 쌀을 포함한 곡물로 가장 중요한 영양성분인 단백질을 보충하려면 해결책은 단순하다. 되도록 많이 먹는 것이다. 170-1)


먹는 문제는 가장 중요한 욕망일 뿐, 욕망 전부는 아니다. ‘의식주’라는 기본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인간은 사회적 성공을 꿈꾼다. 인간은 비교의 동물이다. 남들보다 우위에 서고 싶어한다. 이 분야에서 한국인을 뛰어넘는 민족은 없다. 조선의 사대부는 관료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양민들은 눈에 불을 켜고 지주나 양반이 될 기회를 노렸다. 천민들은 양민으로 올라설 기회가 주어지면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조선 시대는 매우 느슨한 신분제였다. 조선에서 신분이란 개인의 성공으로 얻을 수 있는 타이틀이기도 했다. 드물지만 노비 출신 재상이 배출되기도 했고, 가뭄과 자연재해로 먹고살기 힘들어진 농민은 일단 살기 위해 스스로 노비계약을 하기도 했다. 조선은 모두가 잘 먹어야 한다는 관념에서는 공산주의적 면모를 지녔으면서도, 성공을 향한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는 무척 자본주의적이었다. 한국에서 평등은 모두가 꼭대기를 향해 질주할 기회를 얻는 평등이다. 한국인은 결국 모두가 양반이 되는 데 성공했다. 176)


모두가 양반이 된 현상을 두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근대 조선인-한국인이 전근대 신분제를 부정하고 극복하는 대신, 반대로 신분제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했다는 논리다. 실상은 매우 단순하다. 좋은 건 손에 쥐고 봐야 하는 게 한국인의 속성이다. 신분제를 강력히 거부하는 모범적인 현대인이 되더라도, ‘양반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거부하는 멋진 사람이 되어 손해볼 것은 없다. 한국인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먹고 살게 해주는 은혜를 원하지 않는다. 한국인이 가장 분노하는 것은 ‘사다리 걷어차기’다. 사다리를 오르다가 떨어져 죽어도 상관없다. 단, 사다리는 있어야만 한다. 한국의 좌파와 진보정당은 이 사실을 습관적으로 망각하기 때문에 불리함을 자초한다. 지극히 현실적인 욕망의 동물인 한국인은 ‘자신이 동의할 수 있는 정글’을 원한다. 자신의 신분과 계급을 바꾸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남들 앞에 나서고, 가끔은 무리수를 두다가 자빠져 의기소침해하는 펭수는 한국인의 사회적 욕망을 대변한다. 177-8)


백성이 욕망 추구에 자유롭기만 했던 건 아니다. 조선의 백성인 이상, 아무리 공권력에 떼를 쓰는 행위가 허용되어도 봐줄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조선은 이념 국가답게 수직적이고 획일화된 사회를 추구했다. 조선의 설계자들은 하나의 원칙으로 전국을 통일하고자 했다. 조선에는 요즘으로 치면 ‘국민 공통 교과서’가 존재했다. 바로 《소학(小學)》이다. 사대부와 백성은 학문과 교양에서 차이가 날지라도 소학에서 만났다. 원래 10세 이하의 어린이를 위한 교재인 소학은 모든 조선인의 교집합이라 할 수 있다. 소학을 읽거나 외우지 않은 백성이라도 소학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았다. 조선은 고도의 중앙집권을 성취했는데, 소학은 정신적 중앙집권이었다. 소학이 가장 강조하는 도덕은 효(孝)다. 그런데 핵심적인 문장은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바로 부모와 스승과 군주의 은혜는 같다는 명제다. 조선 질서의 토대는 효(孝)다. 효란 부모가 사랑을 주었기에 갚아야 하는 의무다. 182-3)


