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테 2
오쿠보 케이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권에 이어 2권도 읽었는데 여느 만화들과 다른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아주 만족 중이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 두 장면이 있다.
하나는 만화의 여주인공이 같이 이야기를 진행하는 남자주인공이나 친구들과 사랑의 감정에 빠지게 된다는 진부한 설정을 과감히 깼다는 점과 그러면서 자기 힘으로, 스스로 자립심을 기르기 위해 끈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첫번째 이유의 러브라인은 만화에서 어찌보면 재미를 위해 꼭 필요한 필수요소에 가까운데 이 만화는 이에 대해 딱 선을 긋는다. '아르테에게 불필요한 부분'이라고.
맞는 말이다. 아르테는 훌륭한 화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지 한 사람의 연인이나 아내로 살아가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 아르테에게 중요한 것은 '화가가 되기 위한 것'이다. 아르테가 빵집에서 얻었던 교훈처럼 '자기일은 확실히 해야한다'라는 말. 누구보다 아르테에게 필요한 말이 아닐까 한다.

두번째로 아르테는 자기 일에 집중하면서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립심을 키운다.
앞의 러브라인을 세우게 되면 여자주인공은 자기도 모르게 남자주인공에게 의존해버린다. 하지만 아르테는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벗어나 자기 일을 여전히 열심히 해낸다. 그 점이 아르테의 매력 중 하나일지도.

뒤에 이어지는 3권도 기다려진다. 나중에 아르테가 훌륭한 화가 되기를 바라게 되버린다.

여담으로 아르테와 비슷한 화가가 실제로 있다. '아르테미시아 젠텔레스키'인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딧'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여성 화가다. 그림은 잔인하지만 근육질의 남성의 목을 거침없이 베어내는 유딧의 모습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박력감이 느껴진다. 궁금하면 한 번 찾아보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르테 1
오쿠보 케이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실 만화는 몇몇 유명한 작품 빼고는 거의 읽지 않는다. 그런데 이게 왠걸? 아주 색다른 만화를 얼마전에 발견했는데, 바로 이 ‘아르테‘라는 만화다.

작품 속 배경은 16세기 피렌체. 예술이 흘러넘치던 유명한 르네상스 시대이다. 주인공인 아르테는 귀족 집안 딸이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여자아이며 꿈이 훌륭한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당시 여성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당시만해도 예술도 오로지 남성들의 것으로만 여겼었고 여자 화가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르테는 그럼에도불구하고 가출해 머리까지 자르며 화가가 되기를 요구하고 우여곡절 끝에 ‘레오‘이라는 화가의 제자가 된다.

이 만화는 여자 화가 지망생인 아르테가 펼치는 성장 드라마 같은 작품이다.
어떤 사람들은 주인공인 아르테가 너무 밝으며 열정페이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끝까지 읽다보면 그녀가 이유 없이 밝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때는 화가가 되기 2배나 힘들었으니 아르테도 그만큼 열정을 보이는게 아닐까? 아르테의 당차고 순수한 모습은 읽은 사람에게 절로 웃음과 재미를 남긴다. 그리고 ‘여자이니 하지 못하겠지‘하는 것들을 행동으로 보여주면서 편견을 깨부수는 모습 또한 통쾌하다.

시대극이나 잔잔한 만화를 원하는 사람들에겐 딱 맞는 만화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잉게 숄 지음, 송용구 옮김 / 평단(평단문화사)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백장미‘라는 단체를 아시는가?
모른다면 이 단체가 어디서, 무슨 목적으로 세워졌는지 추측할 수 있는가?
아마 이 단체가 과거 무시무시했던 나치 독일 시절에 세워진 단체라고 말한다면 의외라고 생각할 것이고, 이 단체의 목적이 나치를 비판하고 타도라고 한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이 단체를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단체는 대학생들이 서로 결성해 비밀리에 활동했고 당시 나치 독일의 철저한 탄압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백장미단의 중심인물이었던 한스 숄과 조피 숄 남매가 결국 극형을 선고받아 단두대형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렇지만 그 두 남매가 끼친 영향은 대단했다.
내가 이 단체를 ‘독일의 양심‘이라고 했듯이 이들은 나치 독일의 ‘국가 사회주의‘ 즉 ‘파시즘‘에 대항하여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주장했다. 이외에 유대인 학살의 부조리, 전쟁을 통한 정치적 독재를 펼치며 깨어있는 지식인의 면모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을 보면서 일제강점기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현대사, 특히 군부 독재 시절이 떠올랐다. 아직 학교에서 배운 것 외에는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그 당시 저항했던 운동권 사람과 지식들의 자유를 위한 쟁취 의식은 지금봐도 여전히 존경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들 단체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후에 독일이 나치 독재에서 해방되고 그동안 저지른 악행에 깊은 반성을 표하는 것도 이들 ‘백장미‘단의 노력 때문이 아닐까. (일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독일이었다. 개인적으로 대단하다고 느끼는 나라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이런 인물이 전혀 없는지 사과도 없다.........)

양심 있는 몇몇 인물이 보여준 작은 힘이 비록 작은 힘이라도 연못에 던져진 한 개의 돌일지라도 수많은 파동을 만들어내듯이 작지만 많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도 모른다.

