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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니아의 騎士 1
니헤이 츠토무 지음, 김동욱 옮김 / 애니북스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작품의 오프닝부터 매우 독특하다.
딱 봐도, 거대한 무언가의 지하로 보이는 묘한 공간속에서 '타니카제 나가테' 라는 어려운 이름의 주인공이 훌쩍 등장한다. 솔직히 나도 일본만화 꽤나 봤지만, 이렇게 어려운 이름은 처음이다. 일본 만화의 이름들은 번역 관례상 모두 한글로 번역되기 때문에 한자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타니카제' 라는 이름은 검색해보니 대충 谷風 이런 단어가 잡힌다.
(일본 만화의 주인공 이름들은 뜻문자인 한자를 통한 여러가지 장치들이 되어있는 경우가 많아서 이렇게 특이한 이름들이 나오면 검색해 보곤한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그런 장치가 되어있는 이름들은 작품을 통해, 혹은 작가의 입을 통해 의미가 나오기 마련이다. 한자를 읽는 방법이 몇가지가 있어서, 너무 복잡하면 자국 독자들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해서.ㅋㅋㅋ)
아무튼, 주인공 이름부터 강하게 잡아끈다.
90년대 중~후반을 지배했으며, 수많은 오타쿠들과 작가, 애니메이터 지망생들은 물론 일본 컨텐츠 업계 전체를 요동치게 만들고, 아직까지도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신세기 에반게리온] 은 그야말로 일본 SF만화의 틀 자체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에반게리온 이전까지 거대 로봇물이건 리얼 로봇물이건, 피아의 구분은 명확하기 그지없었다. 주인공의 숙명이나 운명도 매우 또렷했다. 하지만, 에반게리온은 그 제목에 당당하게 붙은 '신세기' 라는 단어를 증명하듯 매우, 매우 새로웠다. 피아의 구분도 애매하고, 주인공도 우울증에 걸린 소심하기 짝이없는 민폐덩어리였다. 그 주변 캐릭터들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수많은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컬트적으로 추앙받은 히로인 '아야나미 레이' 는 답답을 넘어 지나치게 무심하고 시크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게 상당한 매력이었고, 결국 '츤데레'(겉으로는 차갑고 무심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엄청 챙겨주는 성향) 캐릭터의 원형이 되었다.) 주인공이 속해있는 '네르프' 라는 기관은 소속 기관원들에게조차 냉혹하고, 심지어 무엇을 위해 누가 만들었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수수깨끼 같은 기관이었다. 심지어 후반에는 거의 적처럼 되어버린다.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사도' 라는 거대 괴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능이 있는지도 애매하고, 왜 자꾸 지구로 쳐들어오는지도 밝혀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엄청나게 불친절한' 작품인 것이다.
TV판의 엔딩은 아직까지도 수많은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으며, 그 팬들은 완결편을 앞둔 극장용의 새로운 에반게리온에 대한 우려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에반게리온을 통해 컬트적인 색채를 지닌 감독으로 각인된 안노 히데아키가 신 극장판을 통해 에반게리온의 깊고 깊은 수수깨끼를 풀어주려는 것이 아니라, 수수깨끼를 오히려 증폭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음모론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후자를 지지한다. 안노 히데아키는 작품을 통한 논쟁을 즐기고 팬들과 두뇌싸움을 즐기는 타입이다. 기분좋게 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감독이 절대 아니다. 어딘가 불편하고,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을 항상 남겨놓고 여지를 남겨놓는 타입이다.)
이러한 '불친절' 은 일본 애니메이션 팬들에겐 큰 충격이었다.
1970년대 중반, '우주전함 야마토' 라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작품에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작품의 전체적인 세계관과 설정들을 발견하며 보다 깊이있게 세계관 전체를 파고들어가는 이른바 '오타쿠 문화' 가 촉발된 이후 가장 거대한 팬덤이 생겨났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지나칠 정도로 불친절한 스토리 텔링은 오타쿠 한두명이 작품을 들이 판다고 해서, 작품 전체에 깔려있는 설정과 세계관을 해석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단어 하나와 메카닉의 이름 하나하나가 모두 그 거대한 세계관의 하나로써, 작품을 벗어나 전문 지식쪽으로 시야를 넓혀야 메타포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성경에 등장하는 용어로써 '예수님의 제자' 를 뜻하는 '사도' 라는 단어는 에반게리온의 세계관에 등장하는 가장 무시무시한 적의 이름으로 쓰였고, 창세기에 등장하는 태초의 여성 '이브' 에서 온 것이 확실한 'EVA', 그리고, 기독교 성경 중 '위경' 으로 분류되는 부분에서 아담의 첫번째 부인으로 등장하는 '릴리스' 라는 존재의 등장 등, 유대인의 신화를 모티프로 한 것이 분명한 여러 장치들은 어지간한 전문가들이 아니면 발견하기도 힘든 것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네르프NERV' 와 '제레SEELE' 등 생소한 독일어 단어들이 활용된 소속 기관명 등 역시 전문지식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 시기는 지금처럼 인터넷 인프라가 넓게 퍼지기 전이었으니, 지혜를 모으기 위해서는 일단 팬들은 모여야만 했다.
