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정영목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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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출한 영미권의 국내 번역 문학작품을 읽다보면 대개는 번역자 정영목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 해외문학 작품을 즐겨 읽는 독자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쓴 글을 읽을 기회가 없었다. 아니 읽을 기회가 엄청 많았을 터인데 읽지 않았다는 표현이 올바를 것 같다. 번역된 책의 뒤편에는 거의 예외없이 번역자의 해설이나, ‘번역자의 말이라는 형식으로 편집되어 있지만, 나만의 감상이 혹여 번역자의 글로 인해 변형되는 것을 꺼려하기에 항상 외면하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외면해왔던 글들, 번역자로서 썼던 책의 마지막 페이지들에 실렸던 그 글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12명의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일종의 문학 해설집이다. 여기에 그가 번역한 작품들과는 무관한 순수한 일상의 단상이나 그의 문학 예술적 감수성을 보여주는 작은 평론들이라 할 수 있는 에세이 22편이 함께 구성되어 있다. 신간 안내에 이 책이 눈에 뜨이자 곧 알아차렸던 것 같다. 내 고유의 작품 감상이 번역자의 해설과 뒤섞일 염려가 없는 상태, 즉 한 걸음 떨어져 번역자가 읽고 느꼈던 작가와 그 작품들의 감상을 함께 나눌 좋은 기회라는 것을.

 

1. ‘정영목이 통과한 작가들

 

<내가 통과한 작가들>은 지난 522일 타계한 필립로스를 비롯하여 존 업다이크, 존 밴빌, 코맥 매카시, 커트 보니것에 이르는 12명의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평론과 해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첫 인물을 필립 로스가 열고 있는데, 번역자가 가장 좋아했던 작가였던 것 같다. 유태계 미국인이었던 작가로서 그의 작품은 줄곧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는 기록이었음을 해독해 주는데, 로스를 향해 뻔뻔스러울 정도로 전통적인 소설가라고 비아냥거렸던 바다의 작가 존 밴빌과의 비교 해석은 단연 압권이다.

 

내용이 뻔해지면 스타일도 뻔해진다라는 지론을 펴는 밴빌이 보기에 에브리맨의 평이한 스타일은 곧 삶에 대한 사유가 평이하다.”는 증거로 보였던 모양이다. ‘죽음을 주제로 한 두 작가가 그네들의 작품에서 동일한 모티브인 바다를 등장시킨 문장들을 읽게되면 그 사유의 판이함에 삶의 복잡성을 대하는 입장을 발견하게 된다. 해설자인 정영목의 로스를 위한 대변은 별도로 하고 그 다음의 이해는 독자의 몫이다.

 

내가 예순에 죽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했던 주제 사라마구돌뗏목, “강인하고 과묵한 남성의 이미지로 굳건하게 각인된 헤밍웨이의 단편 작품을 통해 작가자신의 내면 치유를 향해 묵언적 평온을 지향하는 또 다른 헤밍웨이의 모습으로 안내하기도 하며, “미국의 소도시 중간계급의 삶에 천착했던 존 업다이크토끼 4부작을 중심으로 존 치버필립 로스의 평론과 어울려 더욱 작품에 대한 이해의 범위를 확대시켜주기도 한다. 그리고 오스카 와일드’, ‘알랭 드 보통’, ‘코맥 매카시등을 새롭게 기억하는 읽기의 시간이 되어주기도 한다.

 

소개된 모든 작가들에 대한 해설은 그들의 작품을 접하게 될 경우 분명 보다 깊은 읽기에 도움이 될 것이지만, 단 한편의 작품을 읽었음에도 강렬하게 내 마음을 지배하는 모더니스트 스타일리스트인 존 밴빌바다를 통한 짧은 평론은 그의 또 다른 회색빛 색조 소설을 기다려지게 한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배치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어둠 속의 웃음소리에 대한 웃음을 자아내는 메타 치정극으로서의 꼼꼼한 작품 해석은 그저 책장에 꽂혀 있기만 했던 그의 작품으로 달려가게 만들기도 한다. 내겐 인간의 삶과 역사에 대한 이들 작가들의 각양각색의 시선을 한 곳에서 발견하는 썩 좋은 시간이었다고 해야겠다.

 

2. ‘정영목이 읽은 세상

 

사실 <내가 읽은 세상>이라는 제목 하에 모여진 정영목의 에세이들은 기대하지 못했던 수확이라 할 수 있다. 번역자라는 직업적 편협성에 한 사람을 가두어두고 그 좁은 곳에 관념을 덧씌우고 있었던 내 편견 탓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22편 중 첫 세 번째에 수록된 칭찬과 성취에 선 사람의 모순된 태도를 지적하는 야유할 권리라는 글에서 완벽하게 전복되고 만다. “칭찬하고 갈채를 보낼 때는 그저 박수만 쳐도 되지만, 자신을 비판하려면 야유하지 말고 예의와 격식을 갖추라고요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론부에서 남에게 야유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자신이 갈채로 죽는 것을 막는 영리한 방법일수도 있음을 지적하며 맺는데, 그야말로 그의 사유와 문장에 완전히 매혹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자비가 정의에 우선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 할머니의 목소리, 김태영 감독의 영화 <가족의 탄생>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 된다>, 여기에 순정만화 바닷마을 다이어리까지 가세하며 가족의 의미를 새기는 새로운 가족은 여느 베스트셀러 에세이를 초월하는 사유의 경쾌함과 깊이가 균형을 이룬 감동을 준다.

 

모두 엄선되고 시의성, 또는 지적 지평을 넓히는 글들이지만 내게 인상 깊었던 에세이는 브레이킹 배드의심의 혜택, 두 편을 선택할 수 있다.

전자는 2014년 미국 에미상 작품상을 수상한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 월터 화이트의 삶에 펼쳐지는 삶의 여러 아이러니에 포커스를 둔 글이다. “세상이 자기를 보는 눈 세 가지”, 자신이 설정한 이미지대로 나도 나를 보고 세상도 나를 보아주는 눈이 일치할 때와 불일치 할 때 벌어지는 인간의 상황을 따라가며, 약자였을 경우의 원망, 강자였을 경우의 자기모독에 대한 세상을 향한 폭력의 모습을 바라보게 해준다. 자신의 간절함을 정당화하는 순간 그것이 악으로 변해가며, 그 악을 선으로 인정받으려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발견케 되는 여정은 불과 4페이지의 짧은 글임에도 거대한 장편소설을 읽어낸 듯한 감상을 주기까지 한다.

 

한편 의심의 혜택합리적 의심이라는 법적 용어를 빗댄 영어의 ‘benefit of the doubt'로 출발해서 세상의 이해에 감추어진 합리성과 투명성의 실체가 발하는 삶의 상황들을 알려준다. 단연 삶의 지혜가 농축된 글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시인 김수영, 평론가 김윤식, 소설가 이문구에 대한 소박하고 친밀감 넘치는 평론 또한 진중하며 맛깔스럽다. 번역가 정영목이 아닌 독보적인 에세이스트로서의 진면목을 알게 되는 기회이기도 하다. 번역뿐 아니라 앞으로 그의 더 많은 창작 작업을 기대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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