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0 그가 남긴 글 중 상당수는 교회 오르간 연주에 관한 상세한 기록과 썩 훌륭한 제자들을 위한 추천서로, 재미없고 난해한 내용이다. 그다음으로 많은 내용은 시청 공무원에게 보내는 항의 서한으로, 자신의 근무여건과 불만스러운 보수를 가지고 끝없이 물고 늘어지고 있다.
p27 이 책의 목적은 작품 속 인간과의 조우에 있다. 따라서 이 책이 지향하는 바는 전통적인 전기와는 매우 다르다. 똑같은 경험과 똑같은 느낌을 다루면서 이 책은 작곡행위가 바흐에게 실제로 무슨 의미였는지 독자에게 알려주고자 한다
p43 내 속은 분노로 끓어올랐다. 어린 시절부터 알아왔던, 이 놀랄 만큼 기쁨에 찬 음악을 어떻게 이토록 점잔만 빼고 창백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을까?
p57 바흐 부고 기사에 수록된 그의 미출판 작품 리스트는 그의 아들과 제자들이 그의 칸타타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려준다. 그들은 바흐 작품 중 총 다섯 편의 주일 및 축일을 위한 교회음악 전곡집을 부고 기사 제일 상단에 올렸다
p95 이처럼 미신과 계몽은 대학도시 안에서도 계속 공존했으며, 지동설과 기계적 세계관이 작센의 일반 시민들에게 그리고 앞으로 살펴볼 학교 교육 침투하는 데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p121 바흐 왕조의 근원과 발전 과정을 복원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이런 남성 편향성과 선택적 접근을 완전히 피해갈 수 있다.
p135 암브로지우스의 음악적 다재다능함, 자신의 재능에 대한 대쪽 같은 믿음, 그리고 기교적으로 정진하고자 노력했던 전후 바흐 형제 및 사촌들의 세대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p142 그가 제바스티안이 아주 어린 시절 접한 음악적 환경 안에서 가장 흥미롭고 혁신적인 음악가였으며, 제바스티안에게 오르간 음악에 대한 첫인상을 안긴 인물이었다는 점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p158 그 자취는 오늘날 남아있지 않고, 셀 수 없이 많은 순레자들이 찾는 아이제나흐의 바흐 하우스는 2000년 가짜로 개조한 인상적인 박물관에 불과하다
p162 요한 마테존이 말했든, '창의력은 열정과 정신을 요구하며, 그 순서와 비율을 냉철히 계산해서 계획적으로 반영해야 한다' 바흐 자신도 만년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근면과 연습을 통해 성취한 것들은, 웬만한 재능과 능력을 타고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이다'
p176 제바스티안 이전 세대 중 가장 위대한 바흐였던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숙원이던 오르간 프로젝트가 완성되는 모습을 보지 못했고, 어린 사촌의 작곡가로서의 눈부신 발전 또한 목격하지 못했다
p191 헨델은 바흐처럼 독일 교회음악가가 될 기회가 이미 두 번이나 있었고, 두 번이나 외면했으며, 이는 -마테존의 충고도 분명 한몫했다- 오페라라는 마법의 세계에 강렬한 유혹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p196 짧은 호흡의 스트럭처, 일관성이 결여된 음조 배열, 음악적 논거를 유지하지 못한 점, 그리고 오페라에서 걸핏하면 보이는 임시 처방과 타협들은 진지한 목적을 가진 음악가 바흐로 하여금 환멸을 느기게 했던 것 같다
p231 바흐의 작품에서는 오페라에 등장하는 허구적 드라마 인물이 아니라 다양한 위기를 관통하는 다양한 인간의 대리인들에게 안배된 아리아들을 만난다
p245 그는 민요가 품고 있는 노골적인 속악과 음란함을 신앙 예배에 전용했는데 이는 '화성의 모든 목표는 신의 영광'이라는 그의 주장을 위해서였다
p258 직장생활 내내 계속된 반대와 비판에도 꺾이지 않던 바흐의 완고한 투지, 그리고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 칸토르에 임명된 뒤 첫4년동안 1년 주기의 칸타타 사이크과 수난곡을 완성시키면서 보여준 그의 집요함을 앞으로 다시 짚어볼 것이다