효의 원리를 철학적 차원에서 비정하게 파고 들어가면, 사실 장사의 논리다. 본질이 도덕적 부채이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받은 게 있으니 갚아야 한다는 게 한국적 효다. 대승불교 경전인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의 제목은 ‘부모의 은혜가 얼마나 무거운지 가르치는 경전’이라는 의미이다. 불교는 철저히 개인적인 종교다. 진리로 향하는 길에 부모의 은혜와 같은 인간관계를 거추장스럽게 여긴다. 많은 대승불교 경전이 위경(僞經, 가짜 경전)이라지만, 부모은중경은 제목부터 대놓고 위경이다. 〈부모은중경〉은 부모가 ‘독자인 당신 따위는 상상도 못 할 고생을 치르며’ 어떻게 자식을 낳고 키웠는지 구구절절 노래한다. 자식에게 마음의 빚을 확실히 지어주기 위해 의학적으로 몹시 정확한 연구가 포함되어 있다. 임신부터 출산, 산후까지 산모의 신체 변화와 각종 후유증이 망라되어 있다. 조선은 공식적으로 불교를 배척한 나라이지만 부모은중경만큼은 소학의 파트너로 권장했다. 183)


13장 조선의 몰락 


한국에는 조선 사회가 한계에 부딪힌 이유를 감성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낳은 정신적 후유증을 예상하는 것이다. 양란(兩亂)에서 조정은 훌륭하게 백성을 지켜내지 못했다. 한 번은 임금이 자신의 국토 안에서 적국의 군주에게 굴욕적인 항복의식을 치르기까지 했다. 그래서 조선의 남성 지배층은 피지배층 앞에 면목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마침내 그들은 무조건 자신에게 복종하라는 수직적이고 성차별적인 윤리를 강요하게 되었으며, 조선은 역동성을 잃어버리고 서서히 몰락해갔다는 이야기다. 실상 임진왜란은 심각한 물질적 피해를 입혔지만 정신적인 절망을 주지는 않았다. 과정이야 어쨌든 침공군을 나라 밖으로 몰아내면 승전이다. 거꾸로 병자호란은 대단한 충격이었지만, 대체로는 심리적 충격이었다. 조선은 그 충격을 잘난 척으로 메워버렸다. 조선과 명나라는 세상에 존재하는 단 두 개의 문명국이었는데, 둘 사이의 생존경쟁에서 승리한 셈이 된다. 187-8)


양란은 국가체제 몰락의 단초가 되지 않았다. 두 전쟁을 합쳐도 경신대기근이라는 대재앙 앞에서는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 경신(庚辛)은 경술년과 신해년을 합친 말로, 1670년과 1671년을 가리킨다. 이 시기 세계 주요 문명은 소빙하기의 도래로 굶주림과 질병이 넘쳐났다. 그러나 한반도만큼 끔찍했던 곳은 없다. 우박과 서리가 작물을 짓밟았다.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들었는데, 비는 곡식이 충분히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내리지 않고 기다렸다가 단번에 내려 홍수를 만들었다. 메뚜기떼가 창궐했다가 사라지자 극악한 태풍이 한반도를 휩쓸었다. 여름에 서리와 눈이 내렸다. 먹지 못한 데다가 추위에 시달리니 면역력이 떨어져 역병이 전국을 휩쓸었다. 전염병에 걸리기는 가축도 마찬가지였다. 농사일에 필수적인 소가 집단 폐사했다는 보고가 전국에서 조정으로 올라왔다. 말라죽은 작물 중에는 솜의 원료인 목화도 있었다. 그러잖아도 추위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은 솜을 얻지 못해 더 얼어 죽었다. 190)