오타쿠들은 괴로워했고, 즐거워했다. 안노 히데아키를 욕하면서 찬양했고, 에반게리온을 짜증내면서 구입했다.
캐릭터 디자인의 아름다움과 메카닉 디자인의 유려함에 열광하는건 한참 낮은 수준의, '오타쿠' 라고 불릴 수도 없는 '팬' 수준이었다.(물론 메카닉의 기계적인 논리를 파헤치는 '메카닉 오타쿠' 들도 성행했다. 실제로 이 메카닉 오타쿠들은 나이도 많고 학력도 뛰어난 전기, 로봇 공학자들이 상당히 많고, 아톰이나 건담등의 애니메이션 팬들이 일본 로봇산업의 근간을 다졌다는 이론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금 오타쿠들의 이미지는 그 시기의 오타쿠들이 제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잡지인 '뉴타입' 은 연일 지면을 통해 전문 지식들을 내보냈다. 애니메이션 전문 기자들은 각종 기사를 통해 '릴리스' 가 유대인들의 신화상 인물이라는 사실이나, 1940년대 후반에 발견되었다는 '숨겨진 사해문서' 등에 대한 기사를 쏟아냈다. 마침 그 즈음 한국판 '뉴타입'이 런칭되면서 한국 또한 에반게리온 신드롬에 휩싸였다. 일본문화가 완전 개방되기 전이었음에도 비디오 대여점에 [신세기 에반게리온] 이 떡하니 진열되어 있었고, 특히 똑똑한 친구들이 이 만화에 열광했다. (참고로 이 작품를 내게 전파해준 절친은 고교 3년내내 전교 1등을 도맡았고, 서울대 3~4학년 과 수석, 못해도 차석질을 했으며 지금은 모 대기업에서 근무중이시다....근데 나는??!! @.@)
[신세기 에반게리온] 은 일본의 컨텐츠 흐름 전체에 새로운 세기를 마련했으니,
그것은 '불친절' 이다. (그리고 츤데레)
SF장르는 기본적으로 독자들에게 친절한 장르이다. 세계관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들이 많다. 이 행성과 이 행성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으며, 이 외계인과 저 외계인의 생체적 특성은 어떻고, 그들의 과학기술 수준은 어떠하며, 이런 과학기술은 어떻게 발달되었는지 등등에 대한 설명이 또렷하게 제공되는 편이다.
하물며 SF애니메이션이라면야.
하지만, [신세기 에반게리온] 은 그야말로 '졸라게' 불친절했다.
이제야 다시 등장할 [시도니아의 기사] 의 '니헤이 츠토무' 는 사실 그러한 불친절함의 대가인 작가이다.
[블레임] 같은 작품은 대부분의 독자들은 아예 세계관을 파헤칠 의욕마저 들지 못하게 한 작품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여기는 어디, 너는 누구??'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거의 작품 끝까지 나오지 않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것이 작가와 작품의 개성이라고 할 지라도, 지나치게 독창적인 세계관은 오히려 외면받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였을까?
[시도니아의 기사] 는 의외로 꽤나 친절하게 시작한다.
어느정도는 에반게리온이 만들어준 '신세기' 를 따랐고, 어느정도는 [마크로스] 의 느낌이 난다. 메카닉 디자인은 독창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춘 [파이브 스타즈 스토리]의 '나가노 마모루' 느낌도 물씬 난다.(하지만 이 작품 또한 그 스토리는 상당히 불친절하고 복잡하기 짝이 없다.) 어...이럼 그냥 평범한 SF되는거 아냐? 싶어 찬찬히 읽어 나가보니, 작가가 독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포기한 부분들이 많이 보인다. 세계관은 단순하게 벼렸고, 그림체도 많이 달라졌다. 전작에서 보여졌던 톤으로 뭉개지고 러프했던 선, 복잡하고 현란한 묘사들을 다 버렸다. 캐릭터의 개성도 또렷하게 등장하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히스토리들도 친절하게 보여준다. 심지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개그코드까지 등장한다. 사실 [시도니아의 기사] 에 등장하는 유머는 포복절도하게 웃기지는 않지만, 전작들에 비하면 확실히 '많다' 고 느껴질 정도이다. 아니, 많은 만화 팬들은 '니헤이 츠토무에게 이런 개그센스가 있었어????' 싶을 정도이다. 게다가 무려 주인공의 입을 통해 기본적인 세계관을 설명까지 해준다. 이전까지의 작품들은 본인의 세계관의 독창성을 자랑하기 위해 급급했다면, 이번 작품에서 확실히 '읽어주세요' 라는 간절함이 느껴진다. 독자들과 함께 호흡하고 싶다는 작가의 바램이 읽힌다.