p271 바흐가 생애 내내 가족들 사이에서 죽음을 자주 마주하고 고통스러워했다는 것만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의 부모가 둘 다 50세를 넘기지 못했고, 20명의 바흐의 자식 중 12명이 세 살이 되기 전에 사망했다
p285 그의 개인적인 독실함, 그가 평생 루터에게 바친 숭배, 그리고 개인적,직업적 재능 양쪽 모두의 의미에서 루터의 저서에 중요성을 부여했다는 것을 넘어서, 여기서 드러나는 바는 '바흐가 분명히 적어도 2백 살은 된 사고방식에 깊이 -그리고 분명 무비판적으로-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p291 이 모든 일은 지난 7년간 갈수록 험악해지다 폭발 직전까지 이른 바흐와 의회 사이에 벌어진 분쟁의 일부였다. 이는 '천재이면서 동시에 순종적인 직원'이 되리라는 기대를 안고 예술가를 관공서에 불러들일 대 벌어지는 고전적인 갈등이기도 하다
p303 대공의 궁정에서 일했던 15년의 시간과는 달리 바흐는 자신이 함께 일하던 조직과 높은 수준의 교회음악을 전달할 자신의 능력 사이의 절충점을 찾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을 처리하는 데 미숙했다는 점이다
p305 그가 소란 및 폭력 행위에 연루되어 아이제나흐 교회 목사들의 골치를 석이고, 사람들 사이에 추문을 일으킨 증거는 무수히 많다
p317 왜 4주가 아닌 4개월 동안 종적을 감췄냐는 완벽하게 합리적인 의문에 대해, 바흐는 '(나의) 예술에 대해 이것저것 이해하기 위해서'였다는 압도적인 태도로 응수했다
p317 뤼백에서 인생 최고로 고무적인 만남을 경험한 뒤 돌아와 여전히 들떠 있는 바흐에게, 살면서 화성 수업이라곤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훌륭한 의원들이 작곡과 오르간 즉흥 연주를 이렇게 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p322 북스테후데처럼 풍부한 경험을 가진 거장이 자신의 지위에서 음악을 어떻게 성취했는지 직접 목격한 스물 두 살의 바흐는 필하우젠에서 비슷한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똑같은 자율성을 보장받고자 했다
p331 이처럼 권위에 눌릴 때면, 그는 자신의 잠재력에 기대어 음악으로 가벼운 복수를 했다. 그 방식은 교묘해서 늘 본래 의도를 감췄기 대문에 우리는 물론 심지어 복수의 대상조차 고의성을 증명하지 못했다
p348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1723년 라이프치히에서 마주한 순간, 그는 이를 성취하기 위해 자신의 지위, 임금, 가족, 그리고 안락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후 3년동안 그는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그 꿈을 실현시키는 데 쏟아부었다. 이 분야에서 그의 창의성-이때 작곡 중이던 세 편의 칸타타 사이클과 두 편의 수난곡-은 거의 넘치는 수준에 이르렸고 구상과 실제, 가치 그 어던 면에서나 당대 다른 작곡가들을 능가했다
p359 음악가로서, 그리고 신에게 선택받은 신하로서 자신의 권위가 도전받는다고 느낄 때마다 그는 성마르고 과민해졌다
p372 그의 화성에 관한 지식은 대단히 심오해서 수학적이기가지 하다. 그의 모든 음표와 조성 하나하나가 서로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화음 하나하나 , 지시 변화 하나하나가 무엇을 만들지 알고 있었다. 에마누엘이 말했듯 '그는 그것들을 완벽하게 계산해서 크고 아름다운 전체에 맞물려 다양성과 위대한 단순성을 결합시켰다'
p389 바흐는 그가 선택한 아홉 명의 희생양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 중 바흐만이 유일하게 샤이베의 가시 돋친 비평에 공개적으로 대응했으며, 이 순간부터 샤이베의 표적이 되었다
p395 바흐가 악보에 포함시킨 엄청난 분량의 디테일한 장식음은 그의 실제 연주 경험과 관련된 것으로, 그가 즉흥적으로 작곡하고, 다듬고, 그리고 최초의 단순한 첫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데 사용했던 다양한 전략들이 가장 훌륭한 방식으로 압축되어 있다