기상이변과 자연재해는 1671년에도 계속되었다. 조선인들은 가족을 죽이거나 버리고, 심지어 가족끼리 잡아먹기까지 했다. 조선의 가족윤리는 양란이 아니라 경신대기근에 추락해 바닥을 쳤다. 조선에서 도굴(盜掘, 무덤 도둑질)은 문화적인 금기였다. 하지만 이때에는 도굴이 판을 쳤다. 추위를 피하려고 죽은 사람의 수의를 벗겨 입기 위해서였다. 이때쯤 조선에는 창궐할 수 있는 모든 해충이 창궐해 쌀은 물론 보리, 기장, 수수, 좁쌀, 조선에서는 희귀한 작물이었던 밀까지 파먹었다. 심지어 한국인의 반찬거리인 산나물의 잎과 뿌리까지 죄다 말라 죽었다. 경신대기근 이전까지 조선 지배층은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본능적인 이기심을 절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경험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대기근 이후에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가족과 자신을 위한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가뭄이 들 때마다 부자가 굶주린 백성에게 곡물을 빌려주고 원금에 더해 이자까지 돌려받는 ‘고리대’가 성행했다. 190-1)


지주들은 대농장을 운영하는 것보다 훨씬 편리한 방식을 선호하게 되었다. 먼저 사정이 안 좋아 고리대를 갚지 못하는 채무자의 땅을 차지한다. 채무자는 한때 자신의 것이었던 논밭에서 일하는 소작농이 된다. 지주는 가만 내버려두어도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알아서 땀 흘려 일하는 소작농에게서 소작료를 걷어가면 그만이다. 자연재해가 닥쳐도 가뭄이 와도 그들의 사정일 뿐이다. 흉년이 들면 고리대에 담보로 잡힌 땅을 차지해서 좋고, 풍년이 들면 수입이 늘어서 좋다. 책임질 것 하나 없이 외주를 주고, 위험요소는 하나도 없는 속 편한 방식이다. 대기근이 불러온 양극화는 잉여자산을 소유한 이들을 상품의 판매자이자 소비자로 만들었다. 곧 상업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조선은 열악한 곡물 생산력으로 천만 명 이상의 인구를 부양해야 했다. 자본경제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조선과 맞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다. 조선 말기에는 현재의 재벌에 해당하는 국제적인 거상(巨商)이 등장할 만큼 양극화가 진행되었다. 192-3)


조선을 멸망시킨 다른 주범은 탕평책이다. 조선에는 붕당정치가 있었다. 붕당을 정치세력으로 봐도 되고, 정당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나는 여기서 붕당의 긴 역사를 이야기할 생각이 없다. 붕당정치의 특징만으로도 족하다. 성리학에는 통(通)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치와 통한다는 뜻이다. 조선의 과거시험 답안지가 받은 가장 높은 등급은 대통(大通, 크게 통함)이었다. 진리와 진리가 아닌 거짓이 명확히 나뉜 세계관이다. 진리는 하나인데, 붕당은 둘 이상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와 그쪽은 추구하는 게 다른 모양이오.”하고 끝날 수는 없다. 주장이 다르면 한쪽은 통이요, 다른 쪽은 불통이다. 논리 대결이 항상 그렇듯 점점 세부적인 부분의 시시비비에 목숨을 걸게 된다. 나쁜 말로 치졸해지고 현실과 동떨어진다. 아마도 대표적인 경우가 그 유명한 예송논쟁(禮訟論爭)이다. 붕당 투쟁은 말과 글로 벌이는 내전이다. 전투에 백성들이 동원되지 않는다. 조선의 정치투쟁은 백성의 삶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진행되었다. 194-5)