사실, 전작들에 비해 [시도니아의 기사]의 세계관은 굉장히 평범하고, 어디선가 많이 접해본 느낌이다.
거대 인간형의 외계의 생명체 '가우나' 에게 파괴당한 지구.
생존한 인간들은 일종의 '노아의 방주' 쯤 되는 '시도니아'를 타고 우주공간으로 도망친다.
계속해서 시도니아를 추격하는 가우나와 그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형 병기 '모리토' .
1980년대에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마크로스]의 판박이이다.
거대 인간형의 외계 생명체 '젠트라디' 에게 파괴당한 지구.
우주로 쏘아진 거대 도시형 우주선인 '마크로스' 에 타고 있던 사람들만이 기적적으로 생존하고, 계속해서 마크로스와 생존 인류를 추격하는 젠트라디와 그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형 병기 '발키리'.
일종의 '노아의 방주' 플롯이다.
니헤이 츠토무가 가장 크게 양보한 부분이 이 세계관에 대한 부분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결국 니헤이 츠토무가 [시도니아의 기사]로 승부를 보려는 부분은 세계관의 독창성이나 아이디어가 아니라, 그 세계안에 녹아있는 사람들의 드라마와 수수께끼, 그리고 디테일한 설정들이다.
니헤이 츠토무는 세계관의 독창성을 버리고, 대신 그 안에서 자신의 독창성을 맘껏 발휘하기 시작한다. 예를들어 마지막 인류가 우주 공간에서 최대한 오랜 세대를 버티기 위해 광합성으로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고 자가 생식이 가능한 방식으로 신체를 개조하고, 클론을 배양하고, 수명이 다한 인간은 비료로 재활용하는 등의 아이디어는 무척이나 재미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가우나의 관계, 시도니아라는 거대 도시 우주선의 비밀, 모리토라는 병기의 비밀과 가우나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카비자시. 카비자시는 어떻게 가우나에게 타격을 줄 수 있으며, 왜 28자루 밖에 없는가? 그리고 가우나가 갖고 있는 절대 방어막인 '에나'. 그것은 또 무엇인가? 등 수수깨끼들을 직접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을 작품 안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물론, 주인공 '타니가제 나가테'를 중심으로 촘촘하게 뻗기 시작하는 타인들과의 관계, 그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드라마들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조금은 '덜 떨어진' 타니가제 나가테는 1,2권만에 모두에게 인정받는 영웅에서 '전범자식' 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추락하고, 사랑의 시작과 동시에 실연을 경험하는 등 다이내믹한 감정의 쌍곡선을 경험하고 있다.
무한한 어둠의 우주를 떠다니는 우주선에 고립된 채 압도적인 적들에게 끊임없이 공격당하는 인류.
그 고립된 사회 안에서, '자연의 선택'이 아닌 '인위의 선택'으로 인간은 과연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
장르만화는 그 한계가 명확하다.
최근 또다른 젊은 천재작가인 이사야마 하지메는 이러한 아이디어의 지상버전인 [진격의 거인] 이라는 작품을 연재중이기도 하다. 이 작품 역시 [신세기 에반게리온] [마크로스]는 물론 [시도니아의 기사] 와 날 것 그대로 비교당하며 물어뜯기고, 찬사를 받는다.
UFC 파이터들이 8각의 '옥타곤' 이라는 틀 안에서 맨주먹으로 피를 철철 쏟으며 우열을 가리듯, 장르 만화가들은 비슷한 소재와 플롯 안에서 참신한 아이디어와 절절한 드라마, 송곳같은 유머센스로 독자들을 공략해 나간다.
[시도니아의 기사] 는 1,2권만을 통해 그 안에서 자신이 어떤 무기를 선택했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과연 그 위에서 [시도니아의 기사] 는 어떤 드라마를 보여줄지, 벌써부터 기대가된다.