독재자의 나라에서 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지.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배불리 먹기만 하면 만족해하는 그런 짐승이 아니지 않니. 물질적으로 보장받는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란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각자 자유로운 견해와 굳은 신념을 가진 인간이라고. 이런 가치를 외면하는 정부는 국민의 존경을 털끝만큼도 받을 수 없단다.
우리가 이 정부이 마땅히 요구해야하는 첫 번째 과제는 국민 개개인이 갖고 있는 바로 이러한 견해와 신념을 보장받는 것이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책은 세계문학에 포함되지 않는게 이상한 작품 중 하나다.
너무 순수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단지 동물을 주제로 했기에 들 수 없었던 것일까?
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진 동물 문학이라고 하자면 잭 런던의 ‘화이트 팽(야성의 부름)‘ 과 ‘시튼 동물기‘ 뿐이다. 그러나 그나마 알려진 이런 작품들도 어른들이 읽기에는 너무 수준이 낮다며 청소년 문학으로 분류하곤 한다. (물론 동물농장이라는 책도 있지만)
블랙 뷰티도 이런 인식의 오류 때문에 청소년 문학으로 불리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파랑새 클래식에서 양장본으로 아름답게 편집해서 출간했지만 현재는 품절.... 에다가 분류를 보면 청소년 문학으로 나온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동물에 대한 내용이라고 해서 무조건 어린이,청소년 문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블랙 뷰티는 무려 1800년대 나온 소설로 그 당시의 인식과 다르게 마차를 끄는 말의 존엄성을 주장한 책이다. 작가가 블랙 뷰티라는 검은 말의 입을 빌려 말하는 내용은 단순한 동물 보호차원에서 말을 대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동반자로서 그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간디의 이런 말이 있다.
˝한 나라의 위대함과 도덕적 성숙도를 보여주는 것은 그 나라 사람들이 동물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1800년대 유럽은 산업화로 한창이었다. 기계와 공장이 활발히 움직이면서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했지만 산업화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인권이라던지 자유가 극히 열약했고, 이때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과 같은 많은 위대한 사상이 만들어진다. 그런 격동의 시대에 동물의 권리를 주장한 소설인 ‘블랙 뷰티‘는 단순한 동물에 대한 애정때문이 아니라 간디의 말처럼 한 나라의 도덕적 성숙을 촉구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청소년 문학으로 해도 어른이 읽기에도 충분한 소설임에는 틀림없다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읽다보면 동물들도 우리 인간과 같이 기쁨과 슬픔을 느끼고 어떨 때는 인간보다 낫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적극 추천이다!


신께서 사람에게는 사물을 알 수 있는 이성을 주셨지만 동물들에게는 이성에 의지하지 않아도 나름의 방식으로 한결 빠르고 완벽하게 알 수 있는 깨달음을 주셨으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키우는 동물의 가치를 절반도 인정하지 못하고 나누어야 할 우정을 나누지 않는다.

백 사람 중 아흔아홉은 말을 토닥여 주는 건 기차를 끄는 증기기관을 칭찬해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말들이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부르죠.
자기들의 느낌을 이야기하지 못하니 사실 그렇기는 하지만 말을 못 한다고해서 고통을 덜 받지는 않아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구나 어른이 되기 위해 성장통을 겪기 마련이다. 이러한 마음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엮어낸 작품이 바로 이 ‘데미안‘이다.

사실 데미안은 주인공이 아니다. 책 제목으로 나왔기에 뭔가 주인공 같지만 읽어보면 주인공의 친구 격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목이 전혀 이상하지 않는 게, 주인공보다 데미안이 더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기 때문이다.
데미안은 주인공 싱클레어를 완전한 ‘나‘자신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마치 단테의 ‘신곡‘에서의 베아트리체처럼 말이다.
싱클레어가 자라면서 느끼는 쓰디쓴 성장통은 데미안과 피스토리우스를 만나면서 점차 완성되고 마침내 완벽한 ‘나‘ 자신이 된다. 비로소 내가 데미안이 되었다는 것을. 아래의 문장이 싱클레어가 내면의 성장통을 겪고 나서 깨달은 점이다.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가는 것, 그것이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닐까.

그렇다면 진정한 ‘나‘가 된다는 건 도대체 뭘까.

가끔가다보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나 자신이 괜히 서러워지고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걸까‘하는 질문이 들곤한다. 그리고 저런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나‘가 되었기 때문에 저렇게 된 것이로구나,하고 느낀다.
그런데 데미안은 이런 고정관념을 확실히 깨부순다. 그것이 진정한 ‘나‘가 된 것이 아니라고. 진정한 ‘나‘는 내가 내면적으로 정말 하고 싶은 것을 강렬히 열망하고 누구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온통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또한 그게 직업적 성공이나 사회의 성공을 말하는 것도 아니라고 설명한다. 꼭 사회에서 성공해야 ‘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데미안에게 끌린 이유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데미안은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싱클레어 곁에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진정한 ‘나‘가 되기 위한 과정은 오직 자기 자신만 알 수 있는게 아닐까한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진정한 소명이란 오직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그것뿐이다.

누구나 언젠가는 제 아버지와 선생님들에게서 떨어져나오는 발걸음을 옮거야 하고, 누구나 고독의 가혹함을 조금이라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