21대 임금 영조에게 붕당 투쟁은 비현실적인 국력 낭비로 보였다. 그는 관념 투쟁을 멈추고 임금을 중심으로 현실적 국익을 챙기자는 탕평책(蕩平策)을 추진했다. 탕평책은 영조가 시작해 손자인 정조가 완성했다. 두 임금이 통치할 때는 문제가 없었다. 영조의 광기 어린 카리스마와 정조의 천재적 두뇌는 탕평책의 포장지를 빛냈다. 하지만 정조가 승하하자 더 큰 폐단이 다가왔다. 강력한 임금과 붕당정치가 사라지자 노론(老論)세력의 일당독재가 시작되었다. 당내투쟁에서 안동김씨가 최종 승리를 거두면서 세도정치의 막이 올랐다. 이는 북한의 조선로동당 안에서 김일성파가 연안파, 소련파, 남로당파를 파멸시키고 마지막으로 동지였던 갑산파마저 숙청하며 나라를 차지한 과정과 비슷하다. 세도정치 역시 특정 가문의 혈통이 국가를 사유화하는 결말로 끝났다. 세도정치가 시작된 시점에 이미 조선은 사망 신고를 받았다. 유교 국가 조선은 유교적이지 못해서 멸망한 것이다. 195-6)


문명사적으로 조선의 멸망은 예정된 것이었다. 큰 그림에서 보면 경신대기근과 탕평책보다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조선 시대에 이미 한반도의 농업생산력은 더 이상의 인구증가를 감당할 수 없는 벽에 부딪혀 안에서부터 붕괴할 운명이었다. 한국어에는 고리타분한 옛날을 뜻하는 ‘고리짝’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원래 사용자는 조선인들이다. 고리짝의 어원은 ‘고려였을 적’ 즉 고려 시대다. 현대인이 ‘전근대’, ‘봉건 시대’라는 표현을 쓰며 후진적인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때처럼 조선인 역시 ‘고리짝’과 조선 시대를 구분했다. 조선이라는 무덤은 생각보다 단단한 토대다. 한국은 진흙 위에 세워지지 않았다. 조선은 문명의 물질적 한계 속에서 생명 연장을 위해 탄생했지만, 막대한 생산력을 가능케 한 2차 산업사회를 만나는 순간까지 민족성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조선은 실패했으나 실패만 하지는 않았다. 조선은 한국인에게 혁명적 기질과 못된 성깔을 물려주었다. 조선인의 시신에서, 마침내 한국인이 태어났다. 201, 204)


결어 한국인의 탄생 


원칙적으로 한국인은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하면서 탄생했다. 실질적으로는 한국전쟁 휴전이 성사된 1953년 7월 27일에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이날을 기점으로 조선인은 대한민국(남한) 국민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인민으로 갈라졌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국민이 된 한국인은 전쟁이 남긴 폐허 위에서 일어섰다.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의 한반도는 자연이 제공하는 생산력이 한계에 다다른 단계를 넘어 급속도로 고갈되어가는 상태였다. 독립 후 다른 모든 산업품목에 앞서 인공 비료부터 생산하려고 했던 건 당연하다. 현재의 한국인이라면 수없이 들어서 알고 있는 노년층의 고생담은 요즘 세대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기구하다. 그들은 쉬지 않고 부지런히 노력해도 굶주렸다. 그러나 살아남는 데에는 성공했다. 한국인에게 삶은 곧 노력의 연속이다. 노력은 한국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적이며, 한국인 자체다. OECD 국가 중 근로자의 연평균 근로시간이 1위인 건 당연하다. 205)


중국에는 오랜 속담이 있다. “천하는 넓고 황제는 멀다.” 이 속담은 지금 이렇게 바뀌었다. “천하는 넓고 당(공산당)은 멀다.” 한국의 중앙은 멀지 않다. 한국에서 강력한 중앙집권의 역사는 고려 4대 임금 광종(光宗)이 호족들을 핏물로 쓸어버리면서 시작되었다. 중국에 비하면 매우 손쉬운 과정이었다. 광종의 뒤를 이은 성종은 최승로(崔承老)를 발탁해 숭유억불 정책을 폈지만, 그는 불교를 무시한 적이 없다. 성종에게 유교와 불교는 각자 다른 가치를 지닌다. 문화적인 부분은 불교에 맡기면 되었다. 국정 운영과 행정체계는 유교를 따르면 된다. 성종에게 유교는 학문도 믿음도 아니었다. 일원화된 행정이었다. 한국은 중앙정부 조직은 물론 과거제, 농경에 대한 세금계산법까지 중국의 좋은 것을 거의 전부 도입해 꽤 그럴싸하게 현지화했다. 한국은 성공적인 현대국가의 필수 조건인 중앙집권과 관료제가 가장 잘 자리 잡은 나라 중 하나다. 그 이유에 원래부터도 오랜 경험이 있었다는 사실이 빠질 순 없다. 207-8)