p437 그 어떤 장르에서든 그는 관습적으로 정해진 정서에 얽매이는 것을 거부했으며, 이와 관련해서는 그의 첫째와 둘째 아들도 명성이 자자했다
p452 그의 발은 마치 날개가 달린 듯 움직이며... 페달을 넘나들었고 그러한 움직임으로 오르간 사운드는 충만하게 채워졌으며 그곳에 참석한 이들의 귀를 천둥 번개처럼 관통했다. 그 천둥 번개는 원석을 다듬어 반지를 만들더니, 소리가 사라지자마자 바흐에게 안겨줬다
p457 니콜라이 교회와 토마스 교회의 내부 디자인은 사회적 계층에 따라 좌석을 분리함으로써 루터교도들의 통합에 정면으로 위배되어 있었다. 다만 공동 예배라는 목적 하나를 위해 이들은 이렇게 분열된 채로 한 자리에 모여 있을 뿐이었다
p470 괴테와 여타 지식인들이 훌륭한 음악 매너와 침묵하는 자기 성철의 습관(피터 게이가 19세기 절묘한 아름다움을 위한 이상적인 자기 통제, 혹은 지연된 심리적 보상이라 불렀던 것)이 무엇인지 가르치기 전, 글루크, 모차르트, 로시니, 슈포어 등 여러 작곡가들은 연주 도중 청중이 배회하는 것은물로이거니와 강물처럼 흐르는 수다와 카드게임, 소르베를 홀짝거리는 소리를 인내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p523 이 크리스마스 음악들은 정신없는 빠르기로 연주되는 작품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p564 라이프치히에서 바흐가 처음 품었던 포부는 학자들의 일반적인 가정보다 훨씬 웅장했다는 것이다
p570 이 칸타타에서 만날 수 있는 바흐의 가장 매력적인 습관 중 하나는 악기의 개성을 한껏 살린다는 점이다. 표정 있는 결말을 위해 그는 각 악기를 독립적으로 사용하거나 다양한 조합을 시도한다
p576 바흐의 음악은 가사만큼이나 타협을 거부한다. 이중 푸가의 두 주제는 서로 교차하고, 한 대의 코르넷과 세 대의 트롬본으로 구성된 고풍스러운 금관 악기들이 친밀하게 합류하면서 성악파트는 2중으로 확대된다
p586 1829년 멘델스존이 요란스럽게 복원한 이래, 마태수난곡은 사실상 바흐의 천재성을 증명하는 최고의 작품으로 인정받으며 경외감에 가까운 보편적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보다 짧은 요한수난곡은 1883년 마찬가지로 멘델스존에 의해 복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듯했다
p637 마지막 합창-유사 코랄 주의 고난이 있었기에-은 프리드리히 슈멘트가 이 노래를 재판 장면의 핵심으로 인정한 이래 학자들의 가장 큰 관심을 모아왔다
p648 성악가들의 선율은 예수의 마지막 말씀(끝났도다)에 부응한 뒤, 관례대로 연주를 완전히 멈췄다가 감바 선율이 죽어가는 종지부 위에서 다시 한번 반복된다. 그러고 난 뒤 다시 회귀하는 화려하면서도 구슬픈 감바 선율은 이 음악을 절대로 공허한 승리주의로 놔두지 않겠다는 분명한 신호다
p658 바흐의 요한수난곡이 초연 직후 정확히 1년 만에 과감하게 수정된 것을 보면 이 첫 번째 버전에 대한 목사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수정을 통해 장엄한 오프닝 코러스와 문제적인 마지막 코랄이 삭제되었다
p664 나는 바흐의 수난곡을 떠받치고 있는 다층적 구조를 청중이, 만약 직접 보거나 들을 수 없다면, 적어도 느낄 수는 있다고 말하고 싶다
p673 1724년과 1725년 공개된 두 가지 상이한 버전의 요한 수난곡은 양쪽 모두 빠른 드라마 전개를 보여줬으며, 이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이후 바흐는 복음 장면들 사이에 청중에게 묵상할 시간을 더 제공할 장치를 고려하게 되었다
p676 요한 수난곡에서 즐길 수 있었던 생생한 장면 묘사와 거침없는 극적 추진력이 감소되는 대신 이 마태 수난곡에서는 정교하게 의인화된 다양한 음성들-드라마 자체(바흐가 주로 대화를 통해서만 진행시키는)에 개입되어 있을 뿐 아니라 아리아도 부르는 우화적인 요소들-과, 생산적인 긴장 상태에서 연속적이면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이 모든 시간 변화를 유지하는 방식을 즐길 수 있다