조선 성리학의 통(通)처럼 한 글자로 동학을 설명해야 한다면, 그것은 접(接, 만남)이다. 동학 신도들이 만나는 가장 작은 모임이 접(接)이며, 접의 지도자를 접주(接主)라고 한다. 통(通)의 세계엔 고정된 이치가 있고, 공부하고 수양한 결과 이치와 통하는 인간(사대부)이 정해져 있다. 나라가 뿌리까지 썩은 조선 말기, 수탈당하던 민중은 사대부와 하늘의 이치 사이의 통을 인정할 수 없었다. 접의 가치는 통과 반대다. 접은 부당한 착취를 당하는 사람들의 연대, 공감, 협동이다. 통은 수직적이다. 하늘의 가르침이 사대부로, 사대부의 통치가 백성으로 이어진다. 접은 수평적이다. 그렇다면 동학은 하늘의 이치와 닿기 위해 무엇을 해야 했을까.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동학의 핵심 사상은 인내천(人乃天)이다. 사람이 곧 하늘이며 이치다. 인간은 인간인 이유만으로 존귀하며, 태어나는 순간부터 도구가 아닌 목표다. 인내천 사상은 전통적인 인(人, 다스리는 소수)과 민(民, 통치받는 다수)의 구분을 지웠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210)


3.1운동은 전국의 조선인이 참여함으로써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그리고 민주공화국 체제가 다수의 합의에 의해 도출되었다는 논리적 근거를 확보했다. 3.1운동이 일제의 무력에 진압당하고 끝났기에 실패한 독립운동이라는 관념은 현대 한국인의 착각이다. 이 운동은 민족국가의 미래 정치체제를 결정했다. 제헌헌법(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의 정당성이 3.1운동 위에 서있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의 진보진영에는 역사에 무지한 관념이 하나 있다. 서양의 완제품인 민주주의가 하늘에서 똑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한국인은 민주주의를 이해하지도 체화하지도 못한 채 민주공화국 헌법을 덜컥 떠안게 되었다. 한국이 헌법상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민주공화국이 된 이유는 이승만을 몰아낸 4.19혁명과 전두환의 신군부에 대항한 80년대의 민주화 투쟁 덕이다. 대한민국은 1987년 군부독재를 끝장낸 6월 혁명을 통해 민주공화국으로 완성되었다. 212)


대한민국의 헌법은 강대한 위력을 발휘해왔다. 조선 성리학은 한국인을 언어로 정리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민족으로 만들었다. 한국에서 무력을 동반한 권력은 문자로 쓰인 제도에 패배했다. 4.19 혁명의 명분은 헌정 가치였다. 이승만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힘은 헌법에서 나왔다. 헌법은 결코 일부 진보 지식인들의 표현처럼 ‘장식’이 아니었다. 이승만의 계엄령과 발포 명령을 거부한 군 장성들 역시 군인은 헌정 가치를 수호한다는 사명감으로 목숨을 걸었다. 한국인은 일상에서 다혈질의 기분파지만, 큰일을 위해 결집했을 땐 로고스(Logos, 옳은 말씀)의 민족이다. 6월 혁명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제도를 재확인한 사건이다. 현재 한국의 성공과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는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맹자에서 탄생한 정도전의 민본, 민본을 대체한 (동학의) 인내천, 현재의 서양식 민주주의까지 한국의 정치사상은 끊기지 않은 역사적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213)


나가는 글: 한국인은 성격이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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