p719 바흐는 일찍부터 (1부에서 최후의 만찬 중 성찬식 주도와 정원에서의 고뇌) 내레이션 위로 그의 존재를 끊임없이 떠올리고, 예수의 개입을- 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현악 사운드와 더불어 (십자가에서 마지막 통곡을 제외하고)-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p731 에마누엘 바흐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포르켈에게 말하길 '부지런히 일했고, 가사의 내용을 중시하며 단어를 이상한 자리에 잘못 배치하지 않도록 노력했고, 그렇다고 큰 그림을 훼손시켜가면서까지 단어 하나하나에 일일이 매달리지는 않았다. 그 결과물을 가지고 자칭 전문가라고 주장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감탄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종종 벌어지곤 했지만 말이다
p738 바흐는 경계를 허무는 사람이었다. 용인되던 취향의 범위, 더 많은 형식적, 표현적 어휘를 수용할 수 있는 음악의 범위, 인간의 감정을 전달하고 신에게 기도하고 이웃을 교화시킬 수 있는 음악의 범위를 더 확장시키고자 했고, 이전에 자신이 무엇을 성취했든 늘 그 이상을 원했다
p762 다음에 이어지는 곡은 우리는 미약하지만 열망의 걸음으로 나아갑니다다.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더라도 고결한 오프닝 코러스 다음에 이처럼 뜬금없이 화려하고 경박하기까지 한 이중창을 예상하기는 힘들 것이다.
p798 바흐 모테트가 보여주는 빛나는 자유, 자신의 창조주를 찬양하며 보여주는 우아한 기쁨, 그리고 죽음을 명상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그의 완벽한 확신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우리의 운명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응답니다.
p809 새로 취임한 시장 야콥 보른은 교직임무에 더욱 충실하라고 바흐에게 직접적으로 강요했고, 의회에는 그가 일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하면서 그로부터 보직을 박탈하고자 시도한바 있었다
p819 바흐의 미사곡은 이러한 경쟁자들을 훨씬 넘어서 있었으며, 객관적 기준으로 보더라도 독창성과 복잡함에 있어 완전히 차원이 달랐다
p844 18세기 문학 및 음악 관습상 표절은 널리 허용되긴 했지만, 헨델과 달리 바흐는 다이아몬드를 만들기 위해 다른 사람의 거친 조약돌을 가져다 쓸 필요가 없었다
p854 바흐가 이 중요한 순간과 어떤 사투를 벌였는지는 그의 자필 악보에 고통스러울 만큼 명료하게 드러난다. 이 페이지를 보면 중간 성부에 줄을 찍찍 긋고 새로 수정한 자국들로 지저분하게 어지럽혀져 있다
p881 바흐는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을 되돌아보며 1723-1733년-토마스 칸토르에 취임한 때부터 작센 선제후에게 미사곡을 헌정할 때까지-을 가장 도전적이고 생산적인 10년으로 보았을 것이다
p894 카를 필립 에마누엘 바흐가 포르켈에게 한 말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편지를 길게 쓸 시간은 없었지만 대신 그의 집은 비둘기장처럼 늘 사람들로 북적거려서 좋은 사람들과 직접 대화를 나눌 기회를 더 많이 가졌다. 그와 어울리는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했고, 유익할 때가 많았다
p901 그의 제자 요한 필립 키른베르거에 따르면, 바흐는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다
p911 바흐의 인간성을 순순히 인정하면 그가 우리와 얼마나 비슷한 사람인지 보이기 시작한다. 그의 천재성을 설명하지 않으려고만 든다면(신의 선물이라든가, 혹은 유전자나 양육의 결과라든가 하는 식으로) 더욱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p926 바흐는 7월 28일 오후 8시 15분이 조금 지난 직후 사망했다
p994 순례여행의 경유지로 통상적인 연주회장이 아닌 교회를 고집했습니다. 바흐의 칸타타는 연주회를 위해 작